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8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嗚呼
라 自唐失其政
으로 天下乘時
하야 이 衮冕峩巍
라
吳曁南唐
은 姦豪竊攘
이라 이러니 貧能自彊
하고 富者先亡
이라
閩陋荊蹙이요 楚開蠻服이라 剝剽弗堪은 吳越其尤요 牢牲視人은 嶺蜒遭劉라
百年之間
에 竝起爭雄
하니 山川亦絶
하야 風氣不通
이라 語曰 淸風興
에 群陰伏
하고 日月出
에 爝火息
이라하니 故眞人作而天下同
이라 作
라
楊行密
은 字
가 化源
이니 廬州合
人也
라 爲人長大有力
하야 能手擧百觔
이라
에 江淮群盜起
할새 行密以爲盜見獲
이어늘 刺史
가 奇其狀貌
하야 釋縛縱之
라
後應募爲州兵하야 戍朔方이라가 遷隊長이러니 歲滿戍還한대 而軍吏惡之하야 復使出戍라
行密將行에 過軍吏舍하니 軍吏陽爲好言하고 問行密行何所欲이어늘 行密奮然曰 惟少公頭爾라하고 卽斬其首하고 携之而出하야 因起兵爲亂하고 自號八營都知兵馬使라 刺史郞幼復이 棄城走라 行密遂據廬州하다
三年
에 唐卽拜行密廬州刺史
하다 淮南節度使
爲畢師鐸所攻
하니 駢表行密行軍司馬
이라
行密率兵數千赴之
하야 行至
한대 師鐸已囚駢
하고 召宣州秦彦
하야 入揚州
라
行密不得入
하고 屯于
이라 師鐸率衆數萬
하여 出擊行密
하니 行密陽敗棄營走
어늘
師鐸兵饑라 乘勝爭入營하야 收軍實하니 行密反兵擊之라 師鐸大敗하야 單騎走入城하야 遂殺高駢하다
行密聞駢死
하고 縞軍向城哭三日
하고 攻其西門
하니 彦及師鐸
이 奔于
이라 行密遂入揚州
하다
是時에 城中倉廩空虛하야 饑民相殺而食이라 其夫婦父子自相牽하야 就屠賣之면 屠者刲剔如羊豕라
行密不能守하야 欲走어늘 而蔡州秦宗權遣其弟宗衡掠地淮南이라 彦及師鐸還自東塘하야 與宗衡合하니 行密閉城不敢出이라
已而
오 宗衡爲偏將孫儒所殺
하고 儒攻
破之
하니 行密益懼
어늘
其客袁襲曰 吾以新集之衆
으로 守空城
이어늘 而諸將多駢舊
이니 非有厚恩素信
하야 力制而心服之也
라 今儒兵方盛
하야 所攻必克
하니 此諸將持兩端
하야 因彊弱擇嚮背之時也
라 鎭使高霸
는 駢之舊將
이니 必不爲吾用
이라하다
行密欲使霸守天長한대 襲曰 吾以疑霸而召之하니 其可復用乎아 且吾能勝儒면 無所用霸요 不幸不勝이면 天長豈吾有哉리오 不如殺之하야 以幷其衆이라하니 行密因犒軍하야 擒霸族之하고 得其兵數千하다
已而오 孫儒殺秦彦畢師鐸하고 幷其兵以攻行密하니 行密欲走海陵이어늘 襲曰 海陵難守어니와 而廬州는 吾舊治也니 城廩完實하야 可爲後圖라하니 行密乃走廬州라
久之에 未知所向하야 問襲曰 吾欲卷甲倍道하야 西取洪州하니 可乎아하니
襲曰
하니 勢未可圖
로되 而秦彦之入廣陵也
에 召池州刺史趙鍠
하야 委以宣州
러니 今彦且死
에 鍠失所恃
하니 而守宣州
는 非其本志
라 且其爲人非公敵
이니 此可取也
라하다
行密乃引兵攻鍠
하야 戰于
하야 大敗之
하고 進圍宣州
하니 鍠棄城走
어늘 追及殺之
라 行密遂入宣州
하다
元年
