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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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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中所次兵略可睹
劉鄩 密州安丘人也 少事靑州러니 敬武卒 子師範立한대 棣州刺史張蟾叛커늘 師範遣指揮使盧洪討蟾하니 洪亦叛이라
師範僞爲好辭하야 召洪하야 洪至 迎於郊外하야 命鄩斬之坐上하고 因使鄩攻張蟾破之하다 師範表鄩登州刺史하야 以爲行軍司馬하다
하니 師範乘梁虛하야 遣人分襲梁諸州縣커늘 他遣者謀多漏洩하야 事不成이로되 獨鄩素好兵書하야 有機略이라
是時 梁已破朱瑾等하야 悉有兗鄆하야爲兗州節度使하니 從周將兵在外어늘 鄩乃使人負油鬻城中하야 悉視城中虛實出入之所하다
油者得羅城下水竇可入일새 鄩乃以步兵五百으로 從水竇入하야 襲破之하고 徙從周家屬外第하고 親拜其母하야 撫之甚有恩禮하다
太祖已出昭宗于鳳翔하고 引兵東還하야攻師範하고 從周攻鄩한대
鄩以置從周母城上하니 母呼從周曰 劉將軍待我甚厚 無異於汝 人臣各爲其主 汝可察之라하니 從周爲之緩攻하다
鄩乃悉簡婦人及民之老疾不足當敵者出之하고 獨與少壯者 同辛苦하고 分衣食하야 堅守以待外援이나
久之 外援不至 人心頗離하야 副使王彦溫 踰城而奔하고 守陴者多逸이라
鄩乃遣人陽語彦溫曰 副使勿多以人出이니 非吾素遣者 皆勿以行하라하고
又下令城中曰 吾遣從副使者得出이어니와 否者인댄 皆族이라하니 城中皆惑하야 奔者乃止하다
已而 梁兵聞之하고 果疑彦溫非實降者하야 乃斬之城下하니 由是 城守益堅이라
師範兵已屈이라 從周以禍福諭鄩한대 鄩報曰 俟吾主降하야 卽以城還梁이라하다 師範敗하야 降梁하니 鄩乃亦降하다
從周爲具齎裝하야 送鄩歸梁하니 鄩曰 降將蒙梁恩不誅 幸矣 敢乘馬而衣裘乎아하고
乃素服乘驢歸梁하니 太祖賜之冠帶하고 飮之以酒어늘 鄩辭以量小하니 太祖曰 取兗州하니 量何大乎아하고 以爲元從都押衙하다
是時 太祖已領四鎭하니 四鎭將吏皆功臣舊人이로되 鄩一旦以降將居其上이어늘
及諸將見鄩하야 皆用軍禮한대 鄩居自如하니 太祖益奇之하다
太祖卽位 累遷左龍武統軍하다 劉知俊叛하야 陷長安하니 太祖遣鄩與牛存節하야 討之한대 知俊走鳳翔이어늘
太祖乃以長安爲永平軍하야 拜鄩節度使하다 卽位 領鎭南軍節度使하야 爲開封尹하다
楊師厚卒 分相魏爲兩鎭하니 末帝恐魏兵亂하야 遣鄩以兵屯于魏縣한대 魏兵果亂하야降晉이라
莊宗入魏하니 鄩以謂晉兵悉從莊宗赴魏하니可襲이라하고
乃結草爲人호되 執以旗幟하고 以驢負之하야 往來城上하고 而潛軍出黃澤關하야 襲太原하다 晉兵望梁壘旗幟往來하고 不知其去也 以故不追하다
鄩至樂平하야 遇雨하야 不克進而旋하야 急趨臨淸하야 爭魏積粟한대 而周德威已先至 鄩乃屯于莘縣하야及河하야 以饋軍하다
久之 末帝以書責鄩曰 全付將軍이어늘 諸州一旦淪沒이라
今倉儲已竭하고 不充이라 將軍與國同心하니 宜思良畫이라한대 鄩報曰 晉兵甚銳하야 未可擊하니 宜待之라하니
末帝復遣問鄩必勝之策한대 鄩曰 臣無奇術하니 請人給米十斛하소서 米盡則敵破矣라하니
末帝大怒하야 誚鄩曰 將軍蓄米 將療饑乎 將破敵乎아하고 乃遣使者監督其軍하다
鄩召諸將謀曰 主上深居禁中하야 與白面兒謀하니 必敗人事 今敵盛하니 未可輕動이라 諸君以爲如何오하니
諸將皆欲戰이어늘 鄩乃悉召諸將하야 坐之軍門하고 人以河水一杯飮之하니 諸將莫測하야 或飮或辭
鄩曰 一杯之難 猶若此어든 滔滔河流 可盡乎아하니 諸將皆失色하다
是時 莊宗 數以勁兵壓鄩營이어늘 鄩不肯出하니 而末帝又數促鄩하야 使出戰이라
莊宗與諸將謀曰 劉鄩學하야 喜以機變用兵하야 本欲示弱以襲我 今其見迫하니 必求速戰이라하다
乃聲言歸太原하고 命符存審守魏하고 陽爲西歸而潛兵貝州 鄩果報末帝曰 晉王西歸하야 魏無備하니 可擊이라하다
乃以兵萬人으로 攻魏城東한대 莊宗自貝州返趨擊之 鄩忽見晉軍하고 驚曰 晉王在此邪아하고 兵稍却하니 追至故元城이라
莊宗與符存審으로 爲兩方陣夾之한대 鄩爲圓陣以禦晉人이라 兵再合 鄩大敗하야 南奔하야濟河하야 保滑州하다
兗州커늘 拜鄩兗州安撫制置使러니 萬進敗死 乃拜鄩泰寧軍節度使하다
朱友謙叛하야어늘 末帝以鄩爲河東道招討使 行次陝州하야 鄩爲書以招友謙이로되 友謙不報하니 留月餘待之
尹皓等素惡鄩하야 乃譖之하야 以爲鄩與友謙親家 이라하야늘
已而 하니 年六十四 贈中書令하니라


05. 劉鄩傳記
내용 중에 열거한 兵略이 볼만하다.
