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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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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唐之衰也 天子不能誅宦官이어늘 而崔胤等爲之外倚彊藩하니 彊藩入하야 宦官誅 而唐亦以亡이라
歐陽公次梁紀 其所摹寫殆盡이나 而與兩爭處尤工이라 予故錄之하야 以見公之史才云이라
太祖神武元聖孝皇帝 姓朱氏 宋州碭山午溝里人也 其父誠 以五經敎授鄕里
生三子하니 曰 全昱存溫이라 誠卒 三子貧하야 不能爲生하야 與其母傭食蕭縣人劉崇家
唐僖宗乾符四年 이라 存溫亡入賊中이러니 巢攻嶺南 存戰死
巢陷京師하고 以溫爲東南面行營先鋒使하야 攻陷하고 以爲同州防禦使 是時 天子在蜀하고 會兵討賊이라
溫數爲河中王重榮所敗하야 屢請益兵於巢어늘 巢中尉孟楷抑而不通이라
溫客謝瞳說溫曰 黃家起於草莽이로대 幸唐衰亂하야 直投其隙而取之爾 非有功德興王之業也 此豈足與共成事哉리오
今天子在蜀하고 諸鎭之兵 日集以謀興復하니 是唐德未厭於人也
且將軍力戰於外어늘 而庸人制之於內하니라하니
溫以爲然하다 乃殺其監軍嚴實하고 自歸于河中하야 因王重榮以降하니
都統王鐸承制拜溫左金吾衛大將軍河中行營招討副使하고 天子賜溫名全忠하다
中和三年三月 拜全忠刺史宣武軍節度使 四月 諸鎭兵破巢하고 復京師한대 巢走이라
七月丁卯 全忠歸于宣武 是歲 黃巢出하야하니 節度使 叛附于巢 遂圍陳州하니라
爲東南面行營兵馬都統하야 會東諸鎭兵以救陳하니 陳州刺史趙犨 亦乞兵于全忠이라
溥雖爲都統이나 而不親兵이러니 四年 全忠乃自將救犨하고 率諸鎭兵하야 擊敗巢將黃鄴尙讓等하니 犨以全忠爲德하야 始附屬焉이라
是時 河東李克用下兵渡河하야 出洛陽하야 與東兵會擊巢
巢已敗去 全忠及克用追敗之于하고 巢走어늘 又敗之于王滿하고 巢走어늘 又大敗之하고
巢挺身東走어늘 至泰山狼虎谷하야 爲時溥追兵所殺하다 九月 天子 以全忠爲檢校司徒同中書門下平章事하고 封沛郡侯
光啓二年三月 進爵王하다 義成軍亂한대 逐其節度使安師儒하고 推牙將張驍爲留後하니 師儒來奔이어늘 殺之
自黃巢死 秦宗權稱帝하야 陷陝洛懷孟唐許汝鄭州하고
遣其將秦賢盧瑭張晊攻汴하니 賢軍板橋하고 晊軍北郊하고 瑭軍萬勝하여 環汴爲三十六柵하다
王顧兵少하야 不敢出하고 乃遣朱珍募兵於東方하고 而求救於兗鄆하다
三年春 珍得兵萬人馬數百匹以歸어늘 乃擊賢板橋하야 拔其四柵하고 又擊瑭萬勝하니 瑭敗投水死
宗權聞瑭等敗하고 乃自將精兵數千하야 柵北郊 五月 兗州朱瑾한대 王置酒軍中이러니
中席 王陽起如厠하야 以輕兵出北門襲晊한대 而樂聲不輟하니 晊不意兵之至也
兗鄆之兵 又從而合擊하야 遂大敗之하야 斬首二萬餘級하니 宗權與晊 夜走過鄭하야 屠其城而去하다
宗權至蔡하야 復遣張晊攻汴이라 王聞晊復來하고 登封禪寺後岡하야 望晊兵過하고
遣朱珍躡之하야 戒曰 晊見吾兵이면 必止하리니 望其止 當速返하고 毋與之鬪也하라
已而 晊見珍在後하고 果止어늘 珍卽馳還이라 王令珍引兵蔽大林하고 而自率精騎出其東하야 伏大冢間이러니
晊止而食하고 食畢 拔旗幟하야 馳擊珍이라 珍兵小却이어늘 王引伏兵橫出하야 斷晊軍爲三而擊之한대 晊大敗하야 脫身走
宗權怒斬晊이어늘 而河陽陝洛之兵爲宗權守者 聞蔡精兵皆已殲於汴하고 因各潰去 故諸葛爽將李罕之取河陽張全義取洛陽하야 以來附하다
十月 天子使來하야 賜王紀功碑하다 朱宣朱瑾兵助汴하야 已破宗權東歸
王移檄兗鄆하야 誣其誘汴亡卒以東하고 乃發兵攻之하야 取其曹州濮州하고 遂遣朱珍攻鄆州라가 大敗而還이라
十二月 天子使來하야 賜王及德政碑하다 淮南節度使하니 入揚州
天子以王兼淮南節度使하니 王乃表行密爲副使하고 以行軍司馬李璠爲留後한대 璠之揚州어늘 行密不納하다
文德元年正月 王如淮南이라가 至宋州하다
是時 秦宗權陷襄州하고 以趙德諲爲節度使한대 德諲叛于宗權以來附 天子因以王爲蔡州四面行營都統하고 以德諲爲副하다
僖宗崩하다 天雄軍亂하야 囚其節度樂彦眞하니
其子相州刺史從訓攻魏할새 來乞兵이어늘 遣朱珍하야 助從訓攻魏한대 而魏軍殺彦眞하고 從訓戰死
魏人立羅弘信이어늘 珍乃還하다 張全義取河陽하고 逐李罕之하니 罕之奔于河東이라
李克用遣兵圍河陽이어늘 全義來求救하니 遣丁會牛存節救之하야 擊敗河東兵于하다
五月 行營討蔡州하야 圍之百餘日不克이라 是時 時溥已爲東南面都統하고 又以王統行營이나 而溥猶稱都統이라
王乃上書하야 論溥討蔡無功이나 而不落都統하야 且欲激怒溥하야 以起兵端하다
高騈死 淮南亂한대 楚州刺史劉瓚來奔이어늘 納之
及王兵攻蔡不克還하야 欲攻徐하야 乃遣朱珍將兵數千以東하고 聲言送瓚還楚州 溥怒論己하고 又聞珍以兵來하야 果出兵拒之하다
珍戰于吳康하야 大敗之하야 取其豐蕭二縣하고 遂攻下之 珍屯蕭縣하고 別遣龐師古하야 攻徐州하다
龍紀元年正月 師古敗溥于呂梁한대 淮西牙將申叢執秦宗權하야 折其足하고 將檻送京師러니 別將郭璠殺叢하고 簒宗權以來獻하다
王遣行軍司馬李璠하야 獻俘于京師하고 表郭璠淮西留後 三月 天子封王爲東平王하다
七月 朱珍殺李唐賓한대 王如蕭縣하야 執珍殺之하고 遂攻徐州하다 大雨水하야 不能屯軍而旋하다
秦宗權 遣其弟宗衡하야 掠地淮南하다 是歲 宗衡 爲其將孫儒所殺하고
儒攻楊行密于揚州하야 淮南大亂하니 行密走宣州하고 儒入揚州
大順元年春 遣龐師古하야 攻孫儒於淮南이라가 大敗而還하다
四月 宿州將張筠 以宿州復歸於時溥어늘 王自將攻之不克하다
黃巢敗走어늘 李克用追之하야 至于寃朐하야 不及而旋하야 過汴할새 駐軍于北郊어늘
王邀克用하야 置酒하고 夜以兵攻之하니 克用踰城而免하야 訟其事于京師하니 天子知曲在汴而和解之
至是하야 宰相私與汴交어늘 王厚之以賂하니 濬爲汴請伐河東하다
唐諸大臣 皆以爲不可興師로대 濬挾汴力하야 請益堅하니 天子不得已而許之하다
五月 以濬爲太原四面行營都統하고 王爲東南面招討使 然王不親兵하고 以兵三千屬濬而已
濬屯于陰地하니 河東叛將馮霸 殺潞州守將李克恭來降이라 遣葛從周入潞州한대 李克用遣康君立攻之하니 從周走河陽하다
九月 王如河陽하다 十月 天子以王兼宣義軍節度使 遂如滑州하야 假道于魏하야 以攻河東하고
且責其軍須하니 亦所以怒魏爲兵端也 魏人果以謂非兵所當出하고 而辭以糧乏하야 皆不許하니 於是攻魏
十一月 張濬之師大敗于陰地하다 二年正月 王及魏人戰于內黃하야 大敗之하고 屠故元城하니 羅弘信來送款하다
十月 克宿州하다 十一月 曹州將郭紹賓殺其刺史郭饒來降하다 十二月 丁會敗朱瑾于金鄕하다
景福元年二月 攻鄆州한대 前軍朱友裕敗于斗門하고 王軍後至하야 又敗而還하다
友裕取濮州하고 遂攻徐州하다 二年四月 龐師古克徐州하고 殺時溥하니 王如徐州하야 以師古爲留後하야 遂攻兗鄆하다
乾寧元年二月 王及朱宣戰于漁山하야 大敗之하다 二年八月 又敗宣于梁山하고 十二月 又敗之于鉅野
兗鄆求救于河東하니 李克用發兵救之하야 假道于魏러니 旣而 魏人擊之
克用怒하야 大擧攻魏한대 羅弘信來求救하니 遣葛從周救魏하다 是歲 李克用封晉王하다
三年五月 戰于洹水하야 擒克用子落落하야 送于魏하니 殺之하다 七月 犯京師하니 天子出居于華州
