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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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歐陽文忠公五代史抄 卷12
歸安 鹿門 茅坤 批評
孫男 闇叔 茅著 重訂
01.
王鎔始末極亂이어늘 而歐公錯綜序次 如一線하니 較之諸傳컨대 爲第一이라
王鎔 其先之遺種이니 曰沒諾干이요 爲鎭州騎將이어늘 武俊錄以爲子하니 遂冒姓王氏
沒諾干子曰末坦活이요 末坦活子曰昇이요 昇子曰廷湊 廷湊子曰元逵 元逵子曰紹鼎紹懿 紹鼎子曰景崇이라
自昇以上三世 常爲鎭州騎將하고 自景崇以上四世五人 皆爲成德軍節度使
景崇 官至守太尉하고 封常山郡王하고 唐中和二年卒하다 子鎔立하니 年十歲
是時 晉新有太原하고 李匡威據幽州하고 王處存據中山하고 赫連鐸據大同하고 孟方立據邢臺하야 四面豪傑竝起而交爭이어늘
鎔介於其間이나 而承祖父百年之業하야 士馬彊而畜積富하야 爲唐累世藩臣이라
鎔年雖少 藉其世家以取重하니 自四方諸鎭廢立承繼 有請於唐者 皆因鎔以聞이라
自晉兵出山東하야 已破孟遷하야 取邢洺礠三州
景福元年 乃大擧擊趙하야 下臨城이라 鎔求救於李匡威어늘 匡威來救하니 晉軍解去
晉王與處存皆自將이로대 而鎔未嘗臨軍하야 遣追風都團練使段亮翦寇都團練使馬珂等하야 以兵屬匡威而已 匡威戰礠河하니 晉軍大敗하다
明年春 晉攻天長軍 鎔出兵救之하야 敗於叱日嶺하니 晉軍遂出井陘이라 鎔又求救於匡威하니 晉軍解去하다
匡威悅其弟匡儔之婦美而淫之 匡儔怒러니 及其救鎔也 誘其軍亂而自立하다 匡威內慙하여 不敢還하고 乃以符印歸其弟而將奔於京師하다
行至深州 鎔德匡威救己하야 使人邀之하야 館於하고 以父事之하다
匡威客李正抱者 少遊燕趙間이러니 每徘徊常山하야 愛之不能去 正抱匡威皆失國無聊하야 相與登城西高閣하야 顧覽山川이라가 泫然而泣이러니 乃與匡威謀劫鎔而代之
因詐爲忌日하니 鎔去衛從하야 晨詣館慰할새 坐定 甲士自幕後出하야 持鎔兩袖하니 鎔曰 吾國賴公而存하니 誠無以報厚德이라 今日之事 是所甘心이라하고 因叩頭以位與匡威하다
匡威素少鎔하야 以謂無能爲也러니 因與鎔方轡詣府하야 將代其位 行過親事營 軍士閉門大譟하니 天雨震電하고 暴風拔木하고 屋瓦皆飛하다
屠者墨君和望見鎔識之하고 從缺垣中躍出하야 挾鎔於馬하야 負之而走하고 亂軍擊殺匡威正抱하니 燕人皆死하다 匡儔雖憾其兄이나 而陽以大義責鎔甚急하다
鎔旣失燕援이어늘 而晉軍急攻平山하야 劫鎔以盟하니 鎔遂與晉和하다
其後梁太祖下晉邢洺礠三州하고 乃爲書招鎔하야 使絶晉而歸梁이어늘 鎔依違不決하다
晉將李嗣昭復取洺州어늘 梁太祖擊敗嗣昭하니 嗣昭棄洺州走하다 梁獲其輜重하야 得鎔與嗣昭書하니 多道梁事
太祖怒하야 因移兵常山하고 顧謂曰 得鎭州以與爾하리니 爾爲我先鋒하라하다
從周至臨城하야 中流矢하야 卧輿中하니 梁軍大沮 梁太祖自將傅城下하야 焚其南關이어늘 鎔懼하야 顧其屬曰 事急矣 奈何
判官周式 辯士也 對曰此難與力爭이나 而可以理奪也라하다 式與梁太祖有舊하야 因請入梁軍하다
