甚哉
라 여 悲夫
인저 可爲流涕者矣
로다 然士之生死
가 豈其一身之事哉
아
에 梁王
이 欲以嬖吏張廷範爲太常卿
이러니 唐宰相裴樞
가 以謂 太常卿
은 唐
이 常以淸流爲之
어늘 廷範乃梁客將
이니 不可
라하니
梁王이 由此大怒하야 曰 吾常謂裴樞純厚하야 不陷浮薄이러니 今亦爲此耶아라하다
是歲四月에 彗出西北하야 掃文昌軒轅天市어늘 宰相柳璨이 希梁王旨하야 歸其譴於大臣이라
於是에 左僕射裴樞獨孤損과 右僕射崔遠과 守太保致仕趙崇과 兵部侍郞王贊과 工部尙書王溥와 吏部尙書陸扆가 皆以無罪貶하고 同日賜死于白馬驛이라
凡搢紳之士로 與唐而不與梁者가 皆誣以朋黨하야 坐貶死者가 數百人이라 而朝廷爲之一空하다
明年三月에 唐哀帝가 遜位於梁할새 遣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張文蔚爲冊禮使하고 禮部尙書蘇循爲副하며 中書侍郞同中書門下平章事楊涉爲押傳國寶使하고 翰林學士中書舍人張策爲副하며 禦史大夫薛貽矩爲押金寶使하고 尙書左丞趙光逢爲副하다
四月甲子
에 文蔚等
이 自上源驛
으로 奉冊寶
하며 乘
하야 導以
하야 朝梁于金祥殿
하니
梁王袞冕南面
이어늘 臣文蔚
과 臣循
이 奉冊升殿
하야 進讀已
에 臣涉
과 臣策
이 奉傳國璽
하고 臣貽矩
와 臣光逢
이 奉
하야 以次升
하야 進讀已
에 降
하야 率文武百官
하야 北面舞蹈
하고 再拜賀
하다
夫一太常卿與社稷이 孰爲重가 使樞等不死면 尙惜一卿이어늘 其肯以國與人乎아
雖樞等之力이 未必能存唐이나 然必不亡唐而獨存也라
嗚呼라 唐之亡也에 賢人君子旣與之共盡하고 其餘在者는 皆庸懦不肖傾險獪猾趨利賣國之徒也라
不然이면 安能蒙恥忍辱于梁庭이 如此哉리오 作唐六臣傳하노라
張文蔚
은 字右華
니 河間人也
라 初
에 以文行知名
하고 擧進士及第
하다 時
에 爲翰林學士承旨
하다
是時
에 天子微弱
하고 制度已隳
어늘 文蔚居
하야 制詔四方
에 獨守大體
하다
殺裴樞等七人
하고 蔓引朝士
하야 輒加誅殺
하니 搢紳相視以目
하야 皆不自保
어늘 文蔚力講解之
하니 朝士多賴以全活
이러라
梁太祖始立에 仍以文蔚爲相하니 梁初制度는 皆文蔚所裁定이라 文蔚居家亦孝悌라
開平二年에 太祖北巡할새 留文蔚西都한대 以暴疾卒하니 贈右僕射하다
涉擧進士하고 昭宗時爲吏部尙書하다 哀帝卽位에 拜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涉은 唐名家니 世守禮法하고 而性情謹厚이라 不幸遭唐之亂하야 拜相之日에 與家人相對泣下하고 顧其子凝式曰 吾不能脫此網羅하니 禍將至矣에 必累爾等이라하다
唐亡에 事梁하야 爲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在位三年에 俛首無所施爲라 罷爲左僕射 知貢擧하고 後數年卒하다
子凝式은 有文辭하고 善筆札이라 歷事梁唐晉漢周하고 常以心疾致仕하야 居於洛陽하다 官至太子太保하다
張策은 字少逸이니 河西敦煌人也라 父同은 爲唐容管經略使라 策少聰悟好學하야 通章句라
父同이 居洛陽敦化里할새 浚井이라가 得古鼎한대 銘曰 魏黃初元年春二月匠吉千이라
同以爲奇
한대 策時年十三
으로 居同側
이라가 啓曰 漢建安二十五年
에 薨
하고 改元延康
이라 是歲十月
에 受禪
하고 又改黃初
하니 是黃初元年
에 無二月也
어늘 銘何謬邪
오하니 同大驚異之
하다
策少好浮圖之說
이러니 乃落髮爲僧
하야 居長安
라 犯長安
이어늘 策乃返初服
하고 奉父母以避亂
하야 居田里十餘年
이러니 召拜廣文館博士
하다
邠州
辟觀察支使
하다 晉王李克用
이 攻行瑜
하니 策與婢肩輿其母
하야 東歸
할새 行積雪中
하니 行者憐之
러라
할새 辟鄭滑支使
