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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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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0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01.
歐陽公於五代史 作一行傳하니 而其言文하고 其旨遠일새 予故錄而出之하노라
嗚呼 五代之亂極矣하니 인저
當此之時하야 臣弑其君하고 子弑其父어늘 而搢紳之士 安其祿而立其朝하야 充然無復廉恥之色者 皆是也
吾以謂自古忠臣義士 多出於亂世어늘 而怪當時可道者何少也오하노니 豈果無其人哉
雖曰干戈興하고 學校廢하야 而禮義衰하고 風俗隳壞 至於如此 然自古天下 未嘗無人也
吾意必有潔身自負之士 嫉世遠去而不可見者로라
自古材賢 有韞于中而不見于外하야 或窮居陋巷하야 委身草莽하니 雖顔子之行이라도 不遇仲尼 而名不彰이어든
況世變多故하야 而君子道消之時乎
吾又以謂必有負材能修節義而沈淪于下하야 泯沒而無聞者라하야
求之傳記호되 而亂世崩離하고 文字殘缺하야 不可復得이라 然僅得者四五人而已
處乎山林而群麋鹿 雖不足以爲中道 然與其食人之祿하야 俛首而包羞 孰若無愧於心하야 放身而自得 吾得二人焉하니 曰鄭遨張薦明이라
勢利不屈其心하고 去就不違其義 吾得一人焉하니 曰石昻이라
苟利於君이면 以忠獲罪하니 何必自明이리오 有至死而不言者하니 此古之義士也 吾得一人焉하니 曰程福贇이라
五代之亂 君不君하며 臣不臣하며 父不父하며 子不子하고 至於兄弟夫婦人倫之際하야도 無不大壞而天理幾乎其滅하니
於此之時 能以孝悌自修於一鄕하야 而風行於天下者 猶或有之 然其事迹不著而無可紀次하니 獨其名氏或因見於書者 吾亦不敢沒이라 而其略可錄者 吾得一人焉하니 曰李自倫이라 作一行傳하노라
鄭遨 字雲叟 滑州白馬人也 故世行其字 遨少好學하고 敏於文辭
唐昭宗時 擧進士不中이러니 見天下已亂하고 有拂衣遠去之意하야 欲攜其妻子하야 與俱隱이어늘 其妻不從이라
遨乃入少室山爲道士하니 其妻數以書勸遨還家어늘 輒投之於火 後聞其妻子卒하고 一慟而止하다
遨與故善한대 振後事梁貴顯하야 欲以祿遨어늘 遨不顧
後振得罪南竄하니 遨徒步千里往視之 由是 聞者益高其行이러라
其後遨聞華山有脂淪入地하야 千歲化爲藥하야 能去하고 因徙居華陰하야 欲求之
與道士李道殷羅隱之友善하니 世目以爲三高士하다
遨種田하고 隱之賣藥以自給하고 道殷有釣魚術하야 鉤而不餌하고 又能化石爲金한대 遨嘗驗其信然而不之求也 節度使劉遂凝數以寶貨遺之로대 遨一不受하다
唐明宗時 以左拾遺하고 晉高祖時 以諫議大夫召之로대 皆不起하니 卽賜號爲逍遙先生하다 四年卒하니 年七十四
遨之節高矣 遭亂世하야 不汚於榮利하야 至棄妻子하고 不顧而去하니 豈非與世相絶而篤愛其身者歟
然遨好飮酒弈棋하고 하야 落人間하니 人間多寫以縑素하야 相贈遺以爲寶
至或圖寫其形하야 翫于屋壁하니 其迹雖遠而其名逾彰하야 與乎異矣