太祖望見式하고 罵曰 吾常以書招鎔不來라가 今吾至此而爾爲說客하니 晩矣 且晉吾讐也而鎔附之하고 吾知李嗣昭在城中하니 可使先出이라하고 乃以所得鎔與嗣昭書示式하니
式進曰 梁欲取一鎭州而止乎 而欲成霸業於天下也 且霸者責人以義而不私 今天子在上 諸侯守封睦隣 所以息爭且休民也 하니 此英雄之事耳 今梁知兵擧無名하고 而假嗣昭以爲辭 且王氏 五世六公撫有此土하니 豈無死士而待嗣昭乎아라하니
梁太祖大喜하야 起牽式衣而撫之曰 吾言戲耳이라하고 因延式上坐하야 議與鎔和하다
鎔以子昭祚爲質하니 梁太祖以女妻之하다 太祖卽位 封鎔趙王하다
鎔祖母喪 諸鎭皆弔 梁使者見晉使在館하고 還言趙王有二志하다
是時 魏博이어늘 梁因欲盡取河北하다
開平四年冬 遣供奉官杜廷隱監魏博將夏諲하여 以兵三千襲深冀二州하고 以王景仁爲北面行營招討使하니 鎔懼하야 乞兵於晉하다
晉人擊敗景仁於柏鄕하니 梁遂失鎭定이어늘 而莊宗由此益彊하야 北破幽燕하고 南并魏博이어늘 鎔常以兵從하니 鎔德晉甚이라
하야 奉觴爲壽어늘 莊宗以鎔父友라하야 尊禮之하다 酒酣 爲鎔歌하고 拔佩刀斷衣而盟하야 許以女妻鎔子昭誨하다
鎔爲人仁而不武하야 未嘗敢爲兵先하고 佗兵攻趙 常藉隣兵爲救하다
當是時하야 諸鎭俱弊於戰爭이나 而趙獨安하니 樂王氏之無事하야 都人士女褒衣博帶하야 務夸侈爲嬉遊하다
鎔尤驕於富貴하고 又好左道하야하야 求長生하다 與道士王若訥留遊西山이러니 登王母祠 使婦人維錦繡牽持而上하다
每出 逾月忘歸하고 任其政於宦者하니 宦者石希蒙與鎔同卧起
鎔自西山宿鶻營莊하고 將還府어늘 希蒙止之하다
宦者李弘規諫曰 今晉王身自暴露以親矢石이어늘 而大王竭軍國之用하야 爲遊畋之資하고 開城空宮하야 逾月不返하니 使一夫閉門不內從者 大王欲何歸乎아하니 鎔懼하야 促駕어늘 希蒙固止之하다
弘規怒하야 遣親事軍將蘇漢衡하야 率兵擐甲露刃於帳前曰 軍士勞矣 願從王歸國이라하다
弘規繼而進曰 惑王者希蒙也 請殺之以謝軍士라하다 鎔不答이어늘 弘規呼甲士斬希蒙首하고 擲於鎔前하니 鎔懼遽歸하다
使其子昭祚與大將張文禮하야 族弘規漢衡하고 收其偏將下獄하야 窮究反狀하니 親軍皆懼하다
이어늘 軍士斬鎔首하야 袖之而出하야 因縱火焚其宮室하야 遂滅王氏之族하다
鎔少子昭誨 年十歲러니 其軍士有德鎔者 藏之穴中하다 亂定 髠其髪하고 被以僧衣하야 遇湖南人李震하야 與之震하니 匿昭誨於茶籠中하야 載之湖南하야 依南嶽爲浮圖하고 易名崇隱하다
明宗時 昭誨已長하야 思歸어늘 而鎔故將符習爲宣武軍節度使한대 震以歸習하니 習表於朝하다 昭誨自稱前成德軍中軍使以見하니 拜考功郞中司農少卿하야
周顯德中 猶爲少府監云이라
張文禮者 狡獪人也 鎔惑愛之하야 以爲子하야 號王德明이라 鎔已死 文禮自爲留後하다
莊宗初納之러니 後知其通於梁也하고 遣趙故將符習與閻寳擊之하다 文禮家鬼夜哭하고 野河水變爲血하야 游魚皆死하니 文禮懼病疽卒하다
子處瑾秘喪拒守하고 擊敗習等하니 以李嗣昭代之 嗣昭中流矢卒하고 以李存進代之 存進輙復戰歿이라
乃以符存審爲招討使하야 遂破之하고 執文禮妻及子處瑾處球處琪等折足하야 歸於晉하니 趙人請而醢之하고 磔文禮尸於市하다


01. 왕용王鎔전기傳記
왕용王鎔의 사적의 시말始末은 몹시 혼란한데, 구양공歐陽公이 정리하고 서술한 것이 마치 한 가닥 실처럼 일목요연하니 다른 들과 비교해보면 으뜸이다.
