歐陽撰五代史에 於宦者傳에 獨卓犖하야 千古爲後之戒라
嗚呼라 自古宦女之禍深矣라 明者는 未形而知懼하고 暗者는 患及而猶安焉하야 至於亂亡而不可悔也라
張承業
은 字繼元
이니 時宦者也
라 本姓
은 康
이니 幼閹
하야 爲內常侍張泰養子
라
其後崔胤誅宦官할새 宦官在外者를 悉詔所在殺之어늘 晉王憐承業하야 不忍殺하야 匿之斛律寺하다 昭宗崩이어늘 乃出承業하야 復爲監軍하다
莊宗常兄事承業하야 歲時升堂拜母하야 甚親重之라 莊宗在魏하야 與梁戰河上十餘年할새 軍國之事를 皆委承業하니 承業亦盡心不懈라
凡所以畜積金帛하고 收市兵馬하고 勸課農桑하야 而成莊宗之業者는 承業之功爲多러라
莊宗歲時에 自魏歸省親할새 須錢蒲博賞賜伶人이어늘 而承業主藏하야 錢不可得이라
莊宗乃置酒庫中
하야 酒酣
에 使子繼岌爲承業起舞
하니 舞罷
에 承業出寶帶
爲贈
이라
莊宗指錢積하야 呼繼岌小字하야 以語承業曰 和哥乏錢이라 可與錢一積이니 何用帶馬爲也오하니
承業謝曰 國家錢은 非臣所得私也라하다 莊宗以語侵之하니 承業怒曰 臣은 老勅使라 非爲子孫計니 惜此庫錢하야 佐王成霸業爾라 若欲用之인댄 何必問臣가 財盡兵散이면 豈獨臣受禍也리오하다
莊宗顧元行欽曰 取劍來하라하니 承業起하야 持莊宗衣而泣曰 臣受先王顧托之命하야 誓雪家國之讎하니 今日爲王惜庫物而死인댄 死不愧於先王矣라하다
閻寶從旁解承業手
하야 令去
하니 承業奮拳毆寶踣
하고 罵曰
이어늘 蒙晉厚恩
이오도 不能有一言之忠
하고 而反諂諛自容邪
아하다
太后聞之하고 使召莊宗하니 莊宗性至孝하야 聞太后召하고 甚懼하야 乃酌兩巵하야 謝承業曰 吾杯酒之失이 且得罪太后라 願公飮此하야 爲吾分過하라하니 承業不肯飮이라
莊宗入內하니 太后使人謝承業曰 小兒忤公하니 已笞之矣라하다 明日에 太后與莊宗俱過承業第하야 慰勞之하다
嗜酒傲忽
하야 自莊宗及諸公子
히 多見侮慢
하니 莊宗深嫉之
라
承業間請曰 盧質嗜酒無禮하니 臣請爲王殺之라하야늘
莊宗曰 吾方招納賢才하야 以就功業이어늘 公何言之過也오하니
承業起賀曰 王能如此하니 天下不足平也라하다 質因此獲免이라
天祐十八年에 莊宗已諾諸將卽皇帝位하니 承業方臥病聞之하고 自太原으로 肩輿至魏하야 諫曰 大王父子가 與梁血戰三十年은 本欲雪國家之讎而復唐之社稷이어늘 今元兇未滅에 而遽以尊名自居하니 非王父子之初心이요 且失天下望하리니 不可라하니
莊宗謝曰 此諸將之所欲也라하니 承業曰 不然이라 梁은 唐晉之讎賊而天下所共惡也라 今王誠能爲天下去大惡하고 復列聖之深讎然後에 求唐後而立之니 使唐之子孫在어든 孰敢當之며 使唐無子孫이어든 天下之士가 誰可與王爭者리오 臣은 唐家一老奴耳니 誠願見大王之成功然後에 退身田里하야 使百官送出洛東門하고 而令路人指而歎曰 此本朝勅使요 先王時監軍也니 豈不臣主俱榮哉아하다
莊宗不聽하니 承業知不可諫하야 乃仰天大哭曰 吾王自取之하야 誤老奴矣로다하고 肩輿至太原하야 不食而卒하니 年七十七이러라
昭宗時
에 爲范陽監軍
하야 與節度使劉仁恭相善
이러니 中
에 大誅宦者
