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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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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高行周起亡囚中하니 前後本末 事情點綴 多玲瓏이라
高行周 字尙質이요 嬀州人也 世爲懷戎戍將이라 父思繼 思繼兄弟皆以武勇雄於北邊하야 爲幽州節度使李匡威戍將하다
匡威爲其弟匡儔所簒 晉王將討其亂하야 謀曰 高思繼兄弟在孔嶺關하니 有兵三千이라 此後患也 不如遣人招之 思繼爲吾用이면 則事無不成이라하고 克用遣人하야 招思繼兄弟하다
燕俗重氣義 思繼等聞晉兵爲匡威報仇하고 乃欣然從之하야 爲晉兵前鋒하니 匡儔聞思繼兄弟皆叛하고 乃棄城走하다
克用以劉仁恭守幽州하되 以其兄某爲先鋒都指揮使하고 思繼爲中軍都指揮使하고 弟某爲後軍都指揮使하야 高氏兄弟分掌燕兵하다
克用臨訣 謂仁恭曰 思繼兄弟勢傾一方하니 爲燕患者 必高氏也 宜善爲防하라하다
克用留晉兵千人하야 爲仁恭衛이어늘 而晉兵多犯法하니 思繼等數誅殺之하다
克用以責仁恭이어늘 仁恭以高氏爲訴하니 由是 晉盡誅思繼兄弟하다
仁恭以其兄某之子行珪爲牙將하고 而思繼子行周年十餘歲亦收之帳下라가 稍長 補以軍職하다
仁恭被囚하고 守光立 以行珪爲武州刺史러니 其後守光背晉하니 晉兵攻之
守光將元行欽牧馬山後라가 聞守光且見圍하고 卽率所牧馬赴援이어늘 而麾下兵叛于道하야 推行欽爲幽州留後하다
行欽曰 吾所憚者 行珪也라하고 乃遣人之懷戎하야 得行珪子縶之하고 兵過武州 招行珪曰 守光可取而代也 當從我行이라 不然이면 且殺公子라하니
行珪謝曰 與君俱劉公將而忍叛之리오 吾當爲劉氏也 尙何顧吾子耶아하다
行欽卽以兵圍行珪러니 月餘 行珪城中食盡하니 召其州人告曰 吾非不爲父老守也 今劉公救兵不至하니 奈何 可殺吾以降晉이라하니 父老皆泣하야 願以死守
是時 行周適從行珪在武州러니 卽夜縋行周하야 馳入晉見莊宗하니 莊宗因遣明宗하야 救武州러니 比至 行欽已解去
行珪 乃降晉하야 莊宗時 歷朔忻嵐三州刺史 大同軍節度使하고 明宗入立 徙鎭威勝安遠하다
行珪性貪鄙하야 所爲多不法이어늘 副使范延策爲人剛直하야 數規諫之하니 行珪不聽啣之하다
已而 戍兵有謀叛者어늘 行珪先覺之하야 因潛徙庫兵于他所
戍兵叛하야 趨庫劫兵이라가 無所得일새 乃潰去어늘 行珪追而殺之하고 因誣奏延策同反하야 幷其子皆見殺하니 天下寃之하다
行珪卒于鎭하니 贈太尉하다
當行珪之降晉也하야 行周隷明宗帳下하야 初爲裨將이라
趙德鈞識之하고 謂明宗曰 此子貌厚而小心이라 他日必大貴하리니 宜善待之하소서하다
梁晉軍河上 莊宗遣明宗하야 東襲鄆州할새 行周將前軍하야 夜遇雨하니 軍中皆欲止不進이어늘
行周曰 此天贊我也 鄆人恃雨不備리니 吾來 宜出其不意라하고 卽夜馳涉濟하야 入其城하니 鄆人方覺이어늘 遂取之하다
莊宗滅梁 以功領端州刺史하고 遷絳州하다
明宗時 從平朱守殷하고 克王都하야 遷潁州團練使振武軍節度使하고 歷鎭彰武昭義하다
晉高祖時 爲西京留守하고 徙鎭天雄하다 安從進叛 以行周爲襄州行營都部署하야 討平之하고 徙鎭歸德이러니 出帝時 代景延廣爲侍衛親軍都指揮使
是時 李彦韜馮玉等用事어늘 乃求歸鎭하다
契丹滅晉하고 留蕭翰守이어늘 又棄去하니 召唐故入汴이러니
起太原하니 從益遣人召行周하야 將以拒漢이어늘 行周嘆曰 衰世難輔어든 況兒戲乎아하고 乃不從하다
漢高祖入京師하야 加行周守中書令하고 徙鎭天平하고 封臨淸王이러니 入立 封齊王하다
卒贈尙書令하고 追封秦王하다 有子懷德이라


07. 고행주高行周전기傳記
고행주高行周는 망국의 포로 중에서 몸을 일으켰는데 전후본말에 대한 사정을 서술한 것이 매우 분명하다.
