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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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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張延朗 汴州開封人也 事梁하야 爲鄆州糧料使러니 明宗克鄆州 得延朗하야 復以爲糧料使하고
後徙鎭宣武成德 以爲元從孔目官하다 明宗卽位 爲莊宅使宣徽北院使忠武軍節度使하다
元年하다
唐制 戶部度支以本司郞中侍郞으로 判其事하고 而有鹽鐵轉運使러니 其後用兵 以國計爲重이라 遂以宰相領其職하다
已後 天下喪亂하야 國用愈空하야 始置租庸使로되 用兵無常하야 隨時調斂이라가 兵罷則止하다
梁興 始置租庸使하야 領天下錢穀하고 廢度支戶部鹽鐵之官이러니 莊宗滅梁 因而不改하니라
明宗入立 誅租庸使孔謙而廢其使職하야 以大臣一人으로 判戶部度支鹽鐵하고 號曰 判三司하다
延朗因請置三司使하니 事下中書 中書用唐故事하야 拜延朗特進工部尙書하야 充諸道鹽鐵轉運等使하고 兼判戶部度支事하니
詔以延朗充三司使하고 班在宣徽使下 三司置使 自此始하니라
延朗號爲有하고 以三司爲己任이로되 而天下錢穀亦無所建明하다
明宗常出遊幸 召延朗共食한대 延朗不至 附使者報曰 三司事忙하야 無暇라하니 聞者笑之하니라
歷泰寧雄武軍節度使하다
以爲吏部尙書兼中書門下平章事判三司하다
러니 三司財貨在太原者 延朗悉調取之하니 高祖深以爲恨하다
晉兵起 廢帝欲親征이로되 而心畏高祖하야 遲疑不決한대 延朗與劉延朗等으로 勸帝必行이라
延朗籍諸道民爲丁及括其馬어늘 丁馬未至 晉兵入京師 高祖得延朗하야 殺之하다


02. 張延朗傳記
張延朗汴州 開封 사람이다. 나라를 섬겨 租庸使鄆州糧料使가 되었는데 明宗鄆州를 함락하였을 때 장연랑을 얻어 다시 糧料使로 삼았고
뒤에 명종이 宣武成德으로 옮겨 鎭守하였을 때 그를 元從孔目官으로 삼았다. 명종이 즉위하였을 때 莊宅使 宣徽北院使 忠武軍節度使로 삼았다.
長興 元年(930)에 三司使에 배수하였다.
의 제도에 戶部度支本司郞中侍郞에게 그 일을 맡게 하면서 鹽鐵轉運使를 두었는데, 이후로 用兵할 때 국가의 재정이 중요해진지라 마침내 宰相이 그 직무를 담당하였다.
乾符 이후에 천하가 혼란하여 국가의 財用이 더욱 부족해지자 비로소 租庸使를 두었으나 용병이 일정하지 않아 그때그때 징수하였다가 전쟁이 끝나면 그만두었다.
나라가 일어나자 비로소 조용사를 두어 天下錢穀을 담당하게 하고 度支戶部鹽鐵의 관직을 없앴는데, 後唐 莊宗나라를 멸망시켰을 때 인습하고 고치지 않았다.
後唐 明宗이 들어와 즉위하였을 때 조용사 孔謙誅罰하면서 이 조용사라는 직책을 없애고서 大臣 한 사람이 호부‧탁지‧염철을 맡게 하고 判三司라고 불렀다.
張延朗이 이를 계제로 삼사사를 설치할 것을 청하니 이 일을 中書省에 내려 논의하게 하였다. 중서성에서는 의 옛 規例에 따라 장연랑을 特進 工部尙書에 배수하고서 諸道鹽鐵轉運等使充任하고 判戶部度支事兼任하도록 하니,
詔書를 내려 장연랑을 삼사사에 충임하고 반열은 宣徽使의 아래에 있도록 하였다. 三司使를 둔 것이 이때부터 비롯하였다.
