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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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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此傳亦整潔可誦이라
張希崇 字德峰이요 幽州薊人也 少好學하야 通左氏春秋러니 劉守光不喜儒士하니 希崇因事軍中爲偏將하야 將兵戍平州하다
其後契丹攻陷平州하야 得希崇知其儒者也하야 以爲盧龍軍行軍司馬하다
明宗時 盧文進自平州亡歸하니 契丹因以希崇代文進爲平州節度使하고 遣其親將以三百騎監之하다
居歲餘 虜將喜其爲人하야 監兵稍怠어늘 希崇因與其麾下謀走南歸하다
其麾下皆言兵多不可俱亡하니 懼不得脫이라하고 因勸希崇獨去
希崇曰 虜兵守我者三百騎爾 烹其將이면 其兵必散走호리라 且平州去虜帳千餘里 使其聞亂而呼兵이라도 則吾與汝等在漢界矣라하니 衆皆曰 善이라하고 乃先爲穽하고 寘以石灰하다
明日 虜將謁希崇이어늘 希崇飮之以酒하야 殺之穽中하니 兵皆潰去 希崇率其麾下하야 得生口二萬南歸하니 明宗嘉之하야 拜汝州防禦使하고 遷靈武節度使하다
靈州地接戎狄하야 戍兵餉道 常苦抄掠이라 希崇乃開屯田하야 敎士耕種하야 軍以足食而省轉饋하니 明宗下詔褒美하다
希崇撫養士卒하고 招輯夷落하니皆遣使入貢하다
居四歲 上書求還內地하야 徒鎭邠寧하다
入立 復拜靈武節度使하니 希崇歎曰 吾當老死邊徼하리니 豈非命邪아하다
希崇事母至孝하야 朝夕母食 必侍立左右라가 徹饌乃敢退하다
爲將不喜聲色하고 好讀書하야 頗知星曆이라 天福三年 月掩口大星하니 希崇歎曰 畢口大星 邊將也 我其當之乎인져하다
明年正月하니 贈太師하다 有子仁謙이라


05. 장희숭張希崇전기傳記
은 실로 정결整潔하여 읽을 만하다.
장희숭張希崇은 자는 덕봉德峰이고 유주幽州 땅 사람이다. 어려서 학문을 좋아하여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에 능통하였는데, 유수광劉守光유사儒士를 좋아하지 않으니 장희숭은 군중軍中에서 일을 보다 편장偏將이 되어 병사를 거느리고 평주平州를 방어하였다.
그 후에 거란契丹이 평주를 공격하여 함락시키고 장희숭을 붙잡아 그가 유사儒士임을 알고는 노룡군행군사마盧龍軍行軍司馬로 삼았다.
명종明宗 때에 노문진盧文進이 평주에서 도망쳐 돌아가자 거란이 인하여 노문진을 대신해 장희숭을 평주절도사平州節度使로 삼고 친신親信하는 장수를 보내 300명의 기병으로 감시하게 하였다.
한해 남짓 지났을 때에 오랑캐의 장수가 장희숭張希崇의 사람됨을 좋아하여 병사를 감시함이 조금 소홀해지자 장희숭이 인하여 그 휘하麾下와 남쪽으로 돌아갈 것을 도모하였다.
휘하의 장수들은 모두 “병사가 많아 함께 도망할 수 없으니 빠져나갈 수 없을까 두렵습니다.”라고 하고 인하여 장희숭에게 혼자 달아날 것을 권하였다.
장희숭이 말하기를 “나를 지키고 있는 오랑캐 병사는 기병 300명뿐이니, 그 장수를 죽이면 그 병사들은 반드시 흩어져 달아날 것이다. 또 평주平州는 오랑캐 진영과 1천여 리나 떨어져 있으니 가령 난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부르더라도 나와 너희들은 이미 멀리 중국 경계에 가 있을 것이다.”라고 하니 수하들이 모두 좋다고 하고 이에 먼저 함정을 만들고 그 속을 석회로 채웠다.
다음날 오랑캐의 장수가 장희숭을 찾아오자 장희숭이 술을 먹여서 함정에 빠뜨려 죽이니 병사들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장희숭이 그 휘하를 거느리고 포로로 잡혔던 중국인 2만 명을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가니, 명종明宗이 가상히 여겨 여주방어사汝州防禦使에 배수하고 영무절도사靈武節度使로 승진시켰다.
영주靈州는 땅이 융적戎狄과 인접해 있어 수자리 사는 병사를 위해 군량을 수송하는 도중에 늘 약탈에 시달렸다. 장희숭張希崇이 이에 둔전屯田을 개간하여 병사들에게 경작하게 하여 군사들을 풍족히 먹이고 군량의 수송을 줄이니, 명종明宗조서詔書를 내려 칭찬하였다.
장희숭이 사졸士卒무양撫養하고 오랑캐 부락들을 타일러 복속시키니 회골回鶻, 과주瓜州, 사주沙州 등 오랑캐들이 모두 사자를 보내 공물貢物을 바쳤다.
