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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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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唐臣傳
01.
德威 善戰將하고 而歐陽公 善序事하니 可謂兩絶이라
周德威 字鎭遠이니 朔州馬邑人也 爲人勇而多智하야 能望塵以知敵數 其狀貌雄偉하고 笑不改容하니 人見之 凜如也러라
事晉王爲騎將이러니 稍遷鐵林軍使하야 從破하고 以功遷內衙指揮使하다
其小字 陽五 當梁晉之際하야 周陽五之勇聞天下하다
令軍中曰 能生得周陽五者 爲刺史라하다
有驍將陳章者 號陳野叉어늘 常乘白馬被朱甲以自異하고 出入陣中 求周陽五하야 欲必生致之
晉王戒德威曰 陳野叉欲得汝以求刺史하니 見白馬朱甲者어든 宜善備之라하니
德威笑曰 陳章好大言耳 安知刺史非臣作邪리잇고하고 因戒其部兵曰 見白馬朱甲者어든 當佯走以避之니라
兩軍皆陣 德威微服雜卒伍中이라 陳章出挑戰하야 兵始交한대 德威部下見白馬朱甲者하고 因退走하니 章果奮矟急追之
德威伺章已過라가 揮鐵鎚擊之하니 中章墮馬 遂生擒之하다
梁攻燕 晉遣德威將五萬人하야 爲燕攻梁하야 取潞州하니 遷代州刺史內外蕃漢馬步軍都指揮使하다
梁軍捨燕攻潞하야 圍以夾城하니 潞州守將 閉城距守한대 而德威與梁軍相持於外踰年이라
嗣昭與德威 素有隙이러니 晉王病且革 語莊宗曰 梁軍圍潞어늘 而德威與嗣昭有隙하니 吾甚憂之라하다
王喪在殯 莊宗新立하야 殺其叔父克寧하야 國中未定이어늘 而晉之重兵 悉屬德威于外하니 晉人皆恐이라
莊宗使人以喪及克寧之難으로 告德威하고 且召其軍이라
德威聞命하고 卽日還軍太原하야 留其兵城外하고 徒步而入하야 伏梓宮前慟哭幾絶하니 晉人乃安이라
遂從莊宗復擊梁軍하야 破夾城하고 與李嗣昭 歡如初하다 以破夾城功으로 拜振武節度使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七年秋 梁遣王景仁將魏滑汴宋等兵七萬人擊趙하다 趙王王鎔 乞師于晉한대 晉遣德威先屯趙州하다
梁軍至于柏鄕한대 趙人告急하니 莊宗自將出贊皇하야 會德威于石橋하고 進距柏鄕五里하야 營于野河北하다
晉兵少어늘 而景仁所將神威龍驤拱宸等軍 皆梁精兵이라 人馬 飾以組綉金銀하야 其光耀日하니 晉軍望之色動이라
德威勉其衆曰 此汴宋傭販兒徒 飾其外耳 其中不足懼也 數十千이니 得之 適足爲吾資
無徒望而愛之 當勉以往取之라하고 라하다
莊宗曰 吾提孤軍出千里하니 其利速戰이라 今不乘勢急擊之하야 使敵知吾之衆寡 則吾無所施矣라한대
德威曰 不然하니이다 趙人 能城守而不能野戰하니 吾之取勝 利在騎兵이라
平川廣野 騎兵之所長也어늘 今吾軍于河上하야 迫賊營門하니 非吾用長之地也라하다 莊宗不悅하야 退臥帳中하니 諸將無敢入見이라
德威謂監軍曰 王怒老兵이나 不速戰者 非怯也 且吾兵少而臨賊營門하니 所恃者一水隔耳
使梁得舟栰渡河 吾無類矣 不如退軍鄗邑하야 誘敵出營하야 擾而勞之 可以策勝也라하다
承業入言曰 德威 老將知兵하니 願無忽其言이라한대 莊宗遽起曰 吾方思之耳로라
已而 德威獲梁游兵하야 問景仁何爲오하니 曰 治舟數百하야 將以爲浮梁이라하다
德威引與俱見한대 莊宗笑曰 果如公所料라하고 乃退軍鄗邑하다
德威晨遣三百騎하야 叩梁營挑戰하고 自以勁兵三千繼之하다
景仁怒하야 悉其軍以出하야 與德威轉鬪數十里하야 至于鄗南하다
兩軍皆陣하니 梁軍橫亙六七里 汴宋之軍居西하고 魏滑之軍居東이라
莊宗策馬登高하야 望而喜曰 平原淺草 可前可却이니 眞吾之勝地也라하고 乃使人告德威曰 吾當爲公先이니 公可繼進이라하니
德威持馬諫曰 梁軍輕出而遠來하야 與吾轉戰하니 其來 必不暇齎糧糗어니와 縱其能齎라도 亦不暇食이니이다
不及日午하야 人馬俱饑리니 因其將退而擊之이라하다 諸將亦皆以爲然하다
至未申時하야 梁軍東偏塵起하니 德威皷譟而進하야 麾其西偏曰 魏滑軍走矣라하고 又麾其東偏曰 梁軍走矣라하다
梁陣動하야 不可復整하고 乃皆走 遂大敗하다
自鄗追至柏鄕 橫尸數十里 景仁以十餘騎 僅而免하다 러라
劉守光僭號於燕한대 晉遣德威將兵三萬하야以擊之하다
德威入하야 取涿州하고 遂圍守光于幽州하야 破其外城한대