고행주高行周는 자는 상질尙質이고 규주嬀州 사람이다. 대대로 회융懷戎수장戍將이 되었다. 아버지는 고사계高思繼이다. 고사계의 형제는 모두 무용武勇이 북쪽 변방에서 뛰어났기에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이광위李匡威수장戍將이 되었다.
이광위가 그 아우 이광주李匡儔에게 지위를 찬탈당하자 진왕晉王이 장차 그 난을 토벌하려 하면서 모의하기를 “고사계高思繼 형제兄弟공령관孔嶺關에 있는데 병사 3천 명을 가지고 있다. 이는 후환後患이 될 것이니 사람을 보내 부르는 것만 못하다. 고사계가 나의 수하가 되면 이루어지지 않는 일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고 이극용李克用이 사람을 보내 고사계 형제를 불렀다.
연주燕州의 풍속은 의기義氣를 중하게 여기는지라 고사계 등이 진나라 병사가 이광위를 위해 복수하려 한다는 말을 듣고 이에 기꺼이 따라 나라 병사의 선봉이 되니, 이광주가 고사계 형제가 모두 반란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이에 성을 버리고 달아났다.
이극용李克用유인공劉仁恭에게 유주幽州를 지키게 하되 고사계高思繼의 형 선봉도지휘사先鋒都指揮使로 삼고 고사계를 중군도지휘사中軍都指揮使로 삼고 아우 후군도지휘사後軍都指揮使로 삼아 고씨高氏 형제兄弟연주燕州의 군사를 나누어 맡게 하였다.
이극용이 떠날 때에 유인공에게 말하기를 “고사계 형제는 세력이 한 지방을 압도하니, 연주의 후환後患이 되는 자는 반드시 고씨高氏일 것이다. 마땅히 잘 방비해야 한다.”라고 하였다.
이극용이 나라 병사 1천 명을 남겨두어 유인공을 호위하게 하였는데 나라 병사가 범법犯法을 많이 저지르자 고사계 등이 자주 그들을 주살하였다.
이극용이 이 일로 유인공을 꾸짖자 유인공이 고씨高氏의 짓이라고 호소하니, 이로 말미암아 진나라가 고사계 형제를 모두 주살하였다.
유인공劉仁恭고사계高思繼의 형 의 아들 고행규高行珪아장牙將으로 삼고 10여 세가 된 고사계의 아들 고행주高行周를 또한 막하에 거두었다가 조금 장성하자 군직軍職에 보임하였다.
유인공이 감금당하고 유수광劉守光이 그 자리를 잇자 고행규를 무주자사武州刺史로 삼았는데 그 후에 유수광劉守光나라를 배반하니 진나라 병사가 그를 공격하였다.
유수광의 장수 원행흠元行欽산후山後에서 말을 기르고 있다가 유수광이 장차 포위당할 지경에 빠졌다는 소식을 듣고 즉시 기르던 말을 거느리고 달려가 구원하려 하였는데, 휘하麾下의 병사들이 길에서 반란을 일으켜 원행흠元行欽을 추대하여 유주유후幽州留後로 삼았다.
원행흠이 말하기를 “내가 두려워하는 바는 고행규이다.”라고 하고 이에 사람을 회융懷戎으로 보내 고행규의 아들을 잡아 구금하고 병사가 무주武州를 지날 때에 고행규를 불러 말하기를 “유수광劉守光을 잡아 처단하고 그의 자리를 대신할 것이니, 응당 나를 따라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장차 공의 아들을 죽일 것이다.”라고 하였다.
고행규가 사양하며 말하기를 “그대와 함께 모두 유공劉公의 장수였는데 차마 배반할 수 있겠는가. 나는 응당 유씨劉氏를 위할 것이니 어찌 나의 아들을 돌아보겠는가.”라고 하였다.
원행흠이 즉시 병사로 고행규를 포위하였는데, 한 달 남짓 만에 고행규의 성 안에 식량이 다하니 의 사람들을 불러 말하기를 “내가 부로父老를 위해 성을 지키지 않으려는 것은 아니지만 지금 유공의 구원병이 이르지 않으니 어찌하겠는가. 나를 죽여 나라에 항복하도록 하라.”라고 하니 부로들이 모두 눈물을 흘리며 죽음으로 지키기를 원하였다.
