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敍事中矩矱이라
諱逖이요 字景山이니 世家
少仕하야 爲監察御史러니 李氏國除 以族北遷하야 獻其文若干篇하야 得召試爲러니
凡主簿二歲 縣民七百人 詣京師하야 願得君爲令이어늘 遷祕書省校書郞 知縣事 數上書하야 論北邊事하다
是時 爲相 四方奏疏不可其意者 悉投二甕中하야 甕滿輒出而焚之하고 未嘗有所肯可로되 獨稱君爲能曰 其言與我多合이라하다
又二歲徙江華令하야 未行 轉運使薦其材하야 拜太僕寺丞 磨勘錢帛糧草 監永城和糴 知海陵監하다
三歲 用監最 遷大理寺丞하야 賜緋衣銀魚하고 監泗州排岸司라가
遷贊善大夫 監永興軍榷貨務하고 遷太常丞 知鼎州러니 州雜하야 喜以攻劫爲生이라
少年百餘人 私自署爲名號하야 常伺夜出掠居人하니 居人惡之 莫敢指라가
君至而歎曰 夫政 民之庇也 威不先去其惡이면 則惠亦不能及人이라하더니
君政旣行 盜皆亡入他境이라가 約君去乃還이러라
遷國子博士하야 奉使兩浙江南하야 言茶鹽利害하야 省州縣之役하니 皆稱旨
出知興元府하야 大修하니 堰水舊漑民田四萬餘頃한대 世傳漢蕭何所爲
君行壞堰이라가 顧其屬曰 方佐漢하야 取天下어늘 乃暇爲此하야 以漑其農하니
古之聖賢 有以利人이면 無不爲也 今吾豈宜憚一時之勞하야 而廢古人萬世之利리오하고
乃率工徒하야 躬治木石이라가 石墜傷其左足이로되 君益不懈
堰成 歲穀大豐이어늘十二莖以獻하니 遷尙書主客員外郞 京西轉運使하고 徙荊湖南路러라
荊湖 南接하니 諸蠻歲出하야 爲州縣患이라 君曰 鳥獸可馴이어든 況蠻亦人乎아하고
乃召其酋豪하야 諭以禍福하니 諸蠻皆以君言爲可信이라하야 訖三歲 不以蠻事聞朝廷이라
君罷來朝 眞宗面稱其能한대 會有司言荊南久不治어늘 眞宗拜君度支員外郞 知府事 荊南鈐轄北路兵馬하다
於荊湖爲大府 故常用重人이라가 至君特選以材하니 用員外郞 自君而始
明年 遷司封員外郞하야 賜金紫하고 徙知揚州하니 州居南方之會 世之仕宦於南與其死而無歸者 皆寓其家於揚州
故其子弟雜居民間하야 往往倚權貴하야 恃法得贖하야 出入里巷하야 爲不法하야 至或破亡其家어늘
君捕其甚者하야 笞之曰 此非吏法이라 乃吾代汝父兄敎也라하니
子弟羞媿自悔하야 稍就學問爲善人하니 風俗大化러라 歲滿 在道得疾하야 卒于하다
君少孤하야 事其母兄 以孝謹聞이라 常戒其妻하되 事嫂如姑하고 而未嘗敢先其兄食하고 衣雖弊라도 兄不易衣 不敢易이러라
遣其弟朝京師할새 君之故友當從이라 以其家屬託君이러니 惟嶽果留不返이어늘
君善撫其家하야 爲嫁其女數人하고 李氏國亡 君載其家하야 北歸京師하야 以還惟嶽이러라
歷官四十年 不問家事하고 好學하되 尤喜孫吳兵法이라 初在僞唐 數上書言事하야 得校書郞이라가 遂遷御史
王師圍金陵 李氏大將李雄 擁兵數萬하야 留上江하야 陰持兩端이어늘 李氏患之하야 以謂非君이면 不能召雄이라한대
君走上江하야 以語動雄하니 雄卽聽命이라 已而李氏以止雄於溧水하니
君曰 此非柵兵之地 留之 必敗라하고 乃戒雄曰 兵來어든 愼無動하고 待我一夕하라 吾當入白하면 可與公兵俱入城이라한대
君去 王師挑之어늘 雄輒出戰하야 果敗死 君至하야 收其敗卒千人而去러라
君少慷慨하야 卒能自立於時 其孝謹聞於其族하며 其信義著於其友하며 其材能稱於其官하니 是皆可書以傳이라 謹狀하노라


11. 司封員外郞 許公行狀
敍事가 법도에 맞다.