守光閉門距守하니 而晉軍盡下燕諸州縣이요 獨幽州不下러니 圍之踰年에야 乃破之하다 以功拜盧龍軍節度使하다
德威雖爲大將이나 而常身與士卒馳騁於矢石之間하다 守光驍將單廷珪望見德威於陣曰 此 周陽五也라하고 乃挺槍馳騎追之하다
德威佯走라가 度廷珪垂及하고 側身少却한대 廷珪馬方馳하야 不可止 縱其少過하야擊之하니 廷珪墜馬하야 遂見擒하니라
莊宗與劉鄩相持于魏러니 鄩夜潛軍出하야 以襲太原하니 德威自幽州以千騎入土門以躡之
鄩至樂平하야 遇雨不得進而還하다 德威與鄩俱東하야 爭趨이라
臨淸 有積粟이요 且晉軍餉道也 德威先馳據之하니 以故 莊宗卒能困鄩軍而敗之하니라
莊宗 勇而好戰하고 尤銳於見敵이로되 德威 老將으로 常務持重以挫人之鋒이라 故其用兵 常伺敵之隙以取勝이라
德威將燕兵三萬人하야 與鎭定等軍으로 從莊宗于河上하야 自麻家渡進軍臨濮以趨汴州
軍宿胡柳陂러니 黎明 候騎報曰 梁軍至矣라하니 莊宗問戰於德威한대
德威對曰 此去汴州 信宿而近이요 梁軍父母妻子 皆在其中하니 而梁人家國 繫此一擧
吾以深入之兵으로 當其必死之戰하니 可以計勝이요 而難與力爭也니이다
且吾軍先至此하야 糧爨具而營柵完이니 是謂以逸待勞之師也
王宜按軍無動이어시든 而臣請以騎軍擾之하야 使其營柵不得成하고 樵爨不暇給하리니 因其勞乏而乘之 可以勝也라하다
莊宗曰 吾軍河上하야 終日俟敵이러니 今見敵不擊이면 復何爲乎아하고
顧李存審曰 公以輜重先하라 吾爲公殿이라하고 遽督軍而出하다 德威謂其子曰 吾不知死所矣라하다
前遇梁軍而陣하니 王軍居中하고 鎭定之軍居左하며 德威之軍居右하고 而輜重次右之西
兵已接 莊宗率銀槍軍하야 馳入梁陣하니 梁軍小敗라가 犯晉輜重이라
輜重見梁朱旗하고 皆驚走入德威軍일새 德威軍亂이어늘 梁軍乘之하니 德威父子皆戰死하다
莊宗與諸將相持而哭曰 吾不聽老將之言而使其父子至此라하다
晉之輜重 見梁兵之敗而入也라가 而卽望見梁朱旗而走하야 遂及於敗하니
此事이라 故曰 兵貴嚴重이라야 始不可敗라하니라


01. 周德威傳記
周德威는 전쟁에서 군사를 거느리기를 잘하였고 歐陽公은 일을 서술하기를 잘하였으니 둘 다 빼어나다고 할 만하다.
周德威鎭遠이니 朔州 馬邑 사람이다. 사람됨이 용맹하고 智謀가 많아 흙먼지가 일어나는 것을 멀리서 바라보고 적군의 숫자를 알아낼 수 있었다. 그의 용모가 헌걸차고 웃을 때에 낯빛을 바꾸지 않으니 사람들이 그를 보면 엄숙해졌다.
晉王(李克用)을 섬겨 騎將이 되었는데 점차 승진하여 鐵林軍使가 되어서 진왕을 수행하여 王行瑜를 격파하고 그 戰功으로 內衙指揮使로 승진하였다.
그의 어릴 적 이름은 陽五니, 나라와 나라가 대치하던 국면에서 周陽五의 용맹은 천하에 이름났다.
나라 군대가 太原을 포위하였을 때 軍中에 명령을 내리기를 “周陽五를 생포해 오는 자는 刺史로 삼겠다.”라고 하였다.
용맹한 장수 陳章이라는 자가 陳野叉라고 불렸는데 항상 白馬를 타고 붉은 갑옷을 입어 다른 사람과 자신을 구별하고, 戰場을 출입할 때 주양오를 찾아다니며 반드시 그를 생포하려 하였다.
晉王周德威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진야차가 그대를 잡아 자사 자리를 얻으려고 하니 백마를 타고 붉은 갑옷을 입은 자를 보거든 잘 대비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니,
주덕위가 웃으며 말하기를 “진장은 큰소리치기 좋아할 뿐이니 어찌 자사가 신이 만들어줄 수 있는 것이 아님을 알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이어 자신의 수하 부대원들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백마를 타고 붉은 갑옷을 입은 자를 보거든 달아나는 체하면서 피해야 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두 군대가 마주하여 을 쳤을 때 주덕위가 일반 병사의 옷을 입고 대오 속에 섞여 있었다. 진장이 나와 도전하여 두 군대가 비로소 交戰하였는데, 주덕위의 부하가 백마를 타고 붉은 갑옷을 입은 자를 보고는 이어 물러나 달아나니 진장이 과연 창을 휘두르며 급히 추격해왔다.
