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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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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晏球多兵略이어늘 而歐公點次有生色이라
王晏球 字瑩之 洛陽人也 少遇亂하야 爲盜所掠이러니 汴州富人杜氏得之하야 養以爲子하니 冒姓杜氏하다
梁太祖鎭宣武할새 選富家子之材武者하야 置之帳下하고 號廳子都 晏球爲人倜儻하고 有大節하야 爲廳子都指揮使러니 太祖卽位 爲右千牛衛將軍하다
友珪立 龍驤戍卒反하야趣京師어늘 遣晏球擊하야 敗之于河陽하니 以功遷龍驤第一指揮使하다
末帝卽位 遷龍驤四軍都指揮使하다 梁遣捉生軍將李霸하야 將千人戍어늘 霸夜作亂하야 自水門入하야 縱火大譟하고 以長竿縛布沃油하야 仰燒建國門이라
晏球聞亂 不俟命하고 率龍驤五百騎擊之하니 賊勢稍却이라
末帝登樓見之하고 呼曰 此非吾龍驤軍邪아하니 晏球奏曰 亂者 李霸一部爾 陛下嚴守宮城하고 而責臣破賊하소서하고 遲明 盡殺之하니 以功拜澶州刺史하다
梁晉軍河上 以晏球爲行營馬步軍都指揮使러니 莊宗入汴할새 晏球以兵追之하야 行至封丘하야 聞末帝已崩하고 卽解甲降唐하니 莊宗賜姓名하야 曰李紹虔하고 拜齊州防禦使하야 戍瓦橋關하다
明宗兵變하야 自鄴而南하야 遣人招晏球어늘 晏球從至洛陽하니 拜歸德軍節度使하다
晏球聞秃餒等兵且來하고 留張延朗하야 屯新樂하고 自逆於러니 而契丹從佗道入定州하야 與都出不意擊延朗軍하니
延朗大敗하야 收餘兵하야 會晏球趨한대 都乘勝追之
晏球先至水次하야 方坐胡床指揮러니 而都衆掩至 晏球與左右十餘人連矢射之하니 都衆稍却이나 而後軍亦至
晏球立高岡하야 號令諸將하되 皆橐弓矢用短兵하되 回顧者斬이라하고
符彦卿以左軍攻其左하며 高行珪以右軍攻其右하며 中軍騎士抱馬項馳入都軍하니 都遂大敗하야 自曲陽至定州 橫尸棄甲六十餘里
都與秃餒入城하야 不敢復出한대 契丹又遣하야 以七千騎益都어늘 晏球遇之唐河하야 追擊至滿城하니 斬首二千級이요 獲馬千匹이라
契丹自中國多故 彊於北方하야 北方諸夷 無大小皆畏伏하고 而中國之兵 遭契丹者 未嘗少得志러니
自晏球擊死秃餒하고 又走惕隱으로 其餘衆奔潰하야 投村落이어늘 村落之人 以鋤耰白梃으로 所在擊殺之하야 無復遺類
惕隱與數十騎走하야 至幽州西하야 爲趙德鈞擒하야 送京師하니
明宗下詔하야 責誚契丹이라 契丹後數遣使至中國하야 求歸惕隱等할새 辭甚卑遜이로대 輒斬其使以絶之
於是時 中國之威 幾於大震而契丹少衰伏矣하니 自晏球始也
晏球攻定州하야 久不克한대 明宗數遣人하야 促其破賊하니 晏球以謂未可急攻이어늘 其偏將朱弘昭張虔釗等宣言曰 晏球怯耳라하고 乃驅兵以進하니 兵果敗하야 殺傷三千餘人이라 由是 諸將不敢復言攻이라
晏球乃休養士卒하야 食其三州之賦하고 悉以俸祿所入具牛酒하야 日與諸將高會 久之 都城中食盡하야 先出其民萬餘人하고 數與秃餒謀決圍以走라가 不果러니 都將馬讓能以城降하니 都自焚死하다
晏球爲將有機略하고 善撫士卒이라 其擊秃餒 旣因敗以爲功하고 而諸將皆欲乘勝取都어늘 晏球反獨不動하야 卒以持久弊之
自天成三年四月都反으로 明年二月始克之한대 軍中未嘗戮一人이라 以破都功으로 拜天平軍節度使하고 이요 贈太尉하다


03. 왕안구王晏球전기傳記
왕안구王晏球병략兵略이 많았는데 구양공歐陽公이 서술한 것이 생동감이 있다.
