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犨는 其先靑州人也니 世爲陳州牙將이라 犨幼與群兒戲道中에 部分行伍하야 指顧如將帥하니 雖諸大兒라도 皆聽其節度하다 其父叔文見之하고 驚曰 大吾門者는 此兒也라하다
及壯에 善用弓劍하고 爲人勇果하며 重氣義어늘 刺史聞其材하고 召至麾下라 累遷忠武軍馬步軍都虞侯하다
王仙芝寇河南하야 陷汝州하고 將犯東都어늘 犨引兵擊敗之하니 仙芝乃南去하다
已而오 黃巢起하야 所在州縣이 往往陷賊이라 陳州豪傑數百人相與詣忠武軍하야 求得犨爲刺史以自保하니 忠武軍表犨陳州刺史하다
已而오 巢陷長安에 犨語將吏曰 以吾計巢若不爲長安市人所誅면 必驅其衆東走하리니 吾州適當其衝矣라하고
乃治城池爲守備하야 遷民六十里內者皆入城中하고 選其子弟하야 配以兵甲하고 以其弟昶珝爲將하다
巢敗에 果東走하야 先遣孟楷據項城이어늘 昶擊破之하야 執楷以歸하다 巢從後至하야 聞楷被執하고 大怒하다
旣而오 秦宗權以蔡州附巢하야 巢勢甚盛하니 乃悉其衆圍犨하고 置舂磨寨하야 糜人之肉以爲食하다
陳人大恐하니 犨語其下曰 吾家三世陳將이니 必能保此라 爾曹男子는 當於死中求生하야 建功立業은 未必不因此時라하니 陳人皆踴躍하다
巢柵城北三里爲八仙營하야 起宮闕하고 置百官하고 聚糧餉하야 欲以久弊之하니 其兵號二十萬이라
陳州舊有弓弩數百
이러니 皆廢壞
라 後生弩工
이 皆不識其器
어늘 珝創意理之
하니 弓矢激五百步
에 人馬皆洞
이라 以故
로 巢不(敦)
近
하다
圍凡三百日에 犨食將盡하야 乃乞兵於梁이어늘 梁太祖與李克用皆自將會陳하야 擊敗巢將黃鄴于西華하다
西華有積粟하야 巢恃以爲餉이어니 及鄴敗에 巢乃解圍去하다
梁太祖入陳州에 犨兄弟迎謁馬首甚恭이라 然犨陰識太祖必成大事하야 乃降心屈迹하야 爲自托之計하다
以梁援己恩으로 爲太祖立生祠하야 朝夕拜謁하고 以其子巖尙太祖女하니 是謂長樂公主라
黃巢已去어늘 秦宗權復亂淮西하야 陷旁二十餘州라 而陳去蔡最近이로대 犨兄弟力拒之하야 卒不能下라
後에 巢宗權皆敗死하니 唐昭宗卽以陳州爲忠武軍하고 拜犨節度使하다 犨已病에 乃以位與其弟昶이러니 後數月卒하다
昶乘大寇新滅하야 乃休兵課農하고 事梁尤謹하야 梁兵攻戰四方에 昶饋輓供億에 未嘗少懈하다 昶卒에 珝代立하다
珝頗知書
하야 乃求
하야 決翟王陂
하야 漑民田
하니 兄弟居陳二十餘年
에 陳人大賴之
하다
梁太祖已降韓建
하고 取同華
하야 徙珝爲同州留後
하고 入唐
하야 爲右金吾衛上將軍
이러니 歲餘
에 以疾免官歸陳
하야 卒于家
하니 陳人爲之
하다
犨次子巖은 梁末帝時에 爲戶部尙書租庸使하야 與張漢傑漢倫等居中用事하다
梁自太祖以暴虐殺戮爲事러니 而末帝爲人特和柔恭謹이나 然性庸愚하고
以漢傑婦家而巖壻也
라 故親信之
하니 梁之大臣老將皆(功)
齒
로대 末帝獨不悟
하야 以(人)
於亡
하다
初에 朱友珪가 弑太祖自立하야 以末帝爲東都留守라 巖如東都하니 末帝與之飮酒하야 從容以誠款告之하다