러니 以母喪解職
하다 服除
에 入唐
하야 爲膳部員外郞
하다
華州
이 辟判官
하고 建徙許州
에 以爲掌書記
하다 建遣策聘于太祖
한대 太祖見而喜曰 張夫子至矣
로다하고 遂留以爲掌書記
하고 薦之于朝
하니 累拜中書舍人 翰林學士
하다
太祖卽位에 遷工部侍郞奉旨하다 開平二年에 拜刑部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하고 遷中書侍郞이러니 以風恙罷爲刑部尙書라가 致仕하야 卒于洛陽하다
光逢在唐에 以文行知名하니 時人稱其方直溫潤하야 謂之玉界尺이라하다
昭宗時에 爲翰林學士承旨 御史中丞이러니 以世亂棄官하고 居洛陽하야 杜門絶人事者五六年이러라
柳璨爲相에 與光逢有舊恩하야 起光逢爲吏部侍郞 太常卿하다
唐亡에 事梁爲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하고 累遷左僕射하고 以太子太保致仕하다
唐天成中
에 하야 拜太保
하고 封齊國公
하다 卒
에 贈太傅
하다
薛貽矩는 字熙用이니 河東聞喜人也라 仕唐爲兵部侍郞 翰林學士承旨하다
하야 大誅宦者
할새 貽矩嘗爲中尉韓全誨等作畫像讚
하야 坐左遷
하다
貽矩乃自結於梁太祖하니 太祖言之於朝하야 拜吏部尙書하고 遷御史大夫하다
天祐三年에 太祖自長蘆還軍할새 哀帝遣貽矩來勞한대 貽矩以臣禮見하니 太祖揖之升階라
貽矩曰 殿下功德及人
하니 이라 皇帝方行
하니 臣安敢違
오하고 乃稱臣拜舞
하니 太祖側身以避之
하다
貽矩還하야 遂趣哀帝遜位하다 太祖卽位에 拜貽矩中書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하고 累拜司空하다 貽矩爲梁相五年에 卒하니 贈侍中하다
蘇循은 不知何許人也라 爲人巧佞하고 阿諛無廉恥하야 惟利是趨라 事唐爲禮部尙書하다
是時에 梁太祖已弑昭宗하고 立哀帝하니 唐之舊臣이 皆憤惋切齒하야 或俛首畏禍하고 或去不仕어늘 而循特傅會梁하야 以希進用이라
梁兵攻楊行密
이라가 大敗于渒河
하니 太祖躁忿
하야 急於禪代
하야 欲邀唐
이라
群臣莫敢當其議
어늘 獨循倡言 梁王功德
은 天命所歸
니 宜卽受禪
이라하다 할새 循
冊禮副使
하다
循有子楷
가 中
에 擧進士及第
한대 어늘 楷常慙恨
이러니
及昭宗遇弑하야 唐政出於梁이라 楷爲起居郞하야 與柳璨張廷範等相結하야 因謂廷範曰 夫諡者는 所以易名而貴信也라 前有司諡先帝曰昭라하니 名實不稱이라 公爲太常卿이요 予史官也니 不可以不言이라하고 乃上疏駁議라
而廷範本梁客將으로 嘗求太常卿不得者일새 廷範亦以此怨唐이라
因下楷疏廷範하니 廷範議曰 臣聞執事堅固之謂恭이요 亂而不損之謂靈이요 武而不遂之謂莊이요 在國逢難之謂閔이요 因事有功之謂襄이니 請改諡昭宗皇帝曰恭靈莊閔皇帝하고 廟號襄宗하소서하다
梁太祖已卽位에 置酒玄德殿하고 顧群臣自陳 德薄하야 不足以當天命이니 皆諸公推戴之力이라하니 唐之舊臣楊涉張文蔚等이 皆慙懼하야 俯伏不能對어늘
獨循與張禕薛貽矩盛稱 梁王功德은 所以順天應人者라하다
循父子
가 皆自以附會梁
하야 得所託
하야 旦夕引首
하야 希見進用
하니 尤惡之
하야 謂太祖曰 梁室新造
에 宜得端士以厚風俗
어늘 循父子皆無行
하니 不可立於新朝
라하다
其後에 友謙叛梁降晉한대 晉王將卽位할새 求唐故臣在者하야 以備百官之闕하니 友謙遣循至魏州하다
是時에 梁未滅하니 晉諸將相多不欲晉王卽帝位라 晉王之意雖銳나 將相大臣에 未有贊成其議者라
循始至魏州하야 望州廨聽事卽拜하고 謂之拜殿이라하고 及入謁하야 舞蹈呼萬歲而稱臣하니 晉王大悅이라
明日
에 又獻
三十管
하니 晉王益喜
하야 因以循爲節度副使
하다
楷
는 中
에 爲尙書員外郞
하다 明宗卽位
에 大臣欲理其駁諡之罪
어늘 以憂死
하다
