故尙書兵部員外郞 知制誥 知鄧州軍州事
之夫人
은 姓高氏
니 宣州宣城人也
라
父諱惠連은 官至兵部郞中하고 母曰廣陵縣君勾氏라 陽夏公은 諱絳이요 姓謝氏라
요 女
는 一早卒
하고 次適上虞縣令
하고 次適大理寺丞李處厚
하고 次若干人
은 未嫁
라
寶元二年에 陽夏公卒于鄧州라 以其年八月某日로 葬于某所하다 後若干年에 夫人隨其子某官于某州하야 以某年某月某日로 卒于官舍라
遂以某年某月某日로 合葬于公之墓하다 夫人初以夫封文安縣君하고 後以其子封渤海縣太君하다
謝氏世爲名族이요 而陽夏公尤顯聞于時라 初에 公與予俱官于洛陽할새 而公之父太子賓客諱濤는 尙無恙이라
其子景初景溫은 方爲童兒며 景平始生이요 二三女子皆幼라
予日至其家하야 進拜賓客할새 見其鬢髮垂白하며 衣冠肅潔하고 貌厚而氣淸하니 壽考君子也라
退而與陽夏公遊할새 見其年壯志盛하야 偉然方爲一時名臣이요 而諸兒女子戲嬉罇席之間者가 皆穎發而秀好라
於是時에 夫人以孝力事其舅하야 爲賢婦며 以柔順事其夫하야 爲賢妻며 以恭儉均一敎育其子하야 爲賢母라
後二三年에 賓客薨于京師하고 又五六年에 陽夏公卒于鄧하고 又十餘年에 景初景溫景平이 皆以進士及第라
景初爲某官이요 景溫某官이요 景平某官이라 夫人于其舅與夫에 爲婦之禮備하고 於其子에 立家之道成이라 享年若干以卒하다
嗚呼
라 하고 今又書夫人之事于碣
하니 殆見謝氏更一世矣
라 其爲之書也
에 宜得其詳
이라
내용 중에 韓公(韓愈)의 문체를 본뜬 곳이 많다.
故 尙書兵部員外郞 知制誥 知鄧州軍州事 陽夏公의 부인은 姓이 高氏니 宣州 宣城 사람이다.
부친 諱 惠連은 관직이 兵部郞中에 이르렀고 모친은 廣陵縣君 勾氏이다. 陽夏公은 諱가 絳이고 姓이 謝氏이다.
부인의 아들은 景初‧景溫‧景平‧景回이고, 딸은 맏이는 일찍 졸하였고 둘째는 上虞縣令 王存에게 시집갔고 셋째는 大理寺丞 李處厚에게 시집갔고 그 뒤로 몇 사람은 아직 시집가지 않았다.
寶元 2년(1039)에 陽夏公이 鄧州에서 졸하였다. 이해 8월 모일에 某所에 장사 지냈다. 몇 년 뒤 부인이 그 아들 아무개가 某州에서 벼슬살이하는 것을 따라가서 모년 모월 모일에 官舍에서 졸하였다.
마침내 모년 모월 모일에 公의 墓에 合葬하였다. 부인은 처음에 남편으로 인해 文安縣君에 봉해졌고, 뒤에 그 아들로 인해 渤海縣太君에 봉해졌다.
謝氏는 대대로 名族이었는데 陽夏公이 더욱 당시에 드러나 알려졌다. 처음에 公이 나와 洛陽에서 함께 벼슬할 적에 公의 부친 太子賓客 諱 濤가 아직 무탈하셨다.
그 아들 景初, 景溫은 당시 아이였으며 景平은 막 태어났고 두세 딸들은 모두 어렸다.
내가 날마다 그 댁에 가서 賓客께 나아가 절을 할 때 그 머리카락이 하얗게 세고 衣冠이 整肅하고 淨潔하며 용모가 후덕하고 기운이 맑은 것을 보니 장수하시는 君子의 모습이었다.
물러나 陽夏公과 노닐 때 그가 나이가 한창이고 뜻이 성대하여 우뚝하게 바야흐로 당대의 名臣이고 술자리 사이에서 장난하던 여러 어린 아들과 딸이 모두 총명이 출중하고 용모가 빼어난 것을 보았다.
이때에 부인이 효성과 노력으로 그 媤父를 섬겨서 어진 며느리가 되었으며, 柔順함으로 그 남편을 섬겨 어진 아내가 되었으며, 恭儉과 均一로 그 자식들을 교육하여 어진 어머니가 되었다.
두세 해 뒤에 賓客께서 京師에서 세상을 떠났고, 다시 5, 6년 뒤에 陽夏公이 鄧州에서 졸하였으며, 다시 10여 년 뒤에 景初, 景溫, 景平이 모두 進士에 及第하였다.
景初는 某官이고 景溫은 某官이며 景平은 某官이다. 부인이 시부와 남편에 대해 며느리와 아내로서의 예를 두루 갖추었고, 그 자식들에 대해 가문을 세우는 도리를 이루었다. 享年 몇 세에 졸하였다.
아, 내가 처음 賓客의 銘을 지었고 다시 陽夏公의 銘을 지었는데 지금 다시 墓碣에 부인의 일을 기록하니, 謝氏 가문을 본 지 거의 1世가 지난지라 부인을 위해 이 글을 지음에 자세하게 記述할 수 있는 것이 당연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