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唐臣傳
01.
德威는 善戰將하고 而歐陽公은 善序事하니 可謂兩絶이라
周德威는 字鎭遠이니 朔州馬邑人也라 爲人勇而多智하야 能望塵以知敵數라 其狀貌雄偉하고 笑不改容하니 人見之에 凜如也러라
事晉王爲騎將
이러니 稍遷鐵林軍使
하야 從破
하고 以功遷內衙指揮使
하다
其小字는 陽五니 當梁晉之際하야 周陽五之勇聞天下하다
有驍將陳章者가 號陳野叉어늘 常乘白馬被朱甲以自異하고 出入陣中에 求周陽五하야 欲必生致之라
晉王戒德威曰 陳野叉欲得汝以求刺史하니 見白馬朱甲者어든 宜善備之라하니
德威笑曰 陳章好大言耳니 安知刺史非臣作邪리잇고하고 因戒其部兵曰 見白馬朱甲者어든 當佯走以避之니라
兩軍皆陣에 德威微服雜卒伍中이라 陳章出挑戰하야 兵始交한대 德威部下見白馬朱甲者하고 因退走하니 章果奮矟急追之라
德威伺章已過라가 揮鐵鎚擊之하니 中章墮馬라 遂生擒之하다
梁攻燕에 晉遣德威將五萬人하야 爲燕攻梁하야 取潞州하니 遷代州刺史內外蕃漢馬步軍都指揮使하다
梁軍捨燕攻潞
하야 圍以夾城
하니 潞州守將
가 閉城距守
한대 而德威與梁軍相持於外踰年
이라
嗣昭與德威로 素有隙이러니 晉王病且革에 語莊宗曰 梁軍圍潞어늘 而德威與嗣昭有隙하니 吾甚憂之라하다
王喪在殯에 莊宗新立하야 殺其叔父克寧하야 國中未定이어늘 而晉之重兵이 悉屬德威于外하니 晉人皆恐이라
莊宗使人以喪及克寧之難으로 告德威하고 且召其軍이라
德威聞命하고 卽日還軍太原하야 留其兵城外하고 徒步而入하야 伏梓宮前慟哭幾絶하니 晉人乃安이라
遂從莊宗復擊梁軍하야 破夾城하고 與李嗣昭로 歡如初하다 以破夾城功으로 拜振武節度使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七年秋
에 梁遣王景仁將魏滑汴宋等兵七萬人擊趙
하다 趙王王鎔
이 乞師于晉
한대 晉遣德威先屯趙州
하다
冬에 梁軍至于柏鄕한대 趙人告急하니 莊宗自將出贊皇하야 會德威于石橋하고 進距柏鄕五里하야 營于野河北하다
晉兵少
어늘 而景仁所將神威龍驤拱宸等軍
은 皆梁精兵
이라 人馬
을 飾以組綉金銀
하야 其光耀日
하니 晉軍望之色動
이라
德威勉其衆曰 此汴宋傭販兒徒
가 飾其外耳
니 其中不足懼也
라 가 數十千
이니 得之
면 適足爲吾資
라
莊宗曰 吾提孤軍出千里하니 其利速戰이라 今不乘勢急擊之하야 使敵知吾之衆寡면 則吾無所施矣라한대
德威曰 不然하니이다 趙人은 能城守而不能野戰하니 吾之取勝은 利在騎兵이라
平川廣野는 騎兵之所長也어늘 今吾軍于河上하야 迫賊營門하니 非吾用長之地也라하다 莊宗不悅하야 退臥帳中하니 諸將無敢入見이라
德威謂監軍
曰 王怒老兵
이나 不速戰者
는 非怯也
라 且吾兵少而臨賊營門
하니 所恃者一水隔耳
라
使梁得舟栰渡河면 吾無類矣라 不如退軍鄗邑하야 誘敵出營하야 擾而勞之면 可以策勝也라하다
承業入言曰 德威는 老將知兵하니 願無忽其言이라한대 莊宗遽起曰 吾方思之耳로라
已而오 德威獲梁游兵하야 問景仁何爲오하니 曰 治舟數百하야 將以爲浮梁이라하다
德威引與俱見한대 莊宗笑曰 果如公所料라하고 乃退軍鄗邑하다