왕안구王晏球는 자는 형지瑩之이고 낙양洛陽 사람이다. 어려서 난을 만나 도적에게 사로잡혔는데, 변주汴州부자富者두씨杜氏가 왕안구를 얻어서 양자로 삼으니, 두씨杜氏 을 가져다 썼다.
태조太祖선무宣武진수鎭守할 때에 재능과 용맹함을 겸비한 부자집 자재를 선발하여 막하에 두고 청자도廳子都라고 불렀다. 왕안구는 사람됨이 호방하고 대절大節이 있어 청자도지휘사廳子都指揮使가 되었는데,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우천우위장군右千牛衛將軍이 되었다.
주우규朱友珪가 즉위하자 용양龍驤수졸戍卒들이 반란을 일으켜 회주懷州로부터 경사京師로 달려오자 왕안구를 보내 하양河陽에서 격퇴하니 그 공으로 용양제일지휘사龍驤第一指揮使로 승진하였다.
말제末帝가 즉위하자 용양사군도지휘사龍驤四軍都指揮使로 승진시켰다. 나라가 착생군장捉生軍將 이패李霸를 보내 1천 명을 거느리고 양류楊劉를 방어하게 하였는데, 이패가 밤에 난을 일으켜 수문水門으로 들어가 불을 지르고 크게 소란을 피우고 긴 장대에다 천을 묶고 기름을 적셔 불을 붙여 위로 들어올려 건국문建國門을 불태웠다.
왕안구王晏球는 난이 일어났다는 말을 듣자 을 기다리지 않고 용양군龍驤軍 5백 기병을 거느리고 격퇴하니, 적의 형세가 조금 꺾였다.
말제末帝에 올라 이를 보고 소리치기를 “이는 우리 용양군이 아닌가.”라고 하니, 왕안구가 아뢰기를 “난을 일으킨 것은 이패의 한 부대일 뿐이니, 폐하께서는 궁성宮城엄수嚴守하시고 적을 격파하는 것은 신에게 맡겨주십시오.”라고 하고 동틀 무렵 반란군을 모두 죽이니 그 공으로 전주자사澶州刺史에 배수되었다.
나라와 나라가 하상河上에 주둔할 때에 왕안구王晏球행영마보군도지휘사行營馬步軍都指揮使로 삼았는데, 장종莊宗변주汴州로 들어가자 왕안구가 병사로 추격하여 봉구封丘에 이르러 말제末帝가 이미 붕어崩御하였다는 소식을 듣고는 즉시 무장을 해제하고 나라에 항복하니, 장종이 이소건李紹虔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하고 제주방어사齊州防禦使에 배수하여 와교관瓦橋關을 수비하게 하였다.
명종明宗병변兵變을 일으켜 으로부터 남하南下하여 사람을 보내 왕안구王晏球를 부르자 왕안구가 종군從軍하여 낙양洛陽에 이르니 귀덕군절도사歸德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정주定州왕도王都가 반란을 일으키자 왕안구를 초토사招討使로 삼아 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 장연랑張延朗 등과 토벌하게 하였다. 왕도가 사람을 보내 북쪽으로 가 거란契丹을 불러들이니 거란이 독뇌秃餒를 보내 1만 기병을 거느리고 왕도를 구원해주었다.
왕안구가 독뇌 등의 병사가 장차 온다는 말을 듣고 장연랑을 남겨두어 신락新樂에 주둔하게 하고 자신은 망도望都에서 적을 맞으려 하였다. 그런데 거란은 다른 길을 통해 정주定州로 들어와 왕도와 함께 생각지도 못한 틈을 타 장연랑의 군대를 공격하였다.
장연랑이 크게 패하여 남은 병사를 수습하여 왕안구와 회합하여 곡양曲陽으로 달려갔는데 왕도가 승세를 타고 추격하였다.
