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3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01.
唐之所以困而及亡은 由茂貞爲之祟가 什且六七이니 歐公序次如畫라
李茂貞은 深州 博野人也라 本姓宋이오 名文通이니 爲博野軍卒하야 戍鳳翔하다 黃巢犯京師에 鄭畋以博野軍擊賊이러니 茂貞以功自隊長遷軍校하다
光啓元年
에 朱玫反
에 僖宗出居興元
이라 遣王行瑜
하야 攻
이어늘 茂貞與保鑾都將李鋌等
으로 敗行瑜於大唐峯
하다
明年에 玫遂敗死하니 茂貞以功自扈蹕都頭拜武定軍節度使하고 賜以姓名하다
扈蹕東歸하야 至鳳翔에 鳳翔節度使李昌符與天威都頭楊守立爭道하야 以兵相攻이러니 昌符不勝하야 走隴州하다 僖宗遣茂貞하야 追擊殺昌符하니 以功拜鳳翔隴右節度使하다
二年에 樞密使楊復恭得罪하야 奔于興元이어늘 興元節度使楊守亮은 復恭之養子也라 納之하다 茂貞乃上書하야 言復恭父子罪皆當誅하고 因自請爲山南招討使어늘 昭宗以宦者故로 難之하야 未許하다
茂貞擅發兵하야 攻破興元하니 復恭父子見殺하다 茂貞表其子繼密權知興元軍府事어늘 昭宗乃徙茂貞하야 爲山南西道節度使하고 以宰相徐彦若鎭鳳翔하다
茂貞不奉詔
하고 上表自論曰 但慮軍情忽變
하야 戎馬難
하야 徒令
生靈
으로 因玆受弊
니 未審乘輿播越
이면 自此何之
오하다
昭宗以茂貞表辭不遜
으로 不能忍
하야 以問宰相杜讓能
하니 讓能以謂茂貞地大兵强
하야 而唐力未可以致討
요 鳳翔又近京師
하야 易以自危
오 而難於後悔
니 他日雖欲
라도 恐不能也
라하다
昭宗怒曰 吾不能孱孱坐受凌弱이라하고 乃責讓能治兵하고 而以覃王嗣周爲京西招討使하다
令下
에 京師市人皆知不可
하야 相與聚承天門
하야 遮宰相請無擧兵
하고 爭投瓦石擊宰相
이어늘 宰相下輿而走
라가 亡其
하다 人情大恐
이어늘 昭宗意益堅
하다
覃王率扈駕軍五十四
하야 戰于盩厔
하야 唐軍敗潰
하니 茂貞遂犯京師
하야 屯于三橋
하다
昭宗御安福門하야 殺兩樞密하야 以謝茂貞하야 使罷兵하다 茂貞與讓能素有隙하야 因曰 謀擧兵者는 非兩樞密이요 乃讓能也라하고 陳兵臨皋驛하야 請殺讓能하다
讓能曰 臣固先言之矣니 惟殺臣可以紓國難이라하니 昭宗泣下沾襟하고 貶讓能雷州司戶參軍하고 賜死하다 茂貞乃罷兵하다
이라 晉王李克用請立珂
어늘 茂貞與韓建王行瑜請立珙
하니 昭宗不許
하다
茂貞等怒하야 率三鎭兵犯京師하야 謀廢昭宗하고 立吉王保러니 未果에 而晉王亦擧兵이어늘 茂貞懼하야 乃殺宰相韋昭度李磎하고 留其養子繼鵬하야 以兵二千宿衛而去하다
晉兵至河中에 繼鵬與行瑜弟行實等으로 爭劫昭宗出奔하야 京師大亂하니 昭宗出居于石門하다 茂貞以兵至鄠縣하야 斬繼鵬自贖하다
晉兵已破王行瑜하고 還軍渭北하야 請擊茂貞하다 昭宗以謂晉遠而茂貞近하야 因欲庇之以爲德하야 而冀緩急之可恃也라
且茂貞已殺其子而自贖矣하니 乃詔罷歸晉軍하다 克用歎曰 唐不誅茂貞이면 憂未已也라하다