주덕위가 진장이 지나가는 것을 엿보고 있다가 鐵鎚를 휘둘러 치니 진장이 철추를 맞고 말에서 떨어진지라 마침내 그를 생포하였다.
나라가 나라를 공격할 때 나라가 周德威를 보내 5만 명을 거느리고서 나라를 위해 나라를 공격하게 하여 潞州를 취하니 주덕위를 代州刺史 內外蕃漢馬步軍都指揮使에 승진시켰다.
나라 군대가 나라를 놔두고 노주를 공격하여 夾城으로 포위하니 노주의 守將 李嗣昭가 성문을 닫아걸고 저항하며 지키자, 주덕위는 나라 군대와 성 밖에서 해를 넘기도록 대치하고 있었다.
이사소는 주덕위와 평소 틈이 있었는데, 晉王은 병이 위급해지자 莊宗에게 말하기를 “나라 군대가 노주를 포위하고 있는데 주덕위와 이사소가 사이가 좋지 못하니 내가 이를 몹시 걱정하고 있다.”라고 하였다.
진왕의 靈柩殯所에 있을 때 장종이 새로 즉위하여 자신의 숙부 李克寧을 죽여 국내가 아직 안정되지 않았는데, 나라의 重兵이 모두 밖에 있는 주덕위에게 소속되어 있으니 나라 사람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장종이 사신을 보내 國喪 및 이극녕의 난을 주덕위에게 알려주고 그 군대를 소환하였다.
주덕위가 명령을 듣고 당일 바로 太原으로 군대를 돌려 성 밖에 군대를 머물게 하고 도보로 들어가서 진왕의 영구 앞에 엎드려 통곡하다가 거의 기절할 듯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제야 안심하였다.
마침내 주덕위가 장종을 수행하여 나라 군대를 다시 공격하여 夾城을 격파하고 이사소와 처음처럼 화해하였다. 〈주덕위는〉 협성을 격파한 戰功으로 振武節度使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제수되었다.
天祐 7년(910) 가을에 나라가 王景仁을 보내 魏州滑州汴州宋州 등의 군대 7만 명을 거느리고서 趙州를 치게 하였다. 趙王 王鎔나라에 援兵을 청하자 나라가 周德威를 보내 먼저 조주에 주둔하게 하였다.
이해 겨울에 나라 군대가 柏鄕에 이르자 조주 사람이 나라에 급변을 알리니, 莊宗이 직접 군대를 거느리고 贊皇을 나와 石橋에서 주덕위와 만나고 백향에서 5 되는 곳까지 전진하여 野河의 북쪽에 주둔하였다.
나라 군대는 적었는데 왕경인이 거느린 神威軍龍驤軍拱宸軍 등은 모두 나라의 정예병인지라, 人馬鎧甲을 비단과 金銀으로 장식하여 그 광채가 햇살에 번쩍이니 나라 군대가 이를 바라보고 안색이 변하였다.
주덕위가 자신의 군대를 鼓舞하기를 “이는 변주‧송주의 고용된 장사치들이 그 외면을 치장한 데 불과하니 그 속은 족히 두려워할 것이 못 된다. 이들이 입은 갑옷 하나 값이 수만 금이니 이를 잡으면 우리의 物資로 삼기에 알맞을 것이다.
한갓 바라보면서 부러워하지만 말고 힘써서 가서 빼앗아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물러나 장종에게 아뢰기를 “나라 군대가 매우 정예로우니 아직 맞서 싸워서는 안 됩니다. 의당 조금 물러나 때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말하기를 “내가 외로운 군대를 거느리고 천 리 밖으로 나왔으니 速戰速決하는 것이 이롭다. 지금 勝勢를 타고 맹렬하게 공격하지 않고서 적들이 우리 군대의 수효를 알아채도록 한다면 우리는 손쓸 수가 없게 될 것이다.”라고 하자,
주덕위가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조주 사람은 성은 잘 지키지만 들에서는 잘 싸우지 못하니 우리가 승리를 거머쥘 수 있는 방법은 그 이로움이 騎兵에 있습니다.
平原廣野는 기병이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인데 지금 우리가 강가에 주둔하여 적군의 營門 가까이 있으니 우리의 장점을 발휘할 수 있는 곳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이 계책을 불쾌하게 여겨 軍幕에 물러나 누우니 장수들 가운데 감히 들어가 알현하는 이가 없었다.
주덕위가 監軍 張承業에게 이르기를 “왕께서 군대를 오래 머물러 지치게 하는 데 화내고 계시지만 속전속결하지 않는 것은 겁을 먹어서가 아니다. 게다가 우리 군대는 적은 데다 적군의 영문 가까이 있으니 믿고 있는 것은 강 하나가 가로막혀 있다는 사실일 뿐이다.
