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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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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牛存節 贊正이니 靑州博昌人也 初名
於河陽이러니 爽卒 存節顧其徒曰 天下洶洶하니 當得英雄事之라하고 乃率其徒十餘人하야 歸梁太祖하다
하니 太祖愛之하야 賜之名字하고 以爲小校하다
張晊攻할새 存節破其二寨하고 梁攻할새 戰南劉橋范縣한대 存節功多
於河陽 全義乞兵於梁한대 太祖以存節故事河陽하야 知其間道라하야 使以兵爲前鋒이라
是時歲饑하야 兵行乏食이어늘 存節以金帛就民하야 易乾葚以食軍하고 擊走罕之하다
太祖攻魏할새 存節下魏黎陽臨河하야 殺魏萬二千人하고 與太祖會內黃하다 遷滑州牢城遏後指揮使하다
梁兵攻할새 存節使都將王言藏船鄆西北隅濠中하고 期以日午渡兵踰濠急攻之한대
會營中火起하야 鄆人登城望火하니 言伏不敢動하야 與存節失期한대 存節獨破鄆西甕城門하야 奪其濠橋하야 梁兵得俱進하야 遂破하다
從葛從周攻淮南할새 從周敗渒河어늘 存節收其散卒八千以歸하니 拜亳宿二州刺史하다
朱瑾走吳하야 召吳兵攻徐宿하니 存節謀曰 淮兵必不先攻宿이라 然宿溝壘素固하야 可以禦敵이라하야
乃夜以兵急趣徐州하야 傅徐城下하니 瑾兵方至하야 望其塵起하고 驚曰 梁兵已來하니 何其速也오하고 不能攻而去하다
已而 太祖使者至하야 授存節軍機하니 悉與存節意合이라 由是諸將益服其能하다 遷潞州都指揮使러니 太祖攻鳳翔할새 使召存節이라
存節爲將 法令嚴整而善得士心이라 潞人送者皆號泣하니라 累拜邢州團練使元帥府左都押衙하다
太祖卽位 拜右千牛衛上將軍하다 從康懷英攻潞州할새 爲行營排陣使
存節顧諸將曰 吾行雖不受命이나 然澤州 要害 不可失也라한대 諸將皆不欲救之
存節戒士卒熟息하고 已而 謂曰 事急不赴 豈曰 勇乎리오하고 擧策而先하니 士卒隨之하니라
比至澤州하야 州人已焚外城하야 將降晉이라가 聞存節至하고 乃稍定이라
存節入城하야 助澤人守어늘 晉人穴地道以攻之한대 存節選勇士數十하야 亦穴地以應之하야 戰于隧中하니 敵不得入하야 晉人解去하니라
遷左龍虎統軍六軍都指揮使絳州刺史라가 遷鄜州留後하다
友珪立 朱友謙叛附于晉하니 西連鳳翔일새 存節東西受敵하다
同州水鹹而無井일새 知俊叛梁 以渴不能守而走 故友謙與岐兵合圍持久하야 欲以渴疲之한대
存節禱而擇地하야 鑿井八十하니 水皆甘可食이라 友謙卒不能下하다
末帝立 加同中書門下平章事하고 徙鎭天平하다 反徐州 遣存節攻破之하고 以功加太尉하다
梁晉相於河上이러니 存節病痟로되 而梁晉方苦戰일새 存節忠憤彌激하야 治軍督士 未嘗言病이라
病革 召歸京師어늘 將卒 語其子知業曰 忠孝 吾子也라하고 不及其佗하니라 贈太師하다


06. 牛存節傳記
牛存節贊正이니 靑州 博昌 사람이다. 초명은 이다.
河陽에서 諸葛爽을 섬겼는데 제갈상이 죽자 우존절이 자기 무리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천하가 매우 어지러우니 영웅을 찾아 섬겨야 한다.”라고 하고, 자기 무리 10여 명을 거느리고서 太祖의 휘하에 들어갔다.
우존절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굳세며 충성스럽고 謹愼하니 양 태조가 그를 아껴서 이름과 를 하사하고 小校로 삼았다.
張晊汴州를 공격했을 때 牛存節이 그의 두 兵營을 격파하였고, 나라가 濮州를 공격할 때 南劉橋范縣에서 싸웠는데 우존절의 戰功이 많았다.
李罕之河陽에서 張全義를 포위했을 때 장전의가 나라에 원군을 요청하자, 太祖가 우존절이 예전에 하양에서 일하여 그곳의 사잇길을 잘 알고 있다고 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선봉에 서게 하였다.