왕안구가 먼저 물가에 이르러 바야흐로 호상胡床에 앉아 지휘하고 있었는데 왕도의 무리들이 갑자기 이르자 왕안구가 좌우左右의 부하 10여 명과 연이어 활을 쏘니 왕도의 무리들이 조금 물러났지만 후군後軍이 또한 이르렀다.
왕안구가 높은 언덕에 서서 장수들에게 호령하기를 모두 활과 화살을 전대에 집어넣고 짧은 무기를 사용하되 뒤를 돌아보는 자는 참하겠다고 하였다.
그리고는 부언경符彦卿좌군左軍으로 왼쪽을 공격하고 고행규高行珪우군右軍으로 오른쪽을 공격하고 중군中軍기사騎士들은 말의 목을 안고 왕도의 군대로 돌격하니, 왕도가 마침내 크게 패하여 곡양曲陽에서 정주定州에 이르기까지 널브러진 시체와 버려진 갑주가 60여 리나 이어졌다.
왕도가 독뇌와 함께 으로 들어가 감히 다시 나오지 않았다. 거란이 또 탕은愓隱을 보내 7천 명의 기병으로 왕도를 도왔는데, 왕안구가 당하唐河에서 적군을 만나 추격하여 만성滿城에까지 이르니 벤 수급이 2천이었고 노획한 말이 1천 필이었다.
거란이 중국이 전쟁이 많아진 뒤로 북방北方에서 강성해져 북방의 크고 작은 여러 오랑캐들이 모두 두려워 복종하였고, 중국의 병사가 거란과 전쟁할 경우 일찍이 조금도 뜻을 얻지 못하였다.
그런데 왕안구가 독뇌를 공격하여 죽이고 또 척은을 패주시킨 뒤로 그 나머지 무리들이 흩어져 달아나 촌락村落으로 들어갔는데 촌락의 사람들이 농기구와 몽둥이를 가지고 도처에서 쳐 죽여 다시 살아남은 이가 없었다.
척은惕隱이 수십 명의 기병과 함께 달아나 유주幽州 서쪽에 이르러 조덕균趙德鈞에게 사로잡혀 경사京師로 보내졌다.
명종明宗조서詔書를 내려 거란契丹을 꾸짖었는데 거란이 이후에 자주 사자를 중국으로 보내 척은 등을 돌려보내 줄 것을 청할 때에 말이 몹시 공손하였지만 사자를 보낼 때마다 참수하여 국교를 끊었다.
이때에 중국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고 거란이 조금 쇠락해졌으니, 이는 왕안구王晏球로부터 시작되었다.
왕안구가 정주定州를 공격하여 오랫동안 이기지 못하자 명종이 수차례 사람을 보내 적을 격파할 것을 재촉하니 왕안구는 급하게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하였는데, 그의 편장偏將 주홍소朱弘昭장건쇠張虔釗 등이 선언하기를 “왕안구는 겁쟁이일 뿐이다.”라고 하고 이에 병사를 몰아 진군하니 병사가 과연 패하여 죽거나 다친 사람이 3천여 명이었다. 이로부터 장수들이 감히 다시 공격하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왕안구가 이에 사졸士卒을 쉬게 하고 세 의 부세로 군사들을 먹이고 들어오는 봉록俸祿 전부를 가지고 소와 술을 마련하여 날마다 장수들과 성대한 연회를 열었다. 오랜 시간이 지나자 왕도王都가 성에 식량이 고갈되어 먼저 그 백성 1만여 명을 내보냈고 여러 차례 독뇌秃餒와 포위를 뚫고 달아날 것을 모의하다가 실행하지 못하였는데, 왕도의 장수 마양능馬讓能이 성을 가지고 항복하니 왕도는 스스로 불을 질러 죽었다.
왕안구王晏球는 장수로서 기략機略이 있었고 사졸士卒들을 잘 위무慰撫하였다. 그가 독뇌秃餒를 공격할 때에 패배한 것을 계기로 을 세웠고 장수들은 모두 승세를 타고 왕도王都를 잡으려고 하였는데, 왕안구만은 오히려 홀로 움직이지 않고서 끝내 지구전持久戰으로 그들을 지치게 하였다.