왕용王鎔은 그 선조가 회골回鶻 아포사阿布思의 후손으로 몰약간沒諾干이다. 진주鎭州 왕무준王武俊기장騎將이 되었는데 왕무준이 그를 거두어 아들로 삼으니 마침내 왕씨王氏 을 사용하였다.
몰낙간의 아들은 말탄활末坦活이고 말탄활의 아들은 이고 승의 아들은 정주廷湊이고 정주의 아들은 원규元逵이고 원규의 아들은 소정紹鼎소의紹懿이고 소정의 아들은 경숭景崇이다.
승으로부터 위로 삼대三代는 늘 진주鎭州기장騎將이 되었고 경숭으로부터 위로 사대四代 다섯 사람은 모두 성덕군成德軍 절도사節度使가 되었다.
경숭은 관직이 수태위守太尉에 이르렀고 상산군왕常山郡王에 봉해졌으며 중화中和 2년(882)에 하였다. 아들 왕용이 즉위하니 나이는 10세였다.
이때 나라는 새로 태원太原을 소유하고 이광위李匡威유주幽州를 점거하고 왕처존王處存중산中山을 점거하고 혁련탁赫連鐸대동大同을 점거하고 맹방립孟方立형대邢臺를 점거하여 사방의 호걸豪傑들이 아울러 일어나 서로 다투었는데,
왕용王鎔은 그 사이에 끼어있었지만, 조부祖父의 백 년 가업家業을 계승하여 병마兵馬는 강하고 축적한 재물은 풍부하여 대대로 나라의 번신藩臣이 되었다.
이 때문에 왕용은 나이가 비록 어렸지만, 그의 세가世家에 힘입어 중요한 지위를 차지하니 사방 제진諸鎭에서 폐위廢位계승繼承 문제로 나라에게 청할 것이 있으면 모두 왕용을 통해 천자天子에게 아뢰었다.
진병晉兵산동山東에서 나온 뒤로 이미 맹천孟遷을 격파하여 형주邢州, 명주洺州, 자주礠州 세 개 를 취하였다.
경복景福 원년元年(892)에 크게 거병擧兵하여 를 공격하여 임성臨城을 함락하였다. 왕용王鎔이광위李匡威에게 원병을 요청하자 이광위가 와서 구원하니 진군晉軍이 포위를 풀고 떠났다.
이듬해 나라가 왕처존王處存과 회합하여 왕용의 견고堅固, 신시新市를 공격하였다.
진왕晉王과 왕처존은 모두 스스로 병사를 거느렸는데 왕용은 일찍이 군사를 지휘한 적이 없어서 추풍도단련사追風都團練使 단량段亮전구도단련사翦寇都團練使 마가馬珂 등을 보내어 병사를 이광위에게 맡길 뿐이었다. 이광위가 자하礠河에서 전투하니 진군晉軍이 크게 패하였다.
이듬해 봄에 나라가 천장군天長軍을 공격하자 왕용이 병사를 내어 구원하다가 질일령叱日嶺에서 패배하니 진나라 군사가 마침내 정형井陘으로 나왔다. 왕용이 또 이광위에게 원병을 청하니 진나라 군사가 포위를 풀고 떠났다.
당초에 이광위李匡威가 그 동생 이광주李匡儔의 부인의 미색美色을 좋아하여 그녀를 간음하였다. 이광주가 노하였는데 이광위가 왕용王鎔을 구원하러 갈 때에 그 군대를 꾀어 난을 일으키고 자기가 이광위의 자리를 빼앗아 차지하니, 이광위는 마음속으로 부끄러워 감히 돌아가지 못하고 이에 부절符節인수印綬를 그 아우에게 넘겨주고 장차 경사京師로 달아나려고 하였다.
길을 가다 심주深州에 이르렀는데 왕용이 이광위가 자신을 구원한 것을 은혜로 여겨 사람을 보내 맞이하여 해자원海子園관소館所를 마련하고서 아버지로 섬겼다.
