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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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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8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嗚呼 自唐失其政으로 天下乘時하야 衮冕峩巍
吳曁南唐 姦豪竊攘이라 이러니 貧能自彊하고 富者先亡이라
閩陋荊蹙이요 楚開蠻服이라 剝剽弗堪 吳越其尤 牢牲視人 嶺蜒遭劉
百年之間 竝起爭雄하니 山川亦絶하야 風氣不通이라 語曰 淸風興 群陰伏하고 日月出 爝火息이라하니 故眞人作而天下同이라
傳行密始末如畫하니 不減史漢이라
楊行密 化源이니 廬州合人也 爲人長大有力하야 能手擧百觔이라
江淮群盜起할새 行密以爲盜見獲이어늘 刺史 奇其狀貌하야 釋縛縱之
後應募爲州兵하야 戍朔方이라가 遷隊長이러니 歲滿戍還한대 而軍吏惡之하야 復使出戍
行密將行 過軍吏舍하니 軍吏陽爲好言하고 問行密行何所欲이어늘 行密奮然曰 惟少公頭爾라하고 卽斬其首하고 携之而出하야 因起兵爲亂하고 自號八營都知兵馬使 刺史郞幼復 棄城走 行密遂據廬州하다
三年 唐卽拜行密廬州刺史하다 淮南節度使爲畢師鐸所攻하니 駢表行密行軍司馬이라
行密率兵數千赴之하야 行至한대 師鐸已囚駢하고 召宣州秦彦하야 入揚州
行密不得入하고 屯于이라 師鐸率衆數萬하여 出擊行密하니 行密陽敗棄營走어늘
師鐸兵饑 乘勝爭入營하야 收軍實하니 行密反兵擊之 師鐸大敗하야 單騎走入城하야 遂殺高駢하다
行密聞駢死하고 縞軍向城哭三日하고 攻其西門하니 彦及師鐸 奔于이라 行密遂入揚州하다
是時 城中倉廩空虛하야 饑民相殺而食이라 其夫婦父子自相牽하야 就屠賣之 屠者刲剔如羊豕
行密不能守하야 欲走어늘 而蔡州秦宗權遣其弟宗衡掠地淮南이라 彦及師鐸還自東塘하야 與宗衡合하니 行密閉城不敢出이라
已而 宗衡爲偏將孫儒所殺하고 儒攻破之하니 行密益懼어늘
其客袁襲曰 吾以新集之衆으로 守空城이어늘 而諸將多駢舊이니 非有厚恩素信하야 力制而心服之也 今儒兵方盛하야 所攻必克하니 此諸將持兩端하야 因彊弱擇嚮背之時也 鎭使高霸 駢之舊將이니 必不爲吾用이라하다
行密乃以軍令召霸하니 霸率其兵入이라
行密欲使霸守天長한대 襲曰 吾以疑霸而召之하니 其可復用乎 且吾能勝儒 無所用霸 不幸不勝이면 天長豈吾有哉리오 不如殺之하야 以幷其衆이라하니 行密因犒軍하야 擒霸族之하고 得其兵數千하다
已而 孫儒殺秦彦畢師鐸하고 幷其兵以攻行密하니 行密欲走海陵이어늘 襲曰 海陵難守어니와 而廬州 吾舊治也 城廩完實하야 可爲後圖라하니 行密乃走廬州
久之 未知所向하야 問襲曰 吾欲卷甲倍道하야 西取洪州하니 可乎아하니
襲曰 하니 勢未可圖로되 而秦彦之入廣陵也 召池州刺史趙鍠하야 委以宣州러니 今彦且死 鍠失所恃하니 而守宣州 非其本志 且其爲人非公敵이니 此可取也라하다
行密乃引兵攻鍠하야 戰于하야 大敗之하고 進圍宣州하니 鍠棄城走어늘 追及殺之 行密遂入宣州하다
元年 唐拜行密宣州觀察使하다 行密遣田頵安仁義李神福等攻浙西하야 取蘇常潤州하고 하고 景福元年 取楚州하다
孫儒自逐行密入廣陵이러니 久之 亦不能守 乃焚其城하고 殺民老疾以餉軍하고 驅其衆渡江하야 號五十萬以攻行密이라
諸將田頵劉威等 遇之輒敗 行密欲走銅官한대 其客戴友規曰 儒來 氣銳而兵多하니 蓋其鋒不可當而可以挫 其衆不可敵而可久以敝之 若避而走 是就擒也라하고 劉威亦曰 背城堅柵이면 可以不戰疲之라하니 行密以爲然하다
久之 儒兵饑又大疫하니 行密悉兵擊之한대 儒敗被擒이라 將死 仰顧見威曰 聞公爲此策以敗我호니 使我有將如公者 其可敗耶아하다
行密收儒餘兵數千하야 以皂衣蒙甲하고 號黑雲都하야 常以爲親軍하다
是歲 復入揚州하니 唐拜行密淮南節度使하다
二年 加檢校太傅 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行密以田頵守宣州하고 安仁義守潤州 昇州刺史馮弘鐸來附하니 分遣頵等攻掠하야 自淮以南江以東諸州 皆下之 進攻蘇州하야 擒其刺史成及하다
四年 兗州朱瑾 奔于行密이라 瑾爲梁所攻하야 求救于晉하니 晉遣李承嗣將勁騎數千助瑾커늘 瑾敗하야 因與俱奔行密이라
行密兵 皆江淮人이니 淮人輕弱이러니 得瑾勁騎而兵益振하다
是歲 梁太祖遣葛從周龐師古攻行密壽州하니 行密擊敗梁兵하고 殺師古한대 而從周收兵走어늘 追至渒河하야 又大敗之하다
五年 攻蘇州하야 及周本戰于白方湖어늘 本敗하야 蘇州復入于越하다
元年 遣李神福攻越戰하야 大敗之하고 擒其將顧全武以歸하다
二年 馮弘鐸叛하야 襲宣州하야 及田頵戰于曷山이어늘 弘鐸敗하야 將入于海하니
行密自至東塘邀之하야 使人謂弘鐸曰 勝敗 用兵常事也 一戰之衂 何苦自棄下海島 吾府雖小 猶足容君이라하니 弘鐸感泣하다
行密從十餘騎하야 馳入其軍하야 以弘鐸歸하야 爲節度副使하고 以李神福代弘鐸爲昇州刺史하다
是歲 唐昭宗在岐하야 遣江淮宣諭使李儼하야 拜行密東面諸道行營都統檢校太師中書令하고 封吳王하다
三年 以李神福爲鄂岳招討使하야 以攻杜洪한대 荊南成汭救洪이어늘 神福敗之于君山하다 梁兵攻靑州한대 王師範來求救하니 遣王茂章救之하야 大敗梁兵하고 殺朱友寧이라
