慶曆八年春에 翰林侍讀學士右諫議大夫楊公이 年六十有九에 告老하고
卽以工部侍郞으로 致仕하야 歸於常州라 其行也에 天子召見宴勞하고 賜以不拜어늘
公卿大夫가 咸出餞於東門하야 瞻望咨嗟하야 相與言曰 楊公歸哉인저 於公에 計爲可榮이나 於國家에 計爲可惜이로다하다
其明年九月十三日
에 公
하야 出其兵論一篇
하야 示其子忱慥而授以言曰 臣聞
요 天下之至恩
은 大義也
라
今臣偕不幸
하되 猶以
로 言天下莫大之憂爲陛下無窮之慮者其事有五
하야 以畢臣志
하니 死無所恨
이라
惟陛下는 用臣言이요 不必哀臣死也하소서하고 言訖而卒하니 不及其私러라
忱慥以其語幷其兵論以聞하니 天子震悼하야 顧有司問可以寵公者한대
有司擧故事以對하니 天子曰 此何足以慰吾思리오하고 乃詔特贈公兵部侍郞이러라
公少師事
學問
하고 爲文章長於議論
이라 好讀兵書
하야 知古兵法
하야 以謂士不兼文武
면 不足任大事
러라
當四方無事時
하야 數上書言邊事
러니 後二十餘年
에 元昊叛河西
하고 契丹擧衆違約
하야 皆警
에 天下弊於兵
이라
公於此時
에 耗精疲神
하야 日夜思慮
하야 하니 皆有法
이라
天子以步卒五百으로 如公之法하야 試於庭하야 以爲可用이로되 而世多非其刀楯이러라
脩嘗奉使河東하야 得邊將王吉하니 言元昊出兎毛川하야 爲吉所敗者는 用楊公楯也라하니 蓋世未嘗用其術爾라
然公素剛少合하고 而議者不一이라 故不得盡用其言이라
할새 請益置土兵
한대 公言竦據內地
하야 無破賊之謀
하고 而坐請益兵
하니
라 則欲以兵少爲解
라하니 竦復論公不忠沮計
어늘 公不能忍以語詆之
러라
其後三路農民
이 이어늘 公又言兵在精
이요 不在衆
이니 衆而不練
이면 則不整而易敗
하고 困國而難供
이라하다
時自將相大臣으로 議者皆務多兵이어늘 獨公之論이 能如此러라
이로되 而救兵不至
라 公在河中
하야 乃僞爲書馳告延州
하니 救兵十萬至矣
라
因命旁郡縣具芻糧什器如其數以俟러니 已而元昊亦解去러라
後公守幷州에 卽詔公爲幷代麟府路經略安撫招討等使兼兵馬都部署한대
公執勅하야 告其群吏曰 天子用我矣라 然任其事면 必圖其效요 欲責其效인댄 必盡其方이라하고
乃列六事以請曰 能用臣言則受命
이요 不然則已
라하니 朝廷難之
하야 公論不已
라 坐是
하야 徙知
하니 公志之不就
가 皆此類也
라
公嘗爲御史러니 章獻太后兄子劉從德이 爲團練使以卒한대
唐武三思楊國忠之禍
는 不獨其身
이요 幾亡其國
이라하니 太后大怒
하야 라
公祥符元年에 進士及第하야 以上書言事하니 眞宗奇之라 召試한대 不赴어늘 拜著作佐郞하고 累官至工部侍郞하고
爲天章閣待制 龍圖閣樞密直學士하야 遂侍講于翰林이러라 嘗爲審刑院詳議官 知淮陽江陰軍 三司度支判官
知御史雜事 判吏部流內銓 三司度支副使 河北河東都轉運使 知河中府陝幷邢滄杭五州하야 所至皆有能績이러라
爲人廉潔剛直하야 少屈而難犯이로되 其仁心愛物이 至其有所能容하얀 人多所不及也러라
이라 曾祖諱偉
요 祖諱某
라 父諱守慶
이니 하고 又娶王氏
하니 太原郡君
이라
이라 公卒之明年秋
에 其子忱
이 以其喪歸于河南
하고
又明年二月十七日에 葬于洛陽縣宣武管平洛鄕之先塋이라
