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고전종합DB

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출력 공유하기

페이스북

트위터

카카오톡

URL 오류신고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嗚呼 世道衰하고 人倫壞하야 而親疏之理 反其常하야 干戈起於骨肉하고 異類合爲父子
五十年間 天下五代而實八姓하니 其三出於丐養이라
蓋其大者 取天下하고 其次 立功名하야 位將相하니 豈非因時之隙하야 以利合而相資者邪
自號하야하니 其所與 俱皆一時雄傑虣武之士 往往養以爲兒하야 號義兒軍이라
至其有天下하야 多用以成功業하고 及其亡也하야도 亦由焉이라
養子多矣로대 其可紀 九人이니 其一 是爲明宗이요 其次曰嗣昭嗣本嗣恩存信存孝存進存璋存賢이라 作義兒傳하노라
太祖出獵하야 至其家하야 見其林中鬱鬱有氣하고 甚異之하야 召其父問焉하니 父言家適生兒 太祖因遺以金帛而取之하야 命其弟克柔하야 養以爲子하다
初名進通이요 後更名嗣昭하다 嗣昭爲人短小而膽勇過人이라
한대 太祖嘗微戒之하니 遂終身不飮하다 太祖愛其謹厚하야 常從用兵하야 爲內衙指揮使하다
하니 遣嗣昭助珂하야 敗珙於하고 獲其將三人이라 梁軍救珙이어늘 嗣昭又敗之于하고 執其將一人하다
光化元年 澤州이어늘 梁遣丁會應罕之 嗣昭與會戰含山하야 執其將一人하고 斬首千級하야 遂取澤州하다
二年 晉遣李君慶하야 攻梁潞州한대 君慶爲梁所敗하니 太祖鴆殺君慶이어늘 嗣昭攻克之하다
三年 出山東하야 取梁洺州하니 梁太祖自將攻之하야하야 設伏於靑山口 嗣昭聞梁太祖自來하고 棄城走라가 前遇伏兵하야 因大敗하다
天復元年 梁破河中하야 執王珂하고 取晉絳慈隰하야 因大擧擊晉하야 圍太原이라 嗣昭日以精騎出擊梁兵이러니 會大雨 梁軍解去하다
晉汾州刺史李瑭 叛降梁軍이러니 梁軍已去일새 嗣昭復取汾州하야 斬瑭하야 遂出하야 取慈州하야 降其刺史唐禮하고 又取隰州하야 降其刺史張瓌하다
是歲 梁軍西犯京師하야 圍鳳翔하니 嗣昭乘間하야 攻梁晉絳하야 戰平陽하야 執梁將一人하고 進攻蒲縣하다
梁朱友寧氏叔琮 以兵十萬迎擊之하니 嗣昭等敗走 友寧追之하니 晉遣李存信하야 率兵迎嗣昭한대 存信又敗
梁軍遂圍太原하니 而慈隰汾州復入于梁이라 大恐하야 謀走雲州어늘 李存信等勸太祖奔于契丹이라
嗣昭力爭以爲不可하고 賴劉太妃亦言之어늘 乃止하다 嗣昭晝夜出奇兵하야 擊梁軍하니 梁軍解去 嗣昭復取汾慈隰하다
是時 鎭定皆已絶晉而附梁하니 晉外失大國之援하고 內亡諸州하야 仍歲之間 孤城被圍者再어늘 於此時 嗣昭力戰之功爲多하다
天祐三年 與周德威攻梁潞州하야 降丁會하니 以嗣昭爲昭義軍節度使하다 梁遣李思安하야 將兵十萬攻潞하야 築夾城以圍之 梁太祖嘗遣人招降嗣昭하니 嗣昭斬其使者하고 閉城拒守
逾年 莊宗始攻破夾城이라 嗣昭完緝兵民 撫養甚有恩意러라 梁晉戰 晉軍敗하고 周德威戰死
莊宗懼하야 欲收兵還하니 嗣昭曰 梁軍已勝하야 旦暮思歸어늘 吾若收軍이면 使彼休息이라 整而復出이면 何以當之리오 宜以精騎撓之하야 因其勞乏이면 可以勝也라하니 莊宗然之