劉鄩密州 安丘 사람이다. 젊은 시절 靑州 王敬武를 섬겼는데 왕경무가 하고 나서 그 아들 王師範이 즉위하자 棣州刺史 張蟾이 배반하거늘 왕사범이 指揮使 盧洪을 보내 장섬을 토벌하게 하니 노홍 역시 배반하였다.
왕사범이 거짓으로 좋은 말을 꾸며 노홍을 불러 노홍이 이르자 郊外에서 맞이하면서 유심에게 명하여 앉은 자리에서 그를 斬殺하고 이어 유심에게 장섬을 쳐서 격파하게 하였다. 왕사범이 表奏하여 유심을 登州刺史로 삼아 行軍司馬로 임명하였다.
太祖가 서쪽으로 鳳翔을 공격하니 王師範나라가 비어 있는 틈을 타 은밀히 군사를 파견하여 州縣들을 나누어 습격하였는데 파견된 자들이 계획을 많이 누설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독 劉鄩은 평소 兵書를 좋아하여 機略이 있었다.
이때에 나라가 이미 朱瑾 등을 격파하여 兗州鄆州를 다 차지하고 葛從周兗州節度使로 삼으니 갈종주가 외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유심이 이에 사람을 시켜 기름을 지고 城中에서 팔면서 성중의 虛實과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모두 살피게 하였다.
기름 파는 이가 진입할 수 있는 城下水路를 파악하자 유심이 이에 步兵 500명을 데리고 수로를 통해 들어가 기습하여 격파하고, 갈종주의 家屬들을 外第에 옮기고 그의 모친에게 친히 절하고서 매우 예우를 갖추어 위무하였다.
太祖鳳翔에서 昭宗을 나오게 한 뒤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오면서 朱友寧을 보내 王師範을 공격하고 葛從周를 보내 劉鄩을 공격하자,
유심이 版輿로 갈종주의 모친을 태워 성 위에 오니 모친이 갈종주를 부르며 말하기를 “劉將軍이 나를 매우 후하게 대우해주는 것이 너와 다를 바가 없다. 신하는 저마다 그 主君을 위하는 것이니 너는 이 점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갈종주가 이 일로 공세를 늦추었다.
유심이 이에 婦人과 백성 가운데 늙고 병들어 적과 싸우지 못할 자들을 모두 가려서 내보내고, 오직 젊고 건장한 이들과 辛苦를 함께하고 衣食을 나눠가며 굳게 지키면서 성 밖의 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래 지나도 성 밖의 원군이 이르지 않자 민심이 자못 離反하여 副使 王彦溫이 성을 넘어 달아났고 성을 지키던 이들 가운데 도망가는 이가 많았다.
유심이 이에 사람을 보내 왕언온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부사는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가지 말 것이니 내가 평소 보낸 이가 아니면 모두 데리고 가지 말라.”라고 하고,
다시 성중에 명령을 내리기를 “내가 보내어 부사를 따라가는 이들은 성을 나갈 수 있거니와 그렇게 하지 않으면 滅族시킬 것이다.”라고 하니, 성중 사람들이 모두 이 명령에 속아 도망가는 자들이 비로소 멈추었다.
이윽고 나라 군대가 이 일을 듣고 과연 왕언온이 진심으로 항복한 자가 아니라고 의심하여 이에 성 아래에서 그를 참수하니 이로부터 성을 수비하는 일이 더욱 견고해졌다.