公有文集十卷과 兵書十五卷하니 讀其書에 可以見公之志요 考其始終之節에 可以知公之心이니 嗚呼라 可謂忠矣로다
로되 而且未嘗識公也
러니 及其葬也
하야 其子不以銘屬於他人而以屬脩者
는 豈以修言爲可信也歟
아 然則銘之其可不信
가
四世以公
이요 이라 師復理卿
이요 振左拾遺
라 文蔚獲嘉
러니 其後益衰
라
避亂
에 曾祖始南
하고 이라 又適南粤
하니 皇考是生
이라
司馬四子에 唯公克大하니 非徒大之라 將又長之로다
世有官族이 孰無繫譜리오마는 或絶於微하고 或亡其序하니 不絶不亡은 由屢有人이라
誰如楊世 愈久而蕃
이리오 次第弗迷
하고 하니 公其歸此
하야 安千萬年
이어다
慶曆 8년(1048) 봄에 翰林侍讀學士 右諫議大夫 楊公이 69세의 나이에 연로함을 아뢰고
바로 工部侍郞으로 致仕하고서 常州에 돌아갔다. 공이 떠날 때 天子께서 召見하고 노고를 위로하시고 跪拜하는 예를 하지 않도록 은택을 내리셨다.
公卿과 大夫들이 다 東門에 나와 餞別하면서 우러러 바라보고 탄식하여 서로 말하기를 “楊公께서 돌아가시는구나. 공에게는 영화스러운 계획이 되겠으나 국가에는 안타까울 만한 계획이로다.”라고 하였다.
그 이듬해 9월 13일에 공이 병이 위독해지자 자신이 지은 〈兵論〉 한 편을 꺼내어 그 아들 忱과 慥에게 보여주고 건네주면서 말하니, 그 말에 “신이 듣건대 臣子는 비록 죽더라도 감히 그 君父를 잊어서는 안 되고 天下의 지극한 은혜는 大義라고 하였습니다.
지금 신 楊偕는 불행히도 죽게 생겼으니, 오히려 죽어가는 사람의 입으로 천하의 더할 나위 없는 우환 중에 폐하의 끝없는 우려가 되는 일 다섯 가지를 말씀드려 신의 뜻을 다 펴니 죽어도 한스러운 바가 없습니다.
오직 폐하께서는 신의 말을 쓰시고 굳이 신의 죽음을 서글퍼하지 마소서.”라고 하고 말을 마치고 졸하였을 뿐 자기의 私事를 언급하지 않았다.
忱과 慥가 공의 유언을 그 〈兵論〉과 함께 아뢰니 천자께서 매우 슬퍼하시면서 有司를 돌아보고 공에게 은총을 내릴 만한 방법을 묻자,
유사가 故事를 들어 대답하니, 천자께서 “이것으로 어찌 족히 공에 대한 나의 그리움을 위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시고, 마침내 조서를 내려 공을 兵部侍郞에 특별히 추증하셨다.
공은 젊어서 种放을 스승으로 모시며 學問하였고 文章을 짓되 議論에 뛰어났다. 兵書를 읽기 좋아하여 옛 兵法을 익히고서 선비가 文武를 겸비하지 못하면 大事를 맡기에 부족하다고 여겼다.
사방의 변방이 무사한 때에 자주 글을 올려 변방의 일을 진언하였는데 20여 년 뒤에 趙元昊가 河西에서 반란을 일으키고 契丹이 무리를 이끌고 맹약을 어겨 세 변방에 모두 警報가 있어 천하가 전쟁으로 피폐해졌다.
공이 이때에 정신을 소모하면서 주야로 곰곰이 생각하여 兵車陣圖와 刀楯 등속을 창작하니 모두 법도가 있었다.
