溫韜는 京兆 華原人也라 少爲盜러니 後事李茂貞하야 爲華原鎭將하야 冒姓李하고 名彦韜라
茂貞以華原縣爲耀州하야 以韜爲刺史어늘 梁太祖圍茂貞於鳳翔에 韜以耀州降梁이라가 已而오 復叛하야 歸茂貞하다
茂貞又以美原縣爲鼎州하야 建義勝軍하고 以韜爲節度使하다
末帝時에 韜復叛茂貞降梁이어늘 改耀州爲崇州하고 鼎州爲裕州하고 義勝軍爲靜勝軍하야 卽以韜爲節度使하니 復其姓溫하고 更其名曰昭圖하다
韜在鎭七年에 唐諸陵在其境內者를 悉發掘之하야 取其所藏金寶한대
而
最固
라 韜從埏道下
하야 見宮室
하니 制度閎麗
가 不異人間
이라
中爲正寢
하고 東西廂列石牀
하고 牀上石函中爲鐵匣
하야 悉藏前世圖書
어늘 筆迹
은 紙墨如新
이라
莊宗滅梁에 韜自許來朝하야 因伶人景進納賂劉皇后어늘 皇后爲言之하니 莊宗待韜甚厚하고 賜姓名曰李紹冲하다
郭崇韜曰 此劫陵賊爾니 罪不可赦라하니 莊宗曰 已宥之矣니 不可失信이라하고 遽遣還鎭이어늘
明宗入洛에 與段凝俱收下獄이러니 已而오 赦之하야 勒歸田里하다 明年에 流于德州하야 賜死하다
嗚呼라 厚葬之弊는 自秦漢以來로 率多聰明英偉之主가 雖有高談善說之士極陳其禍福이나 有不能開其惑者矣라
豈非富貴之欲은 溺其所自私者篤이오 而未然之禍는 難述於無形하야 不足以動其心歟아 然而聞溫韜之事者는 可以少戒也라
獨周太祖能鑑韜之禍
하야 其將終也
에 爲書以遺世宗
하야 使以瓦棺紙衣而斂
하야 將葬
에 開棺示人
하고 旣葬
에 刻石以告後世
하야 毋作
하고 毋置
하니 其意丁寧切至
나 然實錄不書其葬之薄厚也
라
又使葬其平生所服衮冕通天冠絳紗袍各二하되 其一은 于京師하고 其一은 于澶州하고 又葬其劒甲各二하되 其一于河中하고 其一于大名者하니 莫能原其旨也라
온도溫韜가 여러 능陵을 도굴한 것은 만세萬世가 공분公憤하고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다.
온도溫韜는 경조京兆 화원華原 사람이다. 어려서 도적이 되었는데, 후에 이무정李茂貞을 모셔 화원진장華原鎭將이 되어 이씨李氏 성姓을 가져다 쓰고 이름은 언도彦韜로 바꾸었다.
이무정이 화원현華原縣을 요주耀州로 만들어 온도를 자사刺史로 삼았는데, 양梁 태조太祖가 봉상鳳翔에서 이무정을 포위하자 온도는 요주를 가지고 양梁나라에 항복하였다. 이윽고 다시 배반하여 이무정에게 돌아왔다.
이무정이 또 미원현美原縣을 정주鼎州로 만들어 의승군義勝軍을 세우고 온도를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말제末帝 때에 온도가 다시 이무정을 배반하고 양나라에 항복하자 양나라가 요주를 고쳐 숭주崇州로 만들고 정주鼎州를 고쳐 유주裕州로 만들고 의승군을 고쳐 정승군靜勝軍으로 만들고는 즉시 온도를 절도사로 삼으니, 온도가 자신의 성을 온溫으로 되돌리고 그 이름을 소도昭圖로 바꾸었다.
온도溫韜가 진鎭에 머문 지 7년 동안에 자신의 경지 내에 있는 당唐나라의 능陵들을 모두 발굴하여 부장된 금金과 보물寶物을 취하였다.
소릉昭陵이 가장 견고하였는데, 온도가 묘도墓道를 따라 내려와 궁실宮室을 보니 제도制度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인간의 궁실과 다름없었다.
가운데에 정침正寢을 만들고 동서쪽 행랑에 돌로 만든 평상平床을 줄지어 놓고 평상 위의 돌로 된 상자 속에 철 상자를 만들어 전대의 도서를 모두 보관해 두었는데, 종요鍾繇와 왕희지王羲之의 필적은 지묵紙墨이 모두 이제 막 쓴 것 같았다.
온도가 모두 취하여 마침내 세상에 전해졌다. 오직 건릉乾陵만은 비바람 때문에 도굴하지 못하였다.
그 후에 주우겸朱友謙이 양梁나라를 배반하여 동주同州를 취하자 진왕晉王이 군대를 보내 주우겸을 구원하러 화원華原으로 달려오니, 온도溫韜가 두려워 다른 진鎭으로 옮길 것을 청하여 마침내 충무忠武로 옮겼다.
장종莊宗이 양나라를 멸망시키자 온도가 허주許州로부터 조현朝見하러 와서 영인伶人 경진景進을 통해 유황후劉皇后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유황후가 온도를 위해 말해주니 장종莊宗이 온도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고 이소충李紹冲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하였다.
곽숭도郭崇韜가 말하기를 “이 자는 능陵을 도굴한 도적이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종이 말하기를 “이미 용서하였으니 신의信義를 잃을 수는 없다.”라고 하고 곧바로 온도를 진鎭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데 명종明宗이 낙양洛陽으로 들어오자 온도를 단응段凝과 함께 모두 붙잡아 하옥下獄시켰는데 이윽고 사면하여 강제로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듬해에 덕주德州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오호라! 후하게 장례 치르는 폐단은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래로 대부분 총명하고 훌륭한 군주들에게 비록 말을 고상하게 하고 말을 잘하는 선비가 그 화복禍福에 대해 자세히 진설陳說하더라도 그 미혹함을 깨우쳐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부귀富貴에 대한 욕심은 자신의 이익만 바라는 마음에 탐닉함이 깊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화는 형체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묘사하기가 어려워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온도溫韜의 일을 들은 자는 조금은 경계할 것이다.
오대五代의 군주는 왕왕
비명非命에 죽었으니, 어느 겨를에 그 뒷일을 돌아보았겠는가.
後周 世宗
다만 주周 태조太祖만은 온도溫韜의 화禍를 거울삼아 임종臨終할 때에 유서遺書를 써 세종世宗에게 남겨 와관瓦棺과 지의紙衣로 염斂하고 장례지낼 때에 관棺을 열어 사람들에게 보이고 장례지낸 뒤에는 돌에 새겨 후세에게 알려 친묘親廟를 만들지 말고 수릉첩守陵妾을 두지 말게 하였으니, 그 뜻이 지극히 간절하였다. 그러나 실록實錄에는 그 장례의 후박厚薄을 기록하지 않았다.
또 자신이 평소 입었던 곤면衮冕, 통천관通天冠, 강사포絳紗袍 각 두 벌을 수장隨葬하게 하였는데 하나는 경사京師에 매장埋葬하고 하나는 전주澶州에 매장埋葬하게 하였으며, 검과 갑옷 각 두 개를 수장隨葬하게 하였는데 하나는 하중河中에 매장埋葬하고 하나는 대명大名에 매장埋葬하게 한 것은 그 뜻을 알 수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