明宗聖德和武欽孝皇帝
는 世本夷狄
하니 無姓氏
라 父
가 爲鴈門部將
하야 生子邈佶烈
한대 以騎射事太祖
라
爲人質厚寡言하고 執事恭謹하야 太祖養以爲子하고 賜名嗣源이라 梁攻兗鄆에 朱宣朱瑾來乞師하니 太祖遣李存信하야 將兵三萬救之라
存信留莘縣不進
하고 使嗣源別以兵三千先
梁兵
하니 梁兵解去
라
存信留莘縣久之라가 爲羅弘信所襲하야 存信敗走하니 嗣源獨殿而還하다 太祖以嗣源所將騎五百으로 號橫衝都라하다
三年
에 李嗣昭
가 攻梁邢
하야 出靑山
이라가 遇葛從周兵
하야 嗣昭大敗走
하니 梁兵追之
라
嗣源從間道後至하야 謂嗣昭曰 爲公一戰이라하고 乃解鞍礪鏃하야 憑高爲陣하야 左右指畫하니 梁追兵望之莫測이라
嗣源이 急呼曰 吾取葛公하면 士卒可無動가하고 乃馳騎犯之하야 出入奮擊하고 嗣昭繼進하니 梁兵解去라
嗣源이 身中四矢하니 太祖가 解衣賜藥以勞之라 由是로 李橫衝名重四方이라
梁晉相拒于柏鄕한대 梁龍驤軍이 以赤白馬爲兩陣하고 旗幟鎧仗도 皆如馬色하니 晉兵望之하고 皆懼하다
莊宗擧鍾以飮嗣源曰 卿望梁家赤白馬懼乎아 雖吾나 亦怯也라하니 嗣源笑曰 有其表爾니 翌日에 歸吾廐也라하다
莊宗大喜曰 卿當以氣呑之
라하다 因擧鍾飮
하고 奮檛馳騎
하야 犯其白馬
하야 挾二裨將而還
이라 梁兵敗
에 以功拜代州刺史
라
莊宗攻劉守光
할새 嗣源及李嗣昭
가 將兵三萬
하야 別出飛狐
하야 定
하고 取武嬀儒三州
하니
莊宗已平魏州하고 因徇下磁相하야 拜相州刺史昭德軍節度使하다 久之에 徙鎭安國하다
契丹攻幽州
한대 莊宗遣嗣源
하야 與閻寶等擊走之
하다 同光元年
에 徙鎭橫海
라 是時
에 梁唐相拒于河上
한대 李繼韜以
叛降梁
이라
莊宗有憂色하야 召嗣源帳中하야 謂曰 繼韜以上黨降梁하야 而梁方急攻澤州라 吾出不意하야 攻其鄆州하야 以斷梁右臂하니 可乎아하니
嗣源對曰 夾河之兵이 久矣니 苟非出奇면 則大計不決하니 臣請獨當之라하다
乃以步騎五千으로 涉濟하야 至鄆州하니 鄆人無備라 遂襲破之라 卽拜天平軍節度使蕃漢馬步軍副總管하다
梁軍攻破德勝南柵
하니 莊宗退保
하고 王彦章急攻鄆州
어늘 莊宗悉軍救之
라
嗣源爲前鋒하야 擊敗梁軍하고 追至中都하야 擒彦章及梁監軍張漢傑하다
彦章雖敗나 而段凝悉將梁兵하야 屯河上하니 莊宗未知所嚮이라 諸將多言乘勝以取靑齊라하니
嗣源曰 彦章之敗를 凝猶未知하니 使其聞之면 遲疑定計가 亦須三日이라
縱使料吾所嚮하야 亟發救兵이라도 必渡黎陽하리니 數萬之衆舟檝非一日具也라
此去汴州
가 不數百里
요 前無險阻
하니 而行
이면 信宿可至
라 汴州已破
면 段凝豈足顧哉
리오하다
而郭崇韜도 亦勸莊宗入汴하니 莊宗이 以爲然하고 遣嗣源하야 以千騎先至汴하야 攻封丘門하니 王瓚開門降하다
莊宗後至하야 見嗣源하고 大喜하야 手攬其衣以頭觸之曰 天下與爾共之호리라하고 拜中書令하다
二年
에 莊宗
이 祀天南郊
하고 賜以
하다 五月
에 破楊立于潞州
하고 六月
에 徙鎭宣武
하고 兼蕃漢內外馬步軍總管
하다
冬에 契丹侵漁陽하니 嗣源敗之于涿州하다 三年에 徙鎭成德하다 莊宗幸鄴하야 請朝行在어늘 不許라
疾
에 請入省
이어늘 又不許