太祖大怒하야 自將以擊茂章하니 兵號二十萬이로되 復爲茂章所敗하다
田頵叛하야 襲昇州하야 執李神福妻子하야 歸于宣州 行密召神福以討頵한대 頵遣其將王壇逆之하고 又遺神福書하야 以其妻子招之하니
神福曰 吾以一卒 從吳王起事하야 今爲大將하니 忍背德而顧妻子乎아하고 立斬其使以自絶하니 軍士聞之하고 皆感奮이라
行至 頵執神福子承鼎以招之하니 神福叱左右射之하고 遂敗壇兵于吉陽이라 行密別遣臺濛擊頵하니 頵敗死하다
頵及安仁義朱延壽等 皆從行密起微賤이러니 及江淮甫定 思漸休息이로되 而三人者皆猛悍難制 頗欲除之로되 未有以發이라
하니 再思召頵攻鏐杭州하야 垂克이어늘 而行密納鏐賂하고 命頵解兵하니 頵恨之
頵嘗計事廣陵할새 行密諸將 多就頵求賂 而獄吏亦有所求어늘 頵怒曰 吏欲我下獄耶아하고 歸而遂謀反하다
仁義聞之亦反하야 焚東塘以襲常州 常州刺史李遇出戰이라가 望見仁義하고 大罵之하니 仁義止其軍曰 李遇乃敢辱我如此하니 其必有伏兵이라하고 乃引軍却한대 而伏兵果發하야 追至이라
仁義而食이어늘 遇兵不敢追 仁義復入潤州 行密遣王茂章李德誠米志誠等圍之
吳之軍中推朱瑾善槊하고 志誠善射하야 皆爲第一이어늘 而仁義常以射自負曰 志誠之弓十 不當瑾槊之一이요 瑾槊之十 不當仁義弓之一이라하고
每與茂章等戰 必命中而後發하니 以此吳兵畏之하야 不敢近이라
行密亦欲招降之어늘 仁義猶豫未決한대 茂章乘其怠하야 穴地道而入하야 執仁義하야 斬于廣陵하다
延壽者 行密夫人朱氏之弟也 頵及仁義之將叛也 行密疑之하야 乃陽爲目疾하야 每接延壽使者 必錯亂其所見以示之
嘗行 故觸柱而仆하니 朱夫人扶之어늘 良久乃蘇 泣曰 吾業成而喪其目하니 是天廢我也 吾兒子皆不足以任事하니 得延壽付之 吾無恨矣라하다
夫人喜하야 急召延壽어늘 延壽至 行密迎之寢門하야 刺殺之하고 出朱夫人以嫁之하다
二年 遣劉存攻鄂州하야 焚其城하니 城中兵突圍而出이어늘 諸將請急擊之한대 存曰 擊之라가 復入則城愈固 聽其去 城可取也라하다
是日 城破하고 執杜洪하야 斬于廣陵이라 九月 梁兵攻破襄州하니 趙匡凝奔于行密이라 十一月 行密卒하니 年五十四 諡曰이라
子渥立이라 溥僭號하야 追尊行密爲太祖武皇帝하고 陵曰 興陵이라하다
인저 行密之書 稱行密爲人호되 寬仁雅信하야 能得士心이라
其將蔡儔叛於廬州 悉毁行密墳墓러니 及儔敗 而諸將皆請毁其墓以報之어늘 行密嘆曰 儔以此爲惡이어늘 吾豈復爲耶리오하다
嘗使從者張洪負劍而侍러니 洪拔劍擊行密한대 不中이라 洪死 復用洪所善陳紹負劍하고 不疑
又嘗罵其將劉信이어늘 信忿하야 奔孫儒하니 行密戒左右勿追曰 信豈負我者邪리오 其醉而去하니 醒必復來라하야늘 明日果來
行密起於盜賊하야 其下皆驍武雄暴로되 而樂爲之用者 以此也 이러니 及渥已下하야 政在徐溫이라
於此之時 天下大亂하야 中國之禍 簒弑相尋이어늘 而徐氏父子 區區詐力으로 裴回三主로되 不敢輕取之 何也 豈其恩威亦有在人者歟인저


오호라! 나라가 그 정병政柄을 잃어버리고부터 천하天下 사람들이 이때를 틈타 경발黥髡도판盜販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면관冕冠을 쓰고 당당하게 행세하였다.
나라와 남당南唐간웅姦雄이 정권을 쟁탈爭奪하였다. 나라는 지세가 험준하면서 부유하였고 나라는 지세가 험준하면서 가난하였는데 가난했던 나라는 자강自强할 수 있었던 반면 부유했던 나라는 먼저 망하였다.
민국閩國은 협소하였고 형국荊國은 좁았으며 초국楚國남만南蠻의 땅을 개척하였다. 백성들이 착취를 견딜 수 없었던 것은 오월吳越이 제일 심하였고 사람을 희생犧牲처럼 보아 〈마음대로 죽인〉 것은 영남嶺南만인蠻人유씨劉氏남한南漢을 만난 경우였다.
백 년 사이에 나란히 일어나 자웅雌雄을 다투니 산하山河 역시 단절되어 풍속風俗이 통하지 않았다. 속어俗語에 “맑은 바람이 일어남에 뭇 음기陰氣가 잠잠해지고 해와 달이 나옴에 횃불이 꺼진다.”고 하였으니 그러므로 진인眞人이 일어나면 천하天下대동大同하게 된다. 십국十國세가世家를 짓는다.
01. 양행밀楊行密세가世家
양행밀楊行密시말始末을 그림을 그린 것처럼 입전立傳하였으니 ≪사기史記≫, ≪한서漢書≫보다 못하지 않다.
양행밀楊行密화원化源이니 여주廬州 합비合肥 사람이다. 사람됨이 장대長大하고 힘이 있어 한 손으로 100을 들어 올릴 수 있었다.
건부乾符 연간年間강회江淮에서 도적떼가 일어났을 때 양행밀이 도적으로 간주되어 붙잡혔는데 자사刺史 정계鄭棨가 그의 용모를 남다르게 여겨 포승捕繩을 풀고 놓아 주었다.
뒤에 모병募兵에 응하여 주병州兵이 되어 삭방朔方을 수비하다가 대장隊長으로 승진하였는데 복무 기간이 차서 변방에서 돌아오자 군리軍吏가 그를 미워하여 다시 변방으로 나가 수비하게 하였다.
양행밀이 출발하려 할 때 군리의 집을 지나니 군리가 겉으로 덕담을 해주면서 양행밀에게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묻자 양행밀이 발끈하며 말하기를 “오직 그대의 머리가 없어지는 것일 뿐이다.”라고 하고 곧장 그의 머리를 베고 머리를 가지고 나와 인하여 기병起兵하여 난을 일으키고 스스로 팔영도지병마사八營都知兵馬使라고 호칭하니, 자사刺史 낭유복郞幼復이 성을 버리고 떠났다. 양행밀이 마침내 여주廬州를 점거하였다.
