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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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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范延光爲人多方略하고 所歷生平 亦多反覆이어늘 歐陽公點次如畫하야 而二千餘言 如一句
范延光 字子瓌 相州臨漳人也 唐明宗爲節度使하야 置延光麾下而未之奇也
明宗破鄆州 梁兵方扼어늘 其先鋒將康延孝陰送款於明宗이라 明宗求可以通延孝款於莊宗者하니 延光輒自請行이라
乃懷延孝하야 西見莊宗致之하고 且曰 今延孝雖有降意 而梁兵扼楊劉者甚盛하니 未可圖也 不如築壘하야 以通이라하야늘 莊宗以爲然이라
壘成 梁遣王彥章하야 急攻新壘하니 明宗使延光間行求兵이어늘 夜至河上하야 爲梁兵所得하야 送京師
下延光獄하야 搒掠數百하고 脅以白刃이어늘 延光終不肯言晉事 繫之數月 稍爲獄吏所獲이라
莊宗入汴 獄吏去其桎梏하고 拜而出之하니 莊宗見延光喜하야 拜檢校工部尙書하다
明宗時 爲宣徽南院使하다 明宗行幸汴州하야 至滎陽 이어늘
延光曰 守殷反迹始見이라 若緩之하야 使得爲計 則城堅而難近이라 故乘人之未備者 莫若急攻이니 臣請騎兵五百하야 馳至城下하야 以神速駭之라하고
乃以騎兵五百으로 自暮疾馳하야 至半夜 行二百里하야 戰于城下 遲明 明宗亦馳至하니 汴兵望見天子乘輿하고 乃開門이어늘
而延光先入하야 猶巷戰하야 殺傷甚衆 守殷死하니 汴州平하다
明年 遷樞密使하고 出爲成德軍節度使하다 하다
明宗問延光馬數幾何하니 對曰 騎軍三萬五千이라하야늘
明宗撫髀하고 歎曰 吾居兵間四十年在太原時 馬數不過七千이오 莊宗取河北하야 與梁家戰河上 馬纔萬匹이러니 今有馬三萬五千匹而不能一天下하니 吾老矣 馬多奈何오라하다
延光因曰 臣嘗計一馬之費 可養步卒五人이니 三萬五千匹馬 十五萬兵之食也라하야늘 明宗曰 肥戰馬而瘠吾人하니 此吾所愧也라하다
夏州 其子彜超自立而邀旄節이어늘 明宗遣安從進代之 彜超不受代하니 以兵攻之어늘 久不克이라
隰州刺史劉遂凝馳驛入見獻策하야 言綏銀二州之人 皆有內嚮之意하니 請除二刺史하야 以招降之라하야늘 延光曰 王師問罪 本在彜超 夏州已破어든 綏銀豈足顧哉 若不破夏州 雖得綏銀이라도 不能守也라하다
遂凝又請自馳入說彜超하야 使出降하니 延光曰 一遂凝 萬一失之라도 不足惜이니 所惜者 朝廷大體也라하다
是時 用事한대 遂凝兄弟與淑妃有舊하야 方倚以蒙恩寵하야 所言無不聽하니 而大臣以妃故 多不敢爭이어늘 獨延光從容沮止之
明宗有疾하야 不能視朝하니 京師之人 詾詾異議하야 藏竄山谷이어나 或寄匿於軍營이어늘 有司不能禁이라
或勸延光以嚴法制之하니 延光曰 制動當以靜이니 宜少待之라하다 已而 明宗疾少間 京師乃定하다
延光懼禍之及也하야 乃求罷去어늘 延壽陰察延光有避禍意하고 亦遽求罷 明宗再三留之어늘 二人辭益懇至하고 繼之以泣하니 明宗不得已하야 乃皆罷之
延光復鎭成德하고 而用朱弘昭馮贇爲樞密使하다 已而 秦王擧兵見誅하고 明宗崩 潞王反하야 弑愍帝하니 唐室大亂이라 하다
末帝復召延光爲樞密使하고 拜宣武軍節度使하다 하야 逐節度使劉延皓하니 遣延光하야 討平之하고 卽以爲天雄軍節度使하다
延光嘗夢大蛇自臍入其腹하야 半入而掣去之하고 以問門下術士張生하니 張生贊曰 蛇 龍類也 龍入腹中 王者之兆也라하다
張生自延光微時 言其必貴하니 延光素神之하야 常置門下 言事輒中하야 遂以其言爲然하고 由是 頗畜異志하다
當晉高祖起太原하야 末帝遣延光하야 以兵二萬屯遼州하야 與趙延壽이라 旣而 延壽先降이어늘 延光獨不降이라
高祖卽位 延光賀表又頗後諸侯至하고 又其女爲末帝子重美妃 以此遂懷反側하니 高祖封延光臨清王하야 以慰其心하다
有平山人祕瓊者 爲成德軍節度使董溫其衙內指揮使한대 後溫其爲契丹所虜 瓊乃悉殺溫其家族하야 瘞之一穴하고 而取其家貲鉅萬計
延光陰遣人以書招之한대 瓊不納하니 延光怒하야 選精兵하야 伏境上하야 伺瓊過하야 殺之于하야 悉取其貲하고 以戍邏者悞殺聞이라 由是 高祖疑其必爲亂하야 乃幸汴州하다
天福二年六月 延光遂反하야 遣其牙將孫銳澶州刺史馮暉하야 以兵二萬距하야 高祖以楊光遠爲招討使하야 引兵하야 自滑州攻之
銳輕脫無謀하야 兵行 以娼女十餘自隨하고 張蓋操扇하야 酣歌飲食自若이라 軍士苦大熱하야 皆不爲用이라
光遠得其諜者하야 詢得其謀하야 誘銳等渡河하야 半渡而擊之하니 兵多溺死하고 銳暉退走入魏하야 閉壁不復出하다
延光反意未決 而得暴疾하야 不能興이어늘 銳乃陰召暉하야 入城하야 迫延光反하니 延光惶惑하야 遂從之
高祖聞延光用銳等以反하고 笑曰 吾雖不武 然嘗從明宗하야 取天下 攻堅破彊 多矣 如延光已非我敵이어든 況銳等兒戲耶 行取孺子爾라하고 乃決意討之하다
