李嚴
은 幽州人也
니 初名讓坤
이라 事劉守光爲刺史
러니 後事莊宗爲
하다 嚴爲人明敏多藝能
하야 習騎射
하고 頗知書而辯
이라
三年
에 使于蜀
하야 爲王衍陳唐興復功德之盛
할새 音辭淸亮
하니 蜀人聽之皆悚動
이라
衍樞密使
召嚴置酒
하고 從容問中國事
하니 嚴對曰 前年
에 天子建大號于鄴宮
하고 自鄆趨汴
하야 定天下不旬日
이요 而梁之降兵
이 猶三十萬
이라
東漸于海하고 西極甘涼하며 北懾幽陵하고 南踰閩嶺하니 四方萬里가 莫不臣妾이라
而
가 承累世之彊
하고 이 恃先朝之舊
호되 皆遣子入侍
하고 稽首稱藩
이라
至于荊湖吳越이 修貢賦하고 效珍奇하야 願自比于列郡者하야는 至無虛月이라
天子方懷之以德하고 而震之以威하시니 天下之勢가 不得不一也라하다
光嗣曰 荊湖吳越은 非予所知어니와 若鳳翔은 則蜀之姻親也라 其人反覆하니 其可信乎아
又聞契丹日益彊盛호니 大國其可無慮乎아하다 嚴曰 契丹之彊이 孰與僞梁고하니
光嗣曰 比梁差劣耳
라하다 嚴曰 唐滅梁
이 如拉朽
어든 況其不及乎
아 唐兵布天下
하니 發一鎭之衆
하야 可以滅
使無類
라
然而天生四夷하야 不在九州之內하니 自前古王者로 皆存而不論은 蓋不欲窮兵黷武也라하다 蜀人聞嚴應對하고 愈益奇之하니라
是時에 蜀之君臣이 皆庸暗而恃險自安하야 窮極奢僭이라 嚴自蜀還하야 具言可取之狀하다
初
에 莊宗遣嚴以名馬入蜀
하야 市珍奇以充後宮
이어늘 而蜀法嚴禁以奇貨出
하고 其非奇物而出者
를 名曰
이라
莊宗聞之
하고 大怒曰 物歸中國
을 謂之
라하니 王衍其能免爲入草人乎
아하고 於是決議伐蜀
하다
冬
에 魏王繼岌西伐
할새 하고 與康延孝以兵五千先行
하니 所過州縣
이 皆迎降
이라
延孝至漢州하니 王衍告曰 得李嚴來하면 卽降이라하니 衆皆謂伐蜀之謀自嚴始라 而衍怨嚴深하니 不宜往이라하다
嚴聞之喜
하고 라 衍見嚴
하고 하고 卽日以蜀降
하다 嚴還
에 明宗以爲泗州防禦使
하고 客省使如故
라
其後에 孟知祥倔彊於蜀이어늘 安重誨稍裁抑之라가 思有以制知祥者러니 嚴乃求爲西川兵馬都監하다 將行에 其母曰 汝前啓破蜀之謀하니 今行은 其以死報蜀人矣라하야늘 嚴不聽하다 初에 嚴與知祥同事莊宗이러니 時知祥爲中門使라 嚴嘗有過어늘 莊宗怒甚하야 命斬之러니 知祥戒行刑者少緩하라하고 入白莊宗曰 嚴小過라 不宜以喜怒殺人이니 恐失士大夫心이라하다 莊宗怒稍解하야 命知祥監笞嚴二十而釋之하다 知祥雖與嚴有舊恩이나 而惡其來요 蜀人聞嚴來하고 亦皆惡之라 嚴至에 知祥置酒하고 從容問嚴曰 朝廷以公來邪아 公意自欲來邪아하니 嚴曰 君命也라 知祥發怒曰 天下藩鎭이 皆無監軍이어늘 安得爾獨來此리오 此乃孺子熒惑朝廷爾라하고 卽擒斬之어늘 明宗不能詰也라 知祥由此遂反하다
李嚴은 幽州 사람이니 初名은 讓坤이다. 劉守光을 섬겨 刺史가 되었는데 뒤에 唐 莊宗을 섬겨 客省使가 되었다. 이엄은 사람됨이 明敏하고 재주가 많아 말타기와 활쏘기에 익숙하였고 자못 글을 알고 말재주가 있었다.
同光 3년(925)에 李嚴이 蜀나라에 사신 가서 王衍에게 唐나라를 부흥시킨 功德의 성대함을 진술할 때 말소리가 깨끗하고 또랑또랑하니 蜀나라 사람들이 그 소리를 듣고는 모두 두려워하고 놀랐다.
왕연의 樞密使 宋光嗣가 이엄을 불러 주연을 베풀고 조용히 中國의 일을 물으니, 이엄이 대답하기를 “지난해에 天子께서 鄴都의 궁전에서 大號(나라)를 세우고 鄆州에서 汴州로 내달려 天下를 평정하는 데 열흘이 채 못 되었고 梁나라의 투항한 병사들이 30만이나 되었습니다.
동쪽으로 바다에 닿았고 서쪽으로 甘州‧涼州까지 다다랐으며 북쪽으로 幽陵을 懾服시켰고 남쪽으로 閩嶺을 넘으니, 사방 만 리의 강토에서 唐나라에 臣服하지 않는 이가 없었습니다.
淮南 楊氏가 누대에 걸친 강대함을 이어받고 鳳翔 李公이 앞선 조정의 舊臣임을 믿으면서도 모두 아들을 보내 대궐에 들어와 모시고 머리를 조아리며 藩臣을 자처하였습니다.
荊‧湖‧吳越이 貢賦를 올리고 珍奇를 바쳐 스스로 郡縣으로 간주되기를 원한 데 이르러서는 한 달도 거르지 않았습니다.