할새 仁恭匿居翰大安山之北谿以免
하다
其後梁兵攻仁恭할새 仁恭遣居翰하야 從晉王攻梁潞州하야 以牽其兵이러니 晉遂取潞州하야 以居翰爲昭義監軍하다
莊宗卽位에 與郭崇韜竝爲樞密使하다 莊宗滅梁而驕라 宦官因以用事하고 郭崇韜又專任政이어늘 居翰默默하야 苟免而已러라
하고 王衍朝京師
라가 行至秦川
에 而明宗軍變於魏
라
莊宗東征에 慮衍有變하야 遣人馳詔魏王殺之라 詔書已印畫에 而居翰發視之하니 詔書言 誅衍一行이라
居翰以謂殺降不祥하야 乃以詔傅柱하고 揩去行字하야 改爲一家하니 時蜀降人與衍俱東者千餘人이 皆獲免하다
莊宗遇弑하니 居翰見明宗於至德宮하야 求歸田里하야
五代文章陋矣하니 而史官之職은 廢於喪亂하고 傳記小說은 多失其傳이라 故其事迹이 終始不完하야 而雜以訛繆라
至於英豪奮起하야 戰爭勝敗하야 國家興廢之際하얀 豈無謀臣之略과 辯士之談이리오마는 而文字不足以發之하야 遂使泯然無傳於後世라
然獨張承業事는 卓卓在人耳目하야 至今故老猶能道之하니 其論議可謂偉然歟인저 殆非宦者之言也로다
自古宦者亂人之國이 其源深於女禍하니 女는 色而已로대 宦者之害는 非一端也라
蓋其用事也近而習하며 其爲心也專而忍이라 能以小善으로 中人之意하고 小信으로 固人之心하야
使人主必信而親之하야 待其已信然後에 懼以禍福而把持之하니 雖有忠臣碩士列於朝廷이라도 而人主以爲去己疏遠하니 不若起居飮食前後左右之親爲可恃也라
故前後左右者日益親이면 則忠臣碩士日益疏하고 而人主之勢日益孤하니
勢孤則懼禍之心이 日益切하고 而把持者日益牢하야 安危出其喜怒하고 禍患伏於帷闥하니 則嚮之所謂可恃者가 乃所以爲患也라
患已深而覺之하야 欲與疏遠之臣으로 圖左右之親近하면 緩之則養禍而益深하고 急之則挾人主以爲質하니
雖有聖智라도 不能與謀요 謀之而不可爲요 爲之而不可成이요 至其甚則俱傷而兩敗라
故其大者亡國하고 其次亡身이라 而使姦豪得借以爲資而起하야 至抉其種類하야 盡殺以快天下之心而後已라
夫爲人主者가 非欲養禍於內而疏忠臣碩士於外요 蓋其漸積而勢使之然也라
夫女色之惑은 不幸而不悟면 則禍斯及矣니 使其一悟면 捽而去之可也어니와
宦者之爲禍는 雖欲悔悟라도 而勢有不得而去也니 唐昭宗之事是已라 故曰深於女禍者가 謂此也니 可不戒哉아
昭宗信狎宦者
러니 由是
로 有
하고 旣出而與崔胤圖之
하야 胤爲宰相
이어늘 顧力不足爲
하야 乃召兵於梁
이라
梁兵且至에 而宦者挾天子하야 走之岐하니 梁兵圍之三年하고 昭宗旣出에 而唐亡矣라
初에 昭宗之出也에 梁王悉誅唐宦者第五可範等七百餘人하고 其在外者는 悉詔天下捕殺之러니 而宦者多爲諸鎭所藏匿而不殺이라
是時에 方鎭僭擬하야 悉以宦官給事하니 而吳越最多라 及莊宗立에 詔天下訪求故唐時宦者하야 悉送京師하야 得數百人하니 宦者遂復用事하야 以至於亡이라
此何異求已覆之車하야 躬駕而履其轍也아 可爲悲夫인저
莊宗未滅梁時에 承業已死하고 其後居翰이 雖爲樞密使나 而不用事라 有宣徽使馬紹宏者하니 嘗賜姓李하고 頗見信用이라
然誣殺大臣
하고 黷貨賂
하며 專威福
하야 以取怨於天下者