王師範의 군대가 이미 궁지에 몰린지라 葛從周禍福을 가지고 劉鄩을 설득했는데, 유심이 대답하기를 “우리 主君이 항복할 때를 기다려 즉시 성을 나라에 돌려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사범이 패배하여 나라에 投降하니 유심 역시 그제야 투항하였다.
갈종주가 유심을 위해 行裝을 꾸려주고 유심을 나라로 돌려보내니, 유심이 말하기를 “항복한 장수가 나라의 은혜를 입어 주벌되지 않은 것도 다행인데 감히 말을 타고 갖옷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素服을 입고 나귀를 타고서 나라로 가니 太祖가 그에게 冠帶를 하사하고 술을 먹이자 유심이 주량이 적다고 사양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兗州를 취하였으니 局量이 이 얼마나 크단 말인가?”라고 하고 그를 元從都押衙로 삼았다.
이때에 태조가 이미 네 을 차지하여 다스리니 네 將吏들이 모두 功臣과 오랜 부하였는데 유심이 하루아침에 투항한 장수의 신분으로 그들의 윗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런데도 장수들이 유심을 보게 되자 모두 軍禮를 갖추었는데 유심이 泰然自若하게 그대로 있으니 태조가 그를 더욱 비범하게 여겼다.
太祖가 즉위하자 여러 차례 승진하여 左龍武統軍이 되었다. 劉知俊이 배반하여 長安을 함락하니 양 태조가 劉鄩牛存節을 보내 토벌하자 유지준이 鳳翔으로 달아나거늘,
양 태조가 이에 長安永平軍으로 고치고서 유심을 節度使에 배수하였다. 末帝가 즉위하자 유심이 鎭南軍節度使를 맡아 開封尹이 되었다.
楊師厚가 졸한 뒤 相州魏州를 나누어 두 으로 삼으니 末帝魏兵이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劉鄩을 파견하여 魏縣에 군대를 주둔하였는데, 위병이 과연 반란을 일으켜 賀德倫을 협박하여 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래서 莊宗이 위주에 들어가자, 유심이 나라 군대가 모두 장종을 따라 위주에 들어가니 太原을 습격할 만하다고 여기고서,
이에 풀을 엮어 사람 모양을 만들되 깃발을 잡게 하고 나귀에 태워 성 위를 왕래하게 하고는 군대를 몰래 빼어 黃澤關으로 나가 태원을 습격하였다. 나라 군대는 나라 城壘에 깃발이 왕래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들이 간 곳을 몰랐기 때문에 추격하지 않았다.
유심이 樂平에 이르러 비를 만나 전진하지 못하고 회군하여 급히 臨淸으로 가서 위주의 쌓아둔 양식을 다투었는데 周德威가 벌써 먼저 와 있었다. 유심이 이에 莘縣에 주둔하고서 黃河까지 닿도록 甬道를 수축하여 군대에 양식을 대었다.
시일이 오래 지나자 末帝가 서신을 보내 劉鄩問責하기를 “閫外의 일을 將軍에게 전적으로 맡겼는데 河朔들이 하루아침에 다 상실되었다.
지금 창고에 쌓아둔 곡식이 이미 고갈된 데다 운송해 오는 軍糧도 충분하지 못하다. 장군은 국가와 마음을 함께하니 좋은 계책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심이 대답하기를 “나라 군대가 매우 勇猛하여 칠 수가 없으니 의당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말제가 다시 사람을 보내 유심에게 必勝의 계책을 물었는데, 유심이 말하기를 “신은 좋은 계책이 없으니 사람마다 쌀 10을 주십시오. 쌀이 떨어지면 적군이 격파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말제가 크게 노하여 유심을 꾸짖기를 “장군이 군량을 쌓아 둔 것은 굶주린 백성을 먹이려고 해서인가, 아니면 적을 무찌르려는 것인가?”라고 하고 이에 使者를 보내 그 군대를 감독하였다.
유심이 장수들을 불러 의논하기를 “主上께서 禁中에 깊숙이 계시면서 白面書生과 의논하시니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이다. 지금 적군이 強盛하니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니,
장수들이 모두 싸우고자 하거늘 유심이 이에 장수들을 다 불러다가 軍門에 앉게 하고 사람마다 黃河의 물을 한 잔씩 마시게 하니, 장수들이 유심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여 마시기도 하고 사양하기도 하였다.
유심이 말하기를 “물 한 잔 마시게 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 일인데 도도한 황하의 물을 다 마시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장수들이 다 낯빛이 변하였다.
이때에 莊宗魏州에 있으면서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劉鄩의 군영을 자주 압박하였는데, 유심이 나가 싸우려고 하지 않으니 末帝가 다시 자주 유심을 독촉하여 나가 싸우게 하였다.