이광위李匡威문객門客 이정포李正抱는 젊어서 나라와 나라 지역을 다녔는데 매번 상산常山배회徘徊하며 좋아하여 떠나지 않았다. 이정포와 이광위는 모두 나라를 잃고 무료無聊하게 지내며 함께 서쪽의 높은 누각에 올라 산천山川을 돌아보다가 주르륵 눈물 흘렸는데, 이에 이광위와 더불어 왕용王鎔을 겁박하여 그의 자리를 차지하려고 도모하였다.
그리하여 거짓으로 기일忌日이라 하니 왕용이 호위병을 물리치고 새벽에 관소館所로 와서 위로하였다. 이때에 좌정坐定하자 갑사甲士가 장막 뒤에서 나와 왕용의 양 소매를 붙잡으니, 왕용이 말하기를 “우리나라는 공 덕분에 보존되었으니 진실로 후덕厚德에 보답할 길이 없었습니다. 오늘의 일은 기꺼운 마음으로 받겠습니다.”라고 하고 인하여 머리를 조아리고 지위를 이광위에게 주었다.
이광위가 평소 왕용을 하찮게 여겨 큰일을 할 만한 사람이 아니라고 여겼는지라 인하여 왕용과 더불어 고삐를 나란히 하고서 에 나아가 장차 그 지위를 대신하려고 하였다. 길을 가다 왕용의 을 지나갈 때에 군사들이 문을 닫고 크게 소리치니 하늘에서는 비가 오고 천둥이 치며 폭풍이 불어 나무들이 뽑히고 집의 기와들은 모두 날아갔다.
백정 묵군화墨君和가 왕용을 멀리서 알아보고 허물어진 담장 사이로 뛰어 나와 말에서 왕용을 잡아 업고 달아나고 난군亂軍이 이광위와 이정포를 쳐 죽였는데, 〈이광위를 호위하던〉 연인燕人들이 모두 죽었다. 이광주李匡儔는 비록 그 형에게 유감遺憾이 있었지만 겉으로는 대의大義로 매우 심하게 왕용을 꾸짖었다.
왕용은 이미 의 원병을 잃은 데다 진군晉軍이 급히 평산平山을 공격하여 동맹을 맺자고 왕용을 겁박하니 왕용이 마침내 나라와 화친하였다.
그 후에 태조太祖나라의 형주邢州, 명주洺州, 자주礠州 세 개 를 함락하고 이에 서신書信을 써서 왕용王鎔초유招喩하여 나라와 국교를 끊고 나라에 귀부歸附하게 하였는데, 왕용은 머뭇거리며 결정하지 못하였다.
나라 장수 이사소李嗣昭가 다시 명주를 취하자 양 태조가 이사소를 격퇴하니, 이사소가 명주를 버리고 달아났다. 양나라가 적의 치중輜重을 취하여 왕용이 이사소에게 보낸 편지를 얻어 보니 양나라에 관한 일을 말한 것이 많았다.
태조가 노하여 상산常山으로 병사를 옮기고 갈종주葛從周를 돌아보며 말하기를 “진주鎭州를 얻으면 너에게 줄 것이니 너는 나의 선봉이 되어라.”라고 하였다.
갈종주가 임성臨城에 이르러 날아온 화살에 맞아 쓰러져 수레 가운데 누우니, 양군梁軍의 사기가 크게 꺾였다. 양태조가 스스로 병사를 거느리고 성 아래에 이르러 남관南關을 불태우자 왕용이 두려워 그 휘하를 돌아보고 말하기를 “일이 급박하니 내 어찌해야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판관判官 주식周式변사辯士이니, 대답하기를 “이 상황은 힘으로 다투기는 어렵지만 이치로써 극복할 수 있습니다.”라고 하였다. 주식은 양 태조와 친분이 있어 양나라 군영으로 들어가게 해줄 것을 청하였다.
태조가 주식을 멀리서 바라보고 꾸짖어 말하기를 “내가 늘 서신으로 왕용을 불렀을 때는 오지 않다가 지금 내가 여기에 이르러서야 네가 세객說客이 되었으니 늦었다. 또한 나라는 나의 원수인데 왕용이 빌붙었고 나는 이사소가 성중城中에 있다는 것을 알고 있으니 그를 먼저 내보내야 할 것이다.”라고 하고 이에 명주에서 얻었던, 왕용이 이사소에게 보낸 편지를 주식에게 보여주었다.
