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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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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劉皇后 起自側微하야 擅寵黷貨하야 因而濁亂宮中하야 軍士分崩하고 以至君上하얀 身弑國亡이라
摹寫 種種生色 不讓이라
莊宗神閔敬皇后劉氏 魏州成安人也 莊宗正室 曰 衛國夫人韓氏 其次 燕國夫人伊氏 其次后也 初封魏國夫人이라
后父 劉叟 黃鬚이며 善醫卜하야 自號劉山人이라
后生五六歲 晉王攻魏하야 掠成安한대 裨將袁建豐得后하야 納之晉宮하니 貞簡太后 敎以吹笙歌舞
旣笄 甚有色하야 莊宗見而悅之 莊宗已爲晉王 太后幸其宮하니 置酒爲壽하고 自起歌舞
太后歡甚하야 命劉氏吹笙佐酒하고 酒罷去 留劉氏以賜莊宗하다
先時 莊宗攻梁軍於夾城이라가 得符道昭妻侯氏하야 寵專諸宮하니 宮中謂之夾寨夫人이라 莊宗出兵四方 常以侯氏從軍이라
其後 劉氏生子繼岌하니 莊宗以爲類己하야 愛之 由是 劉氏寵益專이라
으로 戰河上十餘年 獨以劉氏從이라 劉氏多智하야 善迎意承旨하니 其他嬪御莫得進見이라
其父 聞劉氏已貴하고 詣魏宮上謁이라 莊宗 召袁建豐問之하니 建豐曰 臣始得劉氏於成安北塢하니 有黃鬚丈人護之라하다
乃出劉叟하야 示建豐하니 建豐曰 是也 然劉氏方與諸夫人으로 爭寵하야 以門望相高
因大怒曰 妾去鄕時 略可記憶하니 妾父不幸死於亂兵이라 妾時 環尸慟哭而去러니 此田舍翁 安得至此오하고 因命笞劉叟于宮門하다
莊宗已卽皇帝位하야 欲立劉氏爲皇后 而韓夫人 正室也 伊夫人 位次在劉氏上이라 以故 難其事而未發이라
宰相豆盧革 樞密使郭崇韜 希旨上章하야 言劉氏當立이라하니 莊宗大悅하다
하니 皇后受冊하고하고 鼓吹하야 見於太廟
韓夫人等 皆不平之하니 乃封韓氏爲淑妃하고 伊氏爲德妃하다 莊宗自滅梁으로 志意驕怠하야 宦官伶人亂政이라
后特用事於中이러니 自以出於賤微하야 踰次得立 以爲佛力이라
又好聚斂하야 分遣人하야 爲商賈하니 至於市肆之間 薪芻果茹하야도 皆稱中宮所賣라하다
四方貢獻이면 必分爲二하야 一以上天子하고 一以入中宮하니 宮中貨賄山積이라
惟寫佛書 饋賂僧尼러니 而莊宗 由此 亦佞佛이라 有胡僧自하니 莊宗 率皇后及諸子하야 迎拜之
僧遊五臺山할새供頓하니 所至傾動城邑이라 又有僧誠惠하니 自言能降龍이라
嘗過鎭州할새 王鎔不爲之禮어늘 誠惠怒曰 吾有毒龍五百이라 當遣一龍揭片石하면 常山之人 皆魚鼈也라하다
會明年 滹沱河大水하야 壞鎭州關城하니 人皆以爲神이라
莊宗及后 率諸子諸妃하야 拜之하니 誠惠端坐不起 由是 士無貴賤 皆拜之 獨郭崇韜不拜也
是時 皇太后及皇后 交通藩鎭하야 太后稱誥令하고 皇后稱敎命하야 兩宮使者 旁午於道
