王朴은 字文伯이니 東平人也라 少擧進士하야 爲校書郞하야 依漢樞密使楊邠하다
邠與王章史弘肇等有隙하니 朴見漢興日淺하고 隱帝年少孱弱하야 任用小人이어늘 而邠爲大臣하야 與將相交惡하고 知其必亂하야 乃去邠東歸하다
鎭澶州
할새 朴爲節度掌書記
하고 世宗爲開封尹
하야 拜朴右拾遺
하고 爲推官
하다
世宗卽位
에 遷比部郞中
하야 獻平邊策曰 唐失道而失吳蜀
하고 晉失道而失幽幷
하니 觀所以失
由
면 知所以平
術
이라
當失之時하야 君暗政亂하고 兵驕民困하며 近者는 姦於內하고 遠者는 叛於外하며 小不制而至于僭하고 大不制而至于濫하야
平之之術은 在乎反唐晉之失而已니 必先進賢退不肖하야 以淸其時하고 用能去不能하야 以審其材하며
恩信號令하야 以結其心하고 賞功罰罪하야 以盡其力하며 恭儉節用하야 以豐其財하고
徭役以時하야 以阜其民하야 俟其倉廩實器用備人可用而擧之하소서
彼方之民이 知我政化大行하야 上下同心하고 力彊財足하고 人安將和하야 有必取之勢면 則知彼情狀者願爲之間諜이요 知彼山川者願爲之先導라
彼民與此民之心同이면 是與天意同이니 與天意同이면 則無不成之功이라
攻取之道는 從易者始라 當今惟吳易圖하니 東至海하고 南至江하야 可撓之地가 二千里라
從少備處로 先撓之하되 備東則撓西하고 備西則撓東이면 彼必奔走以救其弊라
奔走之間에 可以知彼之虛實과 衆之彊弱이니 攻虛擊弱하면 則所向無前矣리이다
勿大擧요 但以輕兵撓之면 彼人怯弱이라 知我師入其地하고 必大發以來應이라
數大發則民困而國竭하고 一不大發則我獲其利라 彼竭我利면 則江北諸州는 乃國家之所有也라
旣得江北이어든 則用彼之民하고 揚我之兵하여 江之南亦不難而平之也리니 如此則用力少而收功多라
得吳則
皆爲內臣
이요 可飛書而召之
라 如不至
어든 則四面幷進
하야 席捲而蜀平矣
요 吳蜀平
이면 幽可望風而至
라
라 不可以恩信誘
요 必須以強兵攻
이나 하야 不足以爲邊患
이니 可爲後圖
라
方今兵力精練하고 器用具備하며 群下知法하고 諸將用命하니 一稔之後에 可以平邊이라
臣은 書生也라 不足以講大事요 至于不達大體하고 不合機變하니 惟陛下寬之하소서하다
遷左諫議大夫知開封府事하고 歲中에 遷左散騎常侍하며 充端明殿學士하다
是時
에 世宗新卽位
에 銳意征伐
하야 已撓群議
하야 親敗
於高平
하고 歸而益治兵
하야 慨然有平一天下之志
라
數顧大臣問治道
하고 選文學之士
等二十人
하야 使作
하니 在選中
이라
而當時文士皆不欲上急於用武하야 以謂 平定僭亂은 在修文德以爲先이라한대
惟翰林學士陶穀竇儀와 御史中丞楊昭儉이 與朴皆言用兵之策하고 朴謂江淮爲可先取라
世宗雅已知朴이러니 及見其議論偉然하야 益以爲奇하야 引與計議天下事에 無不合일새 遂決意用之하다
顯德三年에 征淮할새 以朴爲東京副留守하고 還拜戶部侍郞樞密副使하고 遷樞密使하다 四年에 再征淮할새 以朴留守京師하다
世宗之時에 外事征伐而內修法度라 朴爲人明敏多材智하야 非獨當世之務요 至於陰陽律曆之法하야도 莫不通焉이라
