康義誠
은 字信臣
이니 三部落人也
라 以騎射事晉王
이러니 莊宗時
에 爲突騎指揮使
하다
從明宗討趙在禮요 至魏而軍變에 義誠前陳莊宗過失하고 勸明宗南嚮이러라
明宗卽位
에 遷捧聖指揮使
하고 하다 從破朱守殷
하야 遷侍衛親軍馬步軍都指揮使
하고 領河陽三城節度使
하다
出爲山南東道節度使하고 復爲親軍都指揮使하고 領河陽하야 加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秦王從榮素驕하야 自爲河南尹으로 典六軍하야 拜大元帥하니 唐諸大臣이 皆懼禍及하야 思自脫이로되 獨義誠心結之하야 遣其子事秦王府하다
明宗病커늘 從榮謀以兵入宮하니 唐大臣朱弘昭馮贇等이 皆以爲不可어늘 而義誠獨持兩端이라
從榮已擧兵
하야 至
한대 弘昭等入
하야 以反白
하니 明宗涕泣
하야 召義誠
하야 使自處置
어늘 而義誠卒不出兵
이라
馬軍指揮使朱弘實이 以兵擊從榮하니 從榮敗走라가 見殺하다
三司使孫岳嘗爲馮贇言從榮必敗之狀하니 義誠聞而不悅이러니 及從榮死하야 義誠始引兵入河南府하야 召岳檢閱從榮家貲하다
岳至에 義誠乘亂하야 使人射之하니 岳走至通利坊見殺이어늘 明宗不能詰하다
義誠已殺岳하고 又以從榮故로 與弘實有隙이라 愍帝卽位에 弘實常以誅從榮功自負어늘 義誠心益不平이라
潞王從珂反鳳翔커늘 王思同率諸鎭兵圍之라 興元張虔釗兵叛降從珂하니 思同走하고 諸鎭兵皆潰하다
愍帝大怒하야 謂朱弘昭等曰 朕新卽位라 天下事皆出諸公이라
然於事
에 未有失節
이러니 諸公以大計見迫
하야 不能獨違
일새 事一至此
하니 何方轉禍
오
吾當率左右하야 往迎吾兄하야 遜以位니 苟不吾信이면 死其所也라하다
弘昭等惶恐不能對어늘 義誠前曰 西師驚潰는 主將怯耳라
今京師兵尙多하니 臣請盡將以西하야 扼關而守하야 招集亡散하야 以爲後圖하소서하다
愍帝以爲然하고 幸左藏庫하야 親給將士人絹二十匹錢五千하다 是時에 明宗山陵未畢하야 帑藏空虛하다
軍士負物揚言曰 到鳳翔에 更請一分이라 朱弘實見軍士無鬪志而義誠盡將以西하고
疑其有二心하야 謂義誠曰 今西師小衂이어늘 而無一騎東者하니 人心可知라
不如以見兵守京師以自固니 彼雖幸勝이라도 特得虔釗一軍耳라 諸鎭之兵在後하니 其敢徑來邪아하니
義誠怒曰 如此言인댄 弘實反矣라하다 弘實曰 公謂誰欲反邪아하니 其聲厲而聞이라
愍帝召兩人訊之하니 兩人爭於前하야 帝不能決이러니 遂斬弘實하고 以義誠爲招討使하야 悉將禁軍以西하다
愍帝奔衛州
하다 義誠行至新安
하야 降于從珂
하다 元年四月
에 斬于興敎門外
하고 夷其族
하다
嗚呼라 五代爲國은 興亡以兵이로되 而其軍制는 後世無足稱焉이요 惟侍衛親軍之號는 今猶因之而甚重하니 此五代之遺制也라
然原其始면 起微矣라가 及其至也하야 可謂盛哉인저 當唐之末하야 方鎭之兵多矣라
凡一軍有指揮使一人하야 而合一州之諸軍하고 又有馬步軍都指揮使一人하니 蓋其卒伍之長也라
自梁以宣武軍建國으로 因其舊制하야 有在京馬步軍都指揮使러니 後唐因之요 至明宗時하야 始更爲侍衛親軍馬步軍都指揮使라
當是時
하야 天子自有六軍諸衛之職
하야 六軍有統軍
하고 諸衛有將軍
하며 而又以大臣宗室一人
으로 六軍諸衛事
하니 此朝廷大將天子國兵之舊制也
라
而侍衛親軍者
는 天子自將之私兵也
니 推其名號
면 可知矣
라 將
이면 則都指揮使乃其卒伍之都長耳
라
然自漢周以來
로 其職益重
하야 하야 凡朝廷大事
를 皆決侍衛獄
이라
是時에 史弘肇爲都指揮使하야 與宰相樞密使로 竝執國政호되 而弘肇尤專任이라가 以至於亡이라
然是時에 方鎭各自有兵하야 天子親軍도 猶不過京師之兵而已러니 今方鎭名存而實亡하고
六軍諸衛도 又益以廢하야 朝廷無大將之職하고 而擧天下內外之兵이 皆屬侍衛司矣니 則爲都指揮使者는 其權豈不益重哉아
하고 其後又有殿前都指揮使
하니 亦親軍也
로되 皆不見其更置之始
라 今天下之兵
은 皆分屬此兩司矣
라
康義誠은 字가 信臣이니 代北 三部落 사람이다.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晉王(李克用)을 섬겼는데 唐 莊宗 때에 突騎指揮使가 되었다.
