安重榮은 小字鐵胡니 朔州人也라 祖從義는 利州刺史요 父全은 勝州刺史振武馬步軍都指揮使라
重榮有力하고 善騎射하야 爲振武巡邊指揮使라 晉高祖起太原하야 使張穎陰招重榮한대 其母與兄皆以爲不可어늘 而重榮業以許穎이라
母兄謀共殺穎以止之하니 重榮曰 未可라 吾當爲母卜之호리라하고 乃立一箭하야 百步而射之에 曰 石公爲天子則中이라하야늘 一發輒中이라 又立一箭而射之에 曰 吾爲節度使則中이라하야늘 一發又中하니 其母兄乃許라
重榮以巡邊千騎로 叛入太原이라 高祖卽位에 拜重榮成德軍節度使하다
重榮雖武夫나 而曉吏事하니 其下不能欺라 有夫婦訟其子不孝者어늘 重榮拔劍授其父하야 使自殺之라
其父泣曰 不忍也라하야늘 其母從傍詬罵하고 奪其劍而逐之라 問之하니 乃繼母也라 重榮叱其母出하고 從後射殺之하다
重榮起於軍卒
하야 暴至富貴
하야 而見
晉高祖皆以藩侯得國
하고 嘗謂人曰 天子寧有種耶
아 兵強馬壯者爲之爾
라하다
雖懷異志나 而未有以發也러니 是時에 高祖與契丹으로 約爲父子하야 契丹驕甚이로대 高祖奉之愈謹하니 重榮憤然하야 以謂 詘中國以尊夷狄하고 困已敝之民하야 而充無厭之欲하니 此晉萬世恥也라하고 數以此非誚高祖라
契丹使者往來에 過鎭州어늘 重榮箕踞慢罵하야 不爲之禮하고 或執殺之하다
是時
에 役屬契丹
하야 苦其暴虐
하니 重榮誘之入塞
라
契丹數遣使
하야 責高祖
하고 하니 高祖對使者鞠躬俯首
하야 受責愈謹
하고 多爲好辭以自解
로대 而姑息重榮
하야 不能詰
이라
乃遣供奉官張澄하야 以兵二千搜索幷鎭忻代山谷中吐渾하야 悉驅出塞어늘 吐渾去而復來하니 重榮卒納之라 因招集亡命하고 課民種稗하야 食馬萬匹하야 所爲益驕라
因怒殺指揮使賈章하야 誣之以反하고 章女尙幼하야 欲捨之어늘
女曰 吾家三十口皆死於兵하고 存者特吾與父爾라 今父死어늘 吾何忍獨生이리오 願就死라하야늘 遂殺之라 鎭人於是에 高賈女之烈而知重榮之必敗也라
重榮旣僭侈
에 以爲
不足貴
하야 刻玉爲魚佩之
하고 이라
六年夏
에 契丹使者拽剌過鎭
한대 重榮侵辱之
라 拽剌言不遜
하니 重榮怒
하야 執拽剌
하고 以輕騎掠幽州南境之民
하야 라
乃上表曰 臣昨
에 言契丹殘虐
하야 掠取生口羊馬
하고 自今年二月已後
로 號令諸蕃
하야 點閱強壯
하고 辦具軍裝
하야 期以上秋南向
이라 諸蕃部誠恐上天不祐
하야 敗滅家族
하야 願先自歸
하니 其諸部勝兵
이 衆可十萬
이라 이 皆遣人送契丹所授告身職牒旗幟來歸款
하야 皆號泣告勞
하야 願治兵甲以報怨
이라 又據朔州節度副使趙崇
이 殺節度使劉山
하야 以城來降
이라 竊以諸蕃不招呼而自至
하고 朔州不攻伐而自歸
하니 雖繫人情
이나 盡由天意
라 又念陷蕃諸將等
은 本自勳勞
하야 久居富貴
라가 喪身虜塞
하야 酷虐不勝
하야 企足朝廷
하니 思歸可諒
이라 苟聞傳檄
이면 必盡倒戈
리라하니 其表數千言
이라
又爲書以遺朝廷大臣四方藩鎭하되 皆以契丹可取爲言이라