러니 太后崩
에 請赴山陵
하니 許之
나 而契丹侵邊
하야 乃止
하다 十二月
에 遂朝于洛陽
하다
元年
에 郭崇韜朱友謙
이 皆以讒死
하고 嗣源以名位高
하니 亦見疑忌
라
趙在禮反於魏하니 大臣皆請遣嗣源討賊이어늘 莊宗不許하다 群臣이 屢請莊宗하니 不得已而遣之하다
丁巳
에 以其兵南
하야 遣石敬瑭
하야 將三百騎爲先鋒
하고 하다 壬申
에 入汴州
하다
四月丁亥에 莊宗崩하니 己丑에 入洛陽하다 甲午에 監國하고 朝群臣于興聖宮하다
乙未
에 中門使
爲樞密使
하고 殺元行欽及租庸使孔謙
하다 壬寅
에 左驍衛大將軍孔循爲樞密使
하다
丙午
에 하고 皇帝卽位于柩前
하야 하다 壬子
에 하다 甲寅
에 大赦改元
하다
嗚呼라 自古로 治世少而亂世多하니 三代之王有天下者皆數百年이로되 其可道者는 數君而已어든 況於後世邪며 況於五代邪아
予聞長老爲予言하되 明宗雖出夷狄이나 而爲人純質하야 寬仁愛人하니 於五代之君에 有足稱也라
嘗夜焚香하야 仰天而祝하야 曰 臣本蕃人이니 豈足治天下리오 世亂久矣니 願天早生聖人하소서
自初卽位로 減罷宮人伶官하고 廢內藏庫四方所上物하야 悉歸之有司하다
廣壽殿火災어늘 有司理之하야 請加丹雘하니 喟然嘆曰 天以火戒我하니 豈宜增以侈邪리오하다
歲嘗旱이라가 已而雪이러니 暴坐庭中하야 詔武德司하야 宮中無得掃雪하고 曰 此天所以賜我也라하다
數問宰相
等民間疾苦
하고 聞道等言穀帛賤民無疾疫
하면 則欣然曰 吾何以堪之
리오 當與公等作好事以報上天
이라하고
吏有犯贓이면 輒置之死하야 曰 此民之蠧也라하고 以詔書褒廉吏孫岳等하야 以風示天下하니 其愛人恤物이 蓋亦有意於治矣라
兵革粗息
하고 年屢豐登
하야 生民實賴以休息
이라 然
性果
하고 仁而不明
하야 屢以非辜誅殺臣下
라
至於
之間
하얀 不能慮患爲防
이라가 而變起倉卒
에 陷之以大惡
하고 帝亦由此飮恨而終
이라
當是時하야 大理少卿康澄이 上疏言時事하니 其言曰 爲國家者는 有不足懼者五요 深可畏者六이니
三辰失行은 不足懼요 天象變見은 不足懼요 小人訛言은 不足懼요 山崩川竭은 不足懼요 水旱蟲蝗은 不足懼也라
賢士藏匿은 深可畏요 四人遷業은 深可畏요 上下相徇은 深可畏요 廉恥道消는 深可畏요 毁譽亂眞은 深可畏요 直言不聞은 深可畏也라하니
識者皆多澄言切中時病
이라 若從榮之變
에 安重誨等之死
는 可謂上下相徇而毁譽亂眞之敝矣
라
然澄之言이 豈止一時之病이리오 凡爲國者可不戒哉아
明宗聖德和武欽孝皇帝는 先世가 夷狄에서 나왔으니 姓氏가 없다. 아버지 霓가 鴈門部將이 되어 아들 邈佶烈을 낳았는데 騎射로 太祖(李克用)를 모셨다.
사람이 淳厚하고 과묵하였고 일을 처리함에 공손하고 조심하여 태조가 養子로 삼고 嗣源이란 이름을 내려주었다. 梁나라가 兗州와 鄆州를 공격할 때에 朱宣‧朱瑾이 와서 원병을 청하니, 태조가 李存信을 보내 병사 3만 명을 거느리고 가 구원하게 하였다.
이존신은 莘縣에 머물며 진군하지 않고 李嗣源에게 따로 병사 3천을 거느리고 가 梁나라 군사를 먼저 공격하게 하니, 梁나라 군사가 흩어져 달아났다.