當唐之亡也하야 又有杜曉者하니 字明遠이라 祖審權과 父讓能이 皆爲唐相이라 昭宗時에 王行瑜李茂貞兵犯京師하니 昭宗殺讓能於臨皋하야 以自解라
曉以父死無罪
하야 居喪哀毀
하고 服除
에 布衣
하야 自廢十餘年
하다
判鹽鐵
할새 辟巡官
하고 除畿縣尉 直昭文館
이어늘 皆不起
하다
判戶部
할새 又辟巡官
하니 或謂曉曰
死
하고 子紹自廢不出仕
라가 以物理責之
어늘 乃仕
라 吾子忍令杜氏歲時鋪席
하야 祭其先人
에 同匹庶乎
아하거늘 曉乃爲之起
하다
累遷膳部郞中 翰林學士하다 梁太祖卽位에 遷工部侍郞奉旨하고
嗚呼
라 始爲朋黨之論者誰歟
아 니 眞可謂不仁之人哉
인저
予嘗至
하야 讀
하야 見漢之群臣
이 稱魏功德
하야 而大書深刻
하고 自列其姓名
하야 以夸耀于世
하고
又讀梁實錄하야 見文蔚等所爲如此하고 未嘗不爲之流涕也로라
夫以國予人而自夸耀하고 及遂相之는 此非小人이면 孰能爲也리오 漢唐之末에 擧其朝皆小人也니 而其君子者何在哉오
當漢之亡也하얀 先以朋黨禁錮天下賢人君子하니 而在其朝者가 皆小人也라 然後에 漢從而亡하고
及唐之亡也하얀 又先以朋黨盡殺朝廷之士하야 而其餘存者가 皆庸懦不肖傾險之人也라 然後에 唐從而亡이라
夫欲空人之國而去其君子者는 必進朋黨之說이요 欲孤人主之勢而蔽其耳目者는 必進朋黨之說이요 欲奪國而與人者는 必進朋黨之說이라
夫爲君子者는 固常寡過하니 小人欲加之罪인댄 則有可誣者하고 有不可誣者하야 不能遍及也라 至欲擧天下之善하야 求其類而盡去之하야는 惟指以爲朋黨耳라
故其親戚故舊를 謂之朋黨이 可也요 交遊執友를 謂之朋黨이 可也요 宦學相同을 謂之朋黨이 可也요 門生故吏를 謂之朋黨이 可也니 是數者는 皆其類也며 皆善人也라
故曰 欲空人之國而去其君子者는 惟以朋黨罪之면 則無免者矣라하노라
夫善善之相樂하야 以其類同은 此自然之理也라 故聞善者必相稱譽니 稱譽則謂之朋黨하고 得善者는 必相薦引이니 薦引則謂之朋黨하야
使人聞善不敢稱則하니 人主之耳가 不聞有善于下矣요 見善不敢薦하니 則人主之目이 不得見善人矣라
善人日遠
하고 而小人日進
하면 則爲人主者
가 倀倀然誰
之圖治安之計哉
아
故曰 欲孤人主之勢而蔽其耳目者는 必用朋黨之說也라하노라
一君子存이면 群小人雖衆이나 必有所忌而有所不敢爲라 惟空國而無君子라야 然後小人得肆志於無所不爲하니 則漢魏唐梁之際가 是也라
故曰 可奪國而予人者는 由其國無君子하고 空國而無君子는 由以朋黨而去之也라하노라
嗚呼
라 朋黨之說
을 人主可不察哉
아 傳曰
가 其是之謂歟
인저 可不鑒哉
아 可不戒哉
아
심하다! 백마역白馬驛의 화변禍變이여. 슬프도다! 눈물을 흘릴 만하구나. 그러나 선비가 살고 죽는 것이 어찌 그 한 몸의 일이겠는가.
당초 당唐나라 천우天祐 3년(906)에 양왕梁王이 총애하는 관리 장정범張廷範을 태상경太常卿으로 삼으려 했는데, 당나라 재상 배추裵樞가 “태상경은 당나라에서 늘 청류淸流에게 맡겼거늘 장정범은 양梁나라의 객장客將이니, 맡을 수 없다.”라고 하니,
양왕이 이 때문에 크게 노하여 “내 일찍이 배추는 순후純厚하여 부박浮薄한 데 빠지지 않을 것이라 여겼더니, 지금 또한 이런 짓을 하는가.”라고 하였다.
이해 4월에 혜성이 서북쪽에 출현하여 문창성文昌星과 헌원성軒轅星과 천시성天市星을 스치거늘, 재상 유찬柳璨이 양왕梁王의 뜻에 영합하여 그 허물을 대신大臣들에게 돌렸다.
이에 좌복야左僕射 배추裵樞와 독고손獨孤損, 우복야右僕射 최원崔遠, 수태보守太保로 치사致仕한 조숭趙崇, 병부시랑兵部侍郞 왕찬王贊, 공부상서工部尙書 왕부王溥, 이부상서吏部尙書 육의陸扆가 모두 죄 없이 폄직貶職되었고 같은 날 백마역白馬驛에서 사사賜死되었다.