延光初無必反意 及銳等敗하야 延光遣牙將王知新하야 齎表自歸어늘 高祖不見하고 以知新
延光又附楊光遠하야 表請降이어늘 不報하니 延光遂堅守 晉以箭書二百射城中하야 悉赦魏人하고 募能斬延光者
然魏城堅難下하야 攻之逾年不克하야 師老糧匱 宗正丞石昻上書極諫하야 請赦延光하야 願以單車入說而降之하니 高祖亦悔悟하다
三年九月 使謁者入魏赦延光하니 延光乃降이라 冊封東平郡王天平軍節度使하고하다 居數月 來朝하야 因慙請老하야 以太子太師致仕하다
高祖赦降延光할새 語使者하야 謂之曰 許卿不死矣 若降而殺之 何以享國고하야늘 延光謀於副使李式하니
式曰 主上敦信明義하니 許之不死 則不死矣라하야늘 乃降하다 及致仕居京師하야 歲時 高祖待之與群臣無間이라 然心終不欲使在京師
歲餘 使宣徽使劉處讓으로 載酒하야 夜過延光하야 謂曰 上遣處讓來時 適有契丹使至 問 晉叛臣何在 恐晉不能制 當鎖以來하야 免爲中國後患이라하야늘 延光聞之泣下하고 莫知所爲
處讓曰 當且之洛陽하야 以避契丹使者하라하야늘 延光曰 楊光遠留守河南하니 吾之仇也 吾有田宅在河陽하니 可以往乎아하니 處讓曰 可也라하다
乃挈其帑하야 歸河陽한대 其行 輜重盈路 光遠利其貲하야 果圖之하야 因奏曰 延光反覆姦臣이라 若不圖之 非北走胡則南走吳越이라 請拘之洛陽이라하야늘 高祖猶豫未決이라
光遠兼鎭河陽한대 其子承勳知州事 乃遣承勳하야 以兵脅之하야 使自裁하니 延光曰 天子賜我鐵券하야 許之不死어늘 何得及此오하야늘
乃以壯士驅之上馬하고 行至浮橋 推墮水溺死 以延光自投水死聞하고 因盡取其貲하다 高祖以適會其意하야 不問하고 爲之輟朝하고 贈太師하다
水運軍使曹千獲其流尸于繆家灘하니 詔許歸葬相州 已葬 墓輒崩하야 破其棺槨하야 頭顱皆碎하다
하야 取其貲하고 延光又殺瓊而取之러니 而終以貲爲光遠所殺하고
當延光反時하야 有李彥珣者 爲河陽行軍司馬한대 彥珣附之
從賓敗 彥珣奔于魏하니 延光以爲步軍都監하야 使之守城이라 招討使楊光遠知彥珣邢州人也 其母尙在하고 乃遣人之邢州하야 取其母하야 至城下하야 示彥珣以招之하니 彥珣望見하고 自射殺之
及延光出降하야 晉高祖拜彥珣房州刺史하니 大臣言彥珣殺母當誅라하야늘 高祖以謂 赦令已行이니 不可失信이라하다 하다
嗚呼甚哉 故聖人之於仁義 深矣 其爲教也 勤而不怠하고 緩而不迫하야 欲民漸習而自趨之하야 至於久而安以成俗也
然民之無知하야 習見善則安於爲善하고 習見惡則安於爲惡이라
五代之亂 其來遠矣 自唐之衰 干戈饑饉하야 父不得育其子하고 子不得養其親이라
其始也 骨肉不能相保 蓋出於不幸이로대 因之禮義日以廢하고 恩愛日以薄하야 其習久而遂以大壞하야 至於父子之間하야도 自相賊害하니 五代之際 其禍亂不可勝道也
夫人情 莫不共知愛其親이오 莫不共知惡於不孝 然彥珣彎弓하야 射其母어늘 高祖從而赦之하니 非徒彥珣不自知爲大惡이오 而高祖亦安焉不以爲怪也 豈非積習之久而至於是歟
語曰 이라하니 至其極也하야 使人心不若禽獸하니 可不哀哉 若彥珣之惡而恬然不以爲怪하니 宜其擧世不知爲非也로다


03. 범연광范延光전기傳記
범연광范延光은 사람됨이 방략方略이 많고 살아온 생애에 또한 반복무상反覆無常한 것이 많은데, 구양공歐陽公이 그림처럼 기술하여 2천여 자가 마치 한 구와 같다.
범연광范延光자괴子瓌이니 상주相州 임장臨漳 사람이다. (후당後唐) 명종明宗절도사節度使로 있으면서 범연광을 휘하에 두었으나 특출하게 여기지는 않았다.
명종이 운주鄆州를 격파할 때 나라 병사가 바야흐로 양류楊劉를 점거하고 있었는데 그 선봉장 강연효康延孝가 몰래 명종에게 투항서를 보내왔다. 명종이 강연효가 투항하려는 뜻을 장종莊宗에게 잘 전달할 수 있는 사람을 찾으니 범연광이 문득 스스로 가겠다고 청하였다.
이에 범연광이 강연효의 납환서䗶丸書를 품고 서쪽으로 가서 장종을 알현하여 서신을 바치고서 또 말하기를 “지금 강연효가 비록 투항하려는 뜻이 있으나 양나라 병사가 양류를 점거한 형세가 매우 성대하니 도모할 수 없습니다. 마가구馬家口에 성채를 쌓고서 문양汶陽교통交通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자 장종이 옳게 여겼다.
성채가 완성되자 양나라에서 왕언장王彥章을 보내 새로 지은 성채를 급히 공격하니 명종이 범연광에게 몰래 가서 병사를 요청하게 하였는데, 밤에 황하 가에 이르러 양나라 병사에게 잡혀 경사京師로 압송되었다.
양나라에서 범연광을 옥에 가두고 수백 대의 매질을 하고 칼날을 들이대며 위협하였는데 범연광은 끝내 나라의 실정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 옥에 갇힌 지 수개월에 차츰 옥리獄吏의 마음을 얻었다.