에 唐拜行密宣州觀察使
하다 行密遣田頵安仁義李神福等攻浙西
하야 取蘇常潤州
하고 하고 景福元年
에 取楚州
하다
孫儒自逐行密入廣陵이러니 久之에 亦不能守라 乃焚其城하고 殺民老疾以餉軍하고 驅其衆渡江하야 號五十萬以攻行密이라
諸將田頵劉威等이 遇之輒敗라 行密欲走銅官한대 其客戴友規曰 儒來에 氣銳而兵多하니 蓋其鋒不可當而可以挫요 其衆不可敵而可久以敝之라 若避而走면 是就擒也라하고 劉威亦曰 背城堅柵이면 可以不戰疲之라하니 行密以爲然하다
久之에 儒兵饑又大疫하니 行密悉兵擊之한대 儒敗被擒이라 將死에 仰顧見威曰 聞公爲此策以敗我호니 使我有將如公者면 其可敗耶아하다
行密收儒餘兵數千하야 以皂衣蒙甲하고 號黑雲都하야 常以爲親軍하다
二年
에 加檢校太傅 同中書門下平章事
하다 行密以田頵守宣州
하고 安仁義守潤州
라 昇州刺史馮弘鐸來附
하니 分遣頵等攻掠
하야 自淮以南江以東諸州
를 皆下之
요 進攻蘇州
하야 擒其刺史成及
하다
四年에 兗州朱瑾이 奔于行密이라 初에 瑾爲梁所攻하야 求救于晉하니 晉遣李承嗣將勁騎數千助瑾커늘 瑾敗하야 因與俱奔行密이라
行密兵은 皆江淮人이니 淮人輕弱이러니 得瑾勁騎而兵益振하다
是歲
에 梁太祖遣葛從周龐師古攻行密壽州
하니 行密擊敗梁兵
하고 殺師古
한대 而從周收兵走
어늘 追至渒河
하야 又大敗之
하다
五年
에 攻蘇州
하야 及周本戰于白方湖
어늘 本敗
하야 蘇州復入于越
하다
元年
에 遣李神福攻越戰
하야 大敗之
하고 擒其將顧全武以歸
하다
二年에 馮弘鐸叛하야 襲宣州하야 及田頵戰于曷山이어늘 弘鐸敗하야 將入于海하니
行密自至東塘邀之하야 使人謂弘鐸曰 勝敗는 用兵常事也니 一戰之衂에 何苦自棄下海島오 吾府雖小나 猶足容君이라하니 弘鐸感泣하다
行密從十餘騎하야 馳入其軍하야 以弘鐸歸하야 爲節度副使하고 以李神福代弘鐸爲昇州刺史하다
是歲에 唐昭宗在岐하야 遣江淮宣諭使李儼하야 拜行密東面諸道行營都統檢校太師中書令하고 封吳王하다
三年에 以李神福爲鄂岳招討使하야 以攻杜洪한대 荊南成汭救洪이어늘 神福敗之于君山하다 梁兵攻靑州한대 王師範來求救하니 遣王茂章救之하야 大敗梁兵하고 殺朱友寧이라
라 太祖大怒
하야 自將以擊茂章
하니 兵號二十萬
이로되 復爲茂章所敗
하다
田頵叛하야 襲昇州하야 執李神福妻子하야 歸于宣州라 行密召神福以討頵한대 頵遣其將王壇逆之하고 又遺神福書하야 以其妻子招之하니
神福曰 吾以一卒로 從吳王起事하야 今爲大將하니 忍背德而顧妻子乎아하고 立斬其使以自絶하니 軍士聞之하고 皆感奮이라
行至
에 頵執神福子承鼎以招之
하니 神福叱左右射之
하고 遂敗壇兵于吉陽
이라 行密別遣臺濛擊頵
하니 頵敗死
하다
初에 頵及安仁義朱延壽等이 皆從行密起微賤이러니 及江淮甫定에 思漸休息이로되 而三人者皆猛悍難制라 頗欲除之로되 未有以發이라
하니 再思召頵攻鏐杭州
하야 垂克
이어늘 而行密納鏐賂
하고 命頵解兵
하니 頵恨之
라
頵嘗計事廣陵할새 行密諸將이 多就頵求賂요 而獄吏亦有所求어늘 頵怒曰 吏欲我下獄耶아하고 歸而遂謀反하다
仁義聞之亦反
하야 焚東塘以襲常州
라 常州刺史李遇出戰
이라가 望見仁義