是時 梁軍已登無石山이라 莊宗遣嗣昭하야 轉擊山北하고 而自以趨而呼曰 今日之戰 得山者勝이라하니 晉軍皆爭登山이라 梁軍遽下하야 陣於山西하니 晉軍從上急擊하야 大敗之 於是 晉城
周德威死 嗣昭幽州러니 居數月 以李紹宏代之 嗣昭將去 幽州人皆號哭閉關하야 遮留之어늘 嗣昭夜遁하야 乃得去하다
從莊宗擊契丹於한대 莊宗爲契丹圍之數十重이어늘 嗣昭以三百騎決圍하야 取莊宗以出하다
是時 晉遣閻寶하야 攻張文禮於鎭州한대 寶爲鎭人所敗어늘 乃以嗣昭代之하다 鎭兵出掠이어늘 嗣昭以奇兵擊之러니
鎭軍且盡 餘三人匿破垣中하니 嗣昭馳馬射之라가 反爲賊射中腦 嗣昭顧箙中矢盡하고 拔矢于腦하야 射殺一人하고 還營而卒하다
이라 少爲軍卒하야 善角觝
太祖擊黃巢于陳州라가 得之하야 賜以姓名하고 養爲子하다 後爲義兒軍副兵馬使하고 遷沁州刺史하다
先時 沁州當敵衝이라 徙其南百餘里하야 據險立柵而寓居러니 至存賢爲刺史하야 曰 徙城避敵 豈勇者所爲리오하고 乃復城故州하다
梁兵屢攻之어늘 存賢力自拒守하니 卒不能近하다 遷武州刺史山北團練使하고 又遷慈州하다
是時 友謙新叛梁歸晉한대 而河中食少하야 人心多
諜者因謂存賢曰 河中人欲殺子以歸梁이니 宜亟去하라하니 存賢曰 死王事 吾志也 復何恨哉리오하고 卒擊走梁兵하다
莊宗卽位 拜右武衛上將軍하다 莊宗亦好角觝하야 嘗與較而屢勝하야 頗亦自矜하야 因顧存賢曰 爾能勝我어든 與爾一鎭호리라하니 存賢搏而勝之하다
同光二年春 幽州病甚하니 莊宗置酒宮中하고 歎曰 吾創業故人 零落殆盡하고 其所存者 惟存審耳어늘 今又病篤하니 北方之事 誰可代之오하고
因顧存賢曰 無以易卿이니 角觝之勝 吾不食言호리라하고 卽日以爲盧龍軍節度使하다
是歲 卒于幽州하니 年六十五러라 贈太傅하다


03. 의아義兒전기傳記
아아! 세도世道가 쇠퇴하고 인륜人倫이 무너져 친소親疏의 이치가 그 떳떳함이 뒤집혀 골육骨肉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종족이 다른 사람들이 합하여 부자父子가 되었다.
개평開平에서 현덕顯德에 이르는 50년 사이, 천하에 오대五代의 왕조가 들어섰는데 기실 여덟 성이니 그 가운데 셋은 양자養子에서 나왔다.
크게 된 경우는 천하를 취하고 그 다음은 공명을 세워 장상將相의 지위에 올랐으니, 어찌 시대가 혼란한 틈을 타 이익으로 만나 서로 도움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나라는 스스로를 사타沙陀라 호칭하면서 대북代北에서 일어났으니, 당나라의 군주와 결교結交한 이들은 모두 당시 걸출하고 용맹스러운 무사들이었는지라 왕왕 그들을 양자로 삼아 의아군義兒軍이라 불렀다.
당나라가 천하를 소유함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힘을 써서 공업功業을 이룬 것이 많았고, 당나라가 망함에 미쳐서도 또한 그들로 인해 망하였다.