許州節度使溫韜 以后佞佛 因請以私第爲佛寺하고 爲后薦福이라 莊宗數幸郭崇韜元行欽等私第한대 常與后俱
其後 幸張全義第하야 酒酣하야 命后拜全義爲養父하니 全義日遣姬妾하야 出入中宮하야 問遺不絶이라
莊宗有愛姬甚有色而生子하니 后心患之 莊宗燕居宮中 元行欽侍側이러니
莊宗問曰 爾新喪婦하니 其復娶乎 吾助爾聘호리라하다 后指愛姬하야 請曰 帝憐行欽하니 何不賜之오하니 莊宗 不得已佯諾之
后趣行欽拜謝하야 行欽再拜한대 起顧愛姬하니 肩輿已出宮矣 莊宗不樂하야 稱疾不食者累日이라
同光三年秋 大水하야 兩河之民 流徙道路하니 京師賦調不充하야 六軍之士 往往殍踣이라
乃預借明年夏秋租稅하니 百姓愁苦하야 號泣于路어늘 莊宗方與后 荒于畋遊
十二月己卯臈 畋于白沙한대 后率皇子後宮畢從하야하야 宿龕澗하고 癸未 乃還이라
是時 大雪하야 軍士寒凍이라 金鎗衛兵萬騎 所至責民供給하야 壞什器徹廬舍而焚之하니 縣吏畏懼하야 亡竄山谷이라
明年三月 하고 有星流于하니
占星者言 御前當有急兵하니 宜散積聚以禳之라하다 宰相請出庫物以給軍이어늘 莊宗許之하되
后不肯曰 吾夫婦得天下 雖因武功이나 盖亦有天命이라 命旣在天하니 人如我何리오하다
宰相論于하니 后於屛間耳屬之하야 因取粧奩及皇幼子滿喜하야
置帝前하야 曰 諸侯所貢 給賜已盡하야 宮中所有 惟此耳라하고 請鬻以給軍하니 宰相惶恐而退
하니 軍士負而詬曰 吾妻子已餓死하니 得此何爲오하다
莊宗 東幸汴州할새 從駕兵二萬五千이러니 及至萬勝하야 不得進而還하니 軍士離散하야 所失太半이라 至罌子谷하니 道路隘狹이라
莊宗 見從官執兵仗者하야 皆以好言勞之하야 曰 適報魏王平蜀하야 得蜀金銀五十萬하니 當悉給爾等호리라하니
對曰 陛下與之太晩하니 得者亦不感恩이라하다
莊宗泣下하야 因顧內庫使張容哥하야以賜之하니 容哥對曰 盡矣라하다
軍士叱容哥曰 致吾君至此 皆由爾輩라하고 因抽刀逐之하니 左右救之而免이라
容哥曰 皇后惜物하야 不以給軍이어늘 而歸罪于我하니 事若不測이면 吾身萬段矣라하고 乃投水而死하다
郭從謙反 莊宗中流矢傷甚하야 臥絳霄殿廊下라가 渴欲得飮이어늘 后令宦者하야 進飱酪하고 不自省視하다
莊宗崩 后與李存渥等 焚嘉慶殿하야 擁百騎하야 出師子門하다 后於馬上 以囊盛金器寶帶 欲於太原造寺爲尼
在道因與存渥姦하고 及至太原하야 乃削髮爲尼러니 明宗入立 遣人賜后死하다五年 追諡曰 神閔敬皇后


02. 後唐 劉后傳記
劉皇后는 미천한 신분에서 황후가 되어 총애를 독차지하고 재화를 탐닉하였다. 이로 인해 궁중을 혼탁하고 혼란하게 만들어 군사들이 분열되고, 君上에 이르러서는 자신은 시해당하고 나라가 망하였다.
사건을 묘사함에 이따금 생동감이 넘치는 부분은 太史公(司馬遷)의 ≪史記≫ 〈呂太后本紀〉와 〈外戚世家〉에 뒤지지 않는다.
莊宗神閔敬皇后 劉氏魏州 成安 사람이다. 장종의 正室衛國夫人 韓氏이고, 그 다음은 燕國夫人 伊氏이고, 그 다음이 이니 처음에는 魏國夫人에 봉해졌다.