하고 大罵之
하니 仁義止其軍曰 李遇乃敢辱我如此
하니 其必有伏兵
이라하고 乃引軍却
한대 而伏兵果發
하야 追至
이라
仁義
而食
이어늘 遇兵不敢追
라 仁義復入潤州
라 行密遣王茂章李德誠米志誠等圍之
라
吳之軍中推朱瑾善槊하고 志誠善射하야 皆爲第一이어늘 而仁義常以射自負曰 志誠之弓十이 不當瑾槊之一이요 瑾槊之十이 不當仁義弓之一이라하고
每與茂章等戰에 必命中而後發하니 以此吳兵畏之하야 不敢近이라
行密亦欲招降之어늘 仁義猶豫未決한대 茂章乘其怠하야 穴地道而入하야 執仁義하야 斬于廣陵하다
延壽者는 行密夫人朱氏之弟也라 頵及仁義之將叛也에 行密疑之하야 乃陽爲目疾하야 每接延壽使者에 必錯亂其所見以示之라
嘗行에 故觸柱而仆하니 朱夫人扶之어늘 良久乃蘇라 泣曰 吾業成而喪其目하니 是天廢我也라 吾兒子皆不足以任事하니 得延壽付之면 吾無恨矣라하다
夫人喜하야 急召延壽어늘 延壽至에 行密迎之寢門하야 刺殺之하고 出朱夫人以嫁之하다
二年
에 遣劉存攻鄂州
하야 焚其城
하니 城中兵突圍而出
이어늘 諸將請急擊之
한대 存曰 擊之
라가 復入則城愈固
니 聽其去
면 城可取也
라하다
是日
에 城破
하고 執杜洪
하야 斬于廣陵
이라 九月
에 梁兵攻破襄州
하니 趙匡凝奔于行密
이라 十一月
에 行密卒
하니 年五十四
라 諡曰
이라
子渥立이라 溥僭號하야 追尊行密爲太祖武皇帝하고 陵曰 興陵이라하다
인저 行密之書
에 稱行密爲人
호되 寬仁雅信
하야 能得士心
이라
其將蔡儔叛於廬州에 悉毁行密墳墓러니 及儔敗에 而諸將皆請毁其墓以報之어늘 行密嘆曰 儔以此爲惡이어늘 吾豈復爲耶리오하다
嘗使從者張洪負劍而侍러니 洪拔劍擊行密한대 不中이라 洪死에 復用洪所善陳紹負劍하고 不疑라
又嘗罵其將劉信이어늘 信忿하야 奔孫儒하니 行密戒左右勿追曰 信豈負我者邪리오 其醉而去하니 醒必復來라하야늘 明日果來라
行密起於盜賊
하야 其下皆驍武雄暴
로되 而樂爲之用者
는 以此也
라 이러니 及渥已下
하야 政在徐溫
이라
於此之時에 天下大亂하야 中國之禍가 簒弑相尋이어늘 而徐氏父子가 區區詐力으로 裴回三主로되 不敢輕取之는 何也오 豈其恩威亦有在人者歟인저
오호라! 당唐나라가 그 정병政柄을 잃어버리고부터 천하天下 사람들이 이때를 틈타 경발黥髡과 도판盜販이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면관冕冠을 쓰고 당당하게 행세하였다.
오吳나라와 남당南唐은 간웅姦雄이 정권을 쟁탈爭奪하였다. 촉蜀나라는 지세가 험준하면서 부유하였고 한漢나라는 지세가 험준하면서 가난하였는데 가난했던 나라는 자강自强할 수 있었던 반면 부유했던 나라는 먼저 망하였다.
민국閩國은 협소하였고 형국荊國은 좁았으며 초국楚國은 남만南蠻의 땅을 개척하였다. 백성들이 착취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오월吳越이 제일 심하였고 사람을 희생犧牲처럼 보아 〈마음대로 죽인〉 것은 영남嶺南의 만인蠻人이 유씨劉氏의 남한南漢을 만난 경우였다.