하니 左右狎暱
이 也
라
是時
에 明宗自鎭州入覲
하야 한대 莊宗頗疑其有異志
하야 陰遣紹宏
하야 伺其動靜
이어늘 紹宏反以情告明宗
이라
明宗自魏而反하니 天下皆知禍起於魏로대 孰知其啓明宗之二心者는 自紹宏始也오
郭崇韜已破蜀에 莊宗信宦者言而疑之라 然崇韜之死를 莊宗不知하니 皆宦者爲之也라
當此之時하야 擧唐之精兵이 皆在蜀하니 使崇韜不死런들 明宗入洛에 豈無西顧之患이며 其能晏然取唐而代之邪아
及明
入立
에 又詔天下
하야 悉捕宦者而殺之
하니 宦者亡竄山谷
하야 多削髮爲浮屠
하고 其亡至太原者七十餘人
은 悉捕而殺之都亭驛
하니 流血盈庭
이라
明宗晩而多病이어늘 王淑妃專內以干政하니 宦者孟漢瓊因以用事라
秦王入視할새 明宗疾已革이어늘 旣出而聞哭聲하고 以謂帝崩矣하야 乃謀以兵入宮者는 懼不得立也라
大臣朱弘昭等이 方圖其事어늘 議未決에 漢瓊遽入見明宗하야 言秦王反하고 卽以兵誅之하야 陷秦王大惡하니 而明宗以此飮恨而終이라
嗚呼라 人情處安樂하면 自非聖哲론 不能久而無驕怠라 宦女之禍는 非一日이니 必伺人之驕怠而浸入之라
明宗非佚君이로대 而猶若此者는 蓋其在位差久也일새라 其餘多武人崛起요 及其嗣續하얀 世數短而年不永이라 故宦者莫暇施爲로대 其爲大害者는 略可見矣라
獨承業之論은 偉然可愛요 而居翰은 更一字以活千人이라 君子之於人也에 苟有善焉이면 無所不取하니 吾於斯二人者에 有所取焉이로라
取其善而戒其惡
은 所謂
也
라 故幷述其禍敗之所以然者
하야 著於篇
하노라
구양공歐陽公이 편찬한 ≪오대사五代史≫에서 〈환자전宦者傳〉이 유독 탁월하여 천고에 후대의 감계鑑戒가 된다.
아아! 예로부터 환관宦官과 여색女色으로 인해 생긴 화란禍亂이 심하였다. 명철한 자는 화가 드러나기 전에 두려워할 줄 알고, 어리석은 자는 환란이 닥쳤음에도 편안히 여겨 난리가 일어나고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러 후회할 수 없게 된다.
비록 그러하나 경계하지 않아서는 안 되므로 〈환자전〉을 짓노라.
장승업張承業은 자字는 계원繼元이니 당唐 희종僖宗 때의 환관이다. 본래 성姓은 강씨康氏이니 어릴 때 거세하고 내상시內常侍 장태張泰의 양자養子가 되었다.
진왕晉王(이극용李克用)의 병사가 왕행유王行瑜를 공격할 때 장승업이 자주 양군 사이를 왕래하였는데 진왕이 그 사람됨을 좋아하였다.
당唐 소종昭宗이 이무정李茂貞의 협박을 받아 태원太原으로 도망 나가려 할 때에 먼저 장승업을 진晉에 사신으로 보내 태원으로 가려는 뜻을 설명하고서 이어 장승업을 하동감군河東監軍으로 삼았다.
그 뒤 최윤崔胤이 환관들을 주살誅殺할 때 외방外方에 있는 환관들을 그 자리에서 다 주살하라고 조칙을 내렸는데, 진왕이 장승업을 가엾게 여겨 차마 죽이지 못하고서 곡률사斛律寺에 은신시켰다. 소종이 붕어하자 이에 장승업을 나오게 하여 다시 감군으로 삼았다.