王請以兵赴難이어늘 天子優詔止之하고 又請遷都洛陽하니 不許하다
四年正月 龐師古克鄆州한대 王如鄆州하야 以朱友裕爲留後하고 遂攻兗州하니 朱瑾奔于淮南이어늘 以葛從周爲兗州留後하다
九月 攻淮南할새 龐師古出淸口하고 葛從周出安豐하고 王軍屯于宿州
楊行密 遣瑾하야 先擊淸口하니 師古敗死 從周亟返兵하야 至于渒河어늘 瑾又敗之하니 王懼馳歸하다
光化元年三月 天子以王兼天平軍節度使하다 四月 遣葛從周하야 攻晉之山東하야 取邢洺磁三州하다
襄州趙匡凝 自其父德諲時來附러니 匡凝 又與楊行密李克用通而其事泄하다
七月 遣氏叔琮康懷英하야 攻匡凝하야 取其隨鄧三州하니 匡凝請和어늘 乃止하다 十二月 李罕之 以潞州來降하다
二年 幽州劉仁恭 攻魏한대 羅紹威 來求救하니 王救魏하야 敗仁恭于內黃하다
四月 遣氏叔琮하야 攻晉不克하다 七月 李克用하다
十一月 保義軍亂하야 殺其節度使王珙하고 推其牙將李璠爲留後하니 其將朱簡 殺璠來降이어늘 以簡爲保義軍節度使하다
三年四月 遣從周하야 攻劉仁恭之滄州하야 取其德州하고 及仁恭戰于老鴉堤하야 大敗之하다
八月 晉取洺州한대 王如洺州하야 復取之하다 是時 鎭定皆附于晉이라 遂攻鎭州하야 破臨城하니 王鎔來送款하다
進攻定州 王郜奔于晉하니 其將王處直以定州降하다 唐宦者劉季述 作亂 天子幽于東宮하다
天復元年正月 護駕都頭孫德昭 誅季述하니 天子復立하야 封王爲梁王하다
遣張存敬하야 攻王珂于河中하니하야 下晉絳二州하다 王珂求救于晉한대 晉不能救어늘 乃來降하다
三月 大擧攻晉하니 氏叔琮出太行하야 取澤潞하고 葛從周張存敬侯言張歸厚及鎭定之兵 皆會于太原하야 圍之不克하고 遇雨而退하다
五月 天子以王兼河中尹護國軍節度使하다 六月 晉取慈隰하다
自劉季述等已誅 宰相崔胤外與梁交하야 欲假梁兵하야 盡誅宦者러니
而鳳翔李茂貞邠寧王行瑜等 皆遣子弟以精兵宿衛天子하니 宦者韓全誨等 亦因恃以爲助 天子與胤計事어늘 宦者屬耳하야 頗聞之
乃選美女하야 內之宮中하야 陰令伺察其實이러니 久之 果得胤奏謀所以誅宦者之說이라
全誨等大懼하야 日夜相與涕泣하야 思圖胤以求全이라 胤知謀泄하고 事急 卽矯爲制하야 召梁兵入誅宦者하다
十月 王以宣武宣義天平護國兵七萬으로 至于河中하야 取同州하고 遂攻華州하니 韓建出降이라
全誨等 聞梁王兵且至하고 卽以岐邠宿衛兵劫天子하야 奔于鳳翔이어늘 王乃上書하야 言胤所以召之之意하니
天子怒하야 罷胤相하야 責授工部尙書하고 詔梁兵還鎭하다
王引兵去하야 攻邠州하고 屯于하니 邠州節度使楊崇本以邠寧慶衍四州降이라 崔胤奔于華州하다
二年春 王退軍于河中이러니 晉攻晉絳 遣朱友寧하야 擊敗晉軍于蒲縣하야 取汾慈隰하고 遂圍太原이나 不克而還하니 汾慈隰復入于晉이라
四月 友寧引兵西하야하야 及李茂貞戰于하야 大敗之하다 王兵犯鳳翔 茂貞數出戰하야 輒敗어늘 遂圍之하다
十一月 鄜坊李周彛以兵救鳳翔한대 王遣孔勍襲鄜州하야 虜周彛之族하야 徙于河中하니 周彛乃降하다
是時 岐兵屢敗而圍久하야 城中食盡하니 自天子至後宮 皆凍餒하다
三年正月 茂貞 殺韓全誨等二十人하고 囊其首하야 示梁軍하고 約出天子以爲解甲이라
天子出幸梁軍하야 遣使者馳召崔胤하니 胤托疾不至
王使人戲胤曰 吾未識天子하니 懼其非是 子來爲我辨之하라하다 天子還至興平한대 胤率百官奉迎이라
王自爲天子執轡하고 且泣且行하야 行十餘里止之하니 人見者咸以爲忠이라
己巳 天子至自鳳翔하야 素服哭于太廟而後入하야 殺宦者七百餘人하다
二月甲戌 天子賜王回天再造竭忠守正功臣하고 以輝王祚爲諸道兵馬元帥하고 王爲副元帥하다
爲護駕指揮使하야 以爲天子衛하고 引兵東歸할새 天子餞于延喜樓하야五曲하다
梁兵已西 靑州王師範 遣其將劉鄩하야 襲據梁兗州하다
王已還梁하고 四月 如鄆州하야 遣朱友寧하야 攻靑州한대 師範敗之于石樓하니 友寧死하다
九月 楊師厚 敗靑人于臨朐하야 取其棣州하니 師範以靑州降하고 而鄩亦降하다
友倫擊鞠이라가 墮馬死하니 王怒以爲崔胤殺之하야 하고 其與友倫擊鞠者 皆殺之하다
自天子華州 王請遷都洛陽하니 雖不許 而王命河南張全義하야 修洛陽宮以待하다
天祐元年正月 王如河中하야 遣牙將寇彦卿하야 如京師하야 請遷都洛陽하고 幷徙長安居人以東이라
天子行至陝州한대 王朝于行在하야 先如東都하다
是時 六軍諸衛兵已散亡하야 其從以東者 十數人 打毬供奉內園小兒等二百餘人이라
行至穀水한대 王敎醫官許昭遠하야 告其謀亂하야 悉殺而代之然後以聞이라 由是 天子左右皆梁人矣
四月甲辰 天子至自西都하다 是時 聞梁遷天子洛陽하고 皆欲擧兵討梁하니 王大懼하다
六月 楊崇本 復附于岐 王乃以兵如河中하야 聲言攻崇本하고 遣朱友恭氏叔琮蔣玄暉等行弑하니 하다
十月 朝于京師하야 殺朱友恭氏叔琮하다 十一月 攻淮南하야 取其光州하고 攻壽州不克而旋하다
二年二月 遣蔣玄暉하야等九王于九曲池하다
六月 殺司空裴贄等百餘人하다 七月 復使來하야 賜王迎鑾紀功碑하다
王欲代唐하야 使人諭諸鎭어늘 襄州趙匡凝 以爲不可하니 遣楊師厚攻之하야 取其唐鄧復郢隨均房七州하고 王如襄州하야 軍于漢北하다
九月 師厚破襄州하니 匡凝奔于淮南이라 師厚取하니 荊南留後趙匡明 奔于蜀하야 遂出光州하야 以攻壽州不克하다
天子卜祀天于한대 王怒以爲蔣玄暉等欲祈天以延唐이어늘 天子懼하야 改卜郊하다
十一月辛巳 天子封王爲魏王相國하야 總百揆하야 以宣武宣義天平國天雄武順佑國河陽義武昭義
武寧保義忠義武昭武定泰寧平盧匡國鎭國荊南忠武二十一軍爲魏國하고이어늘 王怒不受하다
十二月 天子以王爲天下兵馬元帥하니 王益怒하야 遣人告樞密使蔣玄暉與何太后私通하야 殺玄暉而焚之하고 遂弑太后于積善宮하고
又殺宰相柳璨太常卿張延範하야 車裂以徇하다 天子下詔하야 以太后故停郊하다
三年春 魏州羅紹威謀殺其하야 來假兵以虞變이라
王爲發兵하야 北攻劉仁恭之滄州한대 兵過魏而紹威已殺牙軍하니 其兵之在外者 果皆叛하야 據貝衛澶博州어늘
王以兵悉殺之하고 遂攻滄州하고 軍于長蘆 劉仁恭求救于晉이어늘 晉人取潞州하니 王乃旋軍하다
開平元年春正月壬寅 天子使御史大夫薛貽矩來勞軍하고 宰相張文蔚率百官來勸進하다
夏四月壬戌 更名晃하고 하고 戊辰 하고 改元國號梁하다
天下之惡梁 久矣 自後唐以來 皆以爲僞也로대 至予論次五代하얀 獨不僞梁하니
議者或譏予大失春秋之旨하야 以謂梁負大惡하니 當加誅絶이어늘 而反進之하니 是獎簒也 非春秋之志也라하거늘
予應之曰 是春秋之志爾 而自立者 而自立者
而自立者 而自立者어늘 聖人於春秋 皆不絶其爲君하니
此予所以不僞梁者 用春秋之法也 然則春秋亦獎簒乎 曰 惟不絶四者之爲君하니 於此 見春秋之意也
聖人之於春秋 用意深이라 故能勸戒切하고 爲言信하니 然後 善惡明이라
夫欲著其罪於後世인댄 在乎不沒其實하니 其實嘗爲君矣 書其爲君하고 其實簒也 書其簒하야
各傳其實하야 而使後世信之 則四君之罪 不可得而掩爾 使爲君者 不得掩其惡然後 人知惡名不可逃
則爲惡者 庶乎其息矣 是謂用意深而勸戒切하고 爲言信而善惡明也
桀紂 不待貶其王而萬世所共惡者也 春秋於大惡之君 不誅絶之者 不害其褒善貶惡之旨也
惟不沒其實하야 以著其罪하야 而信乎後世 與其爲君而不得掩其惡하야 以息人之爲惡 能知春秋之此意然後라야 知予不僞梁之旨也


01. 後梁 太祖本紀
나라가 쇠퇴하자 천자가 宦官을 주벌하지 못하거늘 崔胤 등이 천자를 위해 외부의 강한 藩鎭을 끌어들였는데, 강한 번진이 들어와 환관은 주벌되었지만 당나라 또한 망하였다.