백 년 사이에 나란히 일어나 자웅雌雄을 다투니 산하山河 역시 단절되어 풍속風俗이 통하지 않았다. 속어俗語에 “맑은 바람이 일어남에 뭇 음기陰氣가 잠잠해지고 해와 달이 나옴에 횃불이 꺼진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진인眞人이 일어나면 천하天下가 대동大同하게 된다. 십국十國의 세가世家를 짓는다.
양행밀楊行密의 시말始末을 그림을 그린 것처럼 입전立傳하였으니 ≪사기史記≫, ≪한서漢書≫보다 못하지 않다.
양행밀楊行密은 자字가 화원化源이니 여주廬州 합비合肥 사람이다. 사람됨이 장대長大하고 힘이 있어 한 손으로 100근斤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당唐 건부乾符 연간年間에 강회江淮에서 도적떼가 일어났을 때 양행밀이 도적으로 간주되어 붙잡혔는데 자사刺史 정계鄭棨가 그의 용모를 남다르게 여겨 포승捕繩을 풀고 놓아 주었다.
뒤에 모병募兵에 응하여 주병州兵이 되어 삭방朔方을 수비하다가 대장隊長으로 승진하였는데 복무 기간이 차서 변방에서 돌아오자 군리軍吏가 그를 미워하여 다시 변방으로 나가 수비하게 하였다.
양행밀이 출발하려 할 때 군리의 집을 지나니 군리가 겉으로 덕담을 해주면서 양행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양행밀이 발끈하며 말하기를 “오직 그대의 머리가 없어지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고 곧장 그의 머리를 베고 머리를 가지고 나와 인하여 기병起兵하여 난을 일으키고 스스로 팔영도지병마사八營都知兵馬使라고 호칭하니, 자사刺史 낭유복郞幼復이 성을 버리고 떠났다. 양행밀이 마침내 여주廬州를 점거하였다.
중화中和 3년(883)에 당唐나라가 곧바로 양행밀楊行密을 여주자사廬州刺史에 임명하였다.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병高駢이 필사탁畢師鐸에게 공격을 받으니 고병이 표주表奏하여 양행밀을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삼았다.
양행밀이 수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천장天長에 이르렀다. 그런데 필사탁이 이미 고병을 잡아 가두고 선주宣州의 진언秦彦을 불러 양주揚州로 들어갔다.
양행밀이 들어가지 못하고 촉강蜀岡에 주둔하였다. 필사탁이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나가 양행밀을 치니 양행밀이 거짓으로 패한 체하며 군영軍營을 버리고 달아났다.
필사탁의 군대가 굶주려 있던 터라 승세勝勢를 타고 앞다퉈 군영으로 들어가 군수 물자를 차지하니 양행밀이 군대를 돌려 필사탁을 쳤다. 필사탁이 크게 패하여 단기單騎로 달아나 성에 들어가서 마침내 고병을 죽였다.
양행밀이 고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에게 상복喪服을 입히고 성을 향해 사흘 동안 곡하고 그 서문西門을 공격하니 진언과 필사탁이 동당東塘으로 달아났다. 양행밀이 드디어 양주揚州에 들어갔다.
이때에 양주楊州 성중城中에 창고가 텅 비어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죽여 잡아먹는 터라 부부와 부자 간이 서로 잡아끌어 도살장에 가서 팔아버리면 도살하는 자가 양이나 돼지 다루듯이 살을 발랐다.
