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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4)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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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하니 漢東僻陋하야 無學者 吾家又貧하야 無藏書
州南有大姓李氏者하니 其子堯輔頗好學일새 予爲兒童時 多遊其家하야 見有弊筐貯故書在壁間하고 發而視之라가
得唐昌黎先生文集六卷하니 脫落顚倒하야 無次序 因乞李氏以歸하야 讀之 見其言深厚而雄博이라
然予猶少하야 未能悉究其義 徒見其浩然無涯 若可愛러라
是時 이라 能者取科第擅名聲하야 以誇榮當世 未嘗有道韓文者
予亦方擧進士하야 以禮部詩賦爲事하야 이라
因取所藏韓氏之文하야 復閱之하고 則喟然歎曰 學者當至於是而止爾라하고
因怪時人之不道로되 而顧己亦未暇學이요 徒時時獨念于予心하야 以謂方從進士干祿하야 以養親하니
苟得祿矣인댄 當盡力于斯文하야 以償其素志러라
이러니 而尹師魯之徒皆在
遂相與作爲古文할새 因出所藏昌黎集而補綴之하야 求人家所有舊本而校定之러니
其後天下學者亦漸趨於古 而韓文遂行於世 至于今 蓋三十餘年矣 學者非韓不學也하니 可謂盛矣로다
嗚呼 道固有行于遠而止於近하며 有忽于往而貴于今者하니 非惟世俗好惡之使然이라 亦其理有當然者하니
而孔孟惶惶于一時 而師法於千萬世 韓氏之文 沒而不見者二百年而後 大施于今하니
此又非特好惡之所上下 蓋其久而愈明하야 不可磨滅이라 雖蔽于暫이나 而終耀于無窮者 其道當然也
予之始得於韓也 當其沈沒棄廢之時하니 予固知其不足以追時好而取勢利
於是 就而學之하니 則予之所爲者 豈所以急名譽而干勢利之用哉리오 亦志乎久而已矣
故予之仕 於進不爲喜退不爲懼者 蓋其志先定이니 而所學者宜然也
하니 文字刻畫 頗精於今世俗本이나 而脫繆尤多 凡三十年間 聞人有善本者하면 必求而改正之러니
其最後卷帙不足이어늘 今不復補者 重增其故也 予家藏書萬卷이로되 獨昌黎先生集 爲舊物也
嗚呼 韓氏之文之道 萬世所共尊이요 天下所共傳而有也 予於此本 特以其舊物而尤惜之하노라


08. 舊本 韓愈文集의 뒤에 쓰다
나는 어린 시절 漢東에서 살았는데 漢東은 궁벽하고 누추해서 學者가 없었고 우리 집이 또 가난하여 藏書가 없었다.
의 남쪽에 大姓李氏 집이 있었는데, 그 아들 堯輔가 자못 학문을 좋아하였기에 내가 아이였을 때 그 집에 자주 놀러가서 벽 사이에 오래된 책들이 담겨 있는 낡은 상자가 있는 것을 보고 꺼내어 보다가,
나라 ≪昌黎先生文集≫ 6을 찾았는데 빠져 있고 뒤섞여 있어서 순서가 없었다. 그래서 李氏에게 빌려 가지고 돌아와 읽어봄에 그 말이 深厚하고 雄博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내가 아직 어려서 그 뜻을 다 알지는 못하였고, 그저 가없이 드넓은 것이 좋아할 만함을 알 수 있을 뿐이었다.
이때 天下學者들이 楊億劉筠의 작품을 時文이라고 불렀다. 이 時文을 잘 짓는 이는 科第에 급제하고 名聲을 차지하여 當世에 영화를 뽐냈고 韓愈의 문장을 말하는 자들은 있지 않았다.
韓愈(≪晩笑堂畫傳≫)韓愈(≪晩笑堂畫傳≫)
나 또한 바야흐로 進士試應擧하면서 禮部에서 규정하는 詩賦를 배우는 데 종사하여 나이 열일곱에 에서 시험을 보고서 시험관에게 낙제를 받았다.
이 일로 인해 보관하고 있던 韓氏의 문장을 가져다 다시 읽어보고 한숨을 쉬고 탄식하면서 “學者는 마땅히 여기에 이르러 그칠 뿐이다.”라고 하였다.
이어서 지금 사람들이 한유를 말하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겼으나 나 또한 이를 배울 겨를이 없었고, 그저 때때로 내 마음에 품고서 지금 당장은 進士를 통해 녹봉을 구해 어버이를 봉양해야 하니
만약 녹봉을 얻게 되면 마땅히 이 문장에 진력하여 평소의 뜻을 이룰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7년 뒤에 進士試應擧하여 及第해서 洛陽에서 벼슬살이를 하였는데 尹師魯同流들이 모두 있었다.
마침내 서로 더불어 古文을 지을 때 이로 인하여 보관하고 있던 ≪昌黎集≫을 꺼내어 정리해 보완하고 어떤 집에서 소유하고 있는 舊本을 구하여 校定하였는데,
그 뒤로 천하의 學者들이 또한 점차 古文으로 관심이 향하는지라 韓愈의 문장이 마침내 세상에 유행한 것이 지금까지 30여 년이 되었다. 學者들이 韓愈가 아니면 배우지 않게 되었으니 盛行한다고 이를 만하다.