이존신이 신현에 오랫동안 머물다가 羅弘信의 습격을 받아 이존신이 패하여 달아나니, 이사원이 홀로 후방을 엄호하면서 돌아왔다. 태조가 이사원이 거느리던 騎兵 5백을 橫衝都라 불렀다.
光化 3년(900)에 李嗣昭가 梁나라의 邢州와 洺州를 공격하기 위해 靑山에서 출전하였다가 葛從周의 병사를 만나 이사소가 크게 패하여 달아나니 梁나라 군사가 추격하였다.
李嗣源이 샛길을 따라 뒤늦게 이르러 이사소에게 말하기를 “공을 위해 한번 싸워보겠습니다.”라고 하고, 이에 말안장을 풀고 화살촉을 다듬고는 높은 곳을 점령하여 陣을 만들고 좌우를 가리키며 지휘하니, 梁나라의 추격병들이 바라만 볼 뿐 의도를 알아차리지 못하였다.
이사원이 급히 소리쳐 말하기를 “내가 葛公을 잡으면 사졸들이 동요하지 않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말을 달려 돌진하여 縱橫無盡 공격하고 이사소도 뒤이어 진군하니, 梁나라 병사가 흩어져 달아났다.
이사원이 네 발의 화살을 몸에 맞았는데, 太祖가 옷을 벗어주고 약을 내려주어 위로하였다. 이 일을 계기로 李橫衝의 명성이 사방에 높아졌다.
梁나라와 晉나라가 柏鄕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梁나라 龍驤軍이 적색 말과 흰색 말로 두 陣을 만들고 旗幟‧鐵甲‧무기도 모두 말의 색깔과 똑같이 채색하니, 晉나라의 군사들이 바라보고는 모두 겁을 먹었다.
莊宗이 술잔을 들고 李嗣源에게 마시게 하고는 말하기를 “卿은 梁나라의 적색과 흰색 말을 보고 두려운가? 비록 나라도 역시 두렵다.”라고 하니, 이사원이 웃으며 말하기를 “겉으로 그렇게 보일 뿐이니, 내일이면 우리 마구간으로 들어올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크게 기뻐하며 “卿은 氣勢로 저들을 삼킬 만하다.”라고 하였다. 이사원이 인하여 술잔을 들어 다 마시고는 채찍을 휘둘러 말을 달려 흰색 말이 있는 곳으로 달려가 두 명의 裨將을 사로잡아 돌아왔다. 梁나라 병사가 패함에 공으로 代州刺史에 배수되었다.
장종이 劉守光을 공격하였는데, 李嗣源과 李嗣昭는 군사 3만을 이끌고 따로 飛狐에서 출병하여 山後를 평정하고 武州‧嬀州‧儒州 세 州를 취하니,
장종이 이미 魏州를 평정하고 인하여 磁州‧相州를 차례로 점령하고서 이사원을 相州刺史 昭德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오래 지나 安國으로 옮겨 鎭守하였다.
契丹이 幽州를 공격하자 莊宗이 李嗣源을 보내 閻寶 등과 함께 격퇴하여 패주시켰다. 同光 원년(923)에 橫海로 옮겨 鎭守하였다. 이때에 梁나라와 唐나라가 黃河에서 서로 대치하고 있었는데, 李繼韜가 潞州를 가지고 반란을 일으켜 梁나라에 항복하였다.
장종이 근심 어린 기색을 띠고 이사원을 장막 안으로 불러 말하기를 “이계도가 上黨을 가지고 梁나라에 투항하여 梁나라가 비로소 澤州를 급하게 공격하고 있다. 내가 저들이 생각지도 못한 기습병을 보내 鄆州를 습격하여 梁나라의 오른팔을 자르려 하니 가능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사원이 대답하기를 “황하를 끼고 대치하여 주둔해 있은 지 오래되었으니, 만일 不意에 기습병을 보내지 못한다면 큰 계책이 성사되지 않을 것입니다. 신이 홀로 이 일을 맡기를 바랍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步兵과 騎兵 5천 명을 거느리고 濟水를 건너 운주에 이르니, 운주의 사람들이 방비가 없으므로 마침내 습격하여 격파하였다. 곧 天平軍節度使 蕃漢馬步軍副總管에 배수되었다.
梁나라 군사가 德勝의 남쪽 성채를 공격하여 격파하자 莊宗은 물러나 楊劉를 지켰고, 王彦章이 급히 鄆州를 공격하자 장종이 군사를 총동원하여 구원하였다.
