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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5)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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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莊宗 嬖於色하야 立劉后 劉后險側하야 爲中官左右所詿誤하야 而強其子繼岌하야 以賊殺大將郭崇韜於蜀이라
嗟乎 使崇韜 尙在明宗이면 未必反이요 卽反而明宗據天下라도 崇韜猶可以全蜀擁繼岌하리니 社稷之存亡 猶可半也
歐公摹寫明鬯하야 殊爲嗚咽하니 可爲後世人主寵倖后宮濁亂朝政者之戒
莊宗五子 長曰繼岌이요 其次繼嵩繼蟾繼嶢 繼岌母 曰劉皇后 其四 皆不著其母名號
莊宗卽位 繼岌爲北都留守하고 判六軍諸衛事하고 遷檢校太尉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豆盧革爲相하야 建言唐故事皇子皆爲라하야 因以鄴宮爲興聖宮하야 以繼岌爲使
同光三年 封魏王이라 是歲 伐蜀할새 하니 工部尙書任圜翰林學士李愚 皆參軍事하다
九月戊申 將兵六萬하야 自鳳翔으로 入大散關하니 軍無十日之糧이로대 而所至州鎭皆迎降하야 遂食其粟이라
至興州하야 蜀將程奉璉 以五百騎降일새 因以其兵修閣道以過唐軍이라
王衍 將兵萬人하야 屯利州하고 分其半하야 逆戰于三泉하야 爲先鋒康延孝所敗
衍懼하야 斷吉栢江浮橋하야 奔歸成都하고 唐軍自文州間道以入하다
하니 衍上牋請降하다
丙辰 入成都하니 王衍 乘竹輿하야 至昇仙橋하야 素衣牽羊하고 草索繫首하고 肉袒하고 群臣衰하야 徒跣以降이라
繼岌 下而取璧하니 崇韜解縛焚襯이라 自出師 至降衍 凡七十五日이요 兵不血刃하니
自古用兵之易 未有如此 然繼岌雖爲都統이나 而軍政號令 一出崇韜
莊宗 遣宦者供奉官李從襲監中軍하고 高品李廷安呂知柔爲이라 從襲等 素惡崇韜러니 又見崇韜專任軍事하고 益不平之
及破蜀하야 蜀之貴臣大將自王宗弼以下 皆爭以蜀寶貨妓樂奉崇韜父子어늘 而魏王所得 匹馬束帛而已
崇韜 日決軍事 將吏賓客趨走盈庭이나 而都統府 惟大將晨謁하고 牙門閴然이라
由是 從襲等 不勝其憤이러니 已而 宗弼率蜀人하야 見繼岌하야 請留崇韜鎭蜀이라 從襲等 因言崇韜有異志라하고 勸繼岌爲備
繼岌崇韜曰 陛下倚侍中 如衡華하야 尊之廟堂之上하야 期以一天下而制四夷하니 必不棄元老於蠻夷之地 此事非予敢知也라하다
莊宗 聞崇韜欲留蜀하고 亦不悅하야 遣宦者向延嗣하야 趣繼岌班師
延嗣至成都 崇韜不出迎하고 及見 禮益慢하니 延嗣怒 從襲等 因告延嗣崇韜有異志하야 恐危魏王하다
延嗣還하야 具言之하니 劉皇后 涕泣請保全繼岌한대 莊宗遣宦官馬彦珪하야 往視崇韜去就
是時 新定이나 孟知祥未至하고 所在盜賊亡聚山林이라 崇韜 方遣任圜等하야 分出招集하니 恐後生變이라
故師未卽還이어늘 而彦珪將行 見劉皇后하고 曰 臣見延嗣하니 言蜀中事勢已不可
禍機之作 間不容髮이로대 安能三千里往復禀命乎아하다 劉皇后 以彦珪語 告莊宗하니
莊宗曰 傳言未審하니 豈可便令果決이리오하다 皇后以不得請하야 因自爲敎하야 與繼岌하야 使殺崇韜하다
