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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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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馬重績 字洞微이니 其先出於北狄而世事軍中이라 하고 居于太原이라
唐莊宗鎭太原할새 每用兵征伐 必以問之한대 重績所言無不中이라 拜大理司直이러니 明宗時 廢不用하다
晉高祖以太原拒命하니 廢帝遣兵圍之하야 勢甚危急이라
命重績筮之하니 遇同人하야이니 乾健而離明이라 健者 君之德也 所以治天下也 同人者 人所同也 必有同我者焉이라 라하니 南方也 其同我者自北而南乎인저 西北也 戰而勝 인저하다
是歲九月 契丹助晉하야 擊敗唐軍하야 晉遂有天下 拜重績太子右贊善大夫하고 遷司天監하다
明年 이어늘 命重績筮之하니 遇隨하야 曰 南瞻하니 木不自續이라 虛而動之하니 動隨其覆이라 歲將秋矣 無能爲也라하다
七月而從賓敗하니 高祖大喜하야 賜以良馬器幣하다
天福三年 重績上言 曆象 王者所以正之元宣萬邦之命이로대 而古今所紀 考審多差 하니 以宣明之氣朔으로 合崇玄之五星하야 二曆相參然後符合이라 自前世諸曆 하야 積歲愈多 差闊愈甚이라 臣輒合二曆하야 創爲新法호대 以唐天寶十四載乙未爲上元하고 라하야늘
詔下司天監趙仁錡張文皓等하야 考覈得失이라
仁錡等言 明年庚子正月朔 用重績曆考之하니 皆合無舛이라하야늘 乃下詔頒行之하고 號調元曆이라 行之數歲 輒差하야 遂不用하다
重績又言 十分刻之二十爲一時하고 時以四刻十分爲正하니 此自古所用也 今失其傳하야 由是 晝夜昏曉 皆失其正하니 請依古改正하소서하야늘 從之하다 重績卒年六十四


06. 마중적馬重績전기傳記
마중적馬重績동미洞微이니 그 선조는 북적北狄 출신으로 대대로 군중軍中에서 일하였다. 마중적은 젊을 때 수술數術을 배워 태일太一오기五紀팔상八象과 ≪삼통대력三統大曆≫에 밝았고 태원太原에서 살았다.
장종莊宗태원太原진수鎭守할 때 병사를 움직여 정벌할 때마다 반드시 마중적에게 물었는데, 마중적의 말이 들어맞지 않은 적이 없으므로 대리사직大理司直을 배수하였다. 명종明宗 때에는 파직되어 기용되지 못했다.
고조高祖태원太原에서 항명抗命하니 폐제廢帝가 병사를 보내 포위하여 형세가 몹시 위급하였다.
마중적에게 명하여 점을 치게 하니, 동인괘同人卦를 얻고서 말하기를 “천화天火이니 은 굳건하고 는 밝습니다. 굳건함은 군주의 덕이고 밝음은 남면南面하여 바라봄이니 천하를 다스리는 것입니다. 동인同人은 사람들이 함께 함이니 반드시 나와 함께할 자가 있을 것입니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에서 싸운다.’라고 하니 서북방西北方이요, 또 말하기를 ‘에서 서로 만나본다.’라고 하니 남방南方입니다. 그러니 나와 함께 할 자가 북쪽에서 남쪽으로 올 것입니다. 은 서북방이니 싸워서 이기는 것은 9월과 10월 사이일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이해 9월에 거란契丹나라를 도와 당군唐軍을 격파하여 진나라가 마침내 천하를 소유하였다. 이에 마중적을 태자우찬선대부太子右贊善大夫에 배수하고 사천감司天監으로 승진시켰다.
이듬해에 장종빈張從賓이 반란하자 마중적에게 명하여 점을 치게 하니, 수괘隨卦를 얻고서 말하기를 “남쪽으로 석목析木을 바라보니 나무는 스스로 이어지지 못할 것입니다. 텅 비어 있는데 움직이니 움직임에 따라 전복顚覆될 것입니다. 한해도 가을로 접어들려 하니 일을 해내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7월에 장종빈이 패하니 고조高祖가 크게 기뻐하여 좋은 말과 기물器物과 비단을 하사하였다.