昭宗自石門還하야 益募安聖捧宸等軍萬餘人하야 以諸王將之하다 茂貞謂唐將討己하야 亦治兵請覲하니 京師大恐하야 居人亡入山谷하다
茂貞遂犯京師에 昭宗遣覃王拒之어늘 覃王至三橋하야 軍潰라 昭宗出居于華州하야 遣宰相孫偓하야 以兵討茂貞한대 韓建爲茂貞請하니 乃已하다 久之에 加拜茂貞尙書令하고 封岐王하다
其後에 昭宗爲宦者所廢라가 旣反正에 宰相崔胤欲借梁兵誅諸宦者하야 陰與梁太祖謀之하다
中尉韓全誨等亦倚茂貞之强하야 以爲外援이어늘 茂貞遣其子繼筠하야 以兵數千宿衛京師하니 宦者恃岐兵하야 益驕不可制하다
天復元年에 胤召梁太祖以西하야 梁軍至同州하니 全誨等懼하야 與繼筠劫昭宗하야 幸鳳翔하다 梁軍圍之逾年에 茂貞每戰輒敗하야 閉壁不敢出이라
城中薪食俱盡한대 自冬涉春히 雨雪不止하니 民凍餓死者日以千數이라
米斗直錢七千하야 至燒人屎煮尸而食이라 父自食其子에 人有爭其肉者면 曰 此吾子也니 汝安得而食之오하다
人肉斤直錢百
하고 狗肉斤直錢五百
하니 父甘食其子
하고 而人肉賤於狗
하다 天子於宮中設小磨
하야 遣宮人自屑豆麥以供御
하니 自後宮諸王
으로 凍餒而死者
가 日三四
라
城中人相與邀遮茂貞하야 求路以爲生하니 茂貞窮急하야 謀以天子與梁以爲解하다
昭宗謂茂貞曰 朕與六宮皆一日食粥
하고 一日食
하니 安能不與梁和乎
아하다
三年正月에 茂貞與梁約和하고 斬韓全誨等二十餘人하야 傳首梁軍하니 梁圍解하다
天子雖得出이나 然梁遂劫東遷而唐亡하니 茂貞非惟亡唐이라 亦自困矣라
及梁太祖卽位
하얀 諸侯之强者皆相次稱帝
어늘 獨茂貞不能
이요 但稱岐王
하야 開府置官屬
하고 以妻爲皇后
하고 視朝
하야 出入擬天子而已
라
茂貞居岐에 以寬仁愛物로 民頗安之라 嘗以地狹賦薄으로 下令榷油하고 因禁城門하야 無內松薪하니 以其可爲炬也라
有優者誚之曰 臣請幷禁月明이라한대 茂貞笑而不怒하다
初에 茂貞破楊守亮하야 取興元하니 而邠寧鄜坊皆附之하야 有地二十州러니
其被梁圍也
에 興元入于蜀
하고 已後
에 邠寧鄜坊入于梁
하고 秦鳳階成又入于蜀
하야 當梁末年
하얀 所有七州而已
라
莊宗已破梁에 茂貞稱岐王하고 上牋以季父行自處라가 及聞入洛하고 乃上表稱臣하야 遣其子從曮來朝하니 莊宗以其耆老甚尊禮之하고 改封秦王하고 詔書不名하다
당唐나라가 곤궁에 처해 멸망에 이른 것은 이무정李茂貞이 빌미를 제공한 것이 열에 예닐곱이니, 구양공歐陽公이 서술한 것이 그림과 같다.
이무정李茂貞은 심주深州 박야博野 사람이다. 본래 성은 송씨宋氏이고 이름은 문통文通이니 박야군博野軍의 병졸兵卒이 되어 봉상鳳翔에서 수자리를 섰다. 황소黃巢가 경사京師를 침범하자 정전鄭畋이 박야군博野軍을 거느리고 황소를 격퇴하였는데, 이무정이 전공戰功으로 대장隊長에서 군교軍校로 승진하였다.
광계光啓 원년(885)에 주매朱玫가 반란을 일으키자 희종僖宗이 궁을 나가 흥원興元에 머물렀다. 주매가 왕행유王行瑜를 보내 대산관大散關을 공격하자 이무정이 보란도장保鑾都將 이정李鋌 등과 함께 대당봉大唐峯에서 왕행유를 패퇴시켰다.