진왕晉王(이극용李克用)의 병이 위중해지자 장종莊宗을 장승업에게 부탁하며 말하기를 “아자亞子를 공들에게 부탁하노라.”라고 하였다.
장종이 항상 장승업을 형으로 섬기면서 세시歲時 때마다 장승업의 집에 가서 당에 올라 장승업의 모친에게 절하면서 몹시 친애하고 의중依重하였다. 장종이 위주魏州에 있으면서 양梁과 하상河上에서 십여 년 동안 싸울 때 군국軍國의 일을 모두 장승업에게 맡기니, 장승업 또한 마음을 다하면서 해이하지 않았다.
무릇 금전과 비단을 축적하고 병마兵馬를 사들이고 농상農桑을 권장하여 장종의 대업을 완성시킨 것은 장승업의 공이 많았다.
그리고 정간태후貞簡太后와 한덕비韓德妃와 이숙비伊淑妃 및 여러 공자公子들에 이르기까지 진양晉陽에 있는 자들을 장승업이 일체 법으로 단속하니, 권세 있고 귀한 신분의 사람들이 모두 손을 마주 잡고 공손하게 굴면서 장승업을 두려워하였다.
장종莊宗이 세시歲時에 위주魏州로부터 돌아와 문안을 드릴 때 놀음을 하고 영인伶人들에게 상으로 내려줄 돈이 필요하였는데, 장승업이 재정을 맡고 있어 돈을 얻을 수 없었다.
장종이 이에 곳간 안에 술자리를 차리고 주흥酒興이 무르익자 아들 이계급李繼岌에게 장승업을 위해 일어나 춤을 추도록 하였다. 이계급이 춤을 다 추자 장승업이 보대寶帶와 폐마幣馬를 꺼내 선물로 주었다.
장종이 곳간의 돈 더미를 가리키면서 이계급을 아명兒名으로 부르며 장승업에게 말하기를 “화가和哥는 돈이 모자라니 돈 한 꿰미를 주시오. 띠와 말을 어디다 쓰겠소.”라고 하였다.
그러자 장승업이 거절하며 말하기를 “나랏돈은 신이 사사로이 할 수 없는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장승업에게 모욕적인 언사를 하자 장승업이 화를 내며 말하기를 “신은 늙은 칙사勅使로 자손을 위한 계획을 세우지 않으니, 이 창고의 돈을 아껴 왕을 도와 패업霸業을 완수할 뿐입니다. 만약 이 돈을 쓰고자 하신다면 어찌 구태여 신에게 물으십니까. 재물이 다 없어지고 병사들이 흩어지면 어찌 신만 화禍를 당하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종이 원행흠元行欽을 돌아보며 “검을 가져오라.”라고 하니, 장승업이 일어나 장종의 옷을 붙잡고 울면서 말하기를 “신이 선왕의 고명顧命을 받아 나라의 원수를 설욕하기로 맹세하였으니, 오늘 왕을 위해 창고의 재물을 아끼다가 죽는다면 죽어도 선왕에게 부끄럽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염보閻寶가 옆에서 장승업이 옷을 붙잡은 손을 풀고 나가게 하니, 장승업이 주먹을 날려 염보를 쳐서 넘어뜨리고 꾸짖기를 “염보는 주온朱溫의 적당賊黨인데 진晉의 두터운 은혜를 입고서도 충성스러운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고 도리어 아첨하여 스스로 용납받고자 하는가.”라고 하였다.
태후太后가 이 사실을 듣고 사람을 보내 장종을 부르니, 장종의 성품이 지극히 효성스러워 태후가 부름을 듣고는 몹시 두려워하여 이에 술 두 잔을 따라 장승업에게 사과하며 말하기를 “내가 술을 먹고 한 실수로 태후에게 죄를 얻게 생겼소. 원컨대 공은 이 술을 마시어 나의 잘못을 덜어주오.”라고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은 술을 마시려 하지 않았다.
