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6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傳曰
이라하니 善乎
라 管生之能言也
여
禮義는 治人之大法이요 廉恥는 立身之大節이니 蓋不廉則無所不取요 不恥則無所不爲라
人而如此면 則禍亂敗亡이 亦無所不至어든 況爲大臣而無所不取하고 無所不爲면 則天下其有不亂이며 國家其有不亡者乎아
予讀馮道
하야 見其自述以爲榮
하니 其可謂無廉恥者矣
라 則天下國家可從而知也
로다
而怪士之被服儒者가 以學古自名하야 而享人之祿하며 任人之國者多矣나 然使忠義之節은 獨出於武夫戰卒하니
豈於儒者에 果無其人哉아 豈非高節之士가 惡時之亂하야 薄其世而不肯出歟아 抑君天下者가 不足顧而莫能致之歟아
予嘗得五代時小說一篇에 載王凝妻李氏事하니 以一婦人으로도 猶能如此하니 則知世固嘗有其人而不得見也라
凝家靑齊之間하야 爲虢州司戶參軍이라가 以疾卒于官하니 凝家素貧하고 一子尙幼라
李氏携其子하고 負其遺骸以歸할새 東過開封하야 止旅舍러니 旅舍主人이 見其婦人獨携一子而疑之하야 不許其宿한대 李氏顧天已暮하야 不肯去어늘 主人牽其臂而出之하니
李氏仰天長慟曰 我爲婦人
이어늘 不能守節
하야 而此手爲人執耶
아 不可以一手幷汚吾身
이라하고 卽引斧自斷其臂
하니 路人見者
가 環聚而嗟之
하야 하고 或爲之泣下
라
開封尹聞之하고 白其事于朝하니 官爲賜藥封瘡하며 厚卹李氏하고 而笞其主人者하다
嗚呼라 士不自愛其身而忍恥以偸生者가 聞李氏之風이면 宜少知愧哉인저
馮道
는 字可道
니 瀛州景城人也
라 事
하야 爲參軍
이러니 守光敗
에 去事宦者張承業
이라
承業監河東軍할새 以爲巡官하고 以其文學으로 薦之晉王하야 爲河東節度掌書記하다 莊宗卽位에 拜戶部侍郎하고 充翰林學士하다
道爲人
이 能自刻苦爲儉約
이라 當晉與梁夾河而軍
하야 道居軍中
하야 爲一茅庵
하야 不設牀席
하고 臥一束芻而已
요 하야 意恬如也
라
諸將有掠得人之美女者以遺道어늘 道不能却하야 置之別室하고 訪其主而還之하다
其解學士하여 居父喪于景城할새 遇歲饑이어늘 悉出所有하야 以賙鄕里하고 而退耕于野하고 躬自負薪이라
有荒其田不耕者와 與力不能耕者어든 道夜往하야 潛爲之耕하니 其人後來愧謝어늘 道殊不以爲德하다
勸道少留以待
하니 道曰 吾奉詔赴闕
하니 豈可自留
아하고 乃疾趨至京師
라
莊宗遇弑하고 明宗卽位에 雅知道所爲하야 問安重誨曰 先帝時馮道何在오하니 重誨曰 爲學士也라하야늘
明宗曰 吾素知之니 此眞吾宰相也라하고 拜道端明殿學士하고 遷兵部侍郎하고 歲餘에 拜中書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之間
에 歲屢豐熟
하야 中國無事
어늘 道嘗戒明宗曰 臣爲河東掌書記時
에 奉使中山
이라가 過
에 懼馬蹶失
하야 不敢怠於銜轡
러니 及至平地
하야 謂無足慮
라가 遽跌而傷
이라 凡蹈危者
는 慮深而獲全
하고 居安者
는 患生於所忽
하나니 此人情之常也
라하니
明宗問曰 天下雖豐
이나 百姓濟否
아라하야늘 道曰 穀貴餓農
하고 穀賤傷農
이라하고 因誦文士
하니 其言近而易曉
라 明宗顧左右
하야 錄其詩
하야 常以自誦
하다