장종이 변주汴州에 들어오자 옥리가 범연광의 차꼬와 수갑을 벗겨주고 절하고서 옥에서 내보내주니, 장종이 범연광을 보고 기뻐하여 검교檢校 공부상서工部尙書에 배수하였다.
명종明宗 때에 범연광范延光선휘남원사宣徽南院使가 되었다. 명종이 변주汴州로 행차하여 형양滎陽에 이르렀을 때 주수은朱守殷이 반란을 일으키자,
범연광이 말하기를 “주수은이 막 반란을 일으킨 이때에 만약 진압을 천천히 하여 저들이 대비책을 세우게 한다면, 변주의 성벽이 견고하여 접근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남이 대비하지 못한 틈을 타는 방법으로는 급히 공격하는 것 만한 것이 없으니, 신은 청컨대 기병騎兵 5백을 주시면 성 아래로 달려가 신속한 대응으로 적을 놀라게 하고자 합니다.”라고 하였다.
그리고서 기병 5백을 이끌고 날이 저물녘부터 신속히 내달려서 한밤중에 이르기까지 2백 리를 가서 성 아래에서 전투를 벌였다. 동이 틀 무렵에 명종 또한 급히 도착하니 변주의 병사들이 천자의 수레를 바라보고서 성문을 열었다.
범연광이 먼저 입성하여 시가전市街戰을 벌여 매우 많은 사람을 살상함에 주수은이 죽으니 변주가 평정되었다.
이듬해에 추밀사樞密使로 승진하였고 외직으로 나가 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가 되었다. 안중회安重誨가 죽자 다시 범연광范延光조연수趙延壽를 불러 함께 추밀사로 삼았다.
명종이 범연광에게 말이 몇 마리나 되는지 물으니 범연광이 대답하기를 “기군騎軍이 3만 5천입니다.”라고 하자
명종이 넓적다리를 어루만지면서 탄식하기를 “내가 군영軍營에서 지낸 40년 동안, 태조太祖태원太原에 계실 때에는 말이 7천 필에 불과했고, 장종莊宗하북河北을 취하여 나라와 황하 가에서 전투를 벌일 적에는 말이 겨우 일만 필이었는데, 지금 말 3만 5천 필을 소유하고도 천하를 통일하지 못하였다. 나는 늙었으니 말이 많은들 어이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범연광이 이어서 말하기를 “신이 일찍이 계산해보건대 말 한 마리에 들어가는 비용이면 보졸步卒 다섯 사람을 기를 수 있으니, 3만 5천 필의 말은 15만 병사의 양식입니다.”라고 하자, 명종이 말하기를 “전마戰馬는 살찌고 우리 병사들은 수척해졌으니 이는 나의 부끄러움이다.”라고 하였다.
하주夏州이인복李仁福하자 그 아들 이이초李彜超가 자립하여 절도사節度使의 지위를 요구하였는데 명종明宗안종진安從進을 보내 이인복을 대신하게 하였다. 이이초가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니 병사를 보내 공격하였는데 오랫동안 이기지 못하였다.
습주자사隰州刺史 유수응劉遂凝이 역말을 달려와 들어와서 알현하고 계책을 바치며 말하기를 “수주綏州은주銀州 두 주 사람들이 모두 귀순할 뜻을 가지고 있으니, 청컨대 저에게 두 주의 자사를 제수하여 그들을 회유하여 투항시키게 해주십시오.”라고 하자, 범연광范延光이 말하기를 “왕사王師문죄問罪하려는 대상은 본래 이이초이다. 하주가 격파되고 나면 수주와 은주를 어찌 돌아볼 것이 있겠는가. 만약 하주를 격파하지 못한다면 비록 수주와 은주를 얻더라도 지켜내지 못할 것이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유수응이 또 스스로 말을 달려 들어가 이이초를 설득해서 성문을 열고 나와 투항하게 만들겠다고 청하니, 범연광이 말하기를 “유수응 한 사람은 만에 하나 잘못되더라도 아까울 것이 없겠지만, 아까운 것은 조정의 대체大體이다.”라고 하였다.
이때 왕숙비王淑妃가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유수응 형제가 왕숙비와 예전부터 친분이 있던 사이라 왕숙비에게 의지해 은총을 입어 그들이 말하는 것을 들어주지 않음이 없었다. 대신大臣들도 왕숙비 때문에 대부분 감히 논쟁하지 못하였는데, 범연광만이 차분하게 저지하였다.
명종이 질병이 있어 조회를 보지 못하게 되자, 경사京師 사람들이 수군대며 의론이 분열되어 산골짜기로 숨어들어가거나 혹은 군영에 몸을 의탁하여 숨기도 하였는데 유사有司가 금지하지 못하였다.
어떤 사람이 범연광에게 엄한 법으로 제재하기를 권하니, 범연광이 말하기를 “을 제어함은 마땅히 으로 해야 하니, 응당 조금 기다려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얼마 있어 명종의 질병이 조금 낫자 경사가 마침내 안정되었다.
이때에 진왕秦王이 병권을 쥐고서 몹시 교만하였고 송왕宋王은 유약한 데다가 외방外方에 있으니 의론하는 자들의 마음이 대부분 노왕潞王에게 쏠렸다.
범연광范延光이 화가 닥칠 것을 두려워하여 마침내 파직을 청하자 조연수趙延壽도 범연광이 화를 피하려는 뜻이 있음을 짐작하고서 급작스레 파직을 청하였다. 명종明宗이 재삼 만류하자 두 사람이 더욱 간절하게 사양하고 이어서 눈물을 흘리니 명종이 부득이하여 마침내 모두 파직하였다.
그리고 범연광은 다시 성덕군成德軍진수鎭守하게 하였고 주홍소朱弘昭풍빈馮贇추밀사樞密使로 삼았다. 얼마 뒤 진왕이 병사를 일으켰다가 주살誅殺을 당하였고 명종이 붕어하자 노왕이 반란을 일으켜 민제愍帝를 시해하니 당실唐室이 크게 혼란해졌다. 주홍소와 풍빈 모두 그 와중에 화를 당하여 죽었다.
