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唐臣傳
01.
烏震
은 冀州信都人也
라 少事趙王王鎔爲軍卒
이러니 稍以功遷裨校
하야 隷
軍
하다
習從莊宗于河上에 而鎔爲張文禮所弑한대 震從習討文禮어늘 而家在趙라
文禮執震母妻及子十餘人以招震이로되 震不顧라 文禮乃皆斷其手鼻하되 割而不殊하고 縱至習軍하니 軍中皆不忍正視라
震一慟而止하고 憤激自勵하야 身先士卒하다 晉軍攻破鎭州에 震以功拜刺史하야 歷深趙二州하다
震爲人純質하고 少好學하야 通左氏春秋하고 喜作詩하고 善書러니
及爲刺史
하야는 以廉平爲政
으로 有聲
하야 하야 兼北面水陸轉運使
하다
明宗聞其名
하고 擢拜河北道副招討使
하고 領寧國軍節度使
하야 代
戍于盧臺軍
이라
甚矣
라 震之不
也
여 夫食人之祿而任人之事
하야 事有任
하고 專其責
이면 而其國之利害
가 由己之爲不爲
어니와
爲之雖利於國이라도 而有害於其親者면 猶將辭其祿而去之온 矧其事가 衆人所皆可爲而任不專己요
又其爲與不爲에 國之利害不繫焉者如是로되 而不顧其親이면 雖不以爲利라도 猶曰 不孝어든 況因而利之乎아
夫能事其親以孝然後에 能事其君以忠이니 若烏震者는 可謂大不孝矣로다 尙何有于忠哉리오
烏震은 冀州 信都 사람이다. 젊은 시절 趙王 王鎔을 섬겨 軍卒이 되었는데 점차 戰功으로 裨校에 승진하여 符習의 군대에 소속되었다.
부습이 黃河 가에서 莊宗을 수행하였을 때 王鎔이 張文禮에게 시해되자 오진이 부습을 수행하여 장문례를 토벌하였는데 그의 집이 趙州에 있었다.
장문례가 오진의 모친과 아내 및 아들 등 10여 사람을 잡아두고서 오진에게 〈항복하라〉 불렀는데도 오진은 돌아보지 않았다. 장문례가 이에 그들의 손과 코를 모두 잘라내되 자르기만 하고 죽이지는 않은 채 풀어주어 부습의 軍營에 가게 하니 부습의 軍中 사람들이 모두 차마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였다.
그러나 오진은 한 번 통곡하고 그치고는 憤激하며 스스로 분발하여 몸소 병졸들보다 앞장서서 하였다. 晉나라 군대가 鎭州를 공격하여 격파하자 오진이 戰功으로 刺史에 배수되어 深州와 趙州 두 州의 자사를 역임하였다.
烏震은 사람됨이 순박하고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春秋左氏傳≫에 통달하였고 詩 짓기를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썼는데,
刺史가 되어서는 淸廉하고 公平하게 政事를 펼친다는 평판이 있어 冀州刺史로 승진하여 北面水陸轉運使를 兼任하였다.
明宗(李嗣源)이 그의 명성을 듣고 발탁하여 河北道副招討使에 배수하고 寧國軍節度使를 맡겨 房知溫을 대신하여 盧臺軍을 지키게 하였다.
그가 처음 부임하였을 때 戍兵 龍晊 등이 난을 일으켜 피살되니 太師에 추증되었다.
오호라! 忠과 孝를 義에 따라 행하면 둘 다 온전히 이룰 수 있다는 것은 내가 이미 말한 적이 있거니와 烏震과 같은 자는 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심하구나, 오진이 熟考하지 못한 것이! 무릇 남의 祿을 먹고 남의 일을 맡아, 그 하는 일이 자신이 전담하는 책임이 있으면 그 국가의 利害가 자신이 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 있거니와,
그 일을 하는 것이 비록 국가에 利益이 있다 하더라도 그 어버이에게 危害를 끼치는 일이라면 오히려 그 녹을 사양하고 떠나야 할 것이다. 하물며 그 일이 보통 사람들이 모두 할 수 있는 것으로 그 책임을 자신이 전담하는 것이 아니고,
게다가 자신이 하거나 하지 않거나 간에 국가의 이해가 관계되지 않음이 이와 같은데도 자신의 어버이를 돌아보지 않았으니, 그렇다면 비록 이익을 도모하려는 것이 아니라 해도 오히려 不孝라고 할 것인데 하물며 이를 통해 이익을 도모하려 함에 있어서이겠는가.
무릇 孝로써 자신의 어버이를 섬긴 뒤에 자신의 임금을 忠으로써 섬길 수 있는 것이니 오진과 같은 자는 매우 불효하였다고 이를 만하다. 그러하니 忠誠스러운 점이 어디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