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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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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以悲慨帶敍事 歐陽公知得曼卿 如印在心이라 故描畫得會哭會笑
曼卿 諱延年이요 姓石氏 其上世爲幽州人이라
其祖自成始以其族間走南歸어늘 天子嘉其來하야 將祿之한대 不可
乃家于하다 父諱補之 官至太常博士하다
幽燕俗勁武한대 而曼卿少亦以氣自豪하야 讀書 不治章句하고 獨慕古人奇節偉行非常之功하야
視世俗屑屑 無足動其意者하니 自顧不合於時 乃一混于酒 然好劇飮大醉하야 頹然自放하니 由是 益與時不合이나
而人之從其游者 皆知愛曼卿落落可奇 而不知其才之有以用也
年四十八康定二年二月四日 以太子中允祕閣校理 卒于京師하다
曼卿少擧進士不第러니 眞宗推恩하야 三擧進士 皆補이라
曼卿어늘 素奇之하야 謂曰 母老아하야늘 曼卿矍然起就之
遷殿直이라가 久之 改太常寺太祝 知濟州金鄕縣하야 歎曰 此亦可以爲政也라하다
縣有治聲하고 通判乾寧軍하야 丁母永安縣君李氏憂하고 服除 通判永靜軍하니 皆有能名이라
充館閣校勘하고 累遷大理寺丞하고 通判海州하야 還爲校理러라
曼卿上書하야 請還政天子러니 其後太后崩 以言見幸이라
引嘗言太后事者 遽得顯官하야 欲引曼卿한대 曼卿固止之하니 乃已러라
으로 하야 遂務休兵養息하야 天下晏然하야 內外弛武 三十餘年이라
한대 不報러니 已而元昊反 西方用兵이라
始思其言하야 召見하고 稍用其說하야 籍河北河東陝西之民하야 得鄕兵數十萬이라
曼卿奉使籍兵河東하고 還稱旨일새 賜緋衣銀魚러라 天子方思盡其才 而且病矣
旣而聞邊將有欲以鄕兵捍賊者하야 笑曰 此得吾粗也 夫不敎之兵 勇怯相雜하니
若怯者見敵而動하면 則勇者亦率而潰矣 今或不暇敎어든 不若募其敢行者 則人人皆勝兵也라하다
其視世事 蔑若不足爲 及聽其施設之方하얀 雖精思深慮라도 不能過也
狀貌偉然하고 喜酒自豪하야 若不可繩以法度 退而質其平生趣舍大節하얀 無一悖於理者
遇人 無賢愚皆盡忻懽이나 及可否天下是非善惡하얀 當其意者無幾人이라 其爲文章 勁健하야 稱其意氣
有子濟滋 天子聞其喪하고 官其一子하야 使祿其家하다 旣卒之三十七日 葬于太淸之先塋하다
其友歐陽脩表於其墓曰 嗚呼 曼卿이여 寧自混以爲高언정 不少屈以合世하니 可謂自重之士矣로다
士之所負者愈大 則其自顧也愈重이니 自顧愈重이면 則其合愈難이라
然欲與共大事立奇功인댄 非得難合自重之士 不可爲也
古之魁雄之人 未始不負高世之志 故寧或毁身汚迹하야 卒困于無聞이어나 或老且死而幸一遇하야 猶克少施于世어니와
若曼卿者 非徒與世難合而不克所施 亦其不幸不得至乎하니 其命也夫인저 其可哀也夫인저


01. 石曼卿墓表
슬픈 마음을 敍事에 실었다. 歐陽公曼卿을 안 것이 마치 마음속에 도장을 찍은 것처럼 명료하였다. 그러므로 묘사한 것이 사람을 울게 할 수도 있고 웃게 할 수도 있는 것이다.
曼卿延年이고 石氏이니, 그 선조는 幽州 사람이다.
石延年(≪吳郡名賢圖傳讚≫)石延年(≪吳郡名賢圖傳讚≫)
유주가 契丹에 편입됨에 祖父 自成이 처음으로 족속을 이끌고 틈을 타서 도망하여 남쪽으로 귀순하자 천자가 귀순해 온 것을 가상히 여겨 俸祿을 내리려 하였으나 그렇게 하지 못하였다.
이에 宋州宋城에 정착하였다. 부친 휘 補之는 관직이 太常博士에 이르렀다.
幽燕 지방 사람들은 굳세고 용맹하였는데, 만경은 어릴 때에 또한 기개가 호방하여 독서할 때에 章句에 치중하지 않고 옛사람의 뛰어난 절개, 걸출한 행동, 비범한 공업만을 사모하였다.
그리하여 世俗의 자질구레한 일을 볼 적에 자신의 뜻을 움직일 만한 것은 없었으니, 스스로를 돌아봄에 자신은 세상과 합치되지 않는지라 마침내 오로지 술에만 빠져 자신의 자취를 숨기고 살았다. 그런데 실컷 마시고 大醉하기를 좋아하여 얽매이는 바 없이 자신을 단속하지 않으니 이로 인해 더욱 세상과 뜻이 맞지 않게 되었다.