말제末帝가 다시 범연광을 불러 추밀사로 삼고 선무군절도사宣武軍節度使를 배수하였다. 천웅군天雄軍에서 난리를 일으켜 절도사 유연호劉延皓를 쫓아내니, 범연광을 보내 토벌하여 평정하고 즉시 천웅군절도사로 삼았다.
범연광范延光이 일찍이 큰 뱀이 배꼽에서 배로 들어가 반쯤 들어갔을 때 잡아당겨 제거하는 꿈을 꾸고서 문하門下술사術士 장생張生에서 물으니, 장생이 찬탄하며 말하기를 “뱀은 용의 부류이니, 용이 뱃속으로 들어간 것은 왕자王者의 징조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생이 범연광이 미천한 시절부터 그가 반드시 존귀하게 될 것이라 말하니, 범연광이 평소 그를 신통하게 여겨 항상 문하에 두었다. 그가 어떤 사안에 대해 말을 하면 번번이 들어맞았으므로 마침내 그의 말이 옳다고 여기고 이 때문에 자못 다른 뜻을 품었다.
고조高祖(석경당石敬瑭)가 태원太原에서 기병起兵했을 때 말제末帝가 범연광을 보내 병사 2만으로 요주遼州에 주둔하고서 조연수趙延壽기각지세掎角之勢를 이루게 하였다. 얼마 뒤 조연수는 먼저 투항하였는데 범연광만은 투항하지 않았다.
그리고 고조가 즉위하였을 때 범연광의 하표賀表가 다른 제후諸侯들보다 훨씬 뒤에 도착하였고, 또 그의 딸이 말제의 아들 이중미李重美가 되었기에 이 때문에 마침내 모반할 마음을 품으니, 고조가 범연광을 임청왕臨淸王에 봉하여 그 마음을 위무하였다.
평산平山 사람 비경祕瓊이라는 자가 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 동온기董溫其아내지휘사衙內指揮使가 되었는데 후에 동온기가 거란契丹의 포로가 되자 비경이 마침내 동온기의 가족을 모두 살해하여 한 구덩이에 묻고 그 집의 거만금巨萬金의 재산을 탈취하였다.
고조高祖가 등극하자 비경을 제주방어사齊州防御使로 삼으니 비경이 탈취한 재물을 전대에 넣고서 길을 나섰는데 길이 위주魏州 쪽으로 잡혔다.
그러자 범연광이 몰래 사람을 보내 서신으로 비경을 불렀는데 비경이 받아들이지 않으니 범연광이 노하여 정병精兵을 선발하여 위주 경계에 매복시켜 비경이 지나갈 때를 엿보아 하진夏津에서 살해하고 그 재물을 모두 탈취한 다음 경계를 지키는 군사가 잘못하여 살해하였다고 보고하였다. 이 일로 인해 고조가 범연광이 반드시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의심하여 마침내 변주汴州로 거둥하였다.
천복天福 2년(937) 6월에 범연광이 마침내 반란을 일으켜 그 아장牙將 손예孫銳전주자사澶州刺史 풍휘馮暉를 보내 2만의 병사로 여양黎陽에 이르러서 활주滑州위주衛州를 약탈하였다. 고조가 양광원楊光遠초토사招討使로 삼아 병사를 이끌고 활주에서 호량胡梁을 건너 공격하였다.
손예는 경솔하고 무모하여 진군할 때에 창녀娼女 십여 인을 따르게 하고 일산을 펼치고 부채를 쥐고서 술에 취해 노래 부르면서 먹고 마시며 태연자약하였는데, 군사들은 몹시 무더운 날씨에 시달린 나머지 모두 명을 따르지 않았다.
양광원이 손예의 첩자를 잡아 적진의 계획을 탐지하고서 손예 등을 유인하여 황하黃河를 건너게 하여 반쯤 건넜을 때 공격하니, 병사들 대부분이 물에 빠져 죽고 손예와 풍휘는 도주하여 위주로 들어가 성문을 닫아걸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당초에 범연광范延光이 반란하려는 뜻을 결정하기 전에 갑작스럽게 중병에 걸려 일어날 수 없었는데, 손예孫銳가 몰래 풍휘馮暉를 불러 성에 들어가 범연광에게 반란하도록 압박하니 범연광이 두렵고 미혹되어 마침내 그들의 뜻을 따랐다.
고조高祖가 범연광이 손예 등을 써서 반란한다는 말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가 비록 무용武勇이 있지 않으나 일찍이 명종明宗을 따라 천하를 취하면서 견고하고 강한 적들을 공격하여 깨뜨린 일들이 많다. 범연광 같은 자도 이미 내 적수가 아닌데 하물며 손예 등과 같이 소꿉장난하는 이들이랴. 가서 어린아이를 잡을 것이다.”라고 하고는 마침내 뜻을 결정하여 토벌하였다.
범연광은 애초에 반드시 반란을 일으키려는 뜻은 없었으므로 손예 등이 패하자 범연광이 아장牙將 왕지신王知新을 보내 표문表文을 가지고 가서 스스로 귀순하려고 하였는데 고조가 접견하지 않고 왕지신을 무덕사武德司에 맡겼다.
범연광이 또 양광원에게 의지하여 표문을 올려 투항을 청하였는데 답하지 않으니, 범연광이 마침내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방어하였다. 나라에서 화살에 묶은 편지 2백 개를 성 안으로 쏘아 위주魏州 사람들을 모두 사면하고 범연광의 목을 베어올 수 있는 자를 모집하였다.
그러나 위주의 성이 견고하여 함락하기 어려워 1년이 넘도록 공격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여 병사는 지치고 군량은 바닥을 보였다. 그리고 종정승宗正丞 석앙石昻이 글을 올려 극력으로 간언하여 범연광을 사면하기를 청하면서 홀로 수레를 타고 위주 성으로 들어가 범연광을 설득하여 투항시키기를 원하니, 고조 역시 자신의 실수를 뉘우치고 깨달았다.
천복天福 3년(938) 9월에 알자謁者를 시켜 위주 성에 들어가 범연광을 사면하게 하니, 범연광이 마침내 투항하였다. 그리하여 범연광을 동평군왕東平郡王 천평군절도사天平軍節度使책봉冊封하고 철권鐵券을 하사하였다. 몇 달이 지나 범연광이 조정으로 와서 조회하면서 부끄러워하며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기를 청하여 태자태사太子太師치사致仕하였다.
