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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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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王進 幽州良鄉人也 爲人勇悍하야 走及奔馬 少聚徒爲盜하니 鄉里患之어늘 遣人하야 以賂招置麾下
彥超鎭安遠軍할새 軍中有變이어늘 遣進馳奏京師 明宗怪其來速하고 嘉其足力하야 以隷寧衛指揮하다
後周 太祖後周 太祖
爲侍衛親軍指揮使하야 以進爲軍校
高祖鎭河東할새 因以之從하야 每有急 遣進馳至京師한대 往返不過五六日이라 由是 愈親愛之하다
累遷奉國軍都指揮使하고起魏하야 遷虎捷右廂都指揮使하고 歷汝鄭二州防御使 彰德軍節度使하다 以疾卒하니 贈太師하다
嗚呼 予述舊史라가 至於王進之事하야 未嘗不廢書而嘆曰
甚哉 五代之君 皆武人崛起 其所與 皆勇夫悍卒이어늘 各裂土地封侯王하니 何異豺狼之牧斯人也 雖其附託遭遇 出於一時之幸이나 然猶必皆橫身陣敵이니 非有百夫之勇이면 則必一日之勞어니와
至如進者하얀 徒以疾足善走 而秉旄節하니 何其甚歟 豈非之用 隨世而輕重者歟
世治則君子居之而重하고 世亂則小人易得而輕歟 抑因緣僥倖 未始不有로되 而尤多於亂世하야 旣其極也 遂至於是歟 豈其又有甚於是者歟
當此之時하야 爲國 長者 不過十餘年이요 短者 三四年至一二年이라 天下之人 視其上易君代國 如更戍長無異하니 蓋其輕如此어든 況其下者乎
如進等者 豈足道哉 하고 君子小人 常相上下하니 視在上者如進等이면 則其在下者 可知矣
予書進事 所以哀斯人之亂而見當時賢人君子之在下者 可勝道哉 可勝道哉


02. 왕진王進전기傳記
왕진王進유주幽州 야향良鄉 사람이다. 사람됨이 용맹하고 날쌔서 내달리는 말을 따라잡을 수 있었다. 젊었을 때 무리를 모아 도적질을 하니 향리鄕里에서 우환거리로 여겼는데 부언초符彥超가 사람을 보내 뇌물로 휘하에 불러 들였다.
부언초가 안원군安遠軍진수鎭守할 때 군중에서 변란이 일어났는데 왕진을 보내 경사京師에 급히 아뢰게 하였다. 명종明宗이 신속하게 온 것을 기이하게 여기고 그 다리 힘이 좋은 것을 가상히 여겨 영위지휘寧衛指揮에 예속시켰다.
고조高祖시휘친군지휘사侍衛親軍指揮使로 있으면서 왕진을 군교軍校로 삼았다.
고조가 하동河東진수鎭守할 때 계속 수행하게 하여 급한 일이 생길 때마다 왕진을 경사에 급히 가게 하였는데, 왕래하는 데 걸린 시간이 불과 5, 6일이었다. 이 때문에 더욱 왕진을 친밀히 대하고 아꼈다.
여러 차례 승진하여 봉국군도지휘사奉國軍都指揮使가 되고 태조太祖를 따라 위주魏州에서 기병起兵하여 호첩우상도지휘사虎捷右廂都指揮使로 승진하고 여정이주방어사汝鄭二州防御使창덕군절도사彰德軍節度使를 역임하였다. 현덕顯德 에 병으로 하니 태사太師를 증직하였다.
오호라! 내가 옛 오대五代의 역사를 찬술하다가 왕진의 일에 이르러 책을 덮고 탄식하며 다음과 같이 말하지 않은 적이 없다.
심하다! 오대의 군주들은 모두 무인武人굴기崛起하였으므로 그들과 함께 한 이들은 모두 용맹한 무부武夫와 날쌘 군졸들인데 이들에게 각기 영토를 찢어주어 후왕侯王에 봉했으니, 승냥이와 이리가 백성을 다스린 것과 무엇이 다른가. 비록 그들이 오대의 군주에게 의탁하고 지우知遇를 입은 것은 한때의 요행에서 나온 것이지만 그래도 반드시 적진 속에 들어가 적들과 싸웠으니 백 명의 군사를 당해낼 용맹이 있지 않으면 반드시 하루 동안의 수고라도 하였다.
