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7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01.
嗚呼라 五代禮樂文章은 吾無取焉이나 其後世有必欲知之者리니 不可以遺也라 作司天職方考하노라
司天掌日月星辰之象
이라 하야 以爲曆
하고 而謹察其變者
하야 以爲占
이라
占者는 非常之兆也니 以驗吉凶하고 以求天意하고 以覺人事라 其術藏於有司요
曆者는 有常之數也니 以推寒暑하고 以先天道하고 以勉人事라 其法信於天下라
術有時而用이어니와 法不可一日而差니 差之毫釐면 則亂天人之序하고 乖百事之時라 蓋有國之所重也라
로 가 略存其大法
이러니 而三代中間千有餘歲
에 遺文曠廢
하야 六經無所述
이요 而孔子之徒亦未嘗道也
라
至於後世하야 其學一出於陰陽之家하니 其事則重이나 其學則末이라
夫天人之際
는 遠哉微矣
어늘 而使一藝之士
로 하야 라
蓋自漢而後로 其說始詳見於世로대 其源流所自가 止於如此하니 是果堯舜三代之法歟아 皆不可得而考矣라
然自是以來로 曆家之術이 雖世多不同이나 而未始不本於此라
五代之初
에 因唐之故
하야 用
이러니 하야 不復推古上元甲子冬至
之會
하고 而起唐天寶十四載乙未爲上元
하고 用正月雨水爲氣首
라
初
에 唐
時
에 術者曹士
始變古法
하야 以顯慶五年爲上元
하고 雨水爲歲首
하야 號符天曆
이라
然世謂之
이라하야 秖行於民間
이러니 而重績乃用以爲法
하야 遂施于朝廷
하야 賜號調元曆
이라
周
中
에 國子博士王處訥私撰明玄曆于家
하고 民間又有萬分曆
하고 而蜀有永昌曆正象曆
하고 南唐有齊政曆
하니 五代之際
에 曆家可考見者
는 止於此
라
而調元曆法旣非古요 明玄又止藏其家요 萬分止行於民間하니 其法皆不足紀라
而永昌正象齊政曆은 皆止用於其國이로대 今亦亡하야 不復見이라
世宗卽位하야 外伐僭叛하고 內修法度라 端明殿學士王朴이 通於曆數라 乃詔朴撰定하니 歲餘에 朴奏曰
人情之動은 則可以言知之요 天道之動은 則當以數知之라
數之爲用也는 聖人以之觀天道焉이니 歲月日時가 由斯而成하고 陰陽寒暑가 由斯而節하고 四方之政이 由斯而行이라
夫爲國家者
가 을 必體其元
하고 布政考績
을 必因其歲
하고 禮動樂擧
를 必正其朔
하고 百工
을 必
其時
하고 을 必順其氣
하고 庶務有爲
를 이라
是以
로 聖人受命
에 必治曆數
라 故
有常度
하고 有常應
하야 行之於天下也
라
陛下順考古道
하여 寅畏上天
하고 咨詢庶官
하야 振擧墜典
하시니 雖非能者
나 敢不奉詔
아
乃包萬象以爲法
하되 以立元
하고 測
以候氣
하고 審
以定朔
하고 明
以步月
하고 校
以推星
하고 考
하고 辨
하니 而交蝕詳焉
이라
過之者
를 謂之
이요 不及者
를 謂之
니 至於應變分用
에 無所不通
이라 故以七十二爲經法
이니 經者
는 常用之法也
라
百者는 數之節也니 隨法進退에 不失舊位라 故謂之通法이라
自古朓朒之法은 率皆平行之數라 入曆既有前次하고 而又衰稍不倫이라
皇極舊術은 則迂迴而難用이요 降及諸曆하얀 則疏遠而多失이라
黃道者
는 日軌也
라 其半在赤道內
하고 半在赤道外
요 去
極
라
當與赤道近하얀 則其勢斜요 當與赤道遠하얀 則其勢直이라
九道者
는 月軌也
라 其半在黃道內
하고 半在黃道外
요 去
라
出黃道
를 謂之正交
요 入黃道
를 謂之中交