태조太祖의 양자가 많지만 기록할 만한 자는 아홉 사람이니, 그 첫째는 바로 명종明宗이고 그 다음은 이사소李嗣昭, 이사본李嗣本, 이사은李嗣恩, 이존신李存信, 이존효李存孝, 이존진李存進, 이존장李存璋, 이존현李存賢이다. 〈의아전義兒傳〉을 짓노라.
이사소李嗣昭는 본래 성씨는 한씨韓氏이니 분주汾州 대곡현大谷縣민가民家의 자제이다.
태조太祖가 사냥을 나가 그 집에 이르러 숲 속에 울흥蔚興한 기운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겨 그 아비를 불러 물으니, 아비가 집안에 마침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가 금과 비단을 주고서 아이를 데려와 아우인 이극유李克柔에게 명하여 양자養子로 키우게 하였다.
이사소의 초명初名진통進通이고 후에 사소嗣昭로 개명하였다. 이사소는 사람됨이 몸집은 왜소하였으나 담력과 용맹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애초에는 술을 즐겼는데 태조가 은근히 경계시키니 마침내 종신토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 태조가 그 근후勤厚함을 사랑하여 항상 종군從軍하게 하여 내아지휘사內衙指揮使로 삼았다.
섬주陝州왕공王珙이 그 형 왕가王珂하중河中에서 자리를 다투니, 태조가 이사소를 보내 왕가를 도와 의씨猗氏에서 왕공을 패퇴시키고 그 장수 세 사람을 사로잡았다. 나라 군대가 왕공을 구원하였는데 이사소가 또 호벽보胡壁堡에서 패퇴시키고 그 장수 한 사람을 잡았다.
광화光化 원년(898)에 택주澤州이한지李罕之노주潞州를 습격하여 양나라에 투항하니 양나라가 정회丁會를 보내 이한지에 호응하였다. 이사소가 그들과 함산含山에서 회전會戰하여 그 장수 한 사람을 잡고 삼천의 수급을 베고서 마침내 택주를 차지하였다.
광화 2년(899)에 나라에서 이군경李君慶을 보내 양나라의 노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군경이 양나라에 패하니 태조가 이군경에게 독주毒酒를 내려 죽였는데 이사소가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광화 3년(900)에 산동山東으로 나와 양나라의 명주洺州를 차지하니 태조太祖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면서 갈종주葛從周를 보내 청산구靑山口복병伏兵을 두었다. 이사소가 양 태조가 직접 왔다는 말을 듣고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앞에서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천복天復 원년(901)에 나라가 하중河中을 격파하여 왕가王珂를 잡고 진주晉州강주絳州자주慈州습주隰州를 취하고서 군대를 크게 일으켜 나라를 공격하여 태원太原을 포위하였다. 이사소가 날마다 정예 기병을 이끌고 나가서 양나라 병사를 공격하였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양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진나라의 분주자사汾州刺史 이당李瑭이 배반하여 양나라 군대에 투항했었는데, 양나라 군대가 떠나자 이사소가 다시 분주를 취하여 이당을 참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음지陰地로 나와 자주慈州를 취하고서 자사刺史 당례唐禮를 항복시키고 또 습주隰州를 취하고서 자사刺史 장괴張瓌를 항복시켰다.
이해에 양나라 군대가 서쪽으로 경사京師를 침범하여 봉상鳳翔을 포위하니 이사소가 틈을 타서 양나라의 진강晉絳을 공격하여 평양平陽에서 전투하여 양나라 장수 한 사람을 사로잡고 진격하여 포현蒲縣을 공격하였다.
양나라의 주우녕朱友寧씨숙종氏叔琮십만十萬의 병사로 맞이하여 공격하니 이사소 등이 패주하였다. 주우녕이 추격하니 진나라에서 이존신李存信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이사소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이존신 또한 패배하였다.