德威晨遣三百騎하야 叩梁營挑戰하고 自以勁兵三千繼之하다
景仁怒하야 悉其軍以出하야 與德威轉鬪數十里하야 至于鄗南하다
兩軍皆陣하니 梁軍橫亙六七里에 汴宋之軍居西하고 魏滑之軍居東이라
莊宗策馬登高하야 望而喜曰 平原淺草는 可前可却이니 眞吾之勝地也라하고 乃使人告德威曰 吾當爲公先이니 公可繼進이라하니
德威持馬諫曰 梁軍輕出而遠來하야 與吾轉戰하니 其來에 必不暇齎糧糗어니와 縱其能齎라도 亦不暇食이니이다
不及日午하야 人馬俱饑리니 因其將退而擊之면 勝이라하다 諸將亦皆以爲然하다
至未申時하야 梁軍東偏塵起하니 德威皷譟而進하야 麾其西偏曰 魏滑軍走矣라하고 又麾其東偏曰 梁軍走矣라하다
自鄗追至柏鄕
히 橫尸數十里
요 景仁以十餘騎
로 僅而免
하다 러라
劉守光僭號於燕
한대 晉遣德威將兵三萬
하야 出
以擊之
하다
德威入
하야 取涿州
하고 遂圍守光于幽州
하야 破其外城
한대
守光閉門距守하니 而晉軍盡下燕諸州縣이요 獨幽州不下러니 圍之踰年에야 乃破之하다 以功拜盧龍軍節度使하다
德威雖爲大將이나 而常身與士卒馳騁於矢石之間하다 守光驍將單廷珪望見德威於陣曰 此는 周陽五也라하고 乃挺槍馳騎追之하다
德威佯走
라가 度廷珪垂及
하고 側身少却
한대 廷珪馬方馳
하야 不可止
라 縱其少過
하야 奮
擊之
하니 廷珪墜馬
하야 遂見擒
하니라
莊宗與劉鄩相持于魏
러니 鄩夜潛軍出
하야 以襲太原
하니 德威自幽州以千騎入土門以躡之
라
鄩至樂平
하야 遇雨不得進而還
하다 德威與鄩俱東
하야 爭趨
이라
臨淸은 有積粟이요 且晉軍餉道也라 德威先馳據之하니 以故로 莊宗卒能困鄩軍而敗之하니라
莊宗은 勇而好戰하고 尤銳於見敵이로되 德威는 老將으로 常務持重以挫人之鋒이라 故其用兵은 常伺敵之隙以取勝이라
에 德威將燕兵三萬人
하야 與鎭定等軍
으로 從莊宗于河上
하야 自麻家渡進軍臨濮以趨汴州
라
軍宿胡柳陂러니 黎明에 候騎報曰 梁軍至矣라하니 莊宗問戰於德威한대
德威對曰 此去汴州에 信宿而近이요 梁軍父母妻子가 皆在其中하니 而梁人家國이 繫此一擧라
吾以深入之兵으로 當其必死之戰하니 可以計勝이요 而難與力爭也니이다
且吾軍先至此하야 糧爨具而營柵完이니 是謂以逸待勞之師也라
王宜按軍無動이어시든 而臣請以騎軍擾之하야 使其營柵不得成하고 樵爨不暇給하리니 因其勞乏而乘之면 可以勝也라하다
莊宗曰 吾軍河上하야 終日俟敵이러니 今見敵不擊이면 復何爲乎아하고
顧李存審曰 公以輜重先하라 吾爲公殿이라하고 遽督軍而出하다 德威謂其子曰 吾不知死所矣라하다
前遇梁軍而陣하니 王軍居中하고 鎭定之軍居左하며 德威之軍居右하고 而輜重次右之西라
兵已接에 莊宗率銀槍軍하야 馳入梁陣하니 梁軍小敗라가 犯晉輜重이라
輜重見梁朱旗하고 皆驚走入德威軍일새 德威軍亂이어늘 梁軍乘之하니 德威父子皆戰死하다
莊宗與諸將相持而哭曰 吾不聽老將之言而使其父子至此라하다
晉之輜重이 見梁兵之敗而入也라가 而卽望見梁朱旗而走하야 遂及於敗하니
此事
는 與
同
이라 故曰 兵貴嚴重
이라야 始不可敗
라하니라
周德威는 전쟁에서 군사를 거느리기를 잘하였고 歐陽公은 일을 서술하기를 잘하였으니 둘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하다.
