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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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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奇而錯落이라
慶曆八年春 翰林侍讀學士右諫議大夫楊公 年六十有九 告老하고
卽以工部侍郞으로 致仕하야 歸於常州 其行也 天子召見宴勞하고 賜以不拜어늘
公卿大夫 咸出餞於東門하야 瞻望咨嗟하야 相與言曰 楊公歸哉인저 於公 計爲可榮이나 於國家 計爲可惜이로다하다
其明年九月十三日하야 出其兵論一篇하야 示其子忱慥而授以言曰 臣聞 天下之至恩 大義也
今臣偕不幸하되 猶以 言天下莫大之憂爲陛下無窮之慮者其事有五하야 以畢臣志하니 死無所恨이라
惟陛下 用臣言이요 不必哀臣死也하소서하고 言訖而卒하니 不及其私러라
忱慥以其語幷其兵論以聞하니 天子震悼하야 顧有司問可以寵公者한대
有司擧故事以對하니 天子曰 此何足以慰吾思리오하고 乃詔特贈公兵部侍郞이러라
公少師事學問하고 爲文章長於議論이라 好讀兵書하야 知古兵法하야 以謂士不兼文武 不足任大事러라
當四方無事時하야 數上書言邊事러니 後二十餘年 元昊叛河西하고 契丹擧衆違約하야 皆警 天下弊於兵이라
公於此時 耗精疲神하야 日夜思慮하야 하니 皆有法이라
天子以步卒五百으로 如公之法하야 試於庭하야 以爲可用이로되 而世多非其刀楯이러라
脩嘗奉使河東하야 得邊將王吉하니 言元昊出兎毛川하야 爲吉所敗者 用楊公楯也라하니 蓋世未嘗用其術爾
然公素剛少合하고 而議者不一이라 故不得盡用其言이라
할새 請益置土兵한대 公言竦據內地하야 無破賊之謀하고 而坐請益兵하니
則欲以兵少爲解라하니 竦復論公不忠沮計어늘 公不能忍以語詆之러라
其後三路農民 이어늘 公又言兵在精이요 不在衆이니 衆而不練이면 則不整而易敗하고 困國而難供이라하다
時自將相大臣으로 議者皆務多兵이어늘 獨公之論 能如此러라
이로되 而救兵不至 公在河中하야 乃僞爲書馳告延州하니 救兵十萬至矣
因命旁郡縣具芻糧什器如其數以俟러니 已而元昊亦解去러라
後公守幷州 卽詔公爲幷代麟府路經略安撫招討等使兼兵馬都部署한대
公執勅하야 告其群吏曰 天子用我矣 然任其事 必圖其效 欲責其效인댄 必盡其方이라하고
乃列六事以請曰 能用臣言則受命이요 不然則已라하니 朝廷難之하야 公論不已 坐是하야 徙知하니 公志之不就 皆此類也
公嘗爲御史러니 章獻太后兄子劉從德 爲團練使以卒한대
唐武三思楊國忠之禍 不獨其身이요 幾亡其國이라하니 太后大怒하야
居二歲 復召爲御史하니 言事愈切이라
公祥符元年 進士及第하야 以上書言事하니 眞宗奇之 召試한대 不赴어늘 拜著作佐郞하고 累官至工部侍郞하고
爲天章閣待制 龍圖閣樞密直學士하야 遂侍講于翰林이러라 嘗爲審刑院詳議官 知淮陽江陰軍 三司度支判官
知御史雜事 判吏部流內銓 三司度支副使 河北河東都轉運使 知河中府陝幷邢滄杭五州하야 所至皆有能績이러라
爲人廉潔剛直하야 少屈而難犯이로되 其仁心愛物 至其有所能容하얀 人多所不及也러라
이라 曾祖諱偉 祖諱某 父諱守慶이니 하고 又娶王氏하니 太原郡君이라
이라 公卒之明年秋 其子忱 以其喪歸于河南하고
又明年二月十七日 葬于洛陽縣宣武管平洛鄕之先塋이라
公有文集十卷 兵書十五卷하니 讀其書 可以見公之志 考其始終之節 可以知公之心이니 嗚呼 可謂忠矣로다
로되 而且未嘗識公也러니 及其葬也하야 其子不以銘屬於他人而以屬脩者 豈以修言爲可信也歟 然則銘之其可不信
銘曰 遠矣楊氏 하니 與漢俱起로다
四世以公이요 이라 師復理卿이요 振左拾遺 文蔚獲嘉러니 其後益衰
避亂 曾祖始南하고 이라 又適南粤하니 皇考是生이라
晦顯有時라가 發于皇明이라 하니 道德之優로다
司馬四子 唯公克大하니 非徒大之 將又長之로다
世有官族 孰無繫譜리오마는 或絶於微하고 或亡其序하니 不絶不亡 由屢有人이라
誰如楊世 愈久而蕃이리오 次第弗迷하고 하니 公其歸此하야 安千萬年이어다


02. 翰林侍讀學士 右諫議大夫 楊公墓誌銘
기이하면서 문장이 종횡으로 잘 짜여져 있다.
