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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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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歐陽撰五代史 於宦者傳 獨卓犖하야 千古爲後之戒
嗚呼 自古宦女之禍深矣 明者 未形而知懼하고 暗者 患及而猶安焉하야 至於亂亡而不可悔也
雖然이나 不可以不戒일새 作宦者傳하노라
張承業 字繼元이니 時宦者也 本姓이니 幼閹하야 爲內常侍張泰養子
할새 承業數往來兵間한대 晉王喜其爲人이라
及昭宗爲李茂貞所迫하야 將出奔太原하야 하다
其後崔胤誅宦官할새 宦官在外者 悉詔所在殺之어늘 晉王憐承業하야 不忍殺하야 匿之斛律寺하다 昭宗崩이어늘 乃出承業하야 復爲監軍하다
晉王病且革할새 以莊宗屬承業曰 以累公等이라하다
莊宗常兄事承業하야 歲時升堂拜母하야 甚親重之 莊宗在魏하야 與梁戰河上十餘年할새 軍國之事 皆委承業하니 承業亦盡心不懈
凡所以畜積金帛하고 收市兵馬하고 勸課農桑하야 而成莊宗之業者 承業之功爲多러라
承業一切以法繩之하니 權貴皆斂手畏承業하다
莊宗歲時 自魏歸省親할새 須錢蒲博賞賜伶人이어늘 而承業主藏하야 錢不可得이라
莊宗乃置酒庫中하야 酒酣 使子繼岌爲承業起舞하니 舞罷 承業出寶帶爲贈이라
莊宗指錢積하야 呼繼岌小字하야 以語承業曰 和哥乏錢이라 可與錢一積이니 何用帶馬爲也오하니
承業謝曰 國家錢 非臣所得私也라하다 莊宗以語侵之하니 承業怒曰 臣 老勅使 非爲子孫計 惜此庫錢하야 佐王成霸業爾 若欲用之인댄 何必問臣 財盡兵散이면 豈獨臣受禍也리오하다
莊宗顧元行欽曰 取劍來하라하니 承業起하야 持莊宗衣而泣曰 臣受先王顧托之命하야 誓雪家國之讎하니 今日爲王惜庫物而死인댄 死不愧於先王矣라하다
閻寶從旁解承業手하야 令去하니 承業奮拳毆寶踣하고 罵曰 이어늘 蒙晉厚恩이오도 不能有一言之忠하고 而反諂諛自容邪아하다
太后聞之하고 使召莊宗하니 莊宗性至孝하야 聞太后召하고 甚懼하야 乃酌兩巵하야 謝承業曰 吾杯酒之失 且得罪太后 願公飮此하야 爲吾分過하라하니 承業不肯飮이라
莊宗入內하니 太后使人謝承業曰 小兒忤公하니 已笞之矣라하다 明日 太后與莊宗俱過承業第하야 慰勞之하다
嗜酒傲忽하야 自莊宗及諸公子 多見侮慢하니 莊宗深嫉之
承業間請曰 盧質嗜酒無禮하니 臣請爲王殺之라하야늘
莊宗曰 吾方招納賢才하야 以就功業이어늘 公何言之過也오하니
承業起賀曰 王能如此하니 天下不足平也라하다 質因此獲免이라
天祐十八年 莊宗已諾諸將卽皇帝位하니 承業方臥病聞之하고 自太原으로 肩輿至魏하야 諫曰 大王父子 與梁血戰三十年 本欲雪國家之讎而復唐之社稷이어늘 今元兇未滅 而遽以尊名自居하니 非王父子之初心이요 且失天下望하리니 不可라하니
莊宗謝曰 此諸將之所欲也라하니 承業曰 不然이라 唐晉之讎賊而天下所共惡也 今王誠能爲天下去大惡하고 復列聖之深讎然後 求唐後而立之 使唐之子孫在어든 孰敢當之 使唐無子孫이어든 天下之士 誰可與王爭者리오 唐家一老奴耳 誠願見大王之成功然後 退身田里하야 使百官送出洛東門하고 而令路人指而歎曰 此本朝勅使 先王時監軍也 豈不臣主俱榮哉아하다
莊宗不聽하니 承業知不可諫하야 乃仰天大哭曰 吾王自取之하야 誤老奴矣로다하고 肩輿至太原하야 不食而卒하니 年七十七이러라
同光元年 贈左武衛上將軍하고 諡曰正憲이라하다
張居翰 字德卿이니 故唐掖廷令張從玫之養子
昭宗時 爲范陽監軍하야 與節度使劉仁恭相善이러니 大誅宦者할새 仁恭匿居翰大安山之北谿以免하다
其後梁兵攻仁恭할새 仁恭遣居翰하야 從晉王攻梁潞州하야 以牽其兵이러니 晉遂取潞州하야 以居翰爲昭義監軍하다
莊宗卽位 與郭崇韜竝爲樞密使하다 莊宗滅梁而驕 宦官因以用事하고 郭崇韜又專任政이어늘 居翰默默하야 苟免而已러라
하고 王衍朝京師라가 行至秦川 而明宗軍變於魏