의 아버지는 劉叟이고 〈유수는〉 수염이 황색이었으며 醫學卜筮에 뛰어나 스스로 劉山人이라 불렀다.
가 태어나 5, 6세에 晉王(뒤의 後唐 莊宗)이 위주를 공격하여 성안을 노략질하였는데, 裨將 袁建豐를 얻어 나라 에 들이니, 貞簡太后笙簧 부는 법, 춤과 노래 등을 가르쳤다.
笙
성인이 되자 몹시 美色이 있어 장종이 보고 좋아하였다. 장종이 이미 진왕이 됨에 정간태후가 궁에 幸行하니, 장종이 酒宴을 베풀어 祝壽하고 스스로 일어나 노래하고 춤을 추었다.
정간태후가 몹시 기뻐하며 유씨에게 생황을 불고 술을 따르기를 명하고 주연이 파하여 떠날 때에 유씨를 남겨두어 장종에게 내려주었다.
이보다 앞선 시기에 莊宗夾城에서 나라 군사를 공격하다가 符道昭의 아내 侯氏를 얻어 궁인들 중에 후씨만을 총애하니, 궁중에서 夾寨夫人이라 불렀다. 장종이 四方으로 출병할 때에 늘 후씨를 從軍하게 하였다.
그 뒤에 劉氏가 아들 繼岌을 낳으니, 장종이 자신과 닮았다고 하여 사랑하였다. 이를 계기로 유씨에 대한 총애가 더욱 전일해졌다.
魏博을 함락한 뒤로 黃河 가에서 10여 년 전쟁을 치를 때에 유씨만을 종군하게 하였다. 유씨는 지혜가 많아 능란하게 장종의 뜻에 迎合하니, 다른 처첩과 궁녀들은 나아가 장종을 만날 수가 없었다.
의 아비가 劉氏가 이미 귀하게 되었다는 말을 듣고는 魏州으로 가서 알현하였다. 莊宗袁建豐을 불러 물어보니 원건풍이 말하기를 “신이 처음 成安의 북쪽 마을에서 유씨를 얻었으니, 당시에 누런 수염을 가진 노인이 보호하고 있었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劉叟를 나오게 하여 원건풍에게 보여주니, 원건풍이 말하기를 “이 사람이 맞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나 유씨는 한창 여러 부인과 총애를 다투며 가문의 명망을 서로 비교하고 있었다.
인하여 크게 노하여 말하기를 “첩이 고향을 떠날 때를 대략 기억하고 있으니, 첩의 아비는 불행히도 亂兵에게 죽었습니다. 첩이 당시에 시신 주위를 돌며 통곡하고서 떠났는데, 이 시골 늙은이는 어떻게 여기에 왔습니까.”라고 하고, 인하여 宮門에서 유수에게 를 칠 것을 명하였다.
莊宗이 이미 皇帝의 지위에 올라 劉氏를 세워 皇后로 삼으려 하였지만, 韓夫人正室이고 伊夫人位次가 유씨의 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그 일을 난처하게 여겨 드러내지 않았다.
宰相 豆盧革樞密使 郭崇韜가 장종의 비위를 맞추기 위해 疏章을 올려 유씨가 황후가 되어야 한다고 하니, 장종이 크게 기뻐하였다.
同光 2년(924) 4월 己卯日에 황제가 文明殿에 나아가 使者를 보내 유씨를 책봉하여 황후로 삼으니, 황후가 책봉을 받고서 重翟車를 타고 鹵簿를 갖추고 음악을 연주하면서 행차하여 太廟를 참배하였다.
한부인 등이 모두 불평하니, 이에 韓氏淑妃로 삼고 伊氏德妃로 삼았다. 장종이 나라를 멸한 뒤로 마음이 교만하고 태만해져 환관과 광대들이 조정을 어지럽혔다.
황후가 특히 궁중에서 권력을 천단하였는데 스스로 미천한 신분 출신으로 등급을 넘어 황후의 지위를 얻은 것은 부처의 힘이라고 여겼다.
