吾友張子野旣亡之二年에 其弟充이 以書來請曰 吾兄之喪에 將以今年三月某日로 葬于開封하니 不可以不銘이라 銘之莫如子宜라하니
嗚呼라 予雖不能銘이나 然樂道天下之善以傳焉이온 況若吾子野者는 非獨其善可銘이라
又有平生之舊朋友之恩與其可哀者는 皆宜見於予文하니 宜其來請於予也라
初天聖九年에 予爲西京留守推官하니 是時에 陳郡謝希深南陽張堯夫與吾子野가 尙皆無恙이라
而堯夫子野는 退然其間하야 不動聲氣하니 衆皆指爲長者러라
予時尙少라 心壯志得하야 以爲洛陽은 東西之衝이니 賢豪所聚者多가 爲適然耳러니
하고 幷江漢
에 其行萬三四千里
라 山砠水厓
에 窮居獨遊
하야 思從曩人
호되 邈不可得
이라
然雖洛人이라도 至今皆以謂無如嚮時之盛하니 然後에 知世之賢豪不常聚니 而交遊之難得이 爲可惜也로라
初在洛時
에 已哭堯夫而銘之
하고 하고 今又哭吾子野而銘
하니
於是에 又知非徒相得之難이요 而善人君子를 欲使幸而久在於世라도 亦不可得하니 嗚呼라 可哀也已로다
子野之世
는 曰贈太子太師諱某
는 曾祖也
요 樞密副使 累贈尙書令 諱遜
은 皇祖也
요 尙書比部郞中 諱敏中
은 皇考也
라
曾祖妣李氏
는 隴西郡夫人
이요 祖妣宋氏
는 昭化郡夫人
이니 之妹也
요 妣李氏
는 永安縣太君
이라
子野家聯后姻하야 世久貴仕나 而被服操履는 甚於寒儒하고 好學自力하야 善筆札이라
寶元二年二月丁未
에 以疾卒于官
하니 享年四十有八
이라 子
는 伸
은 요 次
는 從
이요 次幼未名
이라
子野爲人
이 外雖愉怡
나 中自刻苦
라 遇人渾渾
하야 不見
이나 而志守端直
하고 臨事果決
이라
平居酒半이면 脫冠垂頭에 童然禿且白矣라 予固已悲其早衰而遂止於此하니 豈其中亦有不自得者邪아
子野諱先
이니 其上世
人
이라 自曾祖已來
로 家京師
하야 而葬開封
하니 今爲開封人也
라
銘曰 嗟夫子野여 質厚材良이라 孰屯其亨이며 孰短其長가
豈其中有不自得하야 而外物有以戕가 開封之原과 新里之鄕에 三世于此하니 其歸其藏이라
交游의 情을 모두 서술하면서도 自任하고 善을 즐기는 뜻이 말 밖에 宛然히 드러난다.
내 벗 張子野가 세상을 떠난 지 2년에 그의 아우 充이 편지를 보내와서 청하기를, “우리 형님의 喪을 당하여 올해 3월 모일에 開封에 장사 지내려고 하는데 銘을 짓지 않아서는 안 되는지라 銘을 짓는다면 그대처럼 마땅한 이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아, 내가 비록 銘을 잘 짓지는 못하지만 천하의 善을 말하여 전하기를 좋아한다. 하물며 우리 子野 같은 이는 그 善이 銘을 지을 만할 뿐만 아니라,
또 평소의 교유나 벗으로서의 恩義 그리고 애도할 만한 점은 다 내 글에 드러내야 할 것이니, 그가 나에게 글을 보내와서 청하는 것이 당연하다.
처음 天聖 9년(1031)에 내가 西京留守推官이 되었는데 이때 陳郡 謝希深(謝絳), 南陽 張堯夫(張汝士)와 우리 子野가 여전히 모두 아무런 병이 없었다.
이때 이 지방의 선비들이 모두 걸출한 賢士 豪傑인지라 날마다 서로 왕래하면서 술을 마시고 즐거이 큰소리치고 이리저리 각축하면서 서로 선후를 다투며 어울려 웃고 즐거워했는데,
堯夫와 子野는 그 가운데서 溫柔하게 뒤로 물러나 聲氣를 드러내지 않으니 사람들이 모두 長者로 지목하였다.