明年正月 崇韜 留任圜守蜀하야 以待知祥之至러니 崇韜 期班師有日 彦珪至蜀하야 出皇后敎하야 示繼岌하니
繼岌曰 今大軍將發 未有釁端하니 豈可作此負心事리오하다 從襲等 泣曰 今有密敕이어늘 王苟不行하여 使崇韜知之 則吾屬無類矣라하니
繼岌曰 上無詔書로대 徒以皇后手敎 安能殺招討使리오하다 從襲等 力爭이어늘 繼岌不得已而從之
詰旦 從襲以都統命으로 召崇韜하고 繼岌登樓以避之러니 崇韜入昇階 繼岌從者李環 撾碎其首 繼岌遂班師하다
二月 軍至泥溪한대 先鋒康延孝叛하야 據漢州하니 繼岌遣任圜하야 討平之하다
四月辛卯 至興平하야 聞明宗反하야 兵入京師하고 繼岌 欲退保鳳翔이라 至武功한대 李從襲 勸繼岌하야
馳趣京師以救內難이라 行至渭河하니 西都留守張籛 斷浮橋하야 繼岌不得渡 乃循河而東하야 至渭南하니 左右皆潰
從襲謂繼岌하야 曰 大事已去하야 福不可再하니 王宜自圖하라하다 繼岌徘徊泣下라가 謂李環하야 曰 吾道盡途窮하니 子當殺我하라하다
環遲疑라가 久之 謂繼岌乳母하야 曰 吾不忍見王하니 王若無路求生하면 當踣面以俟하라하다
繼岌面榻而臥하니 環縊殺之 任圜 從後至하야 葬繼岌于華州之西南이라 繼岌 少病閹無子
明宗已卽位 圜率征蜀之師二萬하야 至京師하니 明宗撫慰 久之 問圜繼岌何在하니 圜具言繼岌死狀이라
同光三年 詔以皇子繼嵩繼繼蟾繼嶢皆爲光祿大夫檢校司徒하니 蓋其皆幼 故不封이라
當莊宗遇弑時 太祖子孫在者十有一人이어늘 明宗入立 其四人見殺하고 其餘皆不知所終하니 이라
按傳本末컨대 崇韜 初未嘗有留蜀之志 特以其身爲大將하야 而蜀中兵士多附之하고 且都統繼岌在上이나 而崇韜不能以成功已居其下
所以外爲蜀人所擁附하야 而流言於路하고 內爲宦官及繼岌部曲所忌하야 而因以行讒于朝
卒之 莊宗亦惑하고 而劉后矯詔하야 令其子繼岌誅之하야 國遂以亡하니 悲夫


03. 後唐 李繼岌傳記
莊宗女色을 좋아하여 劉后皇后로 세웠다. 유후가 陰險하고 邪僻한 나머지 측근에 있는 宦官이 잘못 보필한 탓에 아들 李繼岌을 강권하여 大將 郭崇韜에서 죽였다.
아. 가령 곽숭도가 오히려 明宗 때에 살아 있었다면 〈명종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가령 반란을 일으켜 명종이 천하를 점거하더라도 곽숭도가 오히려 온전한 을 가지고 이계급을 擁衛하였을 것이니, 社稷을 보존할 확률이 그래도 절반은 되었을 것이다.
歐陽公이 묘사한 것이 분명하고 명쾌하여 〈이 사실을 두고〉 몹시 오열하였으니, 후궁을 총애하여 조정을 어지럽히는 후세의 人主에게 경계가 될 만하다.
莊宗은 아들이 다섯이니, 장자는 繼岌이고 다음은 繼潼繼嵩繼蟾繼嶢이다. 계급의 어머니는 劉皇后이고, 나머지 4명의 아들은 모두 어머니의 名號가 드러나지 않았다.
장종이 즉위함에 계급이 北都留守가 되고 六軍諸衛事를 맡았고 檢校太尉 同中書門下平章事로 승진하였다.
豆盧革宰相이 되어 “나라의 故事 중에 皇子는 모두 宮使가 되어야 하는 예가 있다.”라고 건의하여, 인하여 鄴宮興聖宮으로 만들어 계급을 궁사로 삼았다.
同光 3년(925)에 魏王에 봉해졌다. 이해에 을 정벌할 때에 李繼岌西南面行營都統으로 삼고 郭崇韜都招討使로 삼으니, 工部尙書 任圜翰林學士 李愚가 모두 參軍事가 되었다.
