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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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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張憲 字允中이니 晉陽人也 爲人沈靜寡慾하고 少好學하며 素知其文辭하야 以爲天雄軍節度使掌書記하다
莊宗卽位 拜工部侍郞租庸使하고 遷刑部侍郞判吏部銓東都副留守하다 憲精於吏事하야 甚有能政이라
莊宗幸하니 定州來朝 莊宗命憲治하고 與都擊鞠하다 莊宗建號於東都하고 以鞠場爲卽位壇이라
於是憲言 卽位壇 王者所以興也 至今皆在하니 不可毁라하고 乃別治宮西爲鞠場이라
場未成 莊宗怒하야 命兩亟毁壇以爲場하니 憲退而歎曰 此不祥之兆也라하다
北伐契丹할새 取魏鎧仗以給軍한대 有細鎧五百 憲遂給之而不以聞이라
하다 又問憲庫錢幾何오한대 憲上庫簿有錢三萬緡이라
莊宗益怒하야 謂其嬖伶史彦瓊曰 我與群臣飮博 須錢十餘萬이어늘 而憲以故紙紿我로다
我未渡河時 庫錢常百萬緡이러니 今復何在오하다 彦瓊爲憲解之어늘 乃已하다
伐蜀할새 薦憲可任爲相이어늘 而宦官伶人不欲憲在朝廷이라
樞密承旨段徊曰 宰相 在天子面前하니 事有非是라도 尙可改作이어니와 一方之任 苟非其人이면 則爲患不細
憲材誠可用하니 不如任以一方이라하야늘 乃以爲太原尹北京留守하다
作亂한대 憲家在魏州 在禮善待其家하고 遣人以書招憲하니 憲斬其使하고 不發其書而上之하다
莊宗遇弑하고 明宗入京師어늘 太原猶未知러니 而永王存霸奔于太原이라
左右告憲曰 今魏兵南嚮하고 主上存亡未可知 存霸之來 無詔書하고 而所乘馬斷其鞦하니 豈非戰敗者乎 宜拘之以俟命이라하니
憲曰 吾本書生이라 無尺寸之功이로대 而人主遇我甚厚하니 豈宜懷二心以幸變 第可與之俱死爾로다하다
憲從事張昭遠 敎憲奉表明宗以勸進이어늘 憲涕泣拒之하다
已而 存霸削髮하고 見北京巡檢符彦超하야 願爲僧以求生이어늘 彦超麾下兵大譟하야 殺存霸하다 라가 亦見殺하다
嗚呼 予於이라 鞏廷美楊溫之死 予旣已哀之러니 至於張憲之事하얀 尤爲之痛惜也
予於舊史 考憲事實호니 而永王存霸符彦超 與憲傳所書 始末皆不同하야 莫得而考正하니 蓋方其變故倉卒之時 傳者失之耳
然要其大節 亦可以見也 憲之志 誠可謂忠矣 當其不顧其家하고 絶在禮而斬其使하며 涕泣以拒昭遠之說 其志甚明이요
至其欲與存霸俱死라가 及存霸被殺하야 反棄太原而出奔하얀 然猶不知其心果欲何爲也 予亦以爲不然이라
予之於憲 固欲成其美志로대 而要在憲失其官守而其死不明이라 故不得列于死節也


03. 張憲傳記
張憲允中이니 晉陽 사람이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조용하며 욕심이 적었고 소싯적부터 학문을 좋아하였으며 을 잘 타고 술을 잘 마셨다. 莊宗이 평소 장헌이 문장에 뛰어나다는 것을 알고서 天雄軍節度使掌書記로 삼았다.
琴
장종이 즉위하자 工部侍郞 租庸使拜受되고 刑部侍郞 判吏部銓 東都副留守로 승진하였다. 장헌은 吏務에 밝아 정사에 매우 능하였다.
莊宗東都에 행차하니 定州王都가 와서 朝會하였다. 장종이 張憲에게 명하여 擊鞠場을 만들게 하고 왕도와 함께 격국을 하였다. 당초에 장종이 동도에서 建國하여 황제가 되고 격국장에 卽位壇을 세웠다.