歐陽公이 〈梁本紀〉를 편찬할 때에 묘사가 극진하였지만 李克用과 두 차례 전쟁한 부분은 더욱 공교하다. 내가 이 때문에 이를 수록하여 구양공의 史筆에 대한 재능을 드러내고자 한다.
太祖神武元聖孝皇帝는 성이 朱氏이니, 宋州 碭山 午溝里 사람이다. 아버지인 은 향리에서 五經敎授로 있었다.
아들 셋을 낳으니 全昱이었다. 이 졸하자 세 아들은 가난하여 생계를 유지할 수 없었기에 그 어머니와 함께 蕭縣 사람인 劉崇의 집에서 품을 팔아 생활하였다.
朱全昱은 별다른 재능은 없지만 사람됨이 제법 長者다웠고, 朱存朱溫勇力이 있었는데 주온은 더욱 凶暴하였다.
나라 僖宗 乾符 4년(877)에 黃巢曹州濮州에서 일어나자 朱存朱溫賊中으로 도망쳐 들어갔는데, 황소가 嶺南을 공격할 때에 주존은 戰死하였다.
황소가 京師(長安)를 함락하고는 주온을 東南面行營先鋒使로 삼고서 同州를 공격하여 함락하고 주온을 同州防禦使로 삼았다. 이때에 天子에 있었고 여러 藩鎭에서 병사를 모아 적을 토벌하였다.
주온이 河中王重榮에게 자주 패하자 여러 번 황소에게 병사를 증원해달라 청하거늘 황소의 中尉 孟楷가 이를 묵살하고 황소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주온의 門客 謝瞳이 주온을 설득하기를 “황소는 초야에서 일어났는데 요행이 당나라가 쇠란하여 곧장 그 틈을 타 당나라를 취했을 뿐이고, 功德이 있어 王業을 일으킨 것은 아니니 어찌 함께 일을 이룰 수 있겠습니까.
지금 天子에 있고 여러 번진의 병사들이 날로 모여 부흥을 도모하고 있으니, 이는 당나라의 이 사람들에게 미움을 받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將軍들이 밖에서 힘써 싸우거늘 용렬한 사람들이 내부에서 전횡을 일삼으니, 이는 章邯나라를 등지고 나라로 간 이유입니다.”라고 하였다.
주온이 이 말을 옳다고 여겨 이에 監軍 嚴實을 죽이고 스스로 河中으로 돌아가 王重榮을 통해 항복하니,
都統 王鐸이 천자의 명을 받아 주온을 左金吾衛大將軍 河中行營招討副使에 제수하고, 천자가 주온에게 朱全忠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中和 3년(883) 3월에 朱全忠汴州刺史 宣武軍節度使로 배수하였다. 4월에 각 藩鎭의 병사들이 黃巢를 격파하고 京師를 되찾자 황소는 藍田으로 달아났다.
7월 丁卯日에 주전충이 宣武로 돌아왔다. 이때에 황소가 藍田關을 나와 蔡州를 함락하니 節度使 秦宗權이 배반하여 황소에게 붙었는지라 황소가 마침내 陳州를 포위하였다.
徐州 時溥東南面行營兵馬都統이 되어 동쪽 지역 번진의 병사들을 모아 진주를 구원하니, 陳州刺史 趙犨 또한 주전충에게 救援兵을 청하였다.
시부는 비록 都統이 되었지만 병력을 직접 통솔하지 못하였는데, 중화 4년(884)에 주전충이 비로소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조주를 구원하고 번진의 병사들을 통솔하여 황소의 장수 黃鄴尙讓 등을 패퇴시키니, 조주가 주전충에게 은혜를 입었다 여겨 비로소 依附하였다.
이때에 河東 李克用太行山 쪽으로 병사를 내려보내 黃河를 건너서 낙양으로 나가 동쪽의 병사들과 회합하여 黃巢를 격퇴하였다.
황소가 패주하자 朱全忠과 이극용이 추격하여 郾城에서 패퇴시켰고 황소가 中牟로 달아나거늘 또 王滿에서 패퇴시켰고 황소가 封丘로 달아나거늘 또 크게 패퇴시키니,
황소가 몸만 빠져나와 동쪽으로 달아나 泰山 狼虎谷에 이르러 時溥의 추격병에게 피살되었다. 9월에 천자가 주전충을 檢校司徒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고 沛郡侯로 봉해주었다.
光啓 2년(886) 3월에 爵位가 올라 이 되었다. 義成軍이 반란을 일으키자 節度使 安師儒를 축출하고 牙將 張驍를 추천하여 留後로 삼으니 안사유가 투항하거늘 그를 죽였다.
朱珍李唐賓을 보내 滑州를 함락하고 胡眞을 유후로 삼았다. 12월에 주전충이 吳興郡王으로 옮겨 봉해졌다.
黃巢가 죽은 뒤로 秦宗權稱帝하고서 陝州洛州懷州孟州唐州許州汝州鄭州를 함락하였다.
그리고 자신의 장수 秦賢盧瑭張晊을 보내 汴州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진현은 板橋에 주둔하고 장질은 北郊에 주둔하고 노당은 萬勝에 주둔하여 변주를 에워싸고 36개의 성채를 만들었다.
(朱全忠)은 자신의 군사가 적음을 헤아려 감히 출전하지 않고, 이에 朱珍을 동쪽 방면으로 보내 병사를 모집하게 하고, 兗州鄆州에 원병을 청하였다.
光啓 3년(887) 봄에 주진이 병사 1만 명과 말 수백 필을 얻어 돌아오거늘 비로소 판교에 주둔한 진현을 공격하여 4개의 성채를 빼앗고, 또 만승에서 노당을 공격하니 노당은 패하여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
진종권은 노당 등이 패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스스로 정예병 수천 명을 거느리고 와 북교에 성채를 구축하였다. 5월에 연주의 朱瑾과 운주의 朱宣이 구원하기 위해 달려오자 왕이 군중에서 주연을 베풀었는데,
주연 도중에 왕이 거짓으로 일어나 측간에 가는 척하다가 날랜 군사를 거느리고 북쪽 문을 나가 장질을 습격하였는데, 음악소리가 끊어지지 않으니 장질은 군사가 이른지도 몰랐다.
연주와 운주의 병사가 또 따라서 연합하여 공격해서 마침내 크게 패퇴시켜 2만여 명의 首級을 베니, 진종권과 장질이 밤에 달아나 鄭州를 지나면서 그 성을 도륙하고 떠났다.
秦宗權蔡州에 이르러 다시 張晊을 보내 汴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왕이 장질이 다시 온다는 말을 듣고 封禪寺 뒤편 산등성에 올라 장질의 군대가 지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朱珍을 보내 추격하게 하고는 다음과 같이 경계하였다. “장질이 우리 군대를 보면 반드시 진군을 멈출 것이니, 멈추는 것을 보면 속히 회군하고 그들과 싸우지 말라.”
이윽고 주진이 뒤에 있음을 보고 장질이 과연 진군을 멈추었는데 주진이 곧장 빠르게 회군하였다. 왕이 주진을 시켜 군대를 이끌고 큰 숲속에 숨게 하고, 자신은 정예기병을 이끌고 그 동쪽으로 나가 큰 무덤 사이에 매복하였는데,
장질이 진군을 멈추고 식사를 하고 식사를 마치자마자 旗幟를 뽑아들고 주진을 급히 공격하였다. 주진의 군대가 조금 퇴각하니, 왕이 복병을 이끌고 기습하여 장질의 군대를 셋으로 갈라놓고 공격하였는데, 장질이 크게 패하여 몸만 빼내 달아났다.
진종권이 노하여 장질을 참수하였는데 진종권을 위하여 수비하던 河陽陝州洛州의 병사들이 蔡州의 정예병이 汴州에서 모두 이미 섬멸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각자 흩어져 떠났다. 그러므로 諸葛爽이, 李罕之河陽에서 취한 병사와 張全義가 낙양에서 취한 병사를 거느리고 와 귀부하였다.
10월에 천자의 사신이 와서 왕에게 紀功碑를 하사하였다. 朱宣朱瑾의 군대가 汴州를 구원하러 와 이미 秦宗權을 패퇴시키고 동쪽으로 돌아갔다.
왕이 兗州鄆州에 격문을 보내 주선과 주근이 변주에서 도망친 군사들을 유인하여 동쪽으로 돌아갔다고 誣陷하고는, 곧장 군사를 일으켜 그들을 공격하여 曹州濮州를 취하고 마침내 朱珍을 보내 운주를 공격하게 하였으나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12월에 천자의 사신이 와서 왕에게 鐵券德政碑를 하사하였다. 淮南節度使 高騈이 죽자 楊行密揚州로 들어왔다.
鐵券鐵券
천자가 왕에게 회남절도사를 겸임하게 하니 왕이 이에 표문을 올려 추천하여 양행밀을 副使로 삼고 行軍司馬 李璠留後로 삼았는데, 이번이 양주로 가자 양행밀이 안으로 들이지 않았다.
文德 元年(888) 正月에 왕이 淮南으로 가다 宋州에 이르러 돌아왔다.
이때에 秦宗權襄州를 함락하고 趙德諲節度使로 삼았는데, 조덕인이 진종권을 배반하고 왕에게 와서 붙었다. 천자가 이로 인해 왕을 蔡州四面行營都統으로 삼고 조덕인을 로 삼았다.
3월 癸卯日 僖宗이 붕어하였다. 天雄軍이 반란을 일으켜 節度使 樂彦眞을 구금하니,
그의 아들 相州刺史 樂從訓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에 원병을 청하자 朱珍을 보내 樂從訓을 도와 나라를 공격하게 하였는데, 나라 병사가 악언진을 죽였고 악종훈도 전사하였다.