이때에 고행주高行周가 마침 고행규高行珪를 따라 무주武州에 있었는데, 그날 밤에 고행주를 밧줄에 묶어 성에서 내려 보내 나라로 급히 달려 들어가 장종莊宗을 만나보게 하였다. 장종이 인하여 명종明宗을 보내 무주武州를 구원하였는데, 명종이 무주에 이르렀을 때에 원행흠元行欽은 이미 포위를 풀고 떠났다.
고행규가 이에 진나라에 항복하여 장종 때에 삭주朔州, 흔주忻州, 남주嵐州자사刺史대동군절도사大同軍節度使를 역임하였고, 명종이 들어와 즉위하자 위승威勝, 안원安遠으로 옮겨 진수鎭守하였다.
고행규高行珪는 본성이 탐욕스럽고 속되어 하는 일마다 불법不法이 많았는데 부사副使 범연책范延策은 사람됨이 강직剛直하여 수차례 간언하니, 고행규는 듣지 않고 원한을 품었다.
이윽고 수병戍兵 중에 반란을 도모하는 자가 있었는데, 고행규高行珪가 미리 눈치 채고 인하여 몰래 무기고의 무기를 다른 곳으로 옮겨 놓았다.
수병戍兵이 반란을 일으켜 무기고로 달려가 무기를 탈취하려다 무기를 얻지 못하자 이에 흩어져 달아나니 고행규가 추격하여 살해하고, 인하여 범연책范延策이 반란에 동참하였다고 거짓으로 아뢰어 그 아들과 함께 모두 죽이니 천하 사람들이 고행규를 원망하였다.
고행규가 에서 하니 태위太尉증직贈職되었다.
고행규高行珪나라에 항복할 때에 고행주高行周명종明宗휘하麾下에 소속되어 처음에는 비장裨將이 되었다.
조덕균趙德鈞이 그의 재능을 알아보고는 명종에게 말하기를 “저 사람은 모습이 중후하고 신중합니다. 후일에 반드시 크게 귀하게 될 것이니 잘 대우해주십시오.”라고 하였다.
나라와 진나라가 황하黃河 가에 대치하고 있을 때에 장종莊宗이 명종을 보내 동쪽으로 가 운주鄆州를 습격하게 하였다. 이때에 고행주가 전군前軍을 거느리고 가다 밤에 비를 만나니 군중軍中이 모두 진군進軍을 멈추고 나아가려고 하지 않았다.
고행주가 말하기를 “이는 하늘이 우리를 돕는 것이다. 운주의 사람들은 비를 믿고 방비하지 않을 것이니, 우리가 오는 것은 의당 생각하지도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날 밤에 급히 말을 달려 제수濟水를 건너 성에 들어가자 운주의 사람들이 그제야 알아차리니, 마침내 운주鄆州를 취하였다.
장종이 양나라를 멸망시키자 그 전공으로 고행주는 단주자사端州刺史에 임명되었고 강주자사絳州刺史로 승진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종군從軍하여 주수은朱守殷을 평정하고 왕도王都에게 승리하여 영주단련사潁州團練使 진무군절도사振武軍節度使로 승진하였고 창무절도사彰武節度使, 소의절도사昭義節度使를 역임하였다.
고조高祖 때에 서경유수西京留守가 되었고 옮겨 천웅天雄진수鎭守하였다. 안종진安從進이 반란을 일으키자 고행주高行周양주행영독부서襄州行營都部署로 삼아 토벌하여 평정하고 옮겨 귀덕歸德진수鎭守하게 하였는데 출제出帝 때에 경연광景延廣을 대신하여 시위친군도지휘사侍衛親軍都指揮使로 삼았다.
이때에 이언도李彦韜풍옥馮玉 등이 권력을 전횡하기에 진수鎭守하던 으로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거란契丹나라를 멸망시키고 소한蕭翰을 남겨두어 변주汴州를 지키게 하였는데 소한蕭翰이 또 버리고 떠나자 나라 옛 허왕許王 이종익李從益을 불러 변주汴州로 들어오게 하였다.
고조高祖태원太原에서 병사를 일으키자 이종익이 사람을 보내 고행주高行周를 불러 장차 나라를 막으려 하였는데, 고행주가 탄식하며 말하기를 “쇠미한 세상에서는 군주를 보좌輔佐하기 어려운 법인데 더구나 저 철없는 아이의 장난이야 더 말할 것 있겠는가.”라고 하고 이에 따르지 않았다.