唐 明宗을 따라 趙在禮를 토벌하였고 魏州에 이르러 군대가 변란을 일으켰을 때 강의성이 장종의 過失을 앞에 나와 진술하고 明宗에게 남쪽으로 진군할 것을 권유하였다.
명종이 즉위하자 捧聖指揮使로 승진하고 汾州刺史를 맡았다. 명종을 따라 朱守殷을 물리쳐 侍衛親軍馬步軍都指揮使로 승진하고 河陽三城節度使를 맡았다.
외직으로 나가 山南東道節度使가 되고 다시 親軍都指揮使가 되고 河陽을 맡고서 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였다.
秦王 李從榮이 평소 교만하여 河南尹이 되고 나서부터 六軍을 관장하면서 大元帥에 배수되니 唐의 大臣들이 모두 禍가 미칠까 두려워하면서 스스로 벗어날 길을 생각하였는데도, 유독 康義誠만은 마음속으로 그와 결탁하고자 하여 자기 아들을 보내 秦王府를 섬겼다.
明宗이 병이 들자 이종영이 군대를 거느리고 궁궐로 진입할 것을 모의하니 唐의 大臣 朱弘昭‧馮贇 등이 모두 안 된다고 하였는데 강의성만 홀로 두 생각을 가졌다.
이종영이 이미 擧兵하여 天津橋에 이르자 주홍소 등이 궁궐로 들어가 이종영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아뢰니, 명종이 눈물을 흘리면서 강의성을 불러 스스로 이 일을 처리하게 하였는데 강의성이 끝내 출병하지 않았다.
馬軍指揮使 朱弘實이 군대를 거느리고 이종영을 공격하니 이종영이 敗走하다가 피살되었다.
三司使 孫岳이 예전에 馮贇에게 李從榮이 반드시 실패하고 말 정황을 말하니 康義誠이 이를 듣고 기뻐하지 않았는데, 이종영이 죽고 나자 강의성이 비로소 군대를 이끌고 河南府로 들어가 손악을 불러 이종영의 家財를 검사하였다.
손악이 이르자 강의성이 난리를 틈타 사람을 시켜 그를 화살로 쏘니 손악이 도망가 通利坊에 이르러 피살되었는데 明宗이 강의성에게 책임을 묻지 못하였다.
강의성은 이미 손악을 죽인 데다 이종영에 대한 일 때문에 朱弘實과 틈이 있었다. 愍帝가 즉위하자 주홍실이 항상 이종영을 誅殺한 공로로 자부하니 강의성이 내심 더욱 불만을 품었다.
潞王 李從珂가 鳳翔에서 반란하자 王思同이 각 鎭의 군대를 거느리고 포위하였다. 興元 張虔釗의 군대가 반란하여 이종가에게 투항하니 왕사동이 달아나고 각 鎭의 군대가 모두 흩어졌다.
愍帝가 크게 노하여 朱弘昭 등에게 이르기를 “朕이 막 즉위한 터라 天下의 일이 모두 공들에 의해 결정되고 있다.
그러나 짐이 형님을 섬기는 일에 있어 잘못한 일이 없었는데 공들이 국가의 大計를 구실로 짐을 다그쳐 짐이 혼자 어길 수가 없었기에 일이 이러한 지경에까지 이르고 말았으니 무슨 방법으로 禍를 돌릴 수 있겠는가.
짐은 응당 좌우의 신하를 거느리고 우리 형님을 가서 맞이하여 讓位할 것이니 만일 형님이 짐을 믿지 않는다면 짐은 거기서 죽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홍소 등이 황공하여 대답하지 못하고 있거늘 康義誠이 앞에 나와 말하기를 “서쪽의 군대가 놀라 흩어진 것은 主將이 겁을 집어먹어서일 뿐입니다.
지금 京師의 군대가 아직 많으니 신은 청컨대 전부 거느리고 서쪽으로 出征하여 關門을 잡아 지키면서 도망가고 흩어진 군사들을 불러 모아 후일을 도모하소서.”라고 하였다.