나라 사람이 羅弘信을 옹립하자 주진이 이에 회군하였다. 張全義河陽을 점령하고 李罕之를 추격하니 이한지는 河東으로 달아났다.
李克用이 병사를 보내 하양을 포위하자 장전의가 와서 구원을 청하였는데, 丁會牛存節을 보내 구원하게 하여 沇河에서 하동의 병사를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5월에 行營蔡州를 토벌하여 100여 일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이때에 時溥는 이미 東南面都統이 되었고, 또 왕에게 행영을 통솔하게 하였으나 시부는 오히려 都統이라 칭하였다.
왕이 이에 上書하여 시부는 채주를 토벌할 때에 공이 없었는데도 도통의 職務에서 파면되지 않았음을 논핵하여 장차 시부를 격발시켜 노하게 하여 병란의 단초를 야기하려고 하였다.
당초에 高騈이 죽어 淮南이 혼란하자 楚州刺史 劉瓚이 망명하거늘 왕이 받아주었다.
왕의 병사가 채주를 공격하다 이기지 못하고 돌아오자 徐州를 공격하기 위해 朱珍을 보내 병사 수천 명을 거느리고 동쪽으로 가게 하고 유찬을 송환하고 楚州를 돌려준 일에 대해 소문을 냈다. 시부가 자신을 논죄한 것에 노하였고, 또 주진이 병사를 거느리고 왔다는 소식을 듣고는 과연 출병하여 이를 막았다.
주진이 吳康에서 싸워 크게 패퇴시켜 豐縣蕭縣 두 현을 취하고 마침내 宿州를 공격하여 함락하였다. 주진은 소현에 주둔하고 따로 龐師古를 보내 徐州를 공격하게 하였다.
龍紀 元年(889) 정월에 龐師古呂梁에서 時溥를 패퇴시켰다. 淮西牙將 申叢秦宗權을 잡아 다리를 부러뜨리고 檻車에 실어 京師로 보내려 하였는데, 別將 郭璠이 신총을 죽이고 진종권을 빼앗아 왕에게 와서 바쳤다.
왕이 行軍司馬 李璠을 보내 京師에 진종권을 포로로 바치고, 곽번을 淮西留後로 삼아달라고 表文을 올려 奏請하였다. 3월에 천자가 왕을 東平王으로 봉했다.
7월에 朱珍李唐賓을 죽이자 왕이 蕭縣으로 가 주진을 잡아 죽이고 마침내 徐州를 공격하였다. 겨울에 큰 비가 내려 물이 불어 군대를 주둔할 수 없게 되자 회군하였다.
당초에 秦宗權이 아우 秦宗衡을 보내 淮南 땅을 공략하게 하였다. 이해에 진종형이 그의 장수 孫儒에게 살해당하였고,
손유가 揚州에서 楊行密을 공격하여 淮南이 크게 혼란해지니 양행밀은 宣州로 달아나고 손유는 양주로 들어갔다.
大順 元年(890) 봄에 龐師古를 보내 회남에서 손유를 공격하다가 크게 패하고 돌아왔다.
4월에 宿州將 張筠宿州를 가지고 다시 時溥에게 귀부하였는데, 왕이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당초에 黃巢가 패주하였는데 李克用이 추격하다 寃朐에 이르러 따라잡지 못하고 돌아와 汴州를 지날 때에 북쪽 교외에 군을 주둔시켰다.
왕이 이극용을 맞이하여 上源驛에 주연을 베풀고 밤에 병사를 풀어 공격하니 이극용은 성을 넘어 달아나 화를 면하여 이 일을 京師訴訟하자, 천자가 변주에서 일어난 曲折을 알고서 和解를 권하였다.
이때에 이르러 宰相 張濬이 개인적으로 변주와 交通하거늘 왕이 뇌물을 후하게 주니, 장준이 변주를 위해 河東을 정벌할 것을 청하였다.
나라의 大臣들은 모두 군사를 일으켜서는 안 된다고 하였지만 장준이 변주의 힘을 믿고 더욱 강하게 청하니, 천자가 어쩔 수 없이 허락하였다.
5월에 張濬太原四面行營都統으로 삼고 왕을 東南面招討使로 삼았다. 그러나 왕은 직접 병사를 통솔하지 않고 병사 3천 명을 장준에게 통솔하게 하였을 뿐이었다.
장준이 陰地에 주둔하자 河東에서 반란을 일으킨 장수 馮霸潞州守將 李克恭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葛從周를 보내 潞州로 들어가게 하였는데, 李克用康君立을 보내 공격하게 하니 갈종주는 河陽으로 달아났다.
9월에 왕이 하양으로 갔다. 10월에 천자가 왕에게 宣義軍節度使를 겸임하게 하였다. 왕이 마침내 滑州로 가서 나라에게 길을 빌려 河東을 공격하려 하였고,
나라에게 군수품을 요구하니, 또한 나라를 격발시켜 노하게 하여 병란을 일으킬 단초를 야기하고자 한 것이다. 나라 사람이 과연 왕의 군사가 지나갈 수는 없다고 생각하고 양식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거절하여 모두 허락하지 않으니, 이에 나라를 공격하였다.
11월에 장준의 군사가 음지에서 크게 패하였다. 大順 2년(891) 정월에 왕과 나라 사람이 內黃에서 싸워 나라를 크게 패퇴시키고 옛 元城을 도륙하니, 羅弘信이 항복문서를 보내왔다.
10월에 宿州를 함락하였다. 11월에 曹州 장수 郭紹賓이 그 刺史 郭饒를 죽이고 와서 항복하였다. 12월에 丁會金鄕에서 朱瑾을 패퇴시켰다.
景福 元年(892) 2월에 鄆州를 공격하였는데, 前軍 朱友裕斗門에서 패하였고, 왕의 군대가 후에 이르러 또 패하여 회군하였다.
겨울에 주우유가 濮州를 취하고 마침내 徐州를 공격하였다. 경복 2년(893) 4월에 龐師古가 서주를 함락하고 時溥를 죽이니, 왕은 서주로 가서 방사고를 留後로 삼아 兗州鄆州를 공격하였다.
乾寧 元年(894) 2월에 왕이 朱宣漁山에서 전투하여 크게 패퇴시켰다. 건녕 2년(895) 8월 또 梁山에서 朱宣을 패퇴시켰다. 12월에 또 鉅野에서 패퇴시켰다.
연주와 운주의 사람들이 河東에 원병을 청하니 李克用이 군사를 일으켜 구원하려 하여 나라에게 길을 빌렸으나 얼마 뒤 나라 사람이 공격하였다.
이극용이 노하여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공격하였는데, 羅弘信이 와서 구원을 청하니, 葛從周를 보내 나라를 구원하게 하였다. 이해에 이극용이 晉王에 봉해졌다.
건녕 3년(896) 5월에 洹水에서 전투하여 이극용의 아들 落落을 사로잡아 나라에 보냈는데, 나라에서 그를 죽였다. 7월에 鳳翔李茂貞京師를 범하자 천자가 궁을 나가 華州로 갔다.
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환란에 달려가기를 청하였는데, 천자가 優渥한 조서를 내려 만류하고, 또 洛陽으로 遷都할 것을 청하니 허락하지 않았다.
乾寧 4년(897) 정월에 龐師古鄆州를 함락하자 왕이 운주로 가서 朱友裕留後로 삼아 마침내 兗州를 공격하니, 朱瑾淮南으로 달아나거늘 葛從周兗州留後로 삼았다.
9월에 淮南을 공격할 때에 방사고는 淸口로 나가고 갈종주는 安豐으로 나가고 왕의 군대는 宿州에 주둔하고 있었다.
楊行密이 주근을 보내 청구를 먼저 공격하게 하니 방사고가 패하여 죽었다. 갈종주가 급히 병사를 돌려 渒河에 이르렀는데, 주근이 또 패퇴시키니 왕이 두려워 급히 돌아갔다.
光化 元年(898) 3월에 천자가 왕에게 天平軍節度使를 겸하게 하였다. 4월에 葛從周를 보내 나라의 山東을 공격하게 하여 邢州洺州磁州를 취하였다.
襄州趙匡凝은 그 아버지 趙德諲이 생존해 있을 때부터 歸附하였는데, 조광응은 또 楊行密李克用과 내통하다 그 일이 누설되었다.
7월에 氏叔琮康懷英을 보내어 조광응을 공격하여 泌州隨州鄧州를 취하니, 조광응이 화친을 청하거늘 이에 공격을 멈추었다. 12월에 李罕之潞州를 가지고 와 항복하였다.
光化 2년(899)에 幽州 劉仁恭나라를 공격하였는데, 羅紹威가 와서 구원을 청하니, 왕이 를 구원하여 內黃에서 유인공을 패퇴시켰다.
4월에 氏叔琮을 보내 나라의 太原을 공격하게 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7월에 李克用澤州潞州를 공격하여 취하였다.
11월에 保義軍이 난을 일으켜 節度使 王珙을 죽이고 왕공의 牙將 李璠을 추대하여 留後로 삼았는데, 이번의 장수 朱簡이 이번을 죽이고 와서 항복하니 주간을 保義軍節度使로 삼았다.
광화 3년(900) 4월에 葛從周를 보내 유인공의 滄州를 공격하여 德州를 공격하여 취하고 유인공과 老鴉堤에서 전투를 벌여 크게 패퇴시켰다.
8월에 나라가 洺州를 공격하여 취하였는데, 왕이 명주로 가서 다시 공격하여 취하였다. 이때에 鎭州定州가 모두 나라에 붙었기에 마침내 진주를 공격하여 臨城을 격파하니 王鎔이 항복문서를 보냈다.
진군하여 정주를 공격하자 王郜나라로 달아나니, 그의 장수 王處直이 정주를 가지고 항복하였다. 나라의 환관 劉季述이 난을 일으킴에 천자가 東宮에 유폐되었다.
天復 元年(901) 정월에 護駕都頭 孫德昭劉季述을 죽이니, 천자가 다시 복위하여 왕을 梁王에 봉하였다.