周德威는 字가 鎭遠이니 朔州 馬邑 사람이다. 사람됨이 용맹하고 智謀가 많아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적군의 숫자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용모가 헌걸차고 웃을 때에 낯빛을 바꾸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보면 엄숙해졌다.
晉王(李克用)을 섬겨 騎將이 되었는데 점차 승진하여 鐵林軍使가 되어서 진왕을 수행하여 王行瑜를 격파하고 그 戰功으로 內衙指揮使로 승진하였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陽五니, 梁나라와 晉나라가 대치하던 국면에서 周陽五의 용맹은 천하에 이름났다.
梁나라 군대가 晉의 太原을 포위하였을 때 軍中에 명령을 내리기를 “周陽五를 생포해 오는 자는 刺史로 삼겠다.”라고 하였다.
용맹한 장수 陳章이라는 자가 陳野叉라고 불렸는데 항상 白馬를 타고 붉은 갑옷을 입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고, 戰場을 출입할 때 주양오를 찾아다니며 반드시 그를 생포하려 하였다.
晉王이 周德威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진야차가 그대를 잡아 자사 자리를 얻으려고 하니 백마를 타고 붉은 갑옷을 입은 자를 보거든 잘 대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주덕위가 웃으며 말하기를 “진장은 큰소리치기 좋아할 뿐이니 어찌 자사가 신이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이어 자신의 수하 부대원들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백마를 타고 붉은 갑옷을 입은 자를 보거든 달아나는 체하면서 피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 군대가 마주하여 陣을 쳤을 때 주덕위가 일반 병사의 옷을 입고 대오 속에 섞여 있었다. 진장이 나와 도전하여 두 군대가 비로소 交戰하였는데, 주덕위의 부하가 백마를 타고 붉은 갑옷을 입은 자를 보고는 이어 물러나 달아나니 진장이 과연 창을 휘두르며 급히 추격해왔다.
주덕위가 진장이 지나가는 것을 엿보고 있다가 鐵鎚를 휘둘러 치니 진장이 철추를 맞고 말에서 떨어진지라 마침내 그를 생포하였다.
梁나라가 燕나라를 공격할 때 晉나라가 周德威를 보내 5만 명을 거느리고서 燕나라를 위해 梁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潞州를 취하니 주덕위를 代州刺史 內外蕃漢馬步軍都指揮使에 승진시켰다.
梁나라 군대가 燕나라를 놔두고 노주를 공격하여 夾城으로 포위하니 노주의 守將 李嗣昭가 성문을 닫아걸고 저항하며 지키자, 주덕위는 梁나라 군대와 성 밖에서 해를 넘기도록 대치하고 있었다.
이사소는 주덕위와 평소 틈이 있었는데, 晉王은 병이 위급해지자 莊宗에게 말하기를 “梁나라 군대가 노주를 포위하고 있는데 주덕위와 이사소가 사이가 좋지 못하니 내가 이를 몹시 걱정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진왕의 靈柩가 殯所에 있을 때 장종이 새로 즉위하여 자신의 숙부 李克寧을 죽여 국내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晉나라의 重兵이 모두 밖에 있는 주덕위에게 소속되어 있으니 晉나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장종이 사신을 보내 國喪 및 이극녕의 난을 주덕위에게 알려주고 그 군대를 소환하였다.