무릇 진신搢紳 사대부로 당唐나라를 돕고 양왕梁王을 돕지 않은 자들이 모두 붕당朋黨으로 모함을 받아 폄직되거나 죽은 사람이 수백 명이라 조정이 이 때문에 텅 비게 되었다.
이듬해 3월에 당唐 애제哀帝가 양왕梁王에게 양위讓位할 때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 장문울張文蔚을 책례사冊禮使로 삼고 예부상서禮部尙書 소순蘇循을 부사副使로 삼았으며, 중서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 양섭楊涉을 압전국보사押傳國寶使로 삼고 한림학사翰林學士 중서사인中書舍人 장책張策을 부사로 삼았으며, 어사대부御史大夫 설이구薛貽矩를 압금보사押金寶使로 삼고 상서좌승尙書左丞 조광봉趙光逢을 부사로 삼았다.
4월 갑자일에 장문울 등이 상원역上源驛에서부터 책보冊寶를 받들고 노거輅車를 타고서 금오金吾 의장대와 태상시太常寺 의장대의 인도를 받아 금상전金祥殿에서 양왕에게 조회하니,
양왕이 곤룡포와 면류관 차림으로 남면南面하거늘, 신하 장문울과 신하 소순이 책보를 받들고 전상殿上에 올라가 나아가서 읽기를 마치자, 신하 양섭과 신하 장책이 전국새傳國璽를 받들고 신하 설이구와 신하 조광봉이 금보金寶를 받들고 차례로 올라가 나아가 읽기를 마치고서 내려와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북면北面하여 손을 흔들며 발을 구르고 재배再拜하며 하례賀禮하였다.
대저 태상경太常卿 한 자리와 사직社稷 중에서 어느 것이 중요한가. 만일 배추裵樞 등이 죽지 않았다면 오히려 태상경 한 자리도 아까워했을 터인데 나라를 남에게 넘겨주려 했겠는가.
비록 배추 등의 힘이 반드시 당나라를 보존할 수는 없었겠지만, 당나라는 망하게 두고 자신만 홀로 사는 일은 결코 하지 않았을 것이다.
아아! 당나라가 망할 때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은 이미 모두 죽었고, 남은 자들이라고는 모두 용렬하고 나약하고 불초하고 음험하고 교활하여 이익만 추구하고 나라를 팔아먹는 무리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어찌 양나라 조정에서 수치를 무릅쓰고 욕됨을 참는 것이 이와 같았겠는가. 〈당육신전唐六臣傳〉을 짓노라.
장문울張文蔚은
자字는
우화右華이니
하간河間 사람이다. 처음에는 문장과 행실로 이름이 알려졌고 진사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다.
당唐 소종昭宗 때에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後梁 太祖
이때에 천자는 미약하고 제도는 이미 무너졌는데 장문울이 한림에 있으면서 사방에 포고하는 제서制書와 조서詔書를 지을 적에 홀로 대체大體를 지켰다.
소종이 낙양洛陽으로 천도遷都하면서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배수拜授하였다.
유찬柳璨이 배추裴樞 등 일곱 사람을 살해하고 조정朝廷의 사대부들을 줄줄이 끌어들여 번번이 주살誅殺하니 사대부들이 서로 눈짓으로 쳐다보기만 할 뿐 모두 자신의 목숨을 보전하지 못하였는데 장문울이 힘써 구명하니 많은 조정 사대부들이 그 덕분에 목숨을 보전할 수 있었다.
양梁 태조太祖가 막 즉위하여 장문울을 그대로 재상으로 삼으니 양나라 초기의 제도는 모두 장문울이 제정한 것이었다. 장문울은 집안에 있을 때에는 효성스럽고 우애로웠다.
개평開平 2년(908)에 태조가 북쪽으로 순행할 때 장문울을 서도西都 유후留後로 삼았는데 갑작스런 질병으로 죽으니, 우복야右僕射를 증직하였다.
양섭楊涉의 조부祖父 수收는 당唐 의종懿宗 때 재상을 지냈고 아버지인 엄嚴은 관직이 병부시랑兵部侍郞에 이르렀다.
양섭은 진사시에 급제하고 소종昭宗 때에 이부상서吏部尙書가 되었다. 애제哀帝가 즉위하여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배수하였다.
양섭은 당나라의 명가名家로서 대대로 예법禮法을 지켰고 성정性情이 근엄하고 중후하였다. 불행히도 당나라에 변란이 있을 때를 만나 재상에 배수되던 날에 집안사람과 서로 마주하여 눈물을 흘리고 아들인 응식凝式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내가 이 그물을 벗어날 수 없으니, 재앙이 장차 이르면 반드시 너희들까지도 화를 입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나라가 망하자 양梁을 섬겨 문하시랑門下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었다. 자리에 3년 동안 있으면서 머리만 조아리고 아무런 하는 일이 없었다. 파직되어 좌복야左僕射 지공거知貢擧가 되었고 몇 년 뒤에 졸하였다.