양나라 군대가 마침내 태원을 포위하니 자주와 습주와 분주가 다시 양나라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태조가 크게 두려워하여 운주雲州로 달아날 것을 도모하자 이존신 등이 태조에게 거란契丹으로 달아나기를 권하였다.
이사소가 힘써 간쟁하여 불가하다고 하고 다행히 유태비劉太妃 또한 그렇게 말하자 마침내 그만두었다. 이사소가 밤낮으로 기병奇兵을 내어 양나라 군대를 공격하니 양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그리하여 이사소가 다시 분주와 자주와 습주를 취하였다.
이때에 진주鎭州정주定州가 모두 진나라를 버리고서 양나라에 붙으니 진나라가 밖으로는 대국大國의 원조를 잃고 안으로는 여러 주를 잃어 수 년 사이에 고립된 성에서 포위를 당한 것이 두 번이었는데 이때 이사소가 힘써 싸운 공이 많았다.
천우天祐 3년(906)에 주덕위周德威와 함께 나라의 노주潞州를 공격하여 정회丁會를 항복시키니 이사소李嗣昭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로 삼았다. 양나라가 이사안李思安을 보내 병사 십만十萬을 이끌고서 노주를 공격하여 협성夾城을 쌓아 포위하였다. 태조太祖가 일찍이 사람을 보내 이사소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하니 이사소가 그 사자를 참수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항거하며 수비하였다.
해를 넘겨 장종莊宗이 비로소 협성을 격파하였다. 이사소가 병사와 백성들을 다독이고 안집安集시킬 때에 매우 은혜롭게 위무慰撫하였다. 양나라와 나라가 호류胡柳에서 싸울 때 진군晉軍이 패하고 주덕위가 전사하였다.
장종이 두려워하면서 병사를 거두어 임복臨濮으로 돌아가려 하니 이사소가 말하기를 “양나라 군대가 이미 승리하여 밤낮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있거늘, 우리가 만약 군대를 거두면 저들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군을 추슬러 다시 나오면 어찌 당해내겠습니까. 마땅히 정예 기병으로 저들을 흔들어서 저들이 피곤해진 틈에 공격한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이때 양나라 군대는 이미 무석산無石山에 올라있었다. 장종이 이사소를 보내 산 북쪽으로 돌아가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은창군銀槍軍을 이끌고 달려가며 소리치기를 “오늘 싸움은 산을 차지하는 자가 이긴다.”라고 하니, 진나라 군대가 모두 다투어 산을 올랐다. 양나라 군대가 황급히 산에서 내려와 산 서쪽에 진을 치니 진나라 군대가 산 위에서 급히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이에 진나라가 덕승德勝에 성을 쌓았다.
주덕위가 죽었으므로 이사소가 유주幽州권지權知하였는데, 몇 개월 뒤 이소굉李紹宏으로 교대하였다. 이사소가 떠나려 할 때 유주 사람들이 모두 울부짖으며 관문關門을 닫고서 가로막고 붙잡거늘 이사소가 야밤에 달아나듯이 나오고서야 떠날 수 있었다.
천우天祐 19년(922)에 장종莊宗을 따라 망도望都에서 거란契丹을 공격하였는데 장종이 거란에게 수십 겹으로 포위되자 이사소李嗣昭가 3백의 기병을 이끌고 포위를 뚫고서 장종을 구출하여 나왔다.
이때에 나라가 염보閻寶를 보내 진주鎭州에서 장문례張文禮를 공격하였는데, 염보가 진주 사람들에게 패배하자 이사소로 교체하였다. 진주 병사들이 구문九門으로 나와 노략질을 하자 이사소가 기병奇兵으로 공격하였다.
진주 군대가 전멸당하려 할 때 남은 세 사람이 무너진 담장 안으로 숨으니, 이사소가 말을 달려가 그들에게 활을 쏘다가 도리어 적들이 쏜 화살에 머리를 맞았다. 이사소가 활집에 화살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 머리에서 화살을 뽑아 한 사람을 맞혀 죽이고 군영軍營으로 돌아와 죽었다.