천자께서 步卒 500명을 가지고 공의 병법대로 하여 뜰에서 시험해보고서 쓸 만하다고 여겼으나 세상에서 그 刀楯을 비판하는 이들이 많았다.
내가 일찍이 황명을 받들고 河東에 나가서 邊將 王吉을 만나보니 그가 “元昊가 兎毛川에서 출병하여 나에게 패배하게 된 것은 楊公의 楯을 사용해서이다.”라고 말하였으니 대개 세상에서 일찍이 공의 兵法을 사용한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공은 평소 강직하여 마음이 맞는 사람이 적었고 비판하는 자가 한두 명이 아니었으므로 공의 진언을 다 쓸 수는 없었다.
夏竦이 陝西에서 經略使로 있을 때 土兵을 늘려 배치할 것을 청하자, 공은 “하송이 內地에 웅크리고 있으면서 적군을 쳐부술 계획은 세우지도 않고 앉아서 군사를 늘릴 것을 청하니
이는 패전할 것을 우려한 것으로, 그렇게 되면 군사가 적은 것을 핑계로 삼으려고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夏竦은 다시 공이 不忠하게도 계획을 훼방한다고 論奏하였는데 공이 차마 말로 그를 헐뜯을 수가 없었다.
그 뒤 三路의 농민들 가운데 장성한 자들이 다 얼굴에 刺字하고 병사가 되자 공이 다시 “군대는 정예화하는 데 달려 있는 것이지 수가 많은 데 달려 있는 것이 아니니 수가 많아도 훈련되지 못하면 일사불란하지 않아 패배하기 쉽고 나라를 곤경에 빠뜨리고 임무를 수행하기 어려울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將相과 大臣 이하로 논의하는 자들이 다 군대의 수를 늘리는 데 힘썼는데 오직 공의 논의만이 이와 같았다.
劉平의 군대가 패하자 元昊가 延州를 포위하여 매우 다급하였는데도 구원병이 이르지 않았다. 공이 河中에 있으면서 결국 거짓으로 문서를 만들어 延州에 달려가 고하니 구원병 10만 명이 이르렀다.
이어 주변의 郡縣에 명하여 사료와 양식, 기물들을 병사 수만큼 조달하고서 기다렸는데 얼마 뒤에 元昊 역시 포위를 풀고 떠났다.
뒤에 공이 幷州를 지키게 되자 바로 공에게 조서를 내려 幷代麟府路經略安撫招討等使 兼兵馬都部署로 삼았는데
공이 칙서를 잡고서 휘하의 여러 관리들에게 고하기를, “천자께서 나를 쓰시는구나, 그러나 그 일을 맡았으면 반드시 그 성과를 도모해야 하고 그 성과를 내도록 하려면 반드시 올바른 방법을 다하여야 한다.”라고 하고,
이어 여섯 가지 일을 열거하면서 청하기를, “신의 말을 쓰실 수 있다면 황명을 받들 것이고 그렇지 않다면 그만둘 것입니다.”라고 하니 조정에서 난감해하면서 公論이 그치지 않았다. 이에 죄를 받아 知邢州로 옮기니 공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이 다 이와 같았다.
공이 일찍이 御史가 되었는데 章獻太后의 조카 劉從德이 團練使가 되어 졸하자
그 門人, 親戚, 노비들 가운데 劉從德으로 인해 官爵을 배수받은 자가 수십 명이었고 馬季良은 劉氏의 사위로 龍圖閣直學士가 되었다.
공이 글을 올려 “漢나라의 呂太后가 呂祿과 呂産을 왕으로 봉하여 자신의 종족을 강성하게 하려고 하였다가 도리어 종족을 패망시켰고,
唐나라의 武三思와 楊國忠이 받은 재앙은 그 일신에만 그치지 않고 거의 당나라를 멸망시킬 지경에까지 이르렀습니다.”라고 하니 태후가 크게 노하여 監舒州酒稅로 폄적되었다.
두 해 지나 다시 부름을 받아 御史가 되자 정사를 논함이 더욱 凱切하였다.
