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5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01.
皇甫暉本驍悍反覆이어늘 而歐公點次에 殊覺風神獨鬯하니 令人覽其傳이면 則怒目裂眦起矣리라
皇甫暉
는 魏州人也
라 爲魏軍卒
하야 戍
한대 歲滿當代歸
로대 而留屯
라
暉爲人驍勇無賴하야 夜博軍中이라가 不勝이어늘 乃與其徒謀爲亂하야 劫其都將楊仁晟曰 唐能破梁而得天下者는 以先得魏而盡有河北兵也일새라 魏軍甲不去體하고 馬不解鞍者가 十餘年이어늘 今天下已定에 而天子不念魏軍久戍之勞하니 去家咫尺에 不得相見이라 今將士思歸를 不可遏이니 公當與我俱行이어다 不幸天子怒吾軍이어든 則坐據一州면 足以起事리라하야늘
仁晟曰 公等何計之過也오 今英主在上하야 天下一家하고 精甲銳兵이 不下數十萬이라 公等各有家屬이어늘 何故出此不祥之言고하다
軍士知不可強하야 遂斬之하고 推一小校爲主어늘 不從하니 又斬之하고 乃携二首하야 以詣裨將趙在禮라
在禮從之어늘 乃夜焚貝州하야 以入于魏하니 在禮以暉爲馬步軍都指揮使하다
暉擁甲士數百騎하야 大掠城中이라가 至一民家하야 問其姓하니 曰 姓國이라하야늘 暉曰 吾當破國이라하고 遂盡殺之라
又至一家하야 問其姓하니 曰 姓萬이라하야늘 暉曰 吾殺萬家면 足矣라하고 又盡殺之라
及明宗入魏하야 遂與在禮合謀하니 莊宗之禍는 自暉始라
明宗卽位에 暉自軍卒로 擢拜陳州刺史하니 終唐世히 常爲刺史하다
晉天福中
에 以衛將軍
으로 居京師
한대 在禮已秉
이라가 罷鎭來朝
라
暉往候之曰 與公俱起
하야 卒成大事
나 然由我發也
라 公今富貴
어니 能卹我乎
아 不然
이면 禍起坐中
이라하야늘
在禮懼하야 遽出器幣數千與之하고 而飮以酒하니 暉飮自若하고 不謝而去라 久之에 爲密州刺史하다
契丹犯闕
에 暉率其州人
하야 奔於江南
하니 以爲歙州刺史 奉化軍節度使
하야 鎭
라
周師征淮
하니 景以暉爲北面行營應援使
하야 屯
한대 爲周師所敗
하야 幷其都監姚鳳
으로 皆被擒
이라
召見
에 暉金瘡被體
어늘 哀之
하야 賜以金帶鞍馬
라 後數日卒
하니 拜鳳左屯衛將軍
하다
황보휘皇甫暉는 본디 용맹하고 사나우며 반복무상反覆無常한데, 구양공歐陽公의 서술이 특히 생생하게 그 풍모를 묘사하였으니, 사람들에게 그 전傳을 보게 하면 성난 눈을 부릅뜨고 흘기면서 일어설 것이다.
황보휘皇甫暉는 위주魏州 사람이다. 위주의 군졸軍卒이 되어 와교관瓦橋關에서 수자리를 살았는데 임무 기한이 차서 교대하고 돌아가야 함에도 패주貝州에 주둔하게 되었다.
이때 당唐 장종莊宗이 이미 실정失政하여 천하의 인심이 떠났다.
