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懷英
은 人也
라 事朱瑾爲
이러니 梁兵攻瑾
에 瑾出略食豐沛間
하야 留懷英守城
한대
後從
하야 攻
하야 下鄧州
하다 梁兵攻
于岐
할새 以懷英爲先鋒
이러니
至
하야 擊殺岐兵萬餘人
하니 太祖喜曰 邑名武功
이니 眞武功也
라하고 以名馬賜之
하다
是時
에 李周彛以鄜坊兵救岐
하야 屯于
이어늘 懷英擊走之
하고 이라
岐兵屯奉天일새 懷英柵其東北이어늘 夜半에 岐兵攻之한대 懷英以爲夜中不欲驚它軍하야 獨以三千人出戰이라
遲明
에 岐兵解去
하니 身被十餘瘡
이라 李茂貞與梁和
하니 還京師
하야 賜懷英迎鑾毅勇功臣
하다
攻宿州
어늘 太祖遣懷英擊走之
하니 表宿州刺史
라가 遷保義軍節度使
하다
丁會以
叛梁降晉
한대 太祖命懷英爲招討使
라 將行
할새 太祖戒之
에 語甚切
이라
하다 晉遣周德威
하야 屯于亂柳
하야 數攻夾城
하니 懷英不敢出戰
이라
太祖乃以
代懷英將
하고 降懷英爲都虞候
러니 久之
에 思安亦無功
하니 太祖大怒
하야 罷思安
하고 以同州
爲招討使
라
知俊未至軍
에 太祖自至澤州
하야 爲懷英等軍援
하고 且督之
라 已而
오 晉王
卒
커늘 召周德威還太原
이라
太祖聞晉有喪하고 德威去에 亦歸洛陽하니 而諸將亦少弛라
莊宗謂德威曰 晉之所以能敵梁而彼所憚者는 先王也어늘 今聞吾王之喪하고 謂我新立하야 未能出兵이라하야 其意必怠니
宜出其不意以擊之면 非徒解圍요 亦足以定霸也라하고 乃與德威等으로 疾馳六日하야 至北黃碾한대
하니 懷英大敗
하야 亡大將三百人
하다 懷英以百騎遁歸
하야 詣闕請死
한대
太祖曰 去歲興兵에 太陰虧食한대 占者以爲不利라하야늘 吾獨違之而致敗하니 非爾過也라하고 釋之以爲右衛上將軍하다
知俊以岐兵圍靈武한대 太祖遣懷英攻邠寧以牽之하다 懷英取寧慶衍三州하고 還至昇平에 知俊掩擊之하니 懷英大敗하다
徙鎭感化
하다 其後
叛附于晉
커늘 以懷英討之
하야 與晉人戰白徑嶺
한대 懷英又大敗
하고 徙鎭永平
이라가 卒于鎭
하다
康懷英은 兗州 사람이다. 朱瑾을 섬겨 牙將이 되었는데 梁나라 군대가 주근을 공격하자 주근은 출병하여 豐州와 沛州 사이에서 양식을 마련하면서 강회영을 남겨 兗州城을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강회영이 바로 성을 가지고 梁나라에 항복하니 주근이 결국 吳나라로 도망하였다. 梁 太祖는 강회영을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뒤에 氏叔琮을 따라 趙匡凝을 공격하여 鄧州를 함락하였다. 梁나라 군대가 岐州에서 李茂貞을 공격할 때 康懷英을 先鋒으로 삼았는데
武功에 이르러 기주 군사 만여 명을 擊殺하니 梁 太祖가 기뻐하면서 “고을 이름이 武功이니 참으로 武功이로다.”라고 하고 名馬를 강회영에게 下賜하였다.
이때에 李周彛가 鄜坊의 군대를 거느리고 기주를 구원하러 가서 三原에 주둔하였는데, 강회영이 공격하여 몰아내고 이를 통해 상대편이 소유한 翟州를 취하고서 회군하였다.