또 재물을 축척하기를 좋아하여 사람을 나누어 보내 商人으로 만들었으니, 시장 안에 땔감이나 목초, 과일과 채소 등에 이르러서도 모두 中宮이 내다 파는 것이라고들 하였다.
사방에서 貢物을 바치면 반드시 둘로 나누어 하나는 천자에게 올리고 하나는 중궁에 들이니, 宮中에 재화가 산처럼 쌓였다.
오직 佛書를 베껴 쓸 때만은 승려에게 음식과 뇌물을 주었는데, 莊宗도 이로 말미암아 佛敎를 좋아하였다. 于闐에서 온 西域의 승려가 있었는데, 장종이 皇后와 아들들을 데리고 맞이하고 절하였다.
승려가 五臺山을 갈 때에 中使를 보내 음식을 대접하게 하니, 승려가 이르는 곳마다 城邑이 들썩였다. 또 승려 誠惠라는 자가 있었는데 스스로 을 항복시킬 수 있다고 말하였다.
일찍이 鎭州를 지날 때에 王鎔이 예우하지 않자 성혜가 노하여 “나에게 毒龍 500마리가 있는지라 한 마리 용을 보내 片石을 들어 올리면 常山의 사람들은 모두 물고기와 자라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마침 이듬해에 滹沱河에 큰 홍수가 나서 鎭州의 성과 관문을 무너뜨리니, 사람들이 모두 이라고 생각하였다.
장종과 황후가 아들들과 왕비들을 데리고 가 절하니, 성혜는 端坐하여 일어나지 않았다. 이로부터 선비 중 貴賤을 따질 것 없이 모두 그에게 절하였지만 郭崇韜만은 절하지 않았다.
이때에 皇太后皇后藩鎭과 서로 내통하였는데, 태후의 誥令이라 하고 황후의 敎命이라 하여 두 궁의 使者가 여기저기로 길을 오갔다.
許州節度使 溫韜가 황후가 불교를 좋아한다고 하여 인하여 자신의 집을 佛寺로 만들고 황후를 위하여 복을 빌 것을 청하였다. 莊宗郭崇韜元行欽 등의 집을 자주 방문하였는데 늘 황후와 함께 방문하였다.
그 뒤에 張全義의 집으로 거둥하여 술에 취하여 장전의에게 절하고 養父로 삼으라고 황후에게 명하니, 장전의가 날마다 姬妾을 보내 中宮을 출입하면서 끊임없이 안부를 묻고 뇌물을 바쳤다.
장종에게 몹시 아름다운 愛姬가 있어 아들을 낳으니, 황후가 마음으로 근심하였다. 장종이 궁중에서 편안히 쉴 때에 원행흠이 곁에서 모시고 있었다.
장종이 묻기를 “그대는 이제 막 부인을 잃었으니 어찌 다시 장가들지 않는가? 내가 그대의 聘禮를 돕겠다.”라고 하였다. 황후가 애희을 가리키며 청하기를 “황제께서 원행흠을 아끼시니 어찌 그에게 내려주지 않습니까.”라고 하니, 장종이 어쩔 수 없이 거짓으로 허락하였다.
황후가 원행흠에게 拜謝를 재촉하여 원행흠이 두 번 절하였는데, 원행흠이 일어나 애희을 돌아보니 肩輿(가마)가 이미 궁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장종이 불쾌하여 병을 핑계로 며칠 동안 식사를 하지 않았다.
同光 3년(925) 가을에 큰 홍수가 나서 河南河北의 백성들이 길에서 떠돌아다니니, 京師賦稅가 충분치 않아 六軍의 군사들이 왕왕 굶어 죽었다.
이에 이듬해 여름과 가을의 租稅를 미리 거두니, 백성들이 근심하고 괴로워하여 길에서 부르짖으며 울었는데, 莊宗은 이때에 皇后와 함께 사냥과 遊樂에 빠져 있었다.
12월 己卯日臘日白沙에서 사냥을 하였는데, 황후가 皇子後宮을 거느리고 모두 뒤따라 伊闕을 지나 龕澗에서 유숙하고 癸未日에 비로소 돌아왔다.