장종이 내전內殿으로 들어가니 태후가 사람을 보내 장승업에게 사과하기를 “어린아이가 공을 거슬렀기에 벌써 매를 때렸소.”라고 하였다. 다음날 태후와 장종이 함께 장승업의 집을 찾아가 위로하였다.
노질盧質이 술을 좋아하고 오만하여 장종莊宗으로부터 여러 공자公子에 이르기까지 노질로부터 많이들 업신여김을 당하니, 장종이 노질을 매우 미워하였다.
장승업張承業이 기회를 틈타 청하기를 “노질이 술을 좋아하고 무례하니 신이 청컨대 왕을 위해 노질을 죽이겠습니다.”라고 하자,
장종이 말하기를 “내가 한창 현재賢才를 불러들여 공업功業을 성취하려 하는데, 공은 어찌 말을 이리 지나치게 하는가.”라고 하니,
장승업이 일어나 축하하기를 “왕께서 이와 같으시니 천하를 평정하지 못할 것도 없겠습니다.”라고 하였다. 노질이 이 때문에 화를 면하였다.
천우天祐 18년(921)에 장종莊宗이 황제에 즉위하라는 장수들의 요청을 이미 승낙하니, 장승업이 병석에 누워 있다가 이 사실을 듣고 태원太原에서 견여肩輿를 타고 위주魏州에 이르러 간언하기를 “대왕大王 부자父子가 양梁나라와 30년 동안 혈전血戰을 벌인 것은 본래 나라의 원수를 설욕하고 당나라의 사직을 회복하려는 것이었거늘, 지금 원흉이 망하기도 전에 갑자기 황제의 존명尊名으로 자처하니, 이는 대왕 부자의 초심初心이 아니요 천하의 인망人望을 잃을 것입니다. 불가합니다.”라고 하였다.
장종이 답하기를 “이는 장수들이 바라는 것이다.”라고 하니, 장승업이 말하기를 “그렇지 않습니다. 양나라는 당나라와 진晉나라의 원수이자 천하 사람들이 함께 미워하는 바입니다. 지금 왕께서 진실로 천하를 위해 큰 악을 제거하고서 열성조列聖朝의 깊은 원수를 설욕한 뒤에 당나라의 후사後嗣를 구하여 세워야 하니, 만일 당나라의 자손이 남아 있다면 누가 감히 황제의 자리를 맡겠으며 만일 당나라의 자손이 남아 있지 않다면 천하 사람들 가운데 어느 누가 왕과 더불어 황제의 자리를 다툴 수 있겠습니까. 신은 당가唐家의 한 늙은 노복일 뿐이니 대왕께서 공업을 이루시는 것을 본 뒤 전리田里로 물러나면서 백관들은 낙양洛陽 동문東門에서 신을 전송하러 나오고 행인들은 저를 가리키면서 탄복하기를 ‘이 사람은 본조本朝의 칙사勅使요, 선왕先王 때의 감군監軍이다.’라고 하기를 진실로 바랍니다. 그렇게 된다면 어찌 신하와 군주 모두의 영광이 아니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장종이 따르지 않으니, 장승업은 간쟁할 수 없음을 알고서 이에 하늘을 우러러 크게 곡하고 말하기를 “우리 왕이 스스로 천하를 취하여 늙은 노복을 그르치도다.”라고 하고는 견여를 타고 태원에 이르러 음식을 먹지 않고 죽으니 향년 77세였다.
동광同光 원년(923)에 좌무위상장군左武衛上將軍을 추증하고 시호를 정헌正憲이라 하였다.
장거한張居翰은 자字는 덕경德卿이니 고故 당唐나라 액정령掖廷令 장종매張從玫의 양자養子이다.
소종昭宗 때에 범양감군范陽監軍으로 있으면서 절도사 유인공劉仁恭과 사이가 좋았는데, 천복天復 연간에 환관들을 크게 주륙誅戮할 때 유인공이 장거한을 대안산大安山 북쪽 골짜기에 숨겨주어 화를 면하게 해주었다.