巖爲末帝謀하야 遣人召楊師厚兵起事라 巖還西都하야 卒與袁象先以禁兵誅友珪하고 取傳國寶以授末帝하다
末帝立에 巖自以有功於梁하고 又尙公主하니 聞唐駙馬杜悰位至將相하야 自奉甚豐하야 恥其不及하야
乃占天下良田大宅하고 裒刻商旅하야 其門如市하고 租庸之物을 半入其私라 巖一飮食에 必費萬錢이라
故時魏州牙兵驕하야 數爲亂이라 羅紹威盡誅之러니 太祖崩에 楊師厚逐羅氏하야 據魏州하야 復置牙兵二千人하니 末帝患之하다
師厚死에 巖與租庸判官邵贊議曰 魏爲唐患이 百有餘年이라 自先帝時로 嘗切齒紹威하니 以其前恭而後倨라 今先帝新棄天下에 師厚復爲陛下憂하니 所以然者는 以魏地大而兵多也라 陛下不以此時制之면 寧知後人不爲師厚邪아 不若分相魏爲兩鎭하니 則無北顧之憂矣라하다
末帝以爲然하야 乃分相澶衛爲昭德軍하니 牙兵亂하야 以魏博降晉이라 梁由是盡失河北하다
巖曰 古之王者必郊祀天地러니 陛下卽位에 猶未郊天이라 議者以爲朝廷無異藩鎭이라하니 如此면 何以威重天下리오 今河北雖失이나 天下幸安하니 願陛下力行之하소서
敬翔以爲不可曰 今府庫虛竭하야 箕斂供軍하니 若行郊禋이면 則必賞賚니 是取虛名而受實弊也라하다
末帝不聽하고 乃備法駕幸西京이어늘 而莊宗取楊劉하니 或傳晉兵入東都矣라하고 或曰扼汜水矣라하고 或曰下鄆濮矣라하다
京師大風拔木하니 末帝大懼하고 從官相顧而泣이어늘 末帝乃還東都하야 遂不果郊하다
鎭州張文禮殺王鎔하고 使人告梁曰 臣已北召契丹하니 願梁以兵萬人出德棣州면 則晉兵憊矣라하니
敬翔以爲然이어늘 巖與漢傑皆以爲不可라하야 乃止하다 其後에 出王彦章用段凝하니 皆巖力也라
莊宗兵將至汴
이어늘 末帝惶惑
하야 不知所爲
하야 登建國樓以問群臣
하니
或曰 晉以孤軍遠來하야 勢難持久하니 雖使入汴이라도 不能守也라 宜幸洛陽하야 保險以召天下兵하야 徐圖之면 勝負未可知也라하다
末帝猶豫어늘 巖曰 勢已如此하니 一下此樓면 何人可保리오하니 末帝卒死於樓上하다
當巖用事時하야 許州溫韜尤曲事巖이러니 巖因顧其左右曰 吾常待韜厚하니 今以急投之면 必不幸吾爲利라하고 乃走投韜어늘 韜斬其首以獻하다
莊宗已滅梁에 巖素所善段凝奏請誅巖家屬하야 乃滅族之하다
嗚呼라 禍福之理가 豈可一哉리오 君子小人之禍福異也라
老子曰
이라하니 後世之談禍福者
는 皆以其言爲至論也
라
夫爲善而受福하니 焉得禍며 爲惡而受禍하니 焉得福이리오 惟君子之罹非禍者 未必不爲福이요 小人之求非福者 未嘗不及禍하니 此自然之理也라
始犨自以先見之明으로 深結梁大祖하야 及其子孫皆享其祿利하니 自謂知所托矣러니 安知其族卒與梁俱滅也리오
犨之求福於梁은 蓋老氏之所謂福也요 非君子之所求也니 可不戒哉리오
조주趙犨는 그 선조先祖가 청주靑州 사람으로 대대로 진주陳州의 아장牙將이 되었다. 조주는 어려서 아이들과 길에서 놀이를 할 때에 항오行伍를 안배하여 장수將帥와 같이 지휘하니 비록 큰 아이들이라도 모두 그의 지휘를 따랐다. 그의 아버지 조숙문趙叔文이 이를 보고 놀라며 “우리 가문을 크게 일으킬 사람은 바로 이 아이이다.”라고 하였다.