莊宗東征 慮衍有變하야 遣人馳詔魏王殺之 詔書已印畫 而居翰發視之하니 詔書言 誅衍一行이라
居翰以謂殺降不祥하야 乃以詔傅柱하고 揩去行字하야 改爲一家하니 時蜀降人與衍俱東者千餘人 皆獲免하다
莊宗遇弑하니 居翰見明宗於至德宮하야 求歸田里하야
天成三年 卒於長安하니 年七十一이러라
五代文章陋矣하니 而史官之職 廢於喪亂하고 傳記小說 多失其傳이라 故其事迹 終始不完하야 而雜以訛繆
至於英豪奮起하야 戰爭勝敗하야 國家興廢之際하얀 豈無謀臣之略 辯士之談이리오마는 而文字不足以發之하야 遂使泯然無傳於後世
然獨張承業事 卓卓在人耳目하야 至今故老猶能道之하니 其論議可謂偉然歟인저 殆非宦者之言也로다
自古宦者亂人之國 其源深於女禍하니 色而已로대 宦者之害 非一端也
蓋其用事也近而習하며 其爲心也專而忍이라 能以小善으로 中人之意하고 小信으로 固人之心하야
使人主必信而親之하야 待其已信然後 懼以禍福而把持之하니 雖有忠臣碩士列於朝廷이라도 而人主以爲去己疏遠하니 不若起居飮食前後左右之親爲可恃也
故前後左右者日益親이면 則忠臣碩士日益疏하고 而人主之勢日益孤하니
勢孤則懼禍之心 日益切하고 而把持者日益牢하야 安危出其喜怒하고 禍患伏於帷闥하니 則嚮之所謂可恃者 乃所以爲患也
患已深而覺之하야 欲與疏遠之臣으로 圖左右之親近하면 緩之則養禍而益深하고 急之則挾人主以爲質하니
雖有聖智라도 不能與謀 謀之而不可爲 爲之而不可成이요 至其甚則俱傷而兩敗
故其大者亡國하고 其次亡身이라 而使姦豪得借以爲資而起하야 至抉其種類하야 盡殺以快天下之心而後已
此前史所載宦者之禍常如此者 非一世也
夫爲人主者 非欲養禍於內而疏忠臣碩士於外 蓋其漸積而勢使之然也
夫女色之惑 不幸而不悟 則禍斯及矣 使其一悟 捽而去之可也어니와
宦者之爲禍 雖欲悔悟라도 而勢有不得而去也 唐昭宗之事是已 故曰深於女禍者 謂此也 可不戒哉
昭宗信狎宦者러니 由是하고 旣出而與崔胤圖之하야 胤爲宰相이어늘 顧力不足爲하야 乃召兵於梁이라
梁兵且至 而宦者挾天子하야 走之岐하니 梁兵圍之三年하고 昭宗旣出 而唐亡矣
昭宗之出也 梁王悉誅唐宦者第五可範等七百餘人하고 其在外者 悉詔天下捕殺之러니 而宦者多爲諸鎭所藏匿而不殺이라
是時 方鎭僭擬하야 悉以宦官給事하니 而吳越最多 及莊宗立 詔天下訪求故唐時宦者하야 悉送京師하야 得數百人하니 宦者遂復用事하야 以至於亡이라
此何異求已覆之車하야 躬駕而履其轍也 可爲悲夫인저
莊宗未滅梁時 承業已死하고 其後居翰 雖爲樞密使 而不用事 有宣徽使馬紹宏者하니 嘗賜姓李하고 頗見信用이라
然誣殺大臣하고 黷貨賂하며 專威福하야 以取怨於天下者하니 左右狎暱
是時 明宗自鎭州入覲하야 한대 莊宗頗疑其有異志하야 陰遣紹宏하야 伺其動靜이어늘 紹宏反以情告明宗이라
明宗自魏而反하니 天下皆知禍起於魏로대 孰知其啓明宗之二心者 自紹宏始也
郭崇韜已破蜀 莊宗信宦者言而疑之 然崇韜之死 莊宗不知하니 皆宦者爲之也
當此之時하야 擧唐之精兵 皆在蜀하니 使崇韜不死런들 明宗入洛 豈無西顧之患이며 其能晏然取唐而代之邪
及明入立 又詔天下하야 悉捕宦者而殺之하니 宦者亡竄山谷하야 多削髮爲浮屠하고 其亡至太原者七十餘人 悉捕而殺之都亭驛하니 流血盈庭이라
明宗晩而多病이어늘 王淑妃專內以干政하니 宦者孟漢瓊因以用事
秦王入視할새 明宗疾已革이어늘 旣出而聞哭聲하고 以謂帝崩矣하야 乃謀以兵入宮者 懼不得立也
大臣朱弘昭等 方圖其事어늘 議未決 漢瓊遽入見明宗하야 言秦王反하고 卽以兵誅之하야 陷秦王大惡하니 而明宗以此飮恨而終이라
嗚呼 人情處安樂하면 自非聖哲 不能久而無驕怠 宦女之禍 非一日이니 必伺人之驕怠而浸入之
明宗非佚君이로대 而猶若此者 蓋其在位差久也일새라 其餘多武人崛起 及其嗣續하얀 世數短而年不永이라 故宦者莫暇施爲로대 其爲大害者 略可見矣
獨承業之論 偉然可愛 而居翰 更一字以活千人이라 君子之於人也 苟有善焉이면 無所不取하니 吾於斯二人者 有所取焉이로라
取其善而戒其惡 所謂 故幷述其禍敗之所以然者하야 著於篇하노라


02. 환관宦官전기傳記
구양공歐陽公이 편찬한 ≪오대사五代史≫에서 〈환자전宦者傳〉이 유독 탁월하여 천고에 후대의 감계鑑戒가 된다.