高祖患之하야 爲之幸鄴하야 報重榮曰 前世與虜和親은 皆所以爲天下計라 今吾以天下臣之에 爾以一鎭抗之하니 大小不等이라 無自辱焉이어다하다 重榮謂晉無如我何하야 反意乃決하다
重榮雖以契丹爲言이나 反陰遣人與幽州節度使劉晞相結이라 契丹亦利晉多事하고 幸重榮之亂하야 期兩敝之하야 欲因以窺中國이라 故不加怒於重榮이라
重榮將反也
에 其母又以爲不可
어늘 重榮曰 請爲母卜之
라하고 指其堂下
하야 仰射之
에 曰 吾有天下則中之
라하야늘 一發而中
하니 其母乃許
하다
饒陽令劉巖獻水鳥五色하니 重榮曰 此鳳也라하고 畜之後潭하다 又使人爲大鐵鞭以獻하야 誑其民曰 鞭有神하니 指人에 人輒死라하고 號鐵鞭郎君이라하야 出則以爲前驅하다
鎭之城門抱關鐵胡人이 無故頭自落하니 鐵胡는 重榮小字라 雖甚惡之나 然不悟也라
是歲에 鎭州大旱蝗하니 重榮聚饑民數萬하야 驅以嚮鄴하고 聲言入覲이라 行至宗城破家堤에 高祖遣杜重威逆之라
兵已交에 其將趙彥之與重榮有隙하야 臨陣에 卷旗以奔晉軍이라 其鎧甲鞍轡皆裝以銀하니 晉軍不知其來降하고 爭殺而分之라
重榮聞彥之降晉하고 大懼하야 退入于輜重中하니 其兵二萬皆潰去라
是冬大寒하야 潰兵飢凍及見殺하야 無孑遺하고 重榮獨與十餘騎奔還하야 以牛馬革爲甲하야 驅州人하야 守城以待라
重威兵至城下하니 重榮裨將이 自城東水碾門으로 引官軍以入하야 殺守城二萬餘人이라
重榮以吐渾數百騎守
이어늘 重威使人擒之
하야 하야 命漆其首
하야 送于契丹
하고 改成德軍爲順德
하고 鎭州曰恒州
하고 常山曰恒山云
이라
종횡으로 절도에 맞게 연주하듯 서술한 것이 하나하나 과녁을 명중하는 듯하다.
안중영安重榮은 어릴 적 이름은 철호鐵胡이니 삭주朔州 사람이다. 조부 안종의安從義는 이주자사利州刺史를 지냈고 부친 안전安全은 승주자사勝州刺史 진무마보군도지휘사振武馬步軍都指揮使를 지냈다.
안중영은 용력이 있고 말타기와 활쏘기를 잘하여 진무순변지휘사振武巡邊指揮使가 되었다. 진晉 고조高祖가 태원太原에서 기병起兵하여 장영張穎으로 하여금 몰래 안중영을 불러오게 하였는데 안중영의 모친과 형이 모두 불가하다고 하였으나 안중영은 벌써 장영에게 몸을 맡겼다.
모친과 형이 함께 장영을 살해하여 저지시키려 하니 안중영이 말하기를 “그래서는 안 됩니다. 내가 마땅히 어머니를 위해 점을 쳐보겠습니다.”라고 하고는 화살 하나를 세워두고 백보百步 거리에서 쏘면서 말하기를 “석공石公이 천자가 된다면 명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첫 발에 곧 명중하였다. 또 화살 하나를 세워두고 쏘면서 말하기를 “내가 절도사가 된다면 명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첫 발에 또 명중하니, 모친과 형이 결국 허락하였다.
안중영이 순변군巡邊軍 1천 기병騎兵으로 반란을 일으켜 태원으로 들어갔다. 고조가 즉위하자 안중영을 성덕군절도사成德軍節度使에 배수하였다.