張存敬을 보내 河中에서 王珂를 공격하니, 장존경이 含山으로 나가 晉州絳州 두 주를 함락하였다. 왕가가 에 구원을 청하였는데 나라가 구원하지 못하거늘 이에 와서 투항하였다.
3월에 크게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공격하니, 氏叔琮太行山으로 나가 澤州潞州를 취하였고, 葛從周張存敬侯言張歸厚鎭州定州의 병사들이 모두 太原에 모여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비를 만나 퇴각하였다.
5월에 천자가 왕에게 河中尹 護國軍節度使를 겸하게 하였다. 6월에 나라가 慈州隰州을 취하였다.
劉季述 등이 이미 주살된 뒤로 宰相 崔胤이 밖으로 나라와 交通하여 나라의 병사를 빌려 宦官들을 모두 죽이려 하였는데,
鳳翔李茂貞邠寧王行瑜 등이 모두 자제들을 보내 정예병으로 천자를 宿衛하게 하니, 환관 韓全誨 등이 또한 이들의 힘을 믿고 돕는 세력으로 삼았다. 천자가 최윤과 國事를 계획하거늘 환관들이 몰래 엿들어 계획에 대해 알게 된 것이 많았다.
이에 미녀를 뽑아 궁중으로 들여 그들에게 몰래 실정을 정탐하게 하였는데, 오래 지나 과연 최윤이 도모한 계획이 환관들을 주살하고자 한다는 내용을 알게 되었다.
한전회 등이 크게 두려워하여 밤낮으로 서로 울면서 최윤을 도모하여 일신을 보전할 방법을 생각하였다. 최윤이 계획이 누설된 것을 알고 일이 다급해지자 즉시 거짓으로 詔書를 작성하여 나라 병사를 불러들여 환관들을 주살하였다.
10월에 왕이 宣武宣義天平護國의 병사 7만을 거느리고 河中에 이르러 同州를 취하고 마침내 華州를 공격하니, 韓建이 나와 항복하였다.
韓全誨 등은 梁王의 병사가 또 이르렀다는 말을 듣고 즉시 岐州邠州의 숙위병으로 천자를 겁박하여 鳳翔으로 달아나거늘 왕이 이에 上書하여 崔胤이 자신을 부른 뜻을 말하니,
천자가 노하여 최윤을 宰相에서 파직하여 工部尙書에 강등시켜 제수하였고, 조서를 내려 나라 병사를 鎭州로 돌아가게 하였다.
왕이 병사를 이끌고 떠나 邠州를 공격하고 三原에 주둔하니, 邠州節度使 楊崇本邠州寧州慶州衍州를 바치고 항복하였다. 최윤은 華州로 달아났다.
天復 2년(902) 봄에 왕이 河中으로 군을 물렸는데, 나라가 晉州絳州를 공격하자 朱友寧을 보내 蒲縣에서 나라 군사를 패퇴시켜 汾州慈州隰州를 취하고 마침내 太原을 포위하였지만 이기지 못하고 돌아오니, 분주‧자주‧습주가 다시 나라로 편입되었다.
4월에 朱友寧이 병사를 이끌고 서쪽으로 가 興平에 이르러 李茂貞武功에서 전투하여 크게 패퇴시켰다. 왕의 병사가 鳳翔을 침범하자 이무정이 수차례 출전하여 번번이 패하였는데 마침내 포위되었다.
11월에 鄜坊李周彛가 병사를 거느리고 와 봉상을 구원하려 하였는데, 왕이 孔勍을 보내 鄜州을 습격하여 이주이의 가족을 사로잡아 河中으로 보내니, 이주이가 비로소 항복하였다.
이때에 岐州의 병사가 누차 패하고 포위된 지 오래되어 성안에 식량이 다 떨어지니, 천자로부터 후궁에 이르기까지 모두 추위에 떨고 굶주렸다.
天復 3년(903) 정월에 李茂貞韓全誨 등 20인을 죽이고 首級을 주머니에 담아 나라 군대에 보이고서 천자를 내보내면 무장을 해제할 것을 약속하였다.
천자가 나가 나라 군대로 행차하여 使者를 보내 崔胤을 급히 소환하니, 최윤은 병을 핑계 대고 오지 않았다.
왕이 사람을 보내 최윤을 조롱하며 말하기를 “나는 천자를 알지 못하니, 온 사람이 천자가 아닐까 염려된다. 그대가 와서 나를 위해 판별해달라.”라고 하였다. 천자가 돌아와 興平에 이르렀는데, 최윤이 백관을 거느리고 공경히 맞이하였다.
왕이 스스로 천자를 위하여 말고삐를 잡고 한편으로 눈물을 흘리고 한편으로 가서 10여 리를 가다가 멈추니, 보는 사람들이 모두 충성스럽다고 하였다.
己巳日에 천자가 鳳翔으로부터 이르러 素服을 입고 太廟에서 곡한 뒤에 들어가 환관 700여 명을 죽였다.
2월 甲戌日에 천자가 왕에게 回天再造竭忠守正功臣이라는 칭호를 하사하고, 輝王 李祚諸道兵馬元帥로 삼고 왕을 副元帥로 삼았다.
왕이 이에 아들 朱友倫을 남겨두고 護駕指揮使로 삼아 천자의 호위를 맡기고 병사를 이끌고 동쪽으로 돌아갈 때에 천자가 延喜樓에서 전별연을 열고서 〈楊柳枝〉 다섯 을 연주하게 하였다.
당초에 나라 병사가 이미 서쪽으로 감에 靑州王師範이 장수 劉鄩을 보내 나라 兗州를 습격하여 점거하였다.
왕이 이미 나라로 돌아오고 4월에 鄆州로 가서 朱友寧을 보내 靑州를 공격하였는데, 왕사범이 石樓에서 패퇴하니 주우녕이 전사하였다.
9월에 楊師厚臨朐에서 청주의 군대를 패퇴시켜 棣州를 취하니 왕사범은 청주를 바치고 항복하였고 유심 또한 항복하였다.
朱友倫擊鞠을 하다 말에서 떨어져 죽으니, 왕이 노하여 崔胤이 그를 죽였다고 여겨 朱友謙을 보내 京師에서 최윤을 죽이고, 주우륜과 함께 격국을 했던 사람을 모두 죽였다.
천자가 華州로 파천하였을 때부터 왕이 洛陽으로 천도할 것을 청하니, 비록 허락을 얻지는 못하였지만 왕이 河南 張全義에게 명하여 洛陽宮을 수축하고 기다리게 하였다.
天祐 元年(904) 정월에 왕이 河中으로 가서 牙將 寇彦卿을 보내 京師로 가서 洛陽으로 천도하고 아울러 長安에 거주하는 사람들을 동쪽으로 이주시킬 것을 청하게 하였다.
천자가 幸行하여 陝州에 이르렀는데, 왕이 行在所에서 조회한 다음 먼저 東都(洛陽)로 갔다.
이때에 六軍의 위병들이 이미 흩어지고 도망하여 천자를 동쪽으로 호종하는 자는 小黃門 10여 명과 打毬供奉內園의 어린아이 등 200여 명뿐이었다.
길을 가다 穀水에 이르렀는데, 왕이 醫官 許昭遠을 시켜 저들이 반란을 도모하고 있다고 말하고 모두 죽여 다른 사람으로 대체를 한 뒤에 천자에게 아뢰었다. 이로 인해 천자의 左右는 모두 나라 사람으로 채워졌다.
4월 甲辰日에 천자가 西都로부터 東都에 이르렀다. 이때에 晉王 李克用, 岐王 李茂貞, 楚王 趙匡凝, 蜀王 王建, 吳王 楊行密이, 梁王이 천자를 낙양으로 천도시켰다는 말을 듣고 모두 군사를 일으켜 나라를 토벌하려고 하니 왕이 크게 두려워하였다.
6월에 楊崇本이 다시 岐王에게 붙었다. 왕이 이에 병사를 河中으로 거느리고 가서 양숭본을 공격한다고 소문을 내고 朱友恭氏叔琮蔣玄暉 등을 보내 弑逆을 행하니 昭宗崩御하였다.
10월에 왕이 京師에서 朝見(조현)하여 朱友恭氏叔琮을 죽였다. 11월에 淮南을 공격하여 光州를 취하고 壽州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고 회군하였다.
天祐 2년(905) 2월에 蔣玄暉를 보내 德王 李裕 등 아홉 명의 왕을 九曲池에서 죽였다.
6월에 司空 裴贄 등 100여 명을 죽였다. 7월에 천자가 다시 사신을 보내와 왕에게 迎鑾紀功碑를 하사하였다.
왕이 나라를 대신하고자 하여 사람을 보내 여러 에 이런 뜻을 알렸는데, 襄州趙匡凝이 불가하다고 하니 楊師厚를 보내 공격하게 하여 唐州鄧州復州郢州隨州均州房州 7개 를 취하고 왕은 양주로 가서 漢水 북쪽에 주둔하였다.
9월에 양사후가 양주를 격파하니, 조광응이 회남으로 달아났다. 양사후가 荊南을 취하니, 荊南留後 趙匡明으로 달아나, 마침내 光州로 나가 壽州를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다.
천자가 南郊에서 하늘에 제사 지낼 날을 점치자 왕이 노하여 “蔣玄暉 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내 나라의 國運을 연장시키려 한다.”라고 하거늘, 천자가 두려워하여 교외에서 제사 지낼 날을 다시 점쳤다.
11월 辛巳日에 천자가 왕을 봉하여 魏王相國으로 삼고서 백관을 총괄하게 하고서 宣武宣義天平護國天雄武順佑國河陽義武昭義
武寧保義忠義武昭武定泰寧平盧匡國鎭國荊南忠武 21개의 魏國으로 삼고 九錫을 갖추어 내렸는데, 왕이 노하여 받지 않았다.