장종이 장수들과 의논하기를 “유심은 ≪六韜≫를 배워 臨機應變으로 用兵하기를 좋아하여 본래 자기 쪽의 약한 형세를 보여주어 우리를 습격하고자 할 것이다. 지금 그는 재촉을 받고 있으니 반드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太原으로 돌아간다고 말을 퍼뜨리고 符存審에게 위주를 지키라고 명하고서 거짓으로 서쪽으로 돌아가는 척하면서 貝州에 군대를 매복하였다. 그러자 유심이 과연 말제에게 보고하기를 “晉王이 서쪽으로 돌아가서 위주에 수비가 없으니 공격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병사 만 명을 거느리고 魏城의 동쪽을 공격했는데 장종이 패주에서 돌아와 습격하였다. 유심이 뜻밖에 나라 군대를 보고 놀라서 “진왕이 여기에 있었는가.”라고 하고 군대를 조금씩 퇴각하니 추격하여 옛 元城에 이르렀다.
장종이 부존심과 함께 양쪽에서 方陣을 치고 협공하자 유심이 圓陣을 쳐서 나라 군대를 막았다. 양 군대가 두 차례 교전한 뒤 유심이 대패하여 남쪽으로 달아나 黎陽에서 黃河를 건너 滑州를 지켰다.
말제가 유심을 義成軍節度使로 삼았는데 이듬해 河朔 지방이 모두 나라에 들어가자 유심을 亳州團練使로 강등하였다.
兗州 張萬進이 배반하자 劉鄩兗州安撫制置使에 배수하였는데 장만진이 패하여 죽자 유심을 泰寧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朱友謙이 배반하여 同州를 함락시키자 末帝가 유심을 河東道招討使로 삼았다. 군대가 진군하여 陝州에 이르러 유심이 서신을 써서 주우겸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주우겸이 대답하지 않으니 달포를 머무르며 기다렸다.
尹皓段凝 등이 평소 유심을 미워하여 이에 그를 誣告하여 유심과 주우겸이 친족이므로 그가 머뭇거리며 敵勢를 키워주고 있다고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유심의 군대가 여러 차례 패배하자 이에 유심을 파면하여 洛陽으로 돌아오도록 하여 그를 毒殺하니 향년 64세였다. 中書令追贈하였다.


역주
역주1 劉鄩傳 : 劉鄩(861~923 山東 密州 安丘縣 사람으로, 劉掞이라고도 한다. 유심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23 〈梁書 第23 列傳13〉과 ≪新五代史≫ 卷22 〈梁臣傳 第10〉에 실려 있다. ≪신오대사≫에 수록된 유심의 전기는 ≪구오대사≫의 절반 정도로 축약되어 있다.
유심은 兵略이 뛰어나 ‘一步百計’로 일컬어지기도 했다. 처음에 王師範을 섬길 때 後梁의 장수인 兗州節度使 葛從周가 비워둔 兗州城을 지략으로 함락하였고 이후 갈종주가 공격해 오자 갈종주의 모친을 이용하여 공세를 늦추었다. 또 휘하 장수 王彦溫이 후량에 투항하여 상황이 불리해지자 이를 역으로 이용하여 왕언온이 후량에서 참수당하게 하였다. 이러한 몇 가지 사실을 통해 그의 뛰어난 책략을 알 수 있다.
한편 계속되는 梁나라의 攻勢를 견디지 못하고 왕사범이 後梁 太祖에게 투항하자 결국 유심 역시 그를 따라 투항하였는데 이때의 일화를 통해 그의 器局을 엿볼 수 있다.
이후 戰略家로서의 유심의 면모를 보여주는 것은 魏州에서 後唐 莊宗과 오랫동안 대치하던 때이다. 위주는 安祿山과 史思明의 난이 평정된 후 그들의 부하 장수들이 세운 河北三鎭이라는 세 개의 막강한 藩鎭 가운데 하나인 魏博天雄軍의 屬州로, 그곳의 전통적인 尙武 정신과 축적된 부를 통해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려고 했던 자가 바로 후량의 장수 楊師厚였다.
양사후는 912년 후량 태조가 살해되어 혼란한 틈을 타서 친위 부대 장수인 牙將들을 죽이고 羅周翰을 축출한 뒤 天雄軍節度使의 지위를 인정받고 銀槍效節軍을 조직하여 예전의 친위 부대였던 牙軍을 회복하였는데 그의 사후에 後梁 末帝와 후당 장종이 위주의 패권을 놓고 대치하게 된 것이다. 이 전투에서 유심은 後唐의 본거지 太原을 습격하는 계책을 써서 장종을 물러나게 하려 했다가 실패하였고, 이후 말제의 出征 독촉에 시달리고 장종의 책략에 휘말려 결국 전투에 패배하여 위주를 잃게 되었다.
하지만 이 전투를 통해 유심은 필승을 위한 전술을 고민하는 전략가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보여주는바, 유심과 장종 두 사람이 펼치는 지략 대결 또한 흥미진진하며, 한편으로 實戰의 한 사례로도 음미해볼 만하다.