주덕위가 명령을 듣고 당일 바로 太原으로 군대를 돌려 성 밖에 군대를 머물게 하고 도보로 들어가서 진왕의 영구 앞에 엎드려 통곡하다가 거의 기절할 듯하니 晉나라 사람들이 그제야 안심하였다.
마침내 주덕위가 장종을 수행하여 梁나라 군대를 다시 공격하여 夾城을 격파하고 이사소와 처음처럼 화해하였다. 〈주덕위는〉 협성을 격파한 戰功으로 振武節度使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었다.
天祐 7년(910) 가을에 梁나라가 王景仁을 보내 魏州‧滑州‧汴州‧宋州 등의 군대 7만 명을 거느리고서 趙州를 치게 하였다. 趙王 王鎔이 晉나라에 援兵을 청하자 晉나라가 周德威를 보내 먼저 조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해 겨울에 梁나라 군대가 柏鄕에 이르자 조주 사람이 晉나라에 급변을 알리니, 莊宗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贊皇을 나와 石橋에서 주덕위와 만나고 백향에서 5里 되는 곳까지 전진하여 野河의 북쪽에 주둔하였다.
晉나라 군대는 적었는데 왕경인이 거느린 神威軍‧龍驤軍‧拱宸軍 등은 모두 梁나라의 정예병인지라, 人馬와 鎧甲을 비단과 金銀으로 장식하여 그 광채가 햇살에 번쩍이니 晉나라 군대가 이를 바라보고 안색이 변하였다.
주덕위가 자신의 군대를 鼓舞하기를 “이는 변주‧송주의 고용된 장사치들이 그 외면을 치장한 데 불과하니 그 속은 족히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이들이 입은 갑옷 하나 값이 수만 금이니 이를 잡으면 우리의 物資로 삼기에 알맞을 것이다.
한갓 바라보면서 부러워하지만 말고 힘써서 가서 빼앗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물러나 장종에게 아뢰기를 “梁나라 군대가 매우 정예로우니 아직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의당 조금 물러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말하기를 “내가 외로운 군대를 거느리고 천 리 밖으로 나왔으니 速戰速決하는 것이 이롭다. 지금 勝勢를 타고 맹렬하게 공격하지 않고서 적들이 우리 군대의 수효를 알아채도록 한다면 우리는 손쓸 수가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자,
주덕위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조주 사람은 성은 잘 지키지만 들에서는 잘 싸우지 못하니 우리가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방법은 그 이로움이 騎兵에 있습니다.
平原과 廣野는 기병이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인데 지금 우리가 강가에 주둔하여 적군의 營門 가까이 있으니 우리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이 계책을 불쾌하게 여겨 軍幕에 물러나 누우니 장수들 가운데 감히 들어가 알현하는 이가 없었다.
주덕위가 監軍 張承業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군대를 오래 머물러 지치게 하는 데 화내고 계시지만 속전속결하지 않는 것은 겁을 먹어서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 군대는 적은 데다 적군의 영문 가까이 있으니 믿고 있는 것은 강 하나가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만약 梁나라가 배를 얻어 강을 건너게 된다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일 것이다. 鄗邑으로 군대를 물려 적군이 군영을 나오도록 유인해내어 적을 攪亂하여 지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만 한다면 계책을 써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승업이 들어가 아뢰기를 “주덕위는 노련한 장군으로 兵法을 아니 그의 말을 소홀하게 여기지 마소서.”라고 하자, 장종이 갑자기 일어나 말하기를 “내가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주덕위가 梁나라의 遊擊兵을 잡아 왕경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배 수백 척을 만들어 浮橋로 삼으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주덕위가 유격병을 이끌고 함께 장종을 알현하자, 장종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과연 공이 짐작한 대로다.”라고 하고, 그제야 호읍으로 군대를 물렸다.