장성하자 활과 검을 잘 썼고 사람됨이 용감하고 의기義氣를 중하게 여겼는데, 자사刺史가 그의 재능에 대해 듣고 불러 휘하에 두었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충무군마보군도우후忠武軍馬步軍都虞侯가 되었다.
왕선지王仙芝가 하남河南을 침략하여 여주汝州를 함락하고 장차 동도東都를 침범하려 하였는데, 조주趙犨가 병사를 이끌고 격파하니 왕선지가 이에 남쪽으로 달아났다.
이윽고 황소黃巢가 일어나 곳곳의 주州와 현縣들이 적에게 함락되었다. 진주陳州의 호걸豪傑 수백 명이 서로 충무군忠武軍으로 나아가 조주를 자사刺史로 삼아 스스로 지킬 것을 청하니, 충무군忠武軍이 표주表奏하여 조주를 진주자사陳州刺史로 삼았다.
이윽고 황소가 장안長安을 함락하자 조주가 장리將吏에게 말하기를 “내가 생각건대 황소가 만약 장안長安의 시인市人들에게 주살誅殺되지 않는다면 반드시 그 무리들을 몰아 동쪽으로 달아날 터이니, 우리 주州는 마침 저들이 지나가는 길목에 해당한다.”라고 하였다.
이에 성과 해자를 수리하여 수비守備를 갖추고 60리里 내에 있는 백성을 옮겨 모두 성으로 들어오게 하고는 그 자제들을 선발하여 병기와 갑주를 배급하고 자신의 아우 조창趙昶과 조후趙珝를 장수將帥로 삼았다.
황소가 패전하자 과연 동쪽으로 달아나 맹해孟楷를 먼저 보내 항성項城을 점거하게 하였는데 조창이 격파하고 맹해를 잡아서 돌아왔다. 황소가 뒤이어 당도하여 맹해가 잡혔다는 소식을 듣고 크게 노하였다.
이윽고 진종권秦宗權이 채주蔡州를 가지고 황소黃巢에게 붙어 황소의 세력勢力이 몹시 커지니, 이에 그 무리들을 모두 거느리고 조주趙犨를 포위하고는 성채 안에 절구와 맷돌을 설치하여 인육을 갈아서 먹게 하였다.
진인陳人이 크게 두려워하자 조주가 부하들에게 말하기를 “우리 집안은 3대가 진주陳州의 장수였으니 반드시 이곳을 지킬 것이다. 너희 남자들은 응당 죽음 속에서 살길을 찾아 공업功業을 세워야 할 것이니, 반드시 이 기회를 놓쳐서는 안 된다.”라고 하니, 진인이 모두 크게 고무되었다.
황소가 진주성陳州城 북쪽 3리쯤에 방책防柵을 세워 팔선영八仙營을 만들고서 궁궐宮闕을 세우고 백관百官을 두고 군량을 모아 지구전으로 지치게 하고자 하였는데 병력이 20만 명이라고 하였다.
진주에는 오래전부터 수백 개의 궁노弓弩가 있었는데 낡아 못쓰게 되었다. 후대의 궁노를 만드는 공인工人들은 모두 그 무기를 알지 못하였는데, 조후趙珝가 고안하여 그것들을 수리하니 화살이 500보 거리를 날아가 사람과 말을 모두 관통하였다. 그러므로 황소가 감히 접근하지 못하였다.