아아! 예로부터 환관宦官여색女色으로 인해 생긴 화란禍亂이 심하였다. 명철한 자는 화가 드러나기 전에 두려워할 줄 알고, 어리석은 자는 환란이 닥쳤음에도 편안히 여겨 난리가 일어나고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러 후회할 수 없게 된다.
비록 그러하나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므로 〈환자전〉을 짓노라.
장승업張承業계원繼元이니 희종僖宗 때의 환관이다. 본래 강씨康氏이니 어릴 때 거세하고 내상시內常侍 장태張泰양자養子가 되었다.
진왕晉王(이극용李克用)의 병사가 왕행유王行瑜를 공격할 때 장승업이 자주 양군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진왕이 그 사람됨을 좋아하였다.
소종昭宗이무정李茂貞의 협박을 받아 태원太原으로 도망 나가려 할 때에 먼저 장승업을 에 사신으로 보내 태원으로 가려는 뜻을 설명하고서 이어 장승업을 하동감군河東監軍으로 삼았다.
그 뒤 최윤崔胤이 환관들을 주살誅殺할 때 외방外方에 있는 환관들을 그 자리에서 다 주살하라고 조칙을 내렸는데, 진왕이 장승업을 가엾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서 곡률사斛律寺에 은신시켰다. 소종이 붕어하자 이에 장승업을 나오게 하여 다시 감군으로 삼았다.
진왕晉王(이극용李克用)의 병이 위중해지자 장종莊宗을 장승업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아자亞子를 공들에게 부탁하노라.”라고 하였다.
장종이 항상 장승업을 형으로 섬기면서 세시歲時 때마다 장승업의 집에 가서 당에 올라 장승업의 모친에게 절하면서 몹시 친애하고 의중依重하였다. 장종이 위주魏州에 있으면서 하상河上에서 십여 년 동안 싸울 때 군국軍國의 일을 모두 장승업에게 맡기니, 장승업 또한 마음을 다하면서 해이하지 않았다.
무릇 금전과 비단을 축적하고 병마兵馬를 사들이고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장종의 대업을 완성시킨 것은 장승업의 공이 많았다.
그리고 정간태후貞簡太后한덕비韓德妃이숙비伊淑妃 및 여러 공자公子들에 이르기까지 진양晉陽에 있는 자들을 장승업이 일체 법으로 단속하니, 권세 있고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두 손을 마주 잡고 공손하게 굴면서 장승업을 두려워하였다.
장종莊宗세시歲時위주魏州로부터 돌아와 문안을 드릴 때 놀음을 하고 영인伶人들에게 상으로 내려줄 돈이 필요하였는데, 장승업이 재정을 맡고 있어 돈을 얻을 수 없었다.
장종이 이에 곳간 안에 술자리를 차리고 주흥酒興이 무르익자 아들 이계급李繼岌에게 장승업을 위해 일어나 춤을 추도록 하였다. 이계급이 춤을 다 추자 장승업이 보대寶帶폐마幣馬를 꺼내 선물로 주었다.
장종이 곳간의 돈 더미를 가리키면서 이계급을 아명兒名으로 부르며 장승업에게 말하기를 “화가和哥는 돈이 모자라니 돈 한 꿰미를 주시오. 띠와 말을 어디다 쓰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승업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랏돈은 신이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장승업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자 장승업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신은 늙은 칙사勅使로 자손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니, 이 창고의 돈을 아껴 왕을 도와 패업霸業을 완수할 뿐입니다. 만약 이 돈을 쓰고자 하신다면 어찌 구태여 신에게 물으십니까. 재물이 다 없어지고 병사들이 흩어지면 어찌 신만 를 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종이 원행흠元行欽을 돌아보며 “검을 가져오라.”라고 하니, 장승업이 일어나 장종의 옷을 붙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선왕의 고명顧命을 받아 나라의 원수를 설욕하기로 맹세하였으니, 오늘 왕을 위해 창고의 재물을 아끼다가 죽는다면 죽어도 선왕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염보閻寶가 옆에서 장승업이 옷을 붙잡은 손을 풀고 나가게 하니, 장승업이 주먹을 날려 염보를 쳐서 넘어뜨리고 꾸짖기를 “염보는 주온朱溫적당賊黨인데 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충성스러운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첨하여 스스로 용납받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
태후太后가 이 사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 장종을 부르니, 장종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태후가 부름을 듣고는 몹시 두려워하여 이에 술 두 잔을 따라 장승업에게 사과하며 말하기를 “내가 술을 먹고 한 실수로 태후에게 죄를 얻게 생겼소. 원컨대 공은 이 술을 마시어 나의 잘못을 덜어주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술을 마시려 하지 않았다.