아들 응식은 문사文辭에 재능이 있었고 글씨를 잘 썼다. 양梁과 당唐과 진晉과 한漢과 주周를 차례로 섬겼고 심병心病으로 치사致仕하고서 낙양에서 살았다. 관직이 태자태보太子太保에 이르렀다.
장책張策은 자字는 소일少逸이니 하서河西 돈황敦煌 사람이다. 아버지 동同은 당唐나라 용관경략사容管經略使를 지냈다. 장책은 소싯적부터 총명하고 학문을 좋아하여 장구章句에 통달하였다.
아버지 장동이 낙양洛陽의 돈화리敦化里에 살 때 우물을 파다가 고정古鼎을 얻었는데, 그 명문銘文에 “위魏나라 황초黃初 원년(220) 봄 2월 장인匠人 길천吉千”이라고 적혀 있었다.
장동이 기이하게 여겼는데 장책이 당시 열 셋의 나이로 장동의 곁에 있다가 말하기를 “
한漢나라
건안建安 25년에
조공曹公이 죽고
연강延康으로
개원改元하였습니다. 이해 시월에
문제文帝가
선위禪位를 받고 다시
황초黃初로 개원하였으니, 황초 원년에는 2월이 없거늘 명문이 어쩌면 이리도 그릇되단 말입니까.”라고 하니, 장동이 크게 놀라고 기특해하였다.
曹操
장책은 어려서부터 불가佛家의 설을 좋아하더니 마침내 머리를 깎고 승려가 되어 장안長安 자은사慈恩寺에 기거하였다. 황소黃巢가 장안을 침범하자 장책은 속복俗服으로 갈아입고 부모를 모시고 난리를 피하여 전리田里에서 10여 년을 거하였다. 조정에서 그를 불러 광문관廣文館 박사博士를 배수하였다.
빈주邠州의 왕행유王行瑜가 그를 초빙하여 관찰지사觀察支使를 삼았다. 진왕晉王 이극용李克用이 왕행유를 공격하니, 장책이 여종과 함께 견여肩輿에 모친을 태우고 동쪽으로 돌아갈 때 눈으로 뒤덮인 길을 헤치고 갔으므로 행인들이 가엾게 여겼다.
양梁 태조太祖가 사진四鎭을 겸하여 다스리게 되었을 때 초빙하여 정주鄭州와 활주滑州의 지사支使로 삼았는데 모친상을 당해 관직에서 물러났다. 상기喪期가 끝나 당나라 조정에 들어가 선부원외랑膳部員外郞이 되었다.
화주華州의 한건韓建이 초빙하여 판관判官으로 삼고, 한건이 허주許州로 자리를 옮겨서는 장서기掌書記로 삼았다. 한건이 장책을 보내 양 태조에게 빙문聘問하게 하였는데 태조가 보고서 기뻐하며 말하기를 “장부자張夫子가 왔다.”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마침내 머무르게 하여 장서기掌書記로 삼고 당唐나라 조정에 천거하였는데 여러 차례 관직을 배수하여 중서사인中書舍人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여 공부시랑봉지工部侍郞奉旨로 승진하였다. 개평開平 2년(908)에 형부시랑刑部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고 중서시랑中書侍郞으로 승진하였더니 중풍으로 관직을 그만두고 형부상서刑部尙書로 있다가 치사致仕하고서 낙양에서 졸하였다.
조광봉趙光逢은 자字는 연길延吉이니 아버지 조은趙隱은 당唐나라에서 좌복야左僕射를 지냈다.
조광봉이 당나라 때에 문학과 행실로 이름이 알려졌으니 당시 사람들이 그 방정하고 정직하고 온후하고 부드러움을 칭찬하여 옥계척玉界尺이라고 하였다.
당唐 소종昭宗 때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 어사중승御史中丞이 되었는데, 세상이 어지러워 관직을 버리고 낙양에 살면서 두문불출하며 인사人事를 끊은 지가 5, 6년 세월이었다.
유찬柳璨이 재상으로 있을 때에, 조광봉에게 옛날에 은혜를 입은 일이 있어 조광봉을 불러 이부시랑吏部侍郞 태상경太常卿으로 삼았다.
당나라가 망하자 양梁을 섬겨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가 되고 여러 번 승진하여 좌복야左僕射가 되고 태자태보太子太保로 치사致仕하였다.
양梁 말제末帝가 즉위하자 그를 기용하여 사공司空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로 삼았고 다시 사도司徒로 치사하였다.