이때에 큰 눈이 내려 군사들이 추위에 떨었다. 金鎗衛의 군사 1만 騎兵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에게 옷과 음식을 공급해달라고 요구하며 집기와 집을 부수고 불을 지르니, 의 관리들이 두려워하여 산속으로 도망쳐 숨었다.
이듬해 3월에 客星天庫를 범하였고, 유성이 天棓으로 떨어지니,
점성가가 “御前에 갑작스런 전란이 있을 것이니 의당 모아놓은 재물을 풀어 祓除해야만 합니다.”라고 하였다. 宰相이 창고의 재물을 내어 군사들에게 공급해주기를 청하니 莊宗은 허락하였지만,
皇后가 동의하지 않고 말하기를 “우리 夫婦가 천하를 얻은 것은 비록 武功으로 인한 것이지만 대개 또한 天命이 있었습니다. 이 이미 하늘에 있으니, 사람들이 우리를 어찌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재상이 延英殿에서 〈이 문제를〉 의논하였는데, 황후가 병풍 뒤에서 귀를 대고 듣고서 인하여 화장대와 皇幼子 滿喜를 취하여
皇帝 앞에 두고 말하기를 “諸侯가 바친 공물은 죄다 내려주어 궁중에 남은 것은 오직 이것뿐입니다.”라고 하고 이를 팔아서 군사들에게 지급해주기를 청하니, 재상이 황공하여 물러났다.
趙在禮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출병하여 魏州를 토벌하면서 비로소 물건을 내어 군사들에게 지급하니, 군사들이 물건을 등에 지고 욕하기를 “우리의 妻子는 이미 굶어 죽었으니, 이것을 가져간들 무엇하겠는가.”라고 하였다.
莊宗이 동쪽으로 汴州로 행행할 때에 군사 2만5천 명으로 御駕를 호종하게 하였는데 萬勝에 도착하여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돌아오니, 군사들이 離散하여 잃은 군사가 태반이었다. 罌子谷에 이르니 도로가 더욱 좁아졌다.
장종이 병장기를 잡은 從官들을 보고서 모두 좋은 말로 군사를 위로하며 말하기를 “마침 魏王을 평정하여 金銀 50만을 얻었다는 보고를 받았으니, 이를 모두 너희들에게 지급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대답하기를 “폐하께서 군사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 너무 늦었으니, 받는 사람도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莊宗이 눈물을 흘리며 인하여 內庫使 張容哥를 돌아보고서 袍帶를 뒤져 군사들에게 하사하게 하니, 장용가가 “포대가 바닥이 났습니다.”라고 하였다.
군사들이 장용가를 질타하기를 “우리 임금이 이런 지경에 이르게 한 것은 모두 너희들 때문이다.”라고 하고 인하여 칼을 뽑아 쫓으니, 좌우 사람들이 막아 죽음을 면하였다.
장용가가 말하기를 “皇后가 재물을 아까워하여 군사들에게 지급하지 않았는데 죄를 나에게 돌리니, 사태가 만약 不測하게 되면 나의 몸은 만 조각이 날 것이다.”라고 하고 이에 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郭從謙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장종이 流矢에 맞아 큰 상처를 입어 絳霄殿 행랑 아래에 누워 있다가 갈증이 나 물을 마시려고 하자, 皇后가 환관을 시켜 데운 타락죽을 올리게 하고 자신이 직접 장종을 돌보지 않았다.
장종이 하자 황후와 李存渥 등이 嘉慶殿을 불태우고 기병 1백 를 데리고 師子門을 빠져 나갔다. 황후가 말 위에서 전대에 金器寶帶 등을 담고서 太原에서 절을 짓고 비구니가 되려고 하였다.
길에서 이존악과 간통하고, 태원에 이르러 삭발하고 비구니가 되었는데, 明宗이 즉위하자 사람을 보내 황후를 賜死하였다. 나라 天福 5년(940)에 神閔敬皇后라는 追諡가 내려졌다.


