劉鄩
은 密州安丘人也
라 少事靑州
러니 敬武卒
에 子師範立
한대 棣州刺史張蟾叛
커늘 師範遣指揮使盧洪討蟾
하니 洪亦叛
이라
師範僞爲好辭하야 召洪하야 洪至에 迎於郊外하야 命鄩斬之坐上하고 因使鄩攻張蟾破之하다 師範表鄩登州刺史하야 以爲行軍司馬하다
하니 師範乘梁虛
하야 遣人分襲梁諸州縣
커늘 他遣者謀多漏洩
하야 事不成
이로되 獨鄩素好兵書
하야 有機略
이라
是時
에 梁已破朱瑾等
하야 悉有兗鄆
하야 以
爲兗州節度使
하니 從周將兵在外
어늘 鄩乃使人負油鬻城中
하야 悉視城中虛實出入之所
하다
油者得羅城下水竇可入일새 鄩乃以步兵五百으로 從水竇入하야 襲破之하고 徙從周家屬外第하고 親拜其母하야 撫之甚有恩禮하다
太祖已出昭宗于鳳翔
하고 引兵東還
하야 遣
攻師範
하고 從周攻鄩
한대
鄩以
置從周母城上
하니 母呼從周曰 劉將軍待我甚厚
가 無異於汝
라 人臣各爲其主
니 汝可察之
라하니 從周爲之緩攻
하다
鄩乃悉簡婦人及民之老疾不足當敵者出之하고 獨與少壯者로 同辛苦하고 分衣食하야 堅守以待外援이나
久之에 外援不至라 人心頗離하야 副使王彦溫이 踰城而奔하고 守陴者多逸이라
鄩乃遣人陽語彦溫曰 副使勿多以人出이니 非吾素遣者면 皆勿以行하라하고
又下令城中曰 吾遣從副使者得出이어니와 否者인댄 皆族이라하니 城中皆惑하야 奔者乃止하다
已而오 梁兵聞之하고 果疑彦溫非實降者하야 乃斬之城下하니 由是로 城守益堅이라
師範兵已屈이라 從周以禍福諭鄩한대 鄩報曰 俟吾主降하야 卽以城還梁이라하다 師範敗하야 降梁하니 鄩乃亦降하다
從周爲具齎裝하야 送鄩歸梁하니 鄩曰 降將蒙梁恩不誅가 幸矣니 敢乘馬而衣裘乎아하고
乃素服乘驢歸梁하니 太祖賜之冠帶하고 飮之以酒어늘 鄩辭以量小하니 太祖曰 取兗州하니 量何大乎아하고 以爲元從都押衙하다
是時에 太祖已領四鎭하니 四鎭將吏皆功臣舊人이로되 鄩一旦以降將居其上이어늘
及諸將見鄩하야 皆用軍禮한대 鄩居自如하니 太祖益奇之하다
太祖卽位에 累遷左龍武統軍하다 劉知俊叛하야 陷長安하니 太祖遣鄩與牛存節하야 討之한대 知俊走鳳翔이어늘
太祖乃以長安爲永平軍
하야 拜鄩節度使
하다 卽位
에 領鎭南軍節度使
하야 爲開封尹
하다
楊師厚卒
에 分相魏爲兩鎭
하니 末帝恐魏兵亂
하야 遣鄩以兵屯于魏縣
한대 魏兵果亂
하야 劫
降晉
이라
莊宗入魏
하니 鄩以謂晉兵悉從莊宗赴魏
하니 而
可襲
이라하고
乃結草爲人호되 執以旗幟하고 以驢負之하야 往來城上하고 而潛軍出黃澤關하야 襲太原하다 晉兵望梁壘旗幟往來하고 不知其去也라 以故不追하다
鄩至樂平
하야 遇雨
하야 不克進而旋
하야 急趨臨淸
하야 爭魏積粟
한대 而周德威已先至
라 鄩乃屯于莘縣
하야 築
及河
하야 以饋軍
하다
久之
에 末帝以書責鄩曰
를 全付將軍
이어늘 諸州一旦淪沒
이라
今倉儲已竭
하고 不充
이라 將軍與國同心
하니 宜思良畫
이라한대 鄩報曰 晉兵甚銳
하야 未可擊
하니 宜待之
라하니
末帝復遣問鄩必勝之策한대 鄩曰 臣無奇術하니 請人給米十斛하소서 米盡則敵破矣라하니
末帝大怒하야 誚鄩曰 將軍蓄米는 將療饑乎아 將破敵乎아하고 乃遣使者監督其軍하다
鄩召諸將謀曰 主上深居禁中하야 與白面兒謀하니 必敗人事라 今敵盛하니 未可輕動이라 諸君以爲如何오하니