포위된 지 300일 만에 조주가 식량이 다하려 하자 양梁나라에 원병을 요청하였는데, 양梁 태조太祖가 이극용李克用과 함께 모두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진주陳州에서 회합하여 황소의 장수 황업黃鄴을 서화西華에서 격파하였다.
서화에는 비축된 곡식이 있어 황소가 이를 의지하여 병사들을 먹였는데 황업이 패하자 황소는 이에 포위를 풀고 떠났다.
양梁 태조太祖가 진주陳州로 들어가니 조주趙犨 형제가 말 앞에서 매우 공손하게 영접하고 배알하였다. 그러나 조주는 태조가 반드시 대사大事를 이루리라는 것을 은연중에 알고서 이에 몸과 마음을 낮춰 스스로 의탁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양梁나라가 자신을 구원해준 은혜로 태조를 위하여 생사生祠를 세워 아침저녁으로 배알하였고, 자신의 아들 조암趙巖을 태조의 딸에게 장가보내니, 바로 장락공주長樂公主이다.
황소黃巢가 이미 달아났는데 진종권秦宗權이 다시 회서淮西에서 난을 일으켜 주변의 주州 20여 개를 함락하였다. 그러나 진주陳州는 채주蔡州와의 거리가 가장 가깝지만 조주 형제가 힘을 다해 막아 끝내 함락할 수 없었다.
후에 황소와 진종권이 모두 패하여 죽으니, 당唐 소종昭宗이 즉시 진주를 충무군忠武軍으로 만들고 조주를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조주가 이미 병들자 이에 절도사의 지위를 아우인 조창趙昶에게 주었는데 몇 달 뒤에 졸卒하였다.
조창趙昶이 큰 도적이 막 멸망한 기회를 이용해 이에 병사들을 쉬게 하고 농상農桑을 권장하였으며, 양梁나라를 더욱 정중히 섬겨 양나라 병사가 사방으로 공격하여 싸울 때에 조창이 군량을 운송하여 공급함에 일찍이 조금도 게을리 하지 않았다. 조창이 졸卒하자 조후趙珝가 대신 즉위하였다.
조후趙珝는 자못 글을 알아 이에 등애鄧艾의 옛 자취를 구하여 적왕피翟王陂를 터서 민전民田에 관개灌漑하니, 조주趙犨 형제들이 진주陳州에 산지 20여 년 동안 진인陳人들이 큰 은덕을 입었다.
양梁 태조太祖가 이미 한건韓建에게 항복을 받고 동주同州와 화주華州를 취하여 조후를 옮겨 동주유후同州留後로 삼았다. 당唐나라에 들어가 우금오위상장군右金吾衛上將軍이 되었는데, 1년 남짓 만에 병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진주陳州로 돌아와 집에서 졸卒하니, 진인陳人이 그를 조상弔喪하여 파시罷市하였다.
조주趙犨의 차자次子 조암趙巖은 양梁 말제末帝 때에 호부상서戶部尙書 조용사租庸使가 되어 장한걸張漢傑과 장한륜張漢倫 등과 함께 조정에서 권력을 행사하였다.
양梁나라가 태조太祖로부터 폭정과 살육을 일삼았는데 말제는 사람됨이 매우 유순하고 공근하였지만 성품이 용렬하고 어리석었다.
장한걸은 부가婦家의 사람이고 조암은 사위인지라 친신親信하니, 양梁나라의 대신大臣과 노장老將들은 모두 이를 갈았지만 말제만은 홀로 깨닫지 못하다 망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당초에 주우규朱友珪가 태조太祖를 시해하고 스스로 즉위하여 말제末帝를 동도유수東都留守로 삼았다. 조암趙巖이 동도東都로 가니 말제가 그와 함께 술을 마시다 조용히 속마음을 말해주었다.