9월 戊申日에 군사 6만을 이끌고 鳳翔에서 大散關으로 들어갔는데, 군에 10일치의 군량이 없었지만 이르는 마다 모두 영접하여 항복하므로 마침내 그곳의 양식을 먹었다.
興州에 도착하여 의 장수 程奉璉이 5백의 기병을 거느리고 항복하기에, 인하여 그 군사로 棧道를 보수하여 나라 군사를 건너게 하였다.
王衍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利州에 주둔하고 군사의 절반을 나누어 三泉에서 맞이하여 싸워 先鋒 康延孝에게 패하였다.
왕연이 두려워 吉栢江浮橋를 끊고서 달아나 成都로 돌아갔고, 나라 군사는 文州로부터 샛길을 통해 성도로 들어갔다.
10월 己酉日李繼岌綿州에 도착하니 王衍牋文을 올려 항복을 청하였다.
丙辰日成都로 들어가니, 왕연이 竹輿를 타고 昇仙橋에 이르러 素服을 입고 양을 끌고 풀로 만든 끈으로 머리를 묶고 어깨를 드러내고 璧玉을 입에 물고 관을 등에 지고 신하들은 喪服을 입고 맨발을 드러내놓고 항복하였다.
이계급이 수레에서 내려 벽옥을 잡으니, 郭崇韜가 결박을 풀고 관을 불태웠다. 출병하여 왕연을 항복시키는 데 걸린 시간은 모두 75일이었고 군사들이 칼에 피를 묻히지 않았으니,
예로부터 이처럼 쉽게 用兵한 적은 없었다. 그러나 이계급이 비록 都統이라고는 하지만 軍政號令은 모두 곽숭도에게서 나왔다.
당초에 莊宗이 환관인 供奉官 李從襲을 보내 中軍을 감찰하게 하고 高品 李廷安呂知柔典謁로 삼았다. 이종습 등은 평소 郭崇韜를 미워하였는데, 또 곽숭도가 軍務를 전임하고 있음을 보고 더욱 불만을 가졌다.
을 격파하여 점령하자 王宗弼로부터 이하 貴臣大將들이 모두 앞다퉈 寶貨와 기녀들로 곽숭도 父子를 모셨는데, 魏王이 얻은 것은 한 마리의 말과 1의 비단, 唾壺麈柄일 뿐이었다.
唾壺唾壺
麈
곽숭도가 매일 군무를 결제할 때면 軍官과 빈객들이 달려와 뜰에 가득하였으나, 都統府大將만이 새벽에 배알하고는 牙門이 조용하였다.
이로부터 이종습 등이 분을 이기지 못하였는데, 이윽고 왕종필이 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李繼岌을 만나 곽숭도를 에 남겨 鎭守할 수 있게 해주기를 청하였다. 이종습 등이 이로 인하여 곽숭도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다고 말하고 이계급에게 대비할 것을 권하였다.
이계급이 곽숭도에게 말하기를 “폐하께서 侍中衡山華山과 같이 신뢰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廟堂上賓으로 존중하여 천하를 통일하고 四夷를 제어하기를 기대하시니, 반드시 元老를 오랑캐 땅에 버리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니 이 일은 제가 감히 알 바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莊宗郭崇韜에 머물고자 한다는 말을 듣고 또한 불쾌하여 환관 向延嗣를 보내 李繼岌에게 회군할 것을 재촉하였다.
상연사가 成都에 도착했을 때에 곽숭도가 나와 맞이하지 않고 만났을 때에 가 더욱 거만하니, 상연사가 노하였다. 李從襲 등이 이로 인하여 상연사에게 곽숭도가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니 魏王을 위태롭게 할까 두렵다고 고하였다.
상연사가 돌아와 이 사실을 갖추어 말하니, 劉皇后가 눈물을 흘리며 이계급을 보전해달라 청하였다. 그러자 장종이 환관 馬彦珪를 보내 곽숭도의 거취를 가서 살펴보게 하였다.
이때에 兩川이 새로 평정되었으나 孟知祥이 돌아오지 않았고 도처의 도적들이 산속으로 도망하여 모였다. 곽숭도가 막 任圜 등을 파견하여 나누어 보내 항복을 권하니, 뒤에 변란이 생길까 염려한 것이다.
