嗚呼라 世道衰하고 人倫壞하야 而親疏之理가 反其常하야 干戈起於骨肉하고 異類合爲父子라
五十年間
에 天下五代而實八姓
하니 其三出於丐養
이라
蓋其大者는 取天下하고 其次는 立功名하야 位將相하니 豈非因時之隙하야 以利合而相資者邪아
唐
은 自號
하야 起
하니 其所與
는 俱皆一時雄傑虣武之士
라 往往養以爲兒
하야 號義兒軍
이라
至其有天下하야 多用以成功業하고 及其亡也하야도 亦由焉이라
養子多矣
로대 其可紀
는 九人
이니 其一
은 是爲明宗
이요 其次曰嗣昭嗣本嗣恩存信存孝存進存璋存賢
이라 作義兒傳
하노라
太祖出獵하야 至其家하야 見其林中鬱鬱有氣하고 甚異之하야 召其父問焉하니 父言家適生兒라 太祖因遺以金帛而取之하야 命其弟克柔하야 養以爲子하다
初名進通이요 後更名嗣昭하다 嗣昭爲人短小而膽勇過人이라
한대 太祖嘗微戒之
하니 遂終身不飮
하다 太祖愛其謹厚
하야 常從用兵
하야 爲內衙指揮使
하다
하니 遣嗣昭助珂
하야 敗珙於
하고 獲其將三人
이라 梁軍救珙
이어늘 嗣昭又敗之于
하고 執其將一人
하다
光化元年
에 澤州
이어늘 梁遣丁會應罕之
라 嗣昭與會戰含山
하야 執其將一人
하고 斬首
千級
하야 遂取澤州
하다
二年에 晉遣李君慶하야 攻梁潞州한대 君慶爲梁所敗하니 太祖鴆殺君慶이어늘 嗣昭攻克之하다
三年
에 出山東
하야 取梁洺州
하니 梁太祖自將攻之
하야 遣
하야 設伏於靑山口
라 嗣昭聞梁太祖自來
하고 棄城走
라가 前遇伏兵
하야 因大敗
하다
天復元年에 梁破河中하야 執王珂하고 取晉絳慈隰하야 因大擧擊晉하야 圍太原이라 嗣昭日以精騎出擊梁兵이러니 會大雨라 梁軍解去하다
晉汾州刺史李瑭
이 叛降梁軍
이러니 梁軍已去
일새 嗣昭復取汾州
하야 斬瑭
하야 遂出
하야 取慈州
하야 降其刺史唐禮
하고 又取隰州
하야 降其刺史張瓌
하다
是歲에 梁軍西犯京師하야 圍鳳翔하니 嗣昭乘間하야 攻梁晉絳하야 戰平陽하야 執梁將一人하고 進攻蒲縣하다
梁朱友寧氏叔琮이 以兵十萬迎擊之하니 嗣昭等敗走라 友寧追之하니 晉遣李存信하야 率兵迎嗣昭한대 存信又敗라
梁軍遂圍太原
하니 而慈隰汾州復入于梁
이라 大恐
하야 謀走雲州
어늘 李存信等勸太祖奔于契丹
이라
嗣昭力爭以爲不可하고 賴劉太妃亦言之어늘 乃止하다 嗣昭晝夜出奇兵하야 擊梁軍하니 梁軍解去라 嗣昭復取汾慈隰하다
是時에 鎭定皆已絶晉而附梁하니 晉外失大國之援하고 內亡諸州하야 仍歲之間에 孤城被圍者再어늘 於此時에 嗣昭力戰之功爲多하다
天祐三年에 與周德威攻梁潞州하야 降丁會하니 以嗣昭爲昭義軍節度使하다 梁遣李思安하야 將兵十萬攻潞하야 築夾城以圍之라 梁太祖嘗遣人招降嗣昭하니 嗣昭斬其使者하고 閉城拒守라
逾年
에 莊宗始攻破夾城
이라 嗣昭完緝兵民
에 撫養甚有恩意
러라 梁晉戰
에 晉軍敗
하고 周德威戰死
라
莊宗懼
하야 欲收兵還
하니 嗣昭曰 梁軍已勝
