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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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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情詞嗚咽이라
予友之弟曰君山이니 爲開封府主簿
予與君謨 皆爲館閣校勘하야 居京師러니 君山數往來其兄家 見其以縣事決於其府
府尹素剛하야 好以嚴憚下吏어늘 君山年少位卑하되 能不懾屈而得盡其事之詳하니
吳公獨喜以君山爲能이라 予始知君山敏於爲吏而未知其他也러라
君謨南歸하야 拜其親하고 京師大疫할새 君山以疾卒于縣하다 其妻程氏 一男二女皆幼
縣之人哀其貧하야 以錢二百爲其賻한대 程氏泣曰 吾家素以廉爲吏하니 不可以此汚吾夫라하고 拒而不受하니
於是 又知君山能以惠愛其縣人而以廉化其妻妾也
君山間嘗語予曰 天子以策天下士어늘 而學者以記問應對爲事하니 非古取士之意也 吾獨不然이라하야 乃晝夜自苦爲學이러니
及其亡也하야 君謨發其遺藁하야 得十數萬言하니 皆當世之務 其後踰年 天子與大臣講天下利害하야 爲條目하니
其所改更 於君山之藁 十得其五六이라 於是 又知君山果天下之奇才也
君山景祐中 擧進士하야 初爲러니 縣媼子漁於海而亡이라 媼指某氏爲仇하야 告縣捕賊하니 縣吏難之
皆曰 海有風波하니 豈知其不水死乎 且雖果爲仇所殺이라도 若屍不得이면 則於法不可理라하되
君山獨曰 媼色有寃하니 吾不可不爲理라하야 乃陰察仇家하야 得其迹하고 與媼約曰 吾與汝 宿海上하야 期十日不得屍 則爲媼受捕賊之責이라하다
凡宿七日 海水潮 二屍浮而至어늘 驗之하니 皆殺也 乃捕仇家伏法하다
民有夫婦偕出而盜殺其守舍子者
君山亟召里民하야 畢會 環坐而熟視之라가 指一人曰 此殺人者也라하니 訊之 果伏이라
衆莫知其以何術得也러라 長谿人至今喜道君山事多如此하고 曰前史所載能吏號如神明 不過此也라하다
自天子與大臣 條天下事而屢下擧吏之法으로 尤欲官無小大 必得其材 方求天下能吏어늘 而君山死矣 此可爲痛惜者也
君山 諱高이니 享年二十有八 以某年某月某日卒하다
今年君謨又歸迎其親하야 自太康으로 取其柩以歸하야 將以某年某月某日 葬於某所
且謂予曰 吾兄弟始去其親而來京師하야 欲以仕宦爲親榮이러니
今幸還家로되 吾弟獨以柩歸하니 甚矣 老者之愛其子也 何以塞吾親之悲 子能爲我銘君山乎
乃爲之銘曰 嗚呼 吾聞仁義之行于天下也 可使父不哭子하며 老不哭幼
嗟夫 君山不得其壽 父母七十 扶行送柩로다
子墓予銘하니 其傳不朽 庶幾以此 慰其父母


07. 蔡君山墓誌銘
情意文詞가 구슬프다.
나의 벗 蔡君謨(蔡襄)의 아우는 君山이니 開封府 太康主簿로 있었다.
당시에 나는 君謨와 함께 모두 館閣校勘이 되어 京師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君山이 자주 형의 집을 오가곤 하였으므로 의 일을 開封府에서 결정한 것을 보여주었다.
府尹吳遵路는 평소 강직하여 下吏를 엄하게 다스리기를 좋아하였는데, 君山은 나이가 어리고 지위가 낮으면서도 두려워하거나 굽히지 않고서 일의 자세한 것까지 모두 따지니,
吳公이 홀로 기뻐하며 君山을 유능하다고 여겼다. 내가 君山이 관리로 해야 할 일에 민첩하다는 것을 비로소 알게 되었고 다른 것에 대해서는 몰랐었다.
이듬해에 君謨가 남쪽으로 돌아가 覲親하고 그해 여름에 京師에 큰 역병이 발생하였을 때에 君山이 병으로 에서 하였다. 君山의 아내는 程氏이고 한 명의 아들과 두 딸은 모두 어렸다.
의 사람들이 가난함을 가련하게 여겨 200賻儀로 주자, 程氏가 울면서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평소 청렴함으로 관리생활을 하였으니 이로써 지아비를 더럽힐 수 없다.”라고 하고 거절하며 받지 않으니,
여기에서 또 君山의 사람을 은혜로 사랑하였고 청렴함으로 妻妾을 감화시켰음을 알았다.
君山이 근자에 일찍이 나에게 말하기를 “천자께서 六科로 천하의 선비를 取材하는데, 학자들은 記問應對만을 일삼으니 옛날에 선비를 취하던 뜻이 아닙니다. 저만은 그렇게 하지 않겠습니다.”라고 하면서 이에 밤낮으로 스스로 학문에 매진하였다.
君山이 죽자 君謨가 그의 遺藁를 찾아내 수십만 자의 글을 얻으니 모두 당세의 일에 관한 것이었다. 그 뒤 몇 년이 지남에 천자가 대신들과 함께 천하의 利害를 강론하여 조목을 만들었으니,
제도를 수정한 부분은 君山遺藁에서 열 개 중 대여섯 개를 얻었다. 이에 또 君山이 과연 천하의 奇才임을 알았다.
君山景祐 연간에 進士試에 급제하여 처음에 長谿縣尉가 되었는데, 의 노파의 두 아들이 바다에서 고기를 잡다 실종되었다. 노파는 某氏를 지적하여 원수라 하고는 현에 살인범을 잡아달라고 요청하니, 현의 관리가 난처하였다.