그러므로 군사들이 즉시 돌아오지 않은 것인데, 마언규가 성도로 떠나려 할 때에 유황후를 보고 말하기를 “신이 상연사를 만나보니 상연사가 事勢는 이미 어쩔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말하였습니다.
禍患의 기미가 일어나는 것은 그 사이에 머리털 하나 용납하지 못할 만큼 〈급박하니 조금의 여유도 두어서는 안 되는데〉 어찌 3천 리 길을 오가며 을 받아 처리할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유황후가 마언규의 말을 장종에게 고하니,
장종이 말하기를 “전해들은 말을 자세히 알지 못하는데, 어찌 대뜸 저들에게 과감하게 결단하게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皇后가 청한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자 인하여 스스로 敎命을 내려 이계급에게 주어 곽숭도를 살해하게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郭崇韜任圜을 남겨 을 지키게 하여 孟知祥이 오는 것을 기다리게 하였는데, 곽숭도가 회군해야 할 기일이 얼마 남지 않음에 馬彦珪에 도착하여 皇后敎命을 꺼내 李繼岌에게 보여주니,
이계급이 말하기를 “지금 大軍이 출발하려고 할 때에 아직 분쟁의 단서가 있지 않으니 어찌 마음을 저버리는 일을 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李從襲 등이 울면서 “지금 密勅이 있는데도 왕께서 만일 결행하지 않는다면 곽숭도가 이 사실을 알 경우에는 우리들은 모두 죽을 것입니다.”라고 하니,
이계급이 “위에서 내린 詔書가 없는데, 한갓 황후의 手敎만 가지고 어찌 招討使를 죽일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종습 등이 힘써 간쟁하자 이계급이 어쩔 수 없이 그 말을 따르기로 하였다.
아침에 이종습이 都統의 명으로 곽숭도를 부르고 이계급은 에 올라 피하였는데, 곽숭도가 들어와 계단을 오르자 이계급의 從者 李環이 그의 머리를 내리쳐 부수었다. 이계급이 마침내 회군하였다.
2월에 군대가 泥溪에 이르렀는데 先鋒 康延孝가 반란을 일으켜 漢州를 점거하니, 李繼岌任圜을 보내 토벌하여 평정하였다.
4월 辛卯日興平에 이르러 明宗이 반란을 일으켜 군사가 京師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이계급은 퇴각하여 鳳翔을 지키려고 하였다. 武功에 이르자 李從襲京師로 급히 달려가 내란을 구제하라고 이계급에게 권하였다.
행군하다 渭河에 이르니 西都留守 張籛浮橋를 끊어 이계급이 건널 수 없었다. 이에 위하를 따라 동쪽으로 가 위하 남쪽에 도착하니, 좌우 사람들이 모두 흩어져버렸다.
이종습이 이계급에게 말하기를 “큰 일이 이미 잘못되어 복을 다시 누릴 수 없으니, 왕께서는 살길을 스스로 도모하소서.”라고 하였다. 이계급이 배회하며 눈물을 흘리다가 李環에게 말하기를 “나에게는 살길이 없으니, 네가 나를 죽여라.”라고 하였다.
이환이 오랫동안 고민하다 시간이 많이 지난 뒤에 이계급의 乳母에게 말하기를 “나는 차마 왕의 얼굴을 보고 〈죽일 수〉 없으니, 왕이 만약 살길이 없다면 땅을 향해 얼굴을 돌리고 기다려라.”라고 하였다.
이계급이 침대를 향해 얼굴을 대고 눕자 이환이 목을 졸라 죽였다. 임환이 뒤처져 있다 도착하여 華州의 서남쪽에 이계급을 안장하였다. 이계급은 어릴 때 병으로 고자가 되어 자식이 없다.
明宗이 이미 즉위함에 任圜을 토벌하러 갔던 군사 2만을 거느리고 京師에 이르니, 명종이 慰撫하였다. 오래 지난 뒤에 李繼岌이 어디에 있는지를 임환에게 물으니, 임환이 이계급이 죽은 정황을 상세하게 말하였다.