하야 旦暮思歸
어늘 吾若收軍
이면 使彼休息
이라 整而復出
이면 何以當之
리오 宜以精騎撓之
하야 因其勞乏
이면 可以勝也
라하니 莊宗然之
라
是時
에 梁軍已登無石山
이라 莊宗遣嗣昭
하야 轉擊山北
하고 而自以
趨而呼曰 今日之戰
은 得山者勝
이라하니 晉軍皆爭登山
이라 梁軍遽下
하야 陣於山西
하니 晉軍從上急擊
하야 大敗之
라 於是
에 晉城
矣
라
周德威死
라 嗣昭
幽州
러니 居數月
에 以李紹宏代之
라 嗣昭將去
에 幽州人皆號哭閉關
하야 遮留之
어늘 嗣昭夜遁
하야 乃得去
하다
에 從莊宗擊契丹於
한대 莊宗爲契丹圍之數十重
이어늘 嗣昭以三百騎決圍
하야 取莊宗以出
하다
是時
에 晉遣閻寶
하야 攻張文禮於鎭州
한대 寶爲鎭人所敗
어늘 乃以嗣昭代之
하다 鎭兵出掠
이어늘 嗣昭以奇兵擊之
러니
鎭軍且盡에 餘三人匿破垣中하니 嗣昭馳馬射之라가 反爲賊射中腦라 嗣昭顧箙中矢盡하고 拔矢于腦하야 射殺一人하고 還營而卒하다
太祖擊黃巢于陳州라가 得之하야 賜以姓名하고 養爲子하다 後爲義兒軍副兵馬使하고 遷沁州刺史하다
先時에 沁州當敵衝이라 徙其南百餘里하야 據險立柵而寓居러니 至存賢爲刺史하야 曰 徙城避敵이 豈勇者所爲리오하고 乃復城故州하다
梁兵屢攻之어늘 存賢力自拒守하니 卒不能近하다 遷武州刺史山北團練使하고 又遷慈州하다
是時
에 友謙新叛梁歸晉
한대 而河中食少
하야 人心多
라
諜者因謂存賢曰 河中人欲殺子以歸梁이니 宜亟去하라하니 存賢曰 死王事가 吾志也니 復何恨哉리오하고 卒擊走梁兵하다
莊宗卽位
에 拜右武衛上將軍
하다 莊宗亦好角觝
하야 嘗與
較而屢勝
하야 頗亦自矜
하야 因顧存賢曰 爾能勝我
어든 與爾一鎭
호리라하니 存賢搏而勝之
하다
同光二年春
에 幽州
病甚
하니 莊宗置酒宮中
하고 歎曰 吾創業故人
이 零落殆盡
하고 其所存者
는 惟存審耳
어늘 今又病篤
하니 北方之事
를 誰可代之
오하고
因顧存賢曰 無以易卿이니 角觝之勝을 吾不食言호리라하고 卽日以爲盧龍軍節度使하다
아아! 세도世道가 쇠퇴하고 인륜人倫이 무너져 친소親疏의 이치가 그 떳떳함이 뒤집혀 골육骨肉간에 전투가 벌어지고 종족이 다른 사람들이 합하여 부자父子가 되었다.
개평開平에서 현덕顯德에 이르는 50년 사이, 천하에 오대五代의 왕조가 들어섰는데 기실 여덟 성이니 그 가운데 셋은 양자養子에서 나왔다.
크게 된 경우는 천하를 취하고 그 다음은 공명을 세워 장상將相의 지위에 올랐으니, 어찌 시대가 혼란한 틈을 타 이익으로 만나 서로 도움을 준 것이 아니겠는가.
당唐나라는 스스로를 사타沙陀라 호칭하면서 대북代北에서 일어났으니, 당나라의 군주와 결교結交한 이들은 모두 당시 걸출하고 용맹스러운 무사들이었는지라 왕왕 그들을 양자로 삼아 의아군義兒軍이라 불렀다.
