符存審은 字德詳이니 陳州宛丘人也라 初名은 存이니 少微賤하야 嘗犯法當死러니
臨刑에 指旁壞垣하고 顧主者曰 願就死于彼하니 冀得垣土覆尸라하니 主者哀而許之하야 爲徙垣下라
而主將方飮酒라가 顧其愛妓하야 思得善歌者佐酒하니 妓言有符存이 常爲妾歌하니 甚善이라하다
主將馳騎하야 召存審한대 而存審以徙垣下故로 未加刑이라 因往就召한대 使歌而悅之하니 存審因得不死하다
其後에 事李罕之하야 從罕之歸晉하니 晉王以爲義兒軍使하고 賜姓李氏하고 名存審이라
從晉王擊李匡儔
할새 爲前鋒
하야 破
하다 又從擊王行瑜
하야 破龍泉寨
하니 以功遷檢校左僕射
하다
從李嗣昭攻汾州하야 執李瑭하니 遷左右廂步軍都指揮使하다
又從嗣昭攻潞州하야 降丁會하고 從周德威破梁夾城하니 遷忻州刺史蕃漢馬步軍都指揮使하다
晉趙攻燕
에 梁救燕
하야 擊趙深州
하야 圍蓨縣
한대 存審與史建瑭軍下博
하야 擊走梁軍
하니 하다
魏博叛梁降晉할새 存審爲前鋒하야 屯臨淸이라 莊宗入魏에 存審殿軍魏縣하니 與劉鄩相距於莘西라
從莊宗敗鄩於故元城하니 閻寶以邢州降이라 乃以存審爲安國軍節度使하다 毛璋以滄州降하니 徙存審橫海하고 加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契丹圍幽州어늘 是時에 晉與梁相持河上이라 欲發兵이나 兵少하야 欲勿救하면 懼失之라
莊宗疑하야 以問諸將이어늘 而存審獨以爲當救라하야 曰 願假臣騎兵五千이면 足矣라하다
乃遣存審分兵救之
하니 卒擊走契丹
하다 從戰胡柳陂
어늘 晉
晨敗
하야 亡周德威
하다
存審與其子彦圖力戰
하야 暮復敗梁軍于土山
하야 遂取德勝
하고 築河南北爲兩城
하니 라 遷內外蕃漢馬步軍總管
하다
梁朱友謙以河中同州降晉이어늘 梁遣劉鄩攻同州하니 友謙求救라 乃遣存審與李嗣昭救之하다
河中은 兵少而弱하야 梁人素易之요 且不虞晉軍之速至也라
存審選精騎二百하야 雜河中兵하야 出擊鄩壘라가 陽敗而走어늘 鄩兵追之한대
晉騎反擊하야 獲其騎兵五十하니 梁人知其晉軍也하고 皆大驚이라 然河中糧少而新降일새 人心頗持兩端이라
晉軍屯
하니 諸將皆欲速戰
이어늘 存審曰 使梁軍知吾利於速戰
이면 則將夾渭而營
하야 斷我餉道以持久困我
면
則我進退不可하리니 敗之道也라 不若緩師示弱하고 伺隙出奇니 可以取勝이라하고 乃按軍不動이라
居旬日에 望氣者言有黑氣하니 狀如鬪雞라한대 存審曰 可以一戰矣라하고 乃進軍擊鄩하야 大敗之하니 鄩閉壁不復出하니라
存審曰 鄩兵已敗
하니 不如逸之
라하고 乃休士卒
하고 遣裨將王建及牧馬于
하니
張文禮殺趙王王鎔
하니 晉遣閻寶李嗣昭等攻之
로되 요 最後遣存審破之
하니라
存審爲將에 有機略하야 大小百餘戰에 未嘗敗衂하야 與周德威齊名이러니 德威死에 晉之舊將이 獨存審在라
契丹攻遮虜어늘 乃以存審爲盧龍軍節度使한대 時存審已病하야 辭不肯行이라 莊宗使人慰諭하고 彊遣之하다
莊宗滅梁入洛에 存審自以身爲大將호되 不得與破梁之功하야 怏怏하야 疾益甚이라 因請朝京師하다
是時에 郭崇韜權位已重이나 然其名望素出存審下라 不樂其來而加己上하야 因沮其事하니
存審妻郭氏泣訴于崇韜曰 吾夫於國有功而
어늘 奈何忍令死棄窮野
오하니 崇韜愈怒
라 存審章累上輒不許
라
存審伏枕嘆曰
이러니 今日天下一家
하야 四夷遠俗
으로
至於亡國之將
히 皆得親見天子
하야 奉觴爲壽
어늘 而獨予棄死於此
하니 豈非命哉
리오하다
崇韜度存審病已亟하고 乃請許其來朝하다 徙存審宣武軍節度使하니 卒于幽州하다
臨終에 戒其子曰 吾少提一劍去鄕里하야 四十年間에 取將相이라 然履鋒冒刃하야 出死入生而得至此也라하고
因出其平生身所中矢鏃百餘而示之曰 爾其勉哉
어다 이라
符存審은 字가 德詳이니 陳州 宛丘 사람이다. 초명은 存이니 젊은 시절에 微賤해서 犯法하여 死刑을 받아야 했던 적이 있었는데,
형벌을 받을 때 곁에 있는 무너진 담을 가리키며 형을 집행하는 이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저곳에서 죽기를 원하니 담의 흙으로 내 시신을 덮어주기 바랍니다.”라고 하니, 형을 집행하는 자가 불쌍하게 여겨 이를 허락하고서 담 밑으로 옮겨주었다.