당唐 천성天成 연간에 중사中使가 조광봉의 집에 직접 가서 태보太保를 배수拜授하고 제국공齊國公에 봉했다. 조광봉이 죽자 태부太傅를 추증하였다.
설이구薛貽矩는 자字는 희용熙用이니 하동河東 문희聞喜 사람이다. 당唐나라에 벼슬하여 병부시랑兵部侍郞 한림학사승지翰林學士承旨가 되었다.
소종昭宗이 기岐에서 장안長安으로 돌아와 환관들을 대거 주륙할 때, 설이구가 중위中尉 한전회韓全誨 등에게 화상찬畵像讚을 지어준 일이 있어 연좌되어 좌천되었다.
설이구가 이에 양梁 태조太祖에게 스스로 결탁하니 태조가 조정에 말하여 이부상서吏部尙書에 배수되고 어사대부御史大夫로 승진하였다.
천우天祐 3년(906)에 태조가 장로長蘆에서 환군還軍할 때 애제哀帝가 설이구를 보내 위로하게 하였는데 설이구가 신하의 예로 태조를 알현하니 태조가 읍하고 대계臺階에 올라오게 하였다.
설이구가 말하기를 “전하의 공덕이 사람들에게 미치니 삼령三靈이 개복改卜하였습니다. 황제가 바야흐로 순舜임금과 우禹임금의 일을 행하려 하니 신이 어찌 감히 어기겠습니까.”라고 하고는 칭신稱臣하며 절하고 춤추니 태조가 몸을 옆으로 비껴 피하였다.
설이구가 돌아와 마침내 애제哀帝를 재촉하여 선위禪位하게 하였다. 태조가 즉위하여 설이구를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하고 여러 차례 배수하여 사공司空이 되었다. 설이구가 양梁의 재상이 된 지 5년 만에 졸하니 시중侍中을 추증하였다.
소순蘇循은 어디 사람인지 알지 못한다. 사람됨이 교활하며 언변이 있고 아첨하면서 염치가 없어 이익만을 좇았다. 당唐나라를 섬겨 예부상서禮部尙書가 되었다.
이때 양梁 태조太祖가 이미 소종昭宗을 시해하고 애제哀帝를 옹립하니 당나라의 구신舊臣이 모두 분개하고 이를 갈면서 어떤 이는 머리를 숙이고 화를 입을까 두려워하였고 어떤 이는 조정을 떠나 벼슬하지 않았는데, 소순만은 양나라에 빌붙으면서 등용되기를 바랐다.
양나라 군대가 양행밀楊行密을 공격하였다가 비하渒河에서 대패하니, 태조가 마음이 조급해지고 분통이 나서 선위禪位를 받는 데 급급하여 당나라에 구석九錫을 요구하려 하였다.
신하들이 그 논의를 감당하지 못하였는데 소순이 홀로 나서서 말하기를 “양왕의 공덕은 천명天命을 받을 정도이니 마땅히 즉시 선위를 받아야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듬해 양 태조가 즉위할 때 소순이 책례부사冊禮副使가 되었다.
소순의 아들 소해蘇楷가 건녕乾寧 연간에 진사시에 응시하여 급제하였는데, 소종昭宗이 학사學士 육의陸扆를 시켜 다시 시험 친 후 낙방시키니 소해가 항상 부끄럽고 한스러워하였다.
소종이 시해를 당하자 당나라의 정사가 양梁나라에서 나왔는지라 소해가 기거랑起居郞이 되어 유찬柳璨, 장정범張廷範 등과 서로 결탁하고는 장연범에게 이르기를 “대저 시호라는 것은 이름을 바꾸어 존귀하고 미덥게 하는 것입니다. 이전 유사有司가 선제先帝의 시호를 ‘소昭’라고 했으니 이는 이름과 실제가 걸맞지 못합니다. 공은 태상경太常卿이고 나는 사관史官이니 말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라고 하고는 이에 상소하여 논박하였다.
장연범은 본래 양나라의 객장客將으로 태상경의 벼슬을 구하다가 얻지 못한 적이 있었으므로 장연범 또한 이 때문에 당나라를 원망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소해의 소장을 장연범에게 내리니, 장연범이 의론하기를 “신이 듣건대 일을 행함이 견고한 것을 ‘공恭’이라 하고, 나라가 혼란한데도 이를 줄이지 못한 것을 ‘영靈’이라 하고, 무력을 사용하고도 성공하지 못한 것을 ‘장莊’이라 하고, 나라에 있으면서 난리를 만난 것을 ‘민閔’이라 하고, 일을 말미암아 공이 있는 것을 ‘양襄’이라 하니, 청컨대 소종황제昭宗皇帝의 시호를 고쳐 ‘공령장민황제恭靈莊閔皇帝’로 하고 묘호廟號는 ‘양종襄宗’으로 하소서.”라고 하였다.