만약 나라가 배를 얻어 강을 건너게 된다면 우리는 다 죽은 목숨일 것이다. 鄗邑으로 군대를 물려 적군이 군영을 나오도록 유인해내어 적을 攪亂하여 지치게 하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만 한다면 계책을 써서 이길 수 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장승업이 들어가 아뢰기를 “주덕위는 노련한 장군으로 兵法을 아니 그의 말을 소홀하게 여기지 마소서.”라고 하자, 장종이 갑자기 일어나 말하기를 “내가 지금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주덕위가 나라의 遊擊兵을 잡아 왕경인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물으니, 그가 말하기를 “배 수백 척을 만들어 浮橋로 삼으려고 하고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주덕위가 유격병을 이끌고 함께 장종을 알현하자, 장종이 웃으면서 말하기를 “과연 공이 짐작한 대로다.”라고 하고, 그제야 호읍으로 군대를 물렸다.
周德威가 새벽에 3백의 騎兵을 보내 나라의 軍營을 자극하여 挑戰하고 직접 정예 병사 3천 명을 거느리고 뒤따랐다.
王景仁이 노하여 자신의 全軍을 거느리고 출격하여 주덕위와 수십 리에 걸쳐 자리를 옮겨가며 여러 곳에서 싸워 鄗邑 남쪽에 이르렀다.
두 군대가 모두 전투 대형을 갖추니 나라 군대가 6~7리에 걸쳐 늘어서 있는데, 汴州宋州의 군대는 서쪽에 자리를 잡고 魏州滑州의 군대는 동쪽에 자리를 잡았다.
莊宗이 말을 채찍질하여 높은 곳에 올라 바라보며 기뻐하면서 말하기를 “平原의 작은 풀들에서는 전진할 수도 있고 물러날 수도 있으니 참으로 우리가 이길 수 있는 곳이다.”라고 하고, 이어 사람을 보내 주덕위에게 말하기를 “내가 공의 앞에 설 것이니 공은 나를 따라 전진하라.”라고 하니,
주덕위가 말을 붙잡고 간하기를 “나라 군대가 〈준비 없이〉 가볍게 출정하여 멀리서 와서 우리와 자리를 옮겨가며 여러 곳에서 싸웠으니, 그들이 올 때에 반드시 軍糧을 가져올 겨를이 없었을 것이거니와 설령 그들이 군량이 가져올 수 있었더라도 먹을 겨를이 없었을 것입니다.
정오가 되기 전에 병사와 말이 모두 굶주릴 것이니 그들이 물러나려고 할 때를 이용하여 공격하면 승리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수들도 모두 주덕위의 말이 옳다고 여겼다.
未時(오후 1시~3시)와 申時(오후 3시~5시)쯤이 되어 나라 진영의 동쪽에서 먼지가 일어나니, 주덕위가 북을 치고 고함을 지르면서 전진하여 자신의 서쪽 편대를 지휘하며 말하기를 “위주와 활주의 군대가 달아난다.”라고 하고, 또 자신의 동쪽 편대를 지휘하며 말하기를 “나라 군대가 달아난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나라 진영이 소란스러워져서 전열을 다시 정비하지 못하고 이어 모두 달아난지라 마침내 크게 패하였다.
주덕위가 鄗邑에서 추격하여 柏鄕에 이르기까지 수십 리에 걸쳐 주검이 널브러졌고, 왕경인은 10여 기병을 데리고 겨우 벗어났다. 나라가 나라와 전쟁을 시작한 이래로 모두 수십 번을 싸웠으나 이처럼 크게 패한 적은 없었다.
劉守光나라에서 황제를 참칭하자 나라가 周德威를 보내 군대 3만을 거느리고 飛狐를 나가 공격하게 하였다.
주덕위가 祁溝關에 들어가 涿州를 취하고 마침내 幽州에서 유수광을 포위하여 유주 外城을 격파하자,
유수광이 성문을 닫고 버티며 지키니 나라 군대가 나라 州縣들을 모두 함락하고 유주만 함락하지 못하였는데, 포위한 지 한 해를 넘겨서야 비로소 격파하였다. 주덕위는 이 戰功으로 盧龍軍節度使에 배수되었다.
주덕위는 비록 大將이 되었으나 늘 몸소 병사들과 함께 화살과 돌이 난무하는 사이를 내달렸다. 유수광의 猛將 單廷珪軍陣에서 주덕위를 바라보고 말하기를 “이 사람은 周陽五이다.”라고 하고는, 창을 뽑아 들고 말을 내달려 그를 추격하였다.
주덕위가 달아나는 체하다가 단정규가 거의 쫓아왔음을 헤아리고 몸을 돌려 살짝 물러나자, 단정규는 말이 막 내달리고 있어서 멈출 수가 없는지라 단정규가 조금 지나쳐 가게 두고서 몽둥이로 그를 때리니 단정규가 말에서 떨어져 마침내 생포되었다.
莊宗劉鄩魏州에서 대치하였는데 유심이 한밤에 몰래 군대를 보내 黃澤關을 나가 太原을 습격하니, 周德威幽州로부터 騎兵 천 명을 거느리고서 土門으로 들어가 追擊하였다.
유심은 樂平에 이르러 비를 만나 전진하지 못하고 돌아갔다. 주덕위와 유심 둘 다 동쪽으로 전진하여 臨淸에 먼저 가려고 하였다.
