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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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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錄此以見歐公爲文 其用意如此어늘 世之覽者不之知하고 其好訾之如彼
然而公之沒 且五百年矣로되 其知公而猶未盡其所欲訾公者 猶時時見之하니 予不能無慨云이라
言 天下之人識與不識 皆知師魯文學議論材能하니 則文學之長 議論之高 材能之美 不言可知라하되
又恐太略일새 故條析其事하야 再述于後 述其文則曰 簡而有法이라하니
此一句 惟春秋可當之 其他經非孔子自作文章이라 故雖有法而不簡也
脩於師魯之文不薄矣 而世之無識者 不考文之輕重하고 但責言之多少하야 云 師魯文章不合秪著一句道了
旣述其文하면 則又述其學하야 曰 通知古今이라하니 此語 若必求其可當者 惟孔孟也
旣述其學하면 則又述其論議하야 云 是是非非 務盡其道理하고 不苟止而妄隨라하니 亦非孟子不可當此語
使天下之人으로 盡知師魯材能이면 此三者 皆君子之極美 然在師魯 猶爲末事
其大節 乃篤於仁義하야 窮達禍福 不媿古人하니 其事不可徧擧 故擧其要者一兩事하야 以取信하노니
如上書論范公而自請同貶하고 臨死而語不及私 則平生忠義 可知也 其臨窮達禍福 不媿古人 又可知也
旣已具言其文其學其論議其材能其忠義하고 하고
又言其死後妻子困窮之狀하니 欲使後世知有如此人 以如此事廢死하고 至於妻子如此困窮하니
所以深痛死者하야 而切責當世君子致斯人之及此也
春秋之義 痛之益至 則其辭益深하니 是也 詩人之意 責之愈切이면 則其言愈緩하니 是也
不必號天叫屈然後 爲師魯稱寃也 故於其銘文 但云 藏之深하고 固之密하니 石可朽언정 銘不滅이라하니
意謂擧世無可告語 但深藏牢埋하니 此銘使其不朽 則後世必有知師魯者
其語愈緩하며 其意愈切하니 詩人之意也어늘 而世之無識者乃云 銘文不合不講德이요 不辯師魯以非罪라하다
蓋爲前言其窮達禍福 無媿古人하니 則必不犯法이온 況是讐人所告 故不必區區曲辯也
今止直言所坐 自然知非罪矣로되 添之無害 故勉徇議者添之
若作古文自師魯始及有大宋先達甚多하니 不敢斷自師魯始也
苟合于理 未必爲非 故不是此而非彼也
可以互見이니 不必重出也니라 하니 亦互見之也
誌云 師魯喜論兵이라하니 論兵 儒者末事 言喜無害 喜非嬉戲之戲 喜者 好也 君子固有所好矣
이라하니 豈是薄顔回乎 後生小子 未經師友하고 苟恣所見이면 豈足聽哉리오
便似孟郊詩하고作誌 便似樊文하니 慕其如此
故師魯之誌 用意特深而語簡하니 蓋爲師魯文簡而意深이요 又思平生作文 惟師魯一見 展卷疾讀하야 五行俱下 便曉人深處
因謂死者有知 必受此文이라 所以慰吾亡友爾 豈恤小子輩哉


07. 尹師魯墓誌를 논함
이를 수록하여, 歐公이 글을 지을 때 그 用意가 이와 같거늘 歐公의 글을 보는 세상 사람들이 歐公의 뜻을 알지 못하고 저렇게 헐뜯기 좋아함을 드러낸 것이다.
그렇지만 공이 세상을 떠난 지 5백 년이 되어가는데도 공을 안다면서도 오히려 공을 헐뜯으려는 마음을 다 충족하지 못한 자를 아직도 때때로 볼 수가 있으니 내가 개탄하지 않을 수가 없다.
내가 〈尹師魯墓誌〉에서 天下 사람 가운데 그를 아는 이나 모르는 이 모두 師魯文學議論材能을 알고 있으니 文學의 뛰어남과 議論의 고매함과 材能의 아름다움을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다고 말하였지만,
또 글이 너무 간략한 것을 염려하였기에 그 사례를 조목별로 나누어 뒤에 거듭 서술하였다. 師魯文章을 서술한 부분에서는 簡潔하면서도 法度가 있다고 하였으니,
이 한 孔子六經 가운데 오직 ≪春秋≫만이 부합할 수 있고, 다른 들은 공자가 직접 그 文章을 지은 것이 아니므로 비록 법도가 있다 하더라도 簡潔하지는 못한 것이다.