水運軍將이 於臨河縣에 得一玉杯한대 有文曰傳國寶萬歲杯라 明宗甚愛之하야 以示道하니 道曰 此前世有形之寶爾라 王者는 固有無形之寶也라하야늘
明宗問之
하니 道曰 仁義者
는 帝王之寶也
라 故曰
이라하다
明宗武君이라 不曉其言이어늘 道已去에 召侍臣하야 講說其義하고 嘉納之하다
에 明宗崩
하고 相愍帝
에 이라 愍帝出奔衛州
어늘 道率百官
하야 迎潞王以入
하니 是爲廢帝
라
遂相之하다 廢帝卽位時에 愍帝猶在衛州어늘 後三日에 愍帝始遇弑崩이라 已而오 廢帝出道爲同州節度使하고 踰年에 拜司空하다
에 道又事晉
하니 晉高祖拜道
司空同中書門下平章事
하고 加司徒
하고 兼侍中
하고 封魯國公
하다
高祖崩에 道相出帝하니 加太尉하고 封燕國公하고 罷爲匡國軍節度使하고 徙鎭威勝하다
에 道又事契丹
하야 朝耶律德光於京師
하니 德光責道事晉無狀
이어늘 道不能對
라
又問曰 何以來朝오하니 對曰 無城無兵이어니 安敢不來오라하다
德光誚之曰 爾是何等老子오하야늘 對曰 無才無德癡頑老子라하니 德光喜하야 以道爲太傅하다
德光北歸
에 從至常山
한대 하니 乃歸漢
하야 以太師奉朝請
하다
道少能矯行
하야 以取稱於世
러니 及爲大臣
하야 尤務持重以鎭物
하야 事四姓十君
하야 益以
自處
라 然當世之士
는 無賢愚
히 皆仰道爲元老
하야 而喜爲之稱譽
라
耶律德光嘗問道曰 天下百姓을 如何救得고하야늘 道爲俳語以對曰 此時는 佛出이라도 救不得이오 惟皇帝라야 救得이라하니 人皆以謂契丹不夷滅中國之人者는 賴道一言之善也라
周兵反하야 犯京師어늘 隱帝已崩이라 太祖謂漢大臣必行推戴러니 及見道에 道殊無意라
太祖素拜道라 因不得已拜之하니 道受之如平時라 太祖意少沮하야 知漢未可代하야 遂陽立湘陰公贇爲漢嗣하야 遣道迎贇于徐州러니
贇未至에 太祖將兵하야 北至澶州하야 擁兵而反하야 遂代漢이라 議者謂道能沮太祖之謀而緩之하야 終不以晉漢之亡責道也라 然道視喪君亡國에 亦未嘗以屑意라
道方自號長樂老하고 著書數百言하야 陳己更事四姓과 及契丹所得階勳官爵以爲榮하야
自謂 孝於家
하고 忠於國
하며 爲子爲弟爲人臣爲
長爲夫爲父
하고 有子有孫
이라 時開一卷
하고 時飲一杯
하며 하야 老安於當代
하야 老而自樂
하니 何樂如之
리오하니 蓋其自述如此
라
馮道 道前事九君
에 未嘗諫諍
이러니 하니 世宗曰 劉旻少我
하야 謂我新立而國有大喪
하니 必不能出兵以戰
이오 且善用兵者
는 出其不意
하나니 吾當自將擊之
호리라하야늘 道乃切諫以爲不可
라
世宗曰 吾見唐太宗平定天下에 敵無大小히 皆親征이라하니 道曰 陛下未可比唐太宗이라하야늘
世宗曰 劉旻烏合之衆이 若遇我師면 如山壓卵이라하니 道曰 陛下作得山定否아하야늘 世宗怒하야 起去하야 卒自將擊旻하야 果敗旻于高平이라
世宗取淮南
하고 定三關
하니 威武之振
이 自高平始
라 어늘 葬畢而道卒
하니 年七十三
이라 諡曰文懿
요 追封瀛王
하다
道既卒에 時人皆相稱歎以謂與孔子同壽라하니 其喜爲之稱譽가 蓋如此라 道有子吉이라
전傳에 이르기를 “예의염치禮義廉恥는 국가의 사유四維이니 사유가 신장되지 못하면 국가가 이에 멸망한다.” 하였으니, 훌륭하도다! 관생管生이 말을 잘함이여.
예禮와 의義는 사람을 다스리는 대법大法이고 염廉과 치恥는 입신立身의 대절大節이니, 청렴하지 않으면 취하지 못하는 바가 없고 부끄러워하지 않으면 하지 못하는 바가 없다.