이존현李存賢허주許州 사람이니 본래 성씨는 이고 이름은 이다. 젊었을 때 군졸軍卒이 되었는데 씨름을 잘하였다.
태조가 진주陳州에서 황소黃巢를 공격하다가 이존현을 얻어 성명을 하사하고 양자養子로 삼았다. 뒤에 이존현은 의아군부명마사義兒軍副兵馬使가 되었고 심주자사沁州刺史로 승진하였다.
이보다 앞서 심주는 적들과 충돌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래의 위치보다 남쪽으로 백여 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주성州城을 옮기고 지세가 험고한 곳에 목책을 세우고 우거寓居하였는데, 이존현이 자사로 부임하게 되자 말하기를 “성을 옮겨 적을 피하는 것이 어찌 용감한 자가 할 일이겠는가.”라고 하고는 다시 옛 로 성을 옮겼다.
나라 군대가 누차 공격하였는데 이존현이 힘써 방어하니 양나라 군대가 끝내 심주에 근접할 수 없었다. 무주자사武州刺史 산북단련사山北團練使로 승진하고 다시 승진하여 자주慈州를 맡았다.
천우天祐 18년(921)에 나라 병사가 하중河中에서 주우겸朱友謙을 공격하니, 장종莊宗이존현李存賢을 보내 주우겸을 구원하였다.
이때 주우겸은 막 양나라를 배반하고 나라에 귀부歸附하였는데, 하중의 식량이 적어 사람들이 대부분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첩자가 이 때문에 이존현에게 이르기를 “하중 사람들이 그대를 죽이고 양나라에 귀부하려 하니 서둘러 떠나야 한다.”라고 하니, 이존현이 말하기를 “왕사王事를 위해 죽는 것이 나의 뜻이니 다시 무엇을 한스러워 하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양나라 병사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장종莊宗이 즉위하자 우무위상장군右武衛上將軍에 배수하였다. 장종도 씨름을 좋아하여 일찍이 왕도王都와 씨름을 겨루어 누차 이기고서 자못 또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 이존현李存賢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면 너에게 한 을 주겠다.”라고 하니, 이존현이 장종과 겨루어서 이겼다.
동광同光 2년(924) 봄에 유주幽州부존심符存審의 병세가 위중해지니, 장종이 궁중에서 술자리를 차리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와 나라를 창업한 벗들이 영락하여 다 사라지고 남은 자라고는 존심存審뿐인데 이제 또 병이 위독하니 북방의 일을 누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존현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경을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씨름에서 이기면 한 을 주겠다고 한 말을 내가 식언食言하지 않으리라.”라고 하고는 그날로 노룡군절도사盧龍軍節度使로 삼았다.
이해에 유주幽州에서 죽으니 향년 65세였다. 태부太傅를 추증하였다.


역주
역주1 義兒傳 : 義兒는 養子라는 뜻이다. 五代 시기에 晉王 李克用은 용맹하고 출중한 이를 義兒로 들여 李氏 姓을 하사하고 이들을 將校로 任用하여 부대를 만들어 義兒軍이라 불렀다. 이극용 역시 본래는 突厥 沙陀族 출신으로 本姓은 朱邪였으나 그의 부친 朱邪赤心이 朔州刺史로 있으면서 龐勛의 난리를 토벌한 공으로 唐나라 조정으로부터 國姓을 하사받아 李氏가 되었다. 이극용이 父子 관계를 맺은 義兒들은 모두 武勇이 뛰어나 많은 공업을 세웠는데, 後唐 莊宗의 뒤를 이어 즉위한 明宗 李嗣源 역시 義兒 출신이다. 歐陽脩는 이들을 따로 立傳하여 〈義兒傳〉을 지었다. 이사원은 〈本紀〉에 편입되었으므로 李嗣昭, 李嗣本, 李嗣恩, 李存信, 李存孝, 李存進, 李存璋, 李存賢 등 8인을 〈의아전〉에 입전하였다. ≪廬陵史抄≫에서는 이 가운데 이사소(?~922)와 이존현(860~925)의 열전을 수록하였다. 이들은 모두 이극용의 양자로 莊宗 李存勖과 함께 전장을 누비면서 수많은 전공을 세웠다. 열전에는 이들의 활약상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 구양수는 史論에서 五代 시기는 골육 간에 전투를 벌이고 종족이 다른 사람끼리 父子가 되었던 쇠퇴한 시기라고 규정하고, 후당이 천하를 소유하고 망하는 과정에서 이들의 역할이 컸음을 말하였다. 이사소는 ≪舊五代史≫ 卷52 〈唐書 第28 列傳4〉, 이존현은 ≪舊五代史≫ 卷53 〈唐書 第29 列傳5〉에 각각 열전이 있다. 〈의아전〉은 ≪新五代史≫ 卷36에 실려 있다.