12월에 천자가 왕을 天下兵馬元帥로 삼았는데, 왕이 더욱 노하여 사람을 보내 樞密使 蔣玄暉何太后( 昭宗)와 私通하였음을 고하고 장현휘를 죽여 불태우고 마침내 太后積善宮에서 시해하였다.
宰相 柳璨太常卿 張延範을 죽여 車裂하고서 조리돌렸다. 천자가 詔書를 내려 태후의 연고로 郊祭를 정지한다고 알렸다.
天祐 3년(906) 봄에 魏州羅紹威牙軍을 죽일 것을 계획하고서 왕에게 와서 병사를 빌려 變故에 대비하려고 하였다.
왕이 이를 위해 병사를 출병하여 북쪽으로 劉仁恭滄州를 공격하려고 하였는데, 병사가 위주를 지날 때에 나소위가 이미 아군을 죽이니 외부에 있던 아군들이 과연 모두 반란을 일으켜 貝州衛州澶州博州를 점령하였는데,
왕이 병사를 거느리고 가 모두 죽이고 마침내 창주를 공격하고 長蘆에 주둔하였다. 劉仁恭나라에 구원을 청하거늘 나라 사람이 潞州를 점령하니 왕이 이에 회군하였다.
開平 元年(907) 봄 정월 壬寅日에 천자가 御史大夫 薛貽矩를 보내와 군대를 위로하고, 宰相 張文蔚가 백관을 거느리고 와 제위에 오르기를 권하였다.
여름 4월 壬戌日에 이름을 으로 바꾸었다. 甲子日에 황제에 즉위하였다. 戊辰日에 크게 사면령을 내리고 연호를 바꾸고 국호를 이라 하였다.
오호라! 천하가 나라를 미워한 지가 오래되었다. 後唐 이래로 모두 僞朝라고들 하는데, 내가 五代論次함에 이르러서는 유독 나라를 위조라 하지 않았다.
그러자 의논하는 자들이 혹 내가 ≪春秋≫의 뜻을 크게 그르쳤다고 비난하면서 말하였다. “나라는 큰 악을 저질렀으므로 응당 誅罰하여 단절시켜야 하는데 오히려 치켜세웠으니, 이는 簒奪을 장려한 것이요 ≪춘추≫의 뜻이 아니다.”
내가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이것이 ≪춘추≫의 뜻이다. 桓公隱公을 시해하고서 스스로 군주가 된 자이고, 宣公은 아들 을 죽이고 스스로 군주가 된 자이고,
厲公世子 을 축출하고 스스로 군주가 된 자이고, 나라 公孫剽는 자신의 군주 을 축출하고 스스로 군주가 된 자인데 성인께서는 ≪춘추≫에 모두 단절시키지 않고 군주가 된 사실을 그대로 적었으니,
여기에서 내가 나라를 위조라 하지 않은 것은 ≪춘추≫의 筆法을 따른 것이다.” “그렇다면 ≪춘추≫ 또한 찬탈을 장려한 것인가.” 다음과 같이 응답하였다. “네 사람이 임금이 된 것을 단절시키지 않았으니, 여기에서 ≪춘추≫의 志意를 드러냈다.
聖人이 ≪춘추≫에 마음을 쓴 것이 깊기 때문에 勸戒가 절실하고, 말을 미덥게 하였으니, 그런 뒤에 善惡이 분명해진다.
무릇 후세에 죄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사실을 매몰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사실이 군주가 되었다면 군주가 되었다고 쓰고, 사실이 찬탈한 것이라면 찬탈하였다고 써서,
각각 사실을 전하여 후세로 하여금 미덥게 하면 네 임금의 죄를 덮을 수가 없다. 군주가 된 자로 하여금 죄악을 덮을 수 없게 한 뒤에 사람들로 하여금 惡名을 피할 수 없음을 알게 하였으니,
이렇게 되면 악을 행하는 자가 거의 사라질 것이다. 이를 일러 저술한 뜻이 깊고 권계가 절실하며 그 말이 미덥고 선악이 분명하다고 하는 것이다.
桀紂는 그 왕을 貶下하기를 기다리지 않아도 萬世에서 공동으로 미워하는 자이니, ≪춘추≫가 크게 악한 군주에 대해 주벌하여 단절시키지 않는 것은 선을 襃獎하고 악을 貶斥하는 ≪춘추≫의 취지에 방해되지 않기 때문이다.
오직 사실을 매몰하지 않음으로써 그 죄를 드러내어 후세에 미덥게 한 것과 군주가 된 자가 죄악을 덮지 못하게 하여 악을 행하는 사람이 사라지게 한 것은 ≪춘추≫의 이러한 의도를 능히 알아야만 내가 을 위조라고 하지 않은 뜻을 알 것이다.”


역주
역주1 梁太祖紀 : 徐無黨의 註釋에 “本紀는 옛 것으로 인하여 命名한 것이다. 本은 처음 일어난 바를 근본한다는 것이고, 紀는 일과 시간을 차례대로 기술한다는 것이다. 즉위 이전의 일을 상세하게 기록한 것은 유래를 거슬러 찾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곡진하고 자세하게 기술한 것이니, 천자가 된 과정이 점차적으로 이루어졌는지 갑자기 이루어졌는지를 볼 수 있다. 즉위 이후의 일을 간략하게 기술한 것은 尊位에 거하여 임무가 중하기에 책임질 것이 크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서술한 바가 간략하니, 간략해야만 이에 法을 세울 수 있다.[本紀 因舊以爲名 本原其所始起 而紀次其事與時也 卽位以前 其事詳 原本其所自來 故曲而備之 見其起之有漸有暴也 卽位以後 其事畧 居尊任重 所責者大 故所書者簡 惟簡乃可立法]”라고 하였다.
이 주석은 ≪新五代史≫에 수록된 歐陽脩의 제자인 서무당이 기술한 것이다. 서무당의 주석에는 구양수의 역사관, 褒貶의식, ≪신오대사≫의 집필의도 등이 잘 드러나 있으니, ≪廬陵史抄≫를 이해하는 데에 반드시 필요하다 할 수 있다. 따라서 앞으로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필요한 부분은 주석으로 달고, “徐無黨의 註釋에 ‘……’라고 하였다.”로 기술하고 출전은 따로 밝히지 않는다.
역주2 本紀 : 後梁 太祖(852~912 姓名이 朱溫으로 宋州 碭山 사람이다. 〈梁太祖紀〉는 ≪舊五代史≫ 卷1 〈梁書 第1〉, ≪新五代史≫ 卷1 〈本紀 梁本紀〉에 각각 실려 있다.
그는 어릴 적에 黃巢의 徒黨이었다가 882년 관군에 항복하여 僖宗으로부터 全忠이라는 이름을
後梁 太祖後梁 太祖
하사받았다. 그 뒤 황소의 잔당과 그 밖의 군웅을 평정하여 그 공으로 梁王에 봉해지고 宣武, 宣宜, 護國, 忠武 네 鎭의 節度使를 겸하였다. 뒤에 昭宗을 살해한 뒤 哀帝를 세웠고, 다시 907년에 애제로부터 제위를 찬탈하여 梁나라를 세웠다.
이 전기는 太祖가 황소의 도당이었다가 唐나라에 투항하는 과정, 唐에 투항한 뒤 황소의 잔당을 평정하고 유력 절도사들과 雌雄을 겨루는 과정, 소종을 시해하고 애제를 세운 후 梁나라를 건국하는 과정 등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하지만 ≪구오대사≫에서는 태조에 대해 “백성을 걱정하고 농업을 중시하였으며 더욱이 식량과 병사를 풍족하게 만들 것을 생각하였다. 즉위한 뒤에는 陽과 陰이 지나치게 성할 때마다 승상에게 명하여 그 일을 직접 다스리게 한 적이 많았다.[憂民重農 尤以足食足兵爲念 爰自御極 每愆陽積陰 多命丞相躬其事]”라고 하여 간혹 태조의 장점을 서술한 반면, ≪신오대사≫에서는 일체 이러한 내용을 배제하고 권력을 향한 야망에서 비롯된 권모술수와 잔혹한 모습 등 부정적인 모습만을 서술하였다. 이는 태조의 부정적인 모습을 더욱 분명하게 드러내 唐나라를 멸하고 스스로 황위에 오른 태조의 정당성을 부정함과 동시에 후세에 勸戒를 드리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歐陽脩는 태조의 부정적인 면을 주로 드러내면서도 梁나라를 직접 僞朝라고 기록하지 않았는데, 여기에 대해 史論에서 “聖人이 ≪春秋≫에 마음을 쓴 것이 깊기 때문에 권계가 절실하고, 말을 미덥게 하였으니, 그런 뒤에 善惡이 분명해진다. 무릇 후세에 죄를 드러내고자 한다면 그 방법은 사실을 매몰하지 않는 데에 있으니, 사실이 군주가 되었다면 군주가 되었다고 쓰고 사실이 찬탈한 것이라면 찬탈하였다고 써서 각각 사실을 전하여 후세로 하여금 미덥게 하면 네 임금의 죄를 덮을 수가 없다.”라고 하였다. 즉 구양수는 ≪춘추≫ 筆法에 의거하여 있었던 사실을 그대로 서술해두기만 해도 후인들이 그 사실에 의거하여 태조의 죄악을 분명하게 판단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後梁(907~923 태조 朱全忠에 의해 건국되었고 大梁 汴州에 도읍을 정하였다. 후에 태조가 養子인 博王 朱友文에게 讓位하려 하였으나 912년에 큰 아들 朱友珪가 반란을 일으켜 태조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하였다. 913년에 동생 朱友貞이 주우규를 시해하고 황위를 찬탈하였는데, 그해에 晉王 李存勗에게 패하여 자결하고 梁나라도 망하게 된다.
