梁晉戰柏鄕에 相距鄗邑野河上할새 鎭定兵扼河橋어늘 梁兵急擊之라
莊宗登高
望見鎭定兵將敗
하고 顧建及曰 橋爲梁奪
이면 則吾軍危矣
니 奈何
오하다
建及選二百人
하야 馳擊梁兵
하니 梁兵敗
하야 解去
라 從戰莘縣故元
에 皆先登陷陣
하니 以功累拜遼州刺史
하고 將銀槍效節軍
하다
從戰胡柳에 晉兵已敗하고 與梁爭土山이어늘 梁兵先至하야 登山而陣이라
莊宗至山下하야 望梁陣堅而整하고 呼其軍曰 今日之戰은 得山者勝이라하고 因馳騎犯之하니 建及以銀槍軍繼進하다
梁兵下走하야 陣山西하니 晉兵遂得土山이라 諸將皆言潰兵未集하고 且暮不可戰이라하야늘
閻寶曰 彼陣山上하고 吾在其下에도 尙能擊之어든 況以高而擊下하니 不可失也라하니 建及以爲然하야 因白莊宗曰 請登高望臣破敵이라하고
卽呼其衆曰 今日所失輜重이 皆在山西하니 盍往取之리오하고 卽馳犯梁陣하니 梁兵大敗하다
晉遂軍德勝하야 爲南北城于河上하다 梁將賀瓌攻其南城할새 以竹笮維戰艦于河한대 晉兵不得渡하야 南城危甚이라
莊宗積金帛於軍門
하고 募能破梁戰艦者
하니 至於吐火
히 莫不皆有
라
建及重鎧執矟하고 呼曰 梁晉이 一水間耳니 何必巧爲리오 吾今破之矣라하고 卽以大甕積薪하고 自上流縱火하야 焚梁戰艦하며
建及以二舟載甲士隨之하야 斧其竹笮하니 梁兵皆走라 晉軍乃得渡하야 救南城하니 瓌圍解去라
自莊宗得魏博으로 建及將銀槍效節軍하다 建及爲將에 喜以家資로 散士卒하다
莊宗遣宦官韋令圖監其軍하니 令圖言建及得士心하니 懼有異志라 不可令典牙兵이라하야늘 卽以爲代州刺史라 建及怏怏而卒하니 年五十七이라
王建及은 許州 사람이다. 젊은 시절 李罕之를 섬겨 이한지를 따라 晉나라로 달아나 匡衛指揮使가 되었다.
梁나라와 晉나라가 柏鄕에서 전투할 때에 鄗邑 野河(槐河) 가에서 대치할 때 鎭州‧定州의 군대가 야하 가의 다리를 지키고 있었는데 梁나라 군대가 급습하였다.
唐 莊宗이 높은 臺에 올라 진주‧정주의 군대가 패색이 짙어지는 것을 바라보고, 왕건급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다리를 梁나라에 빼앗기게 된다면 우리 군대가 위태로워지게 될 것이니 어찌하면 좋겠는가?”라고 하였다.
왕건급이 2백 인을 선발하여 말을 달려 梁나라 군대를 치니 梁나라 군대가 패배하여 포위를 풀고 떠났다. 장종을 따라 莘縣과 옛 元城에서 전투할 때에도 모두 먼저 성에 올라 敵陣을 함락하니, 戰功으로 누차 승진하여 遼州刺史에 배수되고 銀槍效節軍을 거느렸다.
晉나라가 楊劉를 공격할 때 王建及이 직접 갈대를 져 날라 垓子를 메우고 먼저 성에 올라 양류를 함락하였다.
莊宗을 따라 胡柳에서 전투할 때 晉나라 군대가 패하고 난 뒤 梁나라와 土山을 다투고 있었는데 梁나라 군대가 먼저 도착하여 산에 올라 軍陣을 펼쳤다.
장종이 산 밑에 이르러 梁나라의 군진이 견고하고 정돈되어 있는 것을 바라보고, 자신의 군대에 외치기를 “오늘의 전쟁은 토산을 빼앗는 자가 이긴다.”라고 하고, 이어 말을 달려 적진으로 뛰어드니 왕건급이 銀槍軍을 이끌고 뒤따라 나아갔다.
梁나라 군대가 토산을 내려와 달아나서 토산의 서쪽에 군진을 펴니 晉나라 군대가 마침내 토산을 빼앗을 수 있었다. 장수들이 모두 “흩어진 군사들이 아직 모이지 않았고 날이 저물어 전투할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閻寶가 말하기를 “저들이 산위에 군진을 펴고 우리들이 산아래에 있을 때도 오히려 물리칠 수 있었는데 하물며 높은 곳에서 아래 있는 저들을 공격하는 것이니 이 기회를 잃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니, 왕건급이 이 말을 옳게 여겨 이어 장종에게 아뢰기를 “청컨대 높은 곳에 올라 신이 적군을 무찌르는 것을 지켜보소서.”라고 하고,
곧바로 자신의 군사들에게 외치기를 “오늘 잃어버린 輜重이 모두 토산의 서쪽에 있으니 어찌 가서 찾아오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곧장 말을 달려 梁나라 군진으로 쳐들어가니 梁나라 군대가 크게 패배하였다.
晉나라가 마침내 德勝에 주둔하고서 黃河의 兩岸에 南城과 北城을 쌓았다. 梁나라 장수 賀瓌가 그 남성을 공격할 때 황하 가에 대나무 줄로 戰艦을 묶어두자 晉나라 군대가 황하를 건널 수가 없어 남성이 매우 위급하였다.
莊宗이 軍門에 금과 비단을 쌓아두고 梁나라의 전함을 깨뜨릴 자를 모집하니 불을 토하고 禁呪를 펴는 이들까지 온갖 사람들이 다 있었다.
王建及이 두 겹의 갑옷을 입고 창을 잡고서 외치기를 “梁나라와 晉나라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으니 어찌 굳이 교묘한 방법을 쓰겠는가? 내가 지금 저들을 격파하겠다.”라고 하고, 곧바로 큰 항아리에 땔나무를 가득 넣고 상류에서 불을 놓아 梁나라의 전함을 불태우는 한편,
왕건급이 배 두 척에 甲士를 태우고 불을 따라가서 전함을 묶은 대나무 줄을 도끼로 끊어버리니 梁나라 군사들이 모두 달아났다. 晉나라 군대가 비로소 황하를 건널 수 있어 남성을 구원하니 하괴가 포위를 풀고 떠나갔다.
莊宗이 魏博을 함락한 뒤에 王建及은 銀槍效節軍을 통솔하였다. 왕건급은 장수로 있으면서 家産을 병사들에게 나누어주기를 좋아하였다.
장종이 宦官 韋令圖를 보내 그의 군대를 감독하게 하니, 위영도가 말하기를 “왕건급이 병사들의 마음을 얻었으니 다른 뜻이 있을까 두렵습니다. 그에게 牙兵을 맡게 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자, 곧바로 그를 代州刺史로 삼았다. 왕건급이 怏怏不樂한 채로 졸하니 향년 57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