사람이고서 이와 같으면 화란禍亂과 패망敗亡이 또한 이르지 않는 바가 없는데, 하물며 대신大臣이 되어서 취하지 못하는 바가 없고 하지 못하는 바가 없으면, 천하가 혼란하지 않을 리 있겠으며 국가가 망하지 않을 리 있겠는가.
내가 풍도馮道의 〈장악로자서長樂老自序〉를 읽고서 풍도가 스스로 자신의 사적을 서술하여 영광이라 한 것을 보았으니, 염치廉恥가 없는 자라고 할 만하다. 따라서 당시의 천하와 국가가 어떠했는지를 이를 통해 알 만하다.
내가 오대五代에 있어서 절개를 온전히 한 선비 세 사람과 국사國事에 목숨을 바친 신하 열다섯 사람을 얻었다.
괴이한 점은, 선비로서 유자儒者의 옷을 입은 이들이 옛 법도를 배워서 스스로 이름이 알려져 남의 녹봉을 먹고 남의 나라를 맡은 사람이 많은데도, 충의忠義의 절개를 지닌 이는 유독 무부武夫와 병졸 출신에서 나오게 한 것이다.
어찌 유자儒者 중에 정말로 그런 사람이 없었겠는가. 아마도 높은 절개를 지닌 선비가 혼란한 시대를 싫어하여 당시 세상을 하찮게 여기고 나오려 하지 않은 것이 아니겠는가? 아니면 천하의 군주 된 자들이 돌아볼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여겨서 이들을 초치하지 못한 것인가?
공자孔子가 “열 가구쯤 사는 작은 마을에도 충신忠信한 사람은 반드시 있다.”라고 하였으니, 어찌 빈말이겠는가.
내가 일찍이 오대五代 때의 단편短篇 잡기雜記를 읽은 적이 있는데 왕응王凝의 아내 이씨李氏의 사적이 실려 있었다. 일개 부인婦人으로도 오히려 이와 같이 할 수 있었으니, 세상에는 진실로 항상 그런 사람이 있으나 보지 못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왕응이 청주靑州와 제주齊州 사이에 살면서 괵주虢州의 사호참군司戶參軍이 되었다가 병으로 임지에서 졸卒하니, 왕응의 집은 본디 가난하고 아들 하나는 아직 어렸다.
이씨李氏가 그 아들을 이끌고 남편의 유해를 지고서 고향으로 돌아가면서 동쪽으로 개봉開封을 지나가다가 여관에 머물게 되었는데, 여관 주인이 부인이 홀로 아들 하나만 이끌고 있는 것을 보고 의아하게 여겨 투숙을 허락하지 않았다. 이씨가 돌아보니 날이 이미 저물었기에 떠나려 하지 않자 여관 주인이 이씨의 팔을 잡고 끌어서 쫓아내었다.
이씨가 하늘을 우러러 보며 길게 통곡하고 말하기를 “나는 부인婦人인데 절개를 지키지 못하여 이 손이 남에게 잡혔단 말인가. 이 한 손 때문에 내 몸까지 더럽힐 수는 없다.”라고 하고, 즉시 도끼를 가져와서 스스로 자기 팔뚝을 끊으니, 길 가던 사람들이 보고서 둘러 모여 탄식하면서, 어떤 사람은 손가락을 퉁기며 격분하였고, 어떤 사람은 눈물을 흘렸다.
개봉부윤開封府尹이 듣고 그 사실을 조정에 보고하니, 관가에서 약을 하사하여 상처를 치료해주고 후하게 보살펴주었으며, 여관 주인에게는 태형笞刑을 가하였다.
오호라! 선비로서 스스로 자기 몸을 아끼지 않고 수치를 참아가며 구차하게 목숨을 연명하는 자가 이씨의 풍도風度를 듣는다면 응당 조금이나마 부끄러워할 줄 알 것이다.
〈풍도전馮道傳〉을 보건대 결국 일개 향원鄕愿 중에서도 가장 처세술이 깊고 교활한 자이다.
풍도馮道는 자字는 가도可道이니 영주瀛州 경성景城 사람이다. 유수광劉守光을 섬겨 참군參軍이 되었는데 유수광이 패하자 유수광을 떠나 환자宦者 장승업張承業을 섬겼다.