주식이 나아가 말하기를 “양나라는 진주 하나를 취하고 그만두려 하십니까? 아니면 천하에 패업霸業을 이루고자 하십니까? 또한 패자霸者로써 남을 책망하고 사적으로 책망하지 않습니다. 지금 천자가 위에 계심에 제후가 봉토를 지키고 이웃 나라와 화목하게 지내는 것은 전쟁을 멈추고 또 백성을 쉬게 하는 것입니다. 옛적에 조공曹公원소袁紹를 격파하고 나라 장리將吏가 원소에게 보낸 편지를 받아서 모두 불태웠으니 이것은 영웅의 일입니다. 지금 양나라도 거병擧兵한 명분이 없음을 알고 이사소를 빌미로 구실을 삼았습니다. 또한 왕씨王氏오세五世의 여섯 이 이 땅을 진무鎭撫하고 소유하였으니 어찌 죽기를 각오한 군사가 없어서 이사소를 기다리겠습니까?”라고 하였다.
양 태조가 크게 기뻐하며 일어나 주식의 옷을 끌어당겨 그를 어루만지며 말하기를 “내 말은 희언戲言이었다.”라고 하고 인하여 주식을 맞이하여 상좌上坐에 앉히고 왕용과의 화의和議를 의논하였다.
왕용이 아들 왕소조王昭祚를 볼모로 삼으니, 양 태조가 딸을 그에게 시집보냈다. 태조가 즉위함에 왕용을 조왕趙王으로 봉하였다.
왕용王鎔조모祖母 제진諸鎭이 모두 조문하였다. 나라 사자使者나라의 사자가 객관客館에 있는 것을 보고 돌아와 조왕趙王이 두 마음을 품고 있음을 말하였다.
이때 위박魏博나소위羅紹威하였는데 양나라가 이로 인해 하북河北을 모두 취하고자 하였다.
개평開平 4년(910) 겨울에 공봉관供奉官 두정은杜廷隱을 파견하여 위박魏博장수將帥 하인夏諲을 감독하여 병사 삼천을 거느리고서 심주深州, 기주冀州를 습격하게 하고 왕경인王景仁북면행영초토사北面行營招討使로 삼으니, 왕용이 두려워 나라에게 원병을 청하였다.
진인晉人백향柏鄕에서 왕경인王景仁을 격퇴하니 나라가 마침내 진주鎭州, 정주定州를 잃었는데, 장종莊宗은 이로 말미암아 더욱 강성해져 북쪽으로 유주幽州, 연주燕州를 격파하고 남쪽으로 위박을 병탄하였다. 왕용은 늘 병사를 거느리고 뒤따랐으니 왕용이 진나라를 몹시 고맙게 여겼다.
이듬해 승천군承天軍에서 장종莊宗과 회동하여 술잔을 들어 장수長壽를 빌었는데 장종이 왕용을 아버지의 벗이라 하여 크게 예우하였다. 술에 취하자 왕용을 위해 노래하고 차고 있는 칼을 뽑아 옷을 잘라 맹세하고서 딸을 왕용의 아들 왕소회王昭誨에게 시집보낼 것을 허락하였다.
왕용王鎔은 사람됨이 어질고 무용武勇이 없어 일찍이 감히 선봉이 된 적이 없었고 다른 군사가 나라를 공격할 때에 늘 이웃의 군사를 빌려 원병으로 삼았다.
이때 제진諸鎭이 모두 전쟁으로 피폐해졌으나 나라만 홀로 평안하였으니 왕씨王氏무사無事함을 기뻐하여 도성의 사녀士女들은 소매가 큰 옷에 넓은 띠를 하고, 사치에 힘쓰며 즐기고 놀았다.
왕용은 더욱 부귀富貴로 교만해졌고 또 사도邪道를 좋아하여 단약丹藥을 만들어 장생長生하기를 구하였다. 도사道士 왕약눌王若訥서산西山에 머물며 유람하였는데 왕모사王母祠에 오를 때 부인들로 하여금 비단 밧줄을 만들어 끌어당기게 하여 올라가게 하였다.
유람을 떠날 때마다 한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고 정사를 환관宦官에게 다스리게 하였는데 환관 석희몽石希蒙이 왕용과 기거를 함께 하였다.
천우天祐 18년(921) 겨울에 왕용王鎔서산西山에서 나와 골영장鶻營莊유숙留宿하고 장차 로 돌아가려고 하였는데 석희몽石希蒙이 만류하였다.
