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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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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康懷英 人也 事朱瑾爲이러니 梁兵攻瑾 瑾出略食豐沛間하야 留懷英守城한대
하니 瑾遂奔于吳 太祖得懷英大喜하다
後從하야하야 下鄧州하다 梁兵攻于岐할새 以懷英爲先鋒이러니
하야 擊殺岐兵萬餘人하니 太祖喜曰 邑名武功이니 眞武功也라하고 以名馬賜之하다
是時 李周彛以鄜坊兵救岐하야 屯于이어늘 懷英擊走之하고 이라
岐兵屯奉天일새 懷英柵其東北이어늘 夜半 岐兵攻之한대 懷英以爲夜中不欲驚它軍하야 獨以三千人出戰이라
遲明 岐兵解去하니 身被十餘瘡이라 李茂貞與梁和하니 還京師하야 賜懷英迎鑾毅勇功臣하다
攻宿州어늘 太祖遣懷英擊走之하니 表宿州刺史라가 遷保義軍節度使하다
丁會以叛梁降晉한대 太祖命懷英爲招討使 將行할새 太祖戒之 語甚切이라
하다 晉遣周德威하야 屯于亂柳하야 數攻夾城하니 懷英不敢出戰이라
太祖乃以代懷英將하고 降懷英爲都虞候러니 久之 思安亦無功하니 太祖大怒하야 罷思安하고 以同州爲招討使
知俊未至軍 太祖自至澤州하야 爲懷英等軍援하고 且督之 已而 晉王커늘 召周德威還太原이라
太祖聞晉有喪하고 德威去 亦歸洛陽하니 而諸將亦少弛
莊宗謂德威曰 晉之所以能敵梁而彼所憚者 先王也어늘 今聞吾王之喪하고 謂我新立하야 未能出兵이라하야 其意必怠
宜出其不意以擊之 非徒解圍 亦足以定霸也라하고 乃與德威等으로 疾馳六日하야 至北黃碾한대
하니 懷英大敗하야 亡大將三百人하다 懷英以百騎遁歸하야 詣闕請死한대
太祖曰 去歲興兵 太陰虧食한대 占者以爲不利라하야늘 吾獨違之而致敗하니 非爾過也라하고 釋之以爲右衛上將軍하다
知俊以岐兵圍靈武한대 太祖遣懷英攻邠寧以牽之하다 懷英取寧慶衍三州하고 還至昇平 知俊掩擊之하니 懷英大敗하다
徙鎭感化하다 其後叛附于晉커늘 以懷英討之하야 與晉人戰白徑嶺한대 懷英又大敗하고 徙鎭永平이라가 卒于鎭하다


04. 康懷英傳記
康懷英兗州 사람이다. 朱瑾을 섬겨 牙將이 되었는데 나라 군대가 주근을 공격하자 주근은 출병하여 豐州沛州 사이에서 양식을 마련하면서 강회영을 남겨 兗州城을 지키게 하였다.
그런데 강회영이 바로 성을 가지고 나라에 항복하니 주근이 결국 나라로 도망하였다. 太祖는 강회영을 얻고 크게 기뻐하였다.
뒤에 氏叔琮을 따라 趙匡凝을 공격하여 鄧州를 함락하였다. 나라 군대가 岐州에서 李茂貞을 공격할 때 康懷英先鋒으로 삼았는데
武功에 이르러 기주 군사 만여 명을 擊殺하니 太祖가 기뻐하면서 “고을 이름이 武功이니 참으로 武功이로다.”라고 하고 名馬를 강회영에게 下賜하였다.
이때에 李周彛鄜坊의 군대를 거느리고 기주를 구원하러 가서 三原에 주둔하였는데, 강회영이 공격하여 몰아내고 이를 통해 상대편이 소유한 翟州를 취하고서 회군하였다.
