師魯는 河南人이니 姓尹氏요 諱洙라 然天下之士 識與不識이 皆稱之曰師魯라하니
爲政有惠愛
하니 潞州人
이 至今思之
라 累遷官
하야 至起居舍人
하다
師魯當天下無事時
하야 獨喜論兵
하야 爲
이 行于世
라
自西兵起로 凡五六歲에 未嘗不在其間이라 故其論議益精密하고 而於西事에 尤習其詳이라
師魯亦去而得罪矣러라 然則天下之稱師魯者 於其材能에 亦未必盡知之也라
其後吏至京師
하야 上書訟師魯以公使錢貸部將
이라 貶
節度副使
하다
疾革에 憑几而坐하야 顧稚子在前에 無甚憐之色하고 與賓客言에 終不及其私러라 享年四十有六以卒이라
師魯娶張氏
하니 某
이라 有兄源字子漸
하니 亦以文學知名
이러니 前一歲卒
하다
女一適人亦卒하고 而其身終以貶死라 一子三歲며 四女未嫁요 家無餘貲라
客其喪于南陽하야 不能歸라 平生故人이 無遠邇요 皆往賻之라 然後妻子得以其柩歸河南하야 以某年某月某日로 葬于先塋之次라
銘曰 藏之深하고 固之密하니 石可朽언정 銘不滅이라
歐陽公의 제일 뜻이 맞는 벗이면서 또한 歐陽公이 제일 마음을 써서 지은 글이다.
師魯는 河南 사람이니 姓은 尹氏이고 諱는 洙이다. 그렇지만 천하의 선비 가운데 그를 아는 이나 모르는 이 모두 師魯라고 일컬으니,
대체로 그 이름이 당세에 존중된 것인데 세상에서 師魯를 아는 자들은 그의 文學을 推尊하기도 하며 그의 議論을 높이 평가하기도 하며 그의 材能을 훌륭하다 여기기도 하였다.
그리고 그의 忠義의 절개가 窮達에 처하며 禍福에 임하여 옛날의 君子에게 부끄러움이 없었던 데 이르러서는 천하에서 師魯를 일컫는 자들이 그를 다 안 것은 아니었다.
師魯는 文章을 짓는 것이 簡潔하면서도 法度가 있었고 博學彊記하여 古今의 일을 환히 알았고 ≪春秋≫에 능통하였다.
그가 남들과 이야기할 때 是是非非의 道理를 모두 궁구하기를 힘쓰고서야 그만두었고 구차하게 議論을 그치고 함부로 동조하여 따르지 않으니 사람들 역시 그보다 뛰어난 이가 드물었다.
일을 만났을 때 어려워하는 일이 없어 과감하게 실천하는 데 용맹하였으니, 그가 세상에서 일컬어지게 된 것은 또한 사람들에게 嫉視를 받게 된 이유이기도 하였다. 그래서 결국 곤궁한 채로 죽었다.
師魯는 젊어서 進士試에 應擧하여 及第해서 絳州正平縣主簿, 河南府戶曹參軍, 邵武軍判官이 되었고,
書判拔萃科에 합격하고 승진하여 山南東道掌書記가 되고 知伊陽縣이 되었다.
王文康公(王曙)이 그가 재주 있다고 천거하여 조정에 불러 시험하여 館閣校勘으로 충원하였고 승진하여 太子中允이 되었다.
天章閣待制 范公이 饒州에 貶謫되었을 때 諫官과 御史들이 이에 대해 諫言하려고 하지 않았는데, 師魯가 글을 올려 “仲淹은 臣의 師友니 함께 폄적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여 監郢州酒稅로 폄적되었고,
다시 唐州로 옮겼다가 부친상을 당하고 喪期가 끝나자 다시 太子中允 知河南縣이 되었다.
趙元昊가 反亂을 일으키자 陝西에 군대를 출동하였다. 大將 葛懷敏이 上奏하여 師魯를 經略判官으로 기용하니 師魯가 비록 懷敏을 통해 천거되었으나 經略使 韓公에게 깊은 지우를 받고 있었다.