천복天福 3년(938)에 마중적馬重績이 상주하기를 “역상曆象왕자王者일기一氣의 근원을 바르게 하고 만방萬邦정령政令을 선포하는 것인데, 고금古今의 기록을 고찰해보니 착오가 많습니다. ≪선명력宣明曆≫은 기영氣盈삭허朔虛는 바르지만 성도星度가 맞지 않고 ≪숭현력崇玄曆≫은 오성五星은 부합하지만 해마다 하루씩 오차가 나니, ≪선명력≫의 기영과 삭허에 ≪숭현력≫의 오성을 합쳐 두 역법을 서로 참조한 뒤에야 실제와 부합합니다. 과거 여러 역법이 모두 천정天正 11월을 기점으로 하여 세수歲首로 삼고 태고太古갑자일甲子日을 사용하여 상원上元을 설정해서 세월이 지나면 지날수록 오차가 더욱 심해졌습니다. 신이 이제 두 역법을 합쳐 새 역법을 만들되, 나라 천보天寶 14년(755)인 을미년乙未年을 상원으로, 정월중기正月中氣우수雨水기수氣首로 삼았습니다.”라고 하자,
조명詔命으로 사천감司天監 조인기趙仁錡장문호張文皓 등에게 하달하여 득실得失을 고찰하게 하였다.
조인기 등이 말하기를 “내년 경자년 정월 초하루를 마중적의 역법을 사용해 고구考究해보니 모두 부합되어 어긋남이 없습니다.”라고 하자 마침내 조서를 내려 반포하여 시행하게 하고 이름을 ≪조원력調元曆≫이라 하였는데, 몇 해를 시행하자 점차 차이가 나서 마침내 쓰지 않았다.
마중적이 또 말하기를 “누각漏刻의 법은, 중성中星으로 주야晝夜를 고찰하여 〈하루를〉 1백 으로 하고, 1은 60이니 8 20이 1가 되며, 1는 4 10으로 을 삼으니, 이는 예로부터 사용한 것입니다. 그런데 지금 잘못 전수되어 오시午時의 시작으로 삼아 아래로 미시未時의 4 10을 침범하여 오시午時로 만들었습니다. 이 때문에 낮과 밤과 저녁과 새벽이 모두 바른 때를 잃었으니, 청컨대 예전대로 개정하소서.”라고 하자, 그대로 따랐다. 마중적은 64세에 하였다.


역주
역주1 馬重績傳 : 馬重績(?~?)의 字는 洞微로 선조가 北狄 출신이다. 젊을 때 術數學을 익혀 천문역법에 밝았다. 後唐과 後晉에서 벼슬하여 司天監을 역임하였고 역대의 역법을 참조하고 개정하여 ≪調元曆≫이라는 새 역법을 제정하기도 하였다. 마중적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96 〈晉書 第22 列傳11〉과 ≪新五代史≫ 卷57 〈雜傳 第45〉에 실려 있다. 특이한 점은 ≪신오대사≫는 대개 ≪구오대사≫의 기록을 축약하는 경우가 많은데, 마중적의 경우는 ≪구오대사≫의 기록을 거의 그대로 수록하는 한편 앞부분에 ≪구오대사≫에는 없는 내용을 더 첨가하였다는 것이다. 마중적이 후당 莊宗에게 앞일을 잘 예측하는 것으로 신임을 받은 점과 후진 高祖에게 점을 쳐주어 들어맞은 일 등이 그것이다. 그러나 구양수가 ≪신오대사≫ 〈사천고〉에 서술한 史論에서, 天道는 다 알 수 없지만 사람은 사람이 해야 할 일을 할 뿐 象緯에 현혹되지 않아야 한다는 입장을 취한 것을 따져보면, 구양수가 마중적의 이러한 능력을 높이 사서 첨가한 것이라기보다는 마중적이 역법의 추산에 뛰어났음을 드러내는 일화로서 부기한 것인 듯하다.
역주2 重績少學數術 明太一五紀八象三統大曆 : 數術은 術數라고도 하며 天文, 曆法, 占卜 등의 학문을 가리킨다. 太一은 太乙이라고도 하며 우주만물의 本原을 가리킨다. ≪禮記正義≫에 “태일은 하늘과 땅이 나뉘기 전의 혼돈의 원기를 일컫는다. 더없이 크기에 ‘태’라 하고 나뉘지 않았기에 ‘일’이라 한다.[太一者謂天地未分混沌之元氣也 極大曰太 未分曰一]”라고 하였다. 五紀는 세월과 자연의 흐름의 기준이 되는 歲, 月, 日, 星辰, 曆數로 ≪書經≫ 〈洪範〉에 나오는 말이다. 八象은 ≪周易≫의 八卦의 象으로 乾(天), 坤(地), 坎(水), 離(火), 艮(山), 兌(澤), 巽(風), 震(雷)을 가리킨다. ≪三統大曆≫은 ≪三統曆≫으로 漢나라 때 劉歆이 기존의 ≪太初曆≫ 등을 보완하여 만든 것으로 현전하는 중국 최초의 비교적 완전한 역법이다. 大曆은 국가에서 공식 반포한 역법이라는 의미로 민간에서 사사로이 사용하는 小曆의 반대말이다.