諸將皆欲戰이어늘 鄩乃悉召諸將하야 坐之軍門하고 人以河水一杯飮之하니 諸將莫測하야 或飮或辭라
鄩曰 一杯之難도 猶若此어든 滔滔河流를 可盡乎아하니 諸將皆失色하다
是時
에 莊宗
魏
에 數以勁兵壓鄩營
이어늘 鄩不肯出
하니 而末帝又數促鄩
하야 使出戰
이라
莊宗與諸將謀曰 劉鄩學
하야 喜以機變用兵
하야 本欲示弱以襲我
라 今其見迫
하니 必求速戰
이라하다
乃聲言歸太原하고 命符存審守魏하고 陽爲西歸而潛兵貝州라 鄩果報末帝曰 晉王西歸하야 魏無備하니 可擊이라하다
乃以兵萬人으로 攻魏城東한대 莊宗自貝州返趨擊之라 鄩忽見晉軍하고 驚曰 晉王在此邪아하고 兵稍却하니 追至故元城이라
莊宗與符存審
으로 爲兩方陣夾之
한대 鄩爲圓陣以禦晉人
이라 兵再合
에 鄩大敗
하야 南奔
하야 自
濟河
하야 保滑州
하다
兗州
反
커늘 拜鄩兗州安撫制置使
러니 萬進敗死
에 乃拜鄩泰寧軍節度使
하다
朱友謙叛
하야 陷
어늘 末帝以鄩爲河東道招討使
라 行次陝州
하야 鄩爲書以招友謙
이로되 友謙不報
하니 留月餘待之
라
尹皓
等素惡鄩
하야 乃譖之
하야 以爲鄩與友謙親家
라 이라하야늘
劉鄩은 密州 安丘 사람이다. 젊은 시절 靑州 王敬武를 섬겼는데 왕경무가 卒하고 나서 그 아들 王師範이 즉위하자 棣州刺史 張蟾이 배반하거늘 왕사범이 指揮使 盧洪을 보내 장섬을 토벌하게 하니 노홍 역시 배반하였다.
왕사범이 거짓으로 좋은 말을 꾸며 노홍을 불러 노홍이 이르자 郊外에서 맞이하면서 유심에게 명하여 앉은 자리에서 그를 斬殺하고 이어 유심에게 장섬을 쳐서 격파하게 하였다. 왕사범이 表奏하여 유심을 登州刺史로 삼아 行軍司馬로 임명하였다.
梁 太祖가 서쪽으로 鳳翔을 공격하니 王師範이 梁나라가 비어 있는 틈을 타 은밀히 군사를 파견하여 梁의 州縣들을 나누어 습격하였는데 파견된 자들이 계획을 많이 누설하여 성공하지 못했다. 하지만 유독 劉鄩은 평소 兵書를 좋아하여 機略이 있었다.
이때에 梁나라가 이미 朱瑾 등을 격파하여 兗州‧鄆州를 다 차지하고 葛從周를 兗州節度使로 삼으니 갈종주가 외부에서 군사를 거느리고 있었는데, 유심이 이에 사람을 시켜 기름을 지고 城中에서 팔면서 성중의 虛實과 드나들 수 있는 길을 모두 살피게 하였다.
기름 파는 이가 진입할 수 있는 城下의 水路를 파악하자 유심이 이에 步兵 500명을 데리고 수로를 통해 들어가 기습하여 격파하고, 갈종주의 家屬들을 外第에 옮기고 그의 모친에게 친히 절하고서 매우 예우를 갖추어 위무하였다.
梁 太祖가 鳳翔에서 唐 昭宗을 나오게 한 뒤 군대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오면서 朱友寧을 보내 王師範을 공격하고 葛從周를 보내 劉鄩을 공격하자,
유심이 版輿로 갈종주의 모친을 태워 성 위에 오니 모친이 갈종주를 부르며 말하기를 “劉將軍이 나를 매우 후하게 대우해주는 것이 너와 다를 바가 없다. 신하는 저마다 그 主君을 위하는 것이니 너는 이 점을 잘 알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갈종주가 이 일로 공세를 늦추었다.