임청에는 비축한 식량이 있는 데다, 나라 군대의 군량을 운반하는 길목이었다. 주덕위가 먼저 내달려 임청을 점거하니 이로 인해 장종이 마침내 유심의 군대를 곤경에 몰아넣어 물리칠 수 있었다.
莊宗은 용맹하고 전쟁을 좋아하는 데다 적군을 맞닥뜨리면 더욱 鬪志가 올랐으나, 周德威老將으로 늘 신중함을 유지하면서 적군의 銳氣를 꺾으려고 힘썼다. 그래서 주덕위의 用兵術은 늘 적군의 틈을 엿보아 승리를 얻어냈다.
天祐 15년(918)에 주덕위가 의 군대 3만 명을 거느리고서 鎭州定州 등지의 군대와 함께 장종을 따라 黃河 가에 이르러 麻家渡에서 臨濮으로 進軍하여 汴州에 갔다.
군대가 胡柳陂에 머물렀는데 동이 틀 무렵 정찰하던 騎兵이 보고하기를 “나라 군대가 왔습니다.”라고 하니, 장종이 주덕위에게 戰術을 묻자
주덕위가 대답하기를 “여기서 변주까지는 이틀을 가면 도달할 만큼 가깝고 나라 군사들의 父母妻子들이 모두 그곳에 있으니 나라의 命運이 이 한 번의 전투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적진에 깊숙이 쳐들어온 병사들을 데리고서 저들의 죽기를 각오한 전투를 맞닥뜨렸으니 計略으로 이겨야지 힘으로 저들과 싸워서는 어렵습니다.
게다가 우리 군대가 먼저 이곳에 도착하여 炊事 준비가 되어 있고 營柵이 완비되어 있으니 이를 일러 편안한 상황에서 고생하는 상대를 맞이하는 군대라고 하겠습니다.
왕은 군대를 안무하여 움직이지 않고 계시면 신이 기병을 데리고 저들을 동요시켜 저들이 영책을 완성하지 못하게 하고 취사할 겨를이 없게 할 것이니 저들의 지치고 부족한 상황을 이용한다면 이길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말하기를 “우리가 황하 가에 주둔하여 종일토록 적군을 기다렸는데 지금 적군을 보고도 공격하지 않는다면 다시 무슨 일을 하고 있으란 말인가?”라고 하고,
李存審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공은 輜重(軍需品)을 이끌고 먼저 가라. 나는 공을 위하여 후미를 맡아 가겠다.”라고 하고, 곧장 군대를 독촉하며 출발하였다. 그러자 주덕위는 자신의 아들에게 이르기를 “내가 어디에서 죽을지 모르겠다.”라고 하였다.
전면에서 나라 군대를 맞닥뜨려 진을 치니 왕의 군대는 중앙에 자리하고 진주‧정주의 군대는 왼쪽에 자리하며 주덕위의 군대는 오른쪽에 자리하고 치중 부대는 오른쪽 주덕위 군대의 서쪽에 자리하였다.
전투가 벌어지자 장종이 銀槍軍을 거느리고서 나라 진영으로 말을 달려 들어가니 나라 군대가 조금 패하였다가 나라의 치중 부대를 공격하였다.
치중 부대가 나라의 붉은 깃발을 보고 모두 놀라 주덕위의 군대로 달려 들어가므로 주덕위의 군대가 혼란해졌는데 나라 군대가 이 틈을 타고 공격하니 주덕위 父子가 모두 전사하였다.
장종이 장수들과 서로 붙들고 통곡하기를 “내가 老將의 말을 듣지 않아 이들 부자를 이 지경에 이르게 하였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즉위하자 주덕위를 太師追贈하고, 明宗 때에는 주덕위를 太尉加贈하고 장종의 사당에 配享하고, 高祖는 주덕위를 燕王追封하였다. 아들 周光輔는 관직이 刺史에 이르렀다.
나라의 輜重 부대가 나라 군대가 패하는 것을 보고 들어갔다가 나라의 붉은 깃발을 보자마자 달아나서 마침내 패배하게 되었으니,
이 일은 韓信나라 깃발을 뽑고 나라의 붉은 깃발을 세운 일과 같다. 그래서 “군대는 嚴重한 〈군율을〉 귀하게 여기는 법이니 그래야 패배하지 않을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


역주
역주1 周德威傳 : 周德威(?~918 字가 鎭遠으로 朔州 馬邑 사람이다. 주덕위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56 〈唐書 第32 列傳8〉과 ≪新五代史≫ 卷25 〈唐臣傳 第13〉에 실려 있다.
歐陽脩는 ≪구오대사≫에 2천 2백여 자 분량인 주덕위의 傳記를 1천 7백여 자로 축약하여 서술하였는데, 後唐의 名將인 그의 용맹함과 노련함을 잘 보여주는 일화를 중심으로 짜임새 있게 구성하였다. 주덕위는 처음부터 晉王 李克用의 휘하 장수가 되어 本名인 周陽五로 천하에 이름을 떨쳤는데, 이극용 사후에도 그의 아들 莊宗 李存勖을 도와 한마음으로 여러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후당의 忠臣이라고 할 수 있다.