이때 흉년이 들어 행군하면서 양식이 부족했는데 우존절이 금과 비단을 가지고 백성들에게 가서 말린 오디와 바꿔 군대를 먹이고 이한지를 격퇴하였다.
太祖를 공격할 때 우존절이 黎陽臨河를 함락하고서 魏軍 1만 2천 명을 죽이고 태조와 內黃에서 만났다. 滑州牢城遏後指揮使로 승진하였다.
나라 군대가 鄆州를 공격할 때 牛存節都將 王言을 보내 운주의 서북쪽 모퉁이 垓子에 배를 숨겨놓고 정오에 군대를 건네주어 해자를 넘어 급히 공격하도록 약속하였다.
그런데 때마침 군영에 불이 나서 운주 사람들이 성에 올라 불길을 바라보니 왕언이 매복한 채 감히 움직이지 못하여 우존절과 약속한 때를 놓치자, 우존절이 혼자 운주의 서쪽 甕城을 격파하여 그 해자의 다리를 탈취하여 나라 군대가 모두 성으로 진입할 수 있어 마침내 朱宣을 격파하였다.
葛從周를 따라 淮南을 공격할 때 갈종주가 渒河에서 패배하였는데 우존절이 그 흩어진 병졸 8천 명을 수습하여 돌아오니 太祖亳州宿州刺史에 제수하였다.
朱瑾나라로 달아나 나라 군대를 불러와서 徐州宿州를 공격하니 우존절이 계책을 세우기를 “의 군대는 반드시 숙주를 먼저 공격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렇지만 숙주는 해자와 城壘가 본래 견고하여 적병을 막을 수 있다.”라고 하고서,
밤에 군사를 거느리고 서주로 급히 달려가 서주 성 아래에 이르니, 주근의 군대가 막 도착하여 멀리서 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바라보고 놀라며 말하기를 “나라 군대가 벌써 왔으니 어쩌면 이리도 빠르단 말인가.”라고 하고는 공격하지 못하고 떠났다.
이윽고 양 태조의 사신이 이르러 우존절에게 군사기밀을 하달하니 우존절과 뜻이 모두 합치하였다. 이로부터 장수들이 우존절의 재능에 더욱 복종하였다. 潞州都指揮使로 옮겼는데 양 태조가 鳳翔을 공격할 때 사람을 보내 우존절을 불렀다.
우존절이 장수로서 지휘할 때 法令嚴整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잘 얻었는지라 전송하는 潞州 사람들이 모두 울부짖으며 슬퍼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邢州團練使 元帥府左都押衙에 제수되었다.
太祖가 즉위했을 때 牛存節右千牛衛上將軍에 배수하였다. 康懷英을 따라 潞州를 공격할 때 行營排陣使가 되었다.
나라 군대가 이미 夾城을 격파하고 나자 우존절 등이 남은 군사를 데리고 돌아오면서 행군하여 天井關에 이르러 나라 군대가 澤州를 공격한다는 소식을 들었다.
우존절이 장수들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우리가 이번 出征에서 비록 따로 명령을 받지는 않았지만 택주는 要害處이니 잃어서는 안 된다.”라고 하였는데 장수들이 모두 구원하려고 하지 않았다.
우존절이 병사들에게 충분히 휴식하게 한 다음 이윽고 이르기를 “사정이 위급한데 달려가지 않으면 어찌 용맹하다고 하겠는가.”라고 하고 채찍을 들어 앞장서니 병사들이 그를 따랐다.
택주에 이르자 택주 사람들이 벌써 外城을 불태우고서 나라에 항복하려 하다가 우존절이 이르렀다는 소식을 듣고 비로소 조금 안정하였다.
우존절이 성에 들어가 택주 사람들을 도와 수비하였는데, 나라 군대가 땅굴을 파서 공격하자 우존절이 勇士 수십 명을 선발하여 역시 땅굴을 파서 대응하여 땅굴 속에서 싸우니 적군이 성에 들어올 수가 없어서 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左龍虎統軍 六軍都指揮使 絳州刺史로 승진하였다가 鄜州留後로 승진하였다.
同州劉知俊이 배반하여 鳳翔으로 달아나니 이에 牛存節匡國軍節度使로 옮겼다.
朱友珪가 즉위하자 朱友謙이 배반하여 나라에 붙으니 서쪽으로 鳳翔과 이어지는지라 우존절이 동서 양면으로 공격을 받게 되었다.