역주3 李克用 : 856~908. 唐나라 말기 突厥 沙陀部 사람으로 한쪽 눈을 잃어 獨眼龍으로도 불렸다. 後唐의 태조로, 朱邪赤心의 아들이다. 젊을 때부터 용맹해 雲州를 거점으로 하며 留后라 자칭하다 당나라 군대에 패하자 韃靼으로 달아났다. 黃巢의 난에 황명을 받아 사타족을 이끌고 와 황소군을 대파하고 장안을 탈환하였다. 후에 朱全忠이 당나라를 멸하고 稱帝하였지만 여전히 당나라를 섬겼다.
역주4 全昱無他材能……勇有力 : ≪五代史記注≫ 卷1에 “≪淸異錄≫에 梁나라 太祖는 처음 起兵했을 때부터 매번 左右를 호령할 때에 큰 붉은 깃발을 가지고 완급을 조절할 때에 깃발을 사용하여 군대를 지휘하였는데, 스스로 이를 가리켜 ‘火龍標’라고 하였다.[淸異錄 梁祖自初起 每令左右 持大赤旗 緩急之際 用以揮軍 祖自目爲火龍標]”라고 하였다.
역주5 黃巢 : ?~884. 唐나라 말기 曹州 寃句 사람이다. 僖宗 乾符 2년(875) 王仙芝가 반란을 일으키자 그도 무리를 모아 호응했다. 건부 5년(878) 왕선지가 전사하자 전군을 통솔하면서 衝天大將軍이라 하면서 中原과 江南 등 전국 각지를 전전하면서 전투를 벌였다. 후에 洛陽과 潼關을 함락하고 長安에 입성하여 스스로 황제에 올라 국호를 大齊, 연호를 金統이라 하였다. 中和 3년(884) 장안에서 철수하여 蔡州를 함락하고 陳州를 포위했지만 3백 일 동안 함락시키지 못했다.
역주6 曹濮 : 曹州와 濮州를 가리키는데, 조주는 지금의 山東省 曹縣 일대이고, 복주는 지금의 河南省 范縣 일대이다.
역주7 同州 : 지금의 陝西省 大荔縣 일대이다.
역주8 諸鎭 : 徐無黨의 註釋에 “諸鎭은 당시의 말을 기록한 것이다. 唐나라는 節度使가 다스리던 軍州를 두고 藩鎭이라고 하였다. 그러므로 赴鎭‧移鎭이라는 말이 있는 것이다.[諸鎭 記當時語也 唐謂節度使所治軍州爲藩鎭 故有赴鎭移鎭之語]”라고 하였다.
역주9 章邯所以背秦而歸楚 : 章邯은 秦나라의 猛將이었다. 후에 項羽에게 밀려 전세가 불리하게 되자 司馬欣을 咸陽으로 보내어 상황을 보고하고 지시를 받아 오게 하였다. 사마흔이 함양으로 가서 司馬門에서 3일을 기다렸으나 당시 권력자인 宦官 趙高가 사마흔을 만나주지 않자 조고의 전횡에 회의를 느껴 항우에게 투항하였다.(≪史記≫ 卷7 〈項羽本紀〉)
역주10 汴州 : 戰國時代에는 大梁, 東魏 때에는 梁州라고 했다가, 隋‧唐에 이르러 汴州로 변경하였다. 五代 이후로는 여러 조대에 걸쳐 수도로 정했기 때문에 汴京이라 칭하게 되었다. 지금의 河南省 開封 일대를 말한다.
역주11 藍田 : 陝西省 西安市 동부 渭水 평원의 남부, 秦嶺山 북쪽 기슭에 위치한 지역이다. 예로부터 아름다운 구슬 산지로 유명한 藍田山이 있어서 秦나라 때부터 藍田縣으로 불렀다
역주12 藍田關 : 長安의 防衛地이다.
역주13 蔡州 : 지금의 河南省 汝陽市 부근이다.
역주14 秦宗權 : ?~889. 당나라 蔡州 上蔡 사람이다. 僖宗 廣明 원년(880) 黃巢의 반군이 淮州를 넘어서자 당시 파견되어 채주에 이르러 황소를 막았지만, 中和 3년(883) 전투에서 패하고 황소에게 항복하였다. 황소가 죽은 뒤 稱帝하였는데, 후에 朱全忠과 싸워 패한 뒤 部將 申叢에게 사로잡혀 京師에 이르러 처형되었다.
역주15 徐州時溥 : 徐無黨의 註釋에 “무릇 某州某人이라고 말한 것은 모두 그 지역의 節度使이다.[凡稱某州某人者 皆其節度使]”라고 하였다.
역주16 太行(항) : 山西省과 河北省의 경계에 있는 太行山을 가리킨다.
역주17 郾城 : 河南省 漯河에 있는 지명이다.
역주18 中牟 : 河南省 鄭州에 있는 지명이다.
역주19 封丘 : 河南省 新鄕에 있는 지명이다.
역주20 (賓)[珍] : 저본에는 ‘賓’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珍’으로 바로잡았다.
역주21 是時……徙封吳興郡王 : 徐無黨의 註釋에 “처음에는 이름으로 불렀고 다음으로 爵位로 불렀고 다음으로 帝로 불렀으니, 점차적으로 〈帝에까지 오른 것이다.〉 작위가 王에 이른 뒤에 작위로 부른 것은 帝에 가까워졌음을 드러낸 것이다.[始而稱名 旣而稱爵 旣而稱帝 漸也 爵至王而後稱 著其逼者]”라고 하였다.
역주22 鄆州朱宣來赴援 : 徐無黨의 註釋에 “세속의 소문에 본래 朱宣이 王을 따랐다고 하는 말은 잘못된 소문이다.[流俗本宣從王者非]”라고 하였다.
역주23 鐵券 : 임금이 공신에게 하사하던 쇠로 만든 牌로, 원래는 漢나라 高祖가 공신들을 봉하는 데에 사용한 것에서 유래되었다.
역주24 高騈 : 821~887. 唐나라 幽州 사람으로 자는 千里이다. 대대로 禁軍將領을 지냈는데, 黃巢의 난을 진압하다 揚州刺史로 좌천되었다. 道家的 방술을 사용한다는 呂用之와 張璘에게 현혹되어 가혹한 정치를 하다가 뒤에 部將 畢師鐸에게 살해되었다.
역주25 楊行密 : 852~905. 五代時代 吳나라의 太祖로 자는 花源, 본명은 行愍, 廬州 合肥 사람이다. 처음에는 도둑이었다가 州兵에 응모해 隊長으로 옮겼다. 戍자리를 나갔다가 반란을 일으켜 驪州를 거점으로 웅거하자 唐나라에서 驪州刺史로 임명하였다. 淮南節度使를 자칭하던 孫儒를 격파하자 唐 昭宗이 淮南節度使에 임명하였고, 天復 2년(902) 吳王에 봉해졌다.
역주26 (回)[而] : 저본에는 ‘回’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而’로 바로잡았다.
역주27 (五月庚子)[三月癸卯] : 저본에는 ‘五月庚子’로, ≪新五代史≫에는 ‘三月庚子’로 되어 있으나, ≪舊唐書≫와 ≪新唐書≫에 의거하여 ‘三月癸卯’로 바로잡았다.
역주28 沇河 : 濟水의 별칭이다. 河南省 濟源縣 王屋山에서 발원하여 溫縣에 이르러 黃河로 들어간다.
역주29 宿州 : 지금 安徽省 북쪽 끝에 위치하며, 江蘇省‧山東省‧河南省과 접하고, 서쪽으로는 淮北市, 남쪽으로는 蚌埠市와 접한다.
역주30 上源驛 : 汴州(현재 河南省 開封市 남쪽에 있던 驛站이다.
역주31 張濬 : 자는 禹川이고 河間 사람이다. 唐 僖宗 때 兵部郞中에 제수되었고, 諫議大夫 등 여러 요직을 두루 거쳐 尙書左僕射로 치사하였다. 후에 朱全忠의 牙將에게 피살되었다.(≪舊唐書≫ 卷179 〈張濬列傳〉)
역주32 鳳翔 : 현재의 陝西省 일대의 지역을 말한다.
역주33 李茂貞 : 856~924. 자는 正臣, 본성은 宋씨, 이름은 文通으로 深州 博野 사람이다. 黃巢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神策軍指揮使에 올랐고, 唐 僖宗을 호종한 공으로 성명을 하사받았다. 昭宗 때 조정에서 兵權을 장악하고 여러 차례 군사를 이끌고 長安에 들어와 재상 韋昭度 등을 살해하고 궁실과 시장에 불을 질렀다. 天復 元年(901 소종이 鳳翔으로 가자 朱全忠과 대립하였다가 천복 3년(903) 주전충과 화해하였다. 後梁이 건국되자 岐王이라 자칭하며 한 지역에서 할거했다. 後唐 莊宗 同光 2년(924) 표문을 올려 신하라 칭하고 秦王에 봉해졌다.
역주34 (祕)[泌] : 저본에는 ‘祕’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泌’로 바로잡았다.
역주35 太原 : 山西省의 省都로 太原은 매우 큰 평야라는 뜻이다. 春秋時代에는 晉陽이라 하였고, 戰國時代에는 趙나라의 수도였다. 秦나라 때에는 太原郡에 속했으며, 唐나라 이후 太原府에 속했다.
역주36 澤潞 : 澤州와 潞州를 가리킨다. 택주는 山西省 남동부 太行山의 남쪽 기슭에 위치한다. 鳳臺라고도 한다. 太白山脈 중에 있으며, 河南 방면으로 통하는 문호 구실을 한다. 노주는 지금의 산서성 長治縣 지역이다.
역주37 含山 : 安徽省 馬鞍山에 있는 縣의 이름이다.
역주38 三原 : 지금의 陝西省 中部의 도시로 西安市의 북쪽 약 40km 지점에 위치한다.
역주39 興平 : 지금 陝西省 咸陽에 있는 市의 이름이다.
역주40 武功 : 지금 陝西省 咸陽에 있는 縣의 이름이다.