이고 景山이니, 대대로 歙州에 살았다.
어려서 僞唐에 벼슬하여 監察御史가 되었는데, 李氏의 나라가 망하자 일족을 데리고 북쪽으로 이주하여 약간 편의 글을 바쳐, 황제가 불러 시험해보고 汲縣尉 冠氏主簿로 삼았다.
주부가 된 지 2년에 縣民 7백 명이 京師에 가서 군을 縣令으로 삼아주기를 원하거늘, 승진하여 祕書省校書郞 知縣事가 되었다. 자주 글을 올려 북쪽 변경의 일을 논하였다.
이때에 趙普가 재상으로 있으면서 사방에서 進奏하는 상소 중에 불가하다고 생각되는 것들은 모두 두 개의 단지 속에 던져 넣고서 단지가 꽉 차면 그때마다 내다가 태워버리고는 認可한 적이 없었는데, 유독 군에 대해서는 유능하다고 칭찬하면서 “그 말이 나와 합치되는 것이 많다.”라고 하였다.
다시 2년 뒤에 江華令으로 자리를 옮겨, 부임하기 전에 轉運使 樊知古가 군의 재주를 천거하여 太僕寺丞 磨勘錢帛糧草 監永城和糴 知海陵監에 제수되었다.
3년의 임기가 지나 考課에서 최고를 받아 大理寺丞으로 승진하여 緋衣銀魚를 하사받고, 監泗州排岸司가 되었다가
승진하여 贊善大夫 監永興軍榷貨務가 되고, 승진하여 太常丞 知鼎州가 되었는데 정주에는 蠻蜑이 섞여 있어 약탈을 일삼으며 살아가는 것을 좋아하였다.
그 가운데 젊은 사람 백여 명이 사사로이 직함을 써서 행세하면서 항상 밤을 틈타 나와서 주민들을 약탈하니, 주민들이 싫어하였으나 감히 지목하지를 못하였다.
군이 정주에 부임하여 탄식하며 말하기를 “대저 정사는 백성을 보호하는 것이니, 위엄이 그 악을 먼저 제거하지 못한다면 은택 또한 사람들에게 미칠 수 없다.”라고 하니,
군이 정사를 돌보고 나자 도적들이 모두 다른 지역으로 도망하여 들어갔다가 군이 떠나면 다시 돌아오기로 약속하였다.
國子博士로 승진하여 使命을 받들고 兩浙江南으로 가서 茶鹽의 이해관계를 말하여 州縣의 부역을 줄이니 모두 황제의 뜻에 부합하였다.
외직으로 나가 知興元府가 되어 山河堰을 크게 수리하니, 山河堰의 물은 오래 전에 백성들의 전답 4만 여 이랑에 대었는데, 세상에서는 나라 때 蕭何가 만든 것이라고 전해져왔다.
蕭何(≪萬古際會圖像≫)蕭何(≪萬古際會圖像≫)
군이 무너진 山河堰에 갔다가 官屬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酇侯가 바야흐로 한나라를 도와 천하를 얻었거늘, 이에 여가를 내어 山河堰을 만들어 농지에 물을 대니,
옛날의 성현들은 사람에게 이익을 끼치는 점이 있으면 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지금 내가 어찌 일시의 수고로움을 꺼려 옛사람이 만세토록 사람을 이롭게 한 것을 폐기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工人들을 이끌고서 몸소 나무와 돌을 다듬다가 돌이 떨어져 왼쪽 발이 다쳤으나, 군은 더욱 게으르지 않고 힘썼다.