천성天成 3년(928) 4월 왕도가 반란한 뒤로 이듬해 2월에 비로소 이겼는데 군중에서 일찍이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 왕도를 격파한 공으로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에 배수되었고 또 평로平盧로 옮겼으며 누차 승진하여 겸중서령兼中書令에까지 이르렀다. 이해에 하니 나이는 62세였고 태위太尉증직贈職되었다.


역주
역주1 王晏球傳 : 王晏球(?~928)는 자는 瑩之이고 洛陽 사람이다. 列傳은 ≪舊五代史≫ 卷64 〈唐書 第40 列傳 第16〉, ≪新五代史≫ 卷46 〈雜傳 第34〉에 각각 실려 있다.
왕안구는 어려서 도적에 사로잡혔다가 汴州의 富者인 杜氏가 얻어서 양자로 삼았다. 후에 梁 太祖에게 선발되어 末帝에 이르기까지 수많은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梁나라와 晉나라가 河上에서 대치할 때에 말제가 이미 崩御하였다는 말을 듣고 즉시 무장을 해제하고 後唐에 항복하여 莊宗에게 李紹虔이라는 성과 이름을 하사받았고, 明宗이 변란을 일으켜 왕안구를 부르자 즉시 從軍하였다. 많은 戰功 중에 定州의 王都의 반란을 진압한 것이 가장 두드러지는데, 왕도가 契丹의 군대까지 끌어들여 저항하였지만 이를 뛰어난 전술과 용맹으로 패주시켰다. 이로 인해 北方에서 강성해진 거란의 세력이 위축되었고 중국의 위세가 크게 떨쳐졌다.
이 열전에서는 왕안구의 사적을 순차적으로 서술하여 그의 兵略을 부각시켰는데, 특히 왕도의 반란을 진압하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또한 그에 대해 장수로서 機略이 있었고 士卒들을 잘 慰撫하였으며 왕도의 반란을 평정하는 동안 군중에서 일찍이 한 사람도 죽이지 않았다고 평하였다.
역주2 懷州 : 치소는 지금의 河南省 沁陽에 있었다.
역주3 楊劉 : 黃河의 北岸으로 현재의 山西省 東阿縣에 있던 지명이다.
역주4 定州王都反……契丹遣秃餒 : ≪五代史纂誤≫ 卷下에 “지금 ≪新五代史≫ 卷72 〈四夷附錄 第1〉을 살펴보건대 ‘定州의 王都가 반란을 일으키자 後唐이 王晏球를 보내 토벌하니, 契丹이 塔納 등을 보내 기병 5천 騎로 王都를 구원하게 하였다.’라고 하여 〈王晏球傳〉과 다르니, 어느 것이 옳은지 알지 못하겠다.[今按契丹附錄云 定州王都反 唐遣王晏球討之 契丹遣塔納等 以騎五千救都 與晏球傳不同 未知孰是]”라고 하였다.
역주5 望都 : 현재 중국 河北省에 있는 縣 이름이다.
역주6 曲陽 : 현재 중국 河北省 保定에 있는 縣 이름이다.
역주7 惕(척)隱 : 遼나라의 宗正 관직으로, 皇族의 政敎를 관장하였다.
역주8 又徙平盧……年六十二 : ≪五代史纂誤補≫ 卷下에 “삼가 살펴보건대 ≪舊五代史≫ 〈明宗紀〉에 ‘王晏球는 長興 元年(930) 3월에 靑州를 鎭守하였는데 3년 8월에 卒하였다.’라고 하였고 本傳에도 또한 ‘靑州를 鎭守할 때에 兼中書令을 증직하였는데, 長興 3년에 卒하였으니 당시 나이가 60세였다.’라고 하니 여기와 합치되지 않는 것이 많다.[謹按薛史明宗紀 王晏球干長興元年三月 鎭靑州 三年八月卒 本傳亦云 鎭靑州 就加兼中書令 長興三年卒 時年六十 此多不合]”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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