당나라가 천하를 소유함에 이르러서는 그들의 힘을 써서 공업功業을 이룬 것이 많았고, 당나라가 망함에 미쳐서도 또한 그들로 인해 망하였다.
당唐 태조太祖의 양자가 많지만 기록할 만한 자는 아홉 사람이니, 그 첫째는 바로 명종明宗이고 그 다음은 이사소李嗣昭, 이사본李嗣本, 이사은李嗣恩, 이존신李存信, 이존효李存孝, 이존진李存進, 이존장李存璋, 이존현李存賢이다. 〈의아전義兒傳〉을 짓노라.
이사소李嗣昭는 본래 성씨는 한씨韓氏이니 분주汾州 대곡현大谷縣의 민가民家의 자제이다.
태조太祖가 사냥을 나가 그 집에 이르러 숲 속에 울흥蔚興한 기운이 있는 것을 보고 매우 기이하게 여겨 그 아비를 불러 물으니, 아비가 집안에 마침 아이가 태어났다고 하였다. 그리하여 태조가 금과 비단을 주고서 아이를 데려와 아우인 이극유李克柔에게 명하여 양자養子로 키우게 하였다.
이사소의 초명初名은 진통進通이고 후에 사소嗣昭로 개명하였다. 이사소는 사람됨이 몸집은 왜소하였으나 담력과 용맹이 남들보다 뛰어났다.
애초에는 술을 즐겼는데 태조가 은근히 경계시키니 마침내 종신토록 술을 마시지 않았다. 태조가 그 근후勤厚함을 사랑하여 항상 종군從軍하게 하여 내아지휘사內衙指揮使로 삼았다.
섬주陝州의 왕공王珙이 그 형 왕가王珂와 하중河中에서 자리를 다투니, 태조가 이사소를 보내 왕가를 도와 의씨猗氏에서 왕공을 패퇴시키고 그 장수 세 사람을 사로잡았다. 양梁나라 군대가 왕공을 구원하였는데 이사소가 또 호벽보胡壁堡에서 패퇴시키고 그 장수 한 사람을 잡았다.
광화光化 원년(898)에 택주澤州의 이한지李罕之가 노주潞州를 습격하여 양나라에 투항하니 양나라가 정회丁會를 보내 이한지에 호응하였다. 이사소가 그들과 함산含山에서 회전會戰하여 그 장수 한 사람을 잡고 삼천의 수급을 베고서 마침내 택주를 차지하였다.
광화 2년(899)에 진晉나라에서 이군경李君慶을 보내 양나라의 노주를 공격하게 하였다. 이군경이 양나라에 패하니 태조가 이군경에게 독주毒酒를 내려 죽였는데 이사소가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광화 3년(900)에 산동山東으로 나와 양나라의 명주洺州를 차지하니 양梁 태조太祖가 스스로 군대를 이끌고 공격하면서 갈종주葛從周를 보내 청산구靑山口에 복병伏兵을 두었다. 이사소가 양 태조가 직접 왔다는 말을 듣고는 성을 버리고 달아나다가 앞에서 복병을 만나 크게 패하였다.
천복天復 원년(901)에 양梁나라가 하중河中을 격파하여 왕가王珂를 잡고 진주晉州와 강주絳州와 자주慈州와 습주隰州를 취하고서 군대를 크게 일으켜 진晉나라를 공격하여 태원太原을 포위하였다. 이사소가 날마다 정예 기병을 이끌고 나가서 양나라 병사를 공격하였는데 마침 큰 비가 내려 양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진나라의 분주자사汾州刺史 이당李瑭이 배반하여 양나라 군대에 투항했었는데, 양나라 군대가 떠나자 이사소가 다시 분주를 취하여 이당을 참수하였다. 그리고 마침내 음지陰地로 나와 자주慈州를 취하고서 자사刺史 당례唐禮를 항복시키고 또 습주隰州를 취하고서 자사刺史 장괴張瓌를 항복시켰다.
이해에 양나라 군대가 서쪽으로 경사京師를 침범하여 봉상鳳翔을 포위하니 이사소가 틈을 타서 양나라의 진강晉絳을 공격하여 평양平陽에서 전투하여 양나라 장수 한 사람을 사로잡고 진격하여 포현蒲縣을 공격하였다.