장종이 내전內殿으로 들어가니 태후가 사람을 보내 장승업에게 사과하기를 “어린아이가 공을 거슬렀기에 벌써 매를 때렸소.”라고 하였다. 다음날 태후와 장종이 함께 장승업의 집을 찾아가 위로하였다.
노질盧質이 술을 좋아하고 오만하여 장종莊宗으로부터 여러 공자公子에 이르기까지 노질로부터 많이들 업신여김을 당하니, 장종이 노질을 매우 미워하였다.
장승업張承業이 기회를 틈타 청하기를 “노질이 술을 좋아하고 무례하니 신이 청컨대 왕을 위해 노질을 죽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장종이 말하기를 “내가 한창 현재賢才를 불러들여 공업功業을 성취하려 하는데, 공은 어찌 말을 이리 지나치게 하는가.”라고 하니,
장승업이 일어나 축하하기를 “왕께서 이와 같으시니 천하를 평정하지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질이 이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
천우天祐 18년(921)에 장종莊宗이 황제에 즉위하라는 장수들의 요청을 이미 승낙하니, 장승업이 병석에 누워 있다가 이 사실을 듣고 태원太原에서 견여肩輿를 타고 위주魏州에 이르러 간언하기를 “대왕大王 부자父子나라와 30년 동안 혈전血戰을 벌인 것은 본래 나라의 원수를 설욕하고 당나라의 사직을 회복하려는 것이었거늘, 지금 원흉이 망하기도 전에 갑자기 황제의 존명尊名으로 자처하니, 이는 대왕 부자의 초심初心이 아니요 천하의 인망人望을 잃을 것입니다.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답하기를 “이는 장수들이 바라는 것이다.”라고 하니, 장승업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양나라는 당나라와 나라의 원수이자 천하 사람들이 함께 미워하는 바입니다. 지금 왕께서 진실로 천하를 위해 큰 악을 제거하고서 열성조列聖朝의 깊은 원수를 설욕한 뒤에 당나라의 후사後嗣를 구하여 세워야 하니, 만일 당나라의 자손이 남아 있다면 누가 감히 황제의 자리를 맡겠으며 만일 당나라의 자손이 남아 있지 않다면 천하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가 왕과 더불어 황제의 자리를 다툴 수 있겠습니까. 신은 당가唐家의 한 늙은 노복일 뿐이니 대왕께서 공업을 이루시는 것을 본 뒤 전리田里로 물러나면서 백관들은 낙양洛陽 동문東門에서 신을 전송하러 나오고 행인들은 저를 가리키면서 탄복하기를 ‘이 사람은 본조本朝칙사勅使요, 선왕先王 때의 감군監軍이다.’라고 하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찌 신하와 군주 모두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종이 따르지 않으니, 장승업은 간쟁할 수 없음을 알고서 이에 하늘을 우러러 크게 곡하고 말하기를 “우리 왕이 스스로 천하를 취하여 늙은 노복을 그르치도다.”라고 하고는 견여를 타고 태원에 이르러 음식을 먹지 않고 죽으니 향년 77세였다.
동광同光 원년(923)에 좌무위상장군左武衛上將軍을 추증하고 시호를 정헌正憲이라 하였다.
장거한張居翰덕경德卿이니 나라 액정령掖廷令 장종매張從玫양자養子이다.
소종昭宗 때에 범양감군范陽監軍으로 있으면서 절도사 유인공劉仁恭과 사이가 좋았는데, 천복天復 연간에 환관들을 크게 주륙誅戮할 때 유인공이 장거한을 대안산大安山 북쪽 골짜기에 숨겨주어 화를 면하게 해주었다.
그 뒤에 나라 군대가 유인공을 공격할 때 유인공이 장거한을 보내 진왕晉王을 따라 양나라의 노주潞州를 공격하여 양나라 군대를 견제하였더니 이 마침내 노주를 취하고서 장거한을 소의감군昭義監軍으로 삼았다.
장종莊宗이 즉위하자 곽숭도郭崇韜와 더불어 추밀사樞密使가 되었다. 장종이 양나라를 멸망시키고서 교만해지니 환관들이 이를 말미암아 국사를 농간하고 곽숭도가 또 국정을 전횡하였는데, 장거한은 침묵을 지키면서 구차하게 화를 면할 따름이었다.
위왕魏王을 격파하고 왕연王衍경사京師조현朝見하러 가던 도중 진천秦川에 이르렀을 때 위주魏州에서 명종明宗이 변란을 일으켰다.
장종이 동쪽으로 정벌하러 가면서 왕연도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위왕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조서를 내려 왕연을 죽이려 하였다. 조서에 이미 인가印可를 하였는데 장거한이 조서를 꺼내 보니 조서에 왕연 일행一行주살誅殺하라고 되어 있었다.