기주 군사가 奉天에 주둔하기에 강회영이 그 동북쪽에 木柵을 둘렀는데, 한밤중에 기주 군사가 공격하자 강회영이 밤중에 다른 군대를 놀래키고 싶지 않다고 하고는 혼자 3천 명을 데리고 出戰하였다.
새벽에 기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가니 강회영은 몸에 십여 군데나 상처를 입었다. 이무정이 梁나라와 講和하니, 唐 昭宗이 京師에 돌아와 강회영에게 迎鑾毅勇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楊行密이 宿州를 공격하자 梁 太祖가 康懷英을 보내 공격하여 몰아내니 〈양 태조가 唐 황제에게〉 表奏하여 〈강회영을〉 宿州刺史로 삼았다가 保義軍節度使로 승진시켰다.
丁會가 潞州를 가지고 梁나라를 배반하고 晉나라에 투항하자, 梁 太祖가 康懷英을 招討使로 삼았다. 그가 출병할 때에 태조가 그에게 당부할 적에 그 말이 몹시 간절하였다.
강회영이 惶恐하여 노주는 기필코 얻을 것이라 하고는 夾城을 수축하여 노주를 포위하였다. 晉나라는 周德威를 보내 亂柳에 주둔하여 협성을 자주 공격하니 강회영이 감히 나가 싸울 수가 없었다.
양 태조가 이에 李思安으로 강회영을 대신해서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강회영을 강등하여 都虞候로 삼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사안 역시 戰功이 없자 양 태조가 크게 노하여 이사안을 파직하고 同州의 劉知俊을 招討使로 삼았다.
유지준이 軍營에 아직 도착하기 전에 양 태조가 몸소 澤州에 이르러 강회영 등의 군대를 위해 후원하는 한편 그들을 督責하였다. 얼마 뒤에 晉王 李克用이 卒하자 唐 莊宗이 주덕위를 太原으로 召還하였다.
태조가 晉나라에 國喪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주덕위가 떠날 때 태조 역시 낙양으로 돌아가니 장수들 또한 조금 해이해졌다.
장종이 주덕위에게 말하기를 “晉나라가 梁나라에 대적할 수 있으면서 저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우리 先王 때문인데 지금 우리 선왕의 喪을 듣고 내가 새로 즉위하여 出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그 마음이 반드시 해이해졌을 것이니,
의당 그들이 생각지 못한 틈을 보아 공격하면 포위를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霸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주덕위 등과 함께 엿새 동안 급히 내달려 北黃碾에 이르자
마침 하늘 가득 안개가 끼었기에 三垂岡에 군대를 매복하고서 곧장 협성으로 달려가 격파하니 강회영이 大敗하여 大將 300인을 잃었다. 강회영이 騎兵 백 명을 데리고 몰래 도망쳐 돌아와 대궐에 나아와 죽기를 청하자,
태조가 말하기를 “지난해 군사를 일으킬 때 月食이 있자 점치는 이가 불리하다고 하였는데도 내가 혼자 이 말을 어겨 패배하게 되었으니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그를 풀어주고 右衛上將軍으로 삼았다.
劉知俊이 배반하여 岐州로 달아나거늘 康懷英을 保義軍節度使 西路副招討使로 삼았다.
유지준이 기주 군대를 거느리고 靈武를 포위하였는데 梁 太祖가 강회영을 보내어 邠寧을 공격하여 그를 견제하게 하였다. 강회영이 寧州‧慶州‧衍州 세 주를 취하고 회군하여 昇平에 이르자 유지준이 습격하니 강회영이 大敗하였다.
강회영은 感化軍으로 옮겨 鎭守하였다. 이후 朱友謙이 배반하여 晉나라에 붙자 강회영에게 그를 토벌하게 하여 晉나라 군대와 白徑嶺에서 전투하였는데 강회영이 또 大敗하였고, 강회영은 永平으로 옮겨 진수하다가 임지에서 卒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