양행밀楊行密이 양주를 지키지 못해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채주蔡州의 진종권秦宗權이 그 아우 진종형秦宗衡을 보내 회남淮南 땅을 약탈하였다. 진언秦彦과 필사탁畢師鐸이 동당東塘에서 돌아와서 진종형과 연합하니 양행밀이 성문을 닫고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윽고 진종형이 편장偏將 손유孫儒에게 살해당하고 손유가 고우高郵를 공격하여 깨뜨리자 양행밀楊行密이 더욱 두려워하였는데,
그 문객門客 원습袁襲이 말하기를 “우리가 새로 모은 무리를 가지고 빈 성을 지키고 있는데 장수들은 대부분 고병高駢이 옛날 거느리던 자들이니 후한 은혜와 평소의 신뢰가 있어 힘으로 누르고 마음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지금 손유의 군대가 바야흐로 강성하여 공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하니 이는 장수들이 두 마음을 품고서 양쪽의 강약强弱에 따라 향배向背를 정하려는 때입니다. 해릉진수사海陵鎭守使 고패高霸는 고병의 옛 장수이니 반드시 우리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양행밀이 이에 군령軍令을 내려 고패를 부르니 고패가 휘하 군대를 거느리고 광릉廣陵으로 들어왔다.
양행밀이 고패에게 천장天長을 지키게 하려고 하자 원습이 말하기를 “우리가 고패를 의심하여 불렀으니 다시 그를 쓸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손유를 이길 수 있으면 고패를 쓸 곳이 없을 것이고 불행히 이기지 못한다면 천장天長이 어찌 우리 소유가 되겠습니까. 그를 죽여서 그의 군대를 합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양행밀이 군사들을 호궤犒饋하는 틈을 이용하여 고패를 사로잡아 멸족滅族시키고 그의 수천 명의 병력을 차지했다.
얼마 뒤에 손유가 진언과 필사탁을 죽이고 그들의 군대를 합쳐 양행밀을 공격하자 양행밀이 해릉海陵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원습이 말하기를 “해릉은 지키기 어렵거니와 여주廬州는 우리가 예전에 관할하던 곳이니 성은 튼튼하고 창고는 충실充實하여 뒷일을 도모할 만합니다.”라고 하니 양행밀이 이에 여주로 달아났다.
오래 지나 양행밀이 갈 곳을 알지 못하여 원습에게 묻기를 “내가 무장을 가볍게 하고 밤낮으로 행군하여 서쪽으로 홍주洪州를 점령하려고 하는데 괜찮겠는가?”라고 하니
원습이 말하기를 “종전鍾傳이 지금 막 강서江西를 차지하였으니 그 형세가 아직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언이 광릉에 들어갔을 때 지주자사池州刺史 조굉趙鍠을 불러 선주宣州를 맡겼는데 지금 진언마저 죽어 조굉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렸으니 선주를 지키는 것은 그의 본뜻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 사람됨이 공의 적수가 못되니 이곳(선주)은 점령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양행밀이 이에 군대를 이끌고 조굉을 공격하여 갈산曷山에서 전투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진군하여 선주를 포위하니 조굉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기에 추격하여 그를 죽였다. 양행밀이 마침내 선주로 들어갔다.
용기龍紀 원년元年(889)에 당唐나라가 양행밀楊行密을 선주관찰사宣州觀察使에 임명하였다. 양행밀이 전군田頵, 안인의安仁義, 이신복李神福 등을 보내 절서浙西를 공격하여 소주蘇州, 상주常州, 윤주潤州를 점령하고 대순大順 2년(891)에 저주滁州, 화주和州를 점령하고 경복景福 원년元年(892)에 초주楚州를 점령하였다.
손유孫儒가 양행밀을 쫓아내고 광릉廣陵에 들어갔는데 오래 지나자 그 역시 광릉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이에 그 성을 불지르고 늙고 병든 백성들을 죽여 군대에게 먹이고 그 군대를 몰아 강을 건너 오십만 명이라 불리는 군대로 양행밀을 공격하였다.
전군, 유위劉威 등의 장수들이 교전할 때마다 패하여 양행밀이 동관銅官으로 달아나려고 하자 그 문객門客 대우규戴友規가 말하기를 “손유가 올 때 사기士氣가 충천衝天하고 병졸兵卒이 많으니 그 예봉은 당해낼 수는 없으나 꺾을 수는 있으며, 그 무리는 대적할 수는 없으나 오래 끌면서 지치게 할 수는 있습니다. 만약 그를 피하여 달아나면 바로 그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고, 유위 역시 말하기를 “성을 등지고 영책營柵을 견고하게 하면 싸우지 않고도 그를 지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양행밀이 옳다고 여겼다.