顯德
年
에 詔朴校定
이어늘 乃削去近世
하고 設通經統三法
하야
하니 朴以謂十二律管互吹
하니 難得其眞
이라하야 乃依
爲律准
하야
以九尺之弦十三
으로 依管長短寸分設柱
하고 用七聲爲均
하니 而和
하다
朴性剛果하고 又見信於世宗하니 凡其所爲를 當時無敢難者나 然人亦莫能加也라
世宗征淮에 朴留京師하야 廣新城하고 通道路가 壯偉宏闊하니 今京師之制는 多其所規爲라
其所作樂은 至今用之不可變이요 其陳用兵之略은 非特一時之策이라
至言諸國興滅次第云 淮南可最先取요 幷必死之寇는 最後亡이라하더니 其後宋興하야 平定四方에 惟幷獨後服하니 皆如朴言이라
六年春
에 世宗遣朴行視
하야 作
한대 還過
第
하야 疾作
하야 仆于坐上
하야 舁歸而卒
하니 年五十四
러라
世宗臨其喪
하야 以
叩地
하고 大慟者數四
하고 贈侍中
하다
嗚呼라 作器者는 無良材而有良匠하고 治國者는 無能臣而有能君하나니 蓋材待匠而成하고 臣待君而用이라
故曰 治國을 譬之於奕하면 知其用而置得其處者勝이요 不知其用而置非其處者敗라
敗者는 臨棊하야 注目終日而勞心이나 使善奕者視焉하야 爲之易置其處則勝矣라
勝者所用은 敗者之棊也요 興國所用은 亡國之臣也라 王朴之材는 誠可謂能矣나 不遇世宗이런들 何所施哉아
世宗之時에 外事征伐하야 攻取戰勝하고 內修制度하야 議刑法定律曆하며 講求禮樂之遺文하니
所用者는 五代之士也라 豈皆愚怯於晉漢而材智於周哉아 惟知所用爾라
夫亂國之君은 常置愚不肖於上하야 而彊其不能하야 以暴其短惡하고 置賢智於下하야 而泯沒其材能하야 使君子小人으로 皆失其所而身蹈危亡이요
治國之君은 能置賢智於近하고 而置愚不肖於遠하야 使君子小人으로 各適其分而身享安榮하니
王朴은 字가 文伯이니 東平 사람이다. 젊은 나이에 進士試에 급제하여 校書郞이 되어 漢의 樞密使 楊邠의 휘하로 들어갔다.
그런데 양빈이 王章‧史弘肇 등과 틈이 벌어지니, 왕박은 漢이 개국한 세월이 얼마 되지도 않고 隱帝는 나이가 어리고 잔약하여 小人을 任用하는데도 양빈은 大臣이 되어 將相들과 서로 사이가 좋지 않음을 보고는 반드시 변란이 일어날 것을 알아 마침내 양빈을 떠나 동쪽으로 돌아갔다.
뒤에 李業 등이 은제로 하여금 權臣들을 주살하게 하여 양빈과 왕장‧사홍조가 모두 피살되었고, 세 사람의 빈객들도 대부분 화를 입었으나 왕박만은 이상의 연고로 화를 면하였다.
周 世宗이
澶州를
鎭守하고 있을 때
王朴을
節度掌書記로 삼았고, 세종이
開封尹이 되자 왕박을
右拾遺에 제수하고
推官으로 삼았다.
後周 世宗
세종이 즉위하자 比部郞中으로 승진하여 〈平邊策〉을 올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唐(後唐)나라가 도를 잃자 吳와 蜀을 잃었고 晉(後晉)나라가 도를 잃자 幽州와 幷州를 잃었으니, 잃어버리게 된 연유를 살펴보면 平定하는 방법을 알 수 있습니다.