당초에 고조高祖범연광范延光을 사면하여 투항하게 하면서 사자使者에게 말하여 범연광에게 이르게 하기를 “을 죽이지 않을 것을 허락한다. 만약 경이 투항했는데 살해한다면 어떻게 내가 나라를 향유하겠는가.”라고 하자, 범연광이 부사副使 이식李式에게 상의하였다.
이식이 말하기를 “주상主上은 신의가 도탑고 의리에 밝으니, 죽이지 않을 것을 허락했다면 죽이지 않는 것입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투항하였다. 범연광이 치사致仕하고 경사京師에 거처하게 되자 세시歲時연현宴見에 고조가 범연광을 뭇 신하들과 차이 없이 대우하였다. 그러나 마음속으로는 끝내 범연광을 경사에 머물게 하고 싶지 않았다.
한 해 남짓 지나 선휘사宣徽使 유처양劉處讓에게 술을 싣고 밤에 범연광의 집에 들러 이르게 하기를 “성상께서 저를 보내실 때 마침 거란契丹의 사신이 당도했습니다. 북조北朝황제皇帝가 묻기를 ‘나라의 위박魏博반신叛臣이 어디에 있는가? 진나라에서 제어하지 못할 듯하니 마땅히 사슬로 묶어 데리고 와서 중국의 후환後患이 되는 것을 면하게 하겠다 하였습니다.”라고 하자, 범연광이 그 말을 듣고 눈물을 흘리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유처양이 말하기를 “우선 낙양洛陽으로 가서 거란 사신을 피해야 합니다.”라고 하자, 범연광이 말하기를 “양광원楊光遠하남河南 유수留守로 있는데 나의 원수요. 내가 소유한 전택田宅하양河陽에 있으니 그리로 가도 되겠소?”라고 하니, 유처양이 “괜찮습니다.”라고 하였다.
이에 처자를 이끌고 하양으로 돌아갔는데, 그가 갈 때 짐을 실은 수레가 길을 가득 메웠다. 양광원이 그 재물을 탐하여 과연 그를 도모하여 상주上奏하기를 “범연광은 반복무상反覆無常간신姦臣이라 만약 그를 도모하지 않는다면, 북쪽 땅으로 달아나지 않으면 남쪽 오월吳越로 달아날 것입니다. 청컨대 낙양에 구금해두소서.”라고 하였는데 고조가 망설이며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양광원은 하양河陽을 겸하여 진수鎭守하고 있었는데 그 아들 양승훈楊承勳지주사知州事로 있었다. 이에 양승훈을 보내 병사로 겁박하여 자살하도록 하니, 범연광이 말하기를 “천자께서 나에게 철권을 하사하여 죽이지 않기로 허락하셨는데 어찌 이럴 수 있는가.”라고 하였다.
그러자 양승훈이 장사壯士들에게 범연광을 핍박하여 말에 올라타게 하고 행렬이 부교浮橋에 이르렀을 때 범연광을 떠밀어 물에 빠뜨려 익사시켰다. 그리고는 범연광이 스스로 강물에 투신하여 죽었다고 보고하고는 그 재물을 다 탈취하였다. 고조는 자신의 뜻에도 딱 들어맞으므로 그 죄를 따져 묻지 않고 범연광을 위해 철조輟朝하고 태사太師를 증직하였다.
수운군사水運軍使 조천曹千이 강물에 떠내려 온 범연광의 시신을 무가탄繆家灘에서 찾으니, 조명詔命으로 상주相州로 돌아가 장사 지낼 것을 허락하였다. 장사를 지내고 났을 때 묘가 갑자기 무너져 그 관곽棺槨이 부서져 시신의 머리가 모두 박살났다.
당초에 비경祕瓊동온기董溫其를 살해하고 그 재물을 탈취하였고, 범연광이 다시 비경을 살해하고 재물을 탈취하였는데 마침내는 재물 때문에 양광원에서 살해당하였고, 양광원 또한 화를 면하지 못하였다.
범연광范延光이 반란하였을 때 이언순李彥珣이라는 자가 하양행군사마河陽行軍司馬로 있었는데, 장종빈張從賓하양河陽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이언순이 장종빈에게 붙었다.
장종빈이 패하자 이언순이 위주魏州로 달아나니 범연광이 그를 보군도감步軍都監으로 삼아 성을 수비하게 하였다. 초토사招討使 양광원楊光遠이 이언순이 형주邢州 사람이고 그 어미가 아직 살아있음을 알고 사람을 형주로 보내 그 어미를 데려와 성 아래에 이르러 이언순에게 보여주며 귀순할 것을 종용하니, 이언순이 멀리서 바라보고 스스로 활을 쏘아 어미를 죽였다.
범연광이 성을 나와 항복하자 고조高祖가 이언순을 방주자사房州刺史에 배수하였다. 대신大臣이 이언순이 어미를 살해하였으니 마땅히 주살誅殺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고조가 말하기를 “사면령을 이미 내렸으니 신의를 잃을 수 없다.”라고 하였다. 뒤에 뇌물죄에 걸려 주살되었다.
오호라! 심하다. 사람의 본성이 습관을 따름이여. 그러므로 성인이 인의仁義에 대해 정심精深하게 하여 그 가르침을 펼칠 때 부지런히 하여 게을리 하지 않고 느슨히 하여 급박하지 않아서 백성들이 점점 습관이 들어 스스로 쫒아와 오랜 시간이 지나서는 편안해져서 풍속을 이루게 하려 한 것이다.
그러나 백성들은 무지하여 을 보는 일에 익숙하면 편안히 선을 행하고 을 보는 일에 익숙하면 편안히 악을 행한다.
오대五代의 혼란은 그 유래가 오래되었다. 나라가 쇠망할 때로부터 전쟁과 기근이 일어나 아비는 그 자식을 기르지 못하고 자식은 그 부모를 봉양할 수 없었다.