장거한은 항복한 자를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여겨 마침내 조서를 기둥에다 붙여 놓고 ‘’자를 문질러 지우고서 ‘일가一家’로 고치니, 당시 촉에서 왕연과 함께 항복하러 동쪽으로 온 사람 천여 명이 모두 화를 면하였다.
장종이 시해를 당하자 장거한은 지덕궁至德宮에서 명종을 알현하고서 전리田里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천성天成 3년(928)에 장안長安에서 졸하니 향년 71세였다.
오대五代 시절의 문장文章은 비루하니, 사관史官의 직무는 상란喪亂으로 없어지고 전기傳記소설小說실전失傳된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그 사적事迹이 시종 온전하지 못하여 오류가 섞여 있다.
영웅들이 떨치고 일어나 전투하여 승패를 다투어 나라의 흥망이 나뉠 때에 이르러서는 어찌 모신謀臣의 책략과 변사辯士의 담론이 없었겠는가마는, 글이 그것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여 마침내 민몰되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없게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張承業의 일만은 우뚝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어서 지금까지도 고로故老들이 말할 수 있으니, 그의 의논議論은 훌륭하다고 할 만하도다. 거의 환관의 말이 아니다.
예로부터 환관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은 그 근원이 여자로 인한 재앙보다 심하니, 여자는 뿐이지만 환관의 해는 한 가지가 아니다.
그 일하는 자리가 임금과 가깝고 익숙하며 그 마음을 쓰는 것이 전일專一하고 참을성이 있으므로, 작은 으로 남의 뜻에 영합하고 작은 믿음으로 남의 마음을 견고히 붙잡아둘 수 있다.
그래서 군주로 하여금 반드시 믿어 가까이 여기고 사랑하도록 하여 군주가 이미 자기를 믿기를 기다린 뒤에 화복禍福으로 위협하여 장악한다. 비록 충성스러운 신하와 어질고 재주 있는 선비가 조정에 늘어서 있더라도 군주는 그들이 자기와 소원한 사람이니 움직이고 음식을 먹을 때 전후좌우前後左右에 가까이 있어 믿을 만한 자들만 못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전후좌우에 있는 자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친밀해지면 충성스러운 신하와 어질고 재주 있는 선비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소원해지고 군주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고립된다.
군주의 형세가 고립되면 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해지고 환관들이 장악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견고해져 안위安危가 그들의 기쁨과 노여움에서 나오고 화환禍患이 궁중 안에 숨어 있게 되니, 전에 믿을 만하다고 했던 것이 바로 화환이 되는 것이다.
화환禍患이 이미 깊어지고서야 알아차려서 소원한 신하들과 더불어 좌우의 친근한 환관들을 도모하고자 하면, 늦출 경우에는 화가 자라나서 더욱 깊어지고 서두를 경우에는 군주를 끼고 볼모로 삼는다.
그리하여 비록 비범한 총명聰明예지叡智가 있더라도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고 도모해도 손을 쓸 수 없으며, 손을 쓰더라도 일을 이룰 수 없고, 심한 경우에 이르러서는 모두 다 상처를 입고 양쪽이 다 패망한다.
그러므로 큰 경우에는 나라를 잃고 그 다음은 자기의 몸을 잃어, 간사하고 호강豪强한 자들로 하여금 이를 빌미로 삼아 일어나 환관의 종족들을 척결하여 죄다 죽여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후련히 풀고서야 그치게 한다.
이는 전대의 역사에서 환관의 화를 기록한 것이 늘 이와 같은 것이니, 한 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대저 군주가 된 자가 안으로 를 기르고 밖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와 어질고 재능있는 선비를 멀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대개 점차 쌓여서 형세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다.
대저 여색女色에 미혹된 것은 불행히 깨달아 알아차리지 못하면 화가 그제야 닥쳐오니, 한번 깨달아 알아차리기만 하면 적발하여 제거할 수 있다.
그렇지만 환관의 화는 비록 뉘우치고 깨닫더라도 그 형세가 이미 제거할 수 없으니, 소종昭宗의 일이 그러한 경우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화보다 심하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종昭宗이 환관들을 믿고 친애하였는데 이 때문에 동궁東宮에 유폐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동궁에서 풀려나서는 최윤崔胤과 일을 도모하여 최윤을 재상으로 삼았지만 최윤의 힘이 일을 도모하기에는 부족하기에 마침내 나라에서 군사를 불러들였다.
양나라의 군사가 장차 이르려 하자 환관들이 천자를 데리고 로 도주하니 양나라 군사가 3년 동안 포위하였고, 소종이 풀려나자 당나라가 망하였다.