역주3 天火之象 : 同人卦는 하늘을 나타내는 乾卦와 불을 나타내는 離卦로 이루어져 있다.
역주4 明者 南面而嚮之 : ≪周易≫ 〈說卦傳〉에 “離는 밝음이니 萬物이 모두 서로 만나보기 때문이다. 南方의 卦이다. 聖人이 南面하여 天下를 다스리면서 밝은 곳을 향해 다스림은 여기에서 뜻을 취하였다.[離也者 明也 萬物皆相見 南方之卦也 聖人南面而聽天下 嚮明而治 蓋取諸此也]”라고 하였다.
역주5 易曰……相見乎離 : 모두 ≪周易≫ 〈說卦傳〉의 말이다.
역주6 其九月十月之交乎 : 乾의 卦位가 서북방에 해당하는데 이는 九․十月의 氣이므로 이렇게 말한 것이다.
역주7 張從賓 : ?~937. 後唐 莊宗을 섬겨 小校가 되었고 이후 전공을 세워 檢校太保, 侍衛步軍都指揮使, 靈武軍節度使 등을 역임하였다. 後晉 高祖 天福 2년(937)에 范延光이 鄴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楊光遠과 함께 범연광을 토벌하러 나섰다가 범연광에게 넘어가 군사를 일으켜 호응하여 皇子 石重信 등을 살해하고 汜水關을 점거하였다. 그러나 杜重威의 토벌군에게 대패하여 황하에 뛰어들어 자살하였다.
二十八宿分野之圖二十八宿分野之圖
역주8 析木 : 星次의 명칭으로 二十八宿 가운데 箕星과 斗星 사이에 해당하며 析木津이라고도 하는데, 기성과 두성 사이에 은하수가 있고 기성은 木에 속하며 그 사이를 가르기 때문이다. 分野로는 幽燕 지방에 해당한다. ≪春秋左傳註疏≫ 卷44의 孫炎의 주석에 “기성과 두성 사이에서 물과 나무를 갈라놓으니 이는 은하수의 나루터이다.[析別水木以箕斗之間 是天漢之津也]”라고 하였다.
역주9 一氣 : 天地가 나뉘기 전의 混沌의 氣로 우주만물의 본원이다.
역주10 宣明氣朔正而星度不驗 崇玄五星得而歲差一日 : 宣明曆은 唐 穆宗 長慶 2년(822)에 徐昻 등이 만든 역법이며, 崇玄曆은 당 昭宗 景福 2년(893)에 邊岡이 만든 역법이다. 氣朔은 氣盈과 朔虛로, 해가 하늘과 만나는 주기는 360일보다 5와 235/940일이 더 많은데 이 많은 기한을 기영이라 하며, 달이 해와 만나는 주기는 360일보다 5와 592/940일이 적은데 이 적은 기한을 삭허라 한다. 기영과 삭허를 합쳐서 윤달을 정한다. 星度는 별이 운행하는 도수이다. 五星은 천체 관측의 기본이 되는 太白星(金星), 歲星(木星), 辰星(水星), 熒惑星(火星), 塡星(土星)이다.