그런데 主將이 이때 술을 마시고 있다가 자신이 아끼는 妓女를 돌아보고서 노래를 잘 부르는 자를 찾아 酒興을 돋우려고 생각하니, 기녀가 “符存이 늘 첩을 위해 노래를 불러주는데 매우 잘 부릅니다.”라고 하였다.
주장이 말을 보내 부존심을 부르자 부존심이 담 밑으로 옮기고 있던 연유로 아직 형벌을 가하지 않고 있었다. 이에 부존심이 나아가 부름에 응하자 주장이 그에게 노래를 부르게 하고 기뻐하니 부존심이 이로 인해 죽지 않을 수 있었다.
이후에 李罕之를 섬겨 이한지를 따라 晉나라에 투항하니 晉王(李克用)이 그를 義兒軍使로 삼고 李氏 성을 하사하며 存審이라고 이름하였다.
晉王을 따라 李匡儔를 칠 때 先鋒이 되어 居庸關을 함락하였다. 또 진왕을 따라 王行瑜를 쳐서 龍泉寨를 격파하니 이 戰功으로 승진하여 檢校左僕射가 되었다.
李嗣昭를 따라 汾州를 공격하여 李瑭을 잡으니 승진하여 左右廂步軍都指揮使가 되었다.
다시 이사소를 따라 潞州를 공격하여 丁會를 항복시키고 周德威를 따라 梁나라의 夾城을 격파하니 승진하여 忻州刺史 蕃漢馬步軍都指揮使가 되었다.
晉나라와 趙나라가 燕나라를 공격할 때 梁나라가 燕나라를 구원하여 趙의 深州를 쳐서 蓨縣을 포위하자, 符存審이 史建瑭과 下博에 주둔하여 梁나라 군대를 쳐서 몰아내니 승진하여 邢州團練使를 맡았다.
魏博이 梁나라를 배반하고 晉나라에 투항할 때 부존심이 선봉이 되어 臨淸에 주둔하였다. 唐 莊宗이 魏에 들어갈 때 부존심이 후방을 맡아 魏縣에 주둔하니 劉鄩과 莘州의 서쪽에서 대치하게 되었다.
장종을 따라 옛 元城에서 유심을 물리치니 閻寶가 邢州를 가지고 투항한지라 이에 부존심을 安國軍節度使로 삼았다. 毛璋이 滄州를 가지고 투항하니 부존심을 橫海로 옮기고 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해주었다.
契丹이 幽州를 포위하였는데 이때에 晉나라가 梁나라와 黃河 가에서 대치하고 있는지라 군대를 출동하려고 하였다가 군사가 부족하여 유주를 구원하지 않으려 하니 그러면 유주를 잃을 것이 두려웠다.
莊宗이 마음을 정하지 못해 장수들에게 물었는데, 符存審만 유주를 구원해야 한다고 하면서 말하기를 “신에게 騎兵 5천을 빌려주시면 충분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부존심을 보내 군사를 나누어주어 유주를 구원하게 하니 마침내 거란을 쳐서 敗走시켰다. 장종을 따라 胡柳陂에서 전투하였는데 晉나라 군대가 새벽에 패배하여 周德威를 잃었다.
부존심이 그의 아들 周彦圖와 함께 奮鬪하여 저녁에 다시 土山에서 梁나라 군대를 패배시켜 마침내 德勝을 취하고 황하의 남북에 두 개의 성을 쌓으니 晉나라 사람들이 이를 일러 夾寨라고 하였다. 승진하여 內外蕃漢馬步軍總管이 되었다.
梁나라 朱友謙이 河中의 同州를 가지고 晉나라에 항복하자 梁나라가 劉鄩을 보내 동주를 공격하니, 주우겸이 구원해주기를 청한지라 이에 符存審과 李嗣昭를 보내 구원하게 하였다.
河中은 군사가 적고 약하여 梁나라 사람들이 평소 소홀하게 여기고 있었던 데다 晉나라 군대가 신속하게 올 것이라고 예상하지 못하였다.