與遨同時有張薦明하니 燕人也 少以儒學遊河朔이러니 後去爲道士하야 通老子莊周之說이라
召見하야 問 道家可以治國乎아하니 對曰 이라 得其極者 尸居衽席之間하야 可以治天地也라하다
高祖大其言하야 延入內殿하야 講道德經하고 拜以爲師
薦明聞宮中奏時鼓하고 曰 陛下聞鼓乎 其聲一而已 五音十二律 鼓無焉이나 然和之者鼓也 夫一 萬事之本也 能守一者 可以治天下라하니 高祖善之하야 하다 後不知其所終이라
石昻 靑州臨淄人也
家有書數千卷하고 喜延四方之士하니 士無遠近 皆就昻學問한대 食其門下者或累歲라도 昻未嘗有怠色이러라
而昻不求仕進이러니 節度使符習 高其行하야 召以爲臨淄令하다
習入朝京師한대 監軍楊彦朗知留後事 昻以公事至府上謁하니 贊者以彦朗諱石 更其姓曰右
昻趨于庭하야 仰責彦朗曰 內侍奈何以私害公 昻姓石이요 非右也라하다 彦朗大怒하야 拂衣起去
昻卽趨出하야 解官還于家하야 語其子曰 吾本不欲仕亂世러니 果爲刑人所辱이로다 子孫其以我爲戒어다하다
昻父亦好學하고 平生不喜佛說이라
父死 昻於柩前誦尙書하고 曰 此吾先人之所欲聞也라하고 禁其家不可以佛事汙吾先人하다
晉高祖時 詔天下하야 求孝悌之士하니 戶部尙書王權 宗正卿石光贊 國子祭酒田敏 兵部侍郞王延等 相與詣東上閤門하야 上昻行義可以應詔이라
詔昻至京師하야 召見便殿하야 以爲宗正丞하다 遷少卿하다
出帝卽位 晉政日壞하니 昻數上疏極諫이로대 不聽이어늘 乃稱疾東歸하야 以壽終于家하다 昻旣去 而晉室大亂하다
程福贇者 不知其世家 爲人沈厚寡言而有勇이라
少爲軍卒하야 以戰功累遷洺州團練使하고 晉出帝時 爲奉國右廂都指揮使하다
契丹入寇하니 出帝北征한대 奉國軍士 乘間夜縱火焚營하야 欲因以爲亂이라
福贇身自救火被傷이러니 火滅而亂者不得發이라
福贇以爲契丹且大至어늘 而天子在軍하고 京師虛空하니 不宜以小故動搖人聽하야 因匿其事하고 不以聞하다
軍將李殷 位次福贇下 利其去而代之하야 因誣福贇與亂者同謀 不然이면 何以不奏오하니 出帝下福贇獄이라
人皆以爲冤이로대 福贇終不自辨以見殺하다
李自倫者 深州人也
天福四年正月 尙書戶部奏 深州司功參軍李自倫 六世同居하니 奉勅准格이라 按格컨대 孝義旌表 必先加按驗하야 孝者復其終身하고 義門仍加旌表 得本州審到鄕老程言等稱 自倫高祖訓이니 訓生粲하고 粲生則하고 則生忠하고 忠生自倫하고 自倫生光厚라하니 六世同居 不妄이라하야늘
勅以所居飛鳧鄕爲孝義鄕하고 匡聖里爲仁和里하며 准式旌表門閭하다
九月丙子 戶部復奏 前登州義門王仲昭六世同居 其旌表有하며 하며一丈하되 在烏頭之南三丈七尺하며 夾樹槐柳하되 十有五步하니 請如之라하다
勅曰 此故事也 令式無之 其量地之宜하야 高其外門하며 門安하며 左右建臺하되 高一丈二尺이요 廣狹方正稱焉하며 圬以白而赤其四角하야 使不孝不義者見之하야 可以悛心而易行焉하라하다


01. 한 가지 덕행德行이 드러났던 인물의 전기傳記
구양공歐陽公이 ≪오대사五代史≫에 〈일행전一行傳〉을 지었으니, 전하는 말에 이른바 “비바람이 몰아쳐 어둑어둑한 때에 닭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도다.”라는 것이다. 〈일행전〉은 그 말이 문아文雅하고 그 뜻이 심원하다. 내가 그러므로 수록하여 드러낸다.
