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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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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楊師厚 本梁一驍將이어늘 而歐公傳之 得其神이라 故錄而出之하노라
楊師厚 少事河陽李罕之러니 罕之降晉 選其麾下勁卒百人하야 獻于하니 師厚在籍中이라
師厚在晉 無所知名이러니 後以罪奔于梁한대 梁太祖以爲宣武軍押衙曹州刺史하다
梁攻王師範할새 師厚戰臨朐하야 擒其偏將八十餘人하고 取棣州하니 以功拜齊州刺史하다
太祖攻趙匡凝於襄陽할새 遣師厚爲先鋒한대 師厚取穀城西童山木爲浮橋하야 渡漢水하야 擊匡凝하야 敗之하니 匡凝棄城走어늘
師厚進攻하야 又走匡凝弟匡明하니 功爲多 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劉知俊反하야 攻陷長安이어늘 劉鄩牛存節等攻之하야 久不克하다
師厚以奇兵으로 傍南山하야 入其西門하야 降其守者하야 遂克之하다
是時 梁兵攻하야 久無功하니 太祖病臥洛陽이라가 少間 乃自將北擊趙
師厚從太祖하야 至洹水하야 夜行迷失道라가 明旦 次魏縣이러니 聞敵將至하고 梁兵潰亂不可止라가 久之 無敵乃定이라
已而 太祖疾作하야 乃還이라 明年少間이어늘 而晉軍攻燕 燕王求援於梁하니
太祖爲之擊趙以牽晉하야 屯于龍花하고 遣師厚攻이나 太祖怒하야 自往督戰하고 乃破하야 屠之하고 進圍蓚縣하다
晉史建瑭以輕兵夜擊梁軍한대 梁軍大擾어늘 太祖與師厚 皆棄南走하야 太祖還東都하고 師厚留屯魏州
하니 師厚乘間하야 殺魏牙將潘晏臧延範等하고 逐出節度使이라 友珪因以師厚爲天雄軍節度使하다
自太祖與晉戰河北으로 師厚嘗爲招討使하야 悉領梁之勁兵이러니 太祖崩 하고 而稍矜倨難制
故時魏恃牙兵하야 其帥得以倔彊이러니 羅紹威時 牙兵盡死하야 魏勢孤하야 始爲梁所制하다
師厚已得志하고 乃復置하니 友珪陰欲圖之하야 召師厚入計事하다
其吏田溫等 勸師厚勿行한대 師厚曰 吾二十年不負朱家어늘 今若不行이면 則見疑而生事 然吾知上爲人하니 雖往이나 無如我何也라하고
乃以勁兵二萬으로 朝京師하야 留其兵城外하고 以十餘人自從入見友珪하니 友珪益恐懼하야 賜與鉅萬而還하다
已而 末帝謀討友珪하야 問於趙巖한대 巖曰 此事成敗 在招討楊公爾 得其一言하야 諭禁軍이면 吾事立辦이니이다
末帝乃遣馬愼交하야 陰見師厚하야 布腹心이로되 師厚猶豫未決하고 謂其下曰 方弑逆時 吾不能卽討 今君臣之分已定이어늘 無故改圖 人謂我何
其下或曰 友珪弑父與君하니 乃天下之惡이라 仗大義以誅賊이면 其事易成이니 彼若一朝破賊이면 公將何以自處오하니
師厚大悟하야 乃遣其將王舜賢하야 至洛陽하야 見袁象先計事하야 使朱漢賓以兵屯滑州爲應이라 末帝卒與象先殺友珪하다
末帝卽位하야 封師厚鄴王하고 하며 事無巨細 皆以諮之 然心益忌而畏之하다
已而 하니 末帝爲之受賀於宮中이라 由是 始分相魏爲兩鎭이라 魏軍亂하야 以魏博降晉하니 梁失河北 自此始하니라


07. 楊師厚傳記
楊師厚는 본래 나라의 일개 용맹한 장수인데 歐陽公이 그를 立傳하면서 그 精神을 얻었다. 그러므로 수록하여 드러낸다.