慶曆 8년(1048) 봄에 翰林侍讀學士 右諫議大夫 楊公이 69세의 나이에 연로함을 아뢰고
바로 工部侍郞으로 致仕하고서 常州에 돌아갔다. 공이 떠날 때 天子께서 召見하고 노고를 위로하시고 跪拜하는 예를 하지 않도록 은택을 내리셨다.
公卿大夫들이 다 東門에 나와 餞別하면서 우러러 바라보고 탄식하여 서로 말하기를 “楊公께서 돌아가시는구나. 공에게는 영화스러운 계획이 되겠으나 국가에는 안타까울 만한 계획이로다.”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 9월 13일에 공이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이 지은 〈兵論〉 한 편을 꺼내어 그 아들 에게 보여주고 건네주면서 말하니, 그 말에 “신이 듣건대 臣子는 비록 죽더라도 감히 그 君父를 잊어서는 안 되고 天下의 지극한 은혜는 大義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 楊偕는 불행히도 죽게 생겼으니, 오히려 죽어가는 사람의 입으로 천하의 더할 나위 없는 우환 중에 폐하의 끝없는 우려가 되는 일 다섯 가지를 말씀드려 신의 뜻을 다 펴니 죽어도 한스러운 바가 없습니다.
오직 폐하께서는 신의 말을 쓰시고 굳이 신의 죽음을 서글퍼하지 마소서.”라고 하고 말을 마치고 졸하였을 뿐 자기의 私事를 언급하지 않았다.
가 공의 유언을 그 〈兵論〉과 함께 아뢰니 천자께서 매우 슬퍼하시면서 有司를 돌아보고 공에게 은총을 내릴 만한 방법을 묻자,
유사가 故事를 들어 대답하니, 천자께서 “이것으로 어찌 족히 공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고, 마침내 조서를 내려 공을 兵部侍郞에 특별히 추증하셨다.
공은 젊어서 种放을 스승으로 모시며 學問하였고 文章을 짓되 議論에 뛰어났다. 兵書를 읽기 좋아하여 옛 兵法을 익히고서 선비가 文武를 겸비하지 못하면 大事를 맡기에 부족하다고 여겼다.
사방의 변방이 무사한 때에 자주 글을 올려 변방의 일을 진언하였는데 20여 년 뒤에 趙元昊河西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契丹이 무리를 이끌고 맹약을 어겨 세 변방에 모두 警報가 있어 천하가 전쟁으로 피폐해졌다.
공이 이때에 정신을 소모하면서 주야로 곰곰이 생각하여 兵車陣圖刀楯 등속을 창작하니 모두 법도가 있었다.
천자께서 步卒 500명을 가지고 공의 병법대로 하여 뜰에서 시험해보고서 쓸 만하다고 여겼으나 세상에서 그 刀楯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다.
내가 일찍이 황명을 받들고 河東에 나가서 邊將 王吉을 만나보니 그가 “元昊兎毛川에서 출병하여 나에게 패배하게 된 것은 楊公을 사용해서이다.”라고 말하였으니 대개 세상에서 일찍이 공의 兵法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공은 평소 강직하여 마음이 맞는 사람이 적었고 비판하는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으므로 공의 진언을 다 쓸 수는 없었다.
夏竦陝西에서 經略使로 있을 때 土兵을 늘려 배치할 것을 청하자, 공은 “하송이 內地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적군을 쳐부술 계획은 세우지도 않고 앉아서 군사를 늘릴 것을 청하니
이는 패전할 것을 우려한 것으로, 그렇게 되면 군사가 적은 것을 핑계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夏竦은 다시 공이 不忠하게도 계획을 훼방한다고 論奏하였는데 공이 차마 말로 그를 헐뜯을 수가 없었다.