라 若正交在秋分之宿
하고 中交在春分之宿
면 則比黃道益斜
요 若正交在春分之宿
하고 中交在秋分之宿
면 則比黃道反直
이요 라
自古로 雖有九道之說이나 蓋亦知而未詳이니 徒有祖述之文이요 而無推步之用이라
今以黃道一周를 分爲八節하고 一節之中을 分爲九道하야 盡七十二道하야
今校逐日行分하야 積以爲變段하니 然後自疾而漸遲하고 勢盡而留하며 自留而行에도
臣考前世
이어늘 近自司天卜祝小術
하야 不能擧其大體
러니 遂爲等接之法
이라
라 後學者不能詳知
하야 因言曆有
하야 以爲注曆之常式
이나 今竝削而去之
라
謹以步日, 步月, 步星, 步發斂으로 爲四篇하야 合爲曆經一卷하고 曆十一卷과 草三卷과 顯德三年七政細行曆一卷으로 以爲欽天曆이라
하니 陛下考曆象日月星辰
은 唐堯之道也
라 天道玄遠
하야 非微臣之所盡知
라
世宗嘉之하고 詔司天監用之하되 以明年正月朔旦으로 爲始하다
予述本紀에 書人而不書天하니 予何敢異於聖人哉아 其文雖異나 其意一也라
自堯舜三代以來로 莫不稱天以擧事하니 孔子刪詩書에 不去也라 蓋聖人不絶天於人하고 亦不以天參人하니 絶天於人則天道廢하고 以天參人則人事惑이라 故常存而不究也라
春秋雖書日蝕星變之類나 孔子未嘗道其所以然者라 故其弟子之徒가 莫得有所述於後世也라
然則天果與於人乎아 果不與於人乎아 曰 天은 吾不知하니 質諸聖人之言이 可也라
此聖人極論天人之際最詳而明者也라 其於天地鬼神에 以不可知爲言하니 其可知者는 人而已라
夫日中則昃하고 盛衰必復하니 天은 吾不知요 吾見其虧益於物者矣라
草木之成者를 變而衰落之하고 物之下者를 進而流行之하니 地는 吾不知요 吾見其變流於物者矣라
人之貪滿者多禍하고 其守約者多福하니 鬼神은 吾不知요 吾見人之禍福者矣라
天地鬼神은 不可知其心이니 則因其著於物者以測之라 故據其跡之可見者以爲言하야 曰虧益 曰變流 曰害福이어니와 若人則可知者라 故直言其情하야 曰好惡라하니 其知與不知는 異辭也나 參而會之하면 與人無以異也라
其果與於人乎아 不與於人乎아 則所不知也라 以其不可知라 故常尊而遠之하며 以其與人無所異也라 則修吾人事而已니 人事者는 天意也라
書曰
이라하니 未有人心悅於下而天意怒於上者
며 未有人理逆於下而天道順於上者
라
然則王者君天下
하고 子生民
하야 布德行政
하야 以順人心
하니 是之謂奉天
이라 至於
하얀 常動而不息
하야 不能無
之變
이라
本紀所述人君行事가 詳矣라 其興亡治亂을 可以見이요 至於三辰五星이 逆順變見하얀 有司之所占者라
嗚呼라 聖人旣沒而異端起하야 自秦漢以來로 學者惑於災異矣라 天文五行之說이 不勝其繁也라
오호라! 오대五代의 예악禮樂과 문장文章은 내가 취하지 않으나, 후세에 이를 반드시 알고자 하는 자가 있을 것이라 빠뜨릴 수 없으므로 〈사천고司天考〉와 〈직방고職方考〉를 짓는다.
사천司天은 일日․월月․성신星辰의 상象을 관장한다. 하늘을 한 바퀴 도는 1세歲 안의 4시時와 24기氣와 72후候에 십일十日과 십이진十二辰이 운행하여 역曆이 되고 그 변화를 삼가 관찰하여 점占을 친다.
점占은 일정하지 않은 조짐이니, 이로써 길흉吉凶을 징험하고 천의天意를 구하고 인사人事를 깨닫는데, 그 술수術數는 유사有司가 간직하고 있다.
역曆은 일정함이 있는 수數이니, 이로써 추위와 더위를 추산推算하고 천도天道를 예측하고 인사人事를 권면하는데, 그 법은 천하 사람들이 신뢰한다.