유심이 이에 婦人과 백성 가운데 늙고 병들어 적과 싸우지 못할 자들을 모두 가려서 내보내고, 오직 젊고 건장한 이들과 辛苦를 함께하고 衣食을 나눠가며 굳게 지키면서 성 밖의 원군을 기다렸다.
그러나 오래 지나도 성 밖의 원군이 이르지 않자 민심이 자못 離反하여 副使 王彦溫이 성을 넘어 달아났고 성을 지키던 이들 가운데 도망가는 이가 많았다.
유심이 이에 사람을 보내 왕언온에게 거짓으로 말하기를 “부사는 사람들을 많이 데리고 가지 말 것이니 내가 평소 보낸 이가 아니면 모두 데리고 가지 말라.”라고 하고,
다시 성중에 명령을 내리기를 “내가 보내어 부사를 따라가는 이들은 성을 나갈 수 있거니와 그렇게 하지 않으면 滅族시킬 것이다.”라고 하니, 성중 사람들이 모두 이 명령에 속아 도망가는 자들이 비로소 멈추었다.
이윽고 梁나라 군대가 이 일을 듣고 과연 왕언온이 진심으로 항복한 자가 아니라고 의심하여 이에 성 아래에서 그를 참수하니 이로부터 성을 수비하는 일이 더욱 견고해졌다.
王師範의 군대가 이미 궁지에 몰린지라 葛從周가 禍福을 가지고 劉鄩을 설득했는데, 유심이 대답하기를 “우리 主君이 항복할 때를 기다려 즉시 성을 梁나라에 돌려줄 것이다.”라고 하였다. 왕사범이 패배하여 梁나라에 投降하니 유심 역시 그제야 투항하였다.
갈종주가 유심을 위해 行裝을 꾸려주고 유심을 梁나라로 돌려보내니, 유심이 말하기를 “항복한 장수가 梁나라의 은혜를 입어 주벌되지 않은 것도 다행인데 감히 말을 타고 갖옷을 입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고,
이에 素服을 입고 나귀를 타고서 梁나라로 가니 太祖가 그에게 冠帶를 하사하고 술을 먹이자 유심이 주량이 적다고 사양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兗州를 취하였으니 局量이 이 얼마나 크단 말인가?”라고 하고 그를 元從都押衙로 삼았다.
이때에 태조가 이미 네 鎭을 차지하여 다스리니 네 鎭의 將吏들이 모두 功臣과 오랜 부하였는데 유심이 하루아침에 투항한 장수의 신분으로 그들의 윗자리를 차지하였다.
그런데도 장수들이 유심을 보게 되자 모두 軍禮를 갖추었는데 유심이 泰然自若하게 그대로 있으니 태조가 그를 더욱 비범하게 여겼다.
梁 太祖가 즉위하자 여러 차례 승진하여 左龍武統軍이 되었다. 劉知俊이 배반하여 長安을 함락하니 양 태조가 劉鄩과 牛存節을 보내 토벌하자 유지준이 鳳翔으로 달아나거늘,
양 태조가 이에 長安을 永平軍으로 고치고서 유심을 節度使에 배수하였다. 梁 末帝가 즉위하자 유심이 鎭南軍節度使를 맡아 開封尹이 되었다.
楊師厚가 졸한 뒤 相州와 魏州를 나누어 두 鎭으로 삼으니 梁 末帝가 魏兵이 반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劉鄩을 파견하여 魏縣에 군대를 주둔하였는데, 위병이 과연 반란을 일으켜 賀德倫을 협박하여 晉나라에 항복하였다.
그래서 莊宗이 위주에 들어가자, 유심이 晉나라 군대가 모두 장종을 따라 위주에 들어가니 太原을 습격할 만하다고 여기고서,
이에 풀을 엮어 사람 모양을 만들되 깃발을 잡게 하고 나귀에 태워 성 위를 왕래하게 하고는 군대를 몰래 빼어 黃澤關으로 나가 태원을 습격하였다. 晉나라 군대는 梁나라 城壘에 깃발이 왕래하는 것을 바라보고 그들이 간 곳을 몰랐기 때문에 추격하지 않았다.
유심이 樂平에 이르러 비를 만나 전진하지 못하고 회군하여 급히 臨淸으로 가서 위주의 쌓아둔 양식을 다투었는데 周德威가 벌써 먼저 와 있었다. 유심이 이에 莘縣에 주둔하고서 黃河까지 닿도록 甬道를 수축하여 군대에 양식을 대었다.