동주는 물이 짠 데다 우물이 없기에 유지준이 나라를 배반하고 나서 물이 부족해 지킬 수가 없어 달아났다. 그래서 주우겸이 岐州 군대와 함께 동주를 포위하여 持久戰을 벌여 물이 부족한 것을 이용해 지치게 하려고 하자,
우존절이 기도하고 땅을 골라 여든 군데에 우물을 파니 물이 모두 달아 마실 만한지라 주우겸이 결국 함락하지 못하였다.
末帝가 즉위함에 同中書門下平章事의 직함을 더해주고 天平軍으로 옮겨 鎭守하게 하였다. 蔣殷徐州에서 반란하자 牛存節을 보내 격파하게 하고 그 戰功으로 太尉를 더하였다.
黃河를 사이에 두고 대치하고 있었는데 우존절이 消渴症을 앓고 있었으나 이 한창 힘겹게 싸우는 와중이기에 우존절은 忠憤이 더욱 격발하여 군대를 지휘하고 병사들을 독려하면서 자신의 병을 말한 적이 없었다.
병세가 위급해지자 召命을 받고 京師로 돌아왔는데 임종할 때가 되어 그 아들 牛知業에게 말하기를 “충성하고 효도하는 이가 내 아들이다.”라고 하고는 다른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 太師에 추증되었다.


역주
역주1 牛存節傳 : 牛存節(853~915 字가 贊正으로 靑州 博昌縣 사람이다. 우존절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22 〈梁書 第22 列傳12〉와 ≪新五代史≫ 卷22 〈梁臣傳 第10〉에 실려 있다. 歐陽脩는 ≪구오대사≫에 1천 4백여 자 분량인 우존절의 傳記를 8백여 자로 축약하여 서술하였는데, 두 史書의 기술에서 보이는 눈에 띄는 차이점을 하나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구오대사≫에서는 첫 부분에 “본명이 禮였는데, 梁 太祖가 그를 얻은 뒤 그의 이름을 고치고 字를 贊貞으로 하였다.”라고 한 뒤, 마지막 부분에서 “임종할 때 아들 知業과 知讓 등에게 忠孝로써 경계하고 다른 일은 언급하지 않았다.……용맹하고 강개하여 大節이 있었는데 野戰과 守城 모두 그의 特長이어서 威名이 境外에 알려져 末帝에게 깊이 존중받았고 木強하고 忠厚함은 賈復의 풍모가 있었다.”라고 하여 그의 生平을 간결하게 論評하였다.
이에 반해, ≪신오대사≫에서는 첫 부분에 “그의 爲人이 木強하고 忠謹하므로 태조가 그를 아껴서 이름과 자를 내려주었다.”고 한 뒤, 이어 그의 주요 행적을 차례대로 서술하고 끝내면서 별도의 논평을 가하지 않았다. 이는 아마도 그가 양 태조를 섬기며 충성을 한결같이 바쳤던 일은 그의 이름과 성품 및 평생의 사업을 통해서 드러내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여 삭제한 것으로 보인다.
앞서의 康懷英의 경우 초년에 승승장구하다가 말년에 접어들면서 여러 전투에서 패배하는 모습을 서술해간 반면에, 우존절의 경우는 비록 구양수가 ≪구오대사≫에 수록된 내용을 축약한 것이기는 하지만 그가 어려운 전투에 임해서도 맡은 임무를 완수하는 면모를 인상적으로 드러냄으로써 충성스럽고 강인한 모습이 점점 더 크게 부각되도록 하였다.
李罕之와의 전투에서 발생한 군량 부족 문제로 인한 어려움, 鄆州를 공격할 때 휘하 장수와의 약속이 어긋나 전술이 어그러져 발생한 어려움, 澤州를 지키려 할 때 휘하 장병들이 따르지 않아 곤란했던 어려움, 同州를 지킬 때의 食水 문제로 인한 어려움 등 우존절이 치른 전투는 하나같이 생각지 못한 逆境을 극복하며 쟁취한 것이었다.