張延朗心計가 있다고 일컬어졌고 三司를 자기가 맡고 있었는데 천하의 錢穀에 대해서 또한 건의한 일이 없었다.
明宗이 항상 밖으로 나가 노닐러 다닐 적에 함께 식사하려고 장연랑을 불렀는데, 장연랑이 가지 않고 使者에게 부탁하여 보고하기를 “삼사의 일이 바빠 겨를이 없습니다.”라고 하니 듣는 자들이 비웃었다.
泰寧軍節度使雄武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廢帝가 그를 吏部尙書 兼中書門下平章事 判三司로 삼았다.
高祖가 다른 뜻을 품었는데 太原에 있는 三司의 재물을 張延朗이 다 가져가니 고조가 매우 유감으로 여겼다.
나라 군대가 반란하였을 때 廢帝親征하려고 하였으나 마음속으로 고조를 두려워하여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자, 장연랑이 劉延朗 등과 함께 폐제에게 반드시 出征해야 한다고 권하였다.
장연랑이 각 의 백성들 가운데 壯丁이 된 자들을 문서에 올리고 그들의 말을 찾아 거두었는데, 장정과 말들이 아직 이르지 않았을 때 나라 군대가 京師로 쳐들어간지라 고조가 張延朗을 붙잡아 죽였다.


역주
역주1 張延朗傳 : 張延朗(?~936 汴州 開封 사람이다. 장연랑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69 〈唐書 第45 列傳21〉과 ≪新五代史≫ 卷26 〈唐臣傳 第14〉에 실려 있다.
≪구오대사≫ 輯佚의 불완전한 양상을 드러내는 〈梁書 太祖紀〉와 〈安重誨傳〉처럼 본 열전 역시 자료의 한계로 인해 原形이 제대로 복원되지 못하였다. ≪구오대사≫의 본 열전을 살펴보면 ≪구오대사≫ 집일의 주요 참고 자료였던 ≪永樂大典≫에 이미 본 열전의 原本이 刪節되어 있어 ≪신오대사≫에도 수록되어 있는 三司使의 유래 설명 부분과 장연랑과 後唐 明宗의 일화 부분이 없는 대신, 장연랑이 判三司를 사직하며 올린 表文 全文을 수록하여 빈약한 내용을 보충하고 있다.
구양수는 첫 부분에서 장연랑의 초기 행적을 간략하게 서술한 뒤 삼사사의 設置 顚末을 설명하였다. 唐代에는 처음에 戶部‧度支‧鹽鐵의 일을 管掌하는 관리를 각각 따로 임명하였는데, 뒤에 전쟁을 이유로 혹은 五代의 혼란기를 거치면서 宰相이나 租庸使 혹은 삼사사 등 官品이 높은 1인이 세 가지 업무를 총괄하는 방향으로 수렴되었다는 것이 핵심이다.
구양수는 삼사사가 이렇게 천하의 財賦를 관장하는 중요하면서도 어려운 일임을 밝힌 다음 바로 이어 장연랑과 명종의 일화를 서술하여 삼사사를 맡은 장연랑의 무능함을 드러내었다.
또한 이어지는 단락에서는 河東에서 石敬瑭이 반란하였을 때 장연랑이 廢帝에게 석경당을 정벌해야 한다고 청한 일을 識者들이 옳게 여겼다는 말[識者韙之]과, 석경당이 장연랑을 주벌한 뒤 삼사사로 임명하기에 합당한 사람이 없어 뒤늦게 후회하였다는 말[甚追悔焉] 등 ≪구오대사≫에 수록되어 있는 장연랑에 대한 좋은 평가를 삭제함으로써, 장연랑이 무능하여 평판이 좋지 않았던 사실만 남게 되었다.
역주2 以租庸使爲鄆州糧料使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에는 ‘租庸使’가 ‘租庸吏’로 되어 있으니 이 부분은 착오이다.[謹案薛史租庸使作租庸吏 此誤]”라고 하였다.