당초에 소종昭宗이 풀려났을 때 양왕梁王이 당나라의 환관 제오가범第五可範 등 700여 명을 다 주살誅殺하고 외방外方에 있는 환관은 모두 천하에 조칙을 내려 잡아 죽이게 하였는데, 환관들 대부분은 번진藩鎭들에서 숨겨주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이때에 방진方鎭들이 참람하게 자신을 황제에 비기면서 모두 환관들에게 일을 맡기니 그 가운데 오월吳越에 가장 환관이 많았다. (후당後唐) 장종莊宗이 즉위하자 천하에 조칙을 내려 옛 당나라 때 환관들을 찾아 구하여 모두 경사京師로 보내게 하여 수백 명을 얻으니, 환관들이 마침내 다시 권력을 잡아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이미 뒤집어진 수레를 구해서 몸소 멍에를 메고서 잘못된 전철을 밟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슬퍼할 만하도다.
장종莊宗을 멸망시키기 전에 장승업張承業은 이미 죽었고, 그 후 장거한張居翰이 비록 추밀사樞密使가 되었으나 권력을 잡지는 못하였다. 선휘사宣徽使 마소굉馬紹宏이라는 이가 있었으니 일찍이 이씨李氏 성을 하사받고 자못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대신大臣을 무함하여 죽이고 뇌물을 탐닉하였으며 상벌을 마음대로 시행하여 천하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았으니, 황제 좌우에서 친압親狎하는 이들은 환관의 무리였다.
이때에 명종明宗진주鎭州에서 들어와 조근朝覲하여 경사京師에서 봉조청奉朝請이 되었다. 장종은 자못 명종이 다른 뜻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은밀히 마소굉을 보내 그 동정을 엿보게 하였는데, 마소굉은 도리어 그러한 사실을 명종에게 고하였다.
명종이 위주魏州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천하 사람들 모두 화란禍亂이 위주에서 일어난 줄 알았다. 그러나 명종이 두 마음을 품게 된 계기가 마소굉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곽숭도郭崇韜을 격파하자 장종이 환관의 말을 믿고서 곽숭도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곽숭도의 죽음을 장종은 알지 못했으니 모두 환관이 한 짓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나라의 모든 정예병이 촉에 있었으니, 만일 곽숭도가 죽지 않았던들 명종이 낙양에 들어갈 때 어찌 서쪽을 염려할 우환이 없었겠으며, 편안하게 나라를 차지하여 황제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겠는가.
명종이 들어와 즉위하자 또 천하에 조명詔命을 내려 환관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게 하니 환관들이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숨어 대부분 삭발하고서 승려가 되었고, 태원太原으로 도망간 70여 명은 모두 잡아 도정역都亭驛에서 죽이니 피가 흘러 뜰에 가득하였다.
명종明宗이 만년에 병치레가 잦자 왕숙비王淑妃내전內殿에서 권력을 독차지하고 국정에 간여하니, 환관 맹한경孟漢瓊이 이로 말미암아 권력을 잡았다.
진왕秦王이 들어와 문병할 때 명종의 병세가 이미 위중하였는데, 궁궐을 나오고 나서 곡소리를 듣고는 황제가 붕어崩御하였다 여겨 마침내 병사들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려고 모의했던 것은 자신이 즉위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였다.
대신 주홍소朱弘昭 등이 한창 그 일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의논이 결정되기 전에 맹한경이 갑작스레 들어와 명종을 알현하고서 진왕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고는 즉시 병사를 일으켜 진왕을 주살誅殺하여 진왕을 대역죄에 빠지게 하니 명종이 이 때문에 한을 품고 죽었다.
뒤에 민제愍帝위주衛州로 도망가자 맹한경이 서쪽으로 노주潞州에서 폐제廢帝를 맞이하였는데 폐제가 그를 미워하여 죽였다.
아아! 사람의 마음이 안락安樂에 처하면 성인聖人철인哲人이 아니고서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교만하고 나태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환관과 여색女色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그 사람이 교만하고 나태해지는 것을 틈타 점점 젖어 들어오는 것이다.
명종明宗방일放逸한 군주가 아니었음에도 이와 같았던 것은 황제의 자리에 있은 지 비교적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는 대부분 무인武人 출신으로 떨쳐 일어난 군주이고 그들을 이은 군주들은 재위한 기간이 짧고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환자들이 농간을 부릴 겨를이 없었으나, 큰 해악이 된 자는 대략 알 수 있다.
유독 장승업의 의논議論은 훌륭하여 참으로 좋고 장거한은 글자 하나를 고쳐 천 명의 사람을 살렸다. 군자는 남에 대하여 진실로 선한 점이 있으면 취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나는 이 두 사람에게 취하는 점이 있다.
그 선을 취하고 그 악을 경계하는 것은 이른바 “사랑하면서도 그의 단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의 장점을 안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화란禍亂패망敗亡의 까닭을 아울러 서술하여 이 에 드러낸다.


역주
역주1 宦者傳 : 〈宦者傳〉은 後唐 莊宗 때의 宦官인 張承業(846~922), 張居翰(858~928), 馬紹宏(?~932) 그리고 明宗 때의 환관인 孟漢琼(?~934)의 행적을 기록한 것으로 ≪新五代史≫ 卷38에 실려 있으며, ≪舊五代史≫에는 이들의 열전이 卷72 〈唐書 第48 列傳24〉에 실려 있다.
