君
은 諱慶
이요 字貽孫
이요 姓歐氏
라 其上世爲
人
이러니 後徙
하고 又徙
이라
乾德二年
에 分穀城之陰城鎭
하야 爲乾德縣
하고 建
하니 歐氏遂爲乾德人
이라
脩嘗爲其縣令
하야 問其故老鄕閭之賢者
하니 皆曰 有三人焉
하니 其一人曰太傅贈太師中書令
이요
三人者는 學問出處가 未嘗一日不同하고 其忠信篤於朋友하며 孝悌稱於宗族하며 禮義達于鄕閭라
乾德之人이 初未識學者라가 見此三人에 皆尊禮而愛親之러니 旣而皆以進士擧於鄕이어늘 而君獨黜於有司라
後二十年
에 으로 爲潭州湘潭主簿 陳州司法參軍 監考城酒稅
하고 遷彭州軍事推官
하고 知泉州永春縣事
하니
而鄧公已貴顯于朝어늘 君尙爲州縣吏라 所至에 上官多鄧公故舊로되 君絶口不復道前事하야 至終其去에 不知君爲鄧公友也러라
君爲吏廉貧하고 宗族之孤幼者를 皆養于家라 居鄕里에 有訟者多就君決曲直하야 得一言에 遂不復爭하니 人至于今傳之라
嗟夫라 三人之爲道가 無所不同이어늘 至其窮達하얀 何其異也아
而三人者未嘗有動於其心
요 乾德之人稱三人者
도 亦不以貴賤爲異
하니 則其幸不幸
을 豈足爲三人者道哉
아
然而達者昭顯于一時하고 而窮者泯沒於無述하면 則爲善者何以勸이며 而後世之來者何以考德於其先가 故表其墓하야 以示其子孫하노라
君有子世英하니 爲鄧城縣令이요 世勣은 擧進士라 君以天聖七年卒하니 享年六十有四라 葬乾德之西北廣節山之原하다
세 사람이 같은 마을에서 뜻과 행동을 함께하였으나 다만 때를 만난 것은 같지 않으므로 感慨하였다.
군은 諱가 慶이고 字가 貽孫이고 姓이 歐氏이다. 그 先世는 韶州 曲江 사람이었는데 후에 均州 鄖鄕으로 이주하고 다시 襄州 穀城으로 이주하였다.
乾德 2년(964)에 곡성의 陰城鎭을 나누어 乾德縣을 만들고 光化軍을 세우니 구씨가 마침내 건덕 사람이 되었다.
내가 일찍이 乾德縣令이 되어 鄕閭의 어진 長老가 누군지 물으니, 모두 말하기를 “세 사람이 있으니, 한 사람은 太傅 贈太師中書令 鄧文懿公이고,
한 사람은 尙書屯田郞中 戴國忠이고, 한 사람은 歐君입니다.”라고 하였다.
세 사람은 학문과 출처가 하루도 같지 않은 적이 없었고, 그 忠信함은 朋友에게 독실하였으며 孝悌는 종족에게 알려졌으며 예의는 鄕閭에 드러났다.
건덕현의 사람들이 애초 學者를 알지 못하다가 이 세 사람을 보고서는 모두 존경하고 친애하였다. 그러다가 얼마 지나 이들 모두 진사로 鄕試에 응시하였는데 군만이 낙방하였다.
20년 뒤에 비로소 三禮科에 응시하여 同出身이 되어 潭州湘潭主簿, 陳州司法參軍, 監考城酒稅가 되고 승진하여 彭州軍事推官이 되고 知泉州永春縣事가 되니,
鄧公은 이미 조정에서 현달하였는데 군은 아직도 州縣의 관리 신세였다. 군이 부임하는 곳마다 군의 상관이 대부분 등공의 오랜 지인이었으나, 군은 입을 닫고서 다시는 지난날의 일을 말하지 않아 떠날 때까지도 군이 등공의 벗이라는 사실을 알지 못하였다.
군은 관직에 있으면서 청렴하였고 고아가 된 종족을 모두 자신의 집에서 길렀다. 향리에 거하면서는 訟事하는 자들이 대부분 군에게 가서 시비를 판결받아 군의 한마디 말에 마침내 다시는 쟁송하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지금까지도 이 사실을 전하고 있다.
아! 저 세 사람의 도가 같지 않은 점이 없는데 그 窮達에 이르러서는 어쩌면 저리도 다른가?
세 사람은 마음이 흔들린 적이 없고 건덕현 사람들이 세 사람을 칭찬하는 말 또한 〈세 사람의〉 貴賤을 가지고 차이를 두지 않았으니, 幸不幸을 가지고 어찌 세 사람의 도를 말할 수 있겠는가.
그렇지만 현달한 자는 당대에 밝게 드러나고 궁박한 자는 그 행적을 傳述함이 없어 자취가 매몰된다면, 선을 행하는 자가 어떻게 권면될 수 있겠으며 후대 사람들이 어찌 先人의 덕을 고찰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墓表를 지어 그 자손들에게 보이노라.
군의 아들 世英은 鄧城縣令이 되었고, 世勣은 진사에 급제하였다. 군은 天聖 7년(1029)에 졸하니 향년 64세였다. 乾德 서북쪽 廣節山 언덕에 군을 안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