그러나 종유하는 사람들은 모두 만경의 우뚝하여 기특해할 만한 모습을 사랑할 줄은 알았지만 만경에게 쓰일 만한 재주가 있다는 것은 알지 못하였다.
48세 되던 康定 2년(1041) 2월 4일에 太子中允 祕閣校理의 관직에 있다가 京師에서 졸하였다.
만경은 젊었을 때 진사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지 못하였는데 眞宗推恩하여 세 차례 진사시에 응시한 자들을 모두 三班奉職補任하였다.
만경이 처음에는 관직에 나아가려 하지 않았는데, 張文節公(張知白)이 평소 만경을 기특하게 여겼으므로 만경에게 이르기를 “모친께서 연로하신데 녹봉을 가리는가?”라고 하니, 만경이 송구해하며 관직에 나아갔다.
이후 승진하여 殿直이 되었다가 오랜 뒤에 太常寺太祝 知濟州金鄕縣으로 改差되어 탄식하기를 “이 작은 고을도 정사를 펼칠 수 있다.”라고 하였다.
현을 잘 다스린다는 명성이 났고 乾寧軍通判이 되어 모친 永安縣君 李氏의 상을 당하였고 탈상하고서 永靜軍通判이 되었는데 모두 유능하다는 명성이 났다.
이후 館閣校勘에 충임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大理寺丞이 되고 海州通判이 되었다가 다시 校理가 되었다.
莊獻明肅太后가 수렴청정할 때 만경이 글을 올려 천자에게 정사를 돌려줄 것을 청하였는데, 그 뒤 태후가 붕어하자 范諷이 말을 잘하여 천자의 총애를 받았다.
일찍이 태후의 일을 말했던 자들이 대번에 현달한 관직을 얻은 사실을 끌어대면서 만경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하였는데 만경이 완고하게 저지하니 그만두었다.
거란이 중국과 通交하고부터, 李德明河南을 모두 차지하였으나 신하의 예로 복속하여 마침내 전쟁을 그쳐 병사들을 쉬게 하며 백성들을 保養하고 안식시키는 일에 힘써, 천하가 태평하여 안팎으로 武備를 느슨히 한 것이 30여 년이었다.
만경이 글을 올려 10가지의 일을 아뢰었는데 천자가 비답을 내리지 않더니, 이윽고 元昊가 반란을 일으켜 서쪽에서 전쟁이 발발하게 되었다.
그제야 천자가 만경의 말을 생각하고서 만경을 召見하고 그 주장을 조금 채택하여 河北河東陝西의 백성들을 징집하여 수십만 명의 鄕兵을 모았다.
만경이 조칙을 받들어 하동에 가서 병사를 징집하고 천자의 뜻에 맞게 임무를 수행하고 돌아오니 緋衣銀魚를 하사하였다. 천자가 바야흐로 만경의 재주를 다 쓰려고 생각하였으나 만경이 병이 들어버렸다.
얼마 뒤에 징병한 향병으로 적을 막고자 하는 변경의 장수가 있다는 말을 듣고는 만경이 웃으면서 “이는 내 뜻을 잘 모르는 것이다. 조련하지 않은 병사들은 용맹한 자와 겁이 많은 자가 섞여 있는 법이니,
만약 겁이 많은 자가 적을 보고 동요하게 되면 용맹한 자도 거기에 휩쓸려서 무너지게 된다. 지금 혹여 병사들을 조련할 시간이 부족하거든 과감하게 행동하는 자를 모집하는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하면 한 사람 한 사람이 모두 정예병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만경은 세상일을 대수롭지 않아서 하잘것없는 것처럼 보았으나, 그가 내놓는 방책을 들어보면 아무리 정밀하고 깊은 사려일지라도 만경의 방책을 능가하지는 못하였다.
만경은 용모가 헌걸차고 술을 좋아하고 호탕하여 법도를 가지고 구속할 수 없을 듯하였으나, 물러와서 그가 평소 取捨하는 大節을 따져보면 하나도 이치에 어긋나는 것이 없었다.
사람을 만날 적에는 어진 사람이거나 어리석은 사람이거나 모두 기쁜 성심을 다하였으나, 천하 사람들의 是非善惡可否를 따지게 되어서는 만경의 뜻에 들어맞는 사람이 얼마 없었다. 만경의 문장은 강건하여 만경의 기상에 걸맞았다.
아들로는 가 있다. 천자가 만경의 부음을 듣고 한 아들에게 관직을 내려 집안에 봉록이 이어지게 하였다. 졸한 지 37일째에 太淸의 선영에 안장하였다.
만경의 벗 구양수는 다음과 같이 墓表를 짓는다. 오호라! 만경이여. 차라리 스스로 자취를 숨겨 고고하게 살지언정 조금도 자신을 굽혀 세상에 영합하지 않았으니, 自重하는 선비라 이를 만하도다.
선비가 자부하는 것이 더욱 크면 스스로를 돌아봄이 더욱 무거우니, 스스로를 돌아봄이 더욱 무거우면 세상과 합치되기가 더욱 어렵다.