안중영安重榮은 비록 무부武夫였으나 이무吏務를 잘 알았으므로 아랫사람이 그를 속일 수 없었다. 어떤 부부夫婦가 불효不孝한 아들을 송사訟事하였는데 안중영이 검을 뽑아 그 아비에게 주면서 스스로 자식을 죽이게 하였다.
그 아비가 울면서 말하기를 “차마 할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는데, 그 어미가 곁에서 욕하고 꾸짖고는 그 검을 빼앗아 아들을 죽이려고 쫓아갔다. 물어보니 바로 계모繼母였다. 안중영이 그 어미를 꾸짖어 나가게 하고는 뒤에서 화살을 쏘아 죽였다.
안중영安重榮은 군졸軍卒에서 발신發身하여 갑자기 부귀富貴해져서 당唐 폐제廢帝와 진晉 고조高祖가 모두 번진藩鎭의 제후諸侯 출신으로 나라를 얻은 것을 보고는 일찍이 어떤 이에게 이르기를 “천자天子가 어찌 종자種子가 있겠는가. 병사가 강하고 말이 튼튼한 자가 천자가 되는 것이다.”라고 하였다.
안중영이 비록 다른 뜻을 품기는 했어도 겉으로 드러낸 적은 없었는데, 이때에 고조가 거란契丹과 부자父子의 맹약을 맺어 거란이 매우 교만하게 구는데도 고조가 더욱 근실하게 받드니 안중영이 분개하여 말하기를 “중국을 굽혀 이적夷狄을 떠받들고 이미 피폐해진 백성을 괴롭혀 만족할 줄 모르는 오랑캐의 욕심을 채워주니, 이는 진晉나라의 만세萬世의 수치이다.”라고 하고는 자주 이 일로 고조를 비난하였다.
거란의 사자가 왕래할 때 진주鎭州를 경유하였는데, 안중영은 두 다리를 뻗고 앉아 업신여기고 꾸짖으면서 예우禮遇하지 않았고 혹 잡아서 죽이기도 하였다.
이때에 토혼吐渾의 백씨白氏가 거란契丹에 복속服屬되어 거란의 학대에 시달리니, 안중영이 이들을 꾀어 변경 안으로 들였다.
그러자 거란이 자주 사자를 보내 고조를 책망하고 아울러 피살된 사자를 찾으니, 고조가 거란의 사자에게 몸을 굽히고 머리를 조아리며 책망을 들을수록 더욱 공손히 대하고 좋은 말을 많이 하여 스스로 해명하였다. 그러나 안중영은 우선 그대로 두고서 꾸짖지 못했다.
마침내 공봉관供奉官 장징張澄을 파견하여 2천의 병사로 병주幷州․진주鎭州․흔주忻州․대주代州의 산골짜기에 있는 토혼을 수색하여 모두 변경 밖으로 쫓아냈는데, 토혼이 떠났다가 다시 오니 안중영이 마침내 이들을 받아들였다. 이어서 망명인亡命人들을 불러 모으고 백성들에게 피를 심게 독책督責하여 1만 필의 말을 먹이면서 하는 짓이 더욱 교만해졌다.
안중영이 노여움을 참지 못해 지휘사指揮使 가장賈章을 살해하고서 반란했다고 무고誣告하였는데, 가장의 딸은 아직 어려 그냥 내버려두려 하였다.
그 딸이 말하기를 “우리 집 서른 명 식구가 모두 병란兵亂에 죽고 살아남은 이는 나와 부친뿐이다. 지금 부친께서 돌아가셨는데 내 어찌 차마 홀로 살겠는가. 죽기를 원하노라.”라고 하자 마침내 살해하였다. 진주鎭州 사람들이 이에 가장의 딸의 정렬貞烈을 높이 여기고 안중영이 반드시 패할 것을 알았다.