조암이 말제를 위하여 모의하여 사람을 보내 양사후楊師厚의 병사를 불러들여 거사擧事하려고 하였다. 조암이 서도西都로 돌아와 끝내 원상선袁象先과 함께 금병禁兵을 동원하여 주우규朱友珪를 주살하고 전국보傳國寶를 취하여 말제에게 주었다.
말제가 즉위하자 조암은 양梁나라에 공이 있다 자부하고 게다가 공주와 혼인하였기에 당唐나라 때 부마駙馬인 두종杜悰이 지위가 장상將相에 이르고 자신의 의식衣食과 거마車馬 따위를 몹시 풍성하게 하였다는 말을 듣고는 두종에게 미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였다.
이에 천하의 좋은 밭과 큰 집을 점유하고 상인들에게 세금을 각박하게 거두어 문전성시門前成市를 이루었고 세금으로 들어오는 재물을 반이나 사적으로 유용하였다. 조암이 한 번 먹고 마실 때에 반드시 1만 전錢을 허비하였다.
옛날에 위주魏州의 아병牙兵이 교만해져 자주 난을 일으키기에 나소위羅紹威가 모두 주살하였는데, 태조太祖가 붕崩하자 양사후楊師厚가 나씨羅氏를 축출하고 위주를 점거하여 다시 아병 2천 명을 두니 말제末帝가 이를 근심하였다.
양사후가 죽자 조암趙巖이 조용판관租庸判官 소찬邵贊과 함께 의논하기를 “위주魏州가 당唐나라의 우환憂患이 된 지가 100여 년입니다. 선제先帝때로부터 일찍이 나소위를 몹시 미워하였으니 그가 앞에서는 공손하지만 뒤에서는 거만하게 굴었기 때문입니다. 지금 선제先帝께서 막 천하天下를 버리고 붕어崩御하시자 양사후가 다시 폐하의 근심거리가 되었으니 그렇게 된 이유는 위주가 땅은 크고 병사가 많기 때문입니다. 폐하陛下께서 이때에 제어하지 않으시면 후인 중에 양사후와 같은 사람이 나오지 않으리라는 것을 어찌 알겠습니까. 상주相州와 위주魏州를 나누어 두 개의 진鎭으로 만드는 것만 못하니 그렇게 하시면 북쪽을 돌아보는 근심이 없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제가 옳다고 여겨 이에 상주相州, 전주澶州, 위주衛州를 나누어 소덕군昭德軍으로 만드니, 아병이 난을 일으켜 위주魏州와 박주博州를 가지고 진晉나라에 항복하였다. 양梁나라가 이로부터 하북河北을 모두 잃었다.
이때에 양梁나라 장수 유심劉鄩 등이 장종莊宗과 전주澶州와 위주魏州 사이에서 서로 대치하여 양나라 군사가 수차례 패하였다.
조암趙巖이 말하기를 “옛날의 왕은 반드시 천지天地에 교제사郊祭祀를 지냈는데, 폐하陛下께서 즉위하시고 아직도 하늘에 교제사를 지내지 않았으므로 의론하는 자들이 ‘조정이 번진藩鎭과 다름이 없다.’라고 하니 이와 같다면 무엇으로 천하에 위엄을 보이겠습니까. 지금 하북河北은 비록 잃었지만 천하가 다행히 안정되었으니, 폐하께서는 힘써 행하십시오.”라고 하였다.
경상敬翔이 불가하다고 하면서 “지금 부고府庫가 텅 비어 가혹하게 세금을 징수하여 군대에 공급하고 있습니다. 만약 교인郊禋을 시행하시면 반드시 상을 주어야 하니 이는 허명虛名만 취하고 실제의 폐해를 받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말제末帝가 듣지 않고 이에 어가御駕를 갖추어 서경西京으로 행행幸行하자 장종莊宗이 양류楊劉를 취하였다. 혹자는 진병晉兵이 동도東都로 들어갔다고 하고 혹자는 사수汜水를 점거하였다라고 하고 혹자는 운주鄆州와 복주濮州를 함락하였다라고 하였다.