아, 는 진실로 먼 후대에는 유행하게 되면서도 가까운 시대에는 받아들여지지 않고, 과거에는 홀시되다가 지금에서야 존귀해지는 경우가 있다. 세속 사람들의 好惡가 그렇게 만드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그 이치가 마땅히 그러한 점이 있으니,
孔子孟子가 생전에 뜻을 펴려고 애태웠으나 후세에야 영원토록 師表가 된 것이다. 韓氏의 문장이 죽어서 드러나지 못한 지 2백 년 뒤인 지금에서야 크게 유행하니,
이는 또 好惡變化無常한 것일 뿐만 아니라 대체로 悠久할수록 더욱 분명해져서 없애버릴 수 없게 되는 것이다. 비록 잠시 동안은 가려지더라도 끝내 무궁한 후세에 밝게 빛나는 것은 그 가 마땅히 그러한 것이다.
내가 처음 韓愈의 문장을 얻어 보았을 때는 그 문장이 묻혀 있고 버려진 때였으니 내가 족히 時俗嗜好를 따르고 권세와 이익을 취할 수 없음을 참으로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 문장을 가져다 놓고 배웠으니 내가 하는 일이 어찌 名譽를 급급하게 취하고 권세와 이익을 구하는 데 쓰고자 해서였겠는가. 또한 悠久한 데 뜻을 둔 것일 뿐이었다.
그래서 나의 벼슬살이의 자세가 관직에 나아감이 기쁨이 되지 않고 관직에서 물러나는 것이 두려움이 되지 못한 것은, 대체로 그 뜻이 먼저 정해져 있어서이니 배운 바가 의당 그러한 것이었다.
한유의 문집이 본래 에서 나왔으니 文字刻畫이 지금 세상의 俗本보다 퍽 정밀하였으나 誤脫은 더욱 많았다. 내가 30년 동안 善本을 소장한 이가 있다는 말만 들으면 반드시 구하여 고치고 바로잡았다.
그렇지만 최후에 卷帙이 부족한데도 지금 다시 보충하지 않은 것은 그 舊本의 본모습에서 권수를 더하는 일을 신중하게 여겨서였다. 우리 집에는 藏書가 만 권이나 되지만 유독 ≪昌黎先生集≫이 유래가 오랜 서책이다.
아, 韓氏萬世의 후인들이 함께 尊崇하는 것이고 천하 사람들이 함께 전하면서 소유하는 것이니, 내가 이 에 대해 특히 유래가 오랜 서책이라는 이유로 더욱 아낀다.


역주
역주1 記舊本韓文後 : 이 글은 歐陽脩가 자신의 30여 년 學文의 歷程을 回顧한 것이다. 韓愈의 문장이 묻혀 있다가 발견되고 마침내 세상에 통행되어 당시에 크게 유행하게 된 경위를 서술한 것이다. 歐陽脩의 주위에 있던 石介, 曾鞏, 王安石, 蘇軾은 모두 韓愈의 문장을 계승하고 발전시킨 이들이다. 본문에 근거해보면, 이 글은 英宗 治平 연간(1064~1067)에 지어진 것이다.
역주2 予少家漢東 : 歐陽脩가 廬陵 사람이라고 自稱한 것은 唐代 書法家 歐陽詢의 玄孫 歐陽琮이 吉州刺史가 되어 후대에 吉州의 廬陵 등의 縣에 世居하여 마침내 그곳의 望族이 되었기 때문이다. 歐陽脩의 부친 歐陽觀이 綿州軍事推官이 된 일로 인해 歐陽脩는 綿州에서 태어났다. 歐陽觀이 3년 뒤 泰州로 부임하는 도중 졸하자, 모친 鄭氏는 아들을 데리고 隋州軍事推官으로 있던 숙부 歐陽曄에게 의지하였다. 隋州가 옛날 漢東郡에 속하였으므로 歐陽脩가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3 天下學者楊劉之作 號爲時文 : 楊億과 劉筠의 작품은 宋初 文壇에서 風靡했는데 石介는 〈怪說〉에서 그들의 문장을 평론하기를, “아름다운 자태를 窮究하여 風月을 이어 붙이고 花草를 희롱하며 기교가 지나치고 화려함이 넘치며 浮華한 내용을 엮었다.”라고 하였다. 時文은 科擧에서 요구되는 일정한 程式이 있는 문장을 가리킨다.
역주4 年十有七……爲有司所黜 : 天聖 원년(1023)에 歐陽脩는 隋州 州試에 응시하였는데 지은 賦에서 韻을 잘못 사용하여 떨어졌다.
역주5 後七年……官于洛陽 : 天聖 8년(1030)에 歐陽脩는 進士에 급제하여 西京留守推官으로 부임하였다.
역주6 集本出於蜀 : 唐나라가 멸망한 이후 王氏와 孟氏가 다스렸던 前蜀과 後蜀 때에는 상대적으로 안정되었으므로 적지 않은 文人들이 歸順하여 書籍을 간행하는 경우가 많았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4)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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