그 뒤 三路의 농민들 가운데 장성한 자들이 다 얼굴에 刺字하고 병사가 되자 공이 다시 “군대는 정예화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지 수가 많은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니 수가 많아도 훈련되지 못하면 일사불란하지 않아 패배하기 쉽고 나라를 곤경에 빠뜨리고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將相大臣 이하로 논의하는 자들이 다 군대의 수를 늘리는 데 힘썼는데 오직 공의 논의만이 이와 같았다.
劉平의 군대가 패하자 元昊延州를 포위하여 매우 다급하였는데도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다. 공이 河中에 있으면서 결국 거짓으로 문서를 만들어 延州에 달려가 고하니 구원병 10만 명이 이르렀다.
이어 주변의 郡縣에 명하여 사료와 양식, 기물들을 병사 수만큼 조달하고서 기다렸는데 얼마 뒤에 元昊 역시 포위를 풀고 떠났다.
뒤에 공이 幷州를 지키게 되자 바로 공에게 조서를 내려 幷代麟府路經略安撫招討等使 兼兵馬都部署로 삼았는데
공이 칙서를 잡고서 휘하의 여러 관리들에게 고하기를, “천자께서 나를 쓰시는구나, 그러나 그 일을 맡았으면 반드시 그 성과를 도모해야 하고 그 성과를 내도록 하려면 반드시 올바른 방법을 다하여야 한다.”라고 하고,
이어 여섯 가지 일을 열거하면서 청하기를, “신의 말을 쓰실 수 있다면 황명을 받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만둘 것입니다.”라고 하니 조정에서 난감해하면서 公論이 그치지 않았다. 이에 죄를 받아 知邢州로 옮기니 공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다 이와 같았다.
공이 일찍이 御史가 되었는데 章獻太后의 조카 劉從德團練使가 되어 졸하자
門人, 親戚, 노비들 가운데 劉從德으로 인해 官爵을 배수받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馬季良劉氏의 사위로 龍圖閣直學士가 되었다.
공이 글을 올려 “나라의 呂太后呂祿呂産을 왕으로 봉하여 자신의 종족을 강성하게 하려고 하였다가 도리어 종족을 패망시켰고,
나라의 武三思楊國忠이 받은 재앙은 그 일신에만 그치지 않고 거의 당나라를 멸망시킬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라고 하니 태후가 크게 노하여 監舒州酒稅로 폄적되었다.
두 해 지나 다시 부름을 받아 御史가 되자 정사를 논함이 더욱 凱切하였다.
공은 大中祥符 元年(1008)에 進士及第하고서 글을 올려 정사를 논하니 眞宗이 기특하게 여긴지라 불러 시험 보였는데 나아가지 않자 著作佐郞에 배수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工部侍郞에 이르렀고
天章閣待制 龍圖閣樞密直學士가 되어 마침내 翰林院侍講이 되었다. 일찍이 審刑院詳議官, 知淮陽江陰軍, 三司度支判官,
知御史雜事, 判吏部流內銓, 三司度支副使, 河北河東都轉運使, 知河中府杭州五州가 되어 부임하는 곳마다 모두 훌륭한 치적이 있었다.
공은 사람됨이 廉潔하고 剛直하여 굽히는 일이 적고 범하기가 어려웠으나 인자한 마음으로 남을 사랑함이 포용할 수 있는 바가 있는 점에서는 사람들이 공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았다.
공은 次公이다. 曾祖이고 祖父이다. 부친은 守慶이니 初娶張氏이고 다시 李氏에게 장가들었고 또 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太原郡君이다.
여섯 손자는 景略, 景亮, 景謨, 景道, 景直, 景彥이다. 공이 졸한 이듬해 가을에 그 아들 이 공의 상여를 모시고 河南으로 돌아갔고,
또 이듬해 2월 17일에 洛陽縣 宣武管 平洛鄕先塋에 안장하였다.
공은 文集 10兵書 15이 있으니 그 글을 읽어보면 공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시종의 절개를 살펴보면 공의 마음을 알 수 있으니 아, 충성스럽다고 이를 만하다.