중화中和 3년(883)에 나라가 곧바로 양행밀楊行密여주자사廬州刺史에 임명하였다. 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 고병高駢필사탁畢師鐸에게 공격을 받으니 고병이 표주表奏하여 양행밀을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삼았다.
양행밀이 수천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가서 천장天長에 이르렀다. 그런데 필사탁이 이미 고병을 잡아 가두고 선주宣州진언秦彦을 불러 양주揚州로 들어갔다.
양행밀이 들어가지 못하고 촉강蜀岡에 주둔하였다. 필사탁이 수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나가 양행밀을 치니 양행밀이 거짓으로 패한 체하며 군영軍營을 버리고 달아났다.
필사탁의 군대가 굶주려 있던 터라 승세勝勢를 타고 앞다퉈 군영으로 들어가 군수 물자를 차지하니 양행밀이 군대를 돌려 필사탁을 쳤다. 필사탁이 크게 패하여 단기單騎로 달아나 성에 들어가서 마침내 고병을 죽였다.
양행밀이 고병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들에게 상복喪服을 입히고 성을 향해 사흘 동안 곡하고 그 서문西門을 공격하니 진언과 필사탁이 동당東塘으로 달아났다. 양행밀이 드디어 양주揚州에 들어갔다.
이때에 양주楊州 성중城中에 창고가 텅 비어 굶주린 백성들이 서로 죽여 잡아먹는 터라 부부와 부자 간이 서로 잡아끌어 도살장에 가서 팔아버리면 도살하는 자가 양이나 돼지 다루듯이 살을 발랐다.
양행밀楊行密이 양주를 지키지 못해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채주蔡州진종권秦宗權이 그 아우 진종형秦宗衡을 보내 회남淮南 땅을 약탈하였다. 진언秦彦필사탁畢師鐸동당東塘에서 돌아와서 진종형과 연합하니 양행밀이 성문을 닫고 감히 나오지 못하였다.
이윽고 진종형이 편장偏將 손유孫儒에게 살해당하고 손유가 고우高郵를 공격하여 깨뜨리자 양행밀楊行密이 더욱 두려워하였는데,
문객門客 원습袁襲이 말하기를 “우리가 새로 모은 무리를 가지고 빈 성을 지키고 있는데 장수들은 대부분 고병高駢이 옛날 거느리던 자들이니 후한 은혜와 평소의 신뢰가 있어 힘으로 누르고 마음으로 굴복시킬 수 있는 자들이 아닙니다. 지금 손유의 군대가 바야흐로 강성하여 공격하기만 하면 반드시 승리하니 이는 장수들이 두 마음을 품고서 양쪽의 강약强弱에 따라 향배向背를 정하려는 때입니다. 해릉진수사海陵鎭守使 고패高霸는 고병의 옛 장수이니 반드시 우리를 위해 싸우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양행밀이 이에 군령軍令을 내려 고패를 부르니 고패가 휘하 군대를 거느리고 광릉廣陵으로 들어왔다.
양행밀이 고패에게 천장天長을 지키게 하려고 하자 원습이 말하기를 “우리가 고패를 의심하여 불렀으니 다시 그를 쓸 수 있겠습니까. 게다가 우리가 손유를 이길 수 있으면 고패를 쓸 곳이 없을 것이고 불행히 이기지 못한다면 천장天長이 어찌 우리 소유가 되겠습니까. 그를 죽여서 그의 군대를 합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양행밀이 군사들을 호궤犒饋하는 틈을 이용하여 고패를 사로잡아 멸족滅族시키고 그의 수천 명의 병력을 차지했다.
얼마 뒤에 손유가 진언과 필사탁을 죽이고 그들의 군대를 합쳐 양행밀을 공격하자 양행밀이 해릉海陵으로 달아나려고 하였는데, 원습이 말하기를 “해릉은 지키기 어렵거니와 여주廬州는 우리가 예전에 관할하던 곳이니 성은 튼튼하고 창고는 충실充實하여 뒷일을 도모할 만합니다.”라고 하니 양행밀이 이에 여주로 달아났다.
오래 지나 양행밀이 갈 곳을 알지 못하여 원습에게 묻기를 “내가 무장을 가볍게 하고 밤낮으로 행군하여 서쪽으로 홍주洪州를 점령하려고 하는데 괜찮겠는가?”라고 하니
원습이 말하기를 “종전鍾傳이 지금 막 강서江西를 차지하였으니 그 형세가 아직 도모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진언이 광릉에 들어갔을 때 지주자사池州刺史 조굉趙鍠을 불러 선주宣州를 맡겼는데 지금 진언마저 죽어 조굉이 의지할 곳을 잃어버렸으니 선주를 지키는 것은 그의 본뜻이 아닙니다. 게다가 그 사람됨이 공의 적수가 못되니 이곳(선주)은 점령할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양행밀이 이에 군대를 이끌고 조굉을 공격하여 갈산曷山에서 전투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진군하여 선주를 포위하니 조굉이 성을 버리고 달아나기에 추격하여 그를 죽였다. 양행밀이 마침내 선주로 들어갔다.
용기龍紀 원년元年(889)에 나라가 양행밀楊行密선주관찰사宣州觀察使에 임명하였다. 양행밀이 전군田頵, 안인의安仁義, 이신복李神福 등을 보내 절서浙西를 공격하여 소주蘇州, 상주常州, 윤주潤州를 점령하고 대순大順 2년(891)에 저주滁州, 화주和州를 점령하고 경복景福 원년元年(892)에 초주楚州를 점령하였다.
손유孫儒가 양행밀을 쫓아내고 광릉廣陵에 들어갔는데 오래 지나자 그 역시 광릉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이에 그 성을 불지르고 늙고 병든 백성들을 죽여 군대에게 먹이고 그 군대를 몰아 강을 건너 오십만 명이라 불리는 군대로 양행밀을 공격하였다.
전군, 유위劉威 등의 장수들이 교전할 때마다 패하여 양행밀이 동관銅官으로 달아나려고 하자 그 문객門客 대우규戴友規가 말하기를 “손유가 올 때 사기士氣충천衝天하고 병졸兵卒이 많으니 그 예봉은 당해낼 수는 없으나 꺾을 수는 있으며, 그 무리는 대적할 수는 없으나 오래 끌면서 지치게 할 수는 있습니다. 만약 그를 피하여 달아나면 바로 그에게 사로잡히게 될 것입니다.”라고 하고, 유위 역시 말하기를 “성을 등지고 영책營柵을 견고하게 하면 싸우지 않고도 그를 지치게 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니 양행밀이 옳다고 여겼다.