마지막으로 ≪구오대사≫ 권23에는 유심을 비롯하여 賀瓌(858~919), 康懷英, 王景仁이 수록되어 있고 그 마지막에 이들을 總評하는 史臣의 말이 있어 참고가 되는바, 인용해보면 다음과 같다.
“유심은 機略으로 자부하였고 하괴는 忠毅로 일컬어졌으며 강회영은 용맹함으로 當世를 보좌하였고 왕경인은 貞純함으로 국가에 보답하였는데 그들의 功業을 비교해보자면 모두 名將이라고 하겠다. 하지만 비록 전투를 잘 수행한 공로가 있지만 또한 전쟁에 패배한 罪過도 있으니 이를 통해 軍事에 늘상 이기는 법이란 없음을 알 수 있으니 어찌 이 말이 빈 말이겠는가! 그렇지만 유심이 兗州를 占據하고서 왕사범에게 忠誠을 다한 것은 英公(李勣 事跡과 견줄 만하니 이 몇몇 장수들과 비교하면 한 등급 위라고 하겠다.[劉鄩以機略自負 賀瓌以忠毅見稱 懷英以驍勇佐時 景仁以貞純許國 較其器業 皆名將也 然雖有善戰之勞 亦有敗軍之咎 則知兵無常勝 豈虛言哉 然鄩之據兖州也 盡誠於師範 比跡於英公 方之數侯 加一等矣]”
역주2 王敬武 : ?~889. 唐나라 말엽의 軍閥로, 靑州 사람이다. 처음에 節度使 安師儒의 막하에 있었는데 881년 靑州와 棣州 일대에 농민 봉기가 일어나자 안사유가 王敬武에게 가서 진압하게 하였다. 왕경무는 농민 봉기를 진압하고 돌아온 뒤 수중의 군사를 거느리고 안사유를 몰아내고 스스로 留後가 되었다. 그는 唐 僖宗에게 충성하지 않고 당시 長安을 점거하여 大齊皇帝로 자칭한 黃巢에게 투항하였다. 재상 王鐸이 張濬을 보내 그를 설득하면서 유후에 제수하였으나 왕경무는 처음에 거절하고 받아들이지 않다가 휘하 군사들의 압박으로 조정의 임명을 받아들여 군대를 보내 왕탁을 도왔다. 이후 節度使에 임명되었다가 唐나라 군대가 長安을 수복한 뒤 同中書門下平章事 檢校太尉에 제수되었다.
그가 죽은 뒤 아들 王師範이 15세에 지위를 계승하였는데 部將 張蟾이 왕사범을 인정하지 않았고 조정에서도 太子少師 崔安潛을 몰래 平盧節度使에 임명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890년에 왕사범이 장섬 및 그의 동맹 盧弘을 격퇴시키자 최안잠이 장안으로 도망쳐 돌아오므로 왕사범에게 그대로 平盧를 다스리게 하였다.
역주3 梁太祖西攻鳳翔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이미 〈梁臣傳〉이라고 하였으면서 본문에서 다시 梁나라를 칭한 것은 外人으로 보는 것이다. 〈牛存節傳〉에서 ‘이어 자기 무리 10여 명을 거느리고서 梁 太祖의 휘하에 들어갔다.’고 하고, 〈徐懷玉傳〉에서 ‘젊은 시절 양 태조를 섬겼다.’고 하고, 〈楊師厚傳〉에서 ‘양 태조가 宣武軍押衙로 삼았다.’고 하고, 〈王景仁傳〉에서 ‘양 태조가 그 아들 朱友寧을 보내 靑州에서 王師範을 공격하였다.’, ‘양 태조가 평소부터 王景仁을 알고 있었다.’고 하고, 〈賀瓌傳〉에서 ‘양 태조가 兗州에서 朱瑾을 공격하였다.’고 하고, 〈王檀傳〉에서 ‘젊은 시절 양 태조를 섬겨 小校가 되었다.’고 하고, 〈馬嗣勳傳〉에서 ‘양 태조가 濠州를 공격하였다.’고 하고, 〈謝彦章傳〉에서 ‘양 태조를 섬겨 騎將이 되었다.’고 하고, 晉臣 3인의 列傳에서 세 번 ‘晉 高祖’라고 칭하였고, 漢臣 〈蘇逢吉傳〉에서 ‘漢 高祖가 河東을 鎭守하였다.’고 하고, 〈史弘肇傳〉에서 ‘한 고조가 禁兵을 관장하였다.’고 하고, 〈楊邠傳〉에서 ‘한 고조를 섬겨 右都押衙가 되었다.’