잃어버렸을 때에는 임금은 어리석고 정사는 혼란하였고 병사는 교만하고 백성은 곤궁하였으며, 가까이 있는 자는 안에서 간사한 짓을 하고 멀리 있는 자는 밖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며, 작은 것은 제어하지 못하여 분수를 넘는 데에 이르고 큰 것은 제어하지 못하여 지나치게 넘치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그리하여 천하의 마음이 떠나 사람들이 명을 따르지 않으니, 吳와 蜀에서는 그 어지러움을 틈타 帝號를 僭稱하고 幽州와 幷州에서는 그 틈을 노려 땅을 점거하였습니다.
평정하는 방법은 唐나라와 晉나라가 했던 것과 반대로 하는 데 있을 따름이니, 반드시 어진 이를 나아오게 하고 不肖한 자를 물러나게 하여 時政을 맑게 하고, 능력 있는 자를 등용하고 능력 없는 자를 물리쳐서 그 재능을 살피며,
은혜와 신의로 號令하여 사람들의 마음을 결속하고, 공이 있는 자에게 상 주고 죄가 있는 자에게 벌주어 그 힘을 다하게 하며, 공손하고 검소하고 절약하여 재용을 풍족하게 하고,
徭役을 때에 맞게 하여 백성을 번성하게 하는 일들을 우선적으로 하여, 國庫가 충실해지고 器用이 완비되고 사람들이 쓸 만해졌을 때를 기다려 움직이소서.
저 적국의 백성이 우리나라의 政化가 크게 행해져 上下가 마음을 같이하고 힘은 강하며 재용은 풍족하고 백성들은 편안하며 장수들은 화합하여 반드시 승리할 형세가 있음을 알게 된다면, 저 적국의 정황을 아는 이는 우리의 間諜이 되고자 할 것이고 저 적국의 山川을 아는 이는 우리의 길잡이가 되고자 할 것입니다.
저 적국과 우리 백성의 마음이 하나가 되면 이는 하늘의 뜻과 같은 것이니, 하늘의 뜻과 같으면 이루지 못할 공업은 없습니다.
공격하여 승리하는 방법은 쉬운 것부터 시작하는 것입니다. 현재 오직 吳가 도모하기 쉬우니, 〈吳의 땅이〉 동쪽으로는 바다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長江에 이르러, 흔들어볼 수 있는 땅이 2천 리나 됩니다.
防備가 부족한 곳부터 먼저 흔들되 저들이 동쪽을 방비할 때는 서쪽을 흔들고 서쪽을 방비할 때는 동쪽을 흔들면, 저들이 반드시 분주히 달려가 무너지는 곳을 구원할 것입니다.
저들이 분주해하는 사이에 저들의 虛實과 병사의 強弱을 알 수 있을 것이니, 저들의 虛하고 弱한 곳을 공격하면 향하는 곳마다 앞을 〈막아서는 적이〉 없게 될 것입니다.
大軍을 움직일 것 없이 단지 輕兵으로 적을 흔들면, 저들은 겁이 많고 약한지라 우리 군사가 자신들의 땅에 들어온 것을 알고 반드시 대군을 일으켜 응전할 것입니다.
저들이 자주 대군을 일으키면 백성은 곤궁하고 국력은 고갈될 것이며, 저들이 한 번이라도 대군을 일으키지 못하게 되면 우리가 유리해질 것입니다. 저들은 고갈되고 우리는 유리하게 되면 江北의 여러 고을은 바로 우리나라의 소유가 될 것입니다.
이미 강북을 얻고 나서는 저들의 백성을 이용하고 우리 병사를 일으켜서 江南 지방도 어렵지 않게 평정할 것이니, 이와 같다면 힘은 적게 들이고 거두는 공은 많을 것입니다.
吳를 얻으면 桂州와 廣州도 모두 內臣이 될 것이고, 岷蜀은 글을 보내 부를 수 있게 될 것입니다. 만약 투항해 오지 않거든 사방에서 병사들을 동시에 진격시켜 자리를 말듯이 蜀을 평정할 수 있을 것이고, 吳와 蜀이 평정되면 幽州는 소문만 듣고도 우리에게 투항해 올 것입니다.