양梁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현덕전玄德殿에 술자리를 차리고 신하들을 돌아보며 스스로 말하기를 “나의 덕이 얕아 천명天命을 감당하기 부족하니 황제의 자리에 오른 것은 모두 공들이 추대한 힘이다.”라고 하니, 당나라의 구신舊臣인 양섭楊涉과 장문울張文蔚은 모두 부끄럽고 두려워서 부복俯伏하여 응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소순만은 장의張禕, 설이구薛貽矩와 함께 크게 칭송하기를 “양왕梁王의 공덕은 천명과 인심人心에 응한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소순 부자父子가 모두 양나라에 빌붙어서 의탁할 곳이 생겼다고 스스로 여겨 조석朝夕으로 고개를 늘이고서 등용되기를 바라니, 경상敬翔이 더욱 미워하여 태조에게 말하기를 “양나라 황실이 처음 들어선 이때에 마땅히 단정한 선비를 얻어 풍속을 두텁게 해야 하거늘, 소순 부자는 모두 훌륭한 품행이 없으니 새 조정에 설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소순 부자를 모두 강제로 전리田里로 돌려보내니, 하중河中에서 주우겸朱友謙에게 의탁하였다.
그 후 주우겸朱友謙이 양梁나라를 배반하고 진晉나라에 항복하였는데, 진왕晉王이 장차 황제에 즉위하려 하면서 살아 있는 당나라의 고신故臣들을 찾아 비어 있는 백관의 자리를 갖추려 하니, 주우겸이 소순을 보내 위주魏州로 가게 했다.
이때 양나라가 아직 멸망되지 않으니, 진나라의 장상將相들 대부분은 진왕이 황제에 즉위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진왕의 뜻은 비록 확고하였으나 장상과 대신 중에 그 논의에 찬성하는 자는 없었다.
그런데 소순이 위주에 처음 도착하여 위주 관아의 청당廳堂을 바라보고는 곧장 절하고서는 ‘배전拜殿’이라 하고, 들어가 알현하게 되어서는 손으로 춤추고 발을 구르며 만세를 부르면서 칭신稱臣하니 진왕이 크게 기뻐하였다.
이튿날 또 획일필畫日筆 삼십 개를 바치니 진왕이 더욱 기뻐하여 소순을 절도부사節度副使로 삼았다.
얼마 뒤 병으로 졸하니 장종莊宗이 즉위하여 좌복야左僕射를 증직하였다.
소해蘇楷는
동광同光 연간에
상서원외랑尙書員外郞이 되었다.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대신이 소해가
당唐 소종昭宗의 시호를 논박한 죄를 다스리고자 하니, 소해가 근심으로 죽었다.
後唐 莊宗
당唐나라가 망할 때에 또 두효杜曉라는 자가 있었으니 자字는 명원明遠이다. 조부 두심권杜審權과 아버지 두양능杜讓能이 모두 당나라의 재상이 되었다. 소종昭宗 때 왕행유王行瑜와 이무정李茂貞의 군대가 경사京師를 침범하니 소종昭宗이 두양능을 임고臨皋에서 죽여 스스로 해명하였다.
두효는 아버지가 죄 없이 죽었다고 여겨 상중에 몸이 상하도록 슬퍼하였고, 상기喪期가 끝나자 포의布衣와 복건幅巾 차림을 하고서 십여 년을 버려진 몸으로 자처하였다.
최윤崔胤이 염철판관鹽鐵判官을 맡았을 때 순관巡官으로 초빙하고 기내畿內 현縣의 현위縣尉와 직소문관直昭文館을 제수하였으나 모두 응하지 않았다.
최원崔遠이 판호부判戶部가 되었을 때 또 순관巡官으로 초빙하니 어떤 사람이 두효에게 말하기를 “혜강嵇康이 죽고 그 아들 혜소嵇紹가 스스로 초야에 묻혀 출사出仕하지 않다가 산도山濤가 사물의 이치를 들어 책망하자 이에 출사하였다. 그대가 차마 두씨杜氏로 하여금 세시歲時에 자리를 펼쳐놓고 선인先人을 제사 지낼 적에 서인庶人과 같은 예로 지내게 하려는가?”라고 하거늘, 두효가 이에 나아가 벼슬하였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선부낭중膳部郞中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양梁 태조太祖가 즉위하자 승진하여 공부시랑봉지工部侍郞奉旨가 되었다.
개평開平 2년(908)에 중서시랑中書侍郞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주우규朱友珪가 즉위하자 승진하여 예부상서禮部尙書 집현전태학사集賢殿太學士가 되었다.
원상선袁象先 등이 적을 토벌할 때 병사들이 크게 노략질을 하였는데, 두효가 난군亂軍에 살해되었다. 우복야右僕射를 증직하였다.
아아! 붕당朋黨의 논의를 처음 주창한 사람이 누구인가? 용俑을 만든 자보다도 심하니, 참으로 불인不仁한 사람이라고 이를 만하다.