〈의아전〉에 대해 宋나라 때 인물인 馬永卿은 濮議와 연관 지어 흥미로운 주장을 하였다. 복의란 宋 英宗이 후사가 없던 仁宗의 뒤를 이어 황위에 올라 자신의 生父인 濮安懿王 趙允讓을 推封하려고 할 때 발생한 논쟁을 가리킨다. 당시 司馬光을 위시한 많은 朝臣들은 임금의 뒤를 이었으면 곧 그 임금의 아들이 되는 것이므로 생부인 복안의왕은 皇伯이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했고, 구양수는 생부를 伯이라고 일컬을 수 없으므로 皇考라 불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마영경은 그의 문집인 ≪嬾眞子≫ 卷2에서 구양수가 복의에 대한 자신의 의론을 〈의아전〉에 담아낸 것이라 하면서 “六一先生(구양수)은 어떤 일을 할 때 모두 깊은 뜻을 담았다.……그러므로 ≪五代史≫ 〈義兒傳〉에 극도로 그 뜻을 담아내었다.[六一先生作事 皆寓深意……故於五代史義兒傳 極致意焉]”라고 하였다.
역주2 開平顯德 : 開平은 唐나라를 멸망시키고 五代의 시작이 된 後梁 太祖의 연호로 907~911년 사이에 사용하였다. 顯德은 五代의 마지막에 들어선 後周 世宗의 연호로 954~960년 사이에 사용하였다.
역주3 沙陀 : 唐나라 초기 天山山脈 동부에 거주하던 西突厥의 한 지파이다. 高宗 때 당나라로부터 간접적인 지배를 받았으나 吐蕃의 압박으로 北庭 방면으로 이동하였다가 憲宗 때 당나라에 투항하였다. 당나라는 이들을 鹽州에 거주하게 하고 그 족장에게 陰山府兵馬使의 지위를 주어 변경 방위를 담당하게 하였다. 당나라 말에 朱邪赤心이 농민반란 평정에 공을 세워 大同軍節度使가 되었고 李國昌이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 그의 아들 李克用은 당나라를 도와 黃巢의 난을 평정하는 데 공을 세웠고 그의 아들 李存勖은 後梁을 무너뜨리고 後唐을 세웠다. 五代 시절 後晉과 後漢도 모두 사타족이 세운 왕조이다. 사타에 유래에 대해서는 歐陽脩도 견해를 가지고 있었는데, 이는 본서 〈唐莊宗紀〉 마지막의 구양수의 史評에 자세하다.
역주4 代北 : 지금의 山西省 代縣이 治所로 代州와 忻州를 관할하였다. 지금의 山西省 雁門道 남부 지역에 해당한다.
역주5 太祖 : 後唐 太祖 李克用(856~908)이다. 후당을 건국한 것은 그의 아들 莊宗 李存勖이고, 이존욱이 이극용을 태조로 추존하였다.