점술占術은 필요한 상황이 생기면 쓰지만 역법曆法은 하루라도 차이가 나서는 안 되니, 털끝만큼이라도 차이가 나면 하늘과 사람의 질서가 혼란해지고 백 가지 일을 행하는 때가 어그러지므로 나라를 다스리는 자가 중시한다.
그러나 요堯임금이 희씨羲氏와 화씨和氏에게 명한 일이 ≪서경書經≫에 보이는 때로부터 중성中星과 윤여閏餘의 대법大法이 대략 남아 있는데, 삼대三代의 중간 천여 년 동안에 남은 문헌이 폐기되어 육경六經에도 기술되지 않고 공자孔子의 문도門徒들도 이를 말한 적이 없었다.
후세에 이르러서는 그 학문이 모두 음양가陰陽家에게서 나오게 되니 중요한 일임에도 말단의 학문이 되었다.
하늘과 사람 사이의 일은 심원深遠하고 미묘微妙한데, 한 가지 기예를 가진 선비에게 누적된 분차分差를 추산推算하여 위로 수천만 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갑자甲子일에 삭단朔旦과 야반夜半과 동지冬至가 모이고 해와 달과 오성五星이 자방子方에 모이는 때를 반드시 찾게 하여 이를 상원上元이라 부르고 역曆의 시작으로 삼았다.
대개 한漢나라 이후로 그 학설이 비로소 세상에 상세히 드러났는데 그 원류源流의 유래는 이와 같을 뿐이니 이것이 과연 요순堯舜과 삼대三代의 법이겠는가. 모두 고구考究할 수 없다.
그러나 이때 이후로 역가曆家의 술수術數가 비록 시대별로 많은 차이는 있었으나 이것을 근본으로 삼지 않은 역법이 없었다.
오대五代 초기에 당唐나라의 옛 역법曆法을 인습因襲하여 ≪숭현력崇玄曆≫을 쓰다가 진晉 고조高祖 때에 이르러 사천감司天監 마중적馬重績이 비로소 고쳐서 새로운 역법을 만들어 다시 상고上古 때 상원上元의 갑자甲子와 동지冬至에 칠요七曜가 모이는 때를 추산하지 않고서 당唐나라 천보天寶 14년(755)인 을미년乙未年을 상원上元으로 삼고 정월正月의 우수雨水를 기수氣首로 삼았다.
당초 당나라 건중建中 연간에 술사術士 조사위曹士蔿가 처음으로 옛 법을 바꾸어 현경顯慶 5년(660)을 상원上元으로 삼고 우수雨水를 세수歲首로 삼아 ≪부천력符天曆≫이라 불렀다.
그러나 세상에서는 소력小曆이라고 부르면서 민간에서만 통용되었다. 그러다가 마중적이 이 역법을 이용해 새 역법을 만들고서 마침내 조정에서 시행하여 황제가 ≪조원력調元曆≫이라는 이름을 내렸다.
그러나 시행 5년 만에 곧 오차가 생겨 사용할 수 없게 되어 다시 ≪숭현력≫을 사용하였다.
주周나라 광순廣順 연간에 국자박사國子博士 왕처눌王處訥이 개인적으로 집에서 ≪명현력明玄曆≫을 찬술하였고, 민간에는 또 ≪만분력萬分曆≫이 있었고, 촉蜀에는 ≪영창력永昌曆≫과 ≪정상력正象曆≫이 있었고, 남당南唐에는 ≪제정력齊政曆≫이 있었으니, 오대시대에 고찰해볼 만한 역가曆家는 여기에 그친다.
그러나 ≪조원력≫의 역법은 이미 옛날의 역법이 아니고, ≪명현력≫은 단지 그 집에서 간직하던 것이고, ≪만분력≫은 단지 민간에서 통용하던 것이니, 그 역법은 모두 기록할 만한 것이 없다.
그리고 ≪영창력≫과 ≪정상력≫과 ≪제정력≫은 모두 그 나라에서만 쓰던 것인데 지금은 또 망실되어 다시 볼 수 없다.
세종世宗이 즉위하여 밖으로는 참람하게 반역하는 자를 정벌하고 안으로는 법도를 정비하였다. 단명전학사端明殿學士 왕박王朴이 역수曆數에 능통하였으므로 이에 왕박에게 조서를 내려 역법을 찬정撰定하게 하니 한 해 남짓 지나 왕박이 다음과 같이 상주上奏하였다.