기주 군사가 奉天에 주둔하기에 강회영이 그 동북쪽에 木柵을 둘렀는데, 한밤중에 기주 군사가 공격하자 강회영이 밤중에 다른 군대를 놀래키고 싶지 않다고 하고는 혼자 3천 명을 데리고 出戰하였다.
새벽에 기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물러가니 강회영은 몸에 십여 군데나 상처를 입었다. 이무정이 나라와 講和하니, 昭宗京師에 돌아와 강회영에게 迎鑾毅勇功臣의 칭호를 하사하였다.
楊行密宿州를 공격하자 太祖康懷英을 보내 공격하여 몰아내니 〈양 태조가 황제에게〉 表奏하여 〈강회영을〉 宿州刺史로 삼았다가 保義軍節度使로 승진시켰다.
丁會潞州를 가지고 나라를 배반하고 나라에 투항하자, 太祖康懷英招討使로 삼았다. 그가 출병할 때에 태조가 그에게 당부할 적에 그 말이 몹시 간절하였다.
강회영이 惶恐하여 노주는 기필코 얻을 것이라 하고는 夾城을 수축하여 노주를 포위하였다. 나라는 周德威를 보내 亂柳에 주둔하여 협성을 자주 공격하니 강회영이 감히 나가 싸울 수가 없었다.
양 태조가 이에 李思安으로 강회영을 대신해서 군대를 거느리게 하고 강회영을 강등하여 都虞候로 삼았다. 그런데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사안 역시 戰功이 없자 양 태조가 크게 노하여 이사안을 파직하고 同州劉知俊招討使로 삼았다.
유지준이 軍營에 아직 도착하기 전에 양 태조가 몸소 澤州에 이르러 강회영 등의 군대를 위해 후원하는 한편 그들을 督責하였다. 얼마 뒤에 晉王 李克用하자 莊宗이 주덕위를 太原으로 召還하였다.
태조가 나라에 國喪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주덕위가 떠날 때 태조 역시 낙양으로 돌아가니 장수들 또한 조금 해이해졌다.
장종이 주덕위에게 말하기를 “나라가 나라에 대적할 수 있으면서 저들이 두려워했던 것은 우리 先王 때문인데 지금 우리 선왕의 을 듣고 내가 새로 즉위하여 出兵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 그 마음이 반드시 해이해졌을 것이니,
의당 그들이 생각지 못한 틈을 보아 공격하면 포위를 풀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또한 霸業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주덕위 등과 함께 엿새 동안 급히 내달려 北黃碾에 이르자
마침 하늘 가득 안개가 끼었기에 三垂岡에 군대를 매복하고서 곧장 협성으로 달려가 격파하니 강회영이 大敗하여 大將 300인을 잃었다. 강회영이 騎兵 백 명을 데리고 몰래 도망쳐 돌아와 대궐에 나아와 죽기를 청하자,
태조가 말하기를 “지난해 군사를 일으킬 때 月食이 있자 점치는 이가 불리하다고 하였는데도 내가 혼자 이 말을 어겨 패배하게 되었으니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라고 하고는 그를 풀어주고 右衛上將軍으로 삼았다.
劉知俊이 배반하여 岐州로 달아나거늘 康懷英保義軍節度使 西路副招討使로 삼았다.
유지준이 기주 군대를 거느리고 靈武를 포위하였는데 太祖가 강회영을 보내어 邠寧을 공격하여 그를 견제하게 하였다. 강회영이 寧州慶州衍州 세 주를 취하고 회군하여 昇平에 이르자 유지준이 습격하니 강회영이 大敗하였다.
강회영은 感化軍으로 옮겨 鎭守하였다. 이후 朱友謙이 배반하여 나라에 붙자 강회영에게 그를 토벌하게 하여 나라 군대와 白徑嶺에서 전투하였는데 강회영이 또 大敗하였고, 강회영은 永平으로 옮겨 진수하다가 임지에서 하였다.


역주
역주1 康懷英傳 : 康懷英(?~916 山東 兗州 사람으로 본명은 懷貞인데 後梁 末帝 朱友貞(888~923 諱를 피하여 이름을 고쳤다.