역주6 李嗣昭……汾州太谷縣民家子也 : ≪舊五代史≫ 卷52 〈唐書 第28 列傳4〉에는 이사소의 字가 益光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五代史記纂誤補≫ 卷3에 “삼가 살펴보건대 ≪唐書≫와 ≪宋史≫의 〈地理志〉에 太谷縣은 모두 幷州에 속한다고 하였으니, 이 부분은 오류인 듯하다.[謹按唐宋地理志太谷縣俱屬幷州 此疑誤]”라고 하였다.
역주7 初喜嗜酒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살펴보건대 ‘喜’가 바로 ‘嗜’이니, ‘喜’는 衍文인 듯하다.[今按喜卽嗜也 疑賸喜字]”라고 하였다. ≪舊五代史≫ 卷52 〈唐書 第28 列傳4〉에 있는 李嗣昭의 열전에는 “애초에는 술을 즐기고 풍류를 좋아하였다.[初嗜酒好樂]”로 되어 있다.
역주8 陝州王珙……爭立於河中 : 唐 建寧 2년(895)에 陝虢節度使 王重盈이 죽었는데, 왕중영의 아들 王珙은 당시 保義軍節度使로 있으면서 護國軍까지 자신이 맡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러나 護國軍은 그의 친족인 王珂가 점거하고 護國軍節度使가 되었다. 그러자 왕공이 아우인 絳州刺史 王瑤와 함께 왕가를 공격하였다. 이때 後梁은 왕공을 후원하였고 晉의 李克用은 왕가를 후원하였다.
역주9 猗氏 : 縣名이다. 현재의 山西省 猗氏縣 남쪽 20리 지점에 있었다.
역주10 胡壁堡 : 현재의 山西省 榮河縣 동쪽 30리 지점에 있었다.
역주11 李罕之 襲潞州以降梁 : 이한지(842~899)는 唐末의 군벌이다. 898년 昭義軍節度使 薛志勤이 죽자 이한지가 澤州에서 병사를 이끌고 潞州를 공격해 점거하고서 스스로를 留后로 칭하였다. 李克用이 장수 李嗣昭를 보내 정벌하자 朱溫(朱全忠)에게 항복하기를 청하니 주온이 병사를 보내 원조하였다.
역주12 (二)[三] : 저본에는 ‘二’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三’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3 葛從周 : ?~915. 五代 때 鄄城 사람으로 字는 通美다. 젊을 때 黃巢를 따랐지만, 나중에 주온에게 항복했다. 주온을 따라 蔡州를 공격했는데, 주온이 말에서 떨어지자 그가 구해 大將에 기용되었다. 朱瑄과 朱瑾을 무찌르고 兗州留后에 올랐다. 劉仁恭이 魏를 공격하자 周隨溫을 따라 위를 구하고, 이 전공으로 泰寧節度使가 되었다. 주온이 後梁을 건국해 태조가 되자 左金吾衛上將軍에 올랐다. 후량 末帝 초에 陳留郡王에 봉해졌다.
역주14 陰地 : 城名이다. 지금의 陝西 商縣과 河南 陝縣에서 嵩縣 일대에 해당한다.
역주15 太祖 : 後唐 태조 李克用이다. 아들 李存勖이 후당을 세우고 태조로 추존하였다.
역주16 胡柳 : 현재 山東省 濮縣 서남쪽에 있는 지명이다. 黃柳陂라고도 한다.
역주17 臨濮 : 옛 성이 현재 山東省 濮縣 남쪽 60리 지점에 있다. 小濮이라고도 한다.
역주18 銀槍軍 : 본래 魏州의 병사들로 銀槍效節都라 불렸으며 사납고 强暴하여 제어하기가 어려웠다고 한다. 後唐 莊宗이 魏州를 차지하고 이들을 親軍으로 삼았다.(≪舊五代史≫ 卷125 〈馮暉列傳〉, 卷454 〈楊師厚列傳〉)
역주19 德勝 : 德勝은 옛날 澶州 境內에 있던 곳으로 오늘날의 河南省 濮陽市에 속하며 黃河에 임해 있다.
