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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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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李嚴 幽州人也 初名讓坤이라 事劉守光爲刺史러니 後事莊宗爲하다 嚴爲人明敏多藝能하야 習騎射하고 頗知書而辯이라
三年 使于蜀하야 爲王衍陳唐興復功德之盛할새 音辭淸亮하니 蜀人聽之皆悚動이라
衍樞密使召嚴置酒하고 從容問中國事하니 嚴對曰 前年 天子建大號于鄴宮하고 自鄆趨汴하야 定天下不旬日이요 而梁之降兵 猶三十萬이라
東漸于海하고 西極甘涼하며 北懾幽陵하고 南踰閩嶺하니 四方萬里 莫不臣妾이라
承累世之彊하고 恃先朝之舊호되 皆遣子入侍하고 稽首稱藩이라
至于荊湖吳越 修貢賦하고 效珍奇하야 願自比于列郡者하야는 至無虛月이라
天子方懷之以德하고 而震之以威하시니 天下之勢 不得不一也라하다
光嗣曰 荊湖吳越 非予所知어니와 若鳳翔 則蜀之姻親也 其人反覆하니 其可信乎
又聞契丹日益彊盛호니 大國其可無慮乎아하다 嚴曰 契丹之彊 孰與僞梁고하니
光嗣曰 比梁差劣耳라하다 嚴曰 唐滅梁 如拉朽어든 況其不及乎 唐兵布天下하니 發一鎭之衆하야 可以滅使無類
然而天生四夷하야 不在九州之內하니 自前古王者 皆存而不論 蓋不欲窮兵黷武也라하다 蜀人聞嚴應對하고 愈益奇之하니라
是時 蜀之君臣 皆庸暗而恃險自安하야 窮極奢僭이라 嚴自蜀還하야 具言可取之狀하다
莊宗遣嚴以名馬入蜀하야 市珍奇以充後宮이어늘 而蜀法嚴禁以奇貨出하고 其非奇物而出者 名曰 이라
由是 嚴無所得而還이요 惟得金二百兩毛布之類
莊宗聞之하고 大怒曰 物歸中國 謂之라하니 王衍其能免爲入草人乎아하고 於是決議伐蜀하다
魏王繼岌西伐할새 하고 與康延孝以兵五千先行하니 所過州縣 皆迎降이라
延孝至漢州하니 王衍告曰 得李嚴來하면 卽降이라하니 衆皆謂伐蜀之謀自嚴始 而衍怨嚴深하니 不宜往이라하다
嚴聞之喜하고 衍見嚴하고 하고 卽日以蜀降하다 嚴還 明宗以爲泗州防禦使하고 客省使如故
其後 孟知祥倔彊於蜀이어늘 安重誨稍裁抑之라가 思有以制知祥者러니 嚴乃求爲西川兵馬都監하다 將行 其母曰 汝前啓破蜀之謀하니 今行 其以死報蜀人矣라하야늘 嚴不聽하다 嚴與知祥同事莊宗이러니 時知祥爲中門使 嚴嘗有過어늘 莊宗怒甚하야 命斬之러니 知祥戒行刑者少緩하라하고 入白莊宗曰 嚴小過 不宜以喜怒殺人이니 恐失士大夫心이라하다 莊宗怒稍解하야 命知祥監笞嚴二十而釋之하다 知祥雖與嚴有舊恩이나 而惡其來 蜀人聞嚴來하고 亦皆惡之 嚴至 知祥置酒하고 從容問嚴曰 朝廷以公來邪 公意自欲來邪아하니 嚴曰 君命也 知祥發怒曰 天下藩鎭 皆無監軍이어늘 安得爾獨來此리오 此乃孺子熒惑朝廷爾라하고 卽擒斬之어늘 明宗不能詰也 知祥由此遂反하다


03. 李嚴傳記
李嚴幽州 사람이니 初名讓坤이다. 劉守光을 섬겨 刺史가 되었는데 뒤에 莊宗을 섬겨 客省使가 되었다. 이엄은 사람됨이 明敏하고 재주가 많아 말타기와 활쏘기에 익숙하였고 자못 글을 알고 말재주가 있었다.