아아! 오대五代 시절의 혼란이 극에 달하였으니, 옛글에 이른바 “천지가 폐색閉塞하면 현인賢人이 숨는다”는 시절일 것이다.
이러한 때를 당하여 신하는 그 임금을 시해하고 자식은 그 아비를 시해하거늘, 진신搢紳 사대부는 그 祿을 편안히 받으면서 조정에 서서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다시는 염치廉恥의 기색이 없는 경우가 전부였다.
나는 생각건대 예로부터 충신忠臣의사義士들은 난세에 많이 배출되었거늘, 괴이하게도 당시에는 언급할 만한 사람이 어찌하여 적은 것인가? 어찌 정말로 그러한 사람이 없었으랴.
비록 전란이 일어나고 학교가 폐해져 예의가 쇠퇴하고 풍속이 무너진 것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나, 예로부터 천하에 이러한 사람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
나는 생각건대 자신을 정결히 하여 자부심을 지닌 선비로서 세상을 싫어하여 멀리 떠나가 볼 수 없는 자가 반드시 있었을 것이다.
예로부터 재주와 어진 덕을 가슴속에 감추고 겉으로 드러내지 않고서 혹 누추한 거리에 곤궁하게 살며 초야에 몸을 의탁한 이들이 있었으니, 안자顔子처럼 행실이 돈독한 사람조차도 중니仲尼를 만나지 못했다면 그 이름이 드러나지 못했을 것이다.
하물며 세상에 변고가 많아 군자의 도가 사라지는 시기에 있어서랴.
나는 또 생각건대 재능을 자부하고 절의節義를 닦으면서 낮은 곳에 침체된 채 자취가 사라져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전기傳記에서 구해보았으나 난리통에 문헌이 일실逸失되어 다시 찾을 수가 없었다. 그렇게 해서 겨우 찾아낸 사람이 네다섯일 따름이다.
산림山林에 살면서 사슴과 무리지어 사는 것은 비록 중도中道라 하기에 부족하지만, 남의 祿을 받아먹으면서 머리를 조아리고 수치심을 품기보다는 마음에 부끄러움 없이 자유롭고 한가하게 몸을 풀어놓고서 유유자적하는 편이 낫지 않겠는가. 내가 이러한 사람을 둘 얻었으니, 정오鄭遨장천명張薦明이다.
권세와 이익이 그 마음을 굽히지 못하고 벼슬에 나아가고 떠남에 의리를 어기지 않는 이를 나는 한 사람 얻었으니, 석앙石昻이다.
진실로 임금에게 이로우면 충성으로 죄를 얻기도 하는 것이니 무엇하러 구태여 스스로 변명하겠는가. 죽음에 이르러서도 말하지 않는 이가 있으니 이런 사람은 옛날의 의사義士이다. 내가 이러한 사람을 하나 얻었으니 정복윤程福贇이다.
오대의 난세에 임금은 임금답지 못하고 신하는 신하답지 못하고 아비는 아비답지 못하고 자식은 자식답지 못하며 형제와 부부의 인륜人倫에 이르러서도 그 도리가 크게 무너져 천리天理가 거의 민멸泯滅되지 않은 것이 없었다.
이러한 때에 한 고을에서 효제孝悌로 스스로 행실을 닦아 천하에 그 풍도風度가 펼쳐진 자는 그래도 혹 있었다. 그러나 그 사적이 드러나지 않아 기술할 수 없으니, 오직 그 이름과 성씨만이라도 혹 서적에 드러난 이들을 내가 또한 감히 민몰泯沒시킬 수 없었다. 그 대략을 기록할 만한 이를 내가 한 사람 얻었으니 이자륜李自倫이다. 〈일행전一行傳〉을 짓노라.
정오鄭遨운수雲叟활주滑州 백마白馬 사람이다. 명종明宗조묘祖廟였으므로 당시에는 그의 를 불렀다. 정오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문사文辭에 재능이 있었다.