오래 뒤에 손유의 군대가 굶주린 데다 역병까지 창궐하니 양행밀楊行密이 군대를 모두 내보내 치자 손유가 패하여 사로잡혔다. 죽게 되었을 때 고개를 들어 유위를 바라보며 말하기를 “듣자 하니 이 이 계책을 내어 나를 패배시켰다고 하니 만약 나에게 공과 같은 장수가 있었다면 패배당했겠는가.”라고 하였다.
양행밀이 손유의 남은 군대 수천 명을 거두어 조의皂衣로 갑옷을 입히고는 흑운도黑雲都라고 부르면서 항상 친군親軍으로 삼았다.
이해에 다시 양주揚州에 들어가니 나라가 양행밀楊行密회남절도사淮南節度使에 임명하였다.
건녕乾寧 2년(895)에 검교태부檢校太傅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를 더하였다. 양행밀이 전군田頵에게 선주宣州를 지키게 하고 안인의安仁義에게 윤주潤州를 지키게 하였다. 승주자사昇州刺史 풍홍탁馮弘鐸이 와서 귀부歸附하니 전군 등을 나누어 보내 공략攻掠하여 회수淮水의 남쪽과 장강長江의 동쪽에 있는 각 들을 모두 함락하였고 진군하여 소주蘇州를 공격하여 그 자사刺史 성급成及을 사로잡았다.
錢鏐錢鏐
건녕 4년(897)에 연주兗州주근朱瑾이 양행밀에게 망명하였다. 처음에 주근이 나라에 공격을 받아 나라에 구원병을 요청하니 진나라가 이승사李承嗣를 보내 강용强勇기병騎兵 수천 명을 거느리고 주근을 도왔는데 주근이 패배하자 인하여 둘이 함께 양행밀에게 망명하였다.
양행밀의 병졸들은 모두 강회江淮 사람으로, 사람들은 유약柔弱하였는데 주근의 강용强勇한 기병을 얻고 나서 군대가 더욱 기세를 떨쳤다.
이해에 태조太祖갈종주葛從周, 방사고龐師古를 보내 수주壽州에서 양행밀을 공격하니 양행밀이 나라 군대를 청구淸口에서 쳐서 패배시키고 방사고를 죽였다. 갈종주가 군대를 거두어 달아나자 추격하여 비하渒河에 이르러 다시 크게 패배시켰다.
건녕 5년(898)에 전유錢鏐소주蘇州를 공격하여 백방호白方湖에서 주본周本과 전투하였는데 주본이 패배하여 소주가 다시 나라에 들어갔다.
천복天復 원년元年(901)에 이신복李神福을 보내 나라를 공격하여 임안臨安에서 전투하여 크게 패배시키고 그 장수 고전무顧全武를 사로잡아 돌아왔다.
천복 2년(902)에 풍홍탁馮弘鐸이 반란하여 선주宣州를 습격하여 갈산曷山에서 전군과 전투하였는데 풍홍탁이 패배하고서 장차 바다로 들어가려고 하였다.
양행밀이 직접 동당東塘에 이르러 그를 부르면서 사람을 보내 풍홍탁에게 이르기를 “승패勝敗용병用兵할 때 늘상 있는 일이니 한 번 전투에 패배했다고 어찌 이리 심하게 자포자기하고 해도海島로 내려간단 말인가. 나의 관부官府가 비록 작으나 그래도 족히 그대를 포용할 수 있다.”라고 하니 풍홍탁이 감격하여 흐느꼈다.
양행밀이 기병 10명을 거느리고 달려가 그 군대에 들어가 풍홍탁을 데리고 돌아와 절도부사節度副使로 삼고 풍홍탁을 대신하여 이신복을 승주자사昇州刺史로 삼았다.
이해에 소종昭宗기주岐州에 있으면서 강회선유사江淮宣諭使 이엄李儼을 보내 양행밀楊行密동면제도행영도통東面諸道行營都統 검교태사檢校太師 중서령中書令에 임명하고 오왕吳王에 봉하였다.
천복天復 3년(903)에 이신복李神福악악초토사鄂岳招討使로 삼아 두홍杜洪을 공격하자 형남荊南성예成汭가 두홍을 구원하였는데 이신복이 군산君山에서 그를 패배시켰다. 나라 군대가 청주靑州를 공격하자 왕사범王師範이 와서 구원병을 청하니 왕무장王茂章을 보내 그를 구원하여 양나라 군대를 크게 패배시키고 주우녕朱友寧을 죽였다.
주우녕은 태조太祖의 아들이기에 태조가 크게 노하여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왕무장을 치니 군사가 20만 명이라고 불릴 정도였으나 다시 왕무장에게 패배하였다.
전군田頵이 배반하여 승주昇州를 습격하여 이신복의 처자식을 붙잡아 선주宣州로 돌아갔다. 양행밀이 이신복을 불러 전군을 토벌하게 하자 전군이 휘하 장수 왕단王壇을 보내 맞서게 하고 또 이신복에게 서신을 보내 처자식을 볼모로 하여 투항하라고 회유하였다.
이신복이 말하기를 “내가 일개 군졸로 오왕吳王을 따라 기병起兵하여 지금 대장大將이 되었으니 어찌 차마 은덕을 저버리고 처자를 돌아보겠느냐.”라고 하고 그 자리에서 사자使者를 베어 단호히 거절하니 군사들이 이 일을 듣고 모두 감동하여 분발하였다.
행군하여 길양기吉陽磯에 이르렀을 때 전군이 이신복의 아들 이승정李承鼎을 잡고서 투항하라고 회유하니 이신복이 좌우左右의 부하들을 질타하여 아들을 쏘게 하고 마침내 왕단의 군대를 길양吉陽에서 패배시켰다. 양행밀이 따로 대몽臺濛을 보내 전군을 치니 전군이 패배하여 죽었다.
당초에 전군田頵안인의安仁義, 주연수朱延壽 등이 모두 양행밀楊行密을 따라 미천한 신분에서 발신發身하였다. 강회江淮가 막 평정됨에 미쳐 점차 편안히 쉬며 생활하려고 생각하였으나 세 사람이 모두 사나워 제압하기가 어렵기에 그들을 몹시 제거하고 싶었는데 아직 손을 쓸 기회가 없었다.
천복天復 2년(902)에 전유錢鏐가 휘하 장수 허재사許再思 등이 반란을 일으켜 그를 포위하니 허재사가 전군을 불러 항주杭州에서 전류를 공격하여 곧 승리할 즈음에 양행밀이 전류의 뇌물을 받고 전군에게 군대를 해산하라고 명하니 전군이 이 일을 유감으로 여겼다.