오직 幷州는 필사적으로 저항할 도적들이라 恩惠와 信義로 유인할 수 없고 반드시 강한 군대로 공격해야 하겠으나, 저들은 이미 힘이 다하였고 기세도 이미 꺾여 변경의 근심거리가 못 되니 후일에 도모해도 됩니다.
지금 병사들은 精銳로 잘 훈련되어 있고 물자는 구비되어 있으며 아랫사람들은 법을 알고 장수들은 목숨을 바치니 1년 뒤에는 변경을 平定할 수 있을 것입니다.
신은 書生이라 큰일을 말하기에 충분하지 못하고 심지어 大體도 통달하지 못하였고 臨機應變도 적합하게 하지 못하니, 바라건대 폐하께서 너그러이 보아주소서.”
左諫議大夫 知開封府事로 승진하고 그해에 左散騎常侍로 승진하였으며 端明殿學士에 충원되었다.
이때 世宗이 막 즉위하여 征伐에 마음을 쏟아 이미 群臣들의 논의를 꺾고서 친히 高平에서 劉旻을 패퇴시켰고, 돌아와 더욱 병사를 조련하여 개연히 천하를 평정하여 하나로 통일할 뜻을 품었다.
그래서 자주 大臣들에게 治道를 자문하고 文學之士인 徐台符 등 20인을 선발하여 〈爲君難爲臣不易論〉과 〈平邊策〉을 짓게 하였는데 왕박도 이때 함께 선발되었다.
당시 文士들은 모두 황제가 用兵을 급선무로 삼지 않게 하려고 “僭亂을 평정하는 것은 文德 닦는 것을 우선으로 하는 데 달려 있습니다.”라고 하였는데,
오직 翰林學士인 陶穀‧竇儀와 御史中丞 楊昭儉만이 왕박과 함께 모두 用兵策을 말하였고, 왕박은 江淮 지역이 가장 먼저 취할 만한 곳이라고 하였다.
세종이 평소 이미 왕박의 재능을 알고 있었는데, 그 의론이 훌륭한 것을 보고서는 더욱 뛰어나게 여겨 그를 引見하여 함께 천하의 일을 계획하고 의론함에 합치되지 않는 점이 없자, 마침내 뜻을 결정하고 왕박의 계책을 따랐다.
顯德 3년(956) 淮南을 정벌할 때 왕박을 東京副留守로 삼았고, 돌아와서 戶部侍郞 樞密副使를 제수하였으며, 樞密使로 승진시켰다. 顯德 4년(957)에 다시 회남을 정벌할 때 왕박을 開封留守로 삼았다.
世宗 때에 밖으로는 征伐을 일삼고 안으로는 法度를 정비하였다. 王朴은 사람됨이 명민하고 材智가 많아 당세의 일뿐만 아니라 陰陽律曆의 법에 대해서도 통달하지 않음이 없었다.
顯德 2년(955)에 조칙을 내려 왕박에게 大曆을 校定하게 하자, 마침내 근세에 세속에 유행하면서 이치에 어긋난 符天曆의 학문을 없애고 通法과 經法과 統法의 三法을 세워
歲‧軌‧離‧交‧朔‧望‧周‧變의 率數와 策數로 해와 달과 五星을 推算하여 ≪欽天曆≫을 만들었다.
顯德 6년(959)에 또 조칙을 내려 왕박에게 雅樂을 고찰하여 바로잡게 하니 왕박이 12律管을 서로 불어봄에 그 참된 음을 알기가 어렵다고 하여 마침내 京房의 음률을 기준으로 하여,
준칙으로 삼아 9尺 길이의 弦 13개로 律管의 長短寸分을 기준으로 하여 雁足을 배열하고 七聲을 사용하여 音階를 만드니 음악을 연주함에 조화롭게 되었다.
王朴은 성품이 굳세고 과감하며 또 世宗에게 신임를 받으니 무릇 그가 행하는 일에 대해 당시 사람들 중 감히 논란을 제기하는 자가 없었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이 왕박보다 뛰어나지도 못하였다.
