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景仁
은 라 初名茂章
이니 少從楊行密
하야 起淮南
하다
景仁爲將에 驍勇剛悍하고 質略無威儀하야 臨敵에 務以身先士卒하니 行密壯之하다
하야 攻王師範于靑州
어늘 師範乞兵於行密
하니 行密遣景仁
하야 以步騎七千
으로 救師範
하다
師範以兵背城爲兩柵이어늘 友寧夜擊其一柵하니 柵中告急하야 趣景仁出戰이로되 景仁按兵不動이라 友寧已破一柵하고 連戰不已하다
遲明에 景仁度友寧兵已困하고 乃出戰大敗之하야 遂斬友寧하고 以其首로 報行密하다
是時에 梁太祖方攻鄆州라가 聞子友寧死하고 以兵二十萬으로 倍道而至라
景仁閉壘示怯이라가 伺梁兵怠하야 毁柵而出하야 驅馳疾戰이러니 戰酣에 退坐하야 召諸將飮酒하고 已而復戰이라
太祖登高望見之라가 得靑州降人하야 問飮酒者爲誰오하니 曰 王茂章也라 太祖歎曰 使吾得此人爲將이면 天下不足平也라하다
梁兵又敗하니 景仁軍還이어늘 梁兵急追之하니 景仁度不可走하고 遣裨將李虔裕하야 以衆一旅로 設覆於山下以待之하고 留軍不行하고 解鞍而寢이라
虔裕疾呼曰 追兵至矣리니 宜速走라 虔裕以死遏之라한대 景仁曰 吾亦戰於此也라하야늘
虔裕三請하니 景仁乃行而虔裕卒戰死하다 梁兵以故不能及而景仁得全軍以歸하다
景仁事行密하야 爲潤州團練使러니 行密死에 子渥自宣州入立하고 以景仁으로 代守宣州라
渥已立에 反求宣州故時物커늘 景仁惜不與하니 渥怒하야 以兵攻之라
景仁奔于
하니 鏐表景仁領宣州節度使
하다 梁太祖素識景仁
하야 乃遣人召之
하니
景仁間道歸梁
할새 仍以爲寧國軍節度使
하고 加同中書門下平章事
하다 久之
에 未有以用
하야 使參宰相班
하야 奉
而已
라
四年
에 以景仁爲北面招討使
하고 將韓勍李思安等兵伐趙
하야 行至魏州
에
이 言太陰虧
하니 不利行師
라하다 太祖亟召景仁等還
이라가 已而
오 復遣之
하다
景仁已去에 太祖思術者言하야 馳使者止景仁於魏以待라 景仁已過邢洺일새 使者及之에 景仁不奉詔하고 進營於柏鄕하다
元年正月庚寅
에 日有食之
어늘 崇政使敬翔白太祖曰 兵可憂矣
니이다 太祖爲之
하다
라하고 乃罷景仁就第
라가 後數月
에 悉復其官爵
하다
末帝立에 以景仁爲淮南招討使하야 使攻廬壽하니 軍過獨山할새 山有楊行密祠라 景仁再拜號泣而去하다
하야 梁兵敗走
어늘 景仁殿而力戰
이라 以故
로 梁兵不甚敗
하다 景仁歸京師
하야 病疽卒
하니 贈太尉
하다
王景仁은 廬州 合肥 사람이다. 초명은 茂章이니 젊은 시절 楊行密을 따라 淮南에서 起兵하였다.
왕경인은 장수로서 지휘할 때 용맹하고 굳세며 질박하고 소탈하여 威儀를 내세우지 않아 적을 맞닥뜨렸을 때 힘써 병졸들보다 앞장서니 양행밀이 장하게 여겼다.
梁 太祖가 조카 朱友寧을 보내 靑州에서 王師範을 공격하자 왕사범이 楊行密에게 援兵을 청하니, 양행밀이 王景仁을 보내 步兵과 騎兵 7천 명을 거느리고 왕사범을 구원하게 하였다.
왕사범이 군대를 거느리고 성을 등지고서 두 營柵을 만들었는데 주우녕이 한밤에 그중 한 영책을 격파하니, 영책 안에서 急報를 알리면서 왕경인에게 出戰하라고 재촉하였으나 왕경인은 군대를 주둔시킨 채 움직이지 않았다. 주우녕은 한 영책을 격파하고 나서 연이어 싸우면서 그치지 않았다.
새벽에 왕경인은 주우녕의 군대가 이미 지쳤으리라 판단하고 비로소 출전하여 크게 물리치고서, 마침내 주우녕을 斬首하고 그 머리를 가지고 양행밀에게 보고하였다.
이때 梁 太祖가 바야흐로 鄆州를 공격하다가 조카 朱友寧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군대 20만 명을 거느리고 곱절로 빨리 행군하여 당도하였다.