우존절 역시 패배한 전투가 많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위에 든 몇몇 孤軍奮鬪를 특별히 열거함으로써 그가 힘겨운 상황에 처하면 처할수록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상황을 바꾸어낼 수 있었던 것은 그 根底에 그의 謹厚한 성품과 나라를 향한 충성이 깔려 있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역주2 諸葛爽 : ?~886. 靑州 博昌 사람이다. 본래 龐勳(?~869 반란군의 部下 小校였는데 唐나라에 투항한 뒤 汝州防禦使를 맡았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夏綏銀節度使 檢校尙書右僕射가 되었다. 黃巢가 長安을 함락하자 투항하여 河陽節度使가 되었다. 얼마 뒤 唐나라 朝廷에 복귀하여 檢校司徒가 되고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어 魏博節度使 韓簡을 물리쳤다. 光啓 2년(886) 軍中에서 病死하였다. 그는 사람됨이 비록 智謀가 있었고 法令이 嚴明하였으나 反複無常하여 인품에 흠이 있었다.
역주3 存節……木彊忠謹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뒷부분에 다시 ‘忠憤이 더욱 격발하였다.’고 하였으나 諸葛仲方(諸葛爽의 아들 섬기지 못하고 梁나라에 歸附하였으니 忠으로 인정할 수 없다.[按下又曰 忠憤彌激 不能事仲方而歸梁 不得以忠予之]”라고 하였다.
역주4 : 戰國時代에는 大梁, 東魏 때에는 梁州라고 했다가 隋‧唐에 이르러 汴州로 변경하였다. 교통의 요지로 漕運이 발달하였는데 後梁 太祖 朱全忠이 도읍으로 정한 뒤로 여러 조대에 걸쳐 수도로 정했기 때문에 汴京이라고도 부르게 되었다. 지금의 河南省 開封 일대를 말한다.
역주5 濮州 : 지금의 河南省 范縣 일대이다.
역주6 李罕之 : 842~899. 陳州 項城 사람이다. 唐末 五代 때의 軍閥로, 성품이 殘暴하여 李摩雲으로 불렸다. 젊은 시절 글공부를 했으나 성취하지 못하고 집을 나가 걸식하며 수모를 당한 뒤에 山賊이 되었다. 앞뒤로 黃巢‧諸葛爽‧李克用‧朱溫 등의 세력 집단에 가담하였다. 黃巢의 반란군에 참여하여 蔡州의 叛軍 秦宗權을 토벌하고 王行瑜 등을 제거하였다. 光州刺史‧澤州刺史‧河陽節度使‧同平章事‧昭義軍節度使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역주7 張全義 : 852~926. 初名은 居言, 字는 國維로, 濮州 臨濮 사람이다. 五代 시기의 장수로, 뒤에 梁 太祖가 宗奭이라는 이름을 내려주었다. 張全義는 대대로 농부였는데 黃巢의 반군에 참여하여 吏部尙書‧充水運使에 임명되었다. 뒤에 河陽節度使 諸葛爽에게 투항하여 여러 차례 戰功을 세워 澤州刺史가 되고 승진하여 忠武軍節度使 守中書令이 되었고 東平王에 봉해졌다. 後梁과 後唐을 섬겨 守太尉‧中書令‧河南尹 兼領河陽節度使를 역임하고 齊王에 봉해졌다. 그는 성품이 勤儉하고 軍民을 잘 위무하여 치적이 뛰어났다. 太師에 추증되고 忠肅이라는 諡號를 받았다.
역주8 : 鄆州로, 지금의 山東省 東平縣에 있었다. 隋 開皇 10년(590) 운주를 설치했다가, 隋 大業 2년(606) 東平郡으로 고쳤다. 唐 武德 5년(622) 운주를 설치하고 總管府를 두어 統州‧濮州‧兗州‧戴州‧曹州 5州와 30縣을 관할하였다. 당 무덕 7년(624) 총관부를 都督府로 고쳤다가, 唐 貞觀 元年(627 도독부를 없애고, 唐 乾元 元年(758 다시 운주로 바꿨다. 北宋 宣和 元年(1119) 다시 東平府로 고치고 나서 지금까지 운주를 다시 설치하지 않았다.