그 뒤에 양梁나라 군대가 유인공을 공격할 때 유인공이 장거한을 보내 진왕晉王을 따라 양나라의 노주潞州를 공격하여 양나라 군대를 견제하였더니 진晉이 마침내 노주를 취하고서 장거한을 소의감군昭義監軍으로 삼았다.
장종莊宗이 즉위하자 곽숭도郭崇韜와 더불어 추밀사樞密使가 되었다. 장종이 양나라를 멸망시키고서 교만해지니 환관들이 이를 말미암아 국사를 농간하고 곽숭도가 또 국정을 전횡하였는데, 장거한은 침묵을 지키면서 구차하게 화를 면할 따름이었다.
위왕魏王이 촉蜀을 격파하고 왕연王衍이 경사京師에 조현朝見하러 가던 도중 진천秦川에 이르렀을 때 위주魏州에서 명종明宗이 변란을 일으켰다.
장종이 동쪽으로 정벌하러 가면서 왕연도 변란을 일으킬까 염려하여 위왕에게 급히 사람을 보내 조서를 내려 왕연을 죽이려 하였다. 조서에 이미 인가印可를 하였는데 장거한이 조서를 꺼내 보니 조서에 왕연 일행一行을 주살誅殺하라고 되어 있었다.
장거한은 항복한 자를 죽이는 것은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여겨 마침내 조서를 기둥에다 붙여 놓고 ‘항行’자를 문질러 지우고서 ‘일가一家’로 고치니, 당시 촉에서 왕연과 함께 항복하러 동쪽으로 온 사람 천여 명이 모두 화를 면하였다.
장종이 시해를 당하자 장거한은 지덕궁至德宮에서 명종을 알현하고서 전리田里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천성天成 3년(928)에 장안長安에서 졸하니 향년 71세였다.
오대五代 시절의 문장文章은 비루하니, 사관史官의 직무는 상란喪亂으로 없어지고 전기傳記와 소설小說은 실전失傳된 것이 많았다. 그러므로 그 사적事迹이 시종 온전하지 못하여 오류가 섞여 있다.
영웅들이 떨치고 일어나 전투하여 승패를 다투어 나라의 흥망이 나뉠 때에 이르러서는 어찌 모신謀臣의 책략과 변사辯士의 담론이 없었겠는가마는, 글이 그것을 제대로 드러내지 못하여 마침내 민몰되어 후세에 전해지는 것이 없게 하였다.
그러나 장승업張承業의 일만은 우뚝하게 사람들의 이목耳目에 남아 있어서 지금까지도 고로故老들이 말할 수 있으니, 그의 의논議論은 훌륭하다고 할 만하도다. 거의 환관의 말이 아니다.
예로부터 환관이 나라를 어지럽히는 것은 그 근원이 여자로 인한 재앙보다 심하니, 여자는 색色뿐이지만 환관의 해는 한 가지가 아니다.
그 일하는 자리가 임금과 가깝고 익숙하며 그 마음을 쓰는 것이 전일專一하고 참을성이 있으므로, 작은 선善으로 남의 뜻에 영합하고 작은 믿음으로 남의 마음을 견고히 붙잡아둘 수 있다.
그래서 군주로 하여금 반드시 믿어 가까이 여기고 사랑하도록 하여 군주가 이미 자기를 믿기를 기다린 뒤에 화복禍福으로 위협하여 장악한다. 비록 충성스러운 신하와 어질고 재주 있는 선비가 조정에 늘어서 있더라도 군주는 그들이 자기와 소원한 사람이니 움직이고 음식을 먹을 때 전후좌우前後左右에 가까이 있어 믿을 만한 자들만 못하다고 여긴다.
그러므로 전후좌우에 있는 자들이 날이 갈수록 더욱 친밀해지면 충성스러운 신하와 어질고 재주 있는 선비들은 날이 갈수록 더욱 소원해지고 군주의 형세는 날이 갈수록 더욱 고립된다.
군주의 형세가 고립되면 화禍를 두려워하는 마음이 날이 갈수록 더욱 절실해지고 환관들이 장악하는 것이 날이 갈수록 더욱 견고해져 안위安危가 그들의 기쁨과 노여움에서 나오고 화환禍患이 궁중 안에 숨어 있게 되니, 전에 믿을 만하다고 했던 것이 바로 화환이 되는 것이다.