山河堰이 완성됨에 그해에 큰 풍년이 들거늘, 嘉禾 12줄기를 얻어 황제에게 바치니 尙書主客員外郞 京西轉運使로 승진하고 자리를 옮겨 荊湖南路轉運使가 되었다.
荊湖는 남쪽으로 溪洞과 인접하여 있으니, 여러 蠻族들이 해마다 출몰하여 州縣의 근심거리가 되었다. 군이 말하기를 “새와 짐승도 길들일 수가 있는데, 하물며 蠻族 또한 사람임에랴.”라고 하고는,
이에 그 추장을 불러 禍福의 이치를 들어 타이르니 만족들이 모두 군의 말은 믿을 만하다고 여겨 군의 임기 3년이 다 가도록 만족의 일을 조정에 보고하지 않았다.
군이 직을 그만두고 조정으로 돌아옴에 眞宗이 면대한 자리에서 군의 유능함을 칭찬하였는데, 마침 有司荊南 지방이 오랫동안 다스려지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거늘, 진종이 군을 度支員外郞 知府事 荊南鈐轄北路兵馬로 제수하였다.
형남은 荊湖 지방에서도 큰 고을이므로 항상 무게 있는 사람을 등용해오다가, 군에 이르러 특별히 그 재주를 가지고 선발하였으니, 員外郞을 이 자리에 쓴 것은 군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이듬해에 司封員外郞으로 승진하여 金魚袋紫衣를 하사받고, 知揚州로 자리를 옮기니 揚州는 남방의 도회지였다. 남방에서 벼슬살이한 자와 죽어서 돌아갈 고향이 없는 세상 사람들이 모두 양주에서 우거하였다.
그러므로 그 자제들이 민간에 섞여 살면서 왕왕 權貴에 의지하여 돈을 내고 죄를 속량받는 법을 믿고서 閭巷에 출입하면서 불법을 저질러 심지어는 혹 패가망신하는 자도 있었다.
그러자 군이 정도가 심한 자를 붙잡아 매질을 하면서 “이는 형법을 적용한 것이 아니라 바로 내가 너의 부형을 대신하여 가르치는 것이다.”라고 하니,
자제들이 부끄러워하면서 스스로 뉘우쳐 차츰 학문을 닦아 착한 사람이 되니 풍속이 크게 교화되었다. 임기가 다하여 돌아가는 도중에 병을 얻어 高郵에서 졸하였다.
군은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그 모친과 형을 섬김에 효성과 근신함으로 알려졌다. 항상 그 처를 경계하되 형수를 시어머니처럼 섬기게 하였고, 감히 형보다 먼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었으며, 옷이 비록 해지더라도 형이 새 옷으로 바꾸지 않으면 자신도 감히 바꾸지 않았다.
이보다 앞서 違命侯가 그 아우를 보내 京師에 조회할 때 군의 故友全惟嶽이 수행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가솔들을 군에게 부탁하였는데 惟嶽이 과연 京師에서 머물면서 돌아오지 않거늘,
군이 그 가솔들을 잘 돌봐서 유악의 여러 딸들을 시집보냈고, 李氏의 나라가 망함에 군이 그 가솔들을 데리고서 북쪽의 京師歸附하여 유악에게 돌려주었다.
벼슬살이하는 40년 동안 집안일은 묻지 않았고, 학문을 좋아하였으되 孫子吳子兵法을 특히 좋아하였다. 처음 僞唐에 있을 때에 자주 글을 올려 時事를 말하여 校書郞이 되었다가 마침내 御史로 승진하였다.