민제가 이 말을 옳게 여기고 左藏庫로 가서 將士들에게 인당 비단 20匹, 錢 5천을 직접 지급하였다. 이때 明宗의 山陵의 일을 아직 마치지 못하여 국고가 텅 비어 있었다.
군사들이 받은 물건을 짊어지고 크게 말하기를 “鳳翔에 도착하면 다시 一分을 더 주시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朱弘實은 군사들이 투지가 없는데도 강의성이 전부 거느리고 서쪽으로 출정하는 것을 보고,
그가 두 마음이 있는가 의심하여 강의성에게 이르기를 “지금 서쪽의 군대가 조금 패했거늘 騎兵 하나도 동쪽으로 오는 자가 없으니 人心을 알 만합니다.
현재 있는 군대를 가지고 京師를 지키며 굳게 버티는 것만 못하니, 저들이 비록 요행히 이기더라도 다만 張虔釗의 군대 하나만 이기는 데 그칠 뿐입니다. 각 鎭의 군대가 후방에 있으니 그가 감히 곧바로 오겠습니까?”라고 하니,
강의성이 노하여 말하기를 “이 말대로라면 주홍실 당신이 반란하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주홍실이 말하기를 “公은 누구에게 반란하려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까?”라고 하니 그 소리가 사나워 황제에게 들렸다.
민제가 두 사람을 불러 물으니 두 사람이 황제의 면전에서 다투어 황제가 결정하지 못하였는데, 결국 주홍실을 斬首하고 강의성을 招討使로 삼아 禁軍을 모두 거느리고 서쪽으로 출정하게 하였다.
愍帝가 衛州로 달아났다. 康義誠이 진군하여 新安에 이르러서 李從珂에게 투항하였다. 淸泰 元年(934) 4월에 강의성을 興敎門 밖에서 斬首하고 滅族시켰다.
오호라! 五代 때에 국가는 군대에 의해 興亡이 결정되었는데 그 군사 제도는 후세에 족히 일컬을 만한 것이 없고, 다만 侍衛와 親軍의 명칭은 지금까지도 그대로 쓰면서 매우 중시하니 이것이 五代의 遺制이다.
그렇지만 그 근원을 따져보면 처음에는 미약하였다가 그 지극함에 이르러서 盛大해졌다고 할 만하다. 唐나라 말엽이 되자 지방 藩鎭[方鎭]의 군대가 많아졌다.
대개 1軍에 指揮使 1人을 두고서 1州의 각 軍을 합하고 또 馬步軍都指揮使 1人을 두니 이는 부대의 隊長이다.
梁나라가 宣武軍을 가지고 建國하고부터 그 옛 제도를 인습하여 在京馬步軍都指揮使를 두었는데 後唐이 이 제도를 인습하였고, 明宗(後唐) 때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고쳐 侍衛親軍馬步軍都指揮使로 삼았다.
이때에 天子가 직접 六軍‧諸衛의 직무를 두어 육군에 統軍을 두고 제위에 將軍을 두는 한편 다시 大臣宗室 1人으로 육군‧제위의 일을 관장하게 하니 이것이 조정의 大將, 천자의 國兵의 옛 제도이다.
시위와 친군은 천자가 직접 통솔하는 私兵이었으니 그 명칭을 고찰해보면 알 수가 있다. 천자가 직접 장수가 되면 도지휘사는 바로 그 부대의 대장일 뿐이었다.
그러나 後漢‧後周 이래로 그 직책이 더욱 중요해져서 후한은 侍衛司獄을 두어 무릇 조정의 大事를 모두 侍衛獄에서 결정하였다.
이때에 史弘肇가 도지휘사로 있으면서 宰相‧樞密使와 함께 國政을 관장하였으나, 사홍조가 더욱 專權을 행사하다가 멸망하는 데 이르렀다.
俗語에 이르기를 “작은 물을 끊지 않으면 흘러 모여 江河가 되고, 작은 불씨를 끄지 않으면 활활 타오르는 것을 어찌하겠는가.”라고 하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때에는 方鎭이 저마다 자기 군대를 두어 천자의 친군조차도 京師의 군대에 불과할 뿐이었는데, 지금은 방진이 명칭만 있고 실질은 없으며
육군‧제위도 날로 더욱 폐지되어 조정에 대장이라는 직책이 없고 온 天下 內外의 군대가 모조리 侍衛司에 예속되었으니 도지휘사가 된 자는 그 권세가 어찌 더욱 크지 않겠는가.
친군이라는 명칭은 명종에게서 시작되고 이후 다시 殿前都指揮使를 두니 역시 친군이었으나 모두 그 변경해 설치한 초기의 정황을 알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天下의 군대는 모두 이 두 司에 分屬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