안중영安重榮이 이미 분수에 넘치게 사치하면서 금어대金魚袋는 만족할 만큼 귀하지 못하다고 여겨 옥玉을 깎아 물고기 모양으로 만들어 찼다. 그리고 두 적처嫡妻를 맞아들였는데 고조高祖가 그대로 인정하여 모두 봉작封爵을 더해주었다.
천복天福 6년(941) 여름에 거란契丹의 사자 예랄拽剌이 진주鎭州를 지나게 되었는데 안중영이 업신여기며 욕을 보였다. 예랄의 말이 공손하지 않자 안중영이 노하여 예랄을 잡아두고 경기병輕騎兵으로 유주幽州 남쪽 경계의 백성을 약탈하고서 박야博野에 머물렀다.
그리고서 표문表文을 올려 말하기를 “신은 앞서 숙토혼熟吐渾의 백승복白承福과 혁련공덕赫連功德 등이 본족本族 3만여 장帳을 거느리고 응주應州에서 도망쳐 온 사실을 보고받았고, 또 생토혼生吐渾의 혼渾과 계필契苾과 양돌궐兩突厥의 삼부三部의 남북장南北將인 사타沙陀와 안경安慶과 구부九府 등이 각기 그 족속과 우양牛羊과 수레와 천막과 갑옷과 말을 거느리고 일곱 여덟 길을 통해 도망쳐왔는데, 그들이 모두 말하기를 ‘거란이 포학하여 노예와 양마羊馬를 약탈해가고 금년 2월 이후로 여러 번부蕃部에 명령을 내려 강건한 병사들을 점열點閱하고 무장武裝을 갖추어서 올 가을 첫 달에 남쪽으로 향하기로 약속을 정했습니다. 여러 번부에서는 하늘이 돌보지 않아 가족家族이 패멸敗滅할까 진실로 두려워하여 먼저 스스로 귀부歸附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는데 그들 부족의 정병精兵이 십만十萬의 무리나 된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또 황하黃河 연안의 당항黨項과 산전山前과 산후山後의 일리逸利와 월리越利 등의 여러 부족의 수령이 모두 사람을 보내 거란에서 받은 고신告身과 직첩職牒과 기치旗幟를 보내면서 투항의 뜻을 표시하고 모두 울부짖으며 자신들의 고통을 고하면서 병갑兵甲을 손질하여 원한을 갚기를 원하고 있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또 삭주절도부사朔州節度副使 조숭趙崇이 절도사節度使 유산劉山을 살해하고서 성을 가지고 와서 항복하려 한다는 사실을 보고받았습니다. 삼가 생각건대 여러 번부가 부르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오고 삭주가 공격하여 정벌하지 않았는데도 스스로 귀부하니, 비록 인정人情에 관련하여 일어난 일이나 모든 것이 하늘의 뜻에 말미암은 것입니다. 또 생각건대 거란에 함락된 지역의 장수들은 본래 스스로 공훈功勳을 세워 오랫동안 부귀富貴를 누리다가 오랑캐의 경계에 몸이 떨어져 혹독한 학대를 이기지 못하여 우리 조정을 향해 발돋움을 하고 바라보고 있으니 그들의 귀부하려는 마음은 믿을 수 있습니다. 만약 우리가 격문을 띄웠다는 소식을 듣는다면 반드시 모두 창을 거꾸로 잡아 쥘 것입니다.”라고 하니, 그 표문이 수천언數千言이었다.
또 서신을 적어 조정朝廷의 대신大臣과 사방四方의 번진藩鎭에 보내면서 모두 거란을 취할 만하다고 말하였다.
고조가 근심하여 이 때문에 업鄴으로 거둥하여 안중영에게 답하기를 “전세前世에 오랑캐와 화친한 것은 모두 천하를 위한 계책이었다. 지금 나는 천하를 신하로 삼고 있고 너는 일개 진주鎭州로 대항하고 있으니 크고 작음이 같지 않다. 스스로 욕辱을 취하지 말지어다.”라고 하였다. 안중영은 진晉나라가 자신을 어찌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마침내 반란하려는 뜻을 결정하였다.