同光 3년(925)에 李嚴나라에 사신 가서 王衍에게 나라를 부흥시킨 功德의 성대함을 진술할 때 말소리가 깨끗하고 또랑또랑하니 나라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모두 두려워하고 놀랐다.
왕연의 樞密使 宋光嗣가 이엄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中國의 일을 물으니, 이엄이 대답하기를 “지난해에 天子께서 鄴都의 궁전에서 大號(나라)를 세우고 鄆州에서 汴州로 내달려 天下를 평정하는 데 열흘이 채 못 되었고 나라의 투항한 병사들이 30만이나 되었습니다.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 甘州涼州까지 다다랐으며 북쪽으로 幽陵懾服시켰고 남쪽으로 閩嶺을 넘으니, 사방 만 리의 강토에서 나라에 臣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淮南 楊氏가 누대에 걸친 강대함을 이어받고 鳳翔 李公이 앞선 조정의 舊臣임을 믿으면서도 모두 아들을 보내 대궐에 들어와 모시고 머리를 조아리며 藩臣을 자처하였습니다.
吳越貢賦를 올리고 珍奇를 바쳐 스스로 郡縣으로 간주되기를 원한 데 이르러서는 한 달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천자께서 지금 恩德으로 그들을 품어주고 威嚴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시니 천하의 형세가 통일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송광사가 말하기를 “吳越은 내가 알 바가 아니거니와 봉상의 경우에는 우리 나라의 姻戚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을 쉽게 뒤바꾸니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契丹이 날로 더욱 彊盛해진다 하니 大國나라가 근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엄이 말하기를 “거란의 강성함이 僞梁(後梁)과 비교할 때 누가 더합니까?”라고 하니,
송광사가 말하기를 “나라와 비교할 때 거란이 조금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엄이 말하기를 “나라가 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마치 썩은 나무를 꺾는 것과 같았는데 하물며 나라만 못한 거란이겠습니까? 나라 군대가 천하에 포진해 있으니 한 의 군사를 출동하여 오랑캐 거란을 멸망시켜 그들의 씨를 말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이 四夷를 낳아 九州의 안에 있지 않게 하니 前古王者로부터 이후로 모두 그들을 살려두고 간섭하지 않았던 것은 武力을 다 써서 전쟁하려 하지 않아서입니다.”라고 하였다. 나라 사람들이 이엄이 應對하는 말을 듣고 더욱 그를 비범하게 여겼다.
이때에 나라의 君臣들이 모두 용렬하고 우매하여 險固한 지형을 믿고 스스로 안전하게 여기면서 사치하고 참람함이 극에 달했다. 李嚴나라에서 돌아와 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을 자세히 갖추어 아뢰었다.
당초에 莊宗이 이엄을 보내면서 名馬를 가지고 에 들어가 팔아 珍奇한 보물을 사서 後宮들에게 나눠주게 하였는데, 나라의 법률에 진기한 財貨를 가지고 劍門을 나가는 것을 嚴禁하였고 진기한 물품이 아닌 것을 내보내는 것을 ‘入草物’이라고 불렀다.
이로 말미암아 이엄이 얻은 것 없이 돌아오면서 단지 황금 200, 地衣, 毛布 따위만 가지고 왔다.
장종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中國으로 오는 물건을 ‘入草’라 한다 하는데 王衍入草人이 됨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나라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겨울에 魏王 李繼岌이 서쪽으로 정벌할 때 李嚴三川招撫使로 삼고 康延孝와 함께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먼저 가니 지나가는 州縣마다 모두 맞이하며 투항하였다.