부존심이 정예 騎兵 2백 명을 뽑아 하중의 병사들과 섞고서 출전하여 劉鄩의 營壘를 공격하다가 패한 척하면서 달아나자 유심의 군대가 추격하였는데,
晉나라 기병이 反擊하여 유심의 기병 5십 명을 잡으니 梁나라 사람들이 그들이 晉나라 군대인 것을 알고는 모두 크게 놀랐다. 그러나 하중은 양식이 적고 이제 막 晉나라에 항복한 터라 人心이 자못 두 나라 사이에서 동요하였다.
晉나라 군대가 朝邑에 주둔하고 있으니 장수들이 모두 速戰하려고 하였는데, 부존심이 말하기를 “만약 梁나라 군대가 우리가 속전하는 것을 이롭게 여긴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渭河를 끼고 영루를 구축하고서 우리의 보급로를 차단하여 持久戰을 펴면서 우리를 곤경에 빠뜨릴 것이다.
그렇게 한다면 우리는 進退兩難이 될 것이니 이는 실패하는 전술이다. 군대의 공격을 잠시 늦추어 약한 척하는 모습을 보이고 틈을 엿보아 奇計를 쓰는 것만 못하니 〈이렇게 해야〉 승리할 수 있다.”라고 하고, 이에 군대를 머무르면서 움직이지 않았다.
열흘이 지났을 때 雲氣를 살피는 자가 말하기를 “하늘에 黑氣가 있는데 형상이 싸움닭 같습니다.”라고 하자, 부존심이 말하기를 “한번 전투할 만하다.”라고 하고, 이에 進軍하여 유심을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키니 유심이 영루를 굳게 닫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부존심이 말하기를 “유심의 군대가 이미 패배하였으니 그를 놓아주는 것만 못하다.”라고 하고, 이에 병사들을 휴식시키고 裨將 王建及을 보내 沙苑에서 말을 기르게 하니,
유심이 晉나라 군대가 해이해졌다고 여기고 그제야 한밤에 달아나자 부존심이 渭河까지 追擊하여 다시 크게 패배시켰다.
張文禮가 趙王 王鎔을 시해하니 晉나라가 閻寶‧李嗣昭 등을 보내 그를 공격하였으나 도착하는 족족 전사하였고, 최후에 符存審을 보내 격파하였다.
符存審은 장수로서 〈지휘할 때〉 智略이 있어 크고 작은 백여 번의 전투에서 패배한 적이 없어 周德威와 명성이 나란하였는데, 주덕위가 죽은 뒤에 晉나라의 옛 장수 가운데 부존심만 살아 있었다.
契丹이 遮虜를 공격하자 이에 부존심을 盧龍軍節度使로 삼았는데, 이때 부존심이 이미 병이 들어 사양하고 나가려고 하지 않는지라 莊宗이 사람을 보내 위로하며 타이르고 억지로 그를 보냈다.
莊宗이 梁나라를 멸망시키고 洛陽에 들어갈 때 符存審은 자신이 大將이 되었는데도, 梁나라를 격파한 공훈을 함께하지 못하였다고 하여 怏怏不樂하여 병이 더욱 심해진지라 이로 인해 京師에 가서 조회하기를 청하였다.
이때에 郭崇韜가 권세와 지위가 이미 높았으나 그 名望은 평소 부존심의 아래에 있는지라 그가 경사에 와서 자신의 위에 앉는 것을 즐거워하지 않아 이에 그가 조회하는 일을 저지하니,
부존심의 처 郭氏가 곽숭도에게 泣訴하기를 “저의 지아비가 국가에 공로가 있고 공과는 同鄕의 오랜 친구인데 어찌하여 차마 저의 지아비로 하여금 궁벽한 草野에서 죽게 놔두시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곽숭도가 더욱 노한지라 부존심이 누차 疏章을 올렸으나 번번이 받아주지 않았다.
부존심이 枕席에 엎드려 탄식하기를 “老夫가 두 군주를 섬긴 지 40년인데 지금 천하가 통일되어 사방의 이민족과 遠方의 풍속이 다른 자들로부터
亡國의 장수와 主上을 해치려고 했다가 신하가 된 사람들까지 모두 직접 천자를 알현하여 술잔을 들어 祝壽하거늘, 나만 이곳에 버려져 죽게 되었으니 어찌 운명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곽숭도는 부존심의 병이 이미 위중한 것을 헤아리고 비로소 그가 조회 오는 것을 윤허하기를 청하였다. 부존심을 宣武軍節度使로 옮기니 幽州에서 졸하였다.
臨終할 때 그 아들들에게 당부하여 말하기를 “내가 어렸을 때 칼 한 자루 들고 고향을 떠나 40년 사이에 將相이 되었다. 그러나 칼끝을 밟고 칼날을 무릅쓰고서 死生을 넘나들며 이 자리에 이를 수 있었다.”라고 하고,
이어 그가 한평생 몸에 맞은 화살촉 백여 개를 꺼내어 보여주면서 말하기를 “너희는 노력하도록 하거라.”라고 하였다. 부존심의 세 아들은 符彦超‧符彦饒‧符彦卿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