안중영安重榮이 비록 거란契丹을 이유로 들었으나 뒤로는 몰래 사람을 보내 유주절도사幽州節度使 유희劉晞와 서로 결탁하였다. 거란 또한 진晉나라가 다사다난해지는 것을 이롭게 여기고 안중영의 반란을 요행으로 여겨 진나라와 안중영 둘 다 피폐해지기를 기다려 그 틈에 중국을 노리려 하였다. 그러므로 안중영에게 분노를 나타내지 않았다.
안중영이 장차 반란하려 할 때 그 모친이 또 불가하다고 하자, 안중영이 말하기를 “어머니를 위해 점을 쳐보고자 합니다.”라고 하고 당堂 아래의 번간幡竿의 용구龍口를 가리키며 위를 향해 쏘면서 말하기를 “내가 천하를 소유하게 된다면 명중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는데 첫 발에 명중하니 그 모친이 결국 허락하였다.
요양령饒陽令 유암劉巖이 오색五色의 물새를 바치니 안중영이 말하기를 “이것은 봉새이다.”라고 하고 뒤뜰의 못에서 길렀다. 또 사람을 시켜 큰 철편鐵鞭을 만들어 바치게 하고서 백성들을 속여 말하기를 “채찍에 신이 깃들어 있으니 사람을 가리키면 사람이 곧 죽는다.”라고 하고는 철편낭군鐵鞭郎君이라 부르면서 출정할 때면 전구前驅로 삼았다.
진주鎭州 성문 앞에 세워둔 호인胡人 철상鐵像이 까닭 없이 머리가 저절로 떨어졌는데, 철호鐵胡는 안중영의 어릴 적 이름이었으므로 이 일을 매우 싫어하였으나 그 의미를 깨닫지는 못했다.
그해 겨울에 안종진安從進이 양양襄陽에서 반란을 일으켰는데 안중영이 듣고서 마침내 거병擧兵하였다.
이해에 진주鎭州에 큰 가뭄과 황충해蝗蟲害가 드니 안중영安重榮이 굶주린 백성 수만 명을 모아 몰아서 업鄴으로 향하게 하고 입근入覲한다고 떠들어댔다. 행렬이 종성宗城의 파가제破家堤에 이르렀을 때 고조高祖가 두중위杜重威를 보내 맞이해 싸우게 하였다.
병사들이 이미 교전한 다음 안중영의 장수 조언지趙彥之가 안중영과 틈이 생겨 전투에 임했을 때 깃발을 접고 진晉나라 군대로 달아났다. 그 갑옷과 안장과 고삐가 모두 은銀장식이었는데, 진나라 군대가 투항하러 오는 것인 줄을 알지 못하고 다투어 달려들어 죽이고서 나누어가졌다.
안중영이 조언지가 진나라에 투항했다는 사실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퇴각하여 치중輜重 가운데로 들어가니 그 병사 2만이 모두 흩어져 달아났다.
이해 겨울이 몹시 추워서 흩어진 병사들이 굶주림과 추위로 죽거나 진나라 군대에 살해되어 살아남은 자가 없었고, 안중영은 홀로 10여 기병騎兵과 함께 도망쳐 돌아와 소와 말의 가죽으로 갑옷을 해 입고 진주 사람들을 몰아 성을 지키며 기다렸다.
두중위의 병사가 성 아래에 이르니 안중영의 비장裨將이 성 동쪽의 수년문水碾門으로 관군官軍을 끌어 들여 수비병 2만여 명을 죽였다.
안중영이 토혼吐渾의 수백 기병騎兵으로 아성牙城을 지켰는데, 두중위가 사람을 시켜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바치니, 고조가 누각에 올라 머리를 받고서 명하여 그 머리에 옻칠을 하여 거란으로 보내고 성덕군成德軍을 순덕順德으로, 진주鎭州를 항주恒州로, 상산常山을 항산恒山으로 개명改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