강회영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23 〈梁書 第23 列傳13〉과 ≪新五代史≫ 卷22 〈梁臣傳 第10〉에 실려 있다. 歐陽脩는 ≪구오대사≫에 1천여 자 분량으로 수록되어 있는 강회영의 傳記를 6백여 자 분량으로 서술하였는데, 강회영이 後梁 太祖 朱全忠(852~912 知遇를 입어 전장에서 승승장구하다가 몇 번의 패배를 거쳐 죽음을 맞는 과정을 간결하게 묘사하였다.
처음에 강회영은 泰寧軍節度使 齊克讓을 몰아내고 그 자리를 차지한 朱瑾(867~918 휘하 장수가 되어 兗州를 지키다가 후량 태조에게 투항하였는데 이후 戰場을 누비며 후량의 세력이 커지는 데 일조를 하였다.
구양수는 李唐이 쇠퇴하고 후량이 세력을 확대하는 국면에서 이당에 잠시 충성을 보였던 趙匡凝, 藩鎭으로 할거하였던 李茂貞‧楊行密과의 전투에서 승리한 일들은 간략하게 서술하였다. 이어 梁나라를 배반한 丁會‧劉知俊‧朱友謙 등과 치른 전투 및 後唐의 莊宗 李存勖(885~926 그 휘하 장수 周德威와 치른 전투의 패배 과정을 일화를 곁들여가며 차례로 묘사하였다. 강회영은 이들과의 전투에서 연이어 패배한 이후 얼마 있다가 결국 죽음을 맞게 되지만 그가 후량을 배반하지 않은 것과 후량 역시 그를 중용한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강회영의 말년은 후량과 후당이 천하의 霸權을 두고 角逐을 벌이던 때였다. 이러한 때 정회와 주우겸은 후당에 투항하고 유지준은 岐州의 이무정에게 투항하는 등 후량의 장수였던 자들이 칼을 돌려 강회영에 맞서 싸웠던 사실을 통해 독자들은 五代의 亂世에 忠孝 관념이 사라져 武將들이 세력을 따라 離合集散하던 世態를 선명하게 엿볼 수가 있다.
역주2 兗州 : 옛 9州 가운데 하나로, 지금의 山東省 西部와 河北省 南部의 경계에 위치하고 있었는데 옛 黄河와 옛 济水의 사이에 있었다.
역주3 牙將 : 軍中의 中下級 軍官을 가리킨다. 참고로, ≪韻會≫에 “牙는 旗의 이름이니 상아로 깃대를 장식하여 휘장 앞에 세우고 이것을 牙門이라 한다.”라고 하였는바, 군대가 출동할 때 장군이 있는 곳에 牙旗를 세웠던 데서 비롯하여 일을 다스리는 곳을 牙 혹은 衙라 하였다.
역주4 懷英卽以城降梁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新五代史≫ 〈朱瑾傳〉에도 ‘朱瑾의 장수 康懷英 등이 城을 가지고 梁나라에 항복하였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강회영을 배반의 首魁로 여긴 것이고, ≪新唐書≫ 〈本紀〉에는 ‘그 아들 康用貞이 兗州를 가지고 배반하여 朱全忠에게 붙었다.’로 되어 있는데 이는 그 아들을 배반의 수괴로 여긴 것이니 의당 강회영에게 장악되어 있는 것일 뿐이다.[按朱瑾傳 亦作瑾將康懷英等 以城降梁 是以懷英爲叛首 而新唐書本紀 作其子用貞 以兗州叛附于全忠 是以其子爲叛首 當是懷英所挾耳]”라고 하였다.