周德威가 새벽에 3백의 騎兵을 보내 梁나라의 軍營을 자극하여 挑戰하고 직접 정예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王景仁이 노하여 자신의 全軍을 거느리고 출격하여 주덕위와 수십 리에 걸쳐 자리를 옮겨가며 여러 곳에서 싸워 鄗邑 남쪽에 이르렀다.
두 군대가 모두 전투 대형을 갖추니 梁나라 군대가 6~7리에 걸쳐 늘어서 있는데, 汴州와 宋州의 군대는 서쪽에 자리를 잡고 魏州와 滑州의 군대는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莊宗이 말을 채찍질하여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며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平原의 작은 풀들에서는 전진할 수도 있고 물러날 수도 있으니 참으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고, 이어 사람을 보내 주덕위에게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앞에 설 것이니 공은 나를 따라 전진하라.”라고 하니,
주덕위가 말을 붙잡고 간하기를 “梁나라 군대가 〈준비 없이〉 가볍게 출정하여 멀리서 와서 우리와 자리를 옮겨가며 여러 곳에서 싸웠으니, 그들이 올 때에 반드시 軍糧을 가져올 겨를이 없었을 것이거니와 설령 그들이 군량이 가져올 수 있었더라도 먹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오가 되기 전에 병사와 말이 모두 굶주릴 것이니 그들이 물러나려고 할 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수들도 모두 주덕위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未時(오후 1시~3시)와 申時(오후 3시~5시)쯤이 되어 梁나라 진영의 동쪽에서 먼지가 일어나니, 주덕위가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전진하여 자신의 서쪽 편대를 지휘하며 말하기를 “위주와 활주의 군대가 달아난다.”라고 하고, 또 자신의 동쪽 편대를 지휘하며 말하기를 “梁나라 군대가 달아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梁나라 진영이 소란스러워져서 전열을 다시 정비하지 못하고 이어 모두 달아난지라 마침내 크게 패하였다.
주덕위가 鄗邑에서 추격하여 柏鄕에 이르기까지 수십 리에 걸쳐 주검이 널브러졌고, 왕경인은 10여 기병을 데리고 겨우 벗어났다. 梁나라가 晉나라와 전쟁을 시작한 이래로 모두 수십 번을 싸웠으나 이처럼 크게 패한 적은 없었다.
劉守光이 燕나라에서 황제를 참칭하자 晉나라가 周德威를 보내 군대 3만을 거느리고 飛狐를 나가 공격하게 하였다.
주덕위가 祁溝關에 들어가 涿州를 취하고 마침내 幽州에서 유수광을 포위하여 유주 外城을 격파하자,
유수광이 성문을 닫고 버티며 지키니 晉나라 군대가 燕나라 州縣들을 모두 함락하고 유주만 함락하지 못하였는데, 포위한 지 한 해를 넘겨서야 비로소 격파하였다. 주덕위는 이 戰功으로 盧龍軍節度使에 배수되었다.
주덕위는 비록 大將이 되었으나 늘 몸소 병사들과 함께 화살과 돌이 난무하는 사이를 내달렸다. 유수광의 猛將 單廷珪가 軍陣에서 주덕위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周陽五이다.”라고 하고는, 창을 뽑아 들고 말을 내달려 그를 추격하였다.
주덕위가 달아나는 체하다가 단정규가 거의 쫓아왔음을 헤아리고 몸을 돌려 살짝 물러나자, 단정규는 말이 막 내달리고 있어서 멈출 수가 없는지라 단정규가 조금 지나쳐 가게 두고서 몽둥이로 그를 때리니 단정규가 말에서 떨어져 마침내 생포되었다.
莊宗이 劉鄩과 魏州에서 대치하였는데 유심이 한밤에 몰래 군대를 보내 黃澤關을 나가 太原을 습격하니, 周德威가 幽州로부터 騎兵 천 명을 거느리고서 土門으로 들어가 追擊하였다.
유심은 樂平에 이르러 비를 만나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주덕위와 유심 둘 다 동쪽으로 전진하여 臨淸에 먼저 가려고 하였다.