세종이 淮南을 정벌할 때 왕박이 開封留守로 있으면서 新城을 확대하고 도로를 개통한 것이 웅장하고 광대하였으니, 지금 도성의 제도들 대부분은 그가 규모를 획정한 것이다.
그가 만든 音樂은 지금까지도 사용하며 바꿀 수 없고, 그가 펼친 用兵 책략은 한때에만 적용하고 말 책략이 아니었다.
여러 나라의 興亡의 차례를 말하면서 “회남은 가장 먼저 취해야 할 곳이요, 필사적으로 저항할 幷州의 도적들은 가장 나중에 망할 것이다.”라고 한 것과 같은 경우, 그 뒤 宋나라가 일어나 사방을 평정할 적에 병주가 유독 나중에 복종하였으니, 모두 왕박의 말대로 된 것이다.
顯德 6년(959) 봄에 세종이 왕박에게 汴口에 가서 시찰하고서 斗門을 만들게 하였는데, 돌아오면서 故相 李穀의 집을 방문했다가 發病하여 자리에서 엎어져 들것에 실려 돌아와 죽으니, 향년 54세였다.
세종이 친히 빈소에 가서 玉鉞로 땅을 치며 서너 차례 대성통곡하고 侍中을 증직하였다.
아아! 器物을 만드는 것은 좋은 資材에 달린 것이 아니고 좋은 匠人에 달려 있으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유능한 신하에 달린 것이 아니고 유능한 임금에 달려 있으니, 대개 자재는 장인이 있어야 완성되고 신하는 임금이 있어야 쓰이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나라 다스리는 것을 바둑에 비유해보면, 바둑돌을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를 알아서 적절한 자리에 바둑돌을 두는 자는 이기고, 어떻게 운용해야 하는지를 몰라서 부적절한 자리에 바둑돌을 두는 자는 패한다.
패하는 자는 바둑판을 앞에 두고서 시선을 고정한 채 하루 종일 勞心焦思하지만, 바둑을 잘 두는 자에게 그 판을 보게 하여 바둑돌의 위치를 바꾸어 두게 하면 이기게 된다.
이긴 자가 사용한 것은 패한 자의 바둑판이요, 흥한 나라가 사용한 것은 망한 나라의 신하이다. 王朴의 재주는 진실로 유능하다고 할 만하나, 世宗을 만나지 못했던들 어디에 재능을 발휘했겠는가.
세종 때에 밖으로는 정벌에 주력하여 다른 나라를 공격해 승리하였고 안으로는 제도를 정비하여 刑法을 논의하고 律曆을 확정하며 禮樂의 遺文을 강구하였으니,
이때 사용한 것은 五代의 선비였다. 이들이 어찌 모두 後晉과 後漢 시절에는 어리석고 怯弱하다가 後周 시절에는 재주 있고 지혜롭게 된 것이겠는가. 〈세종은〉 오직 〈이 선비들을〉 어떻게 써야 할지 알았을 따름인 것이다.
대저 혼란한 나라의 임금은 항상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윗자리에 두어 그 무능함을 우악스럽게 펼쳐 그 단점과 나쁜 점을 마구 내보이게 하며 어질고 지혜로운 자를 아랫자리에 두어 그 재능을 사장시켜서, 君子와 小人이 모두 제자리를 잃고 그 몸은 危亡에 빠지게 만든다.
잘 다스려지는 나라의 임금은 어질고 지혜로운 사람을 가까이에 두고 어리석고 못난 사람을 멀리 두어서, 군자와 소인이 모두 자기 分數에 맞게 되어 그 몸은 안락과 영광을 누리게 만든다.
다스려짐과 혼란함의 차이가 비록 매우 크지만 그렇게 되는 까닭은 많지 않으니, 사람을 두는 곳을 반대로 했을 따름이다. 오호라! 예로부터 나라를 잘 다스린 임금은 적고 나라를 어지럽게 만든 임금은 많았으니, 하물며 五代 시절의 선비가 좋은 임금을 만나고 만나지 못한 것에 대해 이루 다 탄식할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