“신이 듣건대 성인聖人의 국가 경영은 하늘의 변화를 아는 데 달려있다고 합니다.
사람의 뜻[정情]은 말을 통해 그 움직임을 알 수 있듯이, 천체의 운행[도道]은 마땅히 수數를 통해 그 움직임을 알 수 있습니다.
수數의 용도는 성인이 이것으로 천체의 운행을 관찰하는 것이니, 연年․월月․일日․시時의 시간 규범이 이로 말미암아 성립되고 음양陰陽과 한서寒暑를 구분하는 절기節氣가 이로 말미암아 정해지고 사방의 정령政令이 이로 말미암아 시행됩니다.
대저 국가를 다스리는 자가 즉위 초에 원년元年을 새로 정하여 시간 규범을 세우기는 반드시 상원上元에 의거하고, 정령政令을 반포하거나 관원의 근무성적을 고과考課하기는 반드시 연도年度별로 하고, 예악禮樂의 거행은 반드시 적합한 달에 하고, 농부와 공인工人들에게 반드시 농사철과 작업철을 알려주고, 형벌과 정벌을 반드시 적당한 절기에 시행하고, 그 밖의 각종 정무政務를 반드시 마땅한 월月․일日에 행합니다.
이 때문에 성인이 천명을 받으면 반드시 역법曆法을 정비합니다. 그리하여 오기五紀에 항상된 도수度數가 있고 서징庶徵에 항상된 응험應驗이 있어서 정삭正朔이 천하에 시행됩니다.
당唐나라 말엽부터 여러 왕조王朝를 거치는 동안 혼란한 날짜가 천상天象을 앞질러, 천체의 운행을 추산해야 할 역산曆算이 백년 가까이 뒤죽박죽이었습니다.
폐하께서 옛 제왕의 법도를 본받고 살펴 상천上天을 경외敬畏하고 관원들에게 자문하여 실추된 전장典章을 재정비하시니, 신이 비록 역산에 능한 자가 아니기는 하나 감히 조칙을 받들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마침내 모든 천상天象을 포괄하여 역법曆法을 만들되 칠정七政이 ‘모두 자방子方에 모이는[제齊]’ 순간을 찾아 상원上元을 세우고, 규표圭表와 누전漏箭으로 해그림자와 낮의 길이를 측정하여 절기節氣의 변화를 살피고, 달의 영축盈縮을 살펴 삭일朔日을 정하고, 구도九道를 분명히 하여 달의 운행을 추보推步하고, 행성의 지질遲疾을 따져 오성五星의 운행을 추보하고, 황도黃道의 기울기를 고찰하고 하늘이 뜨고 지는 각도를 변별하니 일식과 월식의 추보가 정밀해졌습니다.
대저 천체의 운행 원리를 양대兩大 범주로 정립하여 음陰과 양陽이라 하였습니다. 음과 양이 각기 수數가 있으니, 음․양의 수가 합일되면 〈오행五行이〉 생성됩니다.
〈≪주역周易≫의 시초점蓍草占에서〉 양의 책수策數가 36이고 음의 책수가 24이니, 여기에 기수奇數(홀수)와 우수偶數(짝수)를 곱하여 양의 책수를 2배하고 음의 책수를 3배하면 똑같이 72를 얻습니다. 같아졌으면 음․양의 수가 합일된 것이므로 72는 생성의 수입니다.
생성은 곧 오행의 수數가 생성됨을 이르므로 72를 5배하면 기수朞數(1주기周期의 일수日數)를 얻습니다.
이보다 넘치는 수를 기영氣盈이라 하고 이에 못 미치는 수를 삭허朔虛라고 하는데, 변화하는 상황에 알맞게 구분하여 사용하면 통하지 않는 곳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72를 경법經法으로 삼았으니, ‘경經’은 상용常用하는 법法(기준 수數. 72)을 뜻합니다.
100은 수의 마디(자릿수의 마디)이니 이 법法(기준 수數. 100)에 따라 자릿수를 전진시키거나 물리면 자릿수만 변할 뿐 본래 숫자의 배열순서는 변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이를 통법通法이라고 하였습니다.