장승업이 하동河東을 감군監軍할 때 풍도를 순관巡官으로 삼고 그의 문학文學을 들어 진왕晉王에게 천거하여 하동절도장서기河東節度掌書記로 삼았다. 장종莊宗이 즉위하자 호부시랑戶部侍郎에 배수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에 충임充任하였다.
풍도는 사람됨이 스스로 힘써 고생을 견뎌내며 검약하였다. 진晉나라가 양梁나라와 황하黃河를 끼고 대치할 때 풍도가 군중軍中에 있으면서 띠풀로 초막을 짓고서 상석床席은 차리지 않고 꼴을 묶은 자리 위에 누울 뿐이었고, 받은 봉록俸祿을 가지고 자신이 부리는 사람과 한솥밥을 먹으면서 편안해하였다.
장수들이 남의 미녀美女를 빼앗아 풍도에게 주었는데 풍도는 물리치지 못하고 미녀를 별실別室에 두고서 주인을 찾아가 돌려주었다.
풍도가 학사學士에서 해직되어 경성景城에서 부친의 상을 치를 때 기근이 들자 자신의 소유를 다 내어 향리 사람들을 구휼하고 물러나 들판에서 농사를 짓고 몸소 땔감을 져 날랐다.
전답이 황폐해져 경작하지 못하는 자와 경작할 능력이 없는 자가 있으면 풍도가 밤에 가서 몰래 경작 해주니 사람들이 뒤에 와서 부끄러워하며 사례하였는데 풍도는 전혀 덕을 베풀었다고 여기지 않았다.
풍도馮道가 탈상脫喪하자 조정에서 다시 불러 한림학사翰林學士로 삼았는데, 길을 가다 변주汴州에 이르렀을 때 조재례趙在禮가 난을 일으켜 명종明宗이 위주魏州에서 병사를 이끌고 돌아와 경사京師를 범하는 상황을 만났다.
공순孔循이 풍도에게 잠시 머무르며 기다리라고 권하니, 풍도가 말하기를 “내가 조명詔命을 받들어 대궐로 급히 가는 터이니 어찌 제 마음대로 머무를 수 있겠는가.”라고 하고는 이에 빠르게 달려 경사에 이르렀다.
장종莊宗이 시해 당하고 명종이 즉위하자 평소 풍도의 행실을 알고 있던 터라 안중회安重誨에게 묻기를 “선제先帝 때 풍도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하니, 안중회가 말하기를 “학사學士로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그러자 명종이 말하기를 “내가 평소부터 알고 있으니 이 사람은 참으로 나의 재상宰相감이다.”라고 하고는 풍도를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에 배수하였다. 그리고 병부시랑兵部侍郎으로 승진하고 한해 남짓 지나 중서시랑中書侍郎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되었다.
천성天成과 장흥長興 연간年間에 해마다 자주 풍년이 들어 중국中國에 별 일이 없었는데 풍도가 일찍이 명종을 경계하기를 “신이 하동장서기河東掌書記로 있을 때에 사명使命을 받들고 중산中山으로 가다가 험준한 정형井陘을 지날 적에 말이 실족失足하여 넘어질까 두려워하여 감히 고삐와 재갈 당기는 일을 게을리 하지 못했습니다. 그러다 평지에 이르러 걱정할 만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다가 갑자기 넘어져 다쳤습니다. 무릇 위험한 곳을 지나는 자는 깊이 염려하여 안전을 확보하고 편안한 곳에 거하는 자는 소홀히 여기는 데서 환란이 생겨나는 법이니, 이는 인지상정人之常情입니다.”라고 하였다.
명종이 묻기를 “천하가 풍요롭기는 하나 백성들이 구제되겠는가?”라고 하자, 풍도가 말하기를 “곡물이 귀하면 농부는 굶주리고 곡식이 남아돌면 농부가 손해를 봅니다.”라고 하고서 문사文士 섭이중聶夷中의 〈전가시田家詩〉를 암송하였다. 그 말이 천근淺近하고 이해하기 쉬우므로 명종이 좌우를 돌아보며 그 시를 기록하게 하여 항상 스스로 암송하였다.