그러나 왕진과 같은 경우는 한갓 발이 빠르고 달리기를 잘한다는 이유로 절도사의 지위에 올랐으니, 어쩌면 그리도 심한가! 어찌 명기名器의 사용이 시대에 따라 가벼워지고 무거워진 것이 아니겠는가.
세상이 다스려지면 군자君子가 명기를 차지하여 무거워지고, 세상이 혼란하면 소인小人이 명기를 쉽사리 얻어 가벼워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권세 있는 이에게 빌붙어 요행을 차지하는 일이 애당초 없던 적이 없지만 난세에는 그러한 일이 더욱 많아져 극도에 이르면 마침내 이런 지경에까지 이르는 것인가? 어쩌면 이보다 더욱 심한 경우도 있는 것인가?
이때를 당하여 나라를 다스린 세월이 긴 경우는 십여 년에 불과했고 짧은 경우는 3,4년 내지 1,2년이었다. 그리하여 천하 사람들이 위에서 임금이 바뀌고 나라가 새로 들어서는 것을 마치 수장戍長이 갈리는 것과 다름없이 보았다. 그 윗자리의 가볍기가 이와 같았는데 하물며 그보다 아랫자리이겠는가.
왕진과 같은 자의 경우 어찌 말할 가치나 있겠는가. ≪주역周易≫에 가 번갈아 소장消長하고 군자와 소인이 항상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니, 왕진 등과 같은 자가 윗자리에 있는 것을 보면 그 아래에 있는 사람을 알 만하다.
내가 왕진의 일을 기록한 것은 백성들이 난세를 당한 것을 슬퍼하고 당시 현인군자賢人君子가 아랫자리에 있었음을 드러내려 함이니,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이루 다 말할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王進傳 : 王進(?~954)은 본래는 도적 출신이었다가 後唐의 신하인 符彥超 밑에서 군인 생활을 시작하여 발이 빠른 재주 덕분에 節度使의 지위에까지 올랐다. 왕진의 列傳은 ≪舊五代史≫ 권124 〈周書 第15 列傳4〉와 ≪新五代史≫ 권49 〈雜傳37〉에 모두 짧게 실려 있는데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다만 구양수의 ≪신오대사≫에서는 왕진이 契丹과의 전투에서 67인을 포획한 전공은 생략하였다. 특이한 것은 왕진의 열전은 왕진에 관한 사실보다 구양수의 史論이 훨씬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는 구양수의 편찬목적인 褒貶에 충실한 것으로, 사론에서 기술한 것처럼 보잘것없는 재주를 지닌 小人이 윗자리를 차지하고 賢人君子는 아랫자리에 처하는 당시의 세태를 비판하기 위한 것이다.
역주2 符彥超 : ?~934. 後唐의 장수로 晉王 李克用의 幕下에서 牙將으로 시작해 莊宗 李存勖이 등극하자 節度使가 되었다.
역주3 漢 高祖 : 五代 後漢의 건국자인 劉知遠(895~948)이다. 後晉을 섬기다가 契丹이 침공하여 少帝가 거란으로 끌려가자 스스로 제위에 올랐다.
역주4 周 太祖 : 五代 後周의 건국자인 郭威(904~954)이다. 後漢을 섬기다가 政變을 일으켜 開封에서 즉위하여 후주를 건국하였다.
역주5 顯德 : 五代 後周 世宗의 연호이다. 954년부터 960년까지 사용하였다.
역주6 名器 : 봉건 사회에서 尊卑貴賤을 구분하는 名號와 수레와 의복 등의 제도로, 여기서는 官爵을 가리킨다.
역주7 易否泰消長 : ‘否’와 ‘泰’는 모두 ≪周易≫의 卦名이다. 기운이 유행하여 만물이 형통하는 것이 ‘태’이고 기운이 막혀 만물이 閉塞하는 것이 ‘부’로, 세운의 성쇠를 뜻한다. 또한 이에 따라 군자의 도가 자라고 소인의 도가 소멸되기도 하고, 반대로 소인의 도가 자라나고 군자의 도가 소멸되기도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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