擊鞠擊鞠
〈그런데 이제 와서 그것을 헐고 다시 격국장으로 만들려고 하자〉 이에 장헌이 말하기를 “즉위단은 王者興起한 곳입니다. 나라의 鄗南나라의 繁陽壇이 지금까지도 모두 남아 있으니, 즉위단을 헐어서는 안 됩니다.”라고 하고는, 별도로 궁궐 서쪽에 격국장을 조성하였다.
격국장을 다 짓기 전에 장종이 진노하여 두 虞候에게 명하여 서둘러 즉위단을 헐고 격국장을 만들게 하니, 장헌이 물러나와 탄식하며 말하기를 “이는 상서롭지 못한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당초에 明宗이 북쪽으로 契丹을 정벌하면서 魏州의 갑옷과 병장기들을 취하여 軍中에 지급하였는데, 細甲 오백 벌을 張憲이 군중에 지급하고서는 〈莊宗에게〉 보고하지 않았다.
장종이 위주에 당도하여 크게 진노하여 장헌을 꾸짖어 빨리 말을 타고 가서 가져오게 했는데 좌우에서 諫言하자 그만두었다. 또 장헌에게 倉庫金錢이 얼마나 되는지 물었는데, 장헌이 창고의 장부에 3 이 있다고 아뢰었다.
장종이 더욱 노하여 총애하는 伶人 史彦瓊에게 이르기를 “내가 신하들과 술 마시고 유희를 즐기려면 10餘萬 이 필요하거늘, 장헌이 묵은 종이를 가지고 나를 속이는구나.
내가 河水를 건너기 전에 창고의 금전이 항상 100 이었는데 지금 다 어디로 갔단 말인가?”라고 하였다. 사언경이 장헌을 위해 해명하고서야 문책을 그쳤다.
郭崇韜을 정벌하면서 재상의 직임을 맡을 만하다고 張憲을 추천하였는데, 宦官伶人들은 장헌을 조정에 두고 싶어 하지 않았다.
樞密承旨 段徊가 말하기를 “재상은 천자의 面前에 있으니, 잘못하는 일이 있더라도 오히려 고칠 수가 있거니와, 한 방면을 맡는 직임은 진실로 적임자가 아니면 그 우환이 적지 않습니다.
장헌의 재주가 진실로 쓸 만하니 한 방면을 맡기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거늘, 이에 太原尹 北京留守로 삼았다.
趙在禮가 반란을 일으켰는데 張憲의 가솔들이 魏州에 있었다. 조재례가 장헌의 가솔들을 잘 대우하고 사람을 보내어 書札로 장헌을 부르니, 장헌은 서찰을 가져온 使者의 목을 베고 서찰은 열어보지도 않고서 황제에게 올렸다.
莊宗이 시해당하고 明宗京師에 들어왔는데도 太原에서는 오히려 그 사실을 알지 못했는데 永王 李存霸가 태원으로 달아나 들어왔다.
좌우에서 장헌에게 고하기를 “지금 의 병사들은 남쪽으로 향하고 황제의 生死는 알 수 없습니다. 이존패가 왔을 때 詔書도 없었고 타고 온 말은 밀치가 끊어져 있었으니 어쩌면 패전한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를 구금하고서 명을 기다려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헌이 말하기를 “나는 본디 書生으로 조그마한 공도 없었는데 황제께서 나를 매우 두텁게 대우해주셨으니, 두 마음을 품고서 변란을 요행으로 여기는 것이 어찌 가당키나 하겠는가. 그저 그와 함께 죽을 뿐이다.”라고 하였다.
장헌의 從事官 張昭遠이 명종에게 表文을 올려 〈황제의 자리에〉 나아갈 것을 권하라고 장헌에게 조언하거늘, 장헌이 울면서 거절하였다.
얼마 뒤 이존패는 자신의 머리를 깎고서 北京巡檢 符彦超를 만나 승려가 되어 목숨을 보전하기를 원하였는데, 부언초의 휘하 병사들이 크게 소란을 일으키며 이존패를 살해하였다. 장헌은 沂州로 달아나다가 역시 피살되었다.
