楊師厚는 本梁一驍將이어늘 而歐公傳之에 得其神이라 故錄而出之하노라
楊師厚
는 라 少事河陽李罕之
러니 罕之降晉
에 選其麾下勁卒百人
하야 獻于
하니 師厚在籍中
이라
師厚在晉에 無所知名이러니 後以罪奔于梁한대 梁太祖以爲宣武軍押衙曹州刺史하다
梁攻王師範할새 師厚戰臨朐하야 擒其偏將八十餘人하고 取棣州하니 以功拜齊州刺史하다
太祖攻趙匡凝於襄陽할새 遣師厚爲先鋒한대 師厚取穀城西童山木爲浮橋하야 渡漢水하야 擊匡凝하야 敗之하니 匡凝棄城走어늘
師厚進攻
하야 又走匡凝弟匡明
하니 功爲多
라 同中書門下平章事
하다
劉知俊反하야 攻陷長安이어늘 劉鄩牛存節等攻之하야 久不克하다
師厚以奇兵으로 傍南山하야 入其西門하야 降其守者하야 遂克之하다
是時
에 梁兵攻
하야 久無功
하니 太祖病臥洛陽
이라가 少間
에 乃自將北擊趙
라
師厚從太祖하야 至洹水하야 夜行迷失道라가 明旦에 次魏縣이러니 聞敵將至하고 梁兵潰亂不可止라가 久之에 無敵乃定이라
已而
오 太祖疾作
하야 乃還
이라 明年少間
이어늘 而晉軍攻燕
에 燕王
求援於梁
하니
太祖爲之擊趙以牽晉
하야 屯于龍花
하고 遣師厚攻
이나 라 太祖怒
하야 自往督戰
하고 乃破
하야 屠之
하고 進圍蓚縣
하다
晉史建瑭以輕兵夜擊梁軍
한대 梁軍大擾
어늘 太祖與師厚
가 皆棄
南走
하야 太祖還東都
하고 師厚留屯魏州
라
하니 師厚乘間
하야 殺魏牙將潘晏臧延範等
하고 逐出節度使
이라 友珪因以師厚爲天雄軍節度使
하다
自太祖與晉戰河北
으로 師厚嘗爲招討使
하야 悉領梁之勁兵
이러니 太祖崩
에 하고 而稍矜倨難制
라
故時魏恃牙兵하야 其帥得以倔彊이러니 羅紹威時에 牙兵盡死하야 魏勢孤하야 始爲梁所制하다
師厚已得志
하고 乃復置
하니 友珪陰欲圖之
하야 召師厚入計事
하다
其吏田溫等이 勸師厚勿行한대 師厚曰 吾二十年不負朱家어늘 今若不行이면 則見疑而生事라 然吾知上爲人하니 雖往이나 無如我何也라하고
乃以勁兵二萬으로 朝京師하야 留其兵城外하고 以十餘人自從入見友珪하니 友珪益恐懼하야 賜與鉅萬而還하다
已而오 末帝謀討友珪하야 問於趙巖한대 巖曰 此事成敗는 在招討楊公爾니 得其一言하야 諭禁軍이면 吾事立辦이니이다
末帝乃遣馬愼交
하야 陰見師厚
하야 布腹心
이로되 師厚猶豫未決
하고 謂其下曰 方
弑逆時
에 吾不能卽討
라 今君臣之分已定
이어늘 無故改圖
면 人謂我何
오
其下或曰 友珪弑父與君
하니 乃天下之惡
이라 仗大義以誅賊
이면 其事易成
이니 彼若一朝破賊
이면 公將何以自處
오하니
師厚大悟하야 乃遣其將王舜賢하야 至洛陽하야 見袁象先計事하야 使朱漢賓以兵屯滑州爲應이라 末帝卒與象先殺友珪하다
末帝卽位
하야 封師厚鄴王
하고 하며 事無巨細
히 皆以諮之
라 然心益忌而畏之
하다
已而
오 하니 末帝爲之受賀於宮中
이라 由是
로 始分相魏爲兩鎭
이라 魏軍亂
하야 以魏博降晉
하니 梁失河北
이 自此始
하니라
楊師厚는 본래 梁나라의 일개 용맹한 장수인데 歐陽公이 그를 立傳하면서 그 精神을 얻었다. 그러므로 수록하여 드러낸다.
楊師厚는 潁州 斤溝 사람이다. 젊은 시절 河陽의 李罕之를 섬겼는데 이한지가 晉나라에 투항하면서 그 휘하의 정예 병사 백 명을 골라 晉王에게 바치니 양사후가 그 명단에 있었다.
양사후는 晉나라에 있을 때 이름이 알려지지 않았는데 뒤에 죄를 지어 梁나라로 도망가자 梁 太祖가 宣武軍押衙 曹州刺史로 삼았다.
梁나라가 王師範을 공격할 때 양사후는 臨朐에서 전투하여 그 偏將 80여 인을 사로잡고 棣州를 취하니 그 戰功으로 齊州刺史를 배수하였다.
梁 太祖가 襄陽에서 趙匡凝을 공격할 때 楊師厚를 보내 先鋒에 서게 하였는데, 양사후가 穀城의 西童山의 나무를 베어다가 浮橋를 만들어 漢水를 건너 조광응을 공격하여 물리치니 조광응이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양사후가 진군하여 荊南을 쳐서 다시 조광응의 아우 趙匡明을 몰아내니 전공이 많아 山南東道節度使 同中書門下平章事를 배수하였다.
劉知俊이 배반하여 長安을 쳐서 함락하였는데 劉鄩과 牛存節 등이 공격하여 오래도록 함락하지 못하였다.