내가 師魯文章에 대해 박절하게 하지 않았는데도 알지 못하는 세상 사람들은 글의 輕重을 헤아리지 못하고 말의 분량만 놓고 따져서 師魯文章에 대해 이 한 만 말해서는 마땅하지 않다고 말한다.
師魯의 문장을 서술하고는 또 그 學問을 서술하여 “고금의 일을 환히 알았다.”라고 하였으니, 이 말에 만약 굳이 해당될 만한 이를 찾아본다면 오직 孔子, 孟子일 뿐이다.
師魯의 학문을 서술하고는 또 師魯論議를 서술하여 “是是非非道理를 모두 궁구하기를 힘쓰고서야 〈그만두었고〉 구차하게 議論을 그치고 함부로 동조하여 따르지 않았다.”라고 하였으니, 역시 孟子가 아니면 이 말에 해당될 수 없다.
師魯論議를 서술하고는 또 師魯材能을 서술하여, 師魯貶謫 내력을 갖추어 말하고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바로 師魯陝西에 있으면서 서쪽 변방의 일을 특히 깊이 알았으되 미처 시행해보지 못하고 趙元昊臣服하였고 師魯는 죄를 받았다.”라고 하였다.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師魯材能을 다 알게 한다면 이 세 가지(文學, 議論, 材能)는 모두 君子의 지극히 아름다운 점이지만, 師魯에게 있어서는 오히려 말단적인 일이다.
大節은 바로 仁義篤實하여 窮達禍福에 있어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으니 그 사례들은 일일이 들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 핵심적인 한두 가지 일을 들어 증거로 삼았으니,
이를테면 글을 올려 范公을 논하여 함께 폄적되기를 自請하고 죽음에 임하여 자기의 私事를 말하지 않은 데서 평생의 忠義를 알 수가 있고, 그가 窮達禍福에 임하여 옛사람에게 부끄럽지 않았음을 또 알 수가 있다.
이미 그 文章, 그 學問, 그 論議, 그 材能, 그 忠義를 말하고서, 마침내 또 그에게 원한을 품은 이가 감정을 품고 그를 論告한 일로 폄적되어 죽게 되었음을 말하였고,
또 그가 죽은 뒤 처자식들의 困窮한 상황을 말하였으니, 이와 같은 사람이 이와 같은 일로 버려져 죽고 처자식들까지 이와 같이 곤궁하게 된 일을 후세 사람들로 하여금 알게 하고자 한 것이다.
이는 죽은 이를 깊이 애통해하면서 당세의 군자들이 이 사람을 이 지경까지 내몬 것을 심히 책망한 것이다.
春秋≫의 의리는 애통함이 지극하면 지극할수록 그 言辭가 더욱 深切해지니 ‘子般하였다.’ 한 것이 이것이고, 〈≪詩經≫의〉 詩人의 뜻은 책망함이 절절하면 절절할수록 그 言辭가 더욱 완곡해지니 〈君子偕老〉편이 이것이다.
굳이 하늘에 부르짖고 억울함을 호소한 뒤에야 師魯를 위해 원통함을 풀어주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그 銘文에서 단지 ‘땅속 깊이 감추고 堅固하게 묻었으니 돌은 썩을 수 있을지언정 은 사라지지 않으리라.’라고 하였으니,
그 뜻은 온 세상에 이런 말을 해줄 만한 사람이 없기에 단지 땅속 깊이 감추고 견고하게 묻으니 이 이 만약 썩지 않는다면 후세에 반드시 師魯를 알 자가 있을 것이라고 여긴 것이다.
그 말이 더욱 완곡하며 그 뜻이 더욱 간절하니 詩人의 뜻인데 세상의 알지 못하는 자들은 도리어 “銘文師魯을 말하지 않아서는 안 되고 師魯가 죄가 없음을 변론하지 않았다.”라고 한다.
그러나 앞에서 그가 窮達禍福에 있어 옛사람에게 부끄러운 점이 없었다고 말하였으니 그가 반드시 법을 범하지 않은 것이다. 더구나 이 죄는 원한을 품은 사람이 誣告해서 받은 것이므로 굳이 구구하게 일일이 변명할 것이 없는 것이다.
지금 단지 죄에 연루된 곳을 곧바로 서술함에 자연스럽게 그의 죄가 아님을 알 수 있으나 말을 보태도 나쁠 것이 없었다. 그래서 비판하는 자들의 주장을 애써 따라 말을 보태준 것이다.
古文師魯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쓰는 일을 가지고 말한다면 앞에 穆脩, 鄭條先輩宋代先賢들이 매우 많으니 감히 師魯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단정할 수 없는 것이다.