이듬해에 주매가 마침내 패하여 죽으니, 이무정李茂貞은 군공軍功으로 호필도두扈蹕都頭에서 무정군절도사武定軍節度使에 배수되었고 성姓과 이름을 하사받았다.
황제를 호종하여 동쪽으로 돌아오다 봉상鳳翔에 이르렀을 때에 봉상절도사鳳翔節度使 이창부李昌符가 천위도두天威都頭 양수립楊守立과 길을 다투다 병사로 서로 공격하였는데, 이창부가 이기지 못하여 농주隴州로 달아났다. 희종僖宗이 이무정을 보내 추격하여 이창부를 죽이니, 그 공功으로 봉상농우절도사鳳翔隴右節度使에 배수되었다.
대순大順 원년(890)에 농서군왕隴西郡王에 봉해졌다.
대순大順 2년에 추밀사樞密使 양복공楊復恭이 죄를 지어 흥원興元으로 달아났는데 흥원절도사興元節度使 양수량楊守亮은 양복공의 양자養子였으므로 받아 주었다. 이무정李茂貞이 이에 상서上書하여 양복공 부자父子는 죄가 모두 죽어 마땅하다고 하면서 인하여 산남초토사山南招討使가 되기를 자청하였는데, 소종昭宗이 양복공이 환관宦官이었다는 이유로 난처해하며 허락하지 않았다.
이무정이 마음대로 출병하여 흥원興元을 공격하여 격파하니, 양복공 부자가 살해되었다. 이무정이 표주表奏하여 자신의 아들 이계밀李繼密을 권지흥원군부사權知興元軍府事로 삼아줄 것을 청하니, 소종이 이에 이무정을 옮겨 산남서도절도사山南西道節度使로 삼고 재상宰相 서언약徐彦若을 보내 봉상鳳翔을 진수鎭守하였다.
이무정이 조명詔命을 따르지 않고 표문表文을 올려 스스로 변론하기를 “다만 군정軍情이 갑자기 변하여 군대를 제어하기 어렵게 되어 공연히 전복甸服의 백성들로 하여금 이로 인해 폐해를 입게 할까 우려할 뿐이니, 모르겠지만 대가大駕가 파천播遷하게 되면 이로부터 어디로 가려 하십니까.”라고 하였다.
소종昭宗이 이무정의 표문의 글이 불손함을 참지 못하고 재상宰相 두양능杜讓能에게 물으니, 두양능이 “이무정은 소유한 땅이 크고 병사가 강성하여 당唐나라의 힘으로 토벌할 수 없습니다. 봉상鳳翔은 게다가 경사京師와 가깝기까지 하여 위험해지기가 쉽고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이니, 후일에 비록 조조晁錯를 죽여 제후에게 사죄하려고 하더라도 그렇게 할 수 없게 될까 걱정입니다.”라고 하였다.
소종이 노하여 “나는 겁쟁이처럼 앉아서 능욕을 당할 수 없다”라고 하고는 이에 두양능을 다그쳐 병사兵士를 정비하게 하고 담왕覃王 이사주李嗣周를 경서초토사京西招討使로 삼았다.
명령이 내려오자 경사京師의 시인市人들이 모두 불가함을 알고 서로 승천문承天門에 모여 재상을 막아서서 거병하지 말 것을 청하고는 다투어 기와와 돌을 던져 재상을 공격하자 재상이 수레에서 내려 달아나다 자신의 당인堂印을 잃어버렸다. 사람들은 크게 두려워하는데도 소종의 뜻은 더욱 확고하였다.
담왕覃王이 호가군扈駕軍 54도都를 거느리고 주질盩厔에서 전투하여 당군唐軍이 패하여 궤멸하니, 이무정李茂貞이 마침내 경사京師를 침범하여 삼교三橋에 주둔하였다.
소종昭宗이 안복문安福門으로 가서 두 명의 추밀樞密을 죽여 이무정에게 사과하고 전쟁을 그만두게 하였다. 이무정이 두양능杜讓能과 평소 틈이 있어서 인하여 말하기를 “거병을 모의한 것은 두 명의 추밀 때문이 아니고 바로 두양능 때문입니다.”라고 하고는 임고역臨皋驛에 병사를 펼쳐 놓고서 두양능을 죽이라고 청하였다.