임청에는 비축한 식량이 있는 데다, 晉나라 군대의 군량을 운반하는 길목이었다. 주덕위가 먼저 내달려 임청을 점거하니 이로 인해 장종이 마침내 유심의 군대를 곤경에 몰아넣어 물리칠 수 있었다.
莊宗은 용맹하고 전쟁을 좋아하는 데다 적군을 맞닥뜨리면 더욱 鬪志가 올랐으나, 周德威는 老將으로 늘 신중함을 유지하면서 적군의 銳氣를 꺾으려고 힘썼다. 그래서 주덕위의 用兵術은 늘 적군의 틈을 엿보아 승리를 얻어냈다.
天祐 15년(918)에 주덕위가 燕의 군대 3만 명을 거느리고서 鎭州와 定州 등지의 군대와 함께 장종을 따라 黃河 가에 이르러 麻家渡에서 臨濮으로 進軍하여 汴州에 갔다.
군대가 胡柳陂에 머물렀는데 동이 틀 무렵 정찰하던 騎兵이 보고하기를 “梁나라 군대가 왔습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주덕위에게 戰術을 묻자
주덕위가 대답하기를 “여기서 변주까지는 이틀을 가면 도달할 만큼 가깝고 梁나라 군사들의 父母와 妻子들이 모두 그곳에 있으니 梁나라의 命運이 이 한 번의 전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적진에 깊숙이 쳐들어온 병사들을 데리고서 저들의 죽기를 각오한 전투를 맞닥뜨렸으니 計略으로 이겨야지 힘으로 저들과 싸워서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우리 군대가 먼저 이곳에 도착하여 炊事 준비가 되어 있고 營柵이 완비되어 있으니 이를 일러 편안한 상황에서 고생하는 상대를 맞이하는 군대라고 하겠습니다.
왕은 군대를 안무하여 움직이지 않고 계시면 신이 기병을 데리고 저들을 동요시켜 저들이 영책을 완성하지 못하게 하고 취사할 겨를이 없게 할 것이니 저들의 지치고 부족한 상황을 이용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말하기를 “우리가 황하 가에 주둔하여 종일토록 적군을 기다렸는데 지금 적군을 보고도 공격하지 않는다면 다시 무슨 일을 하고 있으란 말인가?”라고 하고,
李存審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공은 輜重(軍需品)을 이끌고 먼저 가라. 나는 공을 위하여 후미를 맡아 가겠다.”라고 하고, 곧장 군대를 독촉하며 출발하였다. 그러자 주덕위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디에서 죽을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전면에서 梁나라 군대를 맞닥뜨려 진을 치니 왕의 군대는 중앙에 자리하고 진주‧정주의 군대는 왼쪽에 자리하며 주덕위의 군대는 오른쪽에 자리하고 치중 부대는 오른쪽 주덕위 군대의 서쪽에 자리하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장종이 銀槍軍을 거느리고서 梁나라 진영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니 梁나라 군대가 조금 패하였다가 晉나라의 치중 부대를 공격하였다.
치중 부대가 梁나라의 붉은 깃발을 보고 모두 놀라 주덕위의 군대로 달려 들어가므로 주덕위의 군대가 혼란해졌는데 梁나라 군대가 이 틈을 타고 공격하니 주덕위 父子가 모두 전사하였다.
장종이 장수들과 서로 붙들고 통곡하기를 “내가 老將의 말을 듣지 않아 이들 부자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즉위하자 주덕위를 太師에 追贈하고, 明宗 때에는 주덕위를 太尉에 加贈하고 장종의 사당에 配享하고, 晉 高祖는 주덕위를 燕王에 追封하였다. 아들 周光輔는 관직이 刺史에 이르렀다.
晉나라의 輜重 부대가 梁나라 군대가 패하는 것을 보고 들어갔다가 梁나라의 붉은 깃발을 보자마자 달아나서 마침내 패배하게 되었으니,
이 일은 韓信이 趙나라 깃발을 뽑고 漢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운 일과 같다. 그래서 “군대는 嚴重한 〈군율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니 그래야 패배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