소종昭宗 때에 진사시進士試에 응시하여 합격하지 못했는데, 천하가 이미 어지러운 것을 보고 옷깃을 떨치고 멀리 떠나갈 뜻을 지니고서 그 처자를 이끌고 함께 은거하고자 하였으나, 그 아내가 따르지 않았다.
정오는 이에 소실산少室山으로 들어가 도사가 되니, 그의 아내가 자주 서신을 보내 집으로 돌아오라고 정오에게 권하였는데 그때마다 서신을 불속에 던져 넣었다. 그 후 처자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서는 한차례 통곡할 따름이었다.
정오는 이진李振과 예전부터 사이가 좋았는데, 이진이 뒤에 에서 벼슬하여 부귀하고 현달顯達해져서 작록爵祿으로 정오를 부르고자 하였으나 정오는 돌아보지 않았다.
뒤에 이진이 죄를 얻어 남방으로 쫓겨나자 정오가 천 리 길을 걸어가서 안부를 물었다. 이로 말미암아 이 사실을 듣는 사람들이 그의 행실을 더욱 높이 여겼다.
그 뒤에 정오는 화산華山오립송五粒松의 기름이 땅속으로 흘러 들어가 천 년 세월이 지나면 변화하여 선약仙藥이 되어 삼시三尸를 제거할 수 있다는 말을 듣고는 화음華陰으로 거처를 옮겨 그 약을 찾고자 하였다.
도사 이도은李道殷, 나은지羅隱之와 우의가 있었으니 세상에서는 이들을 지목하여 삼고사三高士라고 하였다.
정오는 농사를 짓고 나은지는 약을 팔아 자급자족하였다. 이도은은 낚시하는 기술이 있어 낚시를 던져 넣을 때에 미끼를 달지 않았고, 또 돌을 금으로 변화시킬 수 있었는데 정오가 정말로 그렇다는 것을 증험證驗하였으나 그것을 구하지는 않았다. 절도사 유수응劉遂凝이 자주 보화寶貨를 보내었으나 정오는 하나도 받지 않았다.
당 명종 때에 좌습유左拾遺로 부르고 고조高祖 때에 간의대부諫議大夫로 불렀으나 모두 나아가지 않으니, 곧 사호賜號하여 소요선생逍遙先生이라 하였다. 천복天福 4년(939)에 졸하니, 향년 74세였다.
정오의 절조가 드높은지라 난세를 만나 영예와 이익에 물들지 않고서 처자를 버리고 돌아보지도 않고 떠나기까지 하였으니, 어찌 세상과 단절하고 일신一身만 몹시도 아낀 자가 아니겠는가.
그러나 정오는 음주와 바둑을 좋아하였고 때때로 시문詩文을 지어 그 시문이 인간 세상에 남아 있으니 사람들이 그 글을 흰 명주 비단에 많이 베껴 서로 선물하면서 보배로 여겼다.
어떤 사람은 그 형상을 그림으로 그려 집 벽에다 걸어두고 완상하기까지 하였으니 그의 자취는 비록 멀어졌어도 그 이름은 더욱 드러나 석문石門의 문지기나 하조장인荷蓧丈人의 무리와는 달랐다.
정오鄭遨와 같은 시대에 장천명張薦明이 있었으니 사람이다. 소싯적에는 유학儒學을 배우며 하삭河朔 지방을 유력遊歷하였는데 뒤에는 속세를 떠나 도사道士가 되어 노자老子장주莊周의 학설에 통달하였다.
후진後晉의〉 고조高祖가 불러 보고서 묻기를 “도가道家가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가?”라고 하니, 대답하기를 “라는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하는 것을 두고 말한 것입니다. 그 극도의 경지를 얻은 자는 이부자리에서 편안히 하는 일 없이 있으면서도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고조가 그 말을 훌륭하게 여겨 그를 내전內殿으로 맞아 들여 ≪도덕경道德經≫을 강의하게 하고서 절하고 스승으로 삼았다.
