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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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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溫韜之發諸陵 萬世所共憤咽而流涕者也
溫韜 京兆 華原人也 少爲盜러니 後事李茂貞하야 爲華原鎭將하야 冒姓李하고 名彦韜
茂貞以華原縣爲耀州하야 以韜爲刺史어늘 梁太祖圍茂貞於鳳翔 韜以耀州降梁이라가 已而 復叛하야 歸茂貞하다
茂貞又以美原縣爲鼎州하야 建義勝軍하고 以韜爲節度使하다
末帝時 韜復叛茂貞降梁이어늘 改耀州爲崇州하고 鼎州爲裕州하고 義勝軍爲靜勝軍하야 卽以韜爲節度使하니 復其姓溫하고 更其名曰昭圖하다
韜在鎭七年 唐諸陵在其境內者 悉發掘之하야 取其所藏金寶한대
最固 韜從埏道下하야 見宮室하니 制度閎麗 不異人間이라
中爲正寢하고 東西廂列石牀하고 牀上石函中爲鐵匣하야 悉藏前世圖書어늘 筆迹 紙墨如新이라
韜悉取之하야 遂傳人間하다 風雨不可發이라
莊宗滅梁 韜自許來朝하야 因伶人景進納賂劉皇后어늘 皇后爲言之하니 莊宗待韜甚厚하고 賜姓名曰李紹冲하다
郭崇韜曰 此劫陵賊爾 罪不可赦라하니 莊宗曰 已宥之矣 不可失信이라하고 遽遣還鎭이어늘
明宗入洛 與段凝俱收下獄이러니 已而 赦之하야 勒歸田里하다 明年 流于德州하야 賜死하다
嗚呼 厚葬之弊 自秦漢以來 率多聰明英偉之主 雖有高談善說之士極陳其禍福이나 有不能開其惑者矣
豈非富貴之欲 溺其所自私者篤이오 而未然之禍 難述於無形하야 不足以動其心歟 然而聞溫韜之事者 可以少戒也
五代之君 往往不得其死하니 何暇顧其後哉리오
獨周太祖能鑑韜之禍하야 其將終也 爲書以遺世宗하야 使以瓦棺紙衣而斂하야 將葬 開棺示人하고 旣葬 刻石以告後世하야 毋作하고 毋置하니 其意丁寧切至 然實錄不書其葬之薄厚也
又使葬其平生所服衮冕通天冠絳紗袍各二하되 其一 于京師하고 其一 于澶州하고 又葬其劒甲各二하되 其一于河中하고 其一于大名者하니 莫能原其旨也


02. 온도溫韜전기傳記
온도溫韜가 여러 을 도굴한 것은 만세萬世공분公憤하고 목이 메여 눈물을 흘릴 만한 일이다.
온도溫韜경조京兆 화원華原 사람이다. 어려서 도적이 되었는데, 후에 이무정李茂貞을 모셔 화원진장華原鎭將이 되어 이씨李氏 을 가져다 쓰고 이름은 언도彦韜로 바꾸었다.
이무정이 화원현華原縣요주耀州로 만들어 온도를 자사刺史로 삼았는데, 태조太祖봉상鳳翔에서 이무정을 포위하자 온도는 요주를 가지고 나라에 항복하였다. 이윽고 다시 배반하여 이무정에게 돌아왔다.
이무정이 또 미원현美原縣정주鼎州로 만들어 의승군義勝軍을 세우고 온도를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말제末帝 때에 온도가 다시 이무정을 배반하고 양나라에 항복하자 양나라가 요주를 고쳐 숭주崇州로 만들고 정주鼎州를 고쳐 유주裕州로 만들고 의승군을 고쳐 정승군靜勝軍으로 만들고는 즉시 온도를 절도사로 삼으니, 온도가 자신의 성을 으로 되돌리고 그 이름을 소도昭圖로 바꾸었다.
온도溫韜에 머문 지 7년 동안에 자신의 경지 내에 있는 나라의 들을 모두 발굴하여 부장된 보물寶物을 취하였다.
소릉昭陵이 가장 견고하였는데, 온도가 묘도墓道를 따라 내려와 궁실宮室을 보니 제도制度의 웅장함과 아름다움이 인간의 궁실과 다름없었다.
가운데에 정침正寢을 만들고 동서쪽 행랑에 돌로 만든 평상平床을 줄지어 놓고 평상 위의 돌로 된 상자 속에 철 상자를 만들어 전대의 도서를 모두 보관해 두었는데, 종요鍾繇왕희지王羲之의 필적은 지묵紙墨이 모두 이제 막 쓴 것 같았다.
온도가 모두 취하여 마침내 세상에 전해졌다. 오직 건릉乾陵만은 비바람 때문에 도굴하지 못하였다.
그 후에 주우겸朱友謙나라를 배반하여 동주同州를 취하자 진왕晉王이 군대를 보내 주우겸을 구원하러 화원華原으로 달려오니, 온도溫韜가 두려워 다른 으로 옮길 것을 청하여 마침내 충무忠武로 옮겼다.
장종莊宗이 양나라를 멸망시키자 온도가 허주許州로부터 조현朝見하러 와서 영인伶人 경진景進을 통해 유황후劉皇后에게 뇌물을 바쳤는데, 유황후가 온도를 위해 말해주니 장종莊宗이 온도를 매우 후하게 대접하고 이소충李紹冲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하였다.
곽숭도郭崇韜가 말하기를 “이 자는 을 도굴한 도적이니 죄를 용서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종이 말하기를 “이미 용서하였으니 신의信義를 잃을 수는 없다.”라고 하고 곧바로 온도를 으로 돌아가게 하였다.