고 하고, 〈王章傳〉에서 ‘한 고조가 금병을 관장하였다.’고 하고, 〈劉銖傳〉에서 ‘한 고조와 예부터 친분이 있었다.’고 하고, 〈聶文進傳〉에서 ‘한 고조의 帳中에서 供職하였다.’고 하고, 〈後贊傳〉에서 ‘後贊이 다시 한 고조를 섬겼다.’고 하고, 〈郭允明傳〉에서 ‘젊은 시절 한 고조의 노비였다.’고 하고, 周臣 〈王朴傳〉에서 ‘周 世宗이 澶州를 鎭守하였다.’고 하고, 〈鄭仁誨傳〉에서 세 번 ‘周 太祖’라고 칭하였으니 모두 잘못이다.[按旣曰梁臣傳 此復稱梁 是外之矣 牛存節傅 乃率其徒十餘人歸梁太祖 徐懷玉傳 少事梁太祖 楊師厚傳 梁太祖以爲宣武軍押衙 王景仁傳 梁太祖遣其子友寧攻王師範于靑州 梁太祖素識景仁 賀瓌傳 梁太祖攻朱瑾于兗州 王檀傳 少事梁太祖爲小校 馬嗣勳傳 梁太祖攻濠州 謝彦章傳 事梁太祖爲騎將 晉臣三傳 三稱晉高祖 漢臣蘇逢吉傳 漢高祖鎭河東 史弘肇傳 漢高祖典禁兵 楊邠傳 事漢高祖爲右都押衙 王章傳 漢高祖典禁兵 劉銖傳 與漢高祖有舊 聶文進傳 給事漢高祖帳中 後贊傳 贊更事漢高祖 郭允明傳 少爲漢高祖廝養 周臣王朴傳 周世宗鎭澶州 鄭仁誨傳三稱周太祖 皆誤]”라고 하였다.
역주4 : ≪新五代史≫에는 ‘陰’자로 되어 있다.
역주5 葛從周 : 字는 通美로, 濮州 鄄城 사람이다. 唐末 朱溫의 수하 장수였다. 처음에 黃巢의 군대에 참가하였다. 中和 4년(884) 주온이 王滿渡에서 황소를 크게 물리치자 葛從周는 주온에게 투항하여 그를 따라 秦宗權‧朱宣‧時溥를 물리치고 洺州‧刑州‧磁州 3州를 함락하였다. 여러 차례 전공을 세워 泰寧軍節度使 檢校太傅에 임명되었다. 주온이 梁나라를 세운 뒤 左金吾衛上將軍에 제수되었는데 질병으로 치사하므로 右衛上將軍에 제수되어 偃師에서 지냈다. 朱友貞이 즉위하자 潞州節度使에 제수하고 檢校太師 兼侍中을 더하고 陳留郡王에 進封하였다. 太尉에 追贈되었다.
역주6 朱友寧 : ?~903. 字는 安仁으로, 朗王 朱存의 아들이다. 어려서부터 聰敏하여 詩禮와 兵法을 익혀 빼어난 풍모가 있었다. 梁 太祖가 軍校로 삼았는데 弓劍을 잘 다루었다. 衙內制勝都指揮使 龔州刺史로 승진하였다. 여러 차례 태조를 따라 전투에 참가하여 秦宗權을 섬멸한 뒤에 진종권을 長安으로 押送하는 책임을 맡았다. 王師範과 전투할 때 齊州‧兗州‧營丘에서 여러 차례 왕사범의 군대를 격퇴하였는데 石樓에서 전투할 때 말을 달려 왕사범의 軍陣에 들어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죽임을 당하였다.
역주7 版輿 : 부들방석을 깔아 푹신하게 만든 노인용 가마로, 板輿라고도 한다. 晉나라의 潘岳이 어머니를 모시고 유람할 때 탔던 가마로, 그가 지은 〈閑居賦〉에 “太夫人을 이에 판여에 태우고서 輕軒을 타고 멀리로는 王畿를 유람하고, 가까이로는 家園을 둘러본다.[太夫人乃御版輿 升輕軒 遠賢王畿 近周家園]” 하였다.(≪晉書≫ 卷55 〈潘岳傳〉)
역주8 末帝 : 後梁의 마지막 황제 朱友貞(888~923 가리킨다. 後梁 太祖 朱溫의 셋째 아들이다. 성격이 침착하고 후덕하면서 말수가 적었고, 儒士를 좋아했다. 태조가 즉위하자 均王에 봉해졌다. 朱友珪가 등극하자 東京留守와 開封尹을 역임하였는데 얼마 뒤 군대를 일으켜 주우규를 살해하였다. 즉위하자 鍠으로 改名하고 연호를 乾化로 고쳤다. 얼마 뒤 다시 瑱으로 개명하였다. 晉王 李存勖과 여러 차례 전쟁을 치렀으나 결국 패하여 죽임을 당하고 후량은 멸망하였다.