환관 이홍규李弘規가 간언하기를 “지금 진왕晉王은 몸소 이슬을 맞으며 시석矢石을 무릅쓰고 직접 전쟁터에 다니거늘 대왕께서는 군국軍國의 재용을 허비하여 유람과 사냥의 비용으로 삼고 성을 열어 놓고 궁을 비워 둔 채 한 달이 넘도록 돌아가지 않으니, 만일 한 사내가 문을 닫고 대왕의 행차를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면 대왕께서는 어디로 돌아가시렵니까?”라고 하니 왕용이 두려워 돌아가자고 재촉하였는데 석희몽이 굳게 만류하였다.
이홍규가 노하여 친사군장親事軍將 소한형蘇漢衡을 보내어 군사들을 거느리고 장막 앞에서 갑옷을 두르고 칼을 뽑아 들고 말하기를 “군사들이 지쳤습니다. 왕을 따라 귀국하기를 원합니다.”라고 하게 하였다.
이홍규李弘規가 뒤이어 나아가 말하기를 “왕을 미혹시키는 자는 석희몽이니 그를 죽여 군사軍士들에게 사죄하기를 청합니다.”라고 하였다. 왕용이 대답하지 않자 이홍규가 무장한 병사를 불러 석희몽의 머리를 베고 왕용 앞에 던지니 왕용이 두려워 급히 돌아갔다.
그 아들 왕소조王昭祚대장大將 장문례張文禮로 하여금 이홍규와 소한형蘇漢衡을 멸족시키고 그의 편장偏將을 잡아 하옥시켜 반란의 정황을 추궁하게 하니 친군親軍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장문례가 친군들을 꾀어 반란을 일으켜 한밤중에 친군 10여 명이 담을 넘어 들어갔다. 왕용은 한창 도사道士들과 더불어 향을 태우고 부록符籙을 받고 있었는데 군사들이 왕용의 머리를 베어 소매에 넣고 나와 불을 놓아 그 궁실宮室을 태우고 마침내 왕씨王氏일족一族을 다 죽였다.
왕용王鎔의 작은아들 왕소회王昭誨는 나이가 10살이었는데 그 군사 중에 왕용에게 은혜를 입었던 자가 동굴 속에 숨겨주었다. 반란이 평정됨에 그의 머리카락을 자르고 승복을 입히고서 호남인湖南人 이진李震을 만나 이진에게 넘기니, 차를 담는 바구니 안에 왕소회를 숨겨 호남湖南으로 싣고 가서 남악南嶽의 절에 귀의歸依하여 승려가 되게 하고 이름을 숭은崇隱으로 바꾸었다.
후당後唐 명종明宗 때 왕소회가 이미 장성하여 돌아가고 싶어 하였다. 마침 왕용이 옛날에 거느리던 장수 부습符習선무군宣武軍 절도사節度使로 재임 중이었는데 이진李震이 부습에게 돌려보내니 부습이 조정에 표문表文을 보내 알렸다. 왕소회가 스스로 전 성덕군成德軍 중군사中軍使로 자칭하고 알현하니, 고공낭중考功郞中 사농소경司農少卿에 배수하였다.
후주後周 현덕顯德 연간(954~960)까지도 소부감少府監으로 있었다.
장문례張文禮는 교활한 사람이다. 왕용이 미혹되어 그를 아껴 아들로 삼고 왕덕명王德明이라 불렀다. 왕용이 죽자 장문례는 스스로 유후留侯가 되었다.
장종莊宗이 처음에는 그를 받아 주었다가 후에 나라와 사통한다는 사실을 알고는 나라의 고장故將 부습符習염보閻寶를 보내 공격하게 하였다. 장문례의 집안에서 한밤에 귀신들이 울고 야하野河의 물이 핏빛으로 변하여 물고기가 모두 죽자 장문례는 두려워하다 등창이 생겨 죽었다.
아들 장처근張處瑾이 장문례의 죽음을 숨기고 적을 막아 지켜 부습 등을 공격하여 격퇴시켰다. 이사소李嗣昭를 대신 보냈지만 이사소는 유시流矢에 맞아 죽었고 이존진李存進을 대신 보냈지만 이존진은 갑자기 다시 전투 중에 죽었다.