그런데 명종明宗낙양洛陽으로 들어오자 온도를 단응段凝과 함께 모두 붙잡아 하옥下獄시켰는데 이윽고 사면하여 강제로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였다. 이듬해에 덕주德州로 유배되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오호라! 후하게 장례 치르는 폐단은 나라와 나라 이래로 대부분 총명하고 훌륭한 군주들에게 비록 말을 고상하게 하고 말을 잘하는 선비가 그 화복禍福에 대해 자세히 진설陳說하더라도 그 미혹함을 깨우쳐줄 수 없었던 것이다.
아마도 부귀富貴에 대한 욕심은 자신의 이익만 바라는 마음에 탐닉함이 깊고 아직 드러나지 않은 화는 형체가 나타나지 않았을 때에 묘사하기가 어려워 그 마음을 움직일 수 없었던 것이 아니겠는가. 그러나 온도溫韜의 일을 들은 자는 조금은 경계할 것이다.
오대五代의 군주는 왕왕 비명非命에 죽었으니, 어느 겨를에 그 뒷일을 돌아보았겠는가.
後周 世宗後周 世宗
다만 태조太祖만은 온도溫韜를 거울삼아 임종臨終할 때에 유서遺書를 써 세종世宗에게 남겨 와관瓦棺지의紙衣하고 장례지낼 때에 을 열어 사람들에게 보이고 장례지낸 뒤에는 돌에 새겨 후세에게 알려 친묘親廟를 만들지 말고 수릉첩守陵妾을 두지 말게 하였으니, 그 뜻이 지극히 간절하였다. 그러나 실록實錄에는 그 장례의 후박厚薄을 기록하지 않았다.
또 자신이 평소 입었던 곤면衮冕, 통천관通天冠, 강사포絳紗袍 각 두 벌을 수장隨葬하게 하였는데 하나는 경사京師매장埋葬하고 하나는 전주澶州매장埋葬하게 하였으며, 검과 갑옷 각 두 개를 수장隨葬하게 하였는데 하나는 하중河中매장埋葬하고 하나는 대명大名매장埋葬하게 한 것은 그 뜻을 알 수 없다.


역주
역주1 溫韜傳 : 溫韜(?~928)는 京兆 華原 사람으로 또 다른 이름은 李彦韜, 溫昭圖, 李紹冲이다. 온도의 列傳은 ≪舊五代史≫ 卷73 〈唐書 第49 列傳 第35〉, ≪新五代史≫ 卷40 〈雜傳 第28〉에 각각 실려 있다.
온도는 어려서 도적이 되었다가 李茂貞을 섬겼고, 梁 太祖가 鳳翔을 포위하자 이무정을 배반하고 梁나라에 항복하였는데, 다시 배반하여 이무정에게 돌아왔다. 末帝 때에는 다시 이무정을 배반하고 양나라에 항복하였고 후에 後唐 莊宗이 양나라를 멸망시키자 劉皇后에게 뇌물을 바치고 稱臣하다 明宗에 의해 賜死된 인물이다.
이처럼 배반을 일삼았고 배반할 때마다 스스로 이름을 바꾸거나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기에 이름이 다양한 것이다. 특히 靜勝軍節度使로 있던 7년 동안 자신의 경지 내에 있는 唐나라의 陵을 모두 도굴하여 매장된 金과 寶物을 취한 것에서 그의 沒廉恥한 모습이 더욱 잘 드러난다.
이 열전에서는 온도의 사적은 짧게 서술하였지만 그가 형세가 불리할 때마다 배반하는 모습을 순차적으로 서술하여 그의 飜覆無常함을 드러냈고, 특히 唐나라 능을 도굴한 정황을 상세히 서술하여 몰염치한 모습을 부각시켰다.
史評에서는 역대 총명하고 훌륭한 군주들이 장례를 후하게 치르는 폐단을 만든 것을 지적하고, 온도와 같이 재물에 눈이 먼 사람의 먹잇감이 될 뿐임을 지적하였다. 이에 비해 ≪구오대사≫에는 그의 사적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史評에서는 ≪周易≫의 ‘不善을 쌓은 집안은 반드시 재앙이 돌아온다.[積不善之家 必有餘殃]’라는 말을 인용하여 온도가 능을 도굴한 것은 죽음으로도 죄를 씻을 수 없다고 비판하였다.
역주2 昭陵 : 唐 太宗 李世民의 陵으로 陝西省 咸陽 禮泉縣 동북쪽 30km 지점의 九峻山에 있다. 太宗이 생존하고 있던 貞觀 11년(637) 2월에 기공하여, 貞觀 13년(639)에 완성하였다.
역주3 鍾王 : 名筆로 이름이 높은 魏나라의 鍾繇와 晉나라의 王羲之를 병칭하는 말이다.
역주4 乾陵 : 唐 高宗 李治와 武則天의 합장릉으로 陜西省 咸陽 乾縣 북쪽 6km 지점의 梁山에 있다. 長安 서북방향 즉, 八卦의 乾 자리에 있어 乾陵으로 불리게 되었다.
역주5 其後……遂徙忠武 : ≪五代史纂誤補≫ 卷下에 “삼가 살펴보건대 여기 溫韜는 崇州로부터 許州로 옮겨간 것이니 허주는 梁나라를 기준으로 말하면 응당 匡國軍이 되어야 하고 忠武軍은 곧 同州이다. 여기서 충무군이라 한 것은 잘못이다.[謹按此溫韜以崇州徒許州也 許州自梁言之 當爲匡國 而忠武則同州也 此作忠武誤]”라고 하였다.
역주6 下宮 : 조상의 神主를 모시는 사당인 親廟이다.
역주7 守陵妾 : 陵을 지키는 宮人을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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