오호라! 나는 죽음으로 節操를 지킨 선비 세 사람을 얻었고 세 사람을 잃었다. 鞏廷美楊溫의 죽음을 내가 이미 애도하였는데, 張憲의 일에 이르러서는 더욱 가슴 아프고 애석해하였다.
내가 ≪舊五代史≫에서 장헌의 事實을 고찰해보니 永王 李存霸符彦超의 사실이 〈張憲傳〉에 적힌 내용과는 그 始末이 모두 달라 고찰하여 바로잡을 수 없었다. 대개 바야흐로 변고가 일어나 다급할 때에 傳述하는 사람이 잘못 기록한 것일 터이다.
그러나 요컨대 그 大節은 또한 알 수 있으니, 장헌의 뜻은 진실로 충성스러웠다고 이를 만하다. 그 가솔들을 돌아보지 않고 趙在禮를 사절하고서 그 사신의 목을 베고, 울면서 張昭遠의 말을 거절하였을 때에 그 뜻이 매우 분명하였다.
이존패와 함께 죽고자 하다가 이존패가 피살되자 도리어 太原을 버리고 달아난 때에 이르러서는, 정말이지 그 마음이 과연 무엇을 하고자 했던 것인지 알지 못하겠으나, ≪구오대사≫에서 장헌이 을 버린 일 때문에 사형을 받았다고 적은 것은 또한 그렇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장헌에 대해서 그 아름다운 뜻을 〈잘 기술하여 그의 충절을〉 이루어주고 싶다. 그러나 요컨대 장헌이 성을 지키는 책무를 제대로 수행하지 못했고 그가 왜 賜死되었는지 분명하지 않으므로 〈死節傳〉에 넣지 못하였다.


역주
역주1 張憲傳 : 張憲(?~926 字가 允中으로 晉陽 사람이다. 진양은 오늘날의 太原으로 晉王으로 있다가 後唐을 개국한 河東의 군벌 莊宗 李存勖의 본거지이다. 이런 관계로 장헌은 이존욱을 섬겨 후당의 신하가 되었다.
장헌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69 〈唐書 第45 列傳21〉, 그리고 ≪新五代史≫ 卷28 〈唐臣傳 第16〉에 각각 실려 있다. ≪구오대사≫와 ≪신오대사≫의 열전을 비교해보면, 다른 경우와 마찬가지로 ≪신오대사≫의 기록에 축약이 많다. 이는 그 인물의 요점되는 부분만을 추려 勸懲과 褒貶의 목적을 극대화하려는 歐陽脩의 서술 경향이 반영된 것이다.
장헌은 吏務에 밝고 식견이 있어 장종의 신임을 받았으며 直言을 아끼지 않았다. 본 傳에 실린 卽位壇과 庫錢, 趙在禮의 반란에 대한 대처 등의 일화에서 그가 장종에게 충정을 아낌없이 바치고 國事를 위해 충실했음을 잘 알 수 있다. 이러한 주요 일화의 倂記는 장헌의 특징적인 면모를 잘 부각시켜 준다. 부침이 많고 王朝가 明滅하는 五代의 혼란한 시절에 마음을 변치 않고 군주에 대한 충성을 다한 장헌의 모습은 인상적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충정에도 불구하고 그는 〈死節傳〉에 수록되지 못하고 단지 〈唐臣傳〉에 수록되었을 뿐이다. 이는 그의 죽음에 대한 기록이 분명치 않기 때문인데, 이에 대해 구양수는 열전 말미의 史論에서 안타까움을 드러내면서 장헌의 최후와 관련된 인물인 李存霸와 符彦超의 사실이 ≪구오대사≫의 〈張憲傳〉의 기록과는 그 始末이 모두 달라 고찰하여 바로잡을 수 없었다고 기술하였다.
이는 ≪구오대사≫의 장헌의 열전에는 태원으로 도망쳐 온 인물이 이존패가 아닌 李存渥으로 기술되어 있는 반면, 부언초의 열전에는 明宗이 洛陽에 입성하자 이존패가 河東으로 도망쳐 와 부언초와 장헌을 살해하려고 모의하였으므로 부언초가 이 사실을 알고 이존패를 죽였고, 이를 들은 장헌이 城을 버리고 도망쳤다고 相異하게 기록된 사실을 가리킨 것이다.