장천명이 궁중에서 시각을 알리는 북소리를 듣고는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북소리를 들으셨습니까? 북소리는 한 가지일 따름이니, 오음五音십이율十二律이 북에는 없으나, 오음과 십이율을 조화하는 것은 북입니다. 대저 하나라는 것은 만사萬事의 근본이니, 하나를 잘 지키는 자는 천하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고조가 그 말을 훌륭하게 여겨 통현선생通玄先生이라는 를 내렸다. 그 뒤 그가 어디서 죽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석앙石昻청주靑州 임치臨淄 사람이다.
집에 수천 권의 서적을 두고 사방의 선비를 부르기를 좋아하니, 선비들이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고 모두 석앙에게 와서 배우고 물었는데, 그 문하에서 여러 해 동안 식객으로 있어도 석앙은 소홀히 여기는 기색을 보인 적이 없었다.
석앙은 벼슬을 구하지 않았는데, 절도사節度使 부습符習이 그의 행실을 높게 여겨 불러서 임치령臨淄令으로 삼았다.
부습이 경사京師입조入朝하러 갔는데 감군監軍 양언랑楊彦朗이 절도사의 직무를 대행하고 있었다. 석앙이 공사公事관부官府에 가서 알현하니, 인도하는 사람이 양언랑의 이름이 이었으므로 석앙의 성씨를 “”로 바꾸었다.
석앙이 종종걸음으로 부정府庭으로 나와 양언랑을 올려다보며 꾸짖기를 “내시內侍가 어찌하여 을 해치는 것입니까. 의 성은 이지 가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언랑이 크게 노하여 옷깃을 떨치고 일어나 가버렸다.
석앙은 즉시 종종걸음으로 나와 관직을 벗어던지고 집으로 돌아와 자식에게 말하기를 “내가 본래 난세에 벼슬하고 싶지 않았는데 과연 환관宦官에게 욕을 당하는구나. 자손들은 나를 경계로 삼을지어다.”라고 하였다.
석앙의 아버지 역시 학문을 좋아하고 평소 불가佛家의 설을 좋아하지 않았다.
아버지가 별세하자 석앙이 관곽 앞에서 ≪상서尙書≫를 암송하고 말하기를 “이것이 우리 선인先人께서 듣고자 하는 것이다.”라고 하고는, 그 집안에서 불사佛事로 아버지를 욕되게 하는 일이 없도록 금하였다.
고조高祖 때에 천하에 조명詔命을 내려 효제孝悌를 행하는 선비를 찾으니, 호부상서戶部尙書 왕권王權종정경宗正卿 석광찬石光贊국자좨주國子祭酒 전민田敏병부시랑兵部侍郞 왕연王延 등이 함께 동상합문東上閤門에 나아가 석앙의 품행品行도의道義가 조명에 부응할 만하다고 아뢰었다.
그리하여 조서를 내려 석앙을 경사로 오게 하여 편전便殿에서 소견召見하고서 종정승宗正丞으로 삼았다. 승진하여 소경少卿이 되었다.
출제出帝가 즉위하자 의 국정이 날로 무너지니, 석앙이 자주 상소하여 극력으로 간언하였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자, 마침내 병을 칭탁하고 동쪽으로 돌아가 집에서 천수를 마쳤다. 석앙이 떠나고 나자 이 크게 혼란해졌다.
정복윤程福贇은 그 세계世系를 알지 못한다. 사람됨이 침착하고 중후하며 말수가 적고 용맹이 있었다.
소싯적에 군졸이 되어 전공戰功으로 여러 차례 승진하여 명주단련사洺州團練使가 되었고 출제出帝 때에 봉국우상도지휘사奉國右廂都指揮使가 되었다.
개운開運 연간에 거란契丹이 침입하여 노략질을 하니 출제가 북쪽으로 친정親征하였는데, 봉국군奉國軍의 군사가 이 틈을 타서 밤에 불을 질러 군영軍營을 불태우고서 이어 난리를 일으키려 하였다.