강연효가 漢州에 이르니 王衍이 고하기를 “이엄이 나에게 오면 곧바로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땅을 정벌하려는 계책이 이엄에게서 시작되었으므로 왕연이 이엄을 몹시 원망하고 있으니 이엄이 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엄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고는 곧장 말을 달려 益州로 들어갔다. 왕연이 이엄을 보고 자신의 와 모친을 부탁하고서 당일 바로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이엄이 돌아오자 明宗이 그를 泗州防禦使로 삼고 客省使는 그대로 맡게 하였다.
이후에 孟知祥에서 강경하게 버티거늘 安重誨가 조금씩 그를 억제하다가 맹지상을 제압할 사람을 찾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李嚴이 이에 西川兵馬都監이 되기를 청하였다. 이엄이 출발할 때 그의 모친이 말하기를 “네가 앞서 을 무너뜨릴 계책을 말하였으니 지금 가면 죽음으로써 사람들에게 되갚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엄이 듣지 않았다. 당초에 이엄이 맹지상과 함께 莊宗을 섬겼는데 그 당시 맹지상은 中門使였다. 이엄이 일찍이 잘못한 일이 있자 장종이 몹시 노하여 그를 참수하라고 명하였는데, 맹지상이 형벌을 집행하는 자에게 조금 늦추어달라 당부하고 들어가 장종에게 아뢰기를 “이엄의 잘못은 작은 일입니다. 喜怒의 감정을 가지고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니 士大夫들의 마음을 잃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은 노여움이 조금 풀려 맹지상에게 명하여 이엄에게 笞刑 20대를 때리는 것을 감독하고 풀어주도록 하였다. 맹지상이 비록 이엄과 묵은 恩義가 있었으나 그가 으로 오는 것을 싫어하였고, 사람들도 이엄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를 미워하였다. 이엄이 이르자 맹지상이 酒宴을 베풀고 조용히 이엄에게 묻기를 “朝廷에서 공을 보내 오도록 한 것인가? 공의 뜻으로 스스로 오고자 한 것인가?”라고 하니, 이엄이 말하기를 “임금의 명입니다.”라고 하였다. 맹지상이 노하여 말하기를 “天下藩鎭들이 모두 監軍이 없거늘 어찌 그대 혼자만 이곳에 올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바로 어린 네놈이 조정을 현혹시킨 것일 뿐이다.”라고 하고, 곧바로 그를 잡아 참수하였는데 明宗이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못하였다. 맹지상이 이로부터 마침내 반란하였다.


역주
역주1 李嚴傳 : 李嚴(?~? 本名이 讓坤으로 幽州 사람이다. 이엄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70 〈唐書 第46 列傳22〉와 ≪新五代史≫ 卷26 〈唐臣傳 第14〉에 실려 있다.
歐陽脩는 ≪구오대사≫에 680여 자 정도로 수록되어 있던 이엄의 傳記를 790여 자로 편폭을 늘려 기술하였다. 그 양상을 살펴보면, 우선 이엄이 樞密使 宋光嗣와 나눈 대화는 두 史書의 서술이 많은 편차를 보이고 있고, 이엄이 莊宗을 알현할 때의 일화, 孟知祥과 이엄의 관계를 다룬 부분은 ≪구오대사≫에는 없는 내용이다.
이엄은 多才多能한 사람이었다. 文武를 겸비한 데다 말재주까지 있었는데 그의 말재주는 前蜀에 使臣 갔을 때 王衍의 신하 宋光嗣와 나눈 대화를 보면 잘 볼 수가 있다. 또한 전촉의 사정을 두루 탐지하고 돌아와 정벌 계획까지 세울 정도였던 것으로 볼 때 局勢를 파악하는 능력 또한 뛰어났던 것으로 보인다.