이처럼 장헌이 죽음을 맞이할 당시의 기록이 분명하지 못하고, 그가 성을 버리고 도망친 이유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이 있는 관계로, 구양수는 그의 忠節을 表章하면서도 우선은 〈당신전〉에 수록한 것이다.
역주2 能鼓琴飮酒 : ≪舊五代史≫에 “琴을 잘 타고 술을 마시지 않았다.[善彈琴 不飮酒]”라고 한 것과는 차이가 있다.
역주3 莊宗 : 五代 때 後唐을 건국한 李存勖(885~926 廟號이다. 唐나라 말의 軍閥인 李克用의 아들로, 이극용이 죽으면서 화살 세 개를 주면서 “반드시 梁나라와 燕나라와 契丹에게 원수를 갚으라.”라고 말했다. 즉위한 뒤 북쪽으로 거란을 공격하고 연나라와 後梁을 정복하고는 화살을 太廟에 바쳤다. 923년에 稱帝하고, 후당을 건국한 뒤 洛陽에 도읍을 정했다. 나중에 정사를 멀리하고 방종하다가 寵臣 郭從謙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화살을 맞고 죽었다.
역주4 東都 : 보통 東都는 洛陽을 지칭하는 용어이다. 그러나 後唐은 開國할 때 낙양에 도읍하고 초기에는 鄴을 東京으로 삼았으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동도는 곧 魏州 鄴都이다. 이는 ≪舊五代史≫ 〈張憲列傳〉의 동일 기사에 “황제의 車駕가 鄴에 행차하였다.[車駕幸鄴]”라고 한 데서도 확인된다.
역주5 王都 : ?~929. 본래 이름은 劉雲郞으로 陘邑 사람이다. 五代 초기에 義武軍節度使 王處直의 의붓아들이 되었다가 왕처직이 李存勖을 배반하고 契丹과 내통하자 왕처직을 죽이고 이존욱에게 투항하였다. 이존욱이 자신의 아들 李繼岌을 왕도의 딸과 혼인시키고 왕도를 의무군절도사로 삼았는데, 明宗 李嗣源이 즉위한 뒤 왕도를 미워하여 처치하려 하자 後唐을 배반하고 거란에 붙었다가 이사원이 보낸 군대에게 定州를 함락당하고 가솔들과 함께 스스로 분신하여 죽었다.
역주6 鞠場 : 오늘날의 폴로 경기와 비슷한 擊鞠을 하기 위한 경기장이다. 격국은 말을 타고 공채로 공을 치는 경기이다.
역주7 漢鄗南 魏繁陽壇 : 鄗南은 後漢 光武帝가 즉위한 장소로 趙州 柏鄕縣에 있으며, 繁陽壇은 魏 文帝 曹丕가 漢 獻帝에게 禪讓받아 즉위할 때 許昌의 繁陽에 세운 禪位壇이다.(≪後漢書≫ 卷1 〈光武帝紀〉, ≪三國志≫ 卷2 〈文帝紀〉)
역주8 虞候 : 虞候의 관직은 시대마다 관장하는 직무가 같지 않은데, 五代 시절에는 황제를 親衛하는 군대의 고급 군관을 가리켰다.
역주9 明宗 : 五代 後唐의 2대 군주인 李嗣源(867~933 廟號이다. 본래는 胡人 출신으로 성씨도 없었고 이름만 邈佶烈이었는데, 李克用이 의붓아들로 삼고 성명을 하사하였다. 莊宗 李存勖의 뒤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차분하고 검소하여 정사를 잘 돌보았으나 여러 차례 무고하게 신하들을 誅殺하기도 했다. 와병 중에 秦王 李從榮이 난을 일으키자 분함을 이기지 못하고 죽었다.