그 처음에 골육骨肉끼리 서로 보호할 수 없었던 것은 대개 불행한 시기를 만났기 때문이지만, 이를 말미암아 예의禮義가 날로 폐해지고 은애恩愛가 날로 각박해져 그러한 습속이 오래되자 마침내 크게 무너져 부자 사이에 이르러서도 서로 해치게 되었으니, 오대 시절의 화란禍亂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무릇 인정人情은 그 부모를 사랑해야 함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고 불효를 미워해야 함을 알지 못하는 이가 없다. 그러나 이언순李彥珣은 활을 당겨 그 어미를 쏘았는데도 고조高祖가 그대로 사면하였으니, 단지 이언순만 대악大惡을 저질렀음을 스스로 알지 못한 것이 아니라, 고조 역시 태연하여 괴이한 일이라 여기지 않았다. 어찌 오랫동안 습관이 쌓여서 이 지경에 이른 것이 아니겠는가.
논어論語≫에 이르기를 “본성은 서로 가까우나 습관에 의해 서로 멀어진다.”라고 하였는데, 그 극도에 이르러서는 사람의 마음을 금수禽獸만도 못하게 만드니 슬퍼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이언순의 악행에 대해 태연하여 괴이한 일이라 여기지 않았으니, 출제出帝가 그 아비와 부자관계를 끊은 것에 대해 온 세상이 그 그릇됨을 알지 못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역주
역주1 范延光傳 : 范延光(?~940)은 相州 臨漳 사람으로, 後唐의 莊宗과 明宗을 섬겨 樞密使의 직임에 오르고 이어서 後晉 高祖를 섬겼다. 범연광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97 〈晉書 第23 列傳12〉와 ≪新五代史≫ 卷51 〈雜傳 第39〉에 각각 立傳되어 있다. 범연광은 후당과 후진으로 이어지는 때에 재상의 지위에 올라 두각을 나타낸 五代 시기 주요인물 중 한 사람이다. 본 傳에서 기술한 것처럼 범연광은 기민한 판단력과 재지로 후당을 섬겨 많은 공업을 이루어 그의 생애 전반기에는 볼만한 行事와 節操가 많았다. 後梁에 포로로 잡혀 고문과 협박에도 굴하지 않은 일, 朱守殷의 반란 때 기민하게 奇智를 발휘한 일, 李彜超가 반란했을 때 권세가인 劉遂凝을 제압하며 위급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은 일 등은 그가 一國의 卿相으로 국정을 일임할 만한 재주를 지녔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그러나 그가 뒤에 후진의 고조를 섬길 때의 사적은 이와는 전혀 딴판이다. 祕瓊의 재물을 탐내어 그를 부정한 방법으로 살해하고 이어서 반란을 일으켜 反覆無常한 태도를 취하다가 마침내는 그 역시 楊光遠에게 똑같은 방법으로 살해당하는 대목에 이르면 이것이 한 인물의 사적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상반된다. 범연광의 이 사건은 우리나라 朴趾源의 ≪熱河日記≫나 成大中의 ≪靑城雜記≫ 등에서도 재물이 가져오는 禍와 罪科의 순환의 예로 제시되고 있기도 하다. 범연광이라는 한 인물의 이러한 행태는 그야말로 五代 시기 전체에 걸쳐 이어진 반복무상한 세태를 그대로 대변한 것이다.
더불어 범연광의 열전 말미에는 적들이 자신의 어미를 잡아 성 밑으로 데려오자 제 어미를 직접 활로 쏘아 죽인 李彥珣이라는 사람의 일화가 추가되어 있고, 이 일화에 대해 특별히 구양수가 신랄한 어조로 史論을 남기고 있다. 이는 범연광과 이언순의 사건을 하나로 엮어 五代 시기의 퇴폐하고 반복무상한 세태를 비판하기 위한 의도일 것이다.
茅坤이 평한 바와 같이 범연광의 행적에는 특출난 行事와 반복무상함이 많은데 각각의 사건이 하나하나 생생하게 잘 묘사되어 있어 史錄으로서뿐만 아니라 문장으로서도 뛰어난 글이다. 한편 ≪구오대사≫에서는 범연광을 다음과 같이 평하고 있다. “범연광이 과거 당나라의 신하였을 때 넉넉하게 영예가 있었는데, 진나라가 들어서자 분별 없는 모략을 드러내놓고 거리낌 없이 행하였다. 이미 힘이 모자라 투항하고서 부끄러운 낯빛으로 목숨을 아까워하더니, 맹진에서 죽어 마침내 천년 세월 동안 비웃음을 당하였다.[延光昔爲唐臣 綽有令譽 洎逢晉祚 顯恣狂謀 旣力屈以來降 尙靦顔而惜死 孟津之歿 乃取笑於千載也]”
역주2 楊劉 : 山東省 東阿縣 북쪽 60리 지점에 있는 지명이다. 黃河 가에 위치하여 後粱과 後唐이 대치하던 장소였다.
역주3 䗶(랍)丸書 : 蜜蠟을 뭉쳐 그 안에 서류를 넣은 密書를 가리킨다.
역주4 馬家口 : 山東省 東平縣 서북쪽에 있던 지명으로, 이곳의 서쪽이 楊劉이다.
역주5 汶陽 : 五代 시절 鄆州에 속한 지명이다.
역주6 朱守殷 : ?~927. 後唐의 莊宗을 섬겨 총애를 받아 節度使의 관직에 이르렀다. 明宗 李嗣源과는 본래 사이가 좋지 않아, 梁나라와의 전투에서 주수은이 실책하자 명종이 장종에게 주수은을 죽일 것을 청하기도 하였다. 명종이 즉위한 뒤 汴州에서 모반을 일으켰으나 성공하지 못하고 살해당하였다.