이에 부존심符存審초토사招討使로 삼아 마침내 격파하고 장문례의 아내 및 아들 처근處瑾, 처구處球, 처기處琪 등을 사로잡아 다리를 자르고서 나라로 보내니, 나라 사람들이 청하여 육장肉醬을 담그고 장문례의 시신을 찢어 저자에 진열하였다.


역주
역주1 王鎔傳 : 王鎔(872~921)은 回鶻 阿布思의 후손이고 아버지인 常山郡王 王景崇의 뒤를 이어 10세의 나이로 즉위하였다. 왕용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54 〈唐書 第30 列傳 第6〉과 ≪新五代史≫ 卷39 〈雜傳 第27〉에 각각 실려 있다.
왕용은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였고 강대국들 사이에 끼어있었지만, 祖父의 백 년 家業을 계승하여 병사와 군마는 강하고 부유하여 唐나라의 藩臣이 되었다. 강대국들 사이에서 처음에는 晉나라에 대항하기 위해 李匡威에게 의지하다가 진나라와 화친을 맺었고 梁 太祖의 세력이 강성해져 공격해오자 다시 양나라에 歸附하고 양 태조와 사돈관계를 맺었다. 하지만 다시 진나라에 歸附하였다. 왕용은 사람이 어질고 武勇이 없어 다른 군사가 공격해 올 때마다 늘 이웃의 병사를 빌려 원병으로 삼았다. 이로 인해 늘 境內가 無事하여 풍요로워 부귀로 교만해졌고 邪道를 좋아하여 長生을 구하여 宦官에게 정사를 다스리게 하고는 道士 王若訥과 西山에 머물러 유람하며 한 달이 넘도록 돌아오지 않을 때가 많았다. 결국 張文禮가 반란을 일으켜 왕용을 죽이고 궁실을 불태우고 王氏 一族을 모두 다 죽였다.
이 열전에서는 왕용이 10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여 강대국 사이에서 時勢에 따라 움직이는 모습을 일목요연하게 서술하였다. 또한 선대부터 쌓아온 富와 時勢에 따라 움직인 대가로 얻은 권력과 安寧으로 인해 결국 교만과 사치에 빠져 宦官에게 정사를 맡겨 놓다가 반란에 의해 죽임을 당하는 과정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舊五代史≫의 내용도 큰 차이는 없는데, 史評을 통해 “왕용이 鎭에 웅거하여 王으로 일컬어지며 몇 세대를 다스리려 하였는데 佞臣에게 미혹되어 일족이 傾覆되었다. 이는 富貴가 오래됨에 仁義를 스스로 닦지 않아 눈은 아름다운 미색에 현혹되고 귀는 아름다운 음악에 미혹된 것이다. 그러므로 조짐이 생기기 전에 간사한 이들을 막지 못하였고 싹이 트기 전에 화를 살피지 못하여 서로 이어 패망하였으니 또 누구의 잘못인가.”라고 하여 왕용이 富貴에 교만해져 결국 자신과 宗族이 몰살당한 것을 책망하였다.
역주2 回鶻 : 고대 튀르크어 ‘Uyghur’의 음사로 위구르족이 세운 제국이다. 이전에는 袁紇․烏護․烏紇․回紇 등으로 알려져 있었으며 788년 국호를 변경한 이후부터 기록되었다.
역주3 阿布思 : 아부스(Abus) 부족의 추장으로, ‘일테베르(ilteber)’의 음사이다. 742년에 突厥이 내분에 휩싸이게 되자 唐朝에 투항해 番將으로 활약했다. 751년 安祿山이 契丹에게 패배한 이후 東北에 대한 군사력 강화가 절실하게 되자, 朔方節度副使로 임명되어 동부 전선으로 이동했지만 바로 安祿山과 대립하고 그에 반발해 漠北으로의 복귀를 시도했다. 하지만 753년 五月 回紇에게 패배하게 되면서 그의 세력이 이후에 회흘에 복속되었다.
역주4 王武俊 : 735~801. 唐나라 때 契丹 怒皆部落 사람이다. 자는 元英 시호는 忠烈이다. 德宗 때 檢校秘書監兼御史大夫에 발탁되고 이후 恒冀觀察使를 지냈는데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모반을 꾀했다가 여러 번 官軍에 패하자 스스로 왕이라 부르더니 나라 이름을 趙라 했다. 나중에 李抱眞이 사람을 보내 설득하여 僞號를 버리고 檢校工部尙書에 임명된 뒤 恒州ㆍ冀州ㆍ深州ㆍ趙州 등 州의 절도사를 지냈고 후에 瑯邪郡王이 되었다.