두양능이 말하기를 “신이 진실로 일전에 이를 말씀드렸으니, 오직 신을 죽여야만 국난國難을 풀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소종이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고 두양능을 뇌주사호참군雷州司戶參軍으로 폄적貶謫하고 사사賜死하였다. 이무정이 이에 군대를 물렸다.
이듬해에 하중절도사河中節度使 왕중영王重盈이 졸卒하니, 그의 아들 왕가王珂와 왕공王珙이 자리를 놓고 다투었다. 진왕晉王 이극용李克用은 왕가를 세우기를 청하는데 이무정李茂貞과 한건韓建, 왕행유王行瑜는 왕공을 세우기를 청하니, 소종昭宗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무정 등이 노하여 세 진鎭의 병사를 거느리고 경사京師를 침범하여 소종을 폐위하고 길왕吉王 이보李保를 세울 것을 도모하였는데, 결행하기 전에 진왕이 또한 거병擧兵하니 이무정李茂貞이 두려워 이에 재상宰相 위소도韋昭度와 이계李磎를 죽이고 자신의 양자養子 이계붕李繼鵬을 남겨 병사 2천 명으로 숙위宿衛하게 하고서 떠났다.
진병晉兵이 하중河中에 이르자 이계붕과 왕행유의 아우 왕행실王行實 등이 다투어 소종을 위협하여 도망치려 한 탓에 경사가 크게 혼란해지니, 소종이 궁을 나와 석문石門에 머물렀다. 이무정이 병사를 거느리고 호현鄠縣에 이르러 이계붕을 참수하여 스스로 속죄하였다.
진병晉兵이 이미 왕행유王行瑜를 격파하고 위북渭北으로 회군하여 이무정李茂貞을 공격할 것을 청하였다. 소종昭宗이 진晉나라는 멀고 이무정은 가까이 있으니 인하여 그를 보호해주어 은덕恩德으로 여기게 한 다음 다급할 때에 의지할 수 있기를 기대할 수 있겠다고 생각하였다.
또 이무정이 이미 자신의 양자養子를 죽여 스스로 속죄하니, 이에 조서詔書를 내려 진군晉軍을 돌려보냈다. 이극용李克用이 탄식하며 말하기를 “당唐나라가 이무정을 죽이지 않으면 우환이 그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소종이 석문石門에서 돌아와 안성安聖과 봉신捧宸 등의 군사 1만여 명을 더 모아 제왕諸王에게 통솔하게 하였다. 이무정이 당唐나라가 장차 자신을 토벌할 것이라 생각하여 또한 병사를 정비하여 소종을 뵙기를 청하니, 경사京師가 크게 두려워하여 거주하던 사람들이 산곡山谷으로 도망쳐 들어갔다.
이무정이 마침내 경사京師를 침범하자 소종이 담왕覃王을 보내 막게 하였는데 담왕이 삼교三橋에 이르러 군이 궤멸하니, 소종이 궁을 나와 화주華州에 머무르면서 재상宰相 손악孫偓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이무정을 토벌하게 하였는데, 한건韓建이 이무정을 위하여 그만둘 것을 청하니 이에 중지하였다. 오래 지나 이무정에게 상서령尙書令을 더하여 배수하고 기왕岐王에 봉하였다.
그 후에 소종昭宗이 환관들에게 폐위되었다가 반정反正한 다음에, 재상宰相 최윤崔胤이 양梁나라의 병사兵士를 빌려 환관들을 주살하고자 하여 몰래 양梁 태조太祖와 이 일을 모의하였다.
중위中尉 한전회韓全誨 등이 또한 이무정李茂貞의 강대함을 믿고 외부의 원병援兵으로 삼자 이무정이 아들 이계균李繼筠을 보내 병사 수천 명으로 경사京師를 숙위하니, 환관들이 기왕岐王(이무정)의 병사兵士를 믿고 더욱 교만해져 제어할 수 없었다.
천복天復 원년(901)에 최윤崔胤이 양梁 태조太祖를 불러 서쪽으로 오게 하여 양나라 군대가 동주同州에 이르니, 한전회韓全誨 등이 두려워 이계균李繼筠과 함께 소종昭宗을 위협하여 봉상鳳翔으로 행행幸行하였다. 양나라 군대가 포위한 지 한 해를 넘겼는데 이무정李茂貞이 싸울 때마다 번번이 패하여 성문을 닫고 감히 나오지 않았다.