역주5 氏叔琮 : ?~904. 河南 尉氏 사람으로 五代 시기 後梁을 開國하는 데 일조한 名將이다. 용맹하고 굳세어 膽力이 뛰어나 唐末에 晉陽의 전투에 참여하였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保大軍節度使, 檢校司徒를 지냈다. 天佑 元年(904 洛陽에 나아가 右龍虎統軍이 되어 낙양을 수비하였다. 이해 8월에 後梁 太祖 朱溫의 지시를 받아 唐 昭宗을 시해하고 唐 哀帝을 冊立하였다. 이 일이 있은 후 주온은 氏叔琮이 軍政을 제대로 다스리지 못한다는 이유로 白州司戶로 폄적하였다가 얼마 뒤에 賜死하였다.
역주6 趙匡凝 : 唐末 五代 蔡州 사람으로, 字는 光儀이다. 부친 趙德諲은 본래 秦宗權의 部將이었는데 뒤에 襄陽 등을 가지고 朱溫에게 투항하였다. 조덕인이 죽자 그 땅을 근거로 삼고 다시 아우 趙匡明을 보내 雷彦恭을 몰아내고 荊南을 취하여 영토가 동쪽으로 淮南에 연결되고 서쪽으로 巴蜀에 이어졌다. 주온이 表奏하여 荊襄節度使가 되었다. 唐 天祐 2년(905) 주온의 使者에게 唐나라에 대한 충성을 보인 일을 계기로 결국 주온이 보낸 군대의 공격을 받아 패하여 廣陵으로 달아나 楊行密에게 의지하였다. 뒤에 徐溫에게 피살되었다.
역주7 李茂貞 : 856~924. 자는 正臣, 본성은 宋씨, 본명은 文通으로 深州 博野 사람이다. 黃巢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神策軍指揮使에 올랐고, 唐 僖宗을 호종한 공으로 성명을 하사받았다. 昭宗 때 조정에서 兵權을 장악하고 여러 차례 군사를 이끌고 京師에 들어와 재상 韋昭度 등을 살해하고 궁실과 시장에 불을 질렀다. 天復 元年(901 소종이 鳳翔으로 가자 朱溫과 대립하였다가 天復 3년(903) 주온과 화해하였다. 後梁이 건국되자 岐王이라 자칭하며 한 지역에서 할거했다. 後唐 莊宗 同光 2년(924) 표문을 올려 신하라 칭하고 秦王에 봉해졌다.
역주8 武功 : 지금의 陝西省 咸陽에 있는 縣의 이름이었다.
역주9 三原 : 지금의 陝西省 中部로, 西安市의 북쪽에 있었다.
역주10 因取其翟州而還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大平寰宇記≫에는 ‘坊州 鄜城縣은 李茂貞이 세워 翟州가 되었다가 梁나라 때 禧州로 고쳤다.’고 하였는데 宋代에는 이미 州를 廢하였으므로 ≪新五代史≫ 〈職方攷〉에 著錄하지 않았다. 하지만 徐無黨은 여기에 注疏를 달지 않았다.[謹案大平寰宇記 坊州鄜城縣 李茂貞建爲翟州 梁改禧州 宋已廢州 故職方攷不著 然徐氏于此不注疏矣]”라고 하였다.
역주11 昭宗 : 867~904. 唐나라 제19대 황제로 원래 이름은 傑이었다가 즉위 후 曄으로 개명하고 나중에 다시 敏이라 하였다. 唐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 楊復恭에 의해 889년 황제로 옹립되었다. 李茂貞을 중심으로 하는 반란군이 長安을 압박하자 환관 韓全海가 진언하여 鳳翔으로 도망하였으나 903년 이무정이 한전해, 張彦弘 등을 죽이자 長安으로 돌아왔다. 그 뒤 이무정은 朱全忠에 의해 실각하고 주전충이 최대 藩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904년 1월 주전충은 대신들의 반대를 누르고 洛陽으로 천도하였고, 소종은 그해 8월 주전충이 보낸 사람에 의해 시해되었다.