화환禍患이 이미 깊어지고서야 알아차려서 소원한 신하들과 더불어 좌우의 친근한 환관들을 도모하고자 하면, 늦출 경우에는 화가 자라나서 더욱 깊어지고 서두를 경우에는 군주를 끼고 볼모로 삼는다.
그리하여 비록 비범한 총명聰明과 예지叡智가 있더라도 함께 일을 도모할 수 없고 도모해도 손을 쓸 수 없으며, 손을 쓰더라도 일을 이룰 수 없고, 심한 경우에 이르러서는 모두 다 상처를 입고 양쪽이 다 패망한다.
그러므로 큰 경우에는 나라를 잃고 그 다음은 자기의 몸을 잃어, 간사하고 호강豪强한 자들로 하여금 이를 빌미로 삼아 일어나 환관의 종족들을 척결하여 죄다 죽여 천하 사람들의 마음을 후련히 풀고서야 그치게 한다.
이는 전대의 역사에서 환관의 화를 기록한 것이 늘 이와 같은 것이니, 한 시대만의 일이 아니다.
대저 군주가 된 자가 안으로 화禍를 기르고 밖으로 충성스러운 신하와 어질고 재능있는 선비를 멀리하고자 한 것이 아니라, 대개 점차 쌓여서 형세가 그렇게 되도록 한 것이다.
대저 여색女色에 미혹된 것은 불행히 깨달아 알아차리지 못하면 화가 그제야 닥쳐오니, 한번 깨달아 알아차리기만 하면 적발하여 제거할 수 있다.
그렇지만 환관의 화는 비록 뉘우치고 깨닫더라도 그 형세가 이미 제거할 수 없으니, 당唐 소종昭宗의 일이 그러한 경우이다. 그러므로 여자의 화보다 심하다고 한 것이 이를 두고 말한 것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소종昭宗이 환관들을 믿고 친애하였는데 이 때문에 동궁東宮에 유폐되는 사건이 일어났고, 동궁에서 풀려나서는 최윤崔胤과 일을 도모하여 최윤을 재상으로 삼았지만 최윤의 힘이 일을 도모하기에는 부족하기에 마침내 양梁나라에서 군사를 불러들였다.
양나라의 군사가 장차 이르려 하자 환관들이 천자를 데리고 기岐로 도주하니 양나라 군사가 3년 동안 포위하였고, 소종이 풀려나자 당나라가 망하였다.
당초에 소종昭宗이 풀려났을 때 양왕梁王이 당나라의 환관 제오가범第五可範 등 700여 명을 다 주살誅殺하고 외방外方에 있는 환관은 모두 천하에 조칙을 내려 잡아 죽이게 하였는데, 환관들 대부분은 번진藩鎭들에서 숨겨주어 죽임을 당하지 않았다.
이때에 방진方鎭들이 참람하게 자신을 황제에 비기면서 모두 환관들에게 일을 맡기니 그 가운데 오월吳越에 가장 환관이 많았다. 당唐(후당後唐) 장종莊宗이 즉위하자 천하에 조칙을 내려 옛 당나라 때 환관들을 찾아 구하여 모두 경사京師로 보내게 하여 수백 명을 얻으니, 환관들이 마침내 다시 권력을 잡아 나라가 망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것이 이미 뒤집어진 수레를 구해서 몸소 멍에를 메고서 잘못된 전철을 밟는 것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슬퍼할 만하도다.
장종莊宗이 양梁을 멸망시키기 전에 장승업張承業은 이미 죽었고, 그 후 장거한張居翰이 비록 추밀사樞密使가 되었으나 권력을 잡지는 못하였다. 선휘사宣徽使 마소굉馬紹宏이라는 이가 있었으니 일찍이 이씨李氏 성을 하사받고 자못 신임을 받았다.
그러나 대신大臣을 무함하여 죽이고 뇌물을 탐닉하였으며 상벌을 마음대로 시행하여 천하 사람들로부터 원망을 받았으니, 황제 좌우에서 친압親狎하는 이들은 환관의 무리였다.