전군이 일찍이 광릉廣陵에서 일을 도모할 때 양행밀의 장수들이 전군에게 와서 뇌물을 달라는 경우가 많았고 옥리獄吏 역시 요구하는 것이 있었는데 전군이 노하여 말하기를 “옥리가 나를 하옥下獄하려고 하는가?”라고 하고 돌아가 마침내 모반謀反하였다.
안인의安仁義가 이 소식을 듣고 역시 모반하여 동당東塘을 불지르고 상주常州를 습격하였다. 상주자사常州刺史 이우李遇가 전투하러 나갔다가 안인의를 바라보고 그를 몹시 꾸짖으니 안인의가 군대를 멈추고 말하기를 “이우가 감히 나를 이렇게까지 모욕하니 그가 반드시 복병伏兵을 두었을 것이다.”라고 하고 이어 군대를 이끌고 퇴각退却하자 복병이 과연 출동出動해서 추격하여 협강夾岡에 이르렀다.
안인의가 깃발을 꽂고 갑옷을 벗고서 밥을 먹고 있었는데 이우李遇의 군대가 감히 추격하지 못하니 안인의가 다시 윤주潤州에 들어갔다. 양행밀楊行密왕무장王茂章, 이덕성李德誠, 미지성米志誠 등을 보내 안인의를 포위하였다.
나라 군중軍中에서는 다들 주근朱瑾은 창을 잘 쓰고 미지성은 활을 잘 쏜다고 추켜세워 모두 제일이라 하였다. 그런데 안인의는 늘 활쏘기를 자부自負하여 말하기를 “미지성의 활 열 개가 주근의 창 하나를 당해내지 못하고 주근의 창 열 개가 나의 활 하나를 당해내지 못한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왕무장 등과 싸울 때마다 반드시 화살을 명중命中시킨 뒤에야 출병出兵하니 이 때문에 나라 군대가 안인의를 두려워하여 감히 가까이 가지 못하였다.
양행밀 역시 그를 회유하여 투항시키려 하였는데 안인의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자 왕무장이 그 해이해진 틈을 타서 땅굴을 파고 들어가 안인의를 잡아 광릉廣陵에서 참수하였다.
주연수朱延壽양행밀楊行密의 부인 주씨朱氏의 아우였다. 전군田頵안인의安仁義가 배반하려 할 때 양행밀이 주연수를 의심하여 이에 거짓으로 눈병을 가장하여 매번 주연수의 사자使者를 접견할 때마다 반드시 보는 물체를 혼동하는 것처럼 연기하였다.
일찍이 걸을 적에 일부러 기둥에 부딪혀 넘어지니 주부인朱夫人이 그를 부축하였는데 한참 있다가 비로소 정신을 차렸다. 양행밀이 흐느끼면서 말하기를 “내가 공업功業을 이루고 나서 이 눈을 잃어버렸으니 이는 하늘이 나를 버린 것이다. 내 아들들이 모두 정사政事를 맡기에는 부족하니 주연수에게 맡길 수 있다면 나는 여한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였다.
주부인이 기뻐하면서 급히 주연수를 불렀는데, 주연수가 이르자 양행밀이 그를 침문寢門에서 맞이하여 찔러 죽이고 주부인을 내보내 다른 데로 시집보냈다.
천우天祐 2년(905)에 유존劉存을 보내 악주鄂州를 공격하여 그 성을 불지르니 성중城中의 병사들이 포위를 뚫고 나왔다. 장수들이 급히 그들을 치자고 청하자 유존이 말하기를 “그들을 쳤다가 다시 성에 들어가게 되면 성이 더욱 견고해질 것이니 그들이 떠나게 놔두면 성을 점령할 수 있다.”라고 하였다.
이 날에 성을 격파하고 두홍杜洪을 붙잡아 광릉廣陵에서 참수하였다. 9월에 나라 군대가 양주襄州를 격파하니 조광응趙匡凝양행밀楊行密에게 망명하였다. 11월에 양행밀이 졸하니 향년 54세였다. 시호는 무충武忠이다.
아들 양악楊渥이 즉위하였다. 양부楊溥가 황제를 참칭僭稱하고서 양행밀을 태조무황제太祖武皇帝추존追尊하고 능묘陵墓흥릉興陵이라고 하였다.
오호라! 도적盜賊가 있다고 하니 참으로 그러하다. 양행밀楊行密에 대한 글에서 양행밀의 사람됨을 칭상稱賞하되 관후寬厚하고 인자仁慈하며 고아高雅하고 성실誠實하여 병사들의 마음을 잘 얻었다고 하였다.
휘하의 장수 채주蔡儔여주廬州에서 반란했을 때 양행밀 집안의 분묘墳墓를 죄다 허물었다. 채주가 패배하자 장수들이 모두 그 집안의 분묘를 허물어 보복하자고 청하였는데, 양행밀이 탄식하기를 “채주가 이런 식으로 악행惡行을 저질렀다고 내가 어찌 다시 이런 악행을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일찍이 종자從者 장홍張洪에게 검을 등에 지고 시위侍衛하게 한 적이 있었는데 장홍이 검을 뽑아 양행밀을 쳤으나 적중하지 못했다. 장홍이 죽임을 당한 뒤에 다시 장홍과 친하였던 진소陳紹를 등용하여 검을 등에 지고 시위하게 하면서도 의심하지 않았다.
또 일찍이 휘하의 장수 유신劉信을 꾸짖었는데 유신이 분개하여 손유孫儒에게 달아나니 양행밀이 좌우左右의 부하들에게 그를 추격하지 말라고 당부하기를 “유신이 어찌 나를 저버릴 자이겠는가. 그가 취하여 간 것이니 술이 깨면 꼭 다시 올 것이다.”라고 하였는데 이튿날 과연 그가 돌아왔다.
양행밀이 도적에서 발신發身하여 그 부하들이 모두 용맹勇猛하고 강포强暴하였으나 기꺼이 그의 수하가 되어 쓰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었다. 그래서 2대에 걸쳐 네 임금이 거의 50년을 누렸는데 양악楊渥 이후로는 정권政權서온徐溫에게 있었다.
이때에 천하가 크게 혼란하여 중국中國에 재앙이 내려 찬탈하고 시해하는 일이 계속되었는데 서씨徐氏 부자父子가 보잘것없는 속임수와 무력武力으로 세 임금 곁을 배회하면서도 감히 경솔히 찬탈하지 못한 것은 어째서인가? 어쩌면 양행밀이 끼친 은위恩威가 또한 백성들에게 남아 있어서였을 것이다.


역주
역주1 黥髡(경곤)盜販 : 黥은 이마에 黑色으로 刺字하는 墨刑이고 髡은 毛髮을 자르는 형벌로 重罪를 지은 犯人을 가리키고, 盜販은 국가에서 禁止하거나 專賣하는 상품을 불법적으로 파는 사람을 가리킨다.