역주
역주1 唐劉后傳 : 劉皇后(?~926 魏州 成安 사람이다. 유황후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49 〈唐書 第25 后妃列傳〉, ≪新五代史≫ 卷14 〈唐家人傳 第2〉에 각각 실려 있다.
유황후가 황후가 된 과정은 다음과 같다. 晉王 李存勖(後唐 莊宗 위주를 공격하여 성안을 노략질할 때에 裨將 袁建豐이 5, 6세쯤 되는 后를 얻어 晉나라 宮에 들이니 貞簡太后가 생황 부는 법, 춤, 노래 등을 가르쳤다. 성인이 되자 몹시 美色이 있어 後唐 莊宗이 보고 좋아하니, 정간태후가 장종에게 내려주었고 후에 황후가 되었다.
본 열전에는 유황후가 장종의 황후가 되는 과정과 장종의 총애를 믿고 재화를 탐닉하고 권력을 천단한 일, 장종 사후에 明宗에게 賜死되는 과정 등을 사실적으로 서술하여 유황후의 잔혹하고 탐욕스런 모습을 잘 드러내었다.
특히 황후가 자신의 미천한 신분을 숨기기 위해 자신을 찾아온 아버지를 笞를 쳐 쫓아낸 일, 佛敎에 심취하여 국고를 탕진한 일, 藩鎭과 결탁하여 권력을 천단한 일, 아들을 강권하여 郭崇韜를 죽인 일, 반란군에 의해 큰 상처를 입은 장종을 직접 돌보지 않고 宦官에게 맡겨둔 일, 장종이 崩하자 李存渥과 달아나다 길에서 간통한 일 등을 생생하게 묘사함으로서 왕후의 잔혹하고 탐욕스런 모습을 더욱 부각시켰다.
결국 황후의 이런 탐욕은 반란의 빌미가 되었고 그 와중에 장종과 아들 李繼岌은 죽임을 당하는 비참한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歐陽脩는 ≪신오대사≫ 〈莊宗紀〉에서 “劉氏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立劉氏爲皇后]”라고 서술하였는데, 이는 의도적인 서술방식으로 보인다. 구양수가 ≪신오대사≫를 저술하는 과정에서 황후가 될 자격을 갖추어 정당한 방법으로 황후가 된 경우에는 〈明宗紀〉의 “淑妃 曹氏를 세워 황후로 삼았다.[立淑妃曹氏爲皇后]”와 같이 某妃 혹은 某夫人을 황후로 삼았다고 서술한 반면, 부정한 방법 혹은 자격이 없는 사람이 황후가 된 경우는 〈장종기〉의 서술방식처럼 ‘某氏를 황후로 삼았다.’라고 서술하였다. 구양수의 이러한 서술방식은 그녀를 황후가 될 자격조차 없는 사람으로 크게 폄하한 것이지만 〈劉皇后傳〉을 서술하는 과정에서는 유황후의 淫行을 있는 그대로 서술할 뿐 貶辭를 두지는 않았다.
구양수는 〈장종기〉에서 이미 유황후에 대한 평가를 내렸고, 또한 〈家人傳〉에서 황후의 탐욕이 나라와 집안과 자신을 망하게 하는 과정을 구체적으로 서술함으로써 유황후의 과실을 후세에 생생하게 전하였고, 아울러 後宮을 총애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는 후세의 人主를 경계하였다.
역주2 太史公呂后紀及外戚諸傳 : ≪史記≫의 〈呂太后本紀〉와 〈外戚世家〉를 가리킨다.
역주3 自下魏博……獨以劉氏從 : ≪五代史纂誤≫ 巻上에 “지금 本紀를 살펴보건대, 梁 末帝 貞明 元年(915 魏博 등 여러 州가 晉에 편입되었고, 龍德 3년(923) 梁나라가 망하였다. 처음부터 끝까지 모두 9년이므로 10여 년이 될 수 없다.[今按本紀 梁末帝 貞明元年魏博諸州入于晉 至龍德三年 梁亡 首尾共九年 不得爲十餘年也]”라고 하였다.