楊師厚潁州 斤溝 사람이다. 젊은 시절 河陽李罕之를 섬겼는데 이한지가 나라에 투항하면서 그 휘하의 정예 병사 백 명을 골라 晉王에게 바치니 양사후가 그 명단에 있었다.
양사후는 나라에 있을 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뒤에 죄를 지어 나라로 도망가자 太祖宣武軍押衙 曹州刺史로 삼았다.
나라가 王師範을 공격할 때 양사후는 臨朐에서 전투하여 그 偏將 80여 인을 사로잡고 棣州를 취하니 그 戰功으로 齊州刺史를 배수하였다.
太祖襄陽에서 趙匡凝을 공격할 때 楊師厚를 보내 先鋒에 서게 하였는데, 양사후가 穀城西童山의 나무를 베어다가 浮橋를 만들어 漢水를 건너 조광응을 공격하여 물리치니 조광응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양사후가 진군하여 荊南을 쳐서 다시 조광응의 아우 趙匡明을 몰아내니 전공이 많아 山南東道節度使 同中書門下平章事를 배수하였다.
劉知俊이 배반하여 長安을 쳐서 함락하였는데 劉鄩牛存節 등이 공격하여 오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
楊師厚奇兵을 거느리고 南山을 끼고 장안의 西門으로 들어가 성문을 지키던 군사를 항복시켜 마침내 장안을 함락하였다.
나라의 周德威晉州를 공격하여 유지준과 호응하자 양사후가 蒙阬에서 물리쳐 그 戰功으로 保義軍節度使로 승진하였다가 宣義軍으로 옮겨 鎭守하였다.
이때에 나라 군대가 趙州를 공격하여 오래도록 진전이 없으니, 太祖洛陽에서 臥病하다가 병이 조금 호전되자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조주를 공격하였다.
楊師厚가 태조를 따라 洹水에 당도하여 한밤에 가다가 헤매어 길을 잃어버렸다가 이튿날 새벽에 魏縣에 머물렀다. 그런데 적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나라 군사들이 달아나고 혼란에 빠져 수습할 수 없었다가 한참이 지나 〈다가오는〉 적군이 없게 된 뒤에야 안정되었다.
이윽고 태조가 병이 나서 回軍하였다. 이듬해 태조의 병이 조금 호전되었는데 나라 군대가 나라를 공격하자 燕王 劉守光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니,
태조가 유수광을 위해 조주를 치는 전략으로 나라를 견제하여 龍花에 주둔하는 한편 양사후를 파견하여 棗彊을 공격하였으나 사흘 동안 함락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노하여 몸소 가서 전투를 독려하고서야 격파하여 조강을 도륙하고 진군하여 蓚縣을 포위하였다.
나라 史建瑭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나라 군대를 습격하자 나라 군대가 크게 혼란해지니, 태조와 양사후가 모두 輜重을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하여 태조는 東都로 돌아가고 양사후는 위주에 주둔하였다.
이듬해에 태조가 시해를 당해 朱友珪가 스스로 즉위하니 양사후가 그 기회를 틈타 위주의 牙將 潘晏臧延範 등을 죽이고 節度使 羅周翰逐出하였다. 주우규가 이에 양사후를 天雄軍節度使로 삼았다.
太祖나라와 河北에서 전투한 이래로 楊師厚는 일찍이 招討使가 되어 나라의 정예병을 다 통솔하였었는데, 태조가 붕어한 뒤로 양사후가 마침내 〈정예병을 맡은〉 장수를 몰아내고 조금씩 거만해져서 제어하기 어려웠다.
옛날에 魏州牙兵을 믿고서 그 牙將이 거만하고 강경할 수 있었는데, 羅紹威 때에 아병이 모두 죽임을 당해 위주의 세력이 약화되어 비로소 나라에 제압되었다.
양사후가 뜻을 얻어 〈節度使가 되고서〉 비로소 다시 銀槍效節軍을 만드니, 朱友珪가 몰래 그를 없앨 것을 도모하려고 양사후를 불러 궁중에 들어와 國事를 의논하게 하였다.