그러자 王景仁은 營壘를 닫고 겁을 먹은 듯한 모습을 보여주다가 梁나라 군대가 해이해진 틈을 엿보고서 營柵을 허물고 나와 내달려서 급히 전투하였는데, 전투가 한창인 와중에 물러나 앉아 장수들을 불러 함께 술을 마시고 잠시 뒤에 다시 전투하였다.
태조가 높은 곳에 올라 이 모습을 바라보다가 靑州의 투항한 병사를 데려와서 술을 마시는 자가 누구냐고 물으니 그가 王茂章이라고 대답하였다. 태조가 탄식하기를 “만약 내가 이 사람을 얻어 장수로 삼는다면 천하를 평정하는 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梁나라 군대가 또 패하자 왕경인의 군대가 돌아가거늘 梁나라 군대가 급히 추격하니 왕경인은 달아날 수 없음을 헤아리고, 副將 李虔裕를 보내 한 부대의 군사들을 거느리고 산 아래 매복하여 적군을 기다리게 하고는 군대를 멈춰 행군하지 않고 말안장을 풀고서 잠을 잤다.
그러자 이건유가 큰소리로 외치기를 “추격병이 이를 것이니 급히 달아나야 합니다. 제가 죽는 한이 있더라도 추격병을 막겠습니다.”라고 하자, 왕경인이 말하기를 “나 역시 여기서 싸울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건유가 세 번이나 거듭 청하니 왕경인이 그제야 길을 나섰고 이건유는 결국 戰死하였다. 梁나라 군대가 이 때문에 그를 따라잡지 못하여 왕경인이 군대를 보전하여 回軍할 수 있었다.
王景仁은 楊行密을 섬겨 潤州團練使가 되었는데 양행밀이 죽자 아들 楊渥이 宣州에서 들어와 자리를 잇고 왕경인이 자기를 대신하여 선주를 지키게 하였다.
양악이 자리를 잇고 나서 선주에 본래 있던 물건을 돌이켜 구하였는데, 왕경인이 아까워하며 주지 않으니 양악이 노하여 군대를 거느리고 그를 공격하였다.
왕경인이 錢鏐에게 달아나니 전류는 왕경인을 表奏하여 宣州節度使를 맡게 하였다. 梁 太祖가 평소부터 왕경인을 알고 있어 이에 사람을 보내 그를 부르니,
왕경인이 사잇길을 따라 달아나 梁나라에 투항하기에 이어 寧國軍節度使로 삼고 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여 제수하였다. 그런데 오래도록 그를 쓸 곳이 없어 宰相의 반열에 참여하여 朝請을 받들게 할 뿐이었다.
開平 4년(910)에 王景仁을 北面招討使로 삼고 韓勍‧李思安 등의 군대를 거느리고 趙州를 토벌해서 행군하여 魏州에 이르렀을 때,
司天監이 말하기를 “달이 이지러졌으니 출병하는 데 이롭지 않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梁 太祖는 급히 왕경인 등에게 回軍하라고 불렀다가 이윽고 다시 출정하게 하였다.
왕경인이 떠난 뒤에 태조가 術者의 말을 생각하고서 使者를 급히 보내 왕경인을 위주에서 만류하여 기다리게 하였다. 그런데 왕경인이 벌써 邢州와 洺州를 지나갔기에 사자가 도착하자 왕경인은 詔命을 받들지 않고 전진하여 柏鄕에 營寨를 세웠다.
乾化 元年(911) 正月 庚寅日에 日食이 일어났는데, 崇政使 敬翔이 태조에게 아뢰기를 “이번 토벌이 걱정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태조는 이로 인해 밤늦게야 밥을 먹을 정도로 고심하였다.
이날에 왕경인이 晉나라 군대와 전투하여 백향에서 크게 패하였다. 왕경인이 돌아와 태조에게 고충을 토로하니,
태조가 말하기를 “나 또한 잘 알고 있다. 한경‧이사안이 그대가 客人이라고 輕視하면서 그대의 지휘를 따르지 않았을 것이다.”라고 하고, 왕경인을 파면하여 집으로 돌아가도록 하였다가 몇 개월 뒤에 그 官爵을 모두 회복하여 주었다.
梁 末帝가 즉위하자 王景仁을 淮南招討使로 삼고서 廬州‧壽州를 공격하게 하니, 군대가 獨山을 지나갈 때 산에 楊行密의 사당이 있는지라 왕경인이 再拜하고 號哭하고서 떠났다.
霍山에서 전투하여 梁나라 군대가 敗走하였는데 왕경인이 후미를 지키며 힘써 싸웠다. 이런 연유로 梁나라 군대가 크게 패하지는 않았다. 왕경인이 京師에 돌아와 종기가 나서 卒하니 太尉에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