楊師厚가 奇兵을 거느리고 南山을 끼고 장안의 西門으로 들어가 성문을 지키던 군사를 항복시켜 마침내 장안을 함락하였다.
晉나라의 周德威가 晉州를 공격하여 유지준과 호응하자 양사후가 蒙阬에서 물리쳐 그 戰功으로 保義軍節度使로 승진하였다가 宣義軍으로 옮겨 鎭守하였다.
이때에 梁나라 군대가 趙州를 공격하여 오래도록 진전이 없으니, 梁 太祖가 洛陽에서 臥病하다가 병이 조금 호전되자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북쪽으로 조주를 공격하였다.
楊師厚가 태조를 따라 洹水에 당도하여 한밤에 가다가 헤매어 길을 잃어버렸다가 이튿날 새벽에 魏縣에 머물렀다. 그런데 적군이 다가온다는 소식을 듣고는 梁나라 군사들이 달아나고 혼란에 빠져 수습할 수 없었다가 한참이 지나 〈다가오는〉 적군이 없게 된 뒤에야 안정되었다.
이윽고 태조가 병이 나서 回軍하였다. 이듬해 태조의 병이 조금 호전되었는데 晉나라 군대가 燕나라를 공격하자 燕王 劉守光이 梁나라에 원군을 요청하니,
태조가 유수광을 위해 조주를 치는 전략으로 晉나라를 견제하여 龍花에 주둔하는 한편 양사후를 파견하여 棗彊을 공격하였으나 사흘 동안 함락하지 못하였다. 태조가 노하여 몸소 가서 전투를 독려하고서야 격파하여 조강을 도륙하고 진군하여 蓚縣을 포위하였다.
晉나라 史建瑭이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밤에 梁나라 군대를 습격하자 梁나라 군대가 크게 혼란해지니, 태조와 양사후가 모두 輜重을 버리고 남쪽으로 퇴각하여 태조는 東都로 돌아가고 양사후는 위주에 주둔하였다.
이듬해에 태조가 시해를 당해 朱友珪가 스스로 즉위하니 양사후가 그 기회를 틈타 위주의 牙將 潘晏‧臧延範 등을 죽이고 節度使 羅周翰을 逐出하였다. 주우규가 이에 양사후를 天雄軍節度使로 삼았다.
太祖가 晉나라와 河北에서 전투한 이래로 楊師厚는 일찍이 招討使가 되어 梁나라의 정예병을 다 통솔하였었는데, 태조가 붕어한 뒤로 양사후가 마침내 〈정예병을 맡은〉 장수를 몰아내고 조금씩 거만해져서 제어하기 어려웠다.
옛날에 魏州는 牙兵을 믿고서 그 牙將이 거만하고 강경할 수 있었는데, 羅紹威 때에 아병이 모두 죽임을 당해 위주의 세력이 약화되어 비로소 梁나라에 제압되었다.
양사후가 뜻을 얻어 〈節度使가 되고서〉 비로소 다시 銀槍效節軍을 만드니, 朱友珪가 몰래 그를 없앨 것을 도모하려고 양사후를 불러 궁중에 들어와 國事를 의논하게 하였다.
양사후의 부하 田溫 등이 양사후에게 가지 말라고 권하자, 양사후가 말하기를 “내가 20년 동안 朱氏의 〈梁나라를〉 배반하지 않았는데 지금 만약 가지 않으면 의심을 받고 사달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나는 황제의 사람됨을 아니 비록 가더라도 나를 어찌하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정예병 2만 명을 거느리고 京師에 朝見(조현)하여 성밖에 군대를 머무르게 하고 10여 인을 데리고 직접 들어가 주우규를 알현하니, 주우규가 더욱 두려워져서 수만 금을 하사하고 양사후를 돌아가게 하였다.
이윽고 梁 末帝가 朱友珪를 토벌하고자 모의하여 趙巖에게 계책을 묻자, 조암이 말하기를 “이 일의 成敗는 招討使 楊公에게 달려 있으니 그의 말 한마디를 가지고 禁軍에게 알리면 우리들의 일은 바로 성공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제가 이에 馬愼交를 보내 몰래 楊師厚를 만나서 본심을 내보였다. 그런데 양사후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고 그 부하에게 이르기를 “郢王이 부친을 시해하고 반역했을 때 내가 곧장 토벌하지 못했다. 이제 君臣의 분수가 이미 정해졌는데 아무 이유 없이 생각을 바꾼다면 사람들이 나를 뭐라고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어떤 부하가 말하기를 “주우규가 君父를 시해하였으니 바로 천하의 악인입니다. 均王이 大義를 내걸고 亂賊을 주벌한다면 이 일은 성공하기 쉬울 것이니 그가 만약 하루아침에 난적을 격파한다면 공께서는 장차 어떻게 자처하실 것입니까?”라고 하였다.
양사후가 크게 깨닫고서 이에 그의 휘하 장수 王舜賢을 보내 洛陽에 이르러 袁象先을 만나 일을 계획하고서 朱漢賓에게 병사를 거느리고 滑州에 주둔하여 應援하게 하였다. 말제가 마침내 원상선과 함께 주우규를 죽였다.
末帝가 즉위하여 楊師厚를 鄴王에 봉하고 詔書에 그의 이름을 쓰지 않았으며 대소를 막론하고 政事를 모두 그에게 자문하였으나 말제는 마음속으로 그를 더욱 꺼리면서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양사후가 종기가 나서 졸하니 말제가 이 일로 宮中에서 경하를 받았다. 이로 인해 비로소 相과 魏가 나뉘어 두 鎭이 되었다. 魏軍이 반란하여 魏博 지역을 가지고 晉나라에 투항하니 梁나라가 河北을 상실한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