이후에 휘하의 將帥들이 好水에서 패배하므로 韓公이 知秦州로 강등되었는데 師魯 역시 濠州通判으로 옮기게 되었다.
오랜 뒤에 韓公이 上奏하여 秦州通判이 되었고 승진하여 知涇州가 되고 다시 知渭州 兼涇原路經略部署가 되었다가
水洛에 城을 수축할 때 邊將들과 의견이 달랐던 일로 죄를 받아 知晉州로 옮겼고 다시 知潞州가 되었다.
師魯는 政事를 행할 때 백성에게 은혜와 사랑을 베푸니 潞州 백성들이 지금까지도 師魯를 사모한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起居舍人 直龍圖閣에 이르렀다.
師魯가 天下에 戰亂이 없는 때를 만나 홀로 兵法 논하기를 좋아하여 〈敍燕〉, 〈息戍〉 두 편을 지은 것이 세상에 유행하였다.
서쪽 변방(西夏)에 군대를 출동하고부터 모두 5, 6년 동안 그곳에 있지 않은 적이 없었다. 그래서 그 논의가 더욱 精密하였고 서쪽 변방의 일에 대해 그 자세한 상황을 더욱 잘 알았다.
그가 兵制의 說을 지은 것과 戰守의 勝敗의 요점을 서술한 것이 모두 지금의 利害에 맞았다.
또 土兵을 훈련시켜 戍卒을 대신하게 하여 邊備에 쓰이는 지출을 줄여 夷狄을 막는 장구한 계책으로 삼고자 하였는데, 모두 미처 시행해보지 못한 채 元昊가 臣服하여 西方에 나가 있는 군대가 경계를 풀었다.
그래서 師魯 역시 떠나서 죄를 얻었다. 그렇다면 천하에서 師魯를 일컫는 자들이 그의 재능에 대해 또한 꼭 전부 아는 것은 아니다.
처음에 師魯가 渭州에 있을 때 將吏 가운데 그의 지휘를 어긴 자가 있었는데 軍法을 적용하여 참수하려고 하였으나 실행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그 뒤에 將吏가 京師에 가서 글을 올려 師魯가 公使錢을 가지고 部將에게 빌려주었다고 訴訟하므로 崇信軍節度副使로 폄적되었다.
監均州酒稅로 옮겨 병을 얻었는데 醫藥이 없는지라 들것에 실려 南陽에 이르러 의원을 찾았다.
질병이 위독해지자 안석에 기대 앉아 앞에 있는 어린 아들을 돌아보고도 그다지 가련해하는 안색이 없었고 손님들과 이야기할 때 끝내 자기의 私事를 언급하지 않았다. 享年 46세로 졸하였다.
師魯는 張氏를 아내로 맞으니 某縣君이다. 형 源은 字가 子漸이니 역시 文學으로 이름이 알려졌는데 師魯보다 한 해 전에 졸하였다.
師魯는 십 년 동안 세 번 貶謫되었으며 그 부친을 여의었고 또 그 형을 여의었으며, 아들 네 사람이 있었는데 그중 셋을 잇달아 잃었으며,
딸 한 명이 시집을 갔으나 또한 죽었고 자신은 끝내 폄적된 채로 죽었다. 아들 한 명은 세 살이고 네 딸은 아직 결혼하지 못하였고 집안에는 남은 재산이 없었다.
南陽에서 타향살이하며 喪을 당하여 고향에 돌아갈 수 없게 되자 평소의 벗들이 원근을 가리지 않고 모두 가서 賻儀하였다. 그런 뒤에야 처자식들이 그 靈柩를 가지고 河南으로 돌아와 모년 모월 모일에 先塋의 자리에 장사 지낼 수 있었다.
나는 師魯 형제와 교유하여 일찍이 그 부친의 墓銘을 지은 적이 있었으므로 다시 그 가문의 世系를 나열하지는 않는다.
銘은 다음과 같다. 땅속 깊이 감추고 堅固하게 묻었으니 돌은 썩을 수 있을지언정 銘은 사라지지 않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