양사후의 부하 田溫 등이 양사후에게 가지 말라고 권하자, 양사후가 말하기를 “내가 20년 동안 朱氏의 〈나라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지금 만약 가지 않으면 의심을 받고 사달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황제의 사람됨을 아니 비록 가더라도 나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예병 2만 명을 거느리고 京師朝見(조현)하여 성밖에 군대를 머무르게 하고 10여 인을 데리고 직접 들어가 주우규를 알현하니, 주우규가 더욱 두려워져서 수만 금을 하사하고 양사후를 돌아가게 하였다.
이윽고 末帝朱友珪를 토벌하고자 모의하여 趙巖에게 계책을 묻자, 조암이 말하기를 “이 일의 成敗招討使 楊公에게 달려 있으니 그의 말 한마디를 가지고 禁軍에게 알리면 우리들의 일은 바로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제가 이에 馬愼交를 보내 몰래 楊師厚를 만나서 본심을 내보였다. 그런데 양사후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고 그 부하에게 이르기를 “郢王이 부친을 시해하고 반역했을 때 내가 곧장 토벌하지 못했다. 이제 君臣의 분수가 이미 정해졌는데 아무 이유 없이 생각을 바꾼다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떤 부하가 말하기를 “주우규가 君父를 시해하였으니 바로 천하의 악인입니다. 均王大義를 내걸고 亂賊을 주벌한다면 이 일은 성공하기 쉬울 것이니 그가 만약 하루아침에 난적을 격파한다면 공께서는 장차 어떻게 자처하실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양사후가 크게 깨닫고서 이에 그의 휘하 장수 王舜賢을 보내 洛陽에 이르러 袁象先을 만나 일을 계획하고서 朱漢賓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滑州에 주둔하여 應援하게 하였다. 말제가 마침내 원상선과 함께 주우규를 죽였다.
末帝가 즉위하여 楊師厚鄴王에 봉하고 詔書에 그의 이름을 쓰지 않았으며 대소를 막론하고 政事를 모두 그에게 자문하였으나 말제는 마음속으로 그를 더욱 꺼리면서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양사후가 종기가 나서 졸하니 말제가 이 일로 宮中에서 경하를 받았다. 이로 인해 비로소 가 나뉘어 두 이 되었다. 魏軍이 반란하여 魏博 지역을 가지고 나라에 투항하니 나라가 河北을 상실한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역주
역주1 楊師厚傳 : 楊師厚(?~915 潁州 斤溝 사람이다. 양사후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22 〈梁書 第22 列傳12〉와 ≪新五代史≫ 卷23 〈梁臣傳 第11〉에 실려 있다. 歐陽脩는 ≪구오대사≫에 1천 3백여 자 분량인 양사후의 傳記를 8백여 자로 축약하여 서술하였는데, 두 史書의 기술에서 보이는 눈에 띄는 차이점을 들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구오대사≫에서는 郢王 朱友珪가 父親인 後梁 太祖를 弑害하고 帝位를 簒奪했을 때 魏州의 衙內都指揮使 潘晏‧大將 臧延範‧趙訓의 謀變을 密告하는 자가 있어 양사후가 병사를 풀어 이들을 잡아 斬首하였다고 하였다.
이에 반해, ≪신오대사≫에서는 양사후가 태조가 시해된 틈을 타서 이들을 참수하고 절도사 羅周翰을 逐出하였다고 하여 두 사서의 내용이 미묘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 그리고 ≪신오대사≫의 마지막 부분에서 末帝 朱友貞이 부친을 죽이고 제위를 찬탈한 형 朱友珪를 도모하려고 하는 장면과, 주우정이 양사후에게 주우규를 함께 제거하자고 권유하자 양사후가 그의 부하와 대화를 나누며 고민하는 장면은, 모두 ≪구오대사≫에 없던 내용으로 구양수가 다른 사료를 참고하여 添入한 부분이다.