역주9 朱宣 : ?~897. 朱瑄이라고도 하는데 宋州 下邑縣 사람이다. 젊은 시절 부친을 따라 소금을 몰래 팔았는데 부친이 법을 어겨 죽임을 당하자 떠나서 靑州節度使 王敬武의 軍校가 되어 曹全晟 휘하에 소속되었다. 中和 2년(882) 王敬武가 조전성을 보내 潼關에 들어갈 때 함께 黃巢를 격파하였다. 회군하다 鄆州를 지날 때 鄆州節度使 薛崇이 죽자 그 휘하 장수 崔君預가 留後를 自稱하니 조전성이 최군예를 쳐 죽이고 마침내 운주를 함락하였다. 朱宣은 이 戰功으로 鄆州馬步軍都指揮使가 되었는데 얼마 뒤 조전성이 죽자 군사들이 그를 추대하여 留後가 되니 唐 僖宗이 바로 그를 天平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後梁 太祖가 宣武를 鎭守할 때 그를 형으로 섬겼다. 태조가 새로 鎭을 맡아 兵力이 아직 적어 자주 秦宗權에게 곤경에 처하므로 태조가 주선에게 원병을 청하니 주선이 자기 아우 朱瑾과 함께 兗州‧鄆州의 군대를 거느리고 汴州를 구원하여 蔡州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진종권을 물리쳤다. 이때 태조가 이미 滑州를 습격하여 함락한 뒤 점점 鎭들을 병합하려고 하였는데 주선‧주근이 돌아간 뒤 바로 연주‧운주에 檄文을 보내 주선‧주근이 宣武軍의 병사들을 유인하여 동쪽으로 도망갔다고 하고서 출병하여 도망간 병사들을 수습하면서 그들을 공격하므로 마침내 적국이 되어 曹州‧濮州 사이에서 전투하였다. 이때 梁나라가 다시 동쪽으로 徐州를 공격하고 서쪽으로 蔡州를 치며 북쪽으로 晉나라와 대치하였는데 결국 梁나라에 멸망당하였다. 乾寧 4년(897) 주선은 패배하여 中都로 달아나다가 葛從周에게 붙잡혀 汴橋 아래에서 참수되었다.
역주10 (北)[比] : 저본에는 ‘北’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比’로 바로잡았다.
역주11 從康懷英攻潞州……存節等以餘兵歸 : 牛存節은 潞州 行營에서 들어와 統軍이 되어 洛下에 주둔하였으니 이후 夾城 전투에서의 패배 때에는 우존절이 軍中에 있은 적이 없었다. 이에 대해서는 ≪通鑑考異≫에 辨證한 내용이 있다.(≪舊五代史考異≫)
역주12 天井關 : 雄定關이라고도 하는데 西漢 陽朔 3년(B.C. 22 처음 세워져 南北을 잇는 요충지였다. 晉豫 변경의 거대한 관문으로 山西省 晉城市의 境內, 太行山(태항산 최남부에 자리하여 河南省 焦作市로 왕래할 수 있는 관문이다. 태항산의 八徑 가운데 하나로 칭해진다. 關 앞에 깊이를 알 수 없는 세 개의 天井泉을 따라 명명하였다.
역주13 澤州 : 山西省 남동부 太行山의 남쪽 기슭에 있었다. 鳳臺라고도 한다. 太白山脈에 있으며, 河南 방면으로 통하는 문호 구실을 한다.
역주14 同州劉知俊叛……乃遷存節匡國軍節度使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이 부분은 牛存節에게 同州를 鎭守하게 한 것이다. 동주는 後梁 때 忠武軍이었으니 본문에 ‘匡國’으로 되어 있는 것은 착오이다.[謹案此以存節鎭同州也 同州在梁爲忠武軍 此作匡國誤]”라고 하였다.
역주15 蔣殷 : ?~915. 어려서 부친을 여의고 모친을 따라 河中節度使 王重盈의 집에 의지하니 왕중영이 그를 불쌍히 여기고 養子로 삼았다. 唐 天複 초년에 梁 太祖가 蒲州‧陝州를 평정한 뒤 蔣殷은 大梁으로 옮겼다. 양 태조는 王重盈의 아우 王重榮의 은혜에 보답하고자 王氏의 아들들을 모두 등용하였다. 蔣殷은 朱全忠의 庶子 郢王 朱友珪와 사이가 좋았는데 주우규가 부친을 죽이고 찬탈한 뒤 장은을 徐州節度使로 삼았다. 주우규가 피살된 이후 주전충의 嫡子 均王 朱友貞이 즉위하자 그 형제 福王 朱友璋을 파견하여 장은을 대신해 節度使로 삼으니 장은은 徐州를 근거로 반란하였다. 鄆州節度使 牛存節과 劉鄩이 서주를 공격하니 장은이 淮南을 구원하였는데 楊溥가 朱瑾을 파견해 구원하였으나 유심에게 격파당하였다. 貞明 元年(915) 봄에 성이 함락되자 장은과 가족들이 모두 스스로 불을 놓아 죽었다.
역주16 (據)[距] : 저본에는 ‘據’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距’로 바로잡았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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