역주12 楊行密 : 852~905. 五代時代 吳나라의 太祖로 자는 花源, 본명은 行愍, 廬州 合肥 사람이다. 처음에는 도둑이었다가 州兵에 응모해 隊長으로 옮겼다. 戍자리를 나갔다가 반란을 일으켜 驪州를 거점으로 웅거하자 唐나라에서 驪州刺史에 임명하였다. 淮南節度使를 자칭하던 孫儒를 격파하자 唐 昭宗이 회남절도사에 임명하였고, 天復 2년(902) 吳王에 봉해졌다.
역주13 潞州 : 지금의 山西省에 있었다.
역주14 懷英惶恐……乃築夾城圍之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新五代史≫ 〈義兒傳〉의 李嗣昭의 傳에서 ‘梁나라가 李思安을 보내 병사 十萬을 이끌고서 潞州를 공격하여 夾城을 쌓아 포위하게 하였다.’고 하였고, 〈劉知俊傳〉에서 ‘이사안이 협성을 세우고 노주를 공격하였는데 오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고 하였다. 薛居正의 ≪舊五代史≫ 〈梁本紀〉에서 ‘노주의 이전에 주둔하였던 군대가 壁壘를 아직 점령하지 못한 일 때문에 이에 군대의 統帥를 따로 논의하니 이에 亳州刺史 이사안을 潞州行營都統으로 充任하였다.’라고 하였고, 〈康懷英傳〉에서 ‘康懷英이 梁 太祖가 한 말을 두려워하여 반드시 점령하겠다고 다짐하고서 이에 堡壘를 쌓아 城을 두르고 垓子를 팠다.’라고 하였고, 〈李嗣昭傳〉에서 ‘汴將 이사안이 군대 10만 명을 거느리고 노주를 공격하여 이에 협성을 쌓되 해자를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하여 안팎으로 겹치게 하니 새와 짐승들이 지나갈 수가 없었다.’라고 하였고, ≪資治通鑑≫ 開平 元年(907) 6월에 ‘강회정이 노주에 이르러 밤낮으로 공격하여 반 달 동안 점령하지 못하자 이에 보루를 쌓고 구불구불한 해자를 파고서 지키니 안팎으로 단절되었다.’고 하였고, 7월에 ‘이사안이 다시 重城을 쌓아 안으로 進擊하는 것을 막고 밖으로 援兵을 물리치니 이를 일러 夾寨라고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대체로 강회영이 먼저 城 하나를 쌓고 이사안이 다시 城 하나를 쌓은 것이므로 협채라고 한 것이니 본문에서 ‘懷英이 夾城을 쌓았다.’로 되어 있는 것은 착오이다.[按義兒嗣昭傳 梁遣李思安 將兵十萬攻潞 築夾城以圍之 劉知俊傳 李思安爲夾城攻潞州 久不下 薛史梁本紀 以潞州軍前屯師旅 壁壘未收 乃別議戎帥 于是以亳州刺史李思安 充潞州行營都統 懷英傳 懷英懼太祖之言 期于必取 乃築壘環城 濬鑿池塹 李嗣昭傳 汴將李思安 將兵十萬攻潞州 乃築夾城 深溝高壘 內外重複 飛走路絶 通鑑 開平元年六月 康懷貞至潞州 晝夜攻之 半月不克 乃築壘穿蚰 蜒塹而守之 內外斷絶 七月 李思安更築重城 內以防奔突 外以拒援兵 謂之夾寨 蓋懷英先築一城 思安復築一城 故曰夾寨 此作懷英築夾城誤]”라고 하였다.
역주15 李思安 : 861~912. 字는 貞臣으로, 河南 陳留 사람이다. 後梁의 장군으로 여러 차례 戰功을 세워 開國功臣이 되었다. 젊은 시절 宣武將軍 楊彦洪의 麾下에 있었는데 용맹하고 힘이 세었고 身長이 7尺으로 자못 野心이 있었다. 中和 3년(883) 宣武節度使 朱全忠이 군대를 사열할 때 李思安의 용모가 雄奇함을 보고 몹시 흡족하게 여기고 특별히 이름을 하사하여 이사안이라고 하였다. 黃巢의 군대 및 蔡州節度使 秦宗權의 군대와 전투할 때 항상 자신이 거느리는 부대의 백여 인과 함께 싸웠는데 적군이 당해내지 못하였다.