성 안에 땔감과 식량이 모두 고갈되었는데, 겨울에서 봄에 이르기까지 비와 눈이 그치지 않으니, 얼어 죽거나 굶어 죽는 백성이 날마다 1,000여 명이나 되었다.
쌀 한 말의 가격이 7,000전錢이나 되어 인분을 태워 시신을 삶아 먹는 지경에 이르렀는데, 아비가 스스로 그 자식을 잡아먹다가 타인이 그 고기를 뺏으려 하면 “이는 나의 자식이니 네가 어찌 먹을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인육은 한 근의 가격이 100전이고 개고기는 한 근의 가격이 500전이니, 아비가 자기 자식을 달게 먹었고 인육이 개고기 보다 가격이 낮았다. 천자天子가 궁宮 안에 작은 맷돌을 설치하여 궁인宮人을 보내 스스로 콩과 보리를 갈아서 공급하게 하였으니, 후궁後宮과 제왕諸王의 십육택十六宅으로부터는 얼거나 굶어 죽는 사람이 매일 서너 명이었다.
성 안의 사람들이 서로 이무정을 가로막고 살 길을 구하니, 이무정이 곤궁하고 급박해져 천자를 양梁나라에 넘기고 포위를 풀게 하려고 모의하였다.
소종昭宗이 이무정에게 말하기를 “짐朕과 육궁六宮은 모두 하루는 죽을 먹고 하루는 불탁不托을 먹고 있으니, 어찌 양나라와 화친和親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천복 3년(903) 정월에 이무정이 양나라와 화친을 약속하고 한전회 등 20여 명을 참수하여 수급首級을 양나라 군대에 보내니, 양나라가 포위를 풀었다.
천자가 비록 봉상鳳翔에서 나왔으나 양나라가 마침내 천자를 위협해 동천東遷하여 당唐나라가 멸망하였으니, 이무정은 당나라를 멸망시켰을 뿐만 아니라 또한 스스로 곤경에 빠진 것이다.
양梁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제후諸侯들 중에 강성强盛한 자들은 모두 서로 차례로 칭제稱帝하였는데, 이무정李茂貞은 그렇게 하지 못하고 다만 기왕岐王이라 칭하여 왕부王府를 열어 관속官屬을 두고 처妻를 봉하여 황후皇后로 삼고 명초鳴梢와 우선羽扇을 들고 조정에서 정무를 보고 출입할 때에 천자 흉내를 낼 뿐이었다.
이무정이 기주岐州에 있을 때에 인자하고 물건을 아꼈기에 백성들이 몹시 편안하게 여겼다. 일찍이 땅이 좁고 세금은 적었기에 관官에서 기름을 전매專賣하도록 영令을 내리고 인하여 성문城門에 금령禁令을 내려 소나무를 땔감으로 들이지 못하게 하였으니, 이는 기름 대신에 관솔로 등불을 만들 수 있기 때문이었다.
광대가 조롱하기를 “신은 아울러 달빛도 금지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는데, 이무정은 웃으며 노여워하지 않았다.
당초에 이무정이 양수량楊守亮을 격파하여 흥원興元을 취하자 빈주邠州, 영주寧州, 부주鄜州, 방주坊州가 모두 귀부歸附하여 20개 주州의 땅을 차지하였다.
그런데 양나라에 포위를 당하자 흥원興元은 촉蜀으로 들어갔고, 개평開平 이후에는 빈주, 영주, 부주, 방주가 양나라로 들어갔고, 진주秦州, 봉주鳳州, 계주階州, 성주成州는 또 촉蜀으로 들어가 양나라 말년에는 소유한 것이 7개 주州뿐이었다.
장종莊宗이 양나라를 이미 격파하자 이무정이 기왕이라 칭하고 전문牋文을 올려 계부季父의 항렬로 자처하다가 장종이 낙양洛陽으로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에 표문表文을 올려 칭신稱臣하고 아들 이종엄李從曮을 보내 조회하니, 장종이 이무정을 기로耆老로 몹시 존중하고 예우하여 진왕秦王으로 고쳐 봉해주고 조서詔書에 이름을 쓰지 않았다.
동광同光 2년(924)에 병으로 졸卒하니 나이는 69세였고 시호는 충경忠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