천자께서 지금 恩德으로 그들을 품어주고 威嚴으로 그들을 두렵게 하시니 천하의 형세가 통일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송광사가 말하기를 “荊‧湖‧吳越은 내가 알 바가 아니거니와 봉상의 경우에는 우리 蜀나라의 姻戚입니다. 이 사람들은 마음을 쉽게 뒤바꾸니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또 契丹이 날로 더욱 彊盛해진다 하니 大國인 唐나라가 근심이 없을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이엄이 말하기를 “거란의 강성함이 僞梁(後梁)과 비교할 때 누가 더합니까?”라고 하니,
송광사가 말하기를 “梁나라와 비교할 때 거란이 조금 못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엄이 말하기를 “唐나라가 梁나라를 멸망시킨 것이 마치 썩은 나무를 꺾는 것과 같았는데 하물며 梁나라만 못한 거란이겠습니까? 唐나라 군대가 천하에 포진해 있으니 한 鎭의 군사를 출동하여 오랑캐 거란을 멸망시켜 그들의 씨를 말려버릴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하늘이 四夷를 낳아 九州의 안에 있지 않게 하니 前古의 王者로부터 이후로 모두 그들을 살려두고 간섭하지 않았던 것은 武力을 다 써서 전쟁하려 하지 않아서입니다.”라고 하였다. 蜀나라 사람들이 이엄이 應對하는 말을 듣고 더욱 그를 비범하게 여겼다.
이때에 蜀나라의 君臣들이 모두 용렬하고 우매하여 險固한 지형을 믿고 스스로 안전하게 여기면서 사치하고 참람함이 극에 달했다. 李嚴이 蜀나라에서 돌아와 蜀을 취할 수 있는 상황을 자세히 갖추어 아뢰었다.
당초에 莊宗이 이엄을 보내면서 名馬를 가지고 蜀에 들어가 팔아 珍奇한 보물을 사서 後宮들에게 나눠주게 하였는데, 蜀나라의 법률에 진기한 財貨를 가지고 劍門을 나가는 것을 嚴禁하였고 진기한 물품이 아닌 것을 내보내는 것을 ‘入草物’이라고 불렀다.
이로 말미암아 이엄이 얻은 것 없이 돌아오면서 단지 황금 200兩, 地衣, 毛布 따위만 가지고 왔다.
장종이 이를 듣고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中國으로 오는 물건을 ‘入草’라 한다 하는데 王衍이 入草人이 됨을 면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蜀나라를 정벌하기로 결정하였다.
겨울에 魏王 李繼岌이 서쪽으로 정벌할 때 李嚴을 三川招撫使로 삼고 康延孝와 함께 군사 5천을 거느리고 먼저 가니 지나가는 州縣마다 모두 맞이하며 투항하였다.
강연효가 漢州에 이르니 王衍이 고하기를 “이엄이 나에게 오면 곧바로 항복할 것이다.”라고 하니, 사람들이 모두 蜀 땅을 정벌하려는 계책이 이엄에게서 시작되었으므로 왕연이 이엄을 몹시 원망하고 있으니 이엄이 가서는 안 된다고 하였다.
이엄이 이 말을 듣고 기뻐하고는 곧장 말을 달려 益州로 들어갔다. 왕연이 이엄을 보고 자신의 妻와 모친을 부탁하고서 당일 바로 蜀 땅을 가지고 항복하였다. 이엄이 돌아오자 明宗이 그를 泗州防禦使로 삼고 客省使는 그대로 맡게 하였다.
이후에 孟知祥이 蜀에서 강경하게 버티거늘 安重誨가 조금씩 그를 억제하다가 맹지상을 제압할 사람을 찾으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李嚴이 이에 西川兵馬都監이 되기를 청하였다. 이엄이 출발할 때 그의 모친이 말하기를 “네가 앞서 蜀을 무너뜨릴 계책을 말하였으니 지금 가면 죽음으로써 蜀 사람들에게 되갚음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엄이 듣지 않았다. 당초에 이엄이 맹지상과 함께 莊宗을 섬겼는데 그 당시 맹지상은 中門使였다. 이엄이 일찍이 잘못한 일이 있자 장종이 몹시 노하여 그를 참수하라고 명하였는데, 맹지상이 형벌을 집행하는 자에게 조금 늦추어달라 당부하고 들어가 장종에게 아뢰기를 “이엄의 잘못은 작은 일입니다. 喜怒의 감정을 가지고 사람을 죽여서는 안 되니 士大夫들의 마음을 잃을까 염려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은 노여움이 조금 풀려 맹지상에게 명하여 이엄에게 笞刑 20대를 때리는 것을 감독하고 풀어주도록 하였다. 맹지상이 비록 이엄과 묵은 恩義가 있었으나 그가 蜀으로 오는 것을 싫어하였고, 蜀 사람들도 이엄이 온다는 소식을 듣고 모두 그를 미워하였다. 이엄이 이르자 맹지상이 酒宴을 베풀고 조용히 이엄에게 묻기를 “朝廷에서 공을 보내 오도록 한 것인가? 공의 뜻으로 스스로 오고자 한 것인가?”라고 하니, 이엄이 말하기를 “임금의 명입니다.”라고 하였다. 맹지상이 노하여 말하기를 “天下의 藩鎭들이 모두 監軍이 없거늘 어찌 그대 혼자만 이곳에 올 수 있단 말인가? 이는 바로 어린 네놈이 조정을 현혹시킨 것일 뿐이다.”라고 하고, 곧바로 그를 잡아 참수하였는데 明宗이 이에 대한 책임을 묻지 못하였다. 맹지상이 이로부터 마침내 반란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