역주11 皆起天正十一月爲歲首 用太古甲子爲上元 : 중국 고대에 夏나라는 초저녁에 북두성 자루가 寅方을 가리키는 달을 正月로 삼아 人正이라고 하였고, 殷나라 때는 북두성 자루가 丑方을 가리키는 달을 정월로 삼아 地正이라 하였고, 周나라 때에는 북두성 자루가 子方을 가리키는 달을 정월로 삼아 天正이라 하였다. 天正은 곧 지금의 음력 11월에 해당한다. 太古의 甲子日을 사용하여 上元을 설정하였다는 것은 곧 중국 고대의 역법 가운데 비교적 완정된 형태로 제정된 최초의 역법인 ≪太初曆≫과 ≪三統曆≫에 대한 설명이다. ≪태초력≫은 漢 武帝 太初 원년(B.C. 104)에 만들어진 역법인데 현재는 전하지 않는다. ≪삼통력≫은 劉歆이 ≪태초력≫을 일부 개정해서 내놓은 역법으로 이때 설정한 역법의 시작점인 曆元 즉 上元은 현재 사용하는 干支와 직접적으로 연결된다. 하루의 시작인 자정을 夜半, 한 달의 시작인 초하루를 朔旦이라 하고 당시의 기준으로 한 해의 시작은 冬至였는데 이 야반과 삭단과 동지가 갑자일에 들어오는 것을 甲子夜半朔旦冬至라 하며 이는 당시에 曆元을 산출하는 기준이 되었다. 삭단과 동지가 같은 날 자정 즉 야반에 들어오는 夜半朔旦冬至를 一統이라 하고 이것이 세 번 반복되는 것이 三統인데 삼통이 되면 甲子夜半朔旦冬至가 이루어진다. 이 삼통을 1元이라 하였는데 일원의 햇수는 4,617년으로 이는 곧 夜半朔旦冬至가 갑자일에서 갑자일로 순환되는 한 주기이다. 이렇게 해서 甲子夜半朔旦冬至가 든 元封 6년의 다음해인 기원전 104년 太初 元年이 역원이 되었고 태초 원년의 설정 기준이 되는 그 윗대 4,617년 전의 甲子夜半朔旦冬至를 上元泰初라 하였다. 유흠은 여기에서 더 나아가 1元이 31번 반복된 31元의 주기를 만들어내어 이에 해당하는 143,127歲 과거를 太極上元이라 이름하였다. 이상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漢書≫ 〈律曆志〉에 자세하다.
역주12 雨水正月中氣爲氣首 : 지금은 24節氣라고 표기하지만 엄격하게 이야기하면 24氣라고 해야 한다. 24기는 매달마다 2개씩 배열되는데 매달 초에 있는 것을 節氣, 중순 이후에 있는 것을 中氣라 하였다. 예를 들면 立春은 正月의 절기이고, 雨水는 정월의 중기이다. 여기서는 정월의 중기인 우수를 24기의 첫 번째로 잡았다는 말이다.
역주13 漏刻之法……時以四刻十分爲正 : 中星은 28宿가 사방에 분포하여 일정한 궤도로 운행하다가 차례대로 매월 中天의 南方에 도달하는 별을 가리키는데, 이를 관찰하여 때를 구분하였다. 1백 刻을 하루 12時에 배분하면 매 時마다 8刻씩 균등하게 분배되고 4刻이 남는다. 이 남은 4刻을 다시 12時에 고루 배분하면 1刻은 60分이므로 매 時마다 20分씩 균등하게 분배된다. 따라서 1時는 8刻 20分이 된다. 원문의 “八刻六十分刻”은 底本에는 “刻十分刻”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 및 ≪舊五代史≫의 동일 기사에 의거하여 수정하였다. 그러나 이와 같이 수정하여도 원문이 불분명하여 위에서 언급한 時刻의 분배를 담아내기 어렵다. 굳이 번역하자면 ‘刻마다 60分인 8刻의 20分이 1時이다.’가 될 것이다. 이에 대해 ≪五代史記纂誤續補≫ 卷5에 “마땅히 ‘八刻六十分刻之二十爲一時’라는 말은 ‘刻六十分八刻有二十分爲一時(1刻은 60分이니 8刻 20分이 1時가 된다)’로 바꾸어야 한다.[宜易八刻六十分刻之二十爲一時語 爲刻六十分八刻有二十分爲一時]”라고 변증하였는데, 이에 의거하여 알기 쉽게 번역하였다. 4刻 10分으로 正을 삼는다는 것은, 1時의 8刻 20分을 둘로 나누어 앞의 4刻 10分을 正前이라 하고 뒤의 4刻 10分을 正後라 하고 둘 사이의 정중앙을 正이라 할 때 正을 설정하는 기준이 4刻 10分이라는 말이다. 보통 正前은 初刻이라 하고 正後는 正刻이라 하며 초각은 다시 初初刻, 初一刻, 初二刻, 初三刻, 初四刻으로 나뉘고 正刻은 다시 正初刻, 正一刻, 正二刻, 正三刻, 正四刻으로 나뉜다.
역주14 [八] : 저본에는 ‘八’이 없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5 [六] : 저본에는 ‘六’이 없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보충하였다.
역주16 以午正爲時始 下侵未四刻十分而爲午 : 午時의 正을 時의 시작으로 잡으면 실제로는 午時의 正刻인 시간이 午時의 初刻이 되고 실제로는 未時의 初刻인 시간이 午時의 正刻이 되어버린다. 이에 대해서는 위의 譯註 7)의 마지막 내용 참조.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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