양나라의 주우녕朱友寧과 씨숙종氏叔琮이 십만十萬의 병사로 맞이하여 공격하니 이사소 등이 패주하였다. 주우녕이 추격하니 진나라에서 이존신李存信을 보내 병사를 이끌고 이사소를 맞이하게 하였는데 이존신 또한 패배하였다.
양나라 군대가 마침내 태원을 포위하니 자주와 습주와 분주가 다시 양나라의 영역으로 들어갔다. 태조가 크게 두려워하여 운주雲州로 달아날 것을 도모하자 이존신 등이 태조에게 거란契丹으로 달아나기를 권하였다.
이사소가 힘써 간쟁하여 불가하다고 하고 다행히 유태비劉太妃 또한 그렇게 말하자 마침내 그만두었다. 이사소가 밤낮으로 기병奇兵을 내어 양나라 군대를 공격하니 양나라 군대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그리하여 이사소가 다시 분주와 자주와 습주를 취하였다.
이때에 진주鎭州와 정주定州가 모두 진나라를 버리고서 양나라에 붙으니 진나라가 밖으로는 대국大國의 원조를 잃고 안으로는 여러 주를 잃어 수 년 사이에 고립된 성에서 포위를 당한 것이 두 번이었는데 이때 이사소가 힘써 싸운 공이 많았다.
천우天祐 3년(906)에 주덕위周德威와 함께 양梁나라의 노주潞州를 공격하여 정회丁會를 항복시키니 이사소李嗣昭를 소의군절도사昭義軍節度使로 삼았다. 양나라가 이사안李思安을 보내 병사 십만十萬을 이끌고서 노주를 공격하여 협성夾城을 쌓아 포위하였다. 양梁 태조太祖가 일찍이 사람을 보내 이사소에게 항복하라고 권유하니 이사소가 그 사자를 참수하고 성문을 굳게 닫아걸고 항거하며 수비하였다.
해를 넘겨 장종莊宗이 비로소 협성을 격파하였다. 이사소가 병사와 백성들을 다독이고 안집安集시킬 때에 매우 은혜롭게 위무慰撫하였다. 양나라와 진晉나라가 호류胡柳에서 싸울 때 진군晉軍이 패하고 주덕위가 전사하였다.
장종이 두려워하면서 병사를 거두어 임복臨濮으로 돌아가려 하니 이사소가 말하기를 “양나라 군대가 이미 승리하여 밤낮으로 돌아가기를 생각하고 있거늘, 우리가 만약 군대를 거두면 저들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저들이 군을 추슬러 다시 나오면 어찌 당해내겠습니까. 마땅히 정예 기병으로 저들을 흔들어서 저들이 피곤해진 틈에 공격한다면 승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이 말을 옳게 여겼다.
이때 양나라 군대는 이미 무석산無石山에 올라있었다. 장종이 이사소를 보내 산 북쪽으로 돌아가 공격하게 하고 자신은 은창군銀槍軍을 이끌고 달려가며 소리치기를 “오늘 싸움은 산을 차지하는 자가 이긴다.”라고 하니, 진나라 군대가 모두 다투어 산을 올랐다. 양나라 군대가 황급히 산에서 내려와 산 서쪽에 진을 치니 진나라 군대가 산 위에서 급히 공격하여 크게 패배시켰다. 이에 진나라가 덕승德勝에 성을 쌓았다.
주덕위가 죽었으므로 이사소가 유주幽州를 권지權知하였는데, 몇 개월 뒤 이소굉李紹宏으로 교대하였다. 이사소가 떠나려 할 때 유주 사람들이 모두 울부짖으며 관문關門을 닫고서 가로막고 붙잡거늘 이사소가 야밤에 달아나듯이 나오고서야 떠날 수 있었다.
천우天祐 19년(922)에 장종莊宗을 따라 망도望都에서 거란契丹을 공격하였는데 장종이 거란에게 수십 겹으로 포위되자 이사소李嗣昭가 3백의 기병을 이끌고 포위를 뚫고서 장종을 구출하여 나왔다.