공은 大中祥符 元年(1008)에 進士에 及第하고서 글을 올려 정사를 논하니 眞宗이 기특하게 여긴지라 불러 시험 보였는데 나아가지 않자 著作佐郞에 배수하고 여러 관직을 거쳐 工部侍郞에 이르렀고
天章閣待制 龍圖閣樞密直學士가 되어 마침내 翰林院侍講이 되었다. 일찍이 審刑院詳議官, 知淮陽江陰軍, 三司度支判官,
知御史雜事, 判吏部流內銓, 三司度支副使, 河北河東都轉運使, 知河中府‧陝‧幷‧邢‧滄‧杭州五州가 되어 부임하는 곳마다 모두 훌륭한 치적이 있었다.
공은 사람됨이 廉潔하고 剛直하여 굽히는 일이 적고 범하기가 어려웠으나 인자한 마음으로 남을 사랑함이 포용할 수 있는 바가 있는 점에서는 사람들이 공에게 미치지 못하는 점이 많았다.
공은 字가 次公이다. 曾祖는 諱가 偉이고 祖父는 諱가 某이다. 부친은 諱가 守慶이니 初娶는 張氏이고 다시 李氏에게 장가들었고 또 王氏에게 장가들었으니 太原郡君이다.
여섯 손자는 景略, 景亮, 景謨, 景道, 景直, 景彥이다. 공이 졸한 이듬해 가을에 그 아들 忱이 공의 상여를 모시고 河南으로 돌아갔고,
또 이듬해 2월 17일에 洛陽縣 宣武管 平洛鄕의 先塋에 안장하였다.
공은 文集 10卷과 兵書 15卷이 있으니 그 글을 읽어보면 공의 뜻을 알 수 있고 그 시종의 절개를 살펴보면 공의 마음을 알 수 있으니 아, 충성스럽다고 이를 만하다.
나는 諫官으로 있을 때 일찍이 공과 조정에서 논쟁하던 자였음에도 불구하고 공을 알지 못했다. 그런데 공의 장례에 미쳐 그 아들이 공의 銘을 다른 이에게 부탁하지 않고 나에게 부탁한 것은 어쩌면 내 말을 믿을 만하다고 여겨서가 아니겠는가. 그렇다면 내가 지은 銘이 믿을 만하지 않겠는가.
銘은 다음과 같다. 유구하구나 楊氏는 그 시조가 유래가 있으니 赤泉侯의 공훈이 漢나라와 함께 일어났도다
楊震이 太尉를 지내니 4대가 재상을 지냈고 楊於陵이 正直하여 唐나라에서 僕射를 지냈네 楊師復이 大理寺卿을 지내고 楊振이 左拾遺를 지냈는지라 文章이 성대하여 훌륭한 지위를 얻었더니 그 뒤로는 더욱 쇠미해졌네
中州에서 피란을 가게 됨에 曾祖가 처음 남쪽으로 내려갔고 祖父가 僞邦에서 벼슬하여 烏江을 다스리게 되었네 다시 南粤로 가게 되니 부친이 이에 태어나셨도다
현달하기도 하고 불우하기도 하다가 聖明하신 天子에 이르러 發身하였네 司馬를 지낸 부친에 이르러 비로소 坊州에서 벼슬하였다가 마침내 中部에 터를 잡으니 道德이 넉넉하였도다
司馬의 네 아들 가운데 공만이 능히 창대하였으니 다만 창대할 뿐만 아니라 장차 또 길이 전할 것이로다
대대로 벼슬한 가문 가운데 누가 譜系가 없으리오마는 쇠미해져 끊겨버리기도 하고 그 순서를 잃어버리기도 하니 끊기지도 않고 잃어버리지도 않음은 대대로 훌륭한 후손 있어서라네
뉘라서 양씨의 世系처럼 오래될수록 번성하였겠는가 조상의 次序 분명히 전해지고 昭穆이 정연하게 이어왔으니 공은 여기에 돌아오셔서 천만 년 편히 쉬소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