정복빈이 직접 불을 끄다가 부상을 입었는데 불이 꺼진 뒤에 난리를 일으키려 했던 자는 적발하지 못하였다.
정복빈은 거란의 대군이 장차 이를 것인데 천자는 군중軍中에 있고 경사京師는 텅 비어 있으니 작은 사고로 사람들의 이목을 동요시켜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여 그 일을 숨기고 보고하지 않았다.
군장軍將 이은李殷위차位次가 정복빈보다 아래였다. 정복빈을 제거하고 자신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이 이롭다고 여겨 “정복빈이 난리를 일으킨 자와 함께 모의한 일이니 그렇지 않다면 어째서 아뢰지 않았겠느냐”고 모함하니, 출제가 정복빈을 하옥시켰다.
사람들은 모두 정복빈이 억울하다고 여겼으나 정복빈은 끝내 스스로 변명하지 않고 죽임을 당하였다.
이자륜李自倫심주深州 사람이다.
천복天福 4년(939) 정월에 상서호부尙書戶部가 아뢰기를 “심주사공참군深州司功參軍 이자륜은 6가 함께 살고 있으니 칙령을 받들어 규례를 따르고자 합니다. 규례를 살펴보건대 효의孝義정표旌表할 때에는 반드시 먼저 사실을 조사하여 효자는 종신토록 요역繇役을 면제해주고 의문義門에는 이어서 정표를 더해준다고 되어 있습니다. 본주本州에서 조사한 결과를 보니 향로鄕老 정언程言 등이 말하기를 ‘이자륜의 고조高祖이니, 훈이 을 낳고 찬이 을 낳고 칙이 을 낳고 충이 자륜을 낳고 자륜이 광후光厚를 낳았다.’라고 하니 6대가 함께 사는 것은 거짓이 아닙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칙령으로 그들이 살고 있는 비부향飛鳧鄕효의향孝義鄕으로, 광성리匡聖里인화리仁和里로 개칭하고 규정에 따라 문려門閭에 정표하였다.
9월 병자丙子일에 호부가 다시 아뢰기를 “전에 6대가 함께 사는 등주登州왕중소王仲昭의문義門에 그 정표에는 청사聽事보란步欄이 있었으며, 앞에는 문병門屛을 벌려 세웠으며, 오두정문烏頭正門을 세우되 벌열閥閱일장一丈 이척二尺의 높이로 하고 오두정문의 두 기둥 끝에는 기와로 된 통을 덮어 씌웠으며, 쌍궐雙闕일장一丈 높이로 쌓되 오두정문의 남쪽 삼장三丈 칠척七尺 위치에 두며, 길 양 옆에 홰나무와 버드나무를 심되 서로 간의 거리가 열다섯 걸음이 되게 하였습니다. 이자륜의 정표도 이와 같이 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칙령을 내리기를 “이는 고사故事이니 법식은 없다. 이자륜의 정표는 지세地勢에 맞게 헤아려서 외문外門을 높게 하며, 문에는 작설綽楔을 설치하며, 좌우에 를 세우되 일장一丈 이척二尺의 높이로 네모반듯하게 하며, 흰색으로 칠하되 사방 모퉁이를 붉게 칠하여 불효하고 불충한 자들이 보고서 마음과 행실을 고쳐먹게 하라.”라고 하였다.