역주10 取魏鎧仗以給軍……乃止 : 이 부분은 다소 생략이 있어 그 顚末을 자세히 알 필요가 있다. ≪舊五代史≫ 〈明宗紀〉의 내용에 근거하면, 다음의 곡절이 있다. 後唐 莊宗 3년 정월에 明宗이 병사를 이끌고 契丹을 정벌하러 가면서 鄴 땅을 지나게 되었는데, 업의 邑庫에는 황제 소유의 갑옷이 보관되어 있었다. 명종이 그 가운데 5백 벌을 가지고 정벌을 떠났다. 이해에 장종이 업에 행차하여 그 사실을 알고 매우 노여워하였으나 어찌할 도리가 없었다. 그러다가 명종이 자신의 長子를 北京內衙都指揮使로 삼아달라고 청하자, 장종이 좋아하지 않으면서 “軍政은 내 소관인데 어찌 자신의 아들을 위해 주청할 수 있단 말인가. 나의 細甲을 조칙도 받들지 않고 강제로 가지고 갔으니 그 뜻이 무엇인가?”라고 하고는, 留守 張憲에게 직접 가서 가져오도록 하였으나 좌우에서 諫言하여 그치게 되었다.
역주11 郭崇韜 : ?~926. 五代 때 代州 雁門 사람으로 字는 安時이다. 李存勖을 섬겨 中門副使가 되고 後梁을 멸망시키는 데 일등공신이었다. 侍中과 成德節度使를 역임하고 越國公에 봉해졌다. 항상 忠言을 아끼지 않았으며 魏王 李繼岌을 도와 前蜀을 멸망시켰다. 뒤에 宦官들의 모략으로 살해되었다. 본서 권5 〈郭崇韜傳〉 참조.
역주12 趙在禮 : 886?~947. 五代 後唐의 大臣으로 字는 幹臣이며 涿州 사람이다. 처음에 藩鎭의 劉仁恭을 섬겼다가 후에 李存勖에게 투항하여 魏博軍效節指揮使가 되었다. 후에 貝州의 戍卒 皇甫暉가 병사들을 선동하여 난을 일으켜 主將 楊仁晸을 죽이고 조재례를 겁박하여 주장으로 세우고서 鄴都를 공격하고 조재례를 魏博留後로 삼았다. 莊宗 이존욱이 慰撫하기도 하고 討伐하기도 하였으나 반군은 진정되지 않았고 결국 토벌하러 갔던 明宗 李嗣源이 도리어 반군들과 합세하여 군사를 이끌고 洛陽을 공격하는 바람에 혼란 중에 장종은 군관에게 피살당하였고, 명종이 즉위하여 조재례를 鄴都留守에 제수하였다. 後唐을 멸망시키고 後晉이 들어서자 후진에 벼슬하여 섬겼다. 후진이 契丹에 멸망당할 때 스스로 목을 메어 죽었다.
역주13 憲出奔沂州 : ≪五代史記纂誤補≫ 卷2에 “삼가 살펴보건대 ≪資治通鑑≫에는 ‘沂’가 ‘忻(흔)’으로 되어 있으니, ‘沂州’라고 한 이 부분은 薛居正의 ≪舊五代史≫의 오류를 반복한 것이다.[謹按通鑑沂作忻 此仍薛史之誤]”라고 하였다. ≪구오대사≫ 卷69 〈唐書 第45 列傳21〉에 “張憲이 처음 변란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沂州로 달아났다.[憲初聞有變 出奔沂州]”라고 하였으며, ≪자치통감≫ 卷275 〈後唐紀4〉에는 “장헌이 변란 소식을 듣고 忻州로 달아났다.[憲聞變出奔忻州]”라고 하였다. 沂州는 현재의 山東省 臨沂를 治所로 하던 곳이고, 忻州는 현재의 山西省 忻州市로 太原 북쪽에 있다.
역주14 死節之士 得三人而失三人焉 : ‘得三人’은 ≪新五代史≫ 〈死節傳〉에 실린 王彦章‧裴約‧劉仁贍을 말하고, ‘失三人’은 아래에 나오는 鞏庭美‧楊溫‧張憲을 말한다.
역주15 舊史書憲坐棄城而賜死 : ≪舊五代史≫ 권69 〈張憲傳〉에 “有司가 張憲이 성을 버린 죄를 탄핵하여 4월 24일에 晉陽의 千佛院에서 사사하였다.[有司糾其委城之罪 四月二十四日 賜死于晉陽之千佛院]”라고 기록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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