시일이 오래 지나자 梁 末帝가 서신을 보내 劉鄩을 問責하기를 “閫外의 일을 將軍에게 전적으로 맡겼는데 河朔의 州들이 하루아침에 다 상실되었다.
지금 창고에 쌓아둔 곡식이 이미 고갈된 데다 운송해 오는 軍糧도 충분하지 못하다. 장군은 국가와 마음을 함께하니 좋은 계책을 생각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심이 대답하기를 “晉나라 군대가 매우 勇猛하여 칠 수가 없으니 의당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말제가 다시 사람을 보내 유심에게 必勝의 계책을 물었는데, 유심이 말하기를 “신은 좋은 계책이 없으니 사람마다 쌀 10斛을 주십시오. 쌀이 떨어지면 적군이 격파될 것입니다.”라고 하니,
말제가 크게 노하여 유심을 꾸짖기를 “장군이 군량을 쌓아 둔 것은 굶주린 백성을 먹이려고 해서인가, 아니면 적을 무찌르려는 것인가?”라고 하고 이에 使者를 보내 그 군대를 감독하였다.
유심이 장수들을 불러 의논하기를 “主上께서 禁中에 깊숙이 계시면서 白面書生과 의논하시니 반드시 일을 그르칠 것이다. 지금 적군이 強盛하니 가벼이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대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라고 하니,
장수들이 모두 싸우고자 하거늘 유심이 이에 장수들을 다 불러다가 軍門에 앉게 하고 사람마다 黃河의 물을 한 잔씩 마시게 하니, 장수들이 유심의 의중을 헤아리지 못하여 마시기도 하고 사양하기도 하였다.
유심이 말하기를 “물 한 잔 마시게 하는 것도 이렇게 어려운 일인데 도도한 황하의 물을 다 마시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니 장수들이 다 낯빛이 변하였다.
이때에 莊宗이 魏州에 있으면서 정예 병사를 거느리고 劉鄩의 군영을 자주 압박하였는데, 유심이 나가 싸우려고 하지 않으니 梁 末帝가 다시 자주 유심을 독촉하여 나가 싸우게 하였다.
장종이 장수들과 의논하기를 “유심은 ≪六韜≫를 배워 臨機應變으로 用兵하기를 좋아하여 본래 자기 쪽의 약한 형세를 보여주어 우리를 습격하고자 할 것이다. 지금 그는 재촉을 받고 있으니 반드시 속히 싸우려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太原으로 돌아간다고 말을 퍼뜨리고 符存審에게 위주를 지키라고 명하고서 거짓으로 서쪽으로 돌아가는 척하면서 貝州에 군대를 매복하였다. 그러자 유심이 과연 말제에게 보고하기를 “晉王이 서쪽으로 돌아가서 위주에 수비가 없으니 공격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어 병사 만 명을 거느리고 魏城의 동쪽을 공격했는데 장종이 패주에서 돌아와 습격하였다. 유심이 뜻밖에 晉나라 군대를 보고 놀라서 “진왕이 여기에 있었는가.”라고 하고 군대를 조금씩 퇴각하니 추격하여 옛 元城에 이르렀다.
장종이 부존심과 함께 양쪽에서 方陣을 치고 협공하자 유심이 圓陣을 쳐서 晉나라 군대를 막았다. 양 군대가 두 차례 교전한 뒤 유심이 대패하여 남쪽으로 달아나 黎陽에서 黃河를 건너 滑州를 지켰다.
말제가 유심을 義成軍節度使로 삼았는데 이듬해 河朔 지방이 모두 晉나라에 들어가자 유심을 亳州團練使로 강등하였다.
兗州 張萬進이 배반하자 劉鄩을 兗州安撫制置使에 배수하였는데 장만진이 패하여 죽자 유심을 泰寧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朱友謙이 배반하여 同州를 함락시키자 梁 末帝가 유심을 河東道招討使로 삼았다. 군대가 진군하여 陝州에 이르러 유심이 서신을 써서 주우겸에게 항복을 권유하였으나 주우겸이 대답하지 않으니 달포를 머무르며 기다렸다.
尹皓‧段凝 등이 평소 유심을 미워하여 이에 그를 誣告하여 유심과 주우겸이 친족이므로 그가 머뭇거리며 敵勢를 키워주고 있다고 하였는데,
얼마 있다가 유심의 군대가 여러 차례 패배하자 이에 유심을 파면하여 洛陽으로 돌아오도록 하여 그를 毒殺하니 향년 64세였다. 中書令에 追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