내가 일찍이 번성繁城에 이르러 위魏나라의 수선비受禪碑를 읽고서 한漢나라의 신하들이 위나라의 공덕을 칭송하여 큰 글씨로 쓰고 깊이 새겨놓고 스스로 그 성명姓名을 열거하여 세상에 떠벌려 자랑한 것을 보았고,
또 후량後梁의 실록實錄을 읽고서 장문울張文蔚 등이 한 짓이 이와 같음을 보고서 눈물을 흘리지 않은 적이 없었다.
대저 나라를 남에게 넘겨주고서 떠벌려 자랑하고 마침내는 그를 돕기까지 하는 것은, 이는 소인小人이 아니면 누가 할 수 있겠는가. 한漢나라와 당唐나라의 말엽에 온 조정이 모두 소인이었으니 군자君子는 어디에 있었던가.
한나라가 망할 때에는 먼저 붕당朋黨이라는 명목으로 천하의 현인賢人 군자君子들을 금고禁錮하니 그 조정에 있던 자들은 모두 소인들이었다. 그런 뒤에 한나라가 따라서 망하였다.
그리고 당나라가 망할 때에는 또 먼저 붕당이란 명목으로 조정의 선비들을 다 죽여 남아 있는 자들은 모두 용렬하고 나약하며 불초하고 음험한 사람들이었다. 그런 뒤에 당나라가 따라서 망하였다.
대저 남의 나라를 텅 비게 하여 군자君子를 제거하려는 자는 반드시 붕당朋黨이란 주장을 올리고, 임금의 형세를 외롭게 하여 그 이목耳目을 가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붕당이란 주장을 올리고, 나라를 빼앗아 남에게 넘겨주려 하는 자는 반드시 붕당이란 주장을 올린다.
대저 군자인 사람은 본디 허물이 적으니, 소인이 군자에게 죄를 주고자 할 경우에, 군자 가운데 무함誣陷할 수 있는 사람도 있고 무함할 수 없는 사람도 있어 두루 다 무함할 수는 없다. 그래서 소인이 천하의 선한 사람을 다 들어서 그 무리를 찾아 다 제거하고자 할 경우에는, 오직 붕당으로 지목하는 방법이 있을 뿐이다.
그러므로 친척과 친구를 붕당이라 할 수 있으며, 뜻을 같이하여 교유하는 벗을 붕당이라 할 수 있으며, 관직과 학문을 함께하는 사람들을 붕당이라 할 수 있으며, 문생門生과 옛 속리屬吏를 붕당이라 할 수 있으니, 이 몇 가지 경우는 모두 그 비슷한 부류이며 모두 선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남의 나라를 텅 비게 하여 군자를 제거하려는 자는 오직 붕당이란 주장으로 죄를 주면 벗어날 자가 없을 것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대저 선善한 사람과 선한 사람이 서로 즐거워하여 같은 부류끼리 함께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이치이다. 그러므로 선한 사람에 대해 들은 이는 반드시 그를 칭찬하니 칭찬하면 이들을 붕당朋黨이라 하고, 선한 사람을 얻은 이는 반드시 그를 천거하니 천거薦擧하면 이들을 붕당이라 한다.
그리하여 선한 사람에 대해 들어도 감히 칭찬하지 못하게 하니 임금의 귀는 아래에 선한 사람이 있음을 듣지 못하고, 선한 사람을 보아도 감히 천거하지 못하게 하니 임금의 눈은 선한 사람을 보지 못하게 된다.
그래서 선한 사람은 날로 멀어지고 소인은 날로 가까워지면, 임금 된 자가 갈팡질팡하면서 누구와 더불어 세상을 다스려 편안하게 할 계책을 도모할 수 있겠는가.
그러므로 “임금의 형세를 외롭게 하여 그 이목耳目을 가리고자 하는 자는 반드시 붕당이라는 주장을 한다.”라고 하는 것이다.
한 사람의 군자君子라도 남아 있으면 뭇 소인小人들이 아무리 많아도 반드시 꺼리는 바가 있어 감히 하지 못하는 바가 있다. 그래서 오직 나라를 텅 비워 군자가 없어진 뒤에야 소인들이 못하는 바가 없이 자기 뜻대로 할 수 있으니, 한漢나라와 위魏나라, 당唐나라와 후량後梁이 교체되던 때가 이런 경우이다.
그러므로 “나라를 빼앗아 남에게 줄 수 있는 것은 그 나라에 군자가 없기 때문이고, 나라를 비워서 군자가 없게 되는 것은 붕당朋黨이란 명목으로 제거하기 때문이다.”라고 하는 것이다.
아아! 붕당이라는 주장을 임금이 살피지 않아서야 되겠는가. 옛말에 “한마디 말로 나라를 잃는다.”라고 한 것이 이를 두고 한 말일 것이다. 살피지 않을 수 없고, 경계하지 않을 수 없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