偶儷의 문장은 이치에 부합하기만 하면 굳이 잘못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이쪽(古文)을 옳다 하고 저쪽(騈文)을 그르다고 하지 않은 것이다. 그런데 근래의 古文師魯에서부터 시작되었다고 말한다면 范公祭文에서 이미 이를 말하였다.
〈내 銘文과〉 상호 참조할 수 있으니 굳이 거듭 서술할 것이 없는 것이다. 皇甫湜의 〈韓文公墓誌〉와 李翶의 〈行狀〉이 반드시 같지는 않으니 또한 상호 참조할 수 있다.
墓誌에서 “師魯兵法 논하기를 좋아한다.[]”라고 하였는데, 병법을 논하는 일은 儒者의 지엽적인 일이나 좋아한다[]고 말해도 나쁠 것은 없다. 라는 것은 장난친다는 뜻인 嬉戲가 아니니, 라는 것은 좋아한다는[] 뜻이다. 君子는 본디 좋아하는 것이 있다.
孔子께서 顔回는 학문을 좋아한다[好學]고 말씀하셨으니 어찌 이것이 顔回를 가볍게 본 것이겠는가. 뒤에 태어난 小子師友를 통하지 않고 자기 의견을 맘대로 말한다면 어찌 족히 들을 게 있겠는가.
내가 보건대, 韓退之孟郊에게 준 聯句孟郊와 흡사하고 樊宗師에게 지어준 墓誌樊宗師의 문장과 흡사하였으니, 韓退之가 이와 같이 그들을 欽慕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師魯墓誌를 지을 때 用意가 특히 깊었고 글이 簡潔하였던 것이니 師魯가 문장이 簡潔하면서도 意思深長하였다. 또 생각해보건대, 내가 평소 글을 지으면 오직 師魯가 한 번 보고는 책을 펴고 빠르게 읽어 다섯 줄을 함께 내려가면서 저자의 깊은 의중을 바로 알았다.
이로 인해 죽은 師魯가 앎이 있다면 반드시 내 이 글을 받을 것이라고 생각하였던 것이다. 이것은 내가 세상을 떠난 벗을 위로하는 것일 뿐이니, 어찌 小子 무리들을 고려하겠는가.


역주
역주1 論尹師魯墓誌 : 尹師魯는 歐陽脩의 벗 尹洙로, 慶曆 6년(1046)에 졸하였다. 慶曆 8년(1048)에 歐陽脩는 그를 위해 〈尹師魯墓誌銘〉과 〈祭尹師魯文〉을 지었다. 다만 尹洙의 아내가 墓誌銘이 간략한 데 대해 불만을 품어, 孔嗣宗이 潁州까지 歐陽脩를 찾아가서 반 달을 머물면서 이에 대해 변론하여 歐陽脩는 글을 조금 보태어 고쳐주고 〈辨志〉를 지어 주었다. 당시 尹洙의 墓誌銘에 대한 가족들과 제자들의 불만을 알 수 있는바,
이 글은 歐陽脩가 자신이 글을 짓게 된 경위를 변론하여 尹氏 집안에 보내준 것으로, 尹洙의 墓誌銘을 지은 이듬해인 皇祐 원년(1049)에 지은 것이다. 결국 尹洙의 아들은 韓琦에게 별도로 墓表를 청하여 받았다.
역주2 孔子六經 : 儒家의 여섯 가지 經典, 즉 ≪詩經≫, ≪書經≫, ≪禮記≫, ≪樂記≫, ≪周易≫, ≪春秋≫이다. 전하는 말에는 孔子가 ≪詩經≫‧≪書經≫을 刪削하고 禮樂을 정리하며 ≪周易≫을 贊述하고 ≪春秋≫를 編修하였다고 한다.
역주3 備言師魯歷貶 : 〈尹師魯墓誌銘〉에서, 尹洙가 范仲淹을 변론한 일로 인해 郢州酒稅로 폄적되었다고 한 일을 말한다.
역주4 自兵興……師魯得罪 : 〈尹師魯墓誌銘〉에서, 尹洙가 葛懷敏에게 判官으로 천거되고 또 好水川에서의 패배로 인해 韓琦를 따라 죄를 얻어 濠州로 폄적되었다고 한 일을 말한다.
역주5 遂又言其爲仇人挾情論告以貶死 : 〈尹師魯墓誌銘〉에서, 尹洙가 渭州에 있을 때 將吏가 법을 위반한 일이 있어 그를 처형하려고 하다가 그 재주를 아까워하여 살려주었는데, 뒤에 이 將吏가 京師에 가서 尹洙가 公錢을 유용하였다고 고발하여 尹洙가 죄를 받았다고 한 일을 말한다.