통법通法으로 경법經法을 한 자리 전진시키면 7,200을 얻는데, 이를 통법統法이라 하였습니다. 〈≪흠천력欽天曆≫ 모두冒頭의 첫머리에〉 상원적년上元積年을 제시하고 나서 본문에 들어가기에 앞서 먼저 이 법法(기준 수數 7,200)을 사용하여 역산曆算의 모든 법法(기준 수數)을 조직하였습니다[통統]. 통법通法으로 통법統法을 한 자리 전진시키면 720,000을 얻습니다.
절기節氣와 삭망朔望의 일수日數 아래에 있는 분수分數까지 거두어 반드시 다 드러내었으니, 이를 전율全率이라고 합니다. 통법通法으로 전율全率을 한 자리 전진시키면 72,000,000을 얻는데, 이를 대솔大率이라고 합니다. 원기元紀가 여기에서 생겨납니다.
‘원元’은 연․월․일․시의 간지干支가 모두 갑자甲子이고 일․월․오성이 모두 자방子方에 있어서 영축력盈縮曆과 선후수先後數가 모두 평균인 때에 해당하니, 이른바 칠정七政이 ‘모두 자방子方에 모이는[제齊]’ 때입니다.
옛날에 양성陽城에 규표圭表를 세운 것은 낙읍洛邑에서 가까웠기 때문입니다. 낙읍이 ‘대지大地의 중앙(지중地中)’으로서 충분치 않다고 여긴 것인데, 양성은 낙읍의 동편에 있었습니다.
개원開元 12년(724)에는 전국 각지에 사자使者를 보내 해그림자를 관측하게 하였습니다. 남쪽으로는 임읍林邑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횡야橫野에 이르고 가운데 지점으로 준의浚儀의 악대岳臺를 얻었는데, 준의는 최북단(철륵鐵勒)과 최남단(임읍林邑)을 잇는 직로直路상에서 ‘대지大地의 중앙[地之中]’에 위치하였습니다.
이 때문에 대주大周(후주後周)를 건국하여 변주汴州에 도읍을 정하고서 규표圭表를 세우고 누전漏箭을 설치하여 악대岳臺의 해그림자 길이[晷]와 낮의 길이[누漏]를 측정하여 평균 수치[중수中數]로 삼았습니다.
24기氣의 해그림자 길이와 낮의 길이가 정확히 알려지면 황도 상에서 태양이 도달한 곳과 그에 대응하는 절기를 알 수 있습니다.
해와 달이 모두 영축盈縮 현상이 있으니, 해가 평균 위치보다 앞서 있고[영盈] 달이 평균 위치보다 뒤처져 있으면[축縮] 평균보다 늦게 삭朔이 되고, 달이 평균 위치보다 앞서 있고[영盈] 해가 평균 위치보다 뒤처져 있으면[축縮] 평균보다 빨리 삭朔이 됩니다.
예로부터 달의 조뉵朓朒(달의 평균 위치에 대한 실제 위치의 차) 계산법은 대체로 다 평균수를 사용하여, 입력入曆(근지점近地點 통과 후 경과 시간)을 이미 태양의 영축차 반영 이전의 평균 위치에 따라 산정하고, 달의 조뉵 역시 하루 중의 속도 변화가 반영되도록 세분細分되지 않았습니다.
≪황극력皇極曆≫의 옛 계산법은 분명하지 못하여 사용하기 어려웠고, 그 후의 여러 역법으로 내려와서는 엉성하여 대부분 실제와 맞지 않았습니다.
지금 이 ≪흠천력欽天曆≫은 월리표月離表의 조뉵을 입력일入曆日마다 실제에 맞추어 정하였고, 태양의 영축盈縮을 필요시마다 가감加減하여 얻은 값을 실제 입리入離(입력入曆) 일수로 정하였으며, 하루를 9한限으로 구분하여 매한每限의 손익률損益率(평균 속도와 실제 속도의 차)이 각 한限별로 세분되도록 하였으니, 달의 조뉵 계산법이 정밀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적도赤道는 천구天球의 중간 대역帶域입니다. 그 모양이 둥글고 판판하여, 〈천체상의 절대 위치를 나타낼 때〉 적도 28수宿의 입수도入宿度로 경도經度를 나타냅니다.