역주7 安重誨死……竝爲樞密使 : 安重誨(?~931)는 後唐 明宗의 신임을 받아 재상이 되었으나, 권력을 전횡하고 횡포하게 굴어 마침내 살해당하였다. 趙延壽(?~948)는 본래 姓은 劉氏로 常山 사람이다. 그 부친 劉邟이 脩縣의 현령이었는데 後梁의 劉守文에게 脩縣이 함락당하자 훗날 後唐의 北平王이 되는 趙德鈞에게 거두어져 養子가 되었다. 후당 明宗의 딸인 興平公主에게 장가들었고 汴州司馬, 汝州刺史, 樞密使 등을 역임하였다. 이 부분에 대해 ≪五代史纂誤≫ 卷下에서 다음과 같이 고증하였다. “살펴보건대 〈明宗紀〉에 ‘長興 元年(930) 9월 甲申에 成德軍節度使 范延光을 추밀사로 삼았고, 12월에 안중회가 董璋을 토벌하였다. 長興 2년(931) 2월 辛丑에 안중회를 파직하였고, 4월 甲辰에 宣徽北院使 趙延壽를 추밀사로 삼았고, 5월에 안중회를 죽였다.’라고 하였다. 또 〈安重誨傳〉에 이르기를 ‘안중회가 〈逆謀를 꾸몄다고 의심받은 일 때문에〉 관직에서 물러나기를 청하자, 趙鳳이 大臣은 가볍게 움직여서는 안 된다고 말하여 마침내 범연광을 추밀사로 삼고 안중회는 예전과 같이 직책을 맡았다.’라고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 의거해 말해보면 범연광을 불러 추밀사로 삼았을 때 안중회는 죽지 않았으니, 지금 〈범연광전〉에서 안중회가 죽은 뒤에 불러서 추밀사로 삼았다는 것은 오류이다.[按明宗紀長興元年九月甲申 成德軍節度使范延光爲樞密使 十二月安重誨討董璋 二年二月辛丑安重誨罷 四月甲辰宣徽北院使趙延壽爲樞密使 五月殺安重誨 又安重誨傳云 重誨因求解職 趙鳳以爲大臣不可輕動 遂以范延光爲樞密使 而重誨居職如故 由此言之 則召范延光爲樞密使之時 安重誨未死 今延光本傳以爲重誨死後 乃召爲樞密使者誤也]”
역주8 太祖 : 晉王 李克用(856~908)이다. 아들 李存勖이 後唐을 개국한 후 太祖로 追封되었다.
역주9 李仁福 : ?~933. 唐나라 말에 高宗益이 반란을 일으켜 定難軍節度使 李彜昌을 죽이자 장수들에 의해 받들어져 수장이 되었다. 後粱 太祖 朱溫에게 투항하여 定難軍節度使가 되었고, 晉王 李克用이 周德威 등을 보내 夏州를 공격했을 때 잘 버텨내어 물러나게 하자 同平章事에 봉해졌다. 後粱이 멸망한 후에는 夏州에 웅거하고서 後唐에 稱臣하여 中書令에 봉해졌다. 後唐 明宗 4년에 죽었으며 韓王에 추증되었고, 그 아들 李彜超가 자립하여 留後가 되었다.
역주10 王淑妃 : ?~951? 後唐 明宗 李嗣源의 妃嬪 가운데 한 사람이다. 어려서 미색이 뛰어났고 後梁의 장수 劉鄩의 시녀로 팔려갔었다. 유심이 죽은 후 의지할 데가 없이 있었는데, 李嗣源의 부인인 夏氏가 세상을 떠나 이사원이 別室을 구하던 중 安重誨의 소개로 이사원의 첩이 되었다. 이사원이 등극한 후 妃에 봉해졌고 미색으로 이사원의 총애를 받았다.
역주11 秦王握兵驕甚……議者多屬意於潞王 : 秦王은 明宗 李嗣源의 次子인 李從榮(?~933)이다. 六軍諸衛事와 天下兵馬大元帥를 맡아 병권을 장악하였는데 난폭한 성격으로 신하들과 不和하였다. 933년 明宗의 병이 위중했을 때 宋王에게 帝位가 계승될 것을 염려하여 군사를 이끌고 犯闕하였으나 실패하고 살해되었다. 宋王은 명종 이사원의 三子인 李從厚(914~934)이다. 어려서부터 명종의 총애를 받아 中書令 등을 역임하고 송왕에 봉해졌다. 933년에 진왕의 난이 실패하고 그 충격으로 명종이 붕어하자 황위를 계승하니 바로 愍帝이다. 潞王의 반란으로 폐위되어 시해당했다. 노왕은 명종 이사원의 養子인 李從珂(885~937)이다. 기골이 장대하고 용맹하며 전투를 좋아하여 많은 전공을 세웠다. 송왕 이종후가 즉위한 후 각 藩鎭의 실권을 약화시키려 하자 두려워하여 반란을 일으켜 이종후를 폐위시켜 鄂王으로 降封하고 즉위하니 바로 末帝이다. 이종후는 衛州로 도망갔으나 곧 시해당하였다. 후에 石敬瑭이 契丹을 끌어들여 반란을 일으켜 공격하자 玄武樓에 올라가 불을 지르고 자살했으며 이와 함께 後唐도 멸망하였다.
역주12 弘昭贇皆及禍以死 : 潞王 李從珂가 반란을 일으켰을 때 朱弘昭는 우물에 뛰어들어 자살하였으며, 馮贇은 京城巡檢 安從進에게 살해당하였다. 이종가가 즉위한 후 亡國의 죄가 있다하여 그 시신을 길가에 늘어놓고 官爵을 삭탈하였다.
역주13 天雄軍亂 : 당시 劉皇后의 族屬인 劉延皓가 절도사가 되어 세력을 믿고 남의 재산을 빼앗고 연희를 즐기면서 三軍의 급여를 제때에 공급하지 않아 병사들의 원한이 쌓여가고 있었다. 이때 河東節度使 石敬瑭이 반란을 일으키자, 여기에 호응하려는 목적으로 천웅군 捧聖都虞候 張令昭가 병란을 일으켜 유연호를 공격하니 유연호가 도주하였다.
역주14 掎(기)角 : 앞뒤에서 호응하여 적을 협공하는 것을 가리킨다. ≪春秋左氏傳≫ 襄公 14년에 “비유하자면 사슴을 잡을 때 晉나라 군대는 뿔을 잡고, 여러 戎族은 다리를 잡고서 진나라 군대와 함께 사슴을 쓰러뜨리는 것과 같다.[譬如捕鹿 晉人角之 諸戎掎之 與晉踣之]”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15 晉高祖入立……道出于魏 : ≪舊五代史≫ 卷94 〈祕瓊列傳〉에 따르면, 이때 後晉 高祖가 즉위하고 安重榮을 보내 董溫其를 대신하게 하고 비경은 齊州防御使로 내보냈는데, 안중영의 군대가 매우 많아 비경이 이를 거절하지 못하고 마침내 奇貨들을 다 싸 짊어지고 鄴中을 거쳐 부임했다고 한다.