李嗣源이 先鋒이 되어 梁나라 군사를 격퇴하고 추격하여 中都에 이르러 왕언장과 梁나라 監軍 張漢傑을 사로잡았다.
왕언장이 비록 패하였지만 段凝이 梁나라 병사를 모두 거느리고 黃河 가에 주둔하니, 장종이 어디로 진군해야 할지를 몰랐다. 장수들이 승기를 타고 靑州와 齊州를 취해야 한다고 많이들 말하니
이사원이 말하기를 “왕언장이 패배한 것을 단응은 아직 모르고 있으니, 만일 이 사실을 알게 한다면 주저하다 계획을 확정하는 데에 또한 3일 정도 소요될 것입니다.
가령 우리들이 향하는 곳을 알게 되어 급히 원병을 보내더라도 반드시 黎陽을 건너야 할 것이니, 수만 명의 군사들을 태울 배를 하루 만에 마련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여기에서 汴州까지의 거리가 수백 里가 되는 것도 아니고, 진군하는 길이 험하지도 않으니 方陣을 펼쳐 진군하면 이틀 만에 도착할 수 있습니다. 변주가 이미 격파되면 단응이 어찌 돌아보겠습니까?”라고 하였다.
郭崇韜도 장종에게 변주로 들어갈 것을 권하니 장종이 옳다고 여기고 이사원을 보내 1천 명의 騎兵으로 변주에 먼저 이르러 封丘門을 공격하게 하니 王瓚이 문을 열고 항복하였다.
莊宗이 뒤에 이르러 李嗣源을 보고 크게 기뻐하며 손으로 그의 옷을 당겨 머리를 맞대고 말하기를 “天下를 그대와 함께 공유할 것이다.”라고 하고 中書令에 배수하였다.
同光 2년(924)에 장종이 南郊에서 하늘에 제사 지내고 鐵券을 하사하였다. 5월에 潞州에서 楊立을 격파하고, 6월에 宣武로 옮겨 鎭撫하고 蕃漢內外馬步軍總管을 겸하였다.
겨울에 契丹이 漁陽을 침범하니, 이사원이 涿州에서 패퇴시켰다. 동광 3년(925)에 成德으로 옮겨 진무하였다. 장종이 鄴州로 幸行하니 이사원이 行在所로 조회 가기를 청하였으나 허락하지 않았다.
貞簡太后가 병에 걸리자 들어가 병문안할 것을 청하였는데, 또 허락하지 않았다. 太后가 崩하자 山陵으로 달려갈 것을 청하니 허락하였으나, 거란이 국경을 침범하여 이에 그만두었다. 12월에 마침내 洛陽으로 가 조회하였다.
天成 원년(926)에 郭崇韜와 朱友謙이 모두 참소로 죽고, 李嗣源이 명망과 지위가 높아지니, 또한 의심과 시기를 받았다.
趙在禮가 魏州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대신들이 모두 이사원을 보내 적을 토벌할 것을 청하였지만 莊宗이 허락하지 않았다. 신하들이 장종에게 누차 청하니, 어쩔 수 없이 이사원을 보냈다.
3월 壬子에 이사원이 위주에 이르러 御河 남쪽에 주둔하니, 조재례가 城樓에 올라 謝罪하였다.
甲寅에 군사들이 변란을 일으키자 이사원이 위주로 들어가 조재례와 합류하였다가 저녁에 나와 魏縣에 이르렀다.
丁巳에 군사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가 石敬瑭을 보내 기병 300騎를 거느리고 선봉으로 삼았고, 이사원은 행군하여 鉅鹿을 지나면서 작은 坊의 말 2천 필을 노략질하여 軍에 보태었다. 壬申에 汴州로 들어갔다.
4월 丁亥에 장종이 崩하니, 己丑에 洛陽으로 들어갔다. 甲午에 國事를 관리 감독하고 興聖宮에서 군신을 召見하였다.
乙未에 中門使 安重誨를 樞密使로 삼고, 元行欽과 租庸使 孔謙을 죽였다. 壬寅에 左驍衛大將軍 孔循을 추밀사로 삼았다.
丙午에
西宮에서 비로소 제사를 지내고 장종의
靈柩 앞에서 황제에 즉위하여
袞龍袍와
冕旒冠으로
喪服을 대체하였다.
壬子에
魏王 李繼岌이
薨하였다.
甲寅에 사면령을 크게 내리고
年號를 바꾸었다.