양사후는 후량 태조의 휘하에서 王師範‧趙匡凝‧劉知俊 등을 격파하면서 立地를 다졌고 태조의 말년에는 北面都招討使가 되어 魏州에서 後唐 莊宗 李存勖의 군대와 대치하게 되면서 그곳을 근거지로 점점 세력을 키워나갔다. 魏州는 天雄軍의 속주로, 천웅군은 相州‧澶州‧衛州‧魏州‧博州‧貝州 등 모두 6州를 관할하는 행정구역인데 五代 때 전략적으로 중요한 要衝地였기에 이곳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이곳의 來歷을 살펴보면, 우선 唐 代宗 때 田承嗣(705~779 처음으로 이곳에서 절도사가 된 뒤 牙兵을 불러 모아 보수를 후하게 주어 호위하게 한 것이 割據 국면의 시작이었다. 그런데 세월이 오래 지나면서 아병들은 父子나 姻戚들이 단합해 세력을 형성하여 절도사를 마음대로 바꾸었다. 이후 이들에 의해 史憲誠‧何全皞‧韓君雄‧樂彦禎 등이 절도사를 역임하였는데 악언정이 이들에게 抑留되자 그의 아들 樂從訓이 후량에 원군을 청해 아병을 공격하였으나 패하여 둘 다 죽었다. 이후 아병들은 趙文建‧羅弘信을 절도사로 세웠다가 이윽고 나홍신의 아들 羅紹威가 자리를 이었는데 나소위는 이들을 두려워하여 후량에 도움을 청해 마침내 후량 태조가 馬嗣勳을 보내 아병들을 모조리 誅戮하고 천웅군을 차지하게 되었다. 양사후는 바로 이때 태조의 명으로 이곳에 주둔하여 당시 세력을 확장하고 있던 후당 장종과 대치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912년 태조가 시해되자 양사후는 위주의 牙將들을 죽이고 나소위의 아들로 아직 어렸던 羅周翰을 宣義節度使로 내보낸 뒤 天雄軍節度使로 임명을 받아 후량의 신하이면서도 반독립적인 상태로 있었다. 이후 양사후는 槍 재주가 뛰어난 자들이 많은 魏州 石屋 지역에서 군사를 대거 모집하여 銀槍效節軍을 조직하여 자신의 친위 부대로 삼았다. 이렇게 할거의 뜻을 키우던 양사후가 915년에 죽자 말제가 이를 경축하였을 만큼 그는 후당 장종에 버금갈 정도로 후량 정권에 치명적인 위협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양사후의 謀叛 情狀이 겉으로 드러나지는 않았으므로 구양수가 〈梁臣傳〉에 수록한 것으로 보인다. 양사후가 죽자 趙巖은 邵贊과 함께 말제를 위해 梁나라의 우환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천웅군을 두 藩鎭으로 나누어 相州‧澶州‧衛州는 昭德軍으로 삼아 張筠을 절도사로 삼고, 魏州‧博州‧貝州는 그대로 천웅군으로 삼아 賀德倫을 절도사로 삼았다.
한편 ≪구오대사≫의 마지막 부분에서는 그의 心境의 변화 과정과 말년에 품었던 野心을 인상적으로 서술하고 있는데 ≪신오대사≫에 없는 내용이면서 인간사의 무상함을 느낄 수 있어 참고로 들어본다.
“양사후는 純謹하고 敏幹하여 태조에게 깊이 知遇를 입어 주요한 군대와 큰 번진을 맡았으니 다른 자들은 그에게 미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말년에 공로를 자랑하고 자신의 군대를 믿고서 갑자기 모반하려는 뜻을 키웠다.……또 黎陽에서 커다란 돌을 캐어 자신의 德政을 기록하려고 하여 소 수백 마리가 끄는 鐵車에 싣고 왔는데, 지나는 곳마다 墳墓와 家屋들이 모두 훼손되었기에 백성들이 이를 바라보면서 ‘비석이 온다.[碑來]’고 하였다. 그런데 비석이 막 도착하자마자 양사후가 죽었으므로 魏州 사람들이 이를 ‘슬픔이 온다.[悲來]’의 應報라고 여겼다.[師厚純謹敏幹 深爲太祖知遇 委以重兵劇鎭 他莫能及 然而末年矜功恃衆 驟萌不軌之意……又於黎陽採巨石 將紀德政 以鐡車負載 驅牛數百以拽之 所至之處 丘墓廬舍悉皆毁壞 百姓望之 皆曰碑來 及碑石纔至 而師厚卒 魏人以爲悲來之應]”
역주2 潁州斤溝人也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資治通鑑≫의 注에 ‘≪九域志≫에 「萬壽縣에 斤溝鎭이 있다.」고 하였는바 萬壽는 唐나라 때 汝陰의 百尺鎭이다.’라고 하였는데, 여기(≪新五代史≫ 薛居正의 ≪舊五代史≫ 문장을 그대로 기록하였다. 그렇지만 ‘溝’자 뒤에 ‘里’자가 있어야 한다.[謹案通鑑注 九域志 萬壽縣有斤溝鎭 萬壽 唐汝陰之百尺鎭也 此仍薛史之文 然溝下當有里字]”라고 하였다.
