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氏世家湖南하니 其父諱昭文은 官至國子博士하고 贈工部侍郞이라
夫人年二十二에 歸于王氏하야 用夫封隆平縣君하고 後以其子徙封長壽縣太君하다
夫人爲李氏女
에 事後母
에 以孝聞
이러니 及爲王氏婦
하야는 事其舅姑
라
其舅姑嘗稱夫人하야 以誡諸婦曰 事我者當如此라하고 又以誡其諸女曰 爲人婦者當如此라하다
其爲母也
에 有三男
女
하고 及其老也
하야 은 爲職方員外郞
이요 震
은 太子中舍
요 은 太常博士
라
三子者皆有才行이로되 而復尤好古有文하야 聞于當世라 女皆有歸하다
孫男六人은 曰夷仲 曰虞仲 曰于仲 曰南仲 曰武仲 曰延仲이라 女五人은 一亦歸人矣라 餘尙幼라
夫人享年八十有六이라 以慶曆七年十月十日로 終于京兆子復之官舍하고 用明年二月十七日로 合葬于河南洛陽大樊原王公之墓하다
夫人於王氏에 積行累功하야 其德備矣니 不可以徧書라 書其舅姑之所嘗稱者하야 以見其爲婦之道하고
書其子之賢而有立하야 以見其爲母之方하고 書其子孫之衆과 壽考之隆하야 以見其勤于其家하야 至于有成而終享其福之厚하노라
嗚呼라 於夫人에 無不足矣나 而其子若孫皆曰未也라 謂必有以示永久而不沒者라야 庶幾以慰無窮之哀라하야
家成于勤하고 德隆以壽라 歸安其藏하야 以昌厥後라
서사가 간략하면서도 응축되어 있고 생각하고 헤아림에 법도가 있다.
太中大夫 尙書屯田郞中 上柱國 王公 諱 利의 부인은 李氏이다.
李氏는 대대로 湖南에 거주하였는데 그 부친 諱 昭文은 관직이 國子博士에 이르렀고 工部侍郞에 追贈되었다.
부인은 나이 22세에 王氏에게 시집와서 남편으로 인해 隆平縣君에 봉해졌고, 뒤에 그 아들로 인해 長壽縣太君에 옮겨 봉해졌다.
부인이 李氏 가문의 딸로 있을 때 繼母를 섬김에 효성으로 알려졌는데 王氏의 아내가 되어서는 부모를 섬기던 도리로 시부모를 섬겼다.
그 시부모가 일찍이 부인을 칭찬하면서 며느리들을 경계하기를 “우리를 섬기는 자는 이렇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또 그 딸들을 경계하기를 “며느리 된 자는 이렇게 하여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부인은 어머니가 되어 3남 3녀를 두었고, 연로한 때에 이르러 鼎은 職方員外郞이 되었고, 震은 太子中舍가 되었으며, 復은 太常博士가 되었다.
세 아들이 모두 才行이 있었으되 復은 특히 옛것을 좋아하고 문장이 뛰어나 당대에 알려졌다. 딸들은 모두 시집을 갔다.
손자 여섯 사람은 夷仲, 虞仲, 于仲, 南仲, 武仲, 延仲이다. 손녀 다섯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은 역시 시집을 갔고 나머지는 아직 어리다.
부인은 享年 86세였다. 慶曆 7년(1047) 10월 10일에 京兆에 있던 아들 復의 官舍에서 삶을 마쳤고, 이듬해 2월 17일에 河南 洛陽 大樊原의 王公의 墓에 合葬하였다.
부인은 王氏 가문에서 행실과 공로를 쌓아 그 덕이 갖추어졌으니 이루 다 쓸 수가 없다. 그 시부모가 칭찬하였던 말들을 기록하여 그 며느리로서의 도리를 드러내고,
자식이 어질어 立身한 일을 기록하여 그 어머니로서의 규범을 드러내며, 그 번성한 자손과 오래 장수한 사실을 기록하여 그 가문에서 부지런히 힘써 결실을 이루어 마침내 그 후한 복을 누리기까지 되었음을 드러낸다.
아, 부인의 입장으로서는 부족함이 없겠으나 그 자손들은 모두 아직 미진하다고 하면서 반드시 영구히 드러내어 사라지지 않게 함이 있어야 끝이 없는 저희의 슬픔을 위로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하여,
마침내 나에게 찾아와 銘을 청해 받아서 장사 지내고자 하였다. 부인의 아들의 벗 廬陵 歐陽脩가 부인을 위해 다음과 같이 銘을 짓는다.
가문은 근면한 데서 이루어졌고 德은 隆盛하여 장수하였네 돌아가 그 묻힌 곳 편안히 여겨 그 후손들을 창성케 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