오래 뒤에 손유의 군대가 굶주린 데다 역병까지 창궐하니 양행밀楊行密이 군대를 모두 내보내 치자 손유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죽게 되었을 때 고개를 들어 유위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듣자 하니 공公이 이 계책을 내어 나를 패배시켰다고 하니 만약 나에게 공과 같은 장수가 있었다면 패배당했겠는가.”라고 하였다.
양행밀이 손유의 남은 군대 수천 명을 거두어 조의皂衣로 갑옷을 입히고는 흑운도黑雲都라고 부르면서 항상 친군親軍으로 삼았다.
이해에 다시 양주揚州에 들어가니 당唐나라가 양행밀楊行密을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에 임명하였다.
건녕乾寧 2년(895)에
검교태부檢校太傅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였다. 양행밀이
전군田頵에게
선주宣州를 지키게 하고
안인의安仁義에게
윤주潤州를 지키게 하였다.
승주자사昇州刺史 풍홍탁馮弘鐸이 와서
귀부歸附하니 전군 등을 나누어 보내
공략攻掠하여
회수淮水의 남쪽과
장강長江의 동쪽에 있는 각
주州들을 모두 함락하였고 진군하여
소주蘇州를 공격하여 그
자사刺史 성급成及을 사로잡았다.
錢鏐
건녕 4년(897)에 연주兗州의 주근朱瑾이 양행밀에게 망명하였다. 처음에 주근이 양梁나라에 공격을 받아 진晉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니 진나라가 이승사李承嗣를 보내 강용强勇한 기병騎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주근을 도왔는데 주근이 패배하자 인하여 둘이 함께 양행밀에게 망명하였다.
양행밀의 병졸들은 모두 강회江淮 사람으로, 회淮 사람들은 유약柔弱하였는데 주근의 강용强勇한 기병을 얻고 나서 군대가 더욱 기세를 떨쳤다.
이해에 양梁 태조太祖가 갈종주葛從周, 방사고龐師古를 보내 수주壽州에서 양행밀을 공격하니 양행밀이 양梁나라 군대를 청구淸口에서 쳐서 패배시키고 방사고를 죽였다. 갈종주가 군대를 거두어 달아나자 추격하여 비하渒河에 이르러 다시 크게 패배시켰다.
건녕 5년(898)에 전유錢鏐가 소주蘇州를 공격하여 백방호白方湖에서 주본周本과 전투하였는데 주본이 패배하여 소주가 다시 월越나라에 들어갔다.
천복天復 원년元年(901)에 이신복李神福을 보내 월越나라를 공격하여 임안臨安에서 전투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그 장수 고전무顧全武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천복 2년(902)에 풍홍탁馮弘鐸이 반란하여 선주宣州를 습격하여 갈산曷山에서 전군과 전투하였는데 풍홍탁이 패배하고서 장차 바다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양행밀이 직접 동당東塘에 이르러 그를 부르면서 사람을 보내 풍홍탁에게 이르기를 “승패勝敗는 용병用兵할 때 늘상 있는 일이니 한 번 전투에 패배했다고 어찌 이리 심하게 자포자기하고 해도海島로 내려간단 말인가. 나의 관부官府가 비록 작으나 그래도 족히 그대를 포용할 수 있다.”라고 하니 풍홍탁이 감격하여 흐느꼈다.
양행밀이 기병 10명을 거느리고 달려가 그 군대에 들어가 풍홍탁을 데리고 돌아와 절도부사節度副使로 삼고 풍홍탁을 대신하여 이신복을 승주자사昇州刺史로 삼았다.
이해에 당唐 소종昭宗이 기주岐州에 있으면서 강회선유사江淮宣諭使 이엄李儼을 보내 양행밀楊行密을 동면제도행영도통東面諸道行營都統 검교태사檢校太師 중서령中書令에 임명하고 오왕吳王에 봉하였다.
천복天復 3년(903)에 이신복李神福을 악악초토사鄂岳招討使로 삼아 두홍杜洪을 공격하자 형남荊南의 성예成汭가 두홍을 구원하였는데 이신복이 군산君山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양梁나라 군대가 청주靑州를 공격하자 왕사범王師範이 와서 구원병을 청하니 왕무장王茂章을 보내 그를 구원하여 양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키고 주우녕朱友寧을 죽였다.