그러나 큰일을 함께하고 뛰어난 공적을 세우고자 할진댄, 세상에 합치되기 어렵고 자중하는 선비를 얻지 못하면 할 수가 없다.
옛날 걸출한 사람들은 세상을 고고하게 살아가려는 뜻을 지니지 않은 적이 없다. 그러므로 차라리 혹 법도에 벗어난 행동을 하면서 스스로를 더럽혀 마침내 세상에 알려짐이 없게 되어버리거나, 혹 늙어서 죽을 때까지 다행히 때를 한 번 만나 오히려 자신의 재주를 세상에 조금 펼치게 되기도 한다.
그러나 만경과 같은 사람은 단지 세상과 합치되기 어려워 자신의 재주를 펴지 못하였을 뿐 아니라 또한 불행히도 中壽의 나이에도 이르지 못하였으니, 명이로다! 슬퍼할 만하구나!


역주
역주1 石曼卿墓表 : 이 글은 慶曆 원년(1041)에 지은 것이다. 이 墓表의 주인공인 石延年(994~1041)과 歐陽脩는 모두 당대에 詩文으로 일컬어졌다. 이 글을 지을 당시 歐陽脩의 나이는 35세였다.
墓表는 墓碑와 같다. 墓 앞이나 墓道에 세워서 죽은 사람을 表彰하기 때문에 붙여진 명칭이다. 墓表는 東漢 때 시작되었다. 安帝 元初 元年에 ≪謁者景君墓表≫를 세웠는데, 그 뒤로 인습하였다. 문체는 碑碣과 같으며, 관직의 有無에 관계없이 쓸 수 있었는데, 碑碣이 等級에 제한이 있는 것과는 다르다.
역주2 幽州入于契丹 : 後晉 天福 元年(936)에 石敬瑭(892~942)이 즉위하면서 燕雲 16주를 거란에 할양하는 조건으로 군사 지원을 받아 後唐을 멸망시켰는데 이때 幽州가 거란으로 편입되었다.
역주3 宋州之宋城 : 지금의 河南 商丘의 남쪽에 있었다. 후에 宋나라 때에 송주를 승격시켜 應天府로 삼고 南京으로 불렀다.
역주4 奉職 : 三班奉職을 가리키는 것으로, 宋나라 때 侍從武官의 최하위직이다.
역주5 初不肯就 : ≪宋史≫ 권442 〈石延年列傳〉에는 “석연년이 수치스럽게 생각하여 관직에 나아가려 하지 않았다.[延年恥不就]”라고 되어 있다.
역주6 張文節公 : 張知白(961~1028)이다. 滄州 淸池 사람으로 자는 用晦이고 시호는 文節이다. 參知政事, 樞密副使, 工部尙書, 同平章事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7 擇祿 : ≪孔子家語≫ 권2 〈致思〉에 “집안이 가난하고 어버이가 늙으시면, 녹봉을 가리지 말고 벼슬해야 한다.[家貧親老 不擇祿而仕]”라는 季路의 말이 나온다.
역주8 莊獻明肅太后臨朝 : 장헌명숙태후는 宋 眞宗의 황후인 劉氏이다. 仁宗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였으므로 황태후로써 수렴청정하였다. 明道 2년(1032) 3월에 붕어하였으며 처음의 시호는 莊獻明肅이었다가, 慶曆 4년(1044)에 章獻明肅으로 改諡되었다.
역주9 范諷 : 齊州 사람으로 자는 朴之이고 仁宗 때 관직이 御史中丞에 이르렀다.
역주10 自契丹通中國 : 거란의 세력이 강대해져서 宋나라 초기부터 자주 변경을 침입하였는데, 景德 元年(1004)에 거란이 세운 遼나라가 20만 대군을 일으켜 송나라를 공격하였다. 재상 寇準의 건의에 따라 眞宗이 親征을 벌여 요나라의 군대와 澶淵에서 접전하였다. 이에 요나라는 송나라를 형으로 섬기고 송나라는 해마다 은 10만 냥과 비단 20만 필의 세폐를 보내는 조건으로 강화를 맺었다.
역주11 德明盡有河南而臣屬 : 甘肅, 陝西 지방을 중심으로 세력을 넓혀가던 탕구트족의 족장인 李繼遷이 송나라로부터 자립을 내세우며 반란을 일으켰는데, 이계천이 죽고 그 아들 李德明이 景德 元年(1004)에 송나라에 표문을 올려 송나라에 귀부하고 西平王에 봉해지면서 신하로서 송나라를 섬겼다.
역주12 曼卿上書言十事 : 明道 연간(1032~1033)에 석연년이 글을 올려 천하에 전쟁이 없은 지 30여 년이니, 장수를 선발하고 병사를 조련하여 두 변방에서 일어날지 모르는 불상사에 대비해야 한다고 건의하였으나 천자가 비답을 내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資治通鑑長編≫ 127권에 보인다.
역주13 中壽 : 중수가 몇 살을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90세 이상, 80세, 70세, 60세 등 설이 많으나, 대체로 사람의 수명을 상‧중‧하 세 등급으로 나누었을 때 보통의 평균치인 중등의 수명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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