이때에 진晉나라가 염보閻寶를 보내 진주鎭州에서 장문례張文禮를 공격하였는데, 염보가 진주 사람들에게 패배하자 이사소로 교체하였다. 진주 병사들이 구문九門으로 나와 노략질을 하자 이사소가 기병奇兵으로 공격하였다.
진주 군대가 전멸당하려 할 때 남은 세 사람이 무너진 담장 안으로 숨으니, 이사소가 말을 달려가 그들에게 활을 쏘다가 도리어 적들이 쏜 화살에 머리를 맞았다. 이사소가 활집에 화살이 다 떨어진 것을 보고 머리에서 화살을 뽑아 한 사람을 맞혀 죽이고 군영軍營으로 돌아와 죽었다.
이존현李存賢은 허주許州 사람이니 본래 성씨는 왕王이고 이름은 현賢이다. 젊었을 때 군졸軍卒이 되었는데 씨름을 잘하였다.
태조가 진주陳州에서 황소黃巢를 공격하다가 이존현을 얻어 성명을 하사하고 양자養子로 삼았다. 뒤에 이존현은 의아군부명마사義兒軍副兵馬使가 되었고 심주자사沁州刺史로 승진하였다.
이보다 앞서 심주는 적들과 충돌하는 곳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본래의 위치보다 남쪽으로 백여 리 정도 떨어진 곳으로 주성州城을 옮기고 지세가 험고한 곳에 목책을 세우고 우거寓居하였는데, 이존현이 자사로 부임하게 되자 말하기를 “성을 옮겨 적을 피하는 것이 어찌 용감한 자가 할 일이겠는가.”라고 하고는 다시 옛 주州로 성을 옮겼다.
양梁나라 군대가 누차 공격하였는데 이존현이 힘써 방어하니 양나라 군대가 끝내 심주에 근접할 수 없었다. 무주자사武州刺史 산북단련사山北團練使로 승진하고 다시 승진하여 자주慈州를 맡았다.
천우天祐 18년(921)에 양梁나라 병사가 하중河中에서 주우겸朱友謙을 공격하니, 장종莊宗이 이존현李存賢을 보내 주우겸을 구원하였다.
이때 주우겸은 막 양나라를 배반하고 진晉나라에 귀부歸附하였는데, 하중의 식량이 적어 사람들이 대부분 다른 마음을 품고 있었다.
첩자가 이 때문에 이존현에게 이르기를 “하중 사람들이 그대를 죽이고 양나라에 귀부하려 하니 서둘러 떠나야 한다.”라고 하니, 이존현이 말하기를 “왕사王事를 위해 죽는 것이 나의 뜻이니 다시 무엇을 한스러워 하겠는가.”라고 하고는 마침내 양나라 병사를 공격하여 패주시켰다.
장종莊宗이 즉위하자 우무위상장군右武衛上將軍에 배수하였다. 장종도 씨름을 좋아하여 일찍이 왕도王都와 씨름을 겨루어 누차 이기고서 자못 또한 스스로 자랑스럽게 여겨 이존현李存賢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네가 나를 이길 수 있다면 너에게 한 진鎭을 주겠다.”라고 하니, 이존현이 장종과 겨루어서 이겼다.
동광同光 2년(924) 봄에 유주幽州의 부존심符存審의 병세가 위중해지니, 장종이 궁중에서 술자리를 차리고 탄식하며 말하기를 “나와 나라를 창업한 벗들이 영락하여 다 사라지고 남은 자라고는 존심存審뿐인데 이제 또 병이 위독하니 북방의 일을 누가 대신할 수 있겠는가.”라고 하였다.
그리고는 이존현을 돌아보며 말하기를 “경을 대신할 사람이 없으니 그대가 씨름에서 이기면 한 진鎭을 주겠다고 한 말을 내가 식언食言하지 않으리라.”라고 하고는 그날로 노룡군절도사盧龍軍節度使로 삼았다.
이해에 유주幽州에서 죽으니 향년 65세였다. 태부太傅를 추증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