고조高祖경사京師에 들어와서 고행주高行周에게 수중서령守中書令을 더하여 제수하고 옮겨 천평天平진수鎭守하게 하고 임청왕臨淸王에 봉해주었는데, 태조太祖가 들어와 즉위하여 제왕齊王에 봉해주었다.
한 뒤에 상서령尙書令에 증직되었고 진왕秦王추봉追封되었다. 아들은 고회덕高懷德이다.
後漢 高祖後漢 高祖


역주
역주1 高行周傳 : 高行周(885~952)는 자는 尙質이고 嬀州 사람이다. 列傳은 ≪舊五代史≫ 卷95 〈晉書 第21 列傳 第10〉, ≪新五代史≫ 卷47 〈雜傳 第35〉에 각각 실려 있다.
고행주의 아버지는 高思繼인데 북쪽 변방에서 武勇이 뛰어나 李匡威의 戍將이 되었다가 이광위가 그 아우 李匡儔에게 지위를 찬탈당하자 李克用을 섬겼다. 그러나 劉仁恭의 참소로 주살당하였는데, 유인공이 고사계 형의 아들 高行珪 및 고행주 등을 막하에 거두었다. 후에 유인공이 감금당하고 劉守光이 그 자리를 잇고서 晉나라를 배반하였는데, 고행규는 처음에는 유수광을 따르다 성이 포위당하자 晉 莊宗에게 고행주를 보내 투항하였다. 고행규가 진나라에 항복할 때에 고행주는 明宗의 麾下에 裨將으로 소속되어 크고 작은 전투에서 큰 전공을 세워 刺史로 승진하였고, 명종이 즉위하자 朱守殷, 王都, 安從進 등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큰 공을 세웠다. 契丹이 진나라를 멸망시키자 漢 高祖가 太原에서 일어난 것을 보고는 漢나라에 귀부하여 臨淸王에 봉해졌고 周 太祖가 즉위하여 齊王에 봉해주었다.
이 열전은 고행주에 관한 열전이지만 그의 아버지 고사계와 고사계의 형의 아들 고행규에 대한 사적을 상세하게 서술하여 성장배경을 밝힌 반면, 고행주에 관한 사적은 큰 전공을 세운 것을 나열식으로 짧게 서술하고 진나라 멸망 뒤 행보에 관해 간략하게 서술하였을 뿐 史評도 두지 않았다. 이에 반해 ≪舊五代史≫에서는 고사계와 고행규의 사적은 간략하게 서술하고 고행주의 사적과 행적에 초점을 맞춰 상세하게 서술하여 고행주가 혼란했던 五代시대에 지조를 지키며 유연하게 대처한 모습을 부각시켰다. 또한 史評에서도 “근대에 戎藩을 통솔하고 왕의 작위에 있으면서 봉록은 후하지만 군자들이 비난하지 않고, 명망은 중하지만 人主가 의심하지 않았으며, 飲酌의 사이에 스스로 감추고 처음부터 끝까지 功名을 보전한 사람 중에 고행주와 비교할 만한 사람은 그 누구인가.”라고 하여 고행주의 행적을 높게 평가하였다.
역주2 : 五代 때에 梁나라, 漢나라, 周나라 및 北宋의 都城으로 현재 河南省 開封市이다.
역주3 許王從益 : 後唐 明宗 李嗣源의 다섯 번째 아들이다.
역주4 漢高祖 : 後漢을 개국한 劉知遠(895~948)을 가리킨다. 재위기간은 947∼948이다. 沙陀族 출신으로 後晉 石敬瑭의 부하가 되어 공을 세우고, 실권을 장악하였으며 河東節度使를 겸하였다. 契丹이 後晉을 침공하자 출병을 거부하였고, 少帝가 거란에게 연행되자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나라 이름을 漢이라 하고 汴州로 도읍을 옮겼으나, 1년 만에 병사하였다.
역주5 周太祖 : 後周를 개국한 郭威(904~954)를 가리킨다. 곽위는 邢州 堯山 사람으로 자는 文仲이다. 後唐, 後晉, 後漢에서 벼슬했으며, 후한 隱帝 乾祐 3년(950) 은제가 사람을 보내 자기를 해치려는 것을 알고 병사를 일으켜 汴州로 들어갔다. 은제가 살해된 뒤 劉贇을 황제로 옹립했다가 얼마 뒤 군대를 이끌고 契丹을 막던 중 兵變을 일으키고 돌아와 後漢을 대신해 後周를 세웠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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