황도黃道는 태양의 운행 궤도입니다. 그 절반은 적도의 안(북쪽)에 있고 절반은 적도의 밖(남쪽)에 있으며, 적도에서 가장 먼 지점은 24도 거리에 있습니다.
적도와 가까울 때는 그 기울기가 적도에 대해 비스듬하고, 적도에서 멀 때는 그 기울기가 적도와 나란합니다.
적도에 대해 기울어져 있을 때는 〈적경赤經의 증가 속도에 비해 황도 상의〉 태양의 행도行度가 당연히 느리고, 적도와 나란할 때는 태양의 행도가 당연히 빠릅니다. 따라서 이분二分(춘․추분) 전후에서는 황黃․적도차赤道差를 적도도赤道度(적도를 따라 잰 도수度數)에 더하여 황도도黃道度(황도를 따라 잰 도수)를 구하고, 이지二至(동․하지) 전후에서는 황․적도차를 적도도에서 빼어 황도도를 구합니다.
구도九道는 달의 운행 궤도입니다. 그 절반은 황도의 안(북쪽)에 있고 절반은 황도의 밖(남쪽)에 있으며, 황도에서 가장 먼 지점은 6도 거리에 있습니다.
황도 밖으로 나가는 곳을 정교正交(강교점降交點)라 하고, 황도 안으로 들어가는 곳을 중교中交(승교점昇交點)라고 합니다. 만약 정교가 추분점이 위치한 별자리에 있고 중교가 춘분점이 위치한 별자리에 있으면 구도九道(백도白道)는 적도에 대해 황도보다 더 기울어지고, 만약 정교가 춘분점이 위치한 별자리에 있고 중교가 추분점이 위치한 별자리에 있으면 구도(백도)는 적도에 대해 황도보다 도리어 나란하고, 만약 정교와 중교가 이지점二至點(동․하지점)이 위치한 별자리에 있으면 그 기울기가 적도에 대해 다소 비스듬합니다.
따라서 이지점二至點 또는 이분점二分點(춘․추분점)부터 얼마나 떨어져 있는지를 따져 구도(백도)의 기울기를 조사하면 황도도黃道度를 백도도白道度(백도를 따라 잰 도수度數)로 변환할 때 더하거나 빼야 할 수치를 구할 수 있습니다.
예로부터 구도九道에 대한 설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알긴 알아도 상세히 알지는 못한 것이었으니, 옛 설을 계승한 언설言說이 있을 뿐 추산推算에 사용하지는 못했습니다.
지금 이 ≪흠천력≫에서는 황도 전체를 8마디로 구분하고 한 마디 안을 9도道로 나누었으니 모두 72도道입니다.
이로써 황도와 백도가 상호 기울어진 모습이 숨겨지는 곳이 없도록 했으니, 달의 위치 계산법이 명백해졌다고 할 수 있습니다.
행성行星의 운행은 태양과 가까우면 빠르고 태양에서 멀면 더디니, 태양에서 가장 멀어지면 속도가 다 떨어져서 한 곳에 머물게 됩니다.
예로부터 여러 역법들은 시운동視運動 회합주기표會合周期表의 단목段目 구분이 실제에 맞지 않고 속도 변화에 준칙準則이 없었습니다. 그리하여 오늘의 행분行分(운행 분수分數)이 아직 큰데도 다음날 곧장 한 곳에 머물기도 하고, 한 곳에 머물다가 역행逆行할 때도 오직 평균 속도를 사용하였습니다.
또 어떤 단목에 들어선 뒤의 행도行度를 그대로 입력入曆의 도수度數(영축력 기점起點부터 행성까지 도수度數)로 삼았으니, 모두 행성 운행의 원리에 근본한 계산법이 아니기에 마침내 실제의 천상과 어그러지는 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이 ≪흠천력欽天曆≫에서는 행성의 매일 실제 행분을 따져 그 누적치에 따라 변단變段(단목)을 설정하였으니, 그런 뒤에 속도가 빨랐다가 점차 느려지고 속도가 다 떨어지면 한 곳에 머물며, 한 곳에 머물다가 움직일 때도 적은 수치를 누적한 뒤에 행도가 커지게 되었습니다.