역주41 王乃留子友倫 : 徐無黨의 註釋에 “曾三異의 校定에 말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新五代史≫ 〈梁家人傳〉에 「友倫은 왕의 형 存의 아들이다.」라고 하였고, 그 후에 中書省에서 上議할 때에도 모두 皇姪이라 하였다.’[曾三異校定曰 三異案 家人傳 友倫乃王兄存之子 其後 中書上議 亦皆謂之皇姪]”라고 하였다.
역주42 楊柳枝 : 樂府 가운데 하나인 〈楊柳曲〉의 별칭이다. 본디 漢나라 악부의 橫吹曲辭 가운데 하나인 〈折楊柳〉를 가리키는데, 唐나라에 이르러 〈양류지〉로 이름이 바뀌었으며, 開元 연간에 이르러서 敎坊樂으로 편입되었다. 내용은 고향을 떠날 때에 버들가지를 꺾어주며 이별의 정을 노래한 것이다.
역주43 遣朱友謙 殺胤于京師 : 徐無黨의 註釋에 “曾三異의 校定에 말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新五代史≫ 〈梁家人傳〉에 崔胤을 죽인 자는 朱友謀로 되어 있으니, 朱友謙이 아니다.’[曾三異校定曰 三異案 家人傳 殺崔胤者 朱友謀 非友謙]”라고 하였다.
역주44 小黃門 : 나이 어린 宦官을 말한다. 黃門은 중국 後漢 때에 禁門을 맡아보는 관리였는데, 이를 환관이 맡아보면서 환관의 칭호로 바뀌었다.
역주45 晉王李克用……楊行密 : 徐無黨의 註釋에 “曾三異의 校定에 말하였다. ‘내가 살펴보건대 ≪新五代史≫의 克用의 本紀(〈唐本紀〉) 및 〈李茂貞傳〉, 王建의 世家(〈前蜀世家〉), 楊行密의 世家(〈吳世家〉 모두 唐나라에서 제수한 관직을 기록하였지만, 趙匡凝만은 唐나라에 있을 때를 기록하지 않았으니, 이것은 곧 闕文이다.’[曾三異校定曰 三異案 克用本紀及茂貞傳建行密世家 皆書其在唐所授 獨匡凝不書其在唐 此乃闕文]”라고 하였다.
역주46 昭宗 : 867~904. 唐나라 제19대 황제로 원래 이름은 傑이었다가, 즉위 후 曄으로 개명하고, 나중에 다시 敏이라 하였다. 唐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환관 楊復恭에 의해 889년 황제로 옹립되었다. 李茂貞을 중심으로 하는 반란군이 長安을 압박하자 환관 韓全海가 진언하여 鳳翔으로 도망하였으나, 903년 이무정이 韓全海‧張彦弘 등을 죽이자 장안으로 돌아왔다. 그 뒤 이무정은 朱全忠에 의해 실각하고 주전충이 최대 藩鎭으로 세력을 확장하였다. 904년 1월 주전충은 대신들의 반대를 누르고 洛陽으로 천도하였고, 소종은 그해 8월 朱友恭‧氏叔琮‧蔣玄暉 등 주전충이 보낸 사람에 의해 시해되었다.
역주47 德王裕 : ?~905. 唐나라 제19대 황제 昭宗의 장남으로 897년 2월 황태자가 되었다. 900년 11월에 환관들에 의해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901년 1월 반대 세력의 환관들에 의해 퇴위당하고 德王으로 강격되었다. ≪舊唐書≫에 의하면 906년 2월, 아버지 소종을 시해한 朱全忠의 초청을 받고 동생들과 함께 洛陽의 궁중 연회에 참석하던 중 갑자기 나타난 자객에 의하여 교살되어 부근의 九曲池에 던져졌다고 한다.
역주48 天子 : 唐의 마지막 제20대 황제인 哀帝(892~908 가리킨다. 애제는 昭宗의 9번째 아들로 904년 13세에 朱全忠에 의해 살해된 소종을 이어 황제에 올랐으나, 곧바로 濟陰王으로 격하되었고, 907년 폐위되면서 唐나라 290년의 지배는 종식되었다. 주전충의 後梁(907~923 건국된 다음해인 908년 17세의 나이에 독살되었다.
역주49 荊南 : 지금의 福建省 중부에 있는 도시로 南平이라고도 부른다. 후에 後梁 太祖가 임명한 荊南節度使 高季興이 세운 나라이름이기도 하다. 고계흥이 荊州 일대를 점거하고, 江陵에 수도를 두었지만 5대 57년 만에 宋나라에게 멸망당하였다.
역주50 南郊 : 都城 남쪽 郊外를 가리키는 말로, 夏至에 南郊에 설치된 天壇에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다. 이 때문에 그 제사를 가리키기도 한다.
역주51 (讓)[護] : 저본에는 ‘讓’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護’로 바로잡았다.
역주52 九錫 : 천자가 큰 공로가 있는 제후에게 주던 아홉 가지 衣物을 가리킨다. 車馬‧衣服‧樂器‧朱戶‧納陛‧虎賁‧鈇鉞‧弓矢‧秬鬯이다.
역주53 牙軍 : 唐나라 代宗 때 田承嗣가 魏博節度使가 되어 만든 호위대를 말한다. 200년 후 唐나라 말기에 羅紹威가 절도사가 되었을 때에 牙軍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서 민폐를 끼치고 난을 일으켜 선임 절도사 수 명을 죽이기까지 하였는데, 나소위는 당시 가장 강대했던 朱溫에게 구원을 요청해 2년 만에 아군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였다.(≪資治通鑑≫ 昭宗 3년)
역주54 甲子 皇帝卽位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1에 “살펴보건대 前史에서도 매번 이렇게 서술하니, 대개 ≪春秋≫에 ‘公卽位’의 전례에 구애되어 失位한 군주가 다시 復位할 경우 사용하는 서법과 같음을 면치 못한다. 의당 ‘卽皇帝位’라고 서술해야 한다.[按前史亦每作此 蓋拘春秋公卽位之例 未免似復辟書法耳 宜曰卽皇帝位]”라고 하였다.
역주55 大赦 : 徐無黨의 註釋에 “赦文에 모두 ‘大赦天下’라고 말하니, 이는 그 의지가 먼곳에까지 이르게 하고자 하는 것을 크게 드러냈음을 서술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天下’라는 말을 쓰지 않은 것은 실로 미치지 못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赦文 皆曰 大赦天下 此書大見其志之欲遠及也 不曰天下 實有所不及也]”라고 하였다.
역주56 嗚呼 : ≪五代史記注≫ 卷2에 “先公(歐陽脩 ≪新五代史≫ 74권을 스스로 찬술하셨는데 褒貶과 善惡에 대해 법을 만든 것이 정밀하였다. 발론하실 때면 반드시 ‘嗚呼’라는 말을 쓰시고 ‘이는 난세의 책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선공이 논하시기를 ‘옛날에 孔子께서 ≪春秋≫를 지어 난세를 통해 治法을 세우셨고 나는 本紀를 서술하여 치법으로 亂君을 바로잡았다.’라고 하셨으니 이것이 선공의 뜻이다. 책이 완성되자 분량은 ≪舊五代史≫의 반으로 줄었지만 事迹은 몇 배나 첨가되었고 글은 생략되었지만 일은 구비되었는데 특히 힘쓰신 부분은 前史 중에 잘못된 부분이 매우 많은 것을 바로잡는 것이었다. 嘉祐 중에 지금은 致仕하신 侍郞 范公(范仲淹) 등이 조정에 아뢰어 이 책을 가져다 正史로 갖출 것을 청하였는데, 공은 완성되지 않았다는 이유로 사양하였다. 熙寧 연간에 聖旨가 있어 이 책을 進御하였다.[先公自撰五代史七十四卷 褒貶善惡 爲法精密 發論必以嗚呼 曰此亂世之書也 其論曰昔孔子作春秋 因亂世而立治法 余述本紀 以治法而正亂君 此其志也 書成減舊史之半 而事迹添數倍 文省而事備 其所辨 正前史之失甚多 嘉祐中今致政侍郞范公等 列言于朝 請取以備正史 公辭以未成 熙寧中有旨 取以進御]”라고 하였다.
역주57 魯桓公 弑隱公 : 隱公은 春秋時代 魯나라 임금으로 惠公의 長庶子이다. 이름은 息姑, 시호는 隱이다. 혜공이 죽자 태자 軌(桓公 어리므로 攝政에 추대되어 11년간 정권을 행사하였는데, 후에 공자 翬의 참소로 시해되었다.(≪史記≫ 卷33)
역주58 宣公 弑子赤 : 宣公은 春秋時代 魯나라의 군주로 이름은 俀 또는 倭이고 文公의 庶子다. 문공이 죽자 襄仲이 문공의 적자인 赤과 視를 죽이고 즉위하였다. 이때부터 魯나라 公室은 점점 비천해지고 三桓이 강해졌다. 18년 동안 재위했다.
역주59 鄭厲公 逐世子忽 : 忽은 鄭 莊公의 태자로 모친은 鄧曼이다. 장공이 죽자 蔡仲의 추대를 받아 임금이 되니, 바로 昭公이다. 厲公은 이름이 突로 忽의 아우이며 모친은 雍佶로 소공의 자리를 뺏고 즉위하였다. 소공은 衛나라로 망명했다가 채중의 도움으로 귀국한 뒤에 사냥터에서 高渠彌에게 사살되었고, 여공은 채중을 죽이려다 실패한 뒤에 櫟邑으로 피신해서 17년 동안 있다가 도성으로 돌아와 복위하였다.(≪史記≫ 卷42 〈鄭世家〉)
역주60 衛公孫剽 逐其君衎(간) : 魯 襄公 14년에 孫林父와 甯殖이 난을 일으켜 衛 獻公(衎 몰아내려 하자 헌공은 齊나라로 달아났다. 그 후 公孫剽가 衛나라 군주가 되고 손임보와 영식이 재상이 되었다.(≪春秋左氏傳≫ 襄公 14년, 26년)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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