역주20 權知 : 어떤 관직을 대리하여 맡는다는 뜻으로 관직명으로 쓰이기도 한다.
역주21 十九年 : 唐 昭宗의 마지막 연호인 天祐를 연장하여 쓴 것이다. 천우는 소종 이후 즉위한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 哀帝 역시 사용하였으나 천우 4년에 해당하는 907년에 당나라가 망하고 後梁이 들어서면서 폐기되었다. 후량은 새로 開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晉의 李克用을 비롯한 여러 번진 세력들은 후량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계속하여 천우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여기에서 천우 19년이라고 말한 것이다. 천우 19년은 후량 末帝 龍德 2년에 해당한다.
역주22 望都 : 현재의 河北省 保定市 望都縣이다.
역주23 九門 : 현재의 河北省 稾城縣 서북쪽에 있던 지명이다.
역주24 存賢……賢 : ≪舊五代史≫ 卷53 〈唐書 第29 列傳5〉에는 李存賢의 字가 子良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역주25 天祐十八年……莊宗遣存賢援友謙 : ≪五代史纂誤≫ 卷中에 다음과 같이 고증하였다. “지금 살펴보건대 〈梁末帝紀〉에 ‘貞明 6년(唐 天祐 17, 920) 여름에 河中節度使 朱友謙이 同州를 습격하여 절도사 程全暉를 살해하고 반란하여 晉에 붙으니, 泰寧軍節度使 劉鄩이 토벌하였다.’라고 하였다. 또 〈唐莊宗紀〉에 ‘天祐 17년(920)에 주우겸이 동주를 습격하니, 梁나라에서 유심을 보내 주우겸을 공격하였다. 李存審(符存審)이 동주에서 양나라 군대를 패퇴시켰다.’라고 하였다. 〈梁紀〉와 〈唐紀〉에 모두 17년이라고 하였으니 〈李存賢傳〉에서 18년이라 한 것은 오류이다.[今按梁末帝紀貞明六年夏 河中節度使朱友謙襲同州 殺其節度使程全暉 叛附于晉 泰寧軍節度使劉鄩討之 又唐莊宗紀天祐十七年 朱友謙襲同州 梁遣劉鄩擊友謙 李存審敗梁軍于同州 梁紀與唐紀皆云十七年 而存賢傳以爲十八年者誤也]”
역주26 (疑)[貳] : 저본에는 ‘疑’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과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貳’로 바로잡았다.
역주27 王都 : ?~929. 본래 이름은 劉雲郞으로 陘邑 사람이다. 五代 초기에 義武軍節度使 王處直의 養子가 되었다가 왕처직이 莊宗 李存勖을 배반하고 契丹과 내통하자 왕처직을 죽이고 이존욱에게 투항하였다. 이존욱이 자신의 아들 李繼岌을 왕도의 딸과 혼인시키고 왕도를 의무군절도사로 삼았다. 明宗 李嗣源이 즉위한 뒤 왕도를 미워하여 처치하려 하자 後唐을 배반하고 거란에 붙었다가 이사원이 보낸 군대에게 定州를 함락당하고 가솔들과 함께 스스로 불타 죽었다.
역주28 符存審 : 862~924. 본명은 符存이고 字는 德祥으로 陳州 宛丘 사람이다. 後唐의 장수로 여러 차례 後梁과 契丹을 물리쳐 군공을 세워 李克用이 養子로 삼고 이씨 성을 하사하였다. 檢校左僕射, 忻州刺史, 魏博馬步軍都指揮使, 盧龍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후당 明宗 때에 다시 본래의 성씨로 되돌렸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우)03140 서울특별시 종로구 종로17길 52 낙원빌딩 411호

TEL: 02-762-8401 / FAX: 02-747-0083

Copyright (c) 2022 전통문화연구회 All rights reserved. 본 사이트는 교육부 고전문헌국역지원사업 지원으로 구축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