同光 3년(925)에 詔書를 내려 皇子 繼嵩繼潼繼蟾繼嶢를 모두 光祿大夫 檢校司徒로 삼으니, 대개 모두 어렸기 때문에 봉해주지 않은 것이다.
莊宗이 시해당할 때에 太祖의 자손 중에 살아 있었던 사람은 11명이었는데, 명종이 즉위할 때에 네 명이 살해당하고 나머지는 모두 어떻게 죽었는지 알 수 없으니, 太祖의 후손이 마침내 끊어졌다.
本末을 살펴보니 郭崇韜는 애당초 에 머물 마음이 없었고, 다만 자신이 大將이 되어 의 군사들이 많이 依附하였고, 또 都統 李繼岌은 지위는 높지만 곽숭도는 전공을 이루었기 때문에 이미 그 밑에 있을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밖으로는 의 사람들이 옹호하고 의부한 탓에 길거리에 流言蜚語가 퍼졌고, 안으로는 환관과 이계급의 私兵들에게 미움을 받아 이로 인해 조정에 참소가 행해졌다.
마침내 莊宗도 의심하고 劉后詔書를 위조하여 아들 이계급을 시켜 죽이니 나라가 마침내 망하였다. 슬프다.


역주
역주1 唐繼岌傳 : 李繼岌(?~924 後唐 莊宗의 장자로 劉皇后의 아들이다. 장종의 아들은 모두 다섯 명인데, 이계급 외에 나머지 네 명의 어머니는 名號가 불분명하다. 이계급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51 〈唐書 第27 宗室列傳 第3〉, ≪新五代史≫ 권14 〈唐家人傳 第2〉에 각각 실려 있다.
이 전기는 이계급에 대한 열전이지만 그에 대한 傳記는 간략한 반면, 郭崇韜와 함께 蜀을 정벌하는 과정과 蜀을 정벌한 뒤 이계급의 주변 인물들과 곽숭도의 갈등, 갈등으로 인한 곽숭도의 죽음, 그의 죽음이 後唐에 미친 영향 등을 주로 묘사하였다.
이들의 갈등은 지위는 높지만 실질적인 軍權이 없었던 이계급과, 지위는 낮지만 실질적인 군권을 가졌고 명망도 높았던 곽숭도의 관계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잠복되어 있던 이계급과 곽숭도 두 사람 사이의 갈등은 蜀을 정벌한 뒤로 모든 공로가 곽숭도에게만 집중되자 이를 시기한 이계급의 주변인들이 곽숭도를 참소하면서 심화된다. 특히 장종이 곽숭도의 회군을 독촉하기 위해 보낸 환관 向延嗣가 대접을 소홀히 한 곽숭도에게 원한을 가져 곽숭도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조정에 보고하고 결국 유황후가 詔書를 위조하여 이계급에게 곽숭도를 죽일 것을 강권하면서 갈등은 극에 달한다.
이계급이 끝내 유황후의 명에 따라 부득이하게 곽숭도를 軍營에서 죽이지만 곽숭도가 죽은 뒤 이계급은 明宗이 반란을 일으켜 京師로 들어간다는 소식을 듣고 경사로 돌아가던 중 반란군에 의해 자신의 군사가 모두 흩어지자 결국 자결한다.
이계급에 대해 ≪구오대사≫에서는 “이계급이 어린 나이로 統帥의 직임을 맡아 비록 劍外에서 공을 이루었지만 얼마 뒤 渭水 가에서 자결하였으니, 운이 다하여 하늘이 그를 죽게 한 것이므로 孺子가 허물할 것은 아니다.[繼岌以童騃之歲 當統帥之任 雖成功于劒外 尋求死于渭濱 蓋運盡天亡 非孺子之咎也]”라고 평하여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몰려 나라를 잃고 자신도 죽게 되었음을 말하였다. ≪신오대사≫에서도 곽숭도를 죽이라는 유황후의 조서가 내려오자 이를 반대하다 결국 주변인들의 強勸으로 어쩔 수 없이 죽이는 것으로 묘사하여 곽숭도를 죽인 과실을 이계급에게 돌리지 않았다.