주우녕은 양梁 태조太祖의 아들이기에 태조가 크게 노하여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왕무장을 치니 군사가 20만 명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나 다시 왕무장에게 패배하였다.
전군田頵이 배반하여 승주昇州를 습격하여 이신복의 처자식을 붙잡아 선주宣州로 돌아갔다. 양행밀이 이신복을 불러 전군을 토벌하게 하자 전군이 휘하 장수 왕단王壇을 보내 맞서게 하고 또 이신복에게 서신을 보내 처자식을 볼모로 하여 투항하라고 회유하였다.
이신복이 말하기를 “내가 일개 군졸로 오왕吳王을 따라 기병起兵하여 지금 대장大將이 되었으니 어찌 차마 은덕을 저버리고 처자를 돌아보겠느냐.”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사자使者를 베어 단호히 거절하니 군사들이 이 일을 듣고 모두 감동하여 분발하였다.
행군하여 길양기吉陽磯에 이르렀을 때 전군이 이신복의 아들 이승정李承鼎을 잡고서 투항하라고 회유하니 이신복이 좌우左右의 부하들을 질타하여 아들을 쏘게 하고 마침내 왕단의 군대를 길양吉陽에서 패배시켰다. 양행밀이 따로 대몽臺濛을 보내 전군을 치니 전군이 패배하여 죽었다.
당초에 전군田頵 및 안인의安仁義, 주연수朱延壽 등이 모두 양행밀楊行密을 따라 미천한 신분에서 발신發身하였다. 강회江淮가 막 평정됨에 미쳐 점차 편안히 쉬며 생활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세 사람이 모두 사나워 제압하기가 어렵기에 그들을 몹시 제거하고 싶었는데 아직 손을 쓸 기회가 없었다.
천복天復 2년(902)에 전유錢鏐가 휘하 장수 허재사許再思 등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포위하니 허재사가 전군을 불러 항주杭州에서 전류를 공격하여 곧 승리할 즈음에 양행밀이 전류의 뇌물을 받고 전군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명하니 전군이 이 일을 유감으로 여겼다.
전군이 일찍이 광릉廣陵에서 일을 도모할 때 양행밀의 장수들이 전군에게 와서 뇌물을 달라는 경우가 많았고 옥리獄吏 역시 요구하는 것이 있었는데 전군이 노하여 말하기를 “옥리가 나를 하옥下獄하려고 하는가?”라고 하고 돌아가 마침내 모반謀反하였다.
안인의安仁義가 이 소식을 듣고 역시 모반하여 동당東塘을 불지르고 상주常州를 습격하였다. 상주자사常州刺史 이우李遇가 전투하러 나갔다가 안인의를 바라보고 그를 몹시 꾸짖으니 안인의가 군대를 멈추고 말하기를 “이우가 감히 나를 이렇게까지 모욕하니 그가 반드시 복병伏兵을 두었을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 군대를 이끌고 퇴각退却하자 복병이 과연 출동出動해서 추격하여 협강夾岡에 이르렀다.
안인의가 깃발을 꽂고 갑옷을 벗고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이우李遇의 군대가 감히 추격하지 못하니 안인의가 다시 윤주潤州에 들어갔다. 양행밀楊行密이 왕무장王茂章, 이덕성李德誠, 미지성米志誠 등을 보내 안인의를 포위하였다.
오吳나라 군중軍中에서는 다들 주근朱瑾은 창을 잘 쓰고 미지성은 활을 잘 쏜다고 추켜세워 모두 제일이라 하였다. 그런데 안인의는 늘 활쏘기를 자부自負하여 말하기를 “미지성의 활 열 개가 주근의 창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주근의 창 열 개가 나의 활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무장 등과 싸울 때마다 반드시 화살을 명중命中시킨 뒤에야 출병出兵하니 이 때문에 오吳나라 군대가 안인의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양행밀 역시 그를 회유하여 투항시키려 하였는데 안인의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자 왕무장이 그 해이해진 틈을 타서 땅굴을 파고 들어가 안인의를 잡아 광릉廣陵에서 참수하였다.