열전에서는 梁軍이 太原을 공격했을 때 陳章을 생포한 武勇談으로 시작하여 潞州 攻防戰에서 총대장이 되어 後梁의 夾城을 격파한 일, 趙州를 구원하기 위한 援軍으로 가서 柏鄕에서 후량의 王景仁에게 大敗를 안긴 일, 劉守光을 물리쳐 燕國을 멸하고 單廷珪를 생포한 일, 태원을 습격하고 臨淸을 제압하려던 劉鄩을 저지한 일 등을 서술하여 뛰어난 戰術家이자 용맹한 장수로서의 면모를 잘 드러내었다.
이에 반해 이어지는 마지막 단락에서 구양수는 인물들간의 대화를 위주로 현장감 넘치는 필치를 발휘하여 胡柳陂 전투를 묘사하였다. 구양수는 단락의 첫 부분에서 장종과 주덕위의 성향을 대비하면서 주덕위가 죽을 수밖에 없는 張本을 前提하기는 하였으나, 주덕위가 여러 차례 전투에서 이기다가 전술상의 패착으로 목숨까지 잃는 과정이 다소 급작스럽게 전개되어 一見 당황스럽기까지 하다.
하지만 그만큼 마지막에 터져 나온 장종의 痛哭이 깊은 울림으로 다가옴과 동시에 주덕위가 장수로서 후당에서 어떠한 위치를 점하고 있었는지 충분히 엿볼 수 있게 된다. 특히 ≪구오대사≫에서 장종이 “내 훌륭한 장수를 잃은 것은 내 잘못이다.[喪我良將 吾之咎也]”라고 말한 것으로 간략하게 서술되고 있는 것과 비교해보면, 이 열전을 지은 구양수의 敍事의 妙處가 장종의 이 통곡에 있는 것으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호류피 전투는 후량의 內地 깊숙한 곳인 濮州의 서쪽에 있는 고개인 호류피에서 벌어진 大戰이다. 후량의 末帝 朱友貞과 이존욱은 천하의 霸權을 놓고 오랫동안 다투어왔는데, 918년 8월에 이존욱이 주덕위‧李存審‧李嗣源‧王處直 등과 함께 奚‧契丹‧室韋‧吐谷渾 등 이민족 부대까지 합류시켜 후량과 승부를 결정짓기 위해 濮州로 쳐들어갔다. 하지만 후량의 저항이 거세어 쉽게 승부를 내지 못하며 전선을 옮겨 싸우다가 12월 24일에 복주 서쪽에 있는 고개인 호류피에서 전투를 벌였다.
이 전투에서 후당은 처음 輜重 부대의 潰散으로 인해 주덕위‧王緘이 전사한 것을 비롯해 2/3에 달하는 군사를 잃어버려 타격이 컸지만 마침내 복주를 함락하여 이후 대세를 굳히는 발판이 되었던 중요한 전투이다. 후당의 창업의 초석을 놓는 데 크게 기여하였으나, 최종적인 成功을 보지 못하고 죽은 老將의 죽음에 처연한 마음을 일으키지 않을 수 없다.
역주2 王行瑜 : ?~895. 唐末의 장수로, 邠州 사람이다. 처음에 邠寧節度使 朱玫의 部將이었는데 唐 僖宗 光啓 2년(886) 주매가 李煜을 황제로 옹립하고 王行瑜에게 도망간 희종을 추격하게 하였는데 추격에 실패하자 결국 배반하여 주매를 공격해 죽였다. 뒤에 희종이 빈녕절도사에 임명하였다. 892년 鳳翔節度使 李茂貞과 연합하여 공격을 감행해 漢中을 취하였다. 이듬해 唐 昭宗에게 환관 西門君遂 및 재상 杜讓能 등을 죽이도록 하였다. 895년 이무정 및 鎭國節度使 韓建과 함께 長安에 쳐들어가 재상 韋昭度‧李谿를 죽이고 昭宗을 폐위하고 李保를 황제로 세우는 일을 도모하였다. 李克用이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三鎭軍을 격퇴할 때 빈주도 함께 공격하자, 도망다니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하였다.
역주3 梁軍圍晉太原……爲刺史 : ≪舊五代史≫에는 “〈陳章이〉 氏叔琮에게 말하기를 ‘晉나라 군대가 믿고 있는 자는 周陽五이니 원컨대 그를 사로잡으면 郡으로 상을 내려줄 것을 청합니다.’라고 하였다.[言於叔琮曰 晉人所恃者周陽五 願擒之 請賞以郡]”라고 하여 ≪新五代史≫와는 조금 다르다.(≪舊五代史考異≫)
역주4 : ≪新五代史≫에는 ‘下’자가 없다.
역주5 李嗣昭 : ?~922. 본래 姓은 韓氏이고, 原名은 進通이며, 字는 益光으로, 汾州 太穀 사람이다. 晉王 李克用의 아우 代州刺史 李克柔의 養子이다. 李嗣昭는 용맹하면서 膽略이 있으며, 침착하고 굳세어 潞州를 수복하고 滄州를 구원하며 李瑭의 반란을 진압하고 太原이 포위된 것을 깨뜨렸으며 契丹를 공격하고 張文禮를 정벌하는 등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司徒‧太保‧侍中‧中書令 등의 직책을 역임하였다. 922년 鎭州節度使 장문례를 정벌할 때 화살에 맞아 죽었다. 後唐 莊宗이 즉위한 뒤 太師에 추증되고 隴西郡王에 봉해졌다.