4년이 지나자 상소上疏하여 내지內地로 들어오게 해줄 것을 청하여 임지를 옮겨 빈녕邠寧진수鎭守하였다.
후진後晉 고조高祖가 낙양에 들어와 즉위하자 다시 영무절도사靈武節度使에 배수되니, 장희숭張希崇이 탄식하기를 “나는 변방에서 늙어 죽어야 할 것이니 어찌 천명이 아니겠는가.”라고 하였다.
장희숭張希崇이 지극한 효성으로 어머니를 모셔 아침저녁 어머니가 식사하실 때에 반드시 곁에 시립侍立하고 있다가 음식을 거둔 뒤에야 감히 물러났다.
장수가 되어서는 성색聲色을 좋아하지 않고 독서를 좋아하여 자못 천문天文을 알았는데, 천복天福 3년(938)에 달이 필수畢宿 상단의 큰 별을 가리니, 장희숭이 탄식하기를 “필수畢宿 상단의 큰 별은 변방의 장수를 가리키니, 내가 해당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듬해 정월에 하니 태사太師증직贈職되었다. 아들은 장인겸張仁謙이다.


역주
역주1 張希崇傳 : 張希崇(?~939)은 자는 德峰이고 幽州 薊 땅 사람이다. 열전은 ≪舊五代史≫ 卷88 〈晉書 第14 列傳 第3〉, ≪新五代史≫ 卷47 〈雜傳 第35〉에 각각 실려 있다.
장희숭은 학문을 좋아하여 ≪春秋左氏傳≫에 능통하였는데, 劉守光이 儒士를 좋아하지 않으니 軍中에서 일을 보다 平州를 방어하였다. 契丹이 평주를 함락시키고 장희숭을 인질로 잡았는데, 좋은 계책을 써 휘하 군사들과 중국인 포로 2만 명을 데리고 남쪽으로 돌아왔다. 이때에 明宗이 靈武節度使로 승진시켰다. 靈州에서도 屯田을 개간하여 군사들을 풍족히 먹이고 오랑캐를 타일러 복속시켜 回鶻, 瓜州, 沙州 등 오랑캐들이 貢物을 바쳤다. 4년이 지나 임지를 邠寧으로 옮겼으나 晉 高祖가 즉위하자 다시 靈武節度使에 배수되었다. 938년에 任所에서 卒하였고 太師에 贈職되었다. 효성이 지극하여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고 장수가 된 뒤로 聲色을 좋아하지 않았다. 天文을 알아 자신이 변방에서 죽을 것을 예상하였다.
이 열전에서는 뛰어난 재능과 인자함을 갖추고도 중용되지 못하고 변방을 전전하다 죽은 장희숭의 사적을 짧고 담담하게 서술하였고 史評은 두지 않았다. 이에 반해 ≪구오대사≫에는 장희숭이 효심을 다해 어머니를 모시던 정황을 자세하게 서술하였고, 邠州에서 일어난 訟事를 명쾌하게 판결한 일을 구체적으로 서술하여 그의 인품과 재능을 좀 더 부각시켰다. 또한 사평에서도 장희숭은 큰 재능을 갖추었음에도 변방에서 늙어 才良을 다 펼치지 못하였으니 또한 안타깝다고 평하였다.
역주2 回鶻瓜沙 : 回鶻은 중국 唐나라 때 ‘위구르’를 부르던 말로 몽골 고원과 중앙아시아에서 활약한 투르크계 민족으로서 현재 중국의 新疆維吾爾自治區에 주로 분포한다. 瓜는 瓜州로 지금의 江蘇省 揚州市 남쪽 長江邊에 위치해 있으며 지역이 運河의 입구에 있어 당시 南北 交通의 주요 도로였다. 沙는 沙州로 西夏 부근에 있었던 蒙古 지역의 지명이다.
역주3 晉高祖 : 石敬瑭(892~942)을 가리킨다. 太原 사람으로 後唐의 明宗을 섬겨 전공을 세우고, 그 딸을 아내로 맞이하였다. 禁軍長官으로서 河東節度使와 北京留守를 겸하여, 後唐 최고의 세력가가 되었다. 그 후 명종의 후계자와 반목이 생기자 자립을 꾀하였으며, 契丹에 대하여 신하를 자청하고 歲貢을 바쳤고 후에 16개 州를 할양한다는 조건으로 거란의 원조를 받아 반란을 일으켜 後晉을 세우고 皇帝에 등극한다.
역주4 : 畢宿를 가리킨다. 28宿 가운데 하나로 8개의 별로 이루어져 있으며 白虎의 7수 가운데 제 5수이다. 전쟁과 비를 주관한다고 하여 雨師라고 부르기도 한다. ≪史記≫ 권4 〈周本紀〉에 “9년에 武王이 畢宿에 제사를 올렸다.”라고 하였는데, ≪史記索隱≫에 “畢宿는 전쟁을 주관하는 별이므로 출병하면서 畢宿에 제사를 지낸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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