주연수朱延壽는 양행밀楊行密의 부인 주씨朱氏의 아우였다. 전군田頵 및 안인의安仁義가 배반하려 할 때 양행밀이 주연수를 의심하여 이에 거짓으로 눈병을 가장하여 매번 주연수의 사자使者를 접견할 때마다 반드시 보는 물체를 혼동하는 것처럼 연기하였다.
일찍이 걸을 적에 일부러 기둥에 부딪혀 넘어지니 주부인朱夫人이 그를 부축하였는데 한참 있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양행밀이 흐느끼면서 말하기를 “내가 공업功業을 이루고 나서 이 눈을 잃어버렸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이다. 내 아들들이 모두 정사政事를 맡기에는 부족하니 주연수에게 맡길 수 있다면 나는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부인이 기뻐하면서 급히 주연수를 불렀는데, 주연수가 이르자 양행밀이 그를 침문寢門에서 맞이하여 찔러 죽이고 주부인을 내보내 다른 데로 시집보냈다.
천우天祐 2년(905)에 유존劉存을 보내 악주鄂州를 공격하여 그 성을 불지르니 성중城中의 병사들이 포위를 뚫고 나왔다. 장수들이 급히 그들을 치자고 청하자 유존이 말하기를 “그들을 쳤다가 다시 성에 들어가게 되면 성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니 그들이 떠나게 놔두면 성을 점령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날에 성을 격파하고 두홍杜洪을 붙잡아 광릉廣陵에서 참수하였다. 9월에 양梁나라 군대가 양주襄州를 격파하니 조광응趙匡凝이 양행밀楊行密에게 망명하였다. 11월에 양행밀이 졸하니 향년 54세였다. 시호는 무충武忠이다.
아들 양악楊渥이 즉위하였다. 양부楊溥가 황제를 참칭僭稱하고서 양행밀을 태조무황제太祖武皇帝로 추존追尊하고 능묘陵墓를 흥릉興陵이라고 하였다.
오호라! 도적盜賊도 도道가 있다고 하니 참으로 그러하다. 양행밀楊行密에 대한 글에서 양행밀의 사람됨을 칭상稱賞하되 관후寬厚하고 인자仁慈하며 고아高雅하고 성실誠實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잘 얻었다고 하였다.
휘하의 장수 채주蔡儔가 여주廬州에서 반란했을 때 양행밀 집안의 분묘墳墓를 죄다 허물었다. 채주가 패배하자 장수들이 모두 그 집안의 분묘를 허물어 보복하자고 청하였는데, 양행밀이 탄식하기를 “채주가 이런 식으로 악행惡行을 저질렀다고 내가 어찌 다시 이런 악행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종자從者 장홍張洪에게 검을 등에 지고 시위侍衛하게 한 적이 있었는데 장홍이 검을 뽑아 양행밀을 쳤으나 적중하지 못했다. 장홍이 죽임을 당한 뒤에 다시 장홍과 친하였던 진소陳紹를 등용하여 검을 등에 지고 시위하게 하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또 일찍이 휘하의 장수 유신劉信을 꾸짖었는데 유신이 분개하여 손유孫儒에게 달아나니 양행밀이 좌우左右의 부하들에게 그를 추격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를 “유신이 어찌 나를 저버릴 자이겠는가. 그가 취하여 간 것이니 술이 깨면 꼭 다시 올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튿날 과연 그가 돌아왔다.
양행밀이 도적에서 발신發身하여 그 부하들이 모두 용맹勇猛하고 강포强暴하였으나 기꺼이 그의 수하가 되어 쓰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2대에 걸쳐 네 임금이 거의 50년을 누렸는데 양악楊渥 이후로는 정권政權이 서온徐溫에게 있었다.
이때에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 중국中國에 재앙이 내려 찬탈하고 시해하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서씨徐氏 부자父子가 보잘것없는 속임수와 무력武力으로 세 임금 곁을 배회하면서도 감히 경솔히 찬탈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어쩌면 양행밀이 끼친 은위恩威가 또한 백성들에게 남아 있어서였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