역주6 天祐 : 唐 哀帝의 年號(904~907. 애제는 開平 2년(908) 後梁 太祖 朱全忠에게 피살되었는데, 아직 천하가 통일되지 않았으므로 歐陽脩가 唐의 마지막 연호로 계산한 것이다. 天祐 7년은 바로 개평 4년이다.
역주7 天祐七年秋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살펴보건대, 天祐 7년은 바로 梁나라 開平 4년이다. 〈梁太祖紀〉, 〈唐莊宗紀〉, 〈王景仁傳〉, 〈王鎔傳〉으로 校勘해 보면 모두 ‘개평 4년 겨울 11월’로 되어 있는데 이 傳에서만 가을로 되어 있으니 착오이다.[今按天祐七年 卽梁開平四年也 以梁太祖紀唐莊宗紀王景仁王鎔傳校之 皆是開平四年冬十一月 獨此傳以爲秋誤也]”라고 하였다.
역주8 鎧甲 : 전투할 때 몸을 보호하기 위한 복장으로, 금속이나 가죽으로 만든 갑옷이다.
역주9 其一甲之直(치)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其’자는 아마도 ‘且’자가 될 듯하다.[按其疑作且]”라고 하였다.
역주10 退而告于莊宗曰……宜少退以待之 : ≪舊五代史≫에는 “周德威가 정예 기병을 직접 거느리고 賊兵의 양편을 치되 왼편으로 내달리고 오른편을 뚫어 서너 번이나 출몰하여 이날 적병 백여 명을 잡으니 적병이 黃河를 건너 물러났다. 주덕위가 莊宗에게 아뢰기를, ‘적병의 교만한 기세가 가득하니 의당 군대를 정돈하여 그들이 지치기를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德威自率精騎 擊其兩偏 左馳右決 出沒數四 是日 獲賊百餘人 賊渡河而退 德威謂莊宗曰 賊驕氣充盛 宜按兵以待其衰]”라고 하였는데, ≪新五代史≫에는 정예 기병으로 적병을 친 일을 수록하지 않았다. 하지만 ≪구오대사≫의 뒷부분에 “적병과 지척 사이에 있어 이 강물 하나를 격하고 있다.[去賊咫尺 限此一渠水]”라고 한 부분을 고려하면 ≪신오대사≫에 수록하지 않은 부분은 빠뜨려서는 안 된다.(≪舊五代史考異≫)
역주11 張承業 : 846~922. 본래 姓은 康氏이고, 字는 繼元으로, 太原 府交城 사람이다. 唐末 五代 때의 宦官이다. 張承業은 어려서 궁에 들어가 內常侍 張泰收의 養子가 되었는데 뒤에 內供奉을 맡았다. 乾寧 3년(896) 河東監軍을 맡고 左監門衛將軍을 더하였다. 그는 嚴明하게 법을 집행하여 晉王 李克用에게 신임을 받았고 李存勖을 보좌해달라는 遺命을 받았다. 唐나라가 멸망한 뒤 장승업은 이존욱이 높여주는 官爵을 거절하고 唐나라 때 받았던 官職을 그대로 맡았다. 梁나라와 晉나라가 천하를 다투던 때에 그는 太原留守가 되어 후방의 軍政을 관장하여 이존욱이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建國하는 데 일조하였다. 龍德 2년(922) 이존욱이 稱帝하려는 뜻이 완강하자 장승업이 諫言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아 근심과 번민으로 병을 얻었는데 결국 晉陽에서 죽었다. 後唐이 건립된 뒤 左武衛上將軍에 추증되었고, 貞憲이라는 시호를 하사받았다.
역주12 自梁與晉爭……其大敗未嘗如此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이 전투와 夾寨 전투에서 梁나라가 모두 10만의 군대로 패하였다. 〈唐本紀〉에서 ‘梁나라 군대를 柏鄕에서 패퇴시켜 2만 級을 斬首하고 그 將校 3백 人, 말 3천 匹을 획득하였다.’고 하였는데, 〈康懷英傳〉에서는 협채 전투에서 大將 3백 人을 잃었다고 하였고 薛居正의 ≪舊五代史≫ 〈唐本紀〉에서 협채 전투에서 역시 ‘1만 級을 베고 그 장수 副招討使 符道昭 및 대장 3백 人, 芻粟 백만을 획득하였다.’고 하였다. 장교는 그래도 小將을 아울러 말할 수 있다고 해도 대장이라고만 했으면 소장을 포함해 계산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資治通鑑≫에서 협채 전투에 대해 ‘잃어버린 장교와 士卒이 만 인으로 헤아렸다.’고 두 군데서 서술하였으니 또한 2만 級보다 적지 않다. 설거정의 ≪구오대사≫ 〈당본기〉에서 ‘백향의 전투에서 梁나라 장수 陳思權 이하 285人을 사로잡았다.’고 하였고, 〈周德威傳〉에서도 ‘장교 280人을 획득하였다.’고 하였다. 이는 모두 3백 人을 잡은 것이 아니니 백향의 패배가 협채의 패배만큼 심하지는 않았던 것이다.[按此與夾寨之戰 梁皆以十萬師敗 唐本紀敗梁兵于柏鄕 斬首二萬級 獲其將校三百人 馬三千匹 而康懷英傳夾寨乃亡大將三百人 薛史唐本紀 夾寨亦曰 斬萬餘級 獲其將副招討使符道昭 洎大將三百人 芻粟百萬 將校猶統小將言 第曰大將 不計小將可知矣 通鑑夾寨兩敍亡將校士卒以萬計 亦不下二萬級矣 薛史唐本紀 柏鄕之役 擒梁將陳思權以下二百八十五人 周德威傳亦作獲將校二百八十人 是並未有三百人 則柏鄕之敗 不如夾寨之甚也]”라고 하였다.