역주9 賀德倫 : 선조는 河西 部落 사람이고, 부친은 賀懷慶으로 滑州軍의 小校였다. 賀德倫은 젊어서 활주의 牙將이 되었다. 梁 太祖가 四鎭을 다스릴 때 하덕륜은 戰功을 연이어 세워 여러 차례 刺史와 留後를 역임하고 平盧軍節度使로 승진하였다. 魏博의 楊師厚가 죽자 조정에서 하덕륜을 그 후임으로 삼았다. 貞明 元年(915) 3월 20일 밤에 魏軍이 반란을 일으켜 하덕륜을 붙잡아 別館에 가두고 그 부하들을 모두 죽였다. 반란군의 우두머리 張彦에게 핍박받아 太原에 있는 晉王에게 투항하였다.
역주10 太原 : 중국 山西省의 省都로 太原은 매우 큰 평야라는 뜻이다. 春秋時代에는 晉陽이라 하였고, 戰國時代에는 趙나라의 수도였다. 秦나라 때에는 太原郡에 속했으며 唐나라 이후 太原府에 속했다. 五代에는 晉王 李克用 때부터 後唐의 근거지였다.
역주11 甬道 : 軍糧을 운반하기 위해 외부에서 보이지 않도록 양쪽에 담을 쌓은 길을 말한다.
역주12 閫外之事 : 지방의 軍權 혹은 征伐의 책임을 맡은 장수의 일을 뜻한다. 閫은 도성문으로 閫外之職의 약칭인바, 옛날 장수를 임명하여 외지로 보낼 적에 임금이 장수에게 당부하기를 “도성문 이내는 과인이 통제하고 도성문 밖은 장군이 통제하라.[閫以內 寡人制之 閫以外 將軍制之]” 한 데서 유래하였다.(≪史記≫ 卷102 〈張釋之馮唐列傳〉)
역주13 河朔 : 黃河 이북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역주14 飛輓 : 飛芻輓粟의 줄임말로, ‘輓’은 ‘挽’으로도 쓴다. 꼴을 빨리 보내고 식량을 실어 보낸다는 뜻으로, 군량을 신속하게 실어 보내는 일을 말한다. 唐나라 陸贄의 〈論兩河及淮西利害狀〉에 “關右 지역의 수레와 말을 징발하는 소요를 그치게 하고, 山東 지방의 飛芻輓粟의 노고를 줄어들게 한다.[罷關右賦車籍馬之擾 減山東飛芻輓粟之勞]”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15 (徃)[在] : 저본에는 ‘徃’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在’로 바로잡았다.
역주16 六韜 : 兵書의 이름으로, 文韜‧武韜‧龍韜‧虎韜‧豹韜‧犬韜의 6권으로 되어 있다. 周나라 때 太公望이 지은 것이라고 전해지나 후세의 僞作이다.
역주17 黎陽 : 지금의 河南省 浚縣 동남쪽 지역이었다.
역주18 自黎陽濟河……末帝以爲義成軍節度使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新五代史≫ 〈職方攷〉에서 ‘滑州는 唐代에 본래 義成이라고 하였는데 梁王 朱全忠의 부친의 諱(朱誠 피하여 고쳐 宣義라 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부분의 義成은 宣義가 되어야 한다. 〈霍彦威傳〉, 〈和凝傳〉에 모두 같다.[謹案職方攷 滑州唐故曰義成 以避梁王父諱 改曰宣義 此義成當作宣義 霍彦威和凝傳拉同]”라고 하였고,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新五代史≫ 〈職方攷〉에서 ‘滑州는 唐代에 본래 義成이라고 하였는데 梁王 朱全忠의 부친의 諱를 피하여 고쳐 宣義라 하였다. 後唐이 後梁을 멸망시키고 옛 지명을 회복하였다.’고 하였으니 이 부분은 착오이다.[謹案職方攷 滑州唐故曰義成 以避梁王父諱 改曰宣義 唐滅梁 復其故 此誤]”라고 하였다.