≪卄二史考異≫ 권62에 “≪唐書≫와 ≪宋書≫의 〈地理志〉에는 모두 斤溝縣이 없는데, 胡三省이 이르기를 ‘≪九域志≫에 「潁州 만수현에 근구진이 있으니 만수는 唐나라 여음현의 백척진이다. 開寶 6년(973) 縣을 설치하였다.」고 하였다.[唐宋地理志皆無斤溝縣 胡三省云 九域志 潁州萬壽縣有斤溝鎭 萬壽 唐汝陰縣之百尺鎭也 開寶六年置縣]”라고 하였다.
역주3 晉王 : 後唐의 太祖로 추존된 李克用이다.
역주4 荊南 : 唐나라 때 方鎭의 이름으로, 지금의 湖北省‧湖南省‧四川省 사이에 위치한 지역이다. 五代 시대에는 十國 가운데 한 국가의 명칭으로, 907년 高季興이 後梁 太祖에 의해 荊南節度使에 임명되어 荊州를 점거하였는데 924년 後唐에서 南平王으로 봉해졌다. 세상에서는 荊南 혹은 南平이라고 일컬었다. 江陵에 수도를 두었으며 963년 5대 57년 만에 宋나라에 멸망당하였다.
역주5 拜山南東道節度使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에서 ‘楊師厚가 齊州剌史로 檢校司徒 徐州節度使를 더하였다가 이윽고 비로소 襄州節度使를 제수받았다.’고 하였는데, 여기(≪新五代史≫ 徐州를 먼저 제수받은 일을 말하지 않은 것은 무릇 史傳에서는 어떤 인물이 거쳐간 관직들에 대해 기록할 만한 일이 없는 경우 본래 생략하더라도 문제되지 않는다. 이를테면 唐나라 말엽 및 五代 때 節鎭은 세력이 편중되어 있어서 늘 治亂에 관계되는 연고로 본래 다른 史實에 비해 자세해야 하니 번잡하고 세세한 것이 문제되지 않는다. 또 ≪舊唐書≫ 〈哀帝紀〉에서 天祐 3년(906) 6월 甲申日에 詔勅을 내려 襄州忠義軍額을 停廢하고 예전대로 山南東道節度使로 한다고 하였는바, 여기서는 天祐 2년에 있은 일이니 의당 忠義軍節度使가 되어야 비로소 다른 傳에서 節鎭을 기록한 예들과 서로 부합한다.[謹案薛史 楊師厚以齊州剌史加檢校司徒徐州節度使 已乃授襄州節度使 此不言先授徐州 凡史傳于人所歷官 其無事可紀者 固不妨從略 若唐末及五代時節鎭 勢有畸重 每關理亂之故 自宜比他史詳之 不嫌冗瑣爾 又舊唐書哀帝紀 天祐三年六月甲申 敕襄州忠義軍額宜停 依舊爲山南東道節度使 此在天祐二年 當作忠義軍節度使 方與他傳書節鎭之例相符]”라고 하였다.