역주13 飛狐 : 河北省 淶源縣 남쪽에 있는데, 양쪽의 벼랑이 깎아지른 듯이 서 있고 한 가닥 좁은 길이 나 있다. 이 길이 구불구불 백여 리나 이어져 있다. 이곳은 옛날 河北의 평원과 북방 邊境의 郡을 잇는 교통의 요충지였다.
역주14 祁溝關 : 河北省 涿州城 서남쪽에 있는데, 岐溝關이라고도 한다. 地勢가 險要하여 전쟁이 일어나면 반드시 다투던 곳이다. 고대에는 岐溝府라고 하였다가 뒤에 기구관으로 고쳤는데 오늘날에는 岐溝村이라고 한다. 기록에 의하면 唐末에 세워졌다고 한다.
역주15 : ≪新五代史≫에는 ‘檛’자로 되어 있다.
역주16 黃澤關 : 山西省 左權縣 동남쪽 黃澤嶺에 있는 관문으로, 山勢가 險峻하고 산길이 구불구불하여 十八盤이라고도 한다. 河北省을 왕래하는 요충지이다. 唐나라 때 세웠다.
역주17 臨淸 : 山東省 서북부 漳衛河와 古運河가 교차하는 곳에 있어 河北省과 강을 사이에 두고 마주보고 있는 교통의 요충지이다.
역주18 十五年 : 앞의 唐 哀帝의 연호인 天祐(904~907 계산한 연도이다. 천우 15년은 바로 後梁 末帝의 貞明 4년이다.
역주19 贈德威太師……配享莊宗廟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春明退朝錄≫에는 五代부터 國初(北宋 節度使는 모두 檢校太傅에서 太尉로 옮기고 태위에서 太師로 옮긴다고 하였지만 品秩을 올린다는 明文은 없으니 태위가 태사의 버금이다. 周德威가 태사로서 태위를 더한 일의 경우는 바로 반드시 그럴 수 없는 일이다. 薛居正의 ≪舊五代史≫에서는 오직 天成 연간에 조서를 내려 莊宗의 廟廷에 配享하였다고만 말하였으니 이 부분은 착오가 있는 듯하다.[謹案春明退朝錄 五代至國初 節度使皆自檢校太傅遷太尉 太尉遷太師 然無升秩明文 則太尉亞于太師 德威以太師而加太尉 乃事之必不然者 薛史惟言天成中 詔配享莊宗廟廷而已 此疑有誤]”라고 하였다.
역주20 晉高祖 : 石敬瑭(892~942.
역주21 子光輔 官至刺史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 〈周光輔傳〉에서 ‘周光輔는 아우 몇 사람이 있었다. 周光貞은 義州와 乾州의 刺史를 역임하고 조정에 들어와 諸衛將軍이 되었다. 周光遜은 이어 蔡州刺史가 되었다. 周光贊은 靑州行軍司馬를 맡았는데 楊光遠의 반란이 진압되고 나서 商州司馬로 폄적되었다가 赦免을 받아 徵召되어 돌아와서는 얼마 있다가 집에서 졸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新五代史≫에서는 주광보 이외에 주광손만 〈漢本紀〉 및 〈東漢世家〉에 보일 뿐인데 모두 周德威의 아들이라고 하지 않았고 주광정‧주광찬은 모두 빠뜨렸으니 또한 엉성하다.[按薛史周光輔傳 光輔有弟數人 光貞歷義乾二州刺史 入爲諸衛將軍 光遜繼爲蔡州刺史 光贊任靑州行軍司馬 及楊光遠叛滅 貶商州司馬 會赦徵還 尋卒于家 此書光輔外 止光遜見漢本紀及東漢世家 並未曰爲德威子 光貞光贊皆缺如 亦疏矣]”라고 하였다.
역주22 韓信之拔趙幟立漢赤幟 : 漢나라의 韓信이 井陘口(정형구 趙나라 군대를 크게 격파하고 趙王을 사로잡을 때에 쓴 전술로, 미리 날랜 騎兵 2천을 가려서 모두 한나라를 나타내는 붉은 기를 지니게 하여 대기시킨 다음, 자신이 趙軍과 싸우다가 패주하는 것처럼 하자 조군이 성을 비우고 추격하니 그 틈을 타서 대기해둔 날랜 기병을 시켜 성벽에 달려가서 조나라 깃발을 뽑고 한나라의 붉은 기를 꽂게 하여 조군의 기세를 크게 꺾어 승리한 일이 있다.(≪史記≫ 권92 〈淮陰侯列傳〉)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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