역주
역주1 01. 一行傳 : 〈一行傳〉은 혼란이 극에 달하고 人倫과 綱常이 무너졌던 五代 시기에 한 가지 德行이 특출했던 이들에 대한 列傳이다. 歐陽脩는 小序에서 “예로부터 忠臣과 義士들은 난세에 많이 배출되었거늘, 괴이하게도 당시에는 언급할 만한 사람이 어찌하여 적은 것인가? 어찌 정말로 그러한 사람이 없었으랴. 비록 전란이 일어나고 학교가 폐해져 예의가 쇠퇴하고 풍속이 무너진 것이 이 같은 지경에 이르렀으나, 예로부터 천하에 이러한 사람이 없었던 적은 없었다.……재능을 자부하고 節義를 닦으면서 낮은 곳에 침체된 채 자취가 사라져 알려지지 않은 이들이 있었을 것이다.”라고 밝히면서 세상에 널리 알려진 忠烈과 功業은 아니라 할지라도 泯沒시켜서는 안 되는 德行君子들의 행적을 찾아내어 〈일행전〉에 立傳하였다.
구양수는 〈일행전〉에 총 다섯 사람을 입전하였다.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山林에 몸을 맡겨 자유롭고 유유자적하게 노닐었던 鄭遨와 張薦明은 道敎의 道士들이고, 관직에 나가서도 세상과 영합하지 않고 의리에 따라 행동했던 石昻과 구차하게 자신을 변명하지 않고 직분대로 행하다가 죽음을 맞이한 程福贇은 官人이고, 六世가 함께 동거하며 집안에서 孝悌의 행실로 천하에 널리 알려진 李自倫은 일반 백성이다. 이들은 모두 당대에 높은 관직에 오르거나 난세를 울릴 공업을 세우지는 않았으나 모두 깨끗하고 확고한 德行으로 一身을 온전히 한 인물이다.
宋나라 때 章如愚가 편찬한 ≪群書考索≫ 卷15 〈五代史類〉에서는 〈일행전〉을 두고 “고상한 자들이다.[高尙者也]”라고 하였다. 〈일행전〉 역시 亂世의 역사를 기술하면서 도덕과 명분을 드러내 밝혀 善惡에 대한 褒貶을 분명히 하고자 했던 구양수의 편찬 의식을 드러내준다. 〈일행전〉의 서두에 붙은 구양수의 史論은 ≪歐陽文忠公文鈔≫ 권16 〈史論〉에도 따로 실려 있는데, 茅坤은 이를 두고 “이 일단의 의론은 ≪史記≫와 ≪漢書≫ 이래로 누구도 이르지 못한 것이다.[此一段議論 史漢以來所不到者]”라고 하였다.
〈일행전〉은 ≪新五代史≫ 卷34에 해당한다. ≪舊五代史≫에서는 鄭遨는 卷93 〈晉書 第19 列傳8〉, 程福贇은 卷95 〈晉書 第21 列傳10〉에 열전이 있으며 張薦明과 石昻은 따로 열전이 없다.
역주2 語所謂風雨晦冥雞鳴不已也 : ≪詩經≫ 〈鄭風 風雨〉에 “비바람 몰아쳐 어둑한 때에, 닭 울음소리 그치지 않는도다. 이미 군자를 만났으니, 어찌 기쁘지 않으리오.[風雨如晦 雞鳴不已 旣見君子 云胡不喜]”라고 하였다. 이 시는 亂世에 절조를 지키는 군자를 그리워한 시이다.
역주3 傳所謂天地閉賢人隱之時歟 : ≪周易≫ 〈坤卦〉에 “천지가 변화하면 초목이 무성하고 천지가 폐색하면 현인이 은둔한다.[天地變化草木蕃 天地閉賢人隱]”라고 하였다.
역주4 唐明宗祖廟諱遨 : ≪新五代史≫ 〈卷三十四考證〉에 “唐 明宗의 祖廟의 휘가 遨였으므로 세상에서는 그의 字가 통행되었다.……〈明宗紀〉에 ‘증조부 휘 敖는 諡號는 孝質이고 廟號는 毅祖이다.’라고 하였으니 ‘遨’는 마땅히 ‘敖’가 되어야 한다.[唐明宗祖廟諱遨 故世行其字……曾祖敖 諡曰孝質 廟號毅祖 則遨當作敖]”라고 하였다.