역주6 晉周德威攻晉州以應知俊 師厚敗之于蒙阬(갱) : ≪五代史纂誤≫ 卷上에 “지금 살펴보건대, 〈唐本紀〉에는 ‘莊宗 天祐 6년(909) 劉知俊이 梁나라에서 와서 원군을 청하니, 왕이 스스로 군사를 거느리고 陰地關에 이르러 周德威를 보내 晉州를 공격하게 하여 蒙邟에서 梁나라 군사를 패퇴시켰다.’고 되어 있는데, 이 한 가지 일이 〈梁臣傳〉에는 晉나라 군사를 패퇴시켰다고 하였고, 〈唐紀〉에는 梁나라 군사를 패퇴시켰다고 하여 두 군데서 같지 않으니 누가 맞는지 모르겠다.[今按唐本紀 莊宗天祐六年 劉知俊自梁來乞師 王自將至陰地關 遣周德威攻晉州 敗梁軍于蒙坑 此一事在梁臣傳 則稱敗晉軍 在唐紀 則稱敗梁軍 二者不同 未知孰是]”라고 하였고,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당본기〉에는 ‘梁나라 군사를 패퇴시켰다.’고 하였는데 ≪오대사찬오≫에서는 누가 맞는지 모르겠다고 하였다. ≪資治通鑑考異≫에서는 ≪莊宗實錄≫이 妄言이라고 하였는데 고찰한 내용은 그 앞에 보인다.[按唐本紀作敗梁軍 纂誤未知孰是 通鑑考異謂莊宗實錄爲妄 攷見前]”라고 하였다. 阬은 ≪新五代史≫에 ‘坑’자로 되어 있으며, 두 글자는 통용한다.
역주7 以功遷保義軍節度使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 〈梁紀〉에서 開平 4년(910) 2월에 楊師厚가 陝州에 鎭守하러 왔다고 하였고, 〈楊師厚傳〉에도 4년 2월에 陝州節度使로 옮겼다고 되어 있다. 섬주는 後梁 때 鎭國軍으로, ≪新五代史≫ 〈梁紀〉에서는 開平 3년(909) 11월에 鎭國軍節度使 康懷英이 岐州를 토벌하였다고 기록하였는데, 〈康懷英傳〉에서는 唐나라 때 섬주의 軍號를 잘못 追隨하여 保義로 되어 있다. 여기에서는 강회영이 옮겨 가고서 양사후가 이어 섬주절도사가 되었으므로 〈강회영전〉의 착오와 같다.[謹案薛史梁紀 開平四年二月 楊師厚赴鎭于陝 師厚傳亦作四年二月 移陝州節度使 陝州 梁爲鎭國軍 本史梁紀 開平三年十一月 書鎭國軍節度使康懷英伐岐 而懷英傳誤從唐陝州軍號作保義 此則懷英遷去 師厚繼爲陝州節度使 故與康傳之誤同也]”라고 하였다.
역주8 : 趙州로, 지금의 石家莊市 趙縣인데 華北 平原 중남부, 太行山의 동쪽 기슭에 자리하고 있다.
역주9 劉守光 : ?~914. 深州 樂壽 사람으로, 盧龍節度使 劉仁恭의 아들이고 五代 時期 燕나라를 세운 사람이다. 庶母 羅氏와 간통한 뒤 부친 劉仁恭에게 곤장을 맞고 나서 부자 관계가 단절되었다. 天祐 4년(907) 宣武軍節度使 李思安이 幽州를 공격하자 유인공이 大安山 享樂에 군대를 주둔하느라 성안에서 방비를 하지 않았다. 이에 劉守光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사안을 격퇴한 뒤 성을 함락하여 盧龍節度使를 자칭하고서 아울러 군대를 보내 대안산을 공격하여 부친 유인공을 사로잡아 가두고 義昌節度使 劉守文을 잡아 죽인 뒤 두 鎮을 소유하였다. 같은 해 後梁 太祖 朱全忠이 그를 燕王에 책봉하였다. 乾化 元年(911) 8월에 유수광이 大燕皇帝를 자칭하니 역사에서는 桀燕國이라고 한다. 뒤에 河東節度使 李存勖에게 참수되었다.
역주10 棗彊 : 지금의 河北省 衡水市의 屬縣으로, 하북성 東南部와 형수시 남단에 자리하고 있다.