역주3 租庸使 : 國家의 稅政을 관장하는 관직이다. 唐 玄宗 開元 11년(723) 勾當租庸地稅使에 임명한 宇文融이 최초의 租庸使였다. 뒤에 楊國忠 등이 이어 맡아 조세 수취를 專任하였다. 德宗 이후로 租庸調 제도가 兩稅法으로 바뀌면서 조용사도 폐지되었다. 僖宗 때 黃巢의 반란을 진압하면서 다시 한 번 조용사를 임명하여 군수에 충당하기 위한 물자를 거두었다. 五代 때 後梁과 後唐은 세금을 전담하여 거두는 중추 財政 長官으로 삼았는데 後唐 明宗 때 폐지되었다.
역주4 長興 : 後唐 明宗의 연호(930~933.
역주5 三司使 : 戶部‧度支(탁지)‧鹽鐵 등 재정을 담당하는 부서를 총괄하는 장관을 말한다.
역주6 乾符 : 唐 僖宗의 연호(874~879.
역주7 心計 : 계산 혹은 계산을 잘하는 재능을 가리킨다. 西漢 때 桑弘羊은 河南 洛陽 사람으로, 상인의 아들이었는데 13세에 心計를 써서 武帝의 侍中이 된 일이 있다.(≪史記≫ 卷30 〈平準書〉)
역주8 廢帝以爲吏部尙書兼中書門下平章事判三司 : ≪舊五代史≫에는 張延朗을 吏部尙書가 아니라 禮部尙書로 삼은 것으로 되어 있고 이때 辭職하는 表文을 올렸으나, 廢帝(末帝 허락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임명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구오대사≫에 있는 장연랑의 사직하는 표문은 당시의 폐단을 매우 잘 분석하였고, ≪資治通鑑≫에 있는 李襲吉이 李克用에게 올린 議論 역시 다스림의 근원에 통달한 것인데, 이 ≪新五代史≫에서는 모두 節錄하여 보존하지 않고 도리어 梁나라 朱友珪의 거짓 詔書, 晉나라가 契丹에 항복하는 表文, 後漢 太后가 郭威에게 답하는 誥文 및 湘陰公을 降封하는 고문을 자세하게 수록하였는데 모두 형식적인 修辭일 뿐이니 〈史料를〉 取捨하는 엄밀한 태도를 매우 잃은 것이다.[按薛史張延朗辭職表 深中時病 通鑑李襲吉獻李克用議 亦通治源 此書並不節存之 乃詳于梁友珪僞詔 晉降契丹表 漢太后答郭威及降封湘陰公誥 皆例語耳 甚失去取之宜]”라고 하였다.
역주9 廢帝 : 李從珂(?~936. 鎭州 平山 사람으로, 본래 성은 王氏인데, 李嗣源이 騎將으로 있을 때 평산을 지나가다 납치한 뒤 養子로 삼아 李氏 성을 받았다. 이사원이 즉위하여 後唐 明宗이 되자 그가 전쟁에서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고 하여 潞王에 봉하였다. 應順 초에 閔帝를 죽이고 자립했다. 後晉 高祖 石敬瑭이 契丹을 끌어들여 후당의 군대를 대파하자 玄武樓에 올라가 스스로 불을 지르고 죽었다. 3년 동안 재위했고, 그의 죽음으로 후당도 멸망하였다.
역주10 晉高祖有異志……高祖深以爲恨 : 당시 後晉 高祖 石敬瑭은 河東節度使로 있었으며, 太原은 그 관할지역이었다.
역주11 晉高祖有異志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唐臣傳〉에서 石敬瑭을 晉 高祖라고 일컬어서는 옳지 않은데 〈劉延郞傳〉에서 진 고조라고 일컫고, 漢臣 蘇逢吉‧史弘肇‧王章‧劉銖‧聶文進의 列傳에서 周 太祖라고 일컬은 것은 모두 잘못이다.[按唐臣傳不宜稱石敬瑭爲晉高祖 劉延郞傳稱晉高祖 漢臣蘇逢吉史弘肇王章劉銖聶文進傳稱周太祖皆誤]”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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