〈환자전〉은 구성상 여타의 열전과는 다른 모습을 보인다. 보통은 열전의 서두 또는 말미에 小序 및 史論이 있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개별 傳이 배열되는데, 〈환자전〉은 小序―張承業傳―張居翰傳―史論―馬紹宏傳―孟漢瓊傳―史論 순으로 구성되어 열전 사이사이에 구양수가 의론을 펼치고 있다. 장승업과 장거한은 그 행적에 큰 과실이 없고 오히려 덕이 있으므로 구양수는 이들의 열전 끝에 의론을 펼쳐 宦官이 끼치는 해악을 설파하고 이어서 그 예로 馬紹宏傳과 孟漢琼傳을 편차한 후 다시 사론으로 마무리하였다. 이는 〈환자전〉 마지막에 구양수가 “유독 장승업의 議論은 걸출하여 참으로 좋고 장거한은 글자 하나를 고쳐 천 명의 사람을 살렸다. 군자는 남에 대하여 진실로 선한 점이 있으면 취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나는 이 두 사람에게 취하는 점이 있다.……그 禍亂과 敗亡의 까닭을 아울러 서술하여 이 篇에 드러내노라.”라고 한 데서도 잘 드러난다.
이러한 입장은 ≪구오대사≫ 역시 마찬가지이다. ≪구오대사≫의 史評에서는 “장승업은 武皇의 큰 은혜에 감격하고 莊宗의 中興을 보좌하여 이미 의롭고도 충성스러우니 어떻게 그러한 경지에 오른 것인가. 대저 이와 같다면 春秋시대 晉나라의 勃貂(勃鞮)와 秦나라의 景監도 장승업에 미치기에는 거리가 멀다. 장거한은 조서에서 한 글자를 고쳐 천 명의 사람이 마구잡이로 죽는 것을 구원하였으니 어진 사람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마소굉이 권력을 다투고 맹한경이 화를 얽어 만든 것 같은 경우는 바로 환자들이 늘상 하는 작태이니 또 말할 만한 것이 무엇이겠는가.[承業感武皇之大惠 佐莊宗之中興 旣義且忠 何以階也 夫如是則晉之勃貂秦之景監 去之遠矣 居翰改一字于詔書 救千人之濫死 可不謂之仁人矣乎 如紹宏之争權漢瓊之構禍 乃宦者之常態也 又何足以道哉]”라고 하였다.
구양수의 〈환자전〉의 史論은 내용이 절실하고 흐름이 통창하다. 이 사론은 ≪文抄≫에도 따로 실려 있는데 茅坤은 여기에 “전편이 마치 땅에 水銀을 부음에 百千 구멍마다 들어가지 못하는 곳이 없는 것과 같으니, 그 機用은 원활하고 그 감정은 暢通하다.[通篇如傾水銀於地 而百孔千竅 無所不入 其機員而其情鬯]”라는 평어를 달았다. 또 淸 康熙帝는 ≪聖祖仁皇帝御製文集≫ 第3集 卷39 〈五代史宦者傳論〉에서 “필치가 더욱 진행될수록 기세가 더욱 긴밀해지고 기세가 더욱 긴밀해질수록 의미가 더욱 절실해진다. 마치 千巖萬壑에 회오리 물결이 빙빙 돌면서 물결치는 것과 같으니 어찌 문장의 극치가 아니겠는가.[筆愈轉則勢愈緊 勢愈緊則意愈切 如千巖萬壑洑流迴瀾 豈非文章極觀]”라고 하였다.
역주2 唐僖宗 : 862~888. 성명은 李儇이다. 懿宗 咸通 14년(873)에 환관 劉行深 등이 태자로 옹립했고, 12살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歡樂만 즐기면서 정사는 환관들에게 일임하였다. 黃巢의 반란이 일어나 兩京이 함락되자 成都로 달아났다가 中和 5년(885) 長安으로 돌아왔다. 光啓 2년(886) 환관 田令孜와 河中節度使 王重榮이 충돌하자 다시 鳳翔으로 달아났다가 文德 원년(888) 장안으로 돌아왔다. 얼마 뒤 병으로 사망했다. 15년 동안 재위했고, 시호는 惠聖恭定孝皇帝이다.
역주3 晉王兵擊王行瑜 : 王行瑜(?~895)는 唐末의 장수로, 邠州 사람이다. 僖宗이 邠寧節度使에 임명하였다. 895년에 李茂貞 및 鎭國節度使 韓建과 함께 長安으로 쳐들어가 재상 韋昭度, 李谿를 죽이고 昭宗을 폐위하고 李保를 황제로 세우는 일을 도모하였는데, 晉王 李克用이 군대를 거느리고 남쪽으로 내려가 三鎭軍을 격퇴할 때 邠州도 함께 공격하자, 도망 다니다가 부하에게 살해당하였다.(≪新五代史≫ 卷4 〈唐本紀〉) 본서 〈唐莊宗紀〉에 자세하다.