역주11 三日不能下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纂誤錄≫에는 이 문장이 ‘三日不能下’로 되어 있는데, ≪新五代史≫에서 徐無黨은 ‘月’자 뒤에 原註를 달아 ‘어느 본에는 「日」로 되어 있다.’고 하였다. 孔廣森(1752~1786 ‘상고하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에는 「逾旬」으로 되어 있다.’고 하였으니, 그렇다면 ‘月’과 ‘日’ 모두 옳지 않다. 내가 상고해보건대, ≪資治通鑑≫에서 楊師厚가 棗彊을 포위한 일은 2월 乙亥日에 수록되어 있고, 조강을 함락한 일은 3월 丙戌日에 수록되어 12일이 떨어져 있으니 설거정의 ≪구오대사≫가 옳다.[謹案纂誤錄 此文作三日不能下 徐氏于月下固注云 一作日也 孔氏廣森曰 攷薛史作逾旬 然則月日皆非是 愚攷通鑑師厚圍棗彊 係二月乙亥 拔棗彊 係三月丙戌 相去十二日 則薛史是也]”라고 하였다. ≪신오대사≫는 ‘日’이 ‘月’로 되어 있다.
역주12 輜重 : 말이나 수레에 실은 군수물품 혹은 이를 수송하는 부대를 가리킨다.
역주13 明年……友珪自立 : ≪五代史纂誤≫ 卷上에 “지금 살펴보건대, 〈梁太祖本紀〉에 ‘乾化 2년(912) 3월 병술일에 棗彊을 도륙하고 6월에 郢王 朱友珪가 배반하고 太祖가 崩御한 것은 똑같이 한 해에 일어난 일이니, 이 列傳에서 明年이라고 한 것은 착오이다.’라고 하였다.[今按梁太祖本紀 乾化二年三月丙戌 屠棗彊 六月 郢王友珪反 太祖崩 同是一年之事 此傳言明年 誤也]”라고 하였고, 그 주석에 “이해 임신년은 바로 唐 莊宗 天祐 9년(912.[是年壬申 卽唐莊宗天祐九年也]”,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에는 ‘明年’ 2자가 없다.[案薛史無明年二字]”라고 하였다.
역주14 羅周翰 : 唐末 魏博 貴鄕 사람으로, 魏博節度使 羅紹威의 아들이다. 부친을 이어 위박절도사가 되었을 때 나이가 어려 幕府에서는 都指揮使 潘晏에게 군권을 관장하게 했는데 宣義節度使 楊師厚가 위박을 오랫동안 엿보다가 912년에 반안을 죽이고 魏州에 들어가니, 梁帝 朱友圭는 羅周翰을 선의절도사로 옮겨 임명하고 양사후를 위박절도사에 임명하였다.
역주15 師厚遂逐其帥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楊師厚가 宣義軍節度使로 北面都招討使를 겸하여 魏州에 주둔하였을 때 羅周翰은 본래 天雄軍節渡使였는데 이 부분 앞에서 ‘양사후가 梁나라의 정예병을 모두 거느렸다.’고 말하면서 나주한을 축출한 부분에서는 단지 ‘마침내 그 統帥를 축출하였다.’고만 하였으니 말이 매우 모호하다.[謹案師厚以宣義軍節度使 兼北面都招討使 軍于魏州 而羅周翰自爲天雄軍節渡使 此上云 師厚悉領梁之勁兵 而于逐羅周翰 直云 遂逐其帥 語殊鶻突]”라고 하였다.
역주16 銀槍效節軍 : 銀槍效節都라고도 하는데, 後梁 때 魏博節度使 楊師厚의 개인 護衛 部隊로, 五代 시기에 가장 전투력이 강력했던 군대였다. 병사의 무기가 長槍인 데서 명칭이 비롯하였다. 양사후가 죽은 뒤 이 부대는 後唐 莊宗 李存勖에게 귀속되었다가, 後唐 明宗 天成 2년(927) 도륙당하였다.
역주17 郢王 : 梁 太祖 朱全忠의 둘째 아들 朱友珪의 封號이다.
역주18 均王 : 梁 太祖 朱全忠의 셋째 아들 末帝 朱友貞이 황제에 오르기 전의 封號이다.
역주19 詔書不名 : 詔書에는 신하의 이름을 쓰는 것이 원칙인데, 이름을 쓰지 않았다는 것은 그 신하를 극도로 禮遇하고 尊重한다는 의미이다.
역주20 師厚瘍發卒 : 楊師厚는 乾化 5년(915) 졸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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