모두 말하기를 “바다에는 바람과 파도가 있으니, 어찌 물에 빠져 죽지 않았다는 것을 알겠는가. 또한 과연 원수에게 살해됐다 하더라도 시신을 찾지 못한다면 법으로 다스릴 수 없다.”라고 하였다.
君山만은 홀로 “노파의 기색에 원한이 가득하니 내 처리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하고는, 이어 원수의 집을 은밀히 살펴 증거를 찾아내고 노파와 약속하여 말하기를 “내 그대와 바닷가에서 유숙하면서 10일을 기한으로 하여 시신을 찾지 못하면 그대를 위해 살인범을 체포할 책임을 지겠다.”라고 하였다.
7일을 유숙하였을 때에 밀물이 들자 두 시신이 떠올라 해변에 이르거늘 살펴보니 모두 살해된 것이었다. 이에 원수의 집안 사람을 체포하여 법에 따라 처결하였다.
백성 중에 夫婦가 함께 외출하였을 때에 집을 지키던 아들을 도적이 살해하는 사건이 발생하였다.
君山이 급히 마을의 주민들을 불러 모두 모이자 둘러앉게 하고는 자세히 들여다보다가 한 사람을 지목하여 말하기를 “이 사람이 살인자다.”라고 하니 신문함에 과연 自服하였다.
주민들은 어떤 방법으로 범인을 찾아냈는지 알 수 없었다. 長谿의 사람들이 지금까지 즐겨 君山의 일을 말하는 것이 대부분 이와 같은데, “神明하다고 칭송되는 이전 史書에 수록된 能吏들도 이분보다 낫지 않다.”라고 말을 한다.
天子大臣과 함께 천하의 일을 다스려 관리를 등용하는 법을 누차 내린 뒤로, 더욱 크고 작은 관직에 상관 없이 반드시 인재를 얻고자 하였으므로 바야흐로 천하의 能吏를 구하고 있는데, 君山이 죽었으니 이는 통석할 일이다.
君山이니 향년 28세에 某年 某月 某日에 졸하였다.
금년에 君謨가 또 돌아와 親迎하고는 太康에서 君山의 관을 가지고 돌아와 某年 某月 某日 某所에 장사 지내려 하였다.
또 나에게 말하기를 “우리 형제가 처음 어버이 곁을 떠나 京師에 와서 벼슬에 올라 어버이를 영광스럽게 해드리려고 하였는데,
지금 다행히 집으로 돌아왔건만 아우는 홀로 관에 실려 돌아왔으니 심합니다. 늙은 부모가 자식을 사랑함이여, 무엇으로 어버이의 슬픔을 메울 수 있겠습니까? 그대가 나를 위해 君山銘文을 지어주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에 명을 다음과 같이 짓는다. 아, 내 들으니 仁義가 천하에 행해짐에 아버지로 하여금 아들을 곡하게 해서는 안 되고 노인으로 하여금 어린 사람을 곡하게 해서는 안 된다
안타깝다, 君山이여, 를 누리지 못하였구나 부모 70세에 지팡이를 짚고 아들의 관을 보내는구나 韓退之가 말하기를 죽어서도 〈不朽하니〉 누가 요절했다 하리오
그대의 묘에 내가 銘文을 지으니 오랫동안 전해지리라 이 銘文을 가지고 부모를 위로할 수 있기를 바란다


역주
역주1 蔡君山墓誌銘 : 이 글은 저작년도가 확실하지 않다. 蔡君山은 蔡高(1014~1041)이다.
역주2 蔡君謨 : 蔡襄(1012~1067)이다. 宋나라 興化軍 仙遊 사람으로 字는 君謨, 諡號는 忠惠이다. 開封知府, 翰林學士, 三司使, 杭州知州 등을 역임하였다. 문학적 재능도 뛰어났고, 서예에도 능해 蘇軾, 黃庭堅, 米芾과 함께 송나라의 4대가로 꼽혔다. 저서에 ≪蔡忠惠公集≫ 등이 있다. 본서 권25 〈端明殿學士蔡公墓誌銘〉 참조.
역주3 太康 : 현재 河南 太康이다.
역주4 吳遵路 : 宋 仁宗 때 사람으로 자는 安道이다. 벼슬은 常州知州, 淮南轉運副使, 龍圖閣直學士 등을 지냈다. ≪宋史 권426 循史列傳 吳遵路≫
역주5 明年 : 慶曆 元年(1041)을 가리킨다.
역주6 : 貨幣의 단위이다.
역주7 六科 : 宋나라 때에 科擧로 선비를 선발하던 여섯 가지 과목을 말하는데, 賢良方正能直言極諫, 博達墳典明於敎化, 才識兼茂明於體用, 詳明政理可使從政, 識洞韜略運籌決勝, 軍謀宏遠材任邊寄의 여섯 가지 과목이었다.
역주8 長谿縣 : 福建路 福州에 속해 있었는데, 현재는 福建 霞浦이다.
역주9 (一)[二] : 저본에는 ‘一’로 되어 있으나, ≪文忠集≫ 권28 〈蔡君山墓誌銘〉에 의거하여 ‘二’로 바로잡았다.
역주10 退之有言 死孰謂夭 : 韓愈의 〈李元賓墓銘〉에서 “살아서 선하지 못했다면 누가 장수했다 하리오. 죽어서도 不朽하니 누가 요절했다 하리오.[生而不淑 孰謂其壽 死而不朽 孰謂之夭]”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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