역주4 乃先遣承業……因以爲河東監軍 : ≪舊五代史≫ 권72 〈장승업열전〉에 따르면, 장승업이 이극용과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므로 昭宗이 장승업을 하동감군으로 제수하여 이극용에게 있게 하여 태원에서 황제를 맞이하도록 은밀히 명하였다.
역주5 亞子 : 後唐 莊宗 李存勖의 兒名이다. 亞次로 표기되기도 한다.
역주6 自貞簡太后韓德妃伊淑妃及諸公子 在晉陽者 : ≪五代史記纂誤續補≫ 卷3에 “살펴보건대 〈家人傳〉에 ‘이에 韓氏를 봉하여 淑妃로 삼고 伊氏를 봉하여 德妃로 삼았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薛居正의 ≪舊五代史≫ 〈本紀〉와 〈后妃傳〉, ≪五代會要≫에도 ‘淑妃韓氏’와 ‘德妃伊氏’라고 하였으니 이는 대개 薛居正의 ≪舊五代史≫ 〈張承業傳〉의 오류를 답습한 것이다.[按家人傳乃封韓氏爲淑妃 封伊氏爲德妃 薛史本紀后妃傳五代會要亦作淑妃韓氏德妃伊氏 此蓋仍薛史承業傳誤也]”라고 하였다.
역주7 幣馬 : 禮物로 주는 말을 가리킨다.
역주8 閻寶 朱溫之賊 : 閻寶는 원래 後梁의 邢州節度使였는데 晉이 공격하였을 때 후량을 버리고 진에 투항하였으므로 한 말이다.
역주9 盧質 : 867~942. 字는 子徵으로 河南 사람이다. 唐나라에서 秘書郞을 지냈으며, 뒤에 晉王 李克用을 섬겨 河東節度掌書記가 되었다. 張承業 등과 함께 莊宗을 후사로 세우는 논의를 정하였고, 장종이 즉위한 뒤 大禮使, 太原尹, 兵部尙書 등을 역임하였다. 明宗 때 右僕射를 지냈고, 後晉 高祖 때 太子太保가 되었다. 시호는 文忠이다.
역주10 天復 : 唐 昭宗의 연호로 901~904년 사이에 사용되었다.
역주11 魏王破蜀 : 위왕은 後唐 莊宗 李存勖의 아들인 李繼岌(?~926)이다. 당시 蜀 지역은 王衍(899~926)의 지배하에 있었는데, 925년에 後唐에서 이계급을 西南面行營都統으로 삼고 郭崇韜를 都招討使로 삼아 촉을 정벌하였다.(≪新五代史≫ 卷14 〈唐家人傳〉) 이 내용은 본서 〈唐繼岌傳〉에 자세하다.
역주12 東宮之幽 : 光化 원년(899)에 환관 劉季述이 난을 일으켜 昭宗을 폐위하고 태자인 裕王을 옹립하였다. 소종은 東宮에 두 달 동안 유폐되어 있다가 崔胤 등이 유계술을 죽인 뒤 복위하였다. 본서 〈梁太祖紀〉에 자세한 내용이 보인다.
역주13 黃門內養之徒 : 黃門은 원래 황제를 侍從하면서 명령을 전달하는 임무를 맡는 관직이었는데, 後漢 이래로 이 직책에 환관을 임명하였으므로 환관을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內養은 환관의 長官인 太監을 가리키는 말로 역시 환관을 지칭한다.
역주14 奉朝請於京師 : 제후가 봄에 천자를 뵙는 것을 朝라 하고, 가을에 뵙는 것을 請이라 하였다. 주로 퇴직한 대신이나 장군, 황실과 외척에게 봉조청의 명의를 주어 조회에 참가하도록 하였다.
역주15 (莊)[宗] : 저본에는 ‘莊’으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宗’으로 바로잡았다.
역주16 後愍帝奔於衛州 漢瓊西迎廢帝於潞 : 愍帝는 後唐 明宗의 3남인 李從厚이다. 명종이 죽고 황제로 즉위하였으나, 명종의 養子였던 潞王 李從珂가 鳳翔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낙양을 탈출하여 衛州로 피신하였다. 廢帝는 바로 이종가로, 민제를 폐위하고 황제에 올랐으나 얼마 뒤 契丹과 손잡은 石敬瑭의 공격으로 낙양이 포위되자 자살하였다.
≪五代史記纂誤補≫ 卷3에 “삼가 살펴보건대 ≪資治通鑑≫에 이르기를 ‘漢瓊이 澠池 서쪽에 이르렀을 때 潞王이 명하여 길모퉁이에서 참수하게 하였다.’라고 하였으니, 이 부분의 ‘潞’자는 응당 ‘路’자의 착오일 것이다.[謹按通鑑云漢瓊至澠池西 潞王命斬于路隅 此潞字當是路字之誤]”라고 하였다. ≪자치통감≫의 해당 기사는 卷279 〈後唐紀8 潞王 下〉에 보인다. ≪오대사기찬오보≫의 해석이 近理할 듯하나 우선은 본문에 의거하여 번역하였다.
역주17 愛而知其惡 憎而知其善 : ≪禮記≫ 〈曲禮 上〉의 말이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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