역주2 蜀險而富 漢險而貧 : 蜀은 前蜀과 後蜀으로, 각각 王建과 孟知祥이 다스린 나라이고 漢은 劉旻이 세운 北漢으로, ≪新五代史≫에는 〈東漢世家〉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역주3 十國世家 : ≪新五代史≫ 卷61에서 卷70까지 〈吳世家〉, 〈南唐世家〉, 〈前蜀世家〉, 〈後蜀世家〉, 〈南漢世家〉, 〈楚世家〉, 〈吳越世家〉, 〈閩世家〉, 〈南平世家〉, 〈東漢世家〉라는 제목으로 수록되어 있다. 참고로 卷71에는 〈十國世家年譜〉가 수록되어 있다.
역주4 楊行密 : 楊行密(852~905)은 廬州 合肥 사람으로, 본명은 行愍이다. 양행밀의 事跡은 ≪舊五代史≫ 卷134 〈僭僞列傳 第1〉과 ≪新五代史≫ 卷61 〈吳世家 第1〉에 실려 있다. ≪구오대사≫와 ≪신오대사≫는 모두 司馬遷이 ≪史記≫를 통해 창시한 紀傳體를 본받았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체제가 서로 다른 것을 알 수 있다.
먼저 ≪구오대사≫는 後梁, 後唐, 後晉, 後漢, 後周 五代의 각 왕조별로 本紀와 列傳을 한 묶음으로 구성하였는데 구체적으로 설명하면, 왕조의 世系를 서술한 ‘本紀’를 앞에 두고 后妃를 입전한 ‘后妃列傳’, 宗室을 입전한 ‘宗室列傳’, 해당 왕조를 섬긴 신하들을 입전한 ‘列傳’의 순으로 왕조별로 묶어 구성하였다. 한편 後周 이후부터는 ‘世襲列傳’과 ‘僭僞列傳’을 따로 두어 唐나라에서 독립하여 五代의 각 왕조에 복속하지 않은 정치 집단들을 모아 구성하였다. 특히 두 列傳 가운데 十國으로 불린 나라들은 모두 ‘僭僞列傳’에 소속시켰는바, 淮南 지방을 차지한 양행밀이 바로 이 ‘僭僞列傳’의 서두를 장식하고 있다.
이에 반해 ≪신오대사≫에서는 本紀, 家人傳, 列傳을 각 왕조보다 상위의 범주로 놓고 五代 각 왕조를 한데 묶어 서술한 점이 다르다. 좀더 자세히 설명하면, 우선 五代의 本紀를 한데 묶어 일단 본기를 마무리하고, 바로 뒤에 각 왕조의 황후와 외척을 입전한 家人傳도 한데 묶어 구성한 뒤 일반 列傳의 형식으로 梁臣傳, 唐臣傳, 晉臣傳, 漢臣傳, 周臣傳을 둔 것이다. 이어지는 부분에서는 왕조에 상관없이 인물의 행적에 대한 褒貶의 뜻을 내포한 列傳을 구성하였는데 이 부분이 五代를 바라보는 구양수의 史觀이 집중적으로 드러나는 부분이다. 구체적으로 들면 〈死節傳〉, 〈死事傳〉, 〈一行傳〉, 〈唐六臣傳〉, 〈義兒傳〉, 〈伶官傳〉, 〈宦者傳〉, 〈雜傳〉이다. 이렇게 本紀와 列傳을 구성한 뒤, 구양수는 ≪구오대사≫에서 〈僭僞列傳〉에 묶여 있는 十國을 世家로 묶어 서술하고 ≪구오대사≫처럼 양행밀을 서두에 배치하고 〈吳世家〉라고 하였는 바, 이는 사마천의 ≪사기≫에 보다 더 가까운 구성이라고 할 수 있겠다.
본 세가는 茅坤의 비평처럼 양행밀이 淮南 지방을 차지해 가는 一進一退의 攻防戰을 핍진하게 묘사하여 글을 읽으면 그의 인생 歷程이 마치 눈으로 보는 듯하다. 양행밀은 미천한 출신이었는데 힘이 세고 걸음이 빨라 刺史의 눈에 들어 군인으로 복무하게 되었다. 그러던 중 불만을 품고 起兵하여 廬州를 점거하고서 刺史가 된 것이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이후 淮南節度使 高駢의 行軍司馬가 되어 畢師鐸과 秦彦을 쳐서 揚州를 접수하였다. 하지만 이내 필사탁과 진언을 죽인 孫儒에게 몰려 宣州로 물러나 휘하의 田頵, 安仁義, 李神福 등과 주변 지역을 장악해 가다가 마침내 다시 손유를 쳐서 죽이고 그 군대를 거두어 세력을 키웠다. 이후 後梁, 吳越의 침입을 물리쳐 국세를 과시하고 吳王에 봉해졌다. 한편 내부적으로는 휘하의 전군, 안인의가 차례로 반란을 일으키자 제거하였고 처남 朱延壽도 모략을 써서 제거하였다.
이처럼 양행밀은 회남 지방에 할거하면서 內憂와 外患에 잘 대처하고 백성들을 휴식하게 하여 吳나라의 기반을 닦았다. 하지만 吳나라는 2代부터 정권이 매우 불안정하여 처음에 맏아들 楊渥(886~908)이 자리를 이었다가 張顥에게 시해되었고 그의 부하 徐溫이 장호를 죽이고 양악의 아우 楊渭를 세운 뒤 국정을 장악하였다. 이후 양위의 아우 楊溥에게 한 차례 정권이 더 이어졌다가 서온의 養子 徐知誥(李昪)에게 찬탈 당하여 4代 47년 동안 이어진 吳나라가 망하고 南唐이 세워졌다. 구양수는 史評을 통해 徐氏 父子가 楊氏 정권을 바로 무너뜨리지 못한 이유를 양행밀이 將卒들을 어루만질 줄 아는 능력과 백성들에게 끼친 은택 때문이라고 보았는데, 나라를 다스리는 그의 재능이 비범하였음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한편 ≪구오대사≫에 양행밀에 대한 史評이 실려 있는데 참고로 들면 다음과 같다.
“史臣은 말한다. ‘옛날에 唐 왕조가 무너지며 각 지방이 할거하자 양행밀이 뛰어난 재능과 민첩한 행동으로 앞장서고 李昪이 전전긍긍하는 마음으로 뒤를 이어 僞國으로 僞國을 교체한 것이 60년을 훌쩍 넘었다. 그런데 後周가 정벌하는 군대를 일으킴에 이르러 황제가 회유하는 덕을 표방하자 마침내 산 넘고 강 건너 入貢하여 正朔을 받들어 來朝하였다. 이렇게 보면 험하다는 長江이 또 어찌 족히 믿을 만하겠는가!’[史臣曰 昔唐祚橫流 異方割據 行密以高材捷足啓之于前 李昪以履霜堅冰得之于後 以僞易僞 逾六十年 洎有周興薄伐之師 皇上示懷柔之德 而乃走梯航而入貢 奉正朔以來庭 如是則長江之險 又何足以恃哉]”
역주5 : ≪新五代史≫에는 ‘淝’자로 되어 있다.