황보휘는 사람됨이 용맹하고 사나우며 무뢰無賴하여 밤에 군중軍中에서 저포놀이를 하다가 이기지 못하자 그 무리와 함께 난을 일으킬 것을 모의하여 도장都將 양인성楊仁晟을 겁박하여 말하기를 “당唐나라가 양梁나라를 격파하고 천하를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먼저 위주를 얻어 하북河北의 병사를 다 소유하였기 때문입니다. 위주 군사가 갑옷을 몸에서 벗지 못하고 말들이 안장을 벗지 못한 지 십여 년인데, 이제 천하가 이미 안정된 때에 천자가 위주 군사들이 오랫동안 수자리 선 노고를 생각하지 않으니, 집이 지척에 있음에도 가족을 만나볼 수 없습니다. 지금 장사將士들이 고향에 돌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막을 수 없으니, 공은 우리와 함께 해야 합니다. 불행히 천자가 우리 군사들의 행동을 노여워하거든 그 즉시 주州 하나를 점거하면 큰일을 도모하기 충분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유인성이 말하기를 “공들의 계획이 어쩌면 이리 지나치오. 지금 영명하신 군주가 위에 있어 천하가 한 집안이 되었고 정예로운 군대가 수십 만을 밑돌지 않소. 공들은 각자 가속家屬이 있거늘 어쩌자고 이렇게 불길한 말을 꺼내오.”라고 하였다.
군사들이 억지로 따르게 할 수 없음을 알고 마침내 유인성을 참斬하고서, 소교小校 한 사람을 주장主將으로 추대하였는데 그 역시 따르지 않으니 또 참하였다. 그리고서 두 사람의 머리를 가지고서 비장裨將인 조재례趙在禮에게 갔다.
조재례가 군사들의 뜻을 따르자 밤에 패주貝州를 불사르고 위주로 들어가니, 조재례가 황보휘를 마보군도지휘사馬步軍都指揮使로 삼았다.
황보휘皇甫暉가 갑사甲士 수백 기騎를 거느리고 성 안을 크게 노략질하다가 한 민가民家에 이르러 그 집에 사는 사람의 성姓을 물으니 성姓이 국國이라 하였다. 황보휘가 말하기를 “내가 나라를 깨부술 것이다.”라고 하고서 마침내 일가족을 모두 살해하였다.
또 한 집에 이르러 그 성을 물으니 성이 만萬이라 하였다. 황보휘가 말하기를 “내가 일만 집의 사람을 죽이면 만족하겠다.”라고 하고는 또 모두 살해하였다.
명종明宗이 위주魏州에 들어와 마침내 조재례趙在禮와 함께 일을 도모하였으니 장종莊宗의 재앙은 황보휘에게서 시작된 것이었다.
명종이 즉위하자 황보휘를 군졸軍卒에서 발탁하여 진주자사陳州刺史에 배수拜受하니 당나라(후당後唐)가 망할 때까지 항상 자사刺史의 지위에 있었다.
진晉나라 천복天福 연간(936~944)에 황보휘皇甫暉가 위장군衛將軍의 신분으로 경사京師에 머무르고 있었는데, 조재례趙在禮가 이미 절도사가 되었다가 절도사의 직무를 끝내고 조정으로 왔다.
황보휘가 가서 문후하며 말하기를 “공과 함께 감릉甘陵에서 일어나 마침내 대사大事를 이루었습니다만 이는 나를 통해 일어난 것입니다. 공이 지금 부귀富貴해지셨으니 나를 잘 돌봐주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지 못한다면 재앙이 앉은 자리에서 일어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조재례가 두려워서 황급히 기물과 폐백 수천 개를 꺼내어 주고 술을 먹이니, 황보휘는 태연자약하게 술을 마시고서 사례도 하지 않고 떠났고, 오랜 뒤에 밀주자사密州刺史가 되었다.
거란契丹이 경사京師를 침범하자 황보휘皇甫暉가 자기 주州의 사람들을 이끌고 강남江南으로 달아나니, 이경李景이 그를 섭주자사歙州刺史 봉화군절도사奉化軍節度使로 삼아 강주江州를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주周나라 군대가 회淮를 정벌하자 이경이 황보휘를 북면행영응원사北面行營應援使로 삼아 청류관淸流關에 주둔하였는데 주나라 군대에게 패배하여 도감都監 요봉姚鳳과 함께 모두 사로잡혔다.
세종世宗이 소견召見할 때 황보휘가 몸에 창상創傷을 입고 있으니 세종이 가엾게 여기고 금대金帶와 안장을 얹은 말을 하사하였다. 며칠 뒤에 졸卒하니 봉좌둔위장군鳳左屯衛將軍에 배수拜受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