또 여러 변단(단목)에 대한 변력變曆(≒각 단목 전후의 위치 차)을 별도로 정립하여, 변력을 가지고 변차變差(각 변단變段을 통과한 후의 행성의 위치 변화)를 추산하여 여러 변단(단목)의 변차가 서로 정확히 맞물리게 하였으니, 행성의 불균속 운행에 따른 위치를 알 수 있게 되었습니다.
예로부터 여러 역법들은 모두 태양이 황․백교점부터 15도 이내에 있으면 일․월식이 발생한다고 서로 전하였는데, 이는 해와 달이 서로 가리는 일식은 지구의 그림자에 달이 가리는 월식과 그 원리가 다름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지금 이 ≪흠천력欽天曆≫에서는 해와 달의 시직경視直徑 크기를 고려하여 황․백교점부터 거리가 일․월식에 미치는 영향을 따지고 적도에 대한 황도의 기울기와 하늘(적도)이 〈지평선 위로〉 뜨고 지는 각도를 가지고 백도白道를 올려다보거나 나란히 봄으로 인한 시차視差의 분수分數를 헤아렸으니, 교식交食의 추산이 실제에 맞게 되었습니다.
신이 살펴보건대 고대의 역법에는 식신수食神首(식신두蝕神頭)와 식신미食神尾(식신미蝕神尾)에 대한 글이 없었습니다. 근래에는 사천감司天監이 점이나 치는 잗단 술법을 일삼느라 역법의 대체大體를 운용하지 못하더니 결국은 등접等接의 산법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는 그때그때의 용도에 따라 간결하고 빠른 계산법을 추구한 결과인데, 이리하여 교식交食에 역행逆行의 도수度數가 있게 되었습니다. 후학後學들은 상세히 알지 못하고 역산曆算의 대상에 구요九曜가 있다고 말하면서 책력에 기입하는 일반적인 격식으로 삼고 있으나, 지금 이 ≪흠천력欽天曆≫에서는 모두 삭제해 버렸습니다.
삼가 〈보일步日〉, 〈보월步月〉, 〈보성步星〉, 〈보발렴步發斂〉으로 4편을 만들고 합하여 ≪역경曆經≫ 1권을 만들고, ≪역曆≫ 11권과 ≪초草≫ 3권과 현덕삼년顯德三年 ≪칠정세행력七政細行曆≫ 1권을 아울러 ≪흠천력欽天曆≫을 만들었습니다.
옛날 요堯임금 때 천체의 운행을 공경히 따르도록 하였으니, 폐하께서 일日․월月․성신星辰의 운행을 관측하고 추보하는 일을 살피신 것은 요임금이 행한 훌륭한 일입니다. 천체의 운행 원리는 심오하여 미천한 신이 다 알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세종世宗이 칭찬하고 사천감에 조칙을 내려 사용하게 하되 이듬해 정월 초하루부터 시작하게 하였다.
옛날
공자孔子께서 ≪
춘추春秋≫를 지어 하늘과 사람의 일을 갖추어 기술하셨는데,
孔子
내가 〈본기本紀〉를 찬술하면서 사람의 일은 쓰고 하늘의 일은 쓰지 않았으니, 내가 어찌 감히 성인聖人과 다르게 한 것이겠는가. 그 글은 비록 다르지만 그 뜻은 한가지이다.
요순堯舜과 삼대三代 이래로 하늘의 뜻이라 일컬으며 일을 거행하지 않은 경우가 없었으니, 공자孔子가 ≪시경詩經≫과 ≪서경書經≫을 산정刪定하면서 이런 일들을 삭제하지 않았다. 대개 성인은 사람을 하늘과 단절시키지 않았고 또한 하늘의 변화로 사람의 일을 판단하지도 않았으니, 사람을 하늘과 단절시키면 천도天道가 폐기되고 하늘로 사람을 판단하면 사람의 일이 미혹된다. 그러므로 항상 그 일을 보존하여 기록해 두기는 했어도 그 일을 궁구하지는 않았다.
≪춘추≫에 비록 일식日蝕과 별의 이변異變 등을 기록하였으나 공자는 그 까닭을 말한 적이 없다. 그러므로 그 제자들도 이에 대해 후세에 전술傳述할 수 없었다.