역주6 唐乾符中 : 乾符는 唐나라 僖宗의 첫 번째 연호(874~879)이다.
역주7 鄭棨 : ≪卄二史考異≫ 卷66에 “‘棨’는 ‘綮’가 되어야 한다.[棨當作綮]”로 되어 있다.
역주8 中和 : 唐 僖宗의 세 번째 연호(881~884)이다.
역주9 高駢 : 821~887. 唐나라 幽州 사람으로 字는 千里이다. 先祖는 山東의 名門인 渤海 高氏로 대대로 禁軍 將領을 지냈다. 黃巢가 난을 일으켰을 때 唐 僖宗이 그를 諸道行營兵馬都統에 임명하였는데 大將 張璘이 패하자 성을 지키며 싸우지 않아 황소에게 兩都를 빼앗기게 된 책임으로 揚州刺史로 좌천되었다. 이후 術士 呂用之, 張守一 등에게 현혹되어 가혹한 정치를 하다가 결국 部將 畢師鐸에게 살해되었다. ≪新唐書≫ 〈叛臣列傳〉에 立傳되어 있다.
역주10 天長 : 南京에서 가까운 安徽省의 屬縣으로, 742년에 唐 玄宗이 자신의 생일을 기념하여 특별히 설치한 현이다.
역주11 蜀岡 : 揚州城의 서북쪽에 있는 산으로, 長江을 사이에 두고 金陵(南京)과 마주보고 있다. 산 정상에 蜀井이 있는데 전하는 말로는 地脈이 蜀 땅까지 이어진다고 한다. 서쪽으로 廬州, 滁州와 맞닿아 있는데 북쪽에서 군대가 揚州를 南侵하려면 이 산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와 높은 곳에 보루를 쌓고 대치하게 된다.
역주12 東塘 : 揚州城 동쪽에 있는 지명으로, 高駢이 黃巢를 공격할 때 이곳에 주둔한다고 거짓으로 떠벌렸던 곳이다.
역주13 高郵 : 江蘇省에 속한 縣으로, 秦나라 때 高郵亭을 두었던 데서 유래하였다. 前漢 때 처음 설치하였을 때 廣陵國에 속하였다가 後漢 때에는 廣陵郡에 속하였다. 이후 三國時代에 폐하였다가 西晉 太康 元年(280)에 다시 설치하였다.
역주14 : 사고전서본에는 ‘將’으로 되어 있다.
역주15 海陵 : 江蘇省 泰州의 治所가 있는 곳으로 西漢 때 설치하였는데 後漢 때 廣陵郡에 속하였다. 唐 高祖 武德 3년(620)에 吳陵縣으로 改名하였다가 7년(624)에 海陵縣으로 복원하고 揚州에 소속시켰다.
역주16 廣陵 : 江蘇省 揚州 서북쪽 蜀岡 기슭에 있는 지명이다.
역주17 鍾傳新得江西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梁本紀〉에는 楊行密이 宣州로 달아난 일은 龍紀 元年(889)에 있었고, ≪新唐書≫ 〈本紀〉와 ≪資治通鑑≫에는 鍾傳이 洪州를 함락한 일은 中和 2년(882)에 있었고, 양행밀이 宣州를 함락한 것은 龍紀 元年에 있었다. 서로 이미 8년이나 간격이 있으니 어찌 ‘지금 막 차지하였다’고 할 수 있겠는가. 여기서는 또 宣州에 쳐들어간 일을 龍紀 元年 전에 서술하였으니, 잘못된 것이다. 薛居正의 ≪舊五代史≫ 〈僭僞楊行密傳〉에는 宣州를 점거한 일이 大順 元年(890)에 있었다고 서술하였으니 더욱 잘못되었다.[按梁本紀 行密走宣州在龍紀元年 新唐書本紀 通鑑 傳陷洪州在中和二年 行密陷宣州在龍紀元年 相去已八年 安得曰新得 此又敍入宣州在龍紀元年前 誤矣 薛史僭僞楊行密傳 敍據宣州在大順元年 尤誤]”라고 하였다.
역주18 曷山 : 褐山으로 지금의 安徽省 蕪湖 북쪽 臨江의 四褐山이다.
역주19 龍紀 : 唐 昭宗의 두 번째 연호(889)이다.
역주20 二年 取滁(저)和州 : ≪五代史記纂誤補≫ 卷4에 “삼가 살펴보건대, 歸𡺭이 말하기를, ‘앞에 龍紀 元年이 있으니 이곳은 龍紀 2년이 되어야 한다. 그렇지만 龍紀에는 2년이 없으니 ≪唐書≫ 〈昭宗紀〉 및 〈楊行密傳〉에 의거하면 이곳은 의당 大順 2년이 되어야 하는데 「大順」 2자가 빠진 것이다.’ 하였다.[謹案歸氏𡺭曰 上有龍紀元年 此當爲其二年 然龍紀無二年 據唐書昭宗紀及楊行密傳 此當是大順二年而脫大順二字]”라고 하였고, ≪五代史記纂誤續補≫ 卷6에 “살펴보건대, 龍紀는 1년으로 끝나고 이듬해 正月에 大順으로 改元하니 龍紀 연호가 어떻게 2년이 있을 수 있겠는가. ≪新唐書≫ 〈本紀〉와 〈列傳〉, ≪資治通鑑≫, ≪九國志≫ 〈田頵傳〉에는 모두 大順 2년에 실려 있다. 이는 필시 刪節할 때 어쩌다 大順 연호를 빠뜨린 것이다. 앞에 蘇州, 常州, 潤州를 점령한 것은 바로 大順 元年의 일이다.[按龍紀盡一年 明年正月改元大順 是龍紀安得有二年 新唐書紀傳 通鑑 九國志田頵傳 皆在大順二年 此必節刪時 偶漏大順年號 上取蘇常潤州 正大順元年事也]”라고 하였다.
역주21 乾寧 : 894~898. 唐 昭宗의 다섯 번째 연호이다.
역주22 淸口 : 泗口, 淮泗口, 淸河口라고도 하는데 옛 泗水가 淮水로 들어가는 입구로, 泗水를 淸水라고 하는 데서 비롯한 지명이다. 泗水는 中原으로 물자를 옮기는 水運에 있어 주요한 길로 淸口는 南北 交通의 목구멍에 자리하고 있기에 歷代로 전투가 많이 벌어졌던 전략상의 요충지이기도 하다.