수운군장水運軍將이 임하현臨河縣에서 옥술잔 하나를 얻었는데 ‘전국보傳國寶 만세배萬歲杯’라는 명문銘文이 있었다. 명종明宗이 술잔을 몹시 아끼면서 풍도馮道에게 보여주니, 풍도가 말하기를 “이것은 전세前世의 유형有形의 보배일 뿐입니다. 왕자王者에게는 본디 무형無形의 보배가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명종이 무엇인지 묻자 풍도가 말하기를 “인의仁義는 제왕帝王의 보배입니다. 그러므로 ‘대보大寶를 위位라 하니, 무엇으로 위位를 지키는가? 인仁이다.’라고 하였습니다.”라고 하였다.
명종은 무인武人 출신의 임금이라 그 말뜻을 깨닫지 못하였는데, 풍도가 나가고 난 뒤에 시신侍臣을 불러 그 뜻을 강설講說하게 하고 가납嘉納하였다.
풍도가 명종의 재상으로 10여 년을 지냈을 때 명종이 붕어崩御하였고, 민제愍帝의 재상으로 있을 때 봉상鳳翔에서 노왕潞王이 반란을 일으키므로 민제가 위주衛州로 피신하였는데 풍도가 백관을 인솔하여 노왕을 맞이하여 들이니 이 사람이 폐제廢帝이다.
폐제가 마침내 풍도를 재상으로 삼았다. 폐제가 즉위하였을 때 민제가 아직 위주에 있었는데 3일 뒤에 민제가 비로소 시해 당해 붕어하였다. 얼마 뒤 폐제廢帝가 풍도를 외직으로 보내 동주절도사同州節度使로 삼고 한해를 넘겨 사공司空에 배수하였다.
진晉나라가 당唐나라를 멸망시키자 풍도가 다시 진나라를 섬기니 진晉 고조高祖가 풍도를 수사공守司空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에 배수하고 사도司徒를 더해주고 시중侍中을 겸직하게 하고 노국공魯國公에 봉하였다.
고조가 붕어하자 풍도가 출제出帝의 재상이 되니 태위太尉를 더해주고 연국공燕國公에 봉하고 파직하여 광국군절도사匡國軍節度使로 삼고 자리를 옮겨 위승군威勝軍을 진수鎭守하게 하였다.
거란契丹이 진나라를 멸망시키자 풍도가 다시 거란을 섬겨 경사京師에서 야율덕광耶律德光을 조현朝見하였다. 야율덕광이 풍도가 진나라를 섬긴 형편 없는 작태를 책망하자 풍도가 대답하지 못하였다.
야율덕광이 다시 묻기를 “어찌하여 조현하러 왔는가?”라고 하니, 풍도가 말하기를 “성도 없고 병사도 없는데 어찌 감히 오지 않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야율덕광이 꾸짖기를 “너는 어떤 노인인가?”라고 하자, 풍도가 대답하기를 “재능도 덕도 없는 어리석고 완악한 노인입니다.”라고 하니, 야율덕광이 기뻐하면서 풍도를 태부太傅로 삼았다.
야율덕광이 북쪽으로 돌아갈 때 풍도가 배종陪從하여 상산常山에 이르렀는데 한漢 고조高祖가 즉위하자 이에 한나라에 귀부歸附하여 태사太師와 봉조청奉朝請이 되었다.
주周나라가 한나라를 멸망시키자 풍도가 다시 주나라를 섬기니 주周 태조太祖가 풍도를 태사太師 겸중서령兼中書令에 배수하였다.
풍도馮道는 소싯적에 감정을 절제하고 외면의 행실을 잘 꾸며 당세 사람들의 칭찬을 받았는데 대신大臣이 되어서는 더욱 무게 있게 행동하여 사람들을 진정鎭定시켜 네 성姓의 열 임금을 섬기면서 구덕舊德으로 더욱 자처하였다. 그러나 당세의 선비들은 어질거나 어리석거나 할 것 없이 모두 풍도를 원로元老로 우러르며 좋아하여 칭양稱揚하였다.
야율덕광耶律德光이 일찍이 풍도에게 묻기를 “천하의 백성을 어떻게 구제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자, 풍도가 재담才談으로 대답하기를 “이런 시대는 부처가 나와도 구제할 수 없고, 오직 황제만이 구제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사람들이 모두 거란契丹이 중국 사람들을 죽여 없애지 않은 것은 풍도가 말 한마디를 잘한 덕분이라고 생각하였다.