역주6 子般卒 : ≪春秋≫ 莊公 32년에 “겨울 10월 기미일에 子般이 卒하였다.”라고 하였는데, 이에 대해 杜預는 “子般은 莊公의 太子인데 先君을 아직 장사 지내지 않았으므로 爵位를 말하지 않은 것이다. 죽였다[殺]고 쓰지 않은 것은 諱한 것이다.”라고 하였다.
역주7 君子偕老 : ≪詩經≫ 〈鄘風〉의 편명이다. 이 시에서는 君子인 사람은 결혼하고부터 백발이 될 때까지 함께 늙어가므로 아름다운 옷을 입고 아름다운 용모를 꾸미면서 서로 좋아하는 것인데, 宣姜은 단지 남을 놀라게 하는 미모와 화려한 치장은 갖추었으나 君子의 덕이 없었으므로 그녀를 권면하고 책망한 것이다. 朱熹는 ≪詩集傳≫에서 呂東萊의 評을 인용하여 “말이 더욱 완곡하면서도 뜻이 더욱 깊다.[辭益婉而意益深矣]”라고 하였다.
역주8 前有穆脩鄭條輩 : 穆脩(979~1032)는 字가 伯長으로, 鄆州 사람이다. 大中祥符 2년(1009) 進士가 되어 潁州文學參軍 등을 지냈다. 그는 柳開를 계승하여 古文을 제창하면서 韓愈와 柳宗元의 문집 수백 부를 京師에서 印出하였는바, 宋代 古文運動의 선구자였다. 陳摶에게 ≪周易≫을 배워 李之才에게 전수하였는데 李之才는 邵雍에게 전수하여 宋代 理學의 선도자이기도 하였다. ≪穆參軍集≫ 3권이 있다.
鄭條는 蘇州 사람으로, 어느 곳에서는 蜀人이라 하기도 하며 金斗先生이라 自號하였다. 天聖 8년(1030)에 進士가 되었다. ≪金斗集≫이 있는데 失傳되었다.
역주9 偶儷之文 : 騈儷文을 가리킨다. 對偶와 典故를 講究하여 文詞가 화려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한 것이다. 宋初에 騈儷文의 작자들이 대부분 형식만을 추구하고 내용을 소홀하게 여겨 식견 있는 선비들이 천박하게 여겼다.
역주10 若謂近年古文……已言之矣 : 范仲淹은 〈祭尹師魯舍人文〉에서 윤사로가 騈儷文이 유행했던 당시 古文에 뜻을 두었다고 하였다.
역주11 皇甫湜韓文公墓誌……不必同 : 皇甫湜과 李翶는 모두 唐代의 古文家로 韓愈에게 배웠는데 창작 성과는 韓愈만 못하였다.
역주12 孔子言回也好學 : ≪論語≫ 〈雍也〉에 “魯 哀公이 孔子에게 학문을 좋아하는 제자가 누구인지 물었다. 이때 공자는 ‘顔回라는 제자가 학문을 좋아하여 노여움을 옮기지 않고 허물을 거듭 범하지 않더니, 불행히도 단명하여 죽었습니다. 지금은 없으니 학문을 좋아하는 이가 있다는 말을 듣지 못했습니다.’ 하였다.”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13 脩見韓退之與孟郊聯句 : 韓退之는 韓愈이다. 孟郊는 唐代 詩人으로 字가 東野인데 젊은 시절 嵩山에 은거하였다가 쉰 살이 거의 다 되어서야 비로소 進士가 되었는데 韓愈와 교분이 깊었다. 그의 詩는 자신의 신세를 상심하여 寒苦한 音調가 많았고 詩語가 俗韻을 꺼리고 奇異함을 좋아하여 瘦勁함을 추구하였다.
聯句는 시를 읊을 때 사람들이 각각 한 句나 몇 句씩 돌아가면서 지어서 다 합하여 하나의 시편을 이루는 것인데 漢 武帝와 신하들이 〈栢梁詩〉를 지은 것이 그 시초이다.
역주14 樊宗師 : 唐代 散文家로 南陽 사람이다. 元和 연간에 軍謀宏遠科에 뽑혀 綿州와 絳州의 刺史를 역임하였고 諫議大夫로 부임하던 도중에 병으로 졸하였다. 작문에 있어서는 詼奇하고 險奧함을 힘써 추구하여 艱澀하고 怪癖한 데로 빠졌으므로 당시 사람들이 ‘澀體’라고 불렀다. 韓愈는 그를 위해 〈南陽樊紹述墓誌銘〉을 지어주었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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