역주16 夏津 : 山東省 德州에 속한 縣으로 河北省과의 경계 지점에 있다.
역주17 黎陽 : 河南省 濬縣의 동북쪽에 있는 縣이다.
역주18 滑衛 : 滑州와 衛州로, 활주는 河南省에 속해 있으며 지금의 滑縣이고 위주는 지금의 河南省 新鄕․淇縣․滑縣 등에 걸쳐 있던 지역이다.
역주19 胡梁 : 胡良이라고도 하며 河南省 滑縣 동북쪽에 있다.
역주20 屬武德司 : 무덕사는 禁宮을 宿衛하고 정보를 탐지하는 활동을 하던 황제의 친위기구이다. ≪舊五代史≫ 卷76 〈高祖紀〉에서는 ‘屬’이 ‘收付’로 표기되어 있음을 볼 때, 여기에서 ‘屬’은 ‘내어 맡긴다’, 즉 체포하여 구금해 두었다는 의미일 것이다.
역주21 鐵券 : 철로 만든 牌에 붉은 글씨로 誓辭를 적어 공신에게 주어 그 자손이 죄를 지어도 죄를 면하도록 한 일종의 증서를 가리킨다.
역주22 宴見 : 황제가 편안하고 한가할 때 신하들을 召見하는 것이다.
역주23 北朝皇帝 : 당시 契丹의 황제인 遼 太宗 耶律德光을 가리킨다. 後晉 高祖 石敬瑭은 거란의 지원을 받아 後唐을 무너뜨리고 후진을 건국하였으므로, 항상 거란의 야율덕광을 父皇帝로 칭하고 자신은 兒皇帝라고 칭하였다.
역주24 魏博 : 魏州를 중심으로 한 일대 지역을 가리키는 말이다. 唐나라에서 魏博節度使를 두고 그 治所를 魏州로 하였으며, 魏州와 博州와 德州와 滄州와 瀛州를 관할 하에 두었다. 唐 代宗 때에 天雄軍으로 改號하였다가 田悦이 이곳에서 반란을 일으킨 이후 명칭을 삭제하고 단지 魏博이라고만 불렀다. 昭宗 때에 다시 天雄軍이라 부르다가 五代 後唐 때에 興唐府라 하였고 後晉 때에는 廣晉府라고 부르다가 다시 천웅군이라고 불렀다.
역주25 初祕瓊殺董溫其 : ≪五代史記纂誤補≫ 卷4에 이 부분에 대해 “삼가 살펴보건대 위의 단락에서는 동온기가 거란의 포로가 되자 비경이 동온기의 가족을 모두 살해하였다고 했는데, 여기에서는 동온기를 죽였다고 했으니, 오류인 듯하다.[謹按上云溫其爲契丹所虜 瓊乃悉殺溫其家族 此乃云殺董溫其 恐誤]”라고 하였다.
역주26 光遠亦不能免也 : 양광원이 후에 靑州에서 반란을 일으켜 契丹에 투항했는데, 청주가 後晉의 군대에 포위되자 그 아들 承勳과 承信 등이 양광원을 겁박하여 후진에 항복하여 양광원이 죽임을 당하였다.(≪宋史≫ 卷252 〈楊承信列傳〉)
역주27 張從賓反河陽 : 張從賓은 처음에는 後唐 莊宗을 섬겨 小校로 출발하여 전공을 세워 檢校太傅에까지 이르렀다. 後晉 高祖 石敬瑭이 즉위하고 范延光이 반란을 일으켰을 때 장종빈을 副部署使로 삼아 楊光遠을 따라 범연광을 토벌하게 하였다. 그러나 범연광의 설득에 넘어간 장종빈이 오히려 河陽에서 반란을 일으켜 범연광에게 호응하여 전투를 벌여 석경당의 아들 石重信과 石重乂를 살해하고 汜水關을 점거하였으나 杜重威 등이 이끄는 군대에 대패하여 황하에 투신하여 죽었다.(≪舊五代史≫ 卷97 〈張從賓列傳〉)
역주28 後以坐贓誅 : ≪舊五代史≫ 卷94 〈李彥珣列傳〉에는 “그 후 마지막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後不知其所終也]”로 되어 있다.
역주29 人性之愼於習也 : 이 문장에서 ‘愼’은 ‘順’의 의미로 보았다. 이와 같은 용례는 ≪墨子≫ 〈天志 中〉에 “지금 천하의 군자들이 진실로 聖王의 도를 遵行하여 백성들을 이롭게 하려는 마음이 있다면 인의의 근본을 궁구하고 하늘의 뜻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今天下之君子 中實將欲遵道利民 本察仁義之本 天之意不可不慎也]”라고 한 것 등이 있다.
역주30 性相近 習相遠 : ≪論語≫ 〈陽貨〉에 보인다.
역주31 晉出帝之絕其父 : ≪新五代史≫ 卷9 〈晉本紀〉의 내용에 의거하면, 後晉 出帝 石重貴의 부친은 본래 高祖 石敬塘의 형인 石敬儒이다. 그런데 석경유가 일찍 사망하여 석경당이 석중귀를 아들로 삼았다. 고조 석경당이 붕어할 때 석경당에게는 어린 친아들인 石重睿가 있었으나, 나라가 다사다난하므로 大臣들에 의해 석중귀가 추대되어 황제가 되었다. 이후 석중귀는 本生親과의 父子관계를 絶緣하고 오히려 신하로 대우하여 석경유를 宋王에 追封하였다. 이에 대해 구양수는 본 史論을 포함해 〈晉本紀〉와 〈晉家人傳〉 등의 사평에서 석중귀의 황위 계승이 올바르지 않고 어버이에 대한 도리를 저버렸다고 비판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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