역주16 劉知俊 : ?~917. 字는 希賢으로, 徐州 沛縣 사람이다. 唐末에 割據했던 軍閥로 劉開道라고 불렸다. 본래 感化節度使 時溥의 부하 小校였는데 뒤에 宣武節度使 朱溫에게 투항하여 軍校가 되었다. 宣武軍左開道指揮使, 徐州馬步軍都指揮使, 匡國軍節度使, 檢校太傅, 平章事, 潞州行營招討使를 역임하였다. 909년 鳳翔節度使 李茂貞에게 투항하여 檢校太尉, 中書令이 되었다가 이윽고 彰義軍節度使를 배수하였다. 뒤에 前蜀의 王建에게 투항하였으나 그에게 시기를 받아 917년에 成都 炭市에서 참수되었다.
역주17 李克用 : 856~908. 字는 翼聖이고 本姓은 朱邪(주야, 神武川 新城 사람이다. 突厥 沙陀部 출신으로 李鴉兒라고도 불리고 한쪽 눈을 잃어 獨眼龍으로도 불렸다. 後唐의 太祖로, 朱邪赤心의 아들이다. 젊을 때부터 용맹해 雲州를 거점으로 하며 留后라 자칭하다 당나라 군대에 패하자 韃靼으로 달아났다. 黃巢의 난에 황명을 받아 사타족을 이끌고 와 황소군을 대파하고 長安을 탈환하였다. 뒤에 李茂貞, 王行瑜 및 韓建 세 장수가 京師에 진격하여 唐 昭宗을 협박할 때 李克用은 거듭 군대를 거느리고 勤王하여 세 장수를 패배시키고 소종을 구출하여 晉王에 봉해졌다. 이후로 줄곧 이극용은 장기간 河東에서 할거하면서 汴州를 점거한 朱全忠과 대치하였다. 이극용이 病死하자 아들 李存勖이 後唐을 건립하였는데, 이극용을 武皇帝로 추존하고 廟號를 太祖라고 하였다.
역주18 莊宗 : 885~926. 이름은 李存勖이고 山西省 太原 출생이다. 突厥 沙陀族 출생의 晉王 李克用의 長子로, 908년 왕위를 계승하여 914년 燕나라 劉守光을 멸하고 이어 後梁을 공격하였다. 923년 河北省 魏州에서 제위에 올라 國號를 唐이라 칭하였으며, 같은 해 후량을 멸망시키고 도읍을 洛陽에 정하였다. 925년 前蜀도 병합하여 河北의 땅을 평정하였다. 뛰어난 무장이었으나 측근들에게 정치를 맡기고 사치에 빠진 탓에 반란이 일어나 부하에게 살해당하였다.
역주19 莊宗謂德威曰……攻破之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번다하게 서술하였으니 〈唐莊宗紀〉의 내용과 겹친다.[按繁敍 複唐本紀]”라고 하였다.