역주4 魏博 : 唐나라의 方鎭 이름으로 鄴에 治所가 있었고, 지금의 河北省 大名‧磁縣, 河南省 滑縣 및 山東省 冠縣 등이 관할지역이었다.
역주5 同光二年四月己卯……遣使冊劉氏爲皇后 : ≪五代史纂誤≫ 巻上에 “지금 〈莊宗紀〉를 살펴보건대 ‘同光 2년(924) 2월 癸未에 劉氏를 皇后로 세웠다.’라고 하여 이 列傳의 내용과 같지 않으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今按莊宗紀 乃是同光二年二月癸未 立皇后劉氏 與此不同 未知孰是]”라고 하였다.
역주6 重翟車 : 王后가 타는 다섯 가지 수레 중의 하나로 꿩의 깃털로 장식한 수레를 말한다.(≪周禮≫ 〈春官 巾車〉)
역주7 <그림 name="2020_구양수5_1962668654" sizex="300" sizey="" type="jpg" unit="pixel"><키워드/><그림설명>重翟車 鹵簿 : 鹵는 방패를 가리키고 簿는 행렬의 차례를 기록한 장부를 가리키는데, 왕이나 왕비의 거둥 때의 儀仗 또는 儀仗을 갖춘 행렬을 말한다.
역주8 于闐(전) : 漢나라 때 西域 36국의 하나로서 지금의 新彊省 和闐縣 부근에 있었던 작은 나라이다. 蔥嶺의 북쪽에 있었다고 한다.
역주9 中使 : 宮中에서 파견한 使者로, 대체로 宦官을 가리킨다.
역주10 伊闕 : 지금의 河南省 洛陽市 남쪽에 있는데, 두 개의 산이 대궐처럼 마주보고 있고 그 사이로 伊水가 통과하고 있기 때문에 이렇게 명명한 것이다.
역주11 客星 : 일정한 곳에 늘 있지 아니하고 일시적으로 나타나는 별을 말한다.
역주12 天庫 : 五車星 중의 하나이다. 五車星은 동북쪽 별인 天獄, 동쪽 별인 天倉, 동남쪽 별인 司空, 서남쪽 별인 卿星, 서북쪽 별인 天庫이다.
역주13 天棓(봉) : 일명 覺星이라고도 한다. 그 본체는 별과 유사하고, 끝은 뾰쪽하고 길이는 4길이다. 동북방으로 나오기도 하고 서방으로 나오기도 한다.(≪記言≫ 續集 〈敍述〉)
역주14 延英 : 唐나라 때의 宮殿 이름으로 延英門 안에 있다.
역주15 明年三月……始出物以賚軍 : ≪五代史纂誤≫ 巻上에 “지금 〈莊宗紀〉를 살펴보건대 趙在禮는 同光 4년(926) 2월 癸巳에 貝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甲午에 鄴都를 함락시켰는데, 甲辰에 李嗣源이 조재례를 토벌하고 3월에 이사원이 반란을 일으킨 것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조재례가 반란을 일으킨 것과 이사원이 토벌한 것은 모두 1개월 내에 있었던 일인데, 星變은 3월에 있었다. 지금 여기서 3월에 성변한 일을 먼저 서술하고 그 후에 비로소 조재례가 반란을 일으킨 것을 언급하였으니, 일의 순서가 전도되어 序次가 잘못되었다.[今按莊宗紀 趙在禮以同光四年二月癸巳 反于貝州 甲午陷鄴都 甲辰李嗣源討在禮 三月嗣源反 然則趙在禮反及嗣源討之 皆在一月 而星變在三月 今此先敍三月星變之事 而後乃及趙在禮作亂 則顚倒失序矣]”라고 하였다.
역주16 袍帶 : 비단 도포와 腰帶를 말하는데, 여기서는 군왕이 입던 常服을 말한 것이다.
역주17 天福 : 936~943. 後晉 高祖 때의 연호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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