역주5 李振 : ?~923. 字는 興緒이고 西州 사람이다. 後梁을 세운 朱全忠이 唐나라 대신들을 滑州 白馬驛에서 대거 살해한 白馬之禍를 일으키는 데 일조하였으며 주전충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후량이 멸망하고 後唐이 들어서자 일족이 도륙 당하였다.
역주6 五粒松 : 소나무의 일종으로, 한 떨기에 쌀알처럼 길쭉한 비녀 모양의 잎이 다섯 개가 나므로 붙여진 이름이다.
역주7 三尸 : 道敎에서 사람의 몸 안에 있으면서 수명ㆍ질병ㆍ욕망 따위를 좌우한다고 하는 세 神으로, 三彭이라고도 한다. 庚申日 밤에 사람이 잠을 자면 삼시가 몸 밖으로 나와 하늘로 올라가서 天帝에게 그 사람의 잘못을 고한다 하여 ‘섣달 경신일에는 잠을 자지 않고 밤을 지켜야 복을 얻는다.’는 풍속이 생겼다.
역주8 天福 : 後晉 高祖 石敬瑭의 연호로, 2대 황제인 出帝 石重貴도 연용하였다. 936~944년에 해당한다.
역주9 時時爲詩章 : ≪唐詩紀事≫ 卷71 〈鄭雲叟〉에 “鄭徵君(정오)의 시는 모두 음탕하고 浮華함을 제거하였고 시끌벅적한 세속의 기운을 아주 끊어버렸다.[鄭徵君爲詩 皆祛滛靡 逈絶囂塵]”라고 하였다.
역주10 石門荷蓧之徒 : 세상을 피해 자취를 감추고 숨어사는 賢者를 가리킨다. ≪論語≫ 〈憲問〉에, 子路가 魯나라의 城의 外門인 石門에서 유숙하고 다음날 城門으로 들어서자 석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어디서 오는 길이냐고 물었고, 자로가 공자의 문하 제자라고 말하자 문지기가 “그 사람은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려고 하는 사람이 아닌가.”라고 한 내용이 있다. 또 ≪논어≫ 〈微子〉에, 자로가 공자를 따르다가 뒤떨어졌을 때 삼태기를 멘[荷莜] 노인을 보고 우리 선생님을 보았느냐고 묻자 노인이 “四肢를 부려먹지도 않고 五穀을 분간하지도 못하는데, 누가 선생인가.”라고 하면서 지팡이를 꽂아놓고 김만 맨 내용이 있다.
역주11 高祖 : 後晉 건국자인 石敬瑭(892~942)을 가리킨다.
역주12 道也者 妙萬物而爲言 : ≪周易≫ 〈說卦傳〉에 “신이란 것은 만물을 묘하게 하는 것을 두고 말한 것이다.[神也者 妙萬物而爲言者也]”라고 한 말이 보이는데, 이는 만물을 생성하고 운용하는 이치가 神임을 뜻한다. 여기서는 神을 道로 치환하여 말한 것이다.
역주13 賜號通玄先生 : ≪冊府元龜≫ 卷54에는 天福 5년(940) 11월에 이 일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역주14 開運 : 後晉 出帝 石重貴의 연호로 944~946년 사이에 사용하였다.
역주15 聽事步欄 : 聽事는 廳堂과 같은 말이며, 步欄은 길고 굽은 複道를 가리킨다.
역주16 樹烏頭正門……冒以瓦桶 : 烏頭正門은 祠廟 등의 앞에 세우는 문으로 지붕이 없고 키가 낮은 형식이다. 閥閱이라고 부르는 2개의 기둥 사이에 대문 두 개가 있고 기둥 정상에는 검은 색깔의 陶器制와 금속제의 모자를 씌웠다.
역주17 雙闕 : 옛날에 宮殿, 祠廟, 陵墓 앞 양쪽으로 높게 세운 누대를 가리킨다.
역주18 綽楔(설) : 옛날에 正門의 양쪽 곁에 세워 孝義를 표창하던 나무 기둥을 가리킨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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