나라의 군대가 金陵을 포위함에 이씨의 대장 李雄이 병사 수만 명을 거느리고 上江에 주둔하면서 〈나라와 僞唐〉 양측 모두와 은밀히 관계를 유지하거늘, 이씨가 근심하여 말하기를 “군이 아니면 이웅을 불러올 수 없다.”라고 하였는데,
군이 상강으로 달려가서 이웅을 설득하여 움직이니 이웅이 즉시 명을 따랐다. 얼마 지나 이씨가 蠟書를 보내 이웅을 溧水에 머무르게 하니,
군이 말하기를 “이곳은 군사를 주둔시킬 땅이 아니니, 머물면 반드시 패주하게 될 것이다.”라고 하고, 이에 이웅에게 주의를 주며 말하기를 “송나라 병사들이 오거든 조심하여 병사를 움직이지 말고 하룻저녁만 나를 기다리라. 내가 들어가 임금께 아뢰면 공의 병사와 함께 성으로 들어갈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군이 떠나자 송나라의 군대가 도발하거늘 이웅이 문득 나가서 전투하여 과연 패하여 죽었다. 군이 와서 패잔병 천 명을 거두어 떠났다.
군은 어릴 때부터 성품이 강개하여 마침내 스스로 당세에 공명을 세웠다. 그 효성과 근신함은 그 종족들에게 알려졌으며 그 신실함과 의로움은 그 벗들에게 드러났으며 그 재능은 관직에 걸맞았으니, 이는 모두 글로 지어 전할 만하다. 삼가 행장을 쓰노라.


역주
역주1 司封員外郞許公行狀 : 이 글은 寶元 원년(1039)에 지은 것이다. 王安石의 ≪臨川集≫ 권71의 〈許氏世譜〉에 의거하면, 본 행장의 주인공인 許逖은 구양수가 墓誌銘을 써준 바 있는 許元의 부친이다. 허원의 묘지명은 본서 권27의 〈尙書工部郞中充天章閣待制許公墓誌銘〉이다. 이 허원의 아들 許宗旦은 구양수의 벗이기도 하다.
역주2 歙州 : 治所가 지금의 安徽 歙縣에 있었다.
역주3 僞唐 : 五代十國 때의 南唐(937~975)을 가리킨다. 李昪이 세우고 3대 後主 李煜 때에 송나라에 멸망당하였다.
역주4 汲縣尉冠氏主簿 : 汲縣은 지금의 河南 급현이고, 冠氏는 縣名으로 治所가 지금의 山東省 冠縣 북쪽에 있었다.
역주5 趙普 : 943~994. 字가 則平으로 後周 때 趙匡胤의 막료가 되어 陳橋兵變을 꾸며 송나라의 개국을 도왔다. 송나라에 들어 右諫議大夫, 兵部侍郞, 樞密使 등을 역임하고 여러 차례 재상을 지냈으며 魏國公에 봉해졌다. 시호는 忠獻이다.
역주6 樊知古 : 943~994. 字가 仲師로 舒州軍事推官, 江南轉運使 등을 역임하였다.
역주7 蠻蜑(단) : 중국 남북방의 소수민족에 대한 통칭이다.
역주8 山河堰 : 陝西省 漢中에서 褒水의 물을 끌어들여 農地에 灌漑하던 水利 시설이다. 漢나라 때 蕭何와 曹參이 만든 것이라 하여 ‘蕭參堰’으로도 불린다.
역주9 酇侯 : 蕭何(B.C.257~B.C.193)의 封爵이다.
역주10 嘉禾 : 이삭이 특출 나게 많이 붙은 큰 줄기를 말하는데, 경사스러운 징조로 여겼다. ≪書經≫ 〈微子之命〉에 “唐叔이 다른 줄기가 합하여 한 개의 이삭이 달린 벼를 얻어 천자에게 바쳤는데 周公이 천자의 명으로 〈嘉禾篇〉을 지었다.”라고 하였다.
역주11 溪洞 : 廣西와 湖南 일대의 苗族, 侗族, 壯族 등의 소수민족이 거주하는 지역을 가리킨다.
역주12 高郵 : 江蘇에 있는 縣名이다.
역주13 違命侯 : 南唐의 마지막 임금 李煜이 宋나라에 복속된 이후 받은 봉호이다.
역주14 全惟嶽 : ≪文忠集≫의 주석에는, 어떤 본에는 ‘全’이 ‘潘’이나 ‘金’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는데, 모두 행적은 미상이다.
역주15 蠟書 : 기밀문서를 밀랍으로 봉해 보낸 편지를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