역주20 劉知俊叛……西路副招討使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康懷英은 陝州의 統帥이다. ≪新五代史≫ 〈職方攷〉에 ‘섬주는 唐代에 본래 保義라고 하였는데 梁나라 때 고쳐 鎭國이라 하였고 後唐 때 다시 보의라고 하였다.’라고 하였다. 梁나라의 보의로 말하자면 따로 邢州에 있었으니, 〈王檀傳〉에 ‘太祖가 즉위하였을 때 保義軍節度使로 승진하여 힘써 싸워 형주를 保全하였다.’라고 하였다. 〈本紀〉에서 開平 3년에 保義軍節度使 王檀을 潞州招討使로 삼았다고 먼저 기록하고, 鎭國軍節度使 강회영이 岐州를 토벌하였다고 이어 기록하였으니, 장수를 임명해 토벌함은 각기 가까운 鎭에서 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니 이곳의 보의는 의당 〈本紀〉에 의거하여 진국이 되어야 하니 본래 섬주에 있는 것이고 형주에 있지 않은 것이다.[謹案懷英陝帥也 職方攷 陝州 唐故曰保義 梁改曰鎭國 後唐復曰保義 若梁之保義 自在邢州 王檀傳 太祖卽位 遷保義軍節度使 力戰全邢州 紀于開平三年 先書保義軍節度使王檀爲潞州招討使 繼書鎭國軍節度使康懷英伐岐 可見命將致討 各就近鎭 此處之保義 當依紀作鎭國 固在陝而不在邢也]”라고 하였는데, 그 주석에 “本傳의 上文에 ‘表奏하여 宿州刺史로 삼았다가 보의군절도사로 승진하였다.’고 하여 오히려 唐나라 때에도 있었으니 섬주를 保義軍이라 일컬은 것은 착오가 아니다.[本傳上文 表宿州刺史 遷保義軍節度使 尙在唐時 則陝州稱保義軍不誤]”라고 하였다.
그리고 ≪五代史記纂誤補≫ 卷2의 이어지는 부분에서 “또 살펴보건대, 〈本紀〉에서 開平 3년 11월에 강회영이 岐州를 토벌하였다고 기록하고 薛居正의 ≪舊五代史≫에는 ‘황제가 陝州 康懷英, 華州 寇彦卿을 보내 군대를 거느리고 邠寧을 공격하였다.’고 하였기에, 의당 두 鎭이 되어야 하니 각기 군대를 거느리고 서쪽으로 토벌한 것이지 애초에 招討使라는 명목은 없었던 것이다. 本史(≪舊五代史≫ 〈太祖紀〉 개평 4년 8월에는 楊師厚가 西路行營招討使가 되어 기주를 정벌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資治通鑑≫에는 양사후가 초토사가 되어 感化節度使 康懷貞을 만났다는 문장으로 기록되어 있으니, 아마도 강회영이 개평 4년에 感化로 옮긴 뒤에야 비로소 副招討가 된 것일 뿐인 듯하다. 이는 설거정의 ≪구오대사≫ 본전을 따른다.[又案紀于三年十一月 書康懷英伐岐 薛史作帝遣陝州康懷英 華州寇彦卿 率兵攻迫邠寧 當是兩鎭 各以兵西伐 而初無招討使之目 本史帝紀 四年八月 書楊師厚爲西路行營招討使以伐岐 通鑑作師厚爲招討使 而以會感化節度使康懷貞爲文 疑懷英于四年徙感化後 乃爲副招討耳 此從薛史本傳]”라고 하였다.
역주21 朱友謙 : ?~926. 初名은 朱簡이고 字는 德光으로 河南 許州 사람이다. 五代 시기의 大臣이다. 처음에 陝州軍校가 되었는데 節度使 王珙을 죽이고 宣武節度使 朱全忠에게 투항하니 주전충이 養子로 삼고 友謙으로 改名하였다. 후에 주전충이 表奏하여 陝虢節度使로 삼았다. 주전충이 唐나라를 찬탈하여 즉위한 뒤에 河中節度使로 옮겨 鎭守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中書令이 되고 冀王에 봉해졌다. 朱友珪가 부친 주전충을 시해하고 梁나라의 제위를 찬탈하자 주우겸은 은밀히 晉王 李存勖에게 투항하여 西平王에 봉해지고 守太尉를 더하였다. 後唐 莊宗(이존욱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洛陽에 들어간 뒤 李繼麟이라는 이름을 하사하고 守太師 尙書令을 더하니 은총을 당시에 비할 이가 없었다. 同光 4년(926) 宦官과 伶人에게 죄를 받은 일로 인해 장종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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