경사京師에 큰 바람이 불어 나무가 뽑히니 말제가 크게 두려워하고 종관從官들이 서로 돌아보며 눈물을 흘리자 말제가 이에 동도東都로 돌아와 마침내 교제郊祭를 지내지 못하였다.
진주鎭州의 장문례張文禮가 왕용王鎔을 죽이고 사람을 보내 양梁나라에 고하기를 “신이 이미 북쪽으로 거란契丹을 불렀으니, 양나라가 1만 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덕주德州와 체주棣州로 나오면 진晉나라 병사들이 지치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경상敬翔은 옳다고 여겼는데 조암趙巖과 장한걸張漢傑은 모두 불가하다고 하여 이에 그만두었다. 그 후에 왕언장王彦章을 내치고 단응段凝을 등용하니, 모두 조암의 힘이었다.
장종莊宗의 병사가 변주汴州에 이르려 하자 말제末帝가 당혹스러워하면서 어찌 할 바를 알지 못하고 건국루建國樓에 올라 신하들에게 물으니,
혹자가 “진晉나라는 외로운 군대를 거느리고 멀리까지 와서 형세로 볼 때 지구전持久戰을 하기 어려우니, 비록 변주汴州로 들어오게 하더라도 지킬 수 없을 것입니다. 의당 낙양洛陽으로 행행幸行하여 험준한 요새를 지키면서 천하의 병사를 불러들여 천천히 도모한다면 승부勝負는 알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말제가 머뭇거리자 조암이 말하기를 “형세形勢가 이미 이와 같으니 한 번 이 누각을 내려가면 어떤 사람이 지킬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니, 말제는 끝내 건국루 위에서 죽었다.
조암이 권력을 독단할 때에 허주許州의 온도溫韜가 조암을 잘 섬겼는데, 조암이 인하여 좌우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늘 온도를 후하게 대하였으니, 지금 위급해서 그에게 의지하면 필시 내가 온 것을 요행으로 여겨 이익으로 삼지는 않을 것이다.”라고 하고 이에 온도에게 급히 가 의탁하니 온도가 그 머리를 베어 〈장종에게〉 바쳤다.
장종이 이미 양나라를 멸망시키자 조암과 평소 친분이 있던 단응이 조암의 가속家屬들을 주살할 것을 주청奏請하여 이에 멸족滅族하였다.
오호라. 화복禍福의 이치가 어찌 한 가지로 볼 수 있겠는가. 군자와 소인의 화복은 다르다.
노자老子가 말하기를 “화禍에는 복福이 기대어 있고 복福에는 화禍가 숨어 있다.”라고 하였으니, 후세에 화복을 담론하는 자들은 모두 노자의 말을 지론至論이라 여긴다.
대저 선善을 행하여 복을 받으니 어찌 화를 얻겠으며, 악惡을 행하여 화를 받으니 어찌 복을 얻겠는가. 군자가 뜻하지 않은 화를 당할 경우 반드시 복을 받지 못하지는 않고 소인이 걸맞지 않는 복을 구할 경우 일찍이 화를 당하지 않은 적이 없으니 이는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처음 조주趙犨는 스스로 선견지명先見之明으로 양梁 태조大祖와 깊게 결탁하여 그 자손들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 복록福祿을 누렸으니, 스스로 의탁할 바를 알았다고 생각했을 터인데 어찌 자신의 일족一族이 끝내 양나라와 함께 멸망할 줄 알았겠는가.
조주가 양나라에 복을 구한 것은 대개 노자가 말한 복이요 군자가 구하는 바는 아니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