내가 당시에 아직 어려서 마음이 壯大하고 의기가 양양하여, 洛陽은 東西의 要衝이니 賢士 豪傑들이 많이 모여 있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겼는데,
이후에 낙양을 떠나 京師에 왔고 남쪽으로 夷陵과 江漢으로 쫓겨가게 되어 그 여정이 만삼사천 리나 되었다. 산속과 물가에서 곤궁하게 지내며 홀로 노닐면서 그 시절 사람들을 從遊하고자 생각하였으나 아득히 멀어 만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록 낙양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모두 예전 그 시절만큼 성대하지 않다고 여겼다. 그런 뒤에야 세상의 현사 호걸들이 늘 모여 있는 것이 아니니 좋은 벗들과 교유하기 어려움이 애석한 줄을 알았다.
처음 낙양에서 지내던 때 이미 堯夫를 哭하고 銘을 지었으며, 6년이 지난 뒤에 또 希深을 곡하고 銘을 지었으며, 지금 다시 우리 子野를 곡하고 銘을 지으니,
이에 서로 만나 어울리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善人 君子를 다행스럽게 오랫동안 세상에 살게 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음을 또 알았으니 아, 서글플 뿐이다.
子野의 世系는, 贈太子太師 諱 某는 曾祖이고, 宣徽北院使 樞密副使로 누차 증직되어 尙書令이 된 諱 遜은 조부이고, 尙書比部郞中 諱 敏中은 皇考이다.
曾祖妣 李氏는 隴西郡夫人이고, 祖妣 宋氏는 昭化郡夫人이니 孝章皇后의 자매이고, 妣 李氏는 永安縣太君이다.
子野는 가문이 황후의 인척으로 연결되어 대대로 오랫동안 高官을 지냈으나 衣服과 操行은 寒微한 儒者보다 더 못하였고 학문을 좋아하여 스스로 힘써 글씨를 잘 썼다.
天聖 2년(1024)에 進士에 급제하여 漢陽軍司理參軍, 開封府 咸平主簿, 河南法曹參軍을 역임하였다.
王文康公(王曙), 錢思公(錢惟演), 謝希深(謝絳)과 현 參知政事 宋公(宋庠)이 모두 그가 유능하다고 천거하여 著作佐郞 監鄭州酒稅로 옮기고
知閬州閬中縣이 되고 곧이어 祕書丞에 임명되었고 임기가 차자 知亳州鹿邑縣이 되었다.
寶元 2년(1039) 2월 정미일에 질병으로 관직에 있으면서 졸하니 享年 48세였다. 아들은, 伸은 郊社掌坐이고 둘째 아들은 從이고, 셋째 아들은 어려서 아직 명명하지 않았다.
딸 다섯 명 가운데 맏딸만 시집을 갔다. 부인 劉氏는 長安縣君이다.
子野는 사람됨이 밖으로는 비록 화락한 모습을 보였으나 안으로는 스스로 뼈를 깎는 노력을 하였다. 사람을 만날 때 원만하여 圭角을 드러내지 않았으나 지조를 지킴이 바르고 곧았으며 일에 임해서는 과감하게 결단하였다.
평소 거처할 때 술이 반쯤 거나해지면 冠을 벗고 머리를 드러냄에 훤하게 머리가 벗겨지고 하얗게 세었다. 내가 참으로 이미 그가 일찌감치 노쇠하여 끝내 여기에 그친 것을 서글퍼하였으니, 어쩌면 그가 내면에 자득하지 못한 것이 있어서 그렇게 된 것이리라.
子野는 諱가 先이니 그 上世에는 博州 高堂 사람이었다. 曾祖로부터 京師에서 世居하여 開封에 葬事를 지내니 지금은 開封 사람이 되었다.
銘은 다음과 같다. 서글프다, 子野여 자질 淳厚하고 재주 훌륭하였네 누가 그가 형통할 걸 막았으며 누가 그의 장수를 짧게 하였는가
어쩌면 그 내면에 자득하지 못함이 있어 외물이 그를 해쳤던 것인가 開封의 언덕과 新里의 시골에 張氏 삼대가 이어오니 이곳에 돌아오고 이곳에 묻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