나는 諫官으로 있을 때 일찍이 공과 조정에서 논쟁하던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공의 장례에 미쳐 그 아들이 공의 을 다른 이에게 부탁하지 않고 나에게 부탁한 것은 어쩌면 내 말을 믿을 만하다고 여겨서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지은 이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은 다음과 같다. 유구하구나 楊氏는 그 시조가 유래가 있으니 赤泉侯의 공훈이 나라와 함께 일어났도다
楊震太尉를 지내니 4대가 재상을 지냈고 楊於陵正直하여 나라에서 僕射를 지냈네 楊師復大理寺卿을 지내고 楊振左拾遺를 지냈는지라 文章이 성대하여 훌륭한 지위를 얻었더니 그 뒤로는 더욱 쇠미해졌네
中州에서 피란을 가게 됨에 曾祖가 처음 남쪽으로 내려갔고 祖父僞邦에서 벼슬하여 烏江을 다스리게 되었네 다시 南粤로 가게 되니 부친이 이에 태어나셨도다
현달하기도 하고 불우하기도 하다가 聖明하신 天子에 이르러 發身하였네 司馬를 지낸 부친에 이르러 비로소 坊州에서 벼슬하였다가 마침내 中部에 터를 잡으니 道德이 넉넉하였도다
司馬의 네 아들 가운데 공만이 능히 창대하였으니 다만 창대할 뿐만 아니라 장차 또 길이 전할 것이로다
대대로 벼슬한 가문 가운데 누가 譜系가 없으리오마는 쇠미해져 끊겨버리기도 하고 그 순서를 잃어버리기도 하니 끊기지도 않고 잃어버리지도 않음은 대대로 훌륭한 후손 있어서라네
뉘라서 양씨의 世系처럼 오래될수록 번성하였겠는가 조상의 次序 분명히 전해지고 昭穆이 정연하게 이어왔으니 공은 여기에 돌아오셔서 천만 년 편히 쉬소서


역주
역주1 翰林侍讀學士右諫議大夫楊公墓誌銘 : 이 글은 歐陽脩가 皇祐 3년(1051)에 지은 것이다. 楊公(980~1049)은 이름이 偕이고 字가 次公으로, 坊州 中部 사람이다. ≪兵書≫ 19권, ≪遺集≫ 10권이 있다. ≪宋史≫에 傳記가 있다.
역주2 疾革 : 병세가 위중해졌다는 말로, ‘革’은 ‘急’과 같다.
역주3 臣子 雖死不敢忘其君父者 : 臣子는 신하와 자식을 가리키고, 君父는 君王과 父親을 가리킨다.
역주4 垂閉之口 : 점점 죽어가는 사람의 입을 가리킨다.
역주5 种放 : 字는 明逸이고 號는 雲溪醉侯로, 河南 洛陽 사람이다. 말수가 적고 학문을 좋아하여 7세에 문장에 능하였다. 終南山 東明峰에 은거하였다. 저서에 ≪蒙書≫ 10권, ≪嗣禹說≫, ≪表孟子≫ 上下篇, ≪太一祠錄≫ 등이 있다. 졸한 뒤에 工部尙書를 추증하였다. ≪宋史≫에 傳記가 있다.
역주6 三邊 : 변방의 국경 지대로, 漢代에 幽州, 幷州, 凉州 세 州가 변경에 있어 三邊이라고 일컬었다.
역주7 創作兵車陣圖刀楯之屬 : 刀楯은 兵器로, ‘楯’은 ‘盾’과 같다. ≪宋史≫ 〈楊偕傳〉에, “楊偕가 幷州에 있을 적에 일찍이 八陣圖, 進神盾과 劈陣刀를 논하였는데, 그 진법은 밖은 수레로 둘러싸고 안은 방패를 나란히 늘어놓는 것이었다.”라고 하였다.
역주8 夏竦經略陝西 : 康定 元年(1040) 正月에 夏竦이 陝西經略安撫使가 되고 范仲淹이 陝西都轉運使가 되어 西夏에 대한 대비를 강화하였다.