篇首에 茅坤이 평하기를 “아. 가령 곽숭도가 오히려 명종 때에 살아 있었다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키지 않았을 것이고, 가령 반란을 일으켜 명종이 천하를 점거하더라도 곽숭도가 오히려 온전한 蜀을 가지고 이계급을 擁衛하였을 것이니, 社稷을 보존할 확률이 오히려 절반은 되었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즉 이 전기는 이계급의 전기이지만 이계급과 곽숭도 사이에서 벌어진 사건을 중심으로 이야기를 전개하여 五代時代의 혼란했던 시대상을 보여줌과 동시에 환관들과 유황후의 專橫을 적시하여 후세의 人主를 경계하는 데에 목적을 두었다 할 수 있다.
역주2 (漳)[潼] : 저본에는 ‘漳’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潼’으로 바로잡았다.
역주3 宮使 : 하나의 宮을 주관하는 관원을 말한다.
역주4 以繼岌爲西南面行營都統 郭崇韜爲都招討使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本紀를 살펴보건대 ‘魏王 李繼岌을 西川四面行營都統으로 삼았고 郭崇韜를 招討使로 삼았다.’고 하였는데, 〈郭崇韜傳〉에는 ‘이계급을 西南面行營都統으로 삼고 곽숭도를 招討使로 삼았다.’고 하였다. 西川四面과 西南面, 都招討와 招討는 권력에 輕重이 있으니 서술함에 하나로 통일해야만 한다.[按木紀 魏王繼岌爲西川四面行營都統 郭崇韜爲招討使 崇韜傳 乃以繼岌爲西南面行營都統 崇韜爲招討使 西川四面與西南面 都招討與招討 權有重輕 書宜從一]”라고 하였다.
역주5 十月己酉……至綿州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舊五代史≫의 本紀를 살펴보건대 ‘十月 庚午朔’이라 되어 있으니 이달에 어찌 己酉日이 있겠는가. 의당 본기를 따라 11월이 되어야 한다.[按薛史本紀十月庚午朔 是月中安得有己酉 宜從本紀 作十一月]”라고 하였다.
역주6 衘璧輿襯 : 입에 구슬을 물고 등에 관을 지는 예라는 뜻으로, 적에게 항복하는 예를 뜻한다. ≪春秋左氏傳≫ 僖公 6년에 “〈許나라 군주가 楚나라에 항복할 때,〉 許나라 군주인 남작이 앞으로 손을 묶고 구슬을 입에 물었으며, 그의 대부는 喪服을 입고, 士는 관을 등에 졌다.[許男面縛銜璧 大夫衰絰 士輿櫬]”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7 (經)[絰] : 저본에는 ‘經’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絰’로 바로잡았다.
역주8 典謁 : 빈객을 접대하는 사무를 관장하는 관직을 말한다.
역주9 唾壺 : 입구는 좁고 배가 부른 모양의 가래를 뱉는 도자기를 말한다. 唾具라고도 한다.
역주10 麈柄 : 고라니의 꼬리로 만든 먼지떨이로, 옛날에 高士들이 閑談할 때 손에 들고 벌레를 쫓거나 먼지를 터는 데 썼던 도구이다. 麈尾라고도 한다.
역주11 (請)[謂] : 저본에는 ‘請’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謂’로 바로잡았다.
역주12 兩川 : 東川과 西川을 말한다. 唐 肅宗 至德 2년(757) 劍南道에 東川과 西川 두 절도사를 두었던 데서 유래한다.
역주13 (漳)[潼] : 저본에는 ‘漳’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潼’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4 太祖之後遂絶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2에 “≪淸異錄≫에 ‘後唐의 福慶公主는 孟知祥에게 下嫁하였다. 長興 4년에 明宗이 崩하자 後唐이 혼란하였는데, 莊宗의 자손들은 삭발하고 比丘가 되어 샛길로 蜀으로 달아났다. 이때에 맹지상이 稱帝하고 公主를 위하여 자식처럼 후하게 대우하고 많은 재물을 하사하였다.’고 하였으니 〈후손이〉 끊어진 것은 아니다.[淸異錄 後唐福慶公主下降孟知祥 長興四年 明宗晏駕 唐室難 莊宗諸兒削髮爲苾芻 間道走蜀 時知祥新稱帝 爲公主厚侍猶子 賜予千計 則未絶也]”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5) 책은 2021.01.06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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