주周나라 병사가 반란을 일으켜 경사京師를 침범하였는데, 은제隱帝가 이미 붕어崩御하였으므로 주周 태조太祖는 한漢나라의 대신大臣들이 반드시 자신을 황제로 추대하리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풍도를 만났을 때 풍도는 전혀 그럴 마음이 없었다.
태조는 평소 풍도에게 절을 올리던 관계였으므로 부득이 풍도에게 절을 올리니 풍도가 평소 때처럼 태조의 절을 받았다. 그러자 태조는 뜻이 조금 꺾여 한나라를 아직 대체할 수 없음을 알고서 마침내 형식적으로 상음공湘陰公 유빈劉贇을 한나라의 후사後嗣로 세워 풍도를 보내 서주徐州에서 유빈을 영접해 오게 하였다.
그런데 유빈이 당도하기 전에 태조가 병사를 이끌고 북쪽으로 전주澶州에 이르러 병사들을 거느리고 반란을 일으켜 마침내 한나라를 대체하였다. 의론하는 자들은 풍도가 태조의 계획을 저지하여 늦추었다고 생각하여 끝내 진晉나라와 한나라가 망한 책임을 풍도에게 돌리지 않았다. 그러나 풍도는 임금이 죽고 나라가 망하는 상황을 보면서도 개의한 적이 없었다.
이때를 당하여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 오랑캐들이 번갈아가며 침입하여 생민生民의 운명이 거꾸로 매달린 것보다 위급했다.
그런데 풍도는 바야흐로 장락노長樂老라고 자호自號하고 수백 자의 글을 지어서 자신이 번갈아가며 섬긴 사성四姓의 임금과 거란에서 받은 품계와 공훈과 관작을 서술하고서 영화롭게 여겨
스스로 말하기를 “집에서 효도하고 나라에 충성하였으며 자식과 아우와 신하와 스승과 지아비와 아비로 지내며 아들과 손자를 두었다. 때때로 한 권의 책을 펼쳐보고 때때로 한 잔의 술을 마시며 음식을 맛보고 소리를 분별하고 채색옷을 입으면서 당대에 편안히 늙어 늙어가면서 스스로 즐기니 이 같은 즐거움이 어디 있으랴.”라고 하니, 대개 그가 스스로 서술한 것이 이와 같았다.
풍도馮道가 앞서 아홉 임금을 섬기면서는 간쟁한 적이 없었다. 세종世宗이 막 즉위했을 때 유민劉旻이 상당上黨을 공격하니 세종이 말하기를 “유민이 나를 업신여겨, 나는 막 즉위하였고 나라는 대상大喪을 당하였으니 반드시 출병하여 싸울 수 없으리라고 생각하고 있다. 또 용병을 잘하는 자는 생각지 못한 틈을 엿보아 공격하는 법이니 내가 응당 직접 군사를 이끌고 공격하겠다.”라고 하자, 풍도가 이에 간절히 간쟁하여 불가하다고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내가 보건대 당唐 태종太宗이 천하를 평정할 적에 적의 세력이 크건 작건 모두 친정親征하였다.”라고 하니, 풍도가 말하기를 “폐하는 당 태종에 비길 수 없습니다.”라고 하였다.
세종이 말하기를 “유민의 오합지졸이 만약 나의 군대와 조우한다면 마치 산으로 계란을 누르는 격일 것이다.”라고 하니, 풍도가 말하기를 “폐하께서 산이 되실 수 있겠습니까?”라고 하자, 세종이 노하여 일어나 나가서 마침내 스스로 병사를 이끌고 유민을 공격하여 과연 고평高平에서 유민을 패퇴시켰다.
세종이 회남淮南을 취하고 삼관三關을 평정하였는데 위무威武가 떨쳐지기 시작한 것은 고평 전투에서부터였다. 세종이 유민을 공격할 때 풍도를 비루하게 여겨 종행從行시키지 않고 태조太祖의 산릉사山陵使로 삼았는데 장사葬事가 끝나자 풍도가 졸하니 향년 73세였다. 시호를 문의文懿라 하고 영왕瀛王으로 추봉追封하였다.
풍도가 졸하고 나서 당시 사람들이 모두 서로 칭송하고 탄식하면서 공자孔子와 같은 수壽를 누렸다고 하니, 사람들이 풍도를 좋아하여 칭양稱揚함이 대개 이와 같았다. 풍도는 아들 길吉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