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延朗
은 汴州開封人也
라 事梁
하야 爲鄆州糧料使
러니 明宗克鄆州
에 得延朗
하야 復以爲糧料使
하고
後徙鎭宣武成德에 以爲元從孔目官하다 明宗卽位에 爲莊宅使宣徽北院使忠武軍節度使하다
唐制에 戶部度支以本司郞中侍郞으로 判其事하고 而有鹽鐵轉運使러니 其後用兵에 以國計爲重이라 遂以宰相領其職하다
已後
에 天下喪亂
하야 國用愈空
하야 始置租庸使
로되 用兵無常
하야 隨時調斂
이라가 兵罷則止
하다
梁興에 始置租庸使하야 領天下錢穀하고 廢度支戶部鹽鐵之官이러니 莊宗滅梁에 因而不改하니라
明宗入立에 誅租庸使孔謙而廢其使職하야 以大臣一人으로 判戶部度支鹽鐵하고 號曰 判三司하다
延朗因請置三司使하니 事下中書라 中書用唐故事하야 拜延朗特進工部尙書하야 充諸道鹽鐵轉運等使하고 兼判戶部度支事하니
詔以延朗充三司使하고 班在宣徽使下라 三司置使가 自此始하니라
延朗號爲有
하고 以三司爲己任
이로되 而天下錢穀亦無所建明
하다
明宗常出遊幸에 召延朗共食한대 延朗不至요 附使者報曰 三司事忙하야 無暇라하니 聞者笑之하니라
歷泰寧雄武軍節度使
하다 以爲吏部尙書兼中書門下平章事判三司
하다
러니 三司財貨在太原者
를 延朗悉調取之
하니 高祖深以爲恨
하다
晉兵起에 廢帝欲親征이로되 而心畏高祖하야 遲疑不決한대 延朗與劉延朗等으로 勸帝必行이라
延朗籍諸道民爲丁及括其馬어늘 丁馬未至에 晉兵入京師라 高祖得延朗하야 殺之하다
張延朗은 汴州 開封 사람이다. 梁나라를 섬겨 租庸使로 鄆州糧料使가 되었는데 明宗이 鄆州를 함락하였을 때 장연랑을 얻어 다시 糧料使로 삼았고
뒤에 명종이 宣武‧成德으로 옮겨 鎭守하였을 때 그를 元從孔目官으로 삼았다. 명종이 즉위하였을 때 莊宅使 宣徽北院使 忠武軍節度使로 삼았다.
唐의 제도에 戶部‧度支는 本司의 郞中‧侍郞에게 그 일을 맡게 하면서 鹽鐵轉運使를 두었는데, 이후로 用兵할 때 국가의 재정이 중요해진지라 마침내 宰相이 그 직무를 담당하였다.
乾符 이후에 천하가 혼란하여 국가의 財用이 더욱 부족해지자 비로소 租庸使를 두었으나 용병이 일정하지 않아 그때그때 징수하였다가 전쟁이 끝나면 그만두었다.
梁나라가 일어나자 비로소 조용사를 두어 天下의 錢穀을 담당하게 하고 度支‧戶部‧鹽鐵의 관직을 없앴는데, 後唐 莊宗이 梁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인습하고 고치지 않았다.
後唐 明宗이 들어와 즉위하였을 때 조용사 孔謙을 誅罰하면서 이 조용사라는 직책을 없애고서 大臣 한 사람이 호부‧탁지‧염철을 맡게 하고 判三司라고 불렀다.
張延朗이 이를 계제로 삼사사를 설치할 것을 청하니 이 일을 中書省에 내려 논의하게 하였다. 중서성에서는 唐의 옛 規例에 따라 장연랑을 特進 工部尙書에 배수하고서 諸道鹽鐵轉運等使에 充任하고 判戶部度支事를 兼任하도록 하니,
詔書를 내려 장연랑을 삼사사에 충임하고 반열은 宣徽使의 아래에 있도록 하였다. 三司에 使를 둔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張延朗은 心計가 있다고 일컬어졌고 三司를 자기가 맡고 있었는데 천하의 錢穀에 대해서 또한 건의한 일이 없었다.
明宗이 항상 밖으로 나가 노닐러 다닐 적에 함께 식사하려고 장연랑을 불렀는데, 장연랑이 가지 않고 使者에게 부탁하여 보고하기를 “삼사의 일이 바빠 겨를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자들이 비웃었다.
泰寧軍節度使‧雄武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唐 廢帝가 그를 吏部尙書 兼中書門下平章事 判三司로 삼았다.
晉 高祖가 다른 뜻을 품었는데 太原에 있는 三司의 재물을 張延朗이 다 가져가니 고조가 매우 유감으로 여겼다.
晉나라 군대가 반란하였을 때 廢帝가 親征하려고 하였으나 마음속으로 고조를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자, 장연랑이 劉延朗 등과 함께 폐제에게 반드시 出征해야 한다고 권하였다.
장연랑이 각 道의 백성들 가운데 壯丁이 된 자들을 문서에 올리고 그들의 말을 찾아 거두었는데, 장정과 말들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晉나라 군대가 京師로 쳐들어간지라 고조가 張延朗을 붙잡아 죽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