구양수는 이엄이 전촉의 王衍, 後蜀의 맹지상과 얽혀 있는 인연을 파헤침으로써 이엄이 상승하였다가 추락하게 되는 과정을 설득력 있게 풀어내고 있다. 촉에 사신 가서 활약한 일, 촉에서 돌아와 장종을 알현하고 정벌을 논의한 일, 촉 정벌에서 공훈을 세운 일, 그리고 마지막으로 맹지상을 견제하기 위해 監軍으로 촉에 갔다가 참수당한 일 등 이엄은 後唐과 촉을 매개하는 중요한 고리의 역할을 하였는데, 구양수는 이렇게 촉과 이엄 사이에 벌어지는 일들을 敍事의 중심에 놓고 이엄이 겪은 浮沈을 서술하는 전략을 구사한 것이다.
특히 맹지상은 이전에 이엄의 잘못을 변호하기도 한 恩人인데, 이엄이 이를 믿고 섣불리 촉에 갔다가 화를 당하였으니 이엄의 뛰어난 능력도 幾微를 살피는 데에는 쓸모가 없었던 듯하다.
역주2 客省使 : 唐나라 말엽에 설치한 관직으로, 원래는 宦官이 맡는 경우가 많았는데 後梁 太祖 朱溫이 환관들을 죽인 뒤에 대부분 武將들이 맡았다. 外國과 이민족의 사신을 접대하는 일과 文武 官員들이 皇帝를 朝見할 때의 禮儀를 관장하였다.
역주3 同光三年 使于蜀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살펴보건대, 〈王衍世家〉에 이르기를, ‘乾德 6년에 莊宗이 李嚴을 보내 蜀에 聘問하니 王衍이 上淸宮에서 더불어 함께 朝見하였는데 蜀都의 백성들과 簾帷‧珠翠가 길 양편에 끊어지지 않았다. 이엄이 그곳의 사람과 물자가 富盛하면서 왕연이 교만하고 방탕한 것을 보고 돌아와 이에 촉을 칠 계책을 올렸다. 이듬해 唐의 魏王 李繼岌과 郭崇韜가 촉을 정벌하였다. 이해에 왕연이 咸康으로 改元하고 10월에 秦州에 幸行하여 綿谷에 이르렀는데 唐나라 군대가 그 국경에 쳐들어왔다.’고 하였고, 또 〈十國年譜〉에 이르기를, ‘莊宗 同光 2년 갑신년(924) 바로 王衍의 乾德 6년이고 同光 3년 을유년(925) 바로 왕연의 咸康 元年이다.’라고 하고서, 이어 주석에서 ‘이해에 촉이 망하였다.’라고 하였다. 대체로 이엄은 동광 2년에 촉에 사신 가고 이듬해 서쪽으로 정벌한 것인데 지금 〈李嚴傳〉에서는 도리어 동광 3년에 촉에 사신 가고 이해 겨울에 魏王이 서쪽으로 정벌하였다고 하였으니 1년이 완전히 잘못되었다.[今按王衍世家云 乾德六年 莊宗遣李嚴聘蜀 衍與俱朝上淸 而蜀都士庶簾帷珠翠 夾道不絶 嚴見其人物富盛 而衍驕淫 歸乃獻策伐蜀 明年 唐魏王繼岌郭崇韜伐蜀 是歲衍改元曰咸康 十月幸秦州 至綿谷 而唐師入其境 又十國年譜云 莊宗同光二年甲申歲 卽王衍乾德六年 而同光三年乙酉歲 卽王衍咸康元年 仍注云 是歲蜀亡 蓋嚴以二年使蜀 次年西伐 今嚴傳乃云 同光三年使蜀 是冬魏王西伐 顯誤一年矣]”라고 하였고, 그 주석에 “살펴보건대, 薛居正의 ≪舊五代史≫에는 ‘3년에 촉을 정벌하였다.’고 하였다.[案薛史作三年伐蜀]”라고 하였다.
역주4 同光 : 後唐 莊宗의 연호(923~925.
역주5 宋光嗣 : ?~925. 前蜀에서 권세를 휘둘렀던 宦官으로 王建과 王衍 2대의 왕을 섬겼다.