袞冕
아, 예로부터 治世는 적고 亂世는 많았으니 三代(夏‧殷‧周)의 왕이 天下를 소유한 것이 모두 數百年이었지만 말할 만한 사람은 두세 군주뿐이다. 하물며 후세에 있어서며, 하물며 五代에 있어서랴.
나는 長老가 나에게 다음과 같은 말을 해주는 것을 들었다. “明宗이 비록 夷狄 출신이지만 사람이 순수하고 질박하여 寬仁하고 사람을 사랑하니 五代의 임금 중에 칭송할 만하다.
일찍이 밤에 향을 피우고 하늘을 우러러 축원하여 ‘臣이 본래 변방의 사람이니 어찌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난세가 오래 지속되니 원컨대 하늘에서 빨리 聖人을 내려주십시오.’라고 하였다.”
처음 즉위한 때로부터 宮人과 伶官을 감축하고, 內藏庫로 들어오는 四方에서 상납하는 재물을 폐지하여 모두 有司에게 귀속시켰다.
廣壽殿에 火災가 발생하자 有司가 다스려 단청을 칠할 것을 청하니, 한숨지으며 탄식하기를 “하늘이 화재로 나를 경계하니, 어찌 사치함을 더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한 해의 날씨가 일찍이 가물다가 이윽고 눈이 내리니, 궁전 뜰 가운데 눈을 맞으며 앉아 武德司에 명하여 宮中에 눈을 쓸어내지 못하게 하고, “이것은 하늘이 나에게 준 것이다.”라고 하였다.
수차례 宰相 馮道 등에게 民間의 疾苦를 묻고, 풍도 등이 ‘곡식과 비단은 흔하고 백성들은 질고가 없다.’라고 말하는 것을 들으면 흔연히 기뻐하며 “내가 어떻게 감당하겠는가? 마땅히 공들과 더불어 좋은 일을 하여 上天에 보답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관리 가운데 贓物罪를 범하면 곧바로 사형에 처하면서 “이는 백성의 좀이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청렴한 관리 孫岳 등에게 조서를 내려 褒獎하여 천하에 訓示하니, 사람을 사랑하고 백성을 긍휼히 여김이 대개 또한 治世에 뜻이 있었던 것이다.
明宗이 즉위할 때에 나이가 이미 많아 聲色을 가까이하지 않고 사냥을 즐기지 않았다. 그리고 在位가 10년이니 五代의 임금 중에 가장 장수하였다.
전쟁이 조금 잦아들고 해마다 풍년이 들어 민생이 이에 힘입어 편안해졌다. 그러나 夷狄이 성품이 과감하고 어질지만 총명하지 못하여 누차 죄가 없는데도 신하를 주살하였다.
李從榮의 父子間에 이르러서는 환란을 염려하여 미리 대비하지 않다가 변란이 창졸간에 일어남에 이종영은 끝내 반란을 저지른 大惡에 빠졌고, 명종 역시 이 때문에 통한을 머금고 세상을 마쳤다.
이때에 大理少卿 康澄이 上疏하여 時事를 말하였는데 그중에 “국가를 다스리는 자에게 두려워할 필요가 없는 것이 다섯 가지가 있고, 두려워해야 할 것이 여섯 가지가 있습니다.
三辰(해‧달‧별)이 운행을 잃은 것은 두려워할 것이 없고, 天文에 이변이 나타나는 것은 두려워할 것이 없고, 小人의 유언비어는 두려워할 것이 없고, 산이 무너지고 시내가 마르는 것은 두려워할 것이 없고, 가뭄이 들고 메뚜기가 창궐하는 것은 두려워할 것이 없습니다.
賢士가 숨는 것은 몹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고, 四民이 생업을 바꾸는 것은 몹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고, 上下가 서로 따르기만 하는 것은 몹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고, 廉恥의 도가 없어지는 것은 몹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고, 비방과 칭찬이 진실을 어지럽히는 것은 몹시 두려워할 만한 것이고, 直言을 듣지 않는 것은 몹시 두려워할 만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識者들이 모두 강징의 말이 時病을 정확히 지적하였다고 생각하였다. 저 이종영의 변란과 任圜‧安重誨 등이 죽은 일과 같은 것은 상하가 서로 따르기만 하고 비방과 칭찬이 진실을 어지럽힌 데서 온 폐단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강징의 말이 어찌 단지 한 시대의 병통을 지적한 것에 그치겠는가. 나라를 다스리는 모든 사람이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