역주19 明年……降鄩亳州團練使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劉鄩의 옛 元城에서의 패배는 梁나라 貞明 2년(916) 있었는데 衛州‧惠州‧洺州‧相州‧邢州‧滄州‧貝州 등 여러 州가 곧바로 이어 晉나라에 들어갔다. 그래서 ≪資治通鑑≫의 이해 9월에서, ‘이에 河北이 모두 晉나라에 들어가고 오직 黎陽만 梁나라가 지키는 곳이었다.’라고 하였으니, 이 부분의 ‘明年’ 2자는 의당 ‘鄩降亳州團練使’에 붙여 말해야 한다. 그러나 말의 순서가 잘못되었다. 薛居正의 ≪舊五代史≫ 〈梁末帝紀〉의 정명 2년에서 ‘이해에 하북의 여러 주가 모두 晉나라에 들어갔다.’고 하였는데 본문에서는 ‘諸州’ 2자를 생략하여 말하면서 ‘河朔’만 말하였으니 여양이 여전히 梁나라가 지키는 곳이라는 것은 일이 또 맞아떨어지지 않는다. 또 설거정의 ≪구오대사≫ 〈劉鄩傳〉에는 ‘정명 2년 3월에 유심이 싸우다 패하여 여양에서 河水를 건너 滑州에 이르렀다. 유심이 滑州節度使를 제수받으니 조서를 내려 여양에 주둔하게 하였다. 정명 2년 2월에 晉나라가 군대를 모두 출동하여 여양을 공격하자 유심이 방어하여 물리쳤다. 유심이 대궐에 돌아가게 되자 다시 開封尹이 되어 鎭南을 맡았다.’라고 하였는데 〈≪신오대사≫에는〉 모두 수록하지 않았다.[謹案劉鄩故元城之敗 在梁貞明二年 而衛惠洺相邢滄貝諸州 卽相繼入晉 故通鑑于是年九月云 于是河北皆入于晉 惟黎陽爲梁守也 此明年二字 當屬鄩降亳州團練使言之 然語爲失次 薛史梁紀于貞明二年云 是歲 河北諸州悉入于晉 此省云諸州二字 而單言河朔 則于黎陽之尙爲梁守者 事又不協 又薛史鄩傳 貞明二年三月 鄩戰敗 自黎陽濟河至滑州 尋授滑州節度使 詔屯黎陽 二年二月 晉悉衆攻黎陽 鄩拒之而退 及鄩歸闕 再尹開封領鎭南 皆不著]”라고 하였다.
역주20 張萬進 : 雲州 사람으로, 원래 운주의 小校였는데 幽州로 망명하니 劉守光이 후하게 대우하여 裨將에 임명하였다. 滄州 劉守文이 아우 유수광이 부친을 가두고 그 자리를 빼앗았다고 하여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아우의 죄를 물었는데 雞蘇에서 패하였다. 유수광이 마침내 滄州와 景州를 모두 차지하고 자기 아들 劉繼威에게 맡겼는데 유계위가 어려서 政事를 제대로 처리하지 못해 張萬進에게 그를 보좌하게 하여 軍政에 관한 일은 모두 장만진에게 위임하였다. 유계위는 흉악함이 부친을 닮았는데 장만진의 집에서 음란한 짓을 벌이자 장만진이 노하여 그를 죽였다. 장만진이 梁나라에 투항하자 義昌留後로 삼았다가 義昌을 順化軍으로 바꾸고 장만진을 順化軍節度使로 삼았다. 이후 다시 晉나라에 투항하였는데 얼마 후 梁 末帝가 楊師厚‧劉守奇를 보내 鎭州‧冀州를 습격하면서 이어 동쪽으로 창주를 공격하자 장만진이 투항하였다. 양사후는 表奏하여 靑州節度使로 삼았다가 이윽고 兗州로 옮기고 이어 守進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그러나 貞明 4년(918) 겨울에 반란하고서 사신을 보내 晉王에게 투항하였다. 양 말제는 그의 官爵을 삭탈하고 劉鄩을 보내 토벌하였는데 晉나라가 구원하지 못하였다. 정명 5년 겨울에 小將 邢師遇가 몰래 內應을 모의하여 성문을 열고 梁나라 군대를 받아들여 마침내 성을 함락하고는 장만진을 멸족하였다.
역주21 同州 : 지금의 陝西省 大荔縣 일대이다.
역주22 段凝 : ?~928. 開封 사람이다. 本名은 明遠으로,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智略이 많았다. 처음에 河南府 澠池縣主簿를 지냈다가 梁 太祖를 섬기니 태조가 점차 인재로 여겼다. 開平 3년(909) 右威衛大將軍이 되었다가 左軍巡使 兼水北巡檢使가 되었고, 그의 누이가 미색이 있어 양 태조에게 바친 뒤로 점점 태조의 심복이 되었다. 梁나라가 망한 뒤 정예 병사 5만을 거느리고 後唐에 투항하니 莊宗이 점점 총애하여 李紹欽이라는 姓名을 하사하고 泰寧軍節度使로 삼았다. 明宗이 즉위한 해에 고향으로 돌아가게 하였다가 이듬해 遼州에 長流하고 賜死하였다.
역주23 故其逗留以養賊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교감하건대, ‘其’자는 삭제해도 된다.[校其字可去]”라고 하였다.
역주24 鄩兵數敗……酖殺之 : ≪新五代史≫ 권22 〈考證〉에 “살펴보건대, 司馬光의 ≪資治通鑑≫에 이르기를, ‘몰래 留守 張宗奭으로 하여금 독살하게 하니 丁亥日에 죽었다.’고 하였고, 胡三省의 ≪資治通鑑考異≫에 ‘≪莊宗實錄≫에는 근심과 분노로 병이 나서 죽었다.’고 하였는데 참고를 위해 수록한다.[按司馬光通鑑云 密令留守張宗奭酖之 丁亥卒 胡三省考異 莊宗實錄則云 憂恚發病卒 存考]”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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