역주9 請益置土兵……蓋虞敗事 : ≪宋史≫ 〈楊偕傳〉에, “夏竦이 陝西經略使가 되어 土兵을 늘려 배치하여 戍兵과 교대하고, 수병은 돌려보내 京師를 지키게 할 것을 청하였다. 그러자 楊偕가 말하기를 ‘지금 이때 關中에 財用이 부족한데 다시 土兵을 늘리게 되면 단지 국가의 재정만 소모시킬 것입니다. 지금 적군의 형세가 한창 強盛해져 있으니 비록 土兵을 크게 늘리더라도 戍兵을 줄여 동쪽으로 돌려보낼 수 없습니다. 이는 단지 夏竦이 일이 잘못될 경우를 두려워해서 병사가 적다는 핑계를 대고자 해서입니다.’ 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10 壯者咸墨爲兵 : 얼굴에 글자를 새기고 먹을 칠해서 병사로 삼았다는 말이다. 여기서는 불러 모집하여 군대로 삼은 것을 가리킨다. ≪宋史≫ 〈楊偕傳〉에, “三路의 백성들을 대거 차출하고 모집하여 군대로 삼을 것을 명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11 劉平兵敗 元昊圍延州甚急 : 劉平은 字가 士衡으로 開封 사람이다. 康定 元年(1040)에 유평이 鄜延路副總管 兼環慶鄜延路同安撫使가 되었는데 마침 元昊가 延州를 침략하자 范雍의 부름에 호응하여 石元孫과 군대를 합쳐 적을 맞이하여 힘껏 싸우다가 적군에게 잡혀 興州에서 죽었다. 그런데 마침 눈이 내려 적군이 물러가니 延州가 함락되지 않을 수 있었다. 延州는 치소가 지금의 陝西省 延安에 있었다.
역주12 邢州 : 치소는 지금의 河北省 邢臺에 있었다.
역주13 章獻太后兄子劉從德……爲龍圖閣直學士 : 劉美는 두 아들이 있었으니 從德과 從廣이었다. 또 劉美의 누이동생이 眞宗의 皇后가 되었는데 仁宗이 즉위하자 皇后를 높여 皇太后로 삼았고 劉從德은 外戚이라는 이유로 蔡州團練使에서 풀려났다. 그렇지만 나이가 어리고 무능하였으며 얼마 있다가 병이 들어서 소환되어 돌아오는 길에 죽으니 겨우 24세였다. 劉從德에게 保寧軍節度使를 추증하고 榮國公에 봉하였으며 康懷라는 시호를 내렸다. 태후는 슬픔이 깊었던 나머지 內外의 姻戚, 門人 및 僮僕 수십 명을 錄用하였고 劉從德의 妹弟 馬士良, 외숙 錢惟演의 아들 暖과 蒙正 두 사람에게 두 官階씩 높여주었다. 御史 曹修古, 郭勸이 楊偕와 함께 上疏하여 반대하자 모두 이 일로 貶謫되었다. ≪宋史≫ 〈劉美傳〉, 〈劉從德傳〉 참조.
역주14 言漢呂太后王祿産……而反以覆宗 : 漢 高祖의 皇后 呂氏(雉)는 高祖를 도와 천하를 안정시켰는데 惠帝가 즉위하자 皇后를 높여 皇太后라 하였다. 惠帝가 崩御하자 太子가 즉위하였는데 나이가 어려 太后가 조정에 나아가 政事를 돌보았다. 이에 조카 呂臺, 呂産, 呂祿, 呂臺의 아들 呂通 네 사람을 세워 왕으로 삼고 呂氏 여섯 사람을 列侯에 봉하였으며 그 뒤로도 同族들을 도와 관직을 제수한 일이 많았다. 그렇지만 呂后가 세상을 떠나자 呂産, 呂祿이 죽임을 당하였고 呂氏의 남녀들은 노소를 가리지 않고 모두 斬刑에 처하였다. ≪史記≫ 〈呂后本紀〉, ≪漢書≫ 〈高后紀〉 참조.
역주15 貶監舒州酒稅 : 舒州는 치소가 지금의 安徽省 懷寧에 있었다. 酒稅는 酒稅官을 가리킨다.
역주16 公 字次公 : 本集에는 ‘公諱偕 字次公’으로 되어 있다.
역주17 初娶張氏 又娶李氏 : 本集에는 이 8字가 없다.
역주18 六孫 景略景亮景謨景道景直景彥 : 本集에는 이 14字가 없다.