그렇다면 하늘은 과연 사람의 일에 관여하는가? 과연 사람의 일에 관여하지 않는가? 하늘은 내가 알지 못하니 성인의 말씀에 질정해야 할 것이다.
≪주역周易≫에 이르기를 “하늘의 도道는 가득 찬 것을 이지러뜨리고 겸손한 것에는 보태주며, 땅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변하게 하고 겸손한 데로 흐르며, 귀신은 가득 찬 것을 해치고 겸손한 것에 복을 주며, 사람의 도는 가득 찬 것을 미워하고 겸손한 것을 좋아한다.”라고 하였으니,
이는 성인이 하늘과 사람의 관계를 가장 상세하고 분명하게 논구論究한 것이다. 천지天地와 귀신鬼神에 대해 알지 못한다고 말하였으니, 알 수 있는 것은 사람일 뿐이다.
대저 해가 하늘 한가운데 이르면 기울고, 성쇠盛衰는 반드시 반복되니, 하늘은 내가 알지 못하고, 하늘이 만물萬物을 이지러뜨리고 보태는 것을 내가 본다.
다 자란 초목草木을 변화시켜 시들어 떨어지게 하고 낮은 곳에 있는 만물萬物을 나아가게 하여 흘러가게 만드니, 땅은 내가 알지 못하고 땅이 만물을 변화시키고 흘러가게 하는 것을 내가 본다.
욕심이 넘치는 사람은 재앙이 많고 검약함을 지키는 자는 복福이 많으니, 귀신은 내가 알지 못하고 사람이 재앙과 복을 받는 것을 내가 본다.
하늘과 땅과 귀신은 그 마음을 알 수 없으니, 사물에 드러난 것을 통해 그것을 헤아린다. 그러므로 그 볼 수 있는 자취에 근거하여 말하기를 “이지러뜨리고 보탠다.”라고 하고 “변화시키고 흘러가게 한다.”라고 하고 “해를 끼치고 복을 준다.”라고 하거니와, 사람의 경우는 알 수가 있다. 그러므로 곧장 그 실정을 말하기를 “좋아한다.” “미워한다.”라고 하니, 아는 것과 알지 못하는 것은 말은 다르지만 참작하여 종합해보면 사람의 경우와 다를 것이 없다.
과연 사람에게 관여하는지 관여하지 않는지는 알 수 없다. 알 수 없으므로 항상 이들을 존숭하면서 경원敬遠하며, 사람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사람의 일을 닦을 따름이니, 사람의 일이 바로 하늘의 뜻이다.
≪서경書經≫에 이르기를 “하늘은 우리 백성들이 보는 것을 통해 보며, 하늘은 우리 백성들이 듣는 것을 통해 듣는다.”라고 하였으니, 아래에서 사람의 마음이 기쁜데 위에서 하늘의 뜻이 노하는 경우는 있지 않으며, 아래에서 사람의 이치가 거스르는데 위에서 하늘의 도가 순응하는 경우는 있지 않다.
그렇다면 왕자王者는 천하의 군주가 되고 백성을 자식처럼 보살펴 덕을 펴고 정사政事를 행하여 인심人心에 순응하니, 이를 일러 하늘을 받든다고 한다. 삼신三辰과 오성五星에 이르러서는 항상 운행하여 그치지 않아서 영축盈縮하여 착오가 나는 변이變異가 없을 수 없다.
그리하여 점이 맞기도 하고 맞지 않기도 하여 일정한 기준으로 삼을 수 없는 것은 유사有司의 일이다.
〈본기本紀〉에 기술한 임금의 행사行事가 상세하므로 그 흥망興亡과 치란治亂을 알 수 있고, 삼신三辰과 오성五星이 역순逆順과 변이變異의 현상을 보이는 것에 이르러서는 유사有司가 점칠 바이다.
그러므로 그 직무를 기록하여 사천관司天官이 고찰할 자료로 남긴다.
오호라! 성인이 이미 세상을 떠난 뒤로 이단異端이 일어나 진秦나라와 한漢나라 이래로 학자들이 재이災異의 설에 미혹되었다. 그리하여 천문天文과 오행五行의 학설이 이루 다 할 수 없을 만큼 많다.
나의 기술은 ≪춘추春秋≫와 다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살펴보는 자는 알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