이때에 명종明宗이 진주鎭州에서 들어와 조근朝覲하여 경사京師에서 봉조청奉朝請이 되었다. 장종은 자못 명종이 다른 뜻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은밀히 마소굉을 보내 그 동정을 엿보게 하였는데, 마소굉은 도리어 그러한 사실을 명종에게 고하였다.
명종이 위주魏州에서 반란을 일으키니 천하 사람들 모두 화란禍亂이 위주에서 일어난 줄 알았다. 그러나 명종이 두 마음을 품게 된 계기가 마소굉에게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누가 알았겠는가.
곽숭도郭崇韜가 촉蜀을 격파하자 장종이 환관의 말을 믿고서 곽숭도를 의심하였다. 그러나 곽숭도의 죽음을 장종은 알지 못했으니 모두 환관이 한 짓이었다.
이때를 당하여 당唐나라의 모든 정예병이 촉에 있었으니, 만일 곽숭도가 죽지 않았던들 명종이 낙양에 들어갈 때 어찌 서쪽을 염려할 우환이 없었겠으며, 편안하게 당唐나라를 차지하여 황제의 자리를 대신할 수 있었겠는가.
명종이 들어와 즉위하자 또 천하에 조명詔命을 내려 환관들을 모조리 잡아 죽이게 하니 환관들이 산골짜기로 도망하여 숨어 대부분 삭발하고서 승려가 되었고, 태원太原으로 도망간 70여 명은 모두 잡아 도정역都亭驛에서 죽이니 피가 흘러 뜰에 가득하였다.
명종明宗이 만년에 병치레가 잦자 왕숙비王淑妃가 내전內殿에서 권력을 독차지하고 국정에 간여하니, 환관 맹한경孟漢瓊이 이로 말미암아 권력을 잡았다.
진왕秦王이 들어와 문병할 때 명종의 병세가 이미 위중하였는데, 궁궐을 나오고 나서 곡소리를 듣고는 황제가 붕어崩御하였다 여겨 마침내 병사들을 거느리고 궁궐로 들어가려고 모의했던 것은 자신이 즉위하지 못할까 두려워해서였다.
대신 주홍소朱弘昭 등이 한창 그 일을 논의하고 있었는데 의논이 결정되기 전에 맹한경이 갑작스레 들어와 명종을 알현하고서 진왕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말하고는 즉시 병사를 일으켜 진왕을 주살誅殺하여 진왕을 대역죄에 빠지게 하니 명종이 이 때문에 한을 품고 죽었다.
뒤에 민제愍帝가 위주衛州로 도망가자 맹한경이 서쪽으로 노주潞州에서 폐제廢帝를 맞이하였는데 폐제가 그를 미워하여 죽였다.
아아! 사람의 마음이 안락安樂에 처하면 성인聖人과 철인哲人이 아니고서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 교만하고 나태해지지 않을 수가 없다. 환관과 여색女色의 화禍는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이 아니니, 반드시 그 사람이 교만하고 나태해지는 것을 틈타 점점 젖어 들어오는 것이다.
명종明宗은 방일放逸한 군주가 아니었음에도 이와 같았던 것은 황제의 자리에 있은 지 비교적 오래되었기 때문이다. 그 나머지는 대부분 무인武人 출신으로 떨쳐 일어난 군주이고 그들을 이은 군주들은 재위한 기간이 짧고 향년享年이 길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환자들이 농간을 부릴 겨를이 없었으나, 큰 해악이 된 자는 대략 알 수 있다.
유독 장승업의 의논議論은 훌륭하여 참으로 좋고 장거한은 글자 하나를 고쳐 천 명의 사람을 살렸다. 군자는 남에 대하여 진실로 선한 점이 있으면 취하지 않는 바가 없으니, 나는 이 두 사람에게 취하는 점이 있다.
그 선을 취하고 그 악을 경계하는 것은 이른바 “사랑하면서도 그의 단점을 알고 미워하면서도 그의 장점을 안다.”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화란禍亂과 패망敗亡의 까닭을 아울러 서술하여 이 편篇에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