역주19 脩爲諫官時 嘗與公爭議于朝者 : ≪宋史≫ 〈楊偕傳〉에, “元昊가 和親하기를 청하면서 臣下를 칭하지 않았는데, 楊偕가 이르기를 ‘여러 해 군대를 출동하여 國力이 날로 위축되어 가니 일단 잠시 화친을 허락하고 천천히 誅滅할 계책을 세워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諫官 王秦, 歐陽脩, 蔡襄이 여러 차례 章奏를 통해 탄핵하여 아뢰기를 ‘楊偕가 從官이라는 직책에 있으면서 국가를 위해 外敵을 토벌할 것은 생각하지 않고 元昊가 臣下를 자처하지 않는 요청을 돕고 있으니 誅罰해야 마땅할 죄입니다. 그런데 폐하께서는 차마 誅戮하지 못하시고 있으니 그를 내치셔야지 京師에 머물러 있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였다. 황제가 이 章奏를 楊偕에게 보여주니 楊偕가 불안해하면서 비로소 越州知事로 나가기를 청하였는데 도중에 杭州로 바뀌었다.”라고 하였다. 杭州로 바뀌어 외직에 내쳐진 일을 본문에 수록하지 않은 것은 아마도 말하는 데 구애됨이 있어서였을 것이다.
역주20 有來其始 : 本集에는 ‘其來有始’로 되어 있다.
역주21 赤泉侯功 : 赤泉侯는 西漢의 楊喜로, 華陰(지금의 陝西省 지역) 사람이다. 漢 高祖의 郞中騎將이 되어 高祖를 따라 杜에서 군대를 일으켰다. 韓信의 휘하에 있다가 뒤에 灌嬰을 따라가 함께 項籍을 斬首하였다. 赤泉侯에 봉해졌고 죽은 뒤에 嚴이라는 諡號가 내려졌다.
역주22 震官太尉 : 楊震은 楊喜의 8世孫으로 학문을 좋아하며 淸廉하고 明晳하였다. 나이 50세에 처음 벼슬길에 나아가 延光 2년(123)에 太尉가 되었다. 그 뒤에 박해를 박아 鴆毒을 마시고 죽으니 향년 70여 세였다. ≪後漢書≫에 傳記가 있다.
역주23 於陵正直 僕射于唐 : 楊於陵은 字가 達夫로, 18세에 進士試에 급제하였고 戶部尙書 東都留守 左僕射에 올랐으며 弘農郡公에 봉해졌다. 節操가 嚴峻하고 明潔하여 시종 그 正道를 잃지 않았다. 죽은 뒤에 貞孝라는 諡號가 내려졌다. ≪新唐書≫와 ≪舊唐書≫에 傳記가 있다.
역주24 中州 : 옛 중국의 九州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河南省 일대를 가리킨다. 九州의 중앙에 있으므로 이러한 이름을 얻었는데 豫州라고도 부른다.
역주25 祖屈僞邦 令于烏江 : 조부가 五代十國시대에 중국 南方에 세워진 정권에 벼슬하여 烏江縣令이 된 것을 말한다. 僞邦이라고 한 것은 宋이 멸망시킨 나라이므로 정통성이 결여되었다고 보아서 그렇게 말한 것이다. 烏江은 지금의 安徽省 和縣에 있다.
역주26 在考司馬……遂家中部 : ≪宋史≫ 〈楊偕傳〉에 “부친 守慶은 廣男 劉氏에게 벼슬하였다가 宋朝에 귀의하여 坊州司馬가 되고는 그곳에서 世居하게 되었다.”라고 하였다.
역주27 昭穆綿聯 : 古代 宗法制度에서 宗廟나 墓地에서 선조들을 排列할 때 始祖를 가운데 모셔두고, 2世, 4世, 6世 등을 시조의 왼편에 자리하는데 이를 昭라고 하고, 3世, 5世, 7世 등을 시조의 오른편에 자리하는데 이를 穆이라고 한다. 이를 가지고 宗族 내부의 長幼, 親疏, 遠近을 분별하는데 이를 昭穆이라고 한다. 후대에는 보통 가문의 世系 순서를 가리키게 되었다.
周九廟圖:太祖를 중심을 왼쪽이 ‘昭’이고, 오른쪽이 ‘穆’임周九廟圖:太祖를 중심을 왼쪽이 ‘昭’이고, 오른쪽이 ‘穆’임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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