역주23 錢鏐(류) : 852~932. 字는 具美, 小字는 婆留로, 杭州 臨安 사람이다. 五代十國 時期 吳越國을 세운 사람이다. 錢鏐는 唐末에 董昌을 따라 鄕里에서 반란군을 막은 이후 여러 차례 승진하여 鎭海軍節度使가 되었다. 뒤에 董昌이 唐나라를 배반하여 稱帝하자 詔命을 받들어 董昌을 토벌하고 鎭東軍節度使를 더하였다. 그는 杭州를 비롯한 兩浙 13州를 점거하여 唐, 後梁, 後唐으로부터 越王, 吳王, 吳越王, 吳越國王에 봉해졌다.
역주24 天復 : 901~903. 唐 昭宗의 일곱 번째 연호이다.
역주25 臨安 : 西晉 때 臨水縣을 改名한 곳으로 吳興郡에 속하였는데 臨安山에서 縣名을 취한 것이다. 隋나라 때 없앴다가 唐나라 때 다시 縣을 설치하면서 杭州에 소속시켰다. 後梁 開平 2년(908)에 吳越國에서 安國縣으로 개명하였다.
역주26 友寧 梁太祖子也 : ≪五代史記纂誤補≫ 卷4에 “삼가 살펴보건대, 友寧은 梁 太祖 형의 아들이다. ≪五代史纂誤≫에 이에 대한 설명이 〈王景仁傳〉 부분에 있다.[謹案友寧 梁祖兄子 纂誤有說 在王景仁傳]”라고 하였다.
역주27 吉陽磯 : 安徽省 東至縣 서북쪽, 長江의 동쪽 연안에 있는 吉陽縣에 있다. 吉陽은 吉水의 북쪽에 있어 붙여진 이름으로, 三國시대 吳나라에서 廬陵郡에 속한 廬陵縣을 분리하여 길양현을 설치하였다가 隋나라 때는 廬陵縣에 합쳐졌다. 唐나라 때는 安州에 속하였다. 근처에 吉陽山이 있다.
역주28 天復二年 錢鏐爲其將許再思等叛而圍之 : ≪卄二史考異≫ 卷66에 “上文에서 이미 天復 2년, 3년의 일을 서술하였는데 여기서 田頵이 誅罰된 일로 인하여 전군이 배반하게 된 단서를 뒤미쳐 서술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천복 2년을 거론한 것인데 또한 史家가 回避하는 데서 잘못되는 병통이다.[上文已敍天復二年三年事 此因田頵之誅 追述頵釁(흔)端 故再擧天復二年 亦史家失於回避之病也]”라고 하였다.
역주29 夾岡 : 江蘇省 丹陽縣 북쪽의 長江 연안에 있다. 지세가 높고 아래로 運河를 굽어보는 형세로 인해 그곳의 운하를 夾岡河라고 부른다.
역주30 植幟解甲 : 사고전서본에는 ‘解甲植幟’로 되어 있다.
역주31 天祐 : 唐 昭宗의 마지막 연호(904~907)로, 天祐 元年 8月에 哀帝가 즉위하면서 계속 사용하다가 天祐 4년 3월에 後梁 太祖 朱溫에게 禪位하면서 당나라가 멸망하였다. 하지만 前蜀의 王建, 南漢의 劉隱, 南吳의 楊行密과 楊隆演, 後晉의 李克用, 岐州의 李茂貞, 吳越의 錢鏐 등 割據 政權들은 이 연호를 계속 사용하였는데 후진은 莊宗 李存勖이 同光(923~925)으로 開元할 때까지 가장 오래 사용하였다.
역주32 武忠 : 사고전서본에는 ‘忠武’로 되어 있다.
역주33 嗚呼……信哉 : ≪五代史記注≫ 卷61下에 “≪獨醒雜志≫(曾敏行 撰)에 ‘江南에서는 密(꿀)을 蜂糖이라고 부르니 楊行密의 이름을 피한 것이다. 양행밀이 在位할 때 능히 恩信으로 사람들을 결속시켜서 그가 죽던 날에 나라 사람들이 모두 그를 위해 눈물을 흘렸다. 내가 사는 고장에 南華라는 절이 있어 楊氏와 李氏 두 사람이 발급한 납세증명서를 보관하고 있는데 지금까지도 탈이 없이 전해져 온다. 내가 양행밀이 재위할 때 징수한 産錢을 살펴보니 이씨 때와 비교하여 몇 배나 가벼웠다. 그래서 노인들이 전하는 말에, 「李煜이 재위할 때에 방종하고 사치함이 한도가 없었다. 그래서 이 정도까지 세금을 올렸다.」라고 하였다. 歐陽脩가 양행밀이 도적질하면서도 道가 있다고 이른 말이 어찌 그가 寬厚하게 백성들을 아껴서가 아니겠는가!’ 하였다.[獨醒雜志 江南呼密爲蜂糖 蓋避楊行密名也 行密在時 能以恩信結入 身死之日 國人皆爲之流涕 予里中有僧寺曰南華 藏楊李二人稅帖 今尙無恙 予觀行密時所徵産錢 較之李氏輕數倍 故老相傳云 煜在位時 縱侈無度 故增賦至是 歐陽謂行密爲盜亦有道 豈非以其寬厚愛人乎]”라고 하였다.
역주34 故二世四主 垂五十年 : ≪新五代史≫ 卷61의 徐無黨의 註釋에 “≪吳錄≫, ≪運歷圖≫, ≪九國志≫에 근거해보면 모두 ‘楊行密이 唐나라 景福 元年(892)에 재차 揚州에 들어간 때부터 後晉 天福 2년(937)에 李昪에게 簒奪당할 때까지 실로 46년이다.’라고 하였는데, ≪舊唐書≫, ≪舊五代史≫ 두 책 모두 ‘大順 2년(891)에 揚州에 들어간 때부터 찬탈당할 때까지 47년이다.’라고 하였다. ≪오록≫은 徐鉉 등이 편찬한 것이고 ≪운력도≫는 龔穎이 편찬한 것으로 두 사람은 모두 江南의 옛 신하니 기록한 것이 의당 사실에 맞을 것이다. 그리고 唐나라 말엽의 혼란한 세상에서 中朝의 문헌들이 잘못된 부분이 많다. 그래서 지금 서현과 공영이 기록한 것으로 定說을 삼는다.[據吳錄運歷圖九國志 皆云 行密以唐景福元年 再入揚州 至晉天福二年 爲李昪(변)所簒 實四十六年 而舊唐書舊五代史皆云 大順二年入揚州 至被簒 四十七年 吳錄徐鉉等撰 運歷圖龔(공)穎撰 二人皆江南故臣 所記宜得實 而唐末喪亂 中朝文字多差失 故今以鉉穎所記爲定]”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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