역주6 淮南楊氏 : 唐나라 淮南節度使로 있던 楊行密이 세운 五代十國시대의 吳나라를 가리킨다.
역주7 鳳翔李公 : 唐나라 鳳翔節度使 李茂貞을 가리킨다. 그는 唐 昭宗에 의해 岐王으로 봉해졌다가, 後唐 同光 2년(924) 莊宗에게 항복하여 秦王에 봉해졌다.
역주8 : 사고전서본에는 ‘寇’자로 되어 있다.
역주9 劍門 : 劍門關 혹은 劍閣이라고도 하는데 棧橋의 이름이다. 지금 四川省 劍閣縣 동북쪽 大劍山과 小劍山 사이에 있는데, 諸葛亮이 설치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蜀 지방으로 들어가는 川陝 사이의 주요한 통로로서 군사적 요충지이다.(≪元和郡縣志≫ 〈劍閣道〉)
역주10 入草物 : 草物을 들여보낸다는 말로, 蜀에서 珍奇한 물건의 搬出을 嚴禁하고 粗惡한 물건만 貢物로 바친 일을 가리킨다.
역주11 地衣 : 헝겊으로 가장자리를 꾸미고 여러 개를 잇대어서 크게 만든 돗자리를 말한다.
역주12 入草 : 사고전서본에는 뒤에 ‘物’이 있다.
역주13 以嚴爲三川招撫使 : ≪舊五代史≫는 저본과 같은데, 사고전서본과 ≪新五代史≫에는 ‘撫’가 ‘討’로 되어 있다.
역주14 卽馳騎入益州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살펴보건대, 成都는 唐나라 초에는 비록 일찍이 益州라는 명칭이 있기도 하였지만 얼마 있다가 바로 고쳐서 蜀郡이 되었다. 이후로는 마침내 승격하여 府가 되었고 또한 일찍이 건립하여 南京이 되기도 하였다가 뒤에 다시 府가 되었으니 바로 다시는 익주라는 칭호가 있지 않았다. 唐나라 말엽에 王建이 이미 蜀으로 들어가니 大順 2년 10월에 唐나라에서 왕건을 檢校司徒 成都尹으로 삼았다. 이후에 왕건이 마침내 蜀王을 僭稱하며 開國하였다. 王衍이 패망하자 莊宗이 孟知祥에게 서쪽으로 오도록 명하여 역시 成都尹 劍南西川節度副大使가 되어 蜀을 지켰다. 그렇다면 성도는 唐나라 말엽부터 五代를 거치도록 다시 익주라고 이르지 않은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바로 옛 촉군 성도 지역이고 옛 익주는 실제로 이곳에 있지 않은데 지금 결국 익주라고 부르는 것은 안 될 듯하다.[今按成都 唐初雖嘗有益州之名 尋卽改爲蜀郡 自後遂升爲府 亦嘗建爲南京 後復爲府 卽不復有益州之稱 唐末王建旣行蜀 大順二年十月 唐以建爲檢校司徒成都尹 其後建遂以蜀王 僭號開國 衍旣破亡 而莊宗命孟知祥西來 亦爲成都尹劍南西川節度副大使守蜀 然則成都自唐末歷五代 不復謂之益州 況此正古蜀郡成都之地 而古益州實不在此 今遂呼爲益州 恐未可也]”라고 하였고, 그 주석에 “살펴보건대, 成都를 益州라고 일컬은 것은 歐陽脩의 ≪新五代史≫가 薛居正의 ≪舊五代史≫의 착오를 답습한 데서 비롯한 것이다.[案稱成都爲益州 歐陽史係仍薛史之誤]”라고 하였다.
역주15 以妻母爲託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살펴보건대, ‘妻母’는 薛居正의 ≪舊五代史≫를 따라 ‘母妻’가 되어야 한다.[按妻母宜從薛史作母妻]”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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