역주5 景福元年……攻鎔堅固新市 : ≪五代史纂誤補≫ 卷下에 “삼가 唐紀를 살펴보건대 晉나라가 臨城을 취한 해는 大順 2년(891)이고 이듬해에 晉나라가 王處存과 회합하여 王鎔을 공격한 것이 바로 景福 元年(892)이 된다. ≪舊唐書≫의 〈昭宗紀〉와 〈王鎔傳〉에도 이와 같이 기록되어 있으니, 여기는 잘못된 듯하다.[謹按唐紀 晉取臨城 在大順二年 其明年 晉會王處存攻鎔 乃爲景福元年 舊唐書昭宗紀王鎔傳竝同 此疑誤]”라고 하였다.
역주6 (梅)[海] : 저본에는 ‘梅’로 되어 있으나, ≪五代史纂誤補≫에 의거하여 ‘海’로 바로잡았다.
역주7 館於(梅)[海]子園 : ≪五代史纂誤補≫ 卷下에 “삼가 살펴보건대 ≪夢溪筆談≫ 卷24에 ‘鎭陽은 池苑이 훌륭하여 鎭들 중에 으뜸이니, 바로 王鎔이 살던 때의 海子園이다. 鎭陽의 사람들은 그 못을 자랑스럽게 여겨 潭園이라 불렀으니, 이 때문에 옛날에 일찍이 海子라고 불렀다는 것을 알지 못한다.’라고 하였으니, 여기 梅 자가 잘못되었음을 알겠다.[謹按夢溪筆談云 鎭陽池苑之盛 甲于諸鎭 乃王鎔時海子園也 鎭人矜大其池 謂之潭園 蓋不知昔嘗謂之海子矣 知此梅字誤也]”라고 하였다.
역주8 葛從周 : ?~915. 五代 때 鄄城 사람으로 자는 通美다. 젊을 때 黃巢를 따랐지만, 나중에 朱溫에게 항복했다. 주온을 따라 蔡州를 공격했는데, 주온이 말에서 떨어지자 그를 구해 大將에 기용되었다. 주온이 後梁을 건국해 태조가 되자 左金吾衛上將軍에 올랐다. 후량 末帝 초에 陳留郡王에 봉해졌다.
역주9 昔曹公破袁紹…悉焚之 : 曹操가 袁紹를 격파하고 그 문서를 수습하던 중에 許都의 휘하 및 軍中 사람들의 편지를 얻고는 모두 태워버리며 말하기를 “강성한 원소를 대면하였을 때는 나도 오히려 스스로 마음이 불안하였는데 하물며 보통 사람들이겠는가?”라고 하였다.[操收紹書中 得許下及軍中人書 皆焚之 曰當紹之疆 孤猶不能自保 況衆人乎](≪資治通鑑≫ 卷63 〈漢紀 五十五〉)
역주10 羅紹威 : 後梁의 정치가이며 학자이다. 자는 端己이며, 벼슬이 太師 겸 中書令에 이르렀고 저서로는 ≪偸江東集≫이 있다.
역주11 開平四年冬……會莊宗於承天軍 : ≪五代史纂誤補≫ 卷下에 “삼가 唐紀를 살펴보건대 ‘天祐 8년(911) 정월에 栢鄕에서 梁나라 군대를 패퇴시켰고 7월에 趙나라 王鎔과 承天軍에서 회합하였다.’라고 하였고, 梁紀에도 또한 ‘乾化 元年(911) 정월에 王景仁과 晉나라 사람이 栢鄕에서 전투하였다.’라고 하였다. 대개 乾化 元年은 바로 開平 4년의 다음해이고 晉나라의 天祐 8년이니, 여기 ‘開平四年’은 잘못되었다.[謹按唐紀天祐八年正月敗梁軍於柏鄕 七月會趙王鎔於承天軍 梁紀亦書乾化元年正月王景仁及晉人戰於柏鄕 蓋乾化元年 即開平四年之明年 而晉之天祐八年也 此誤]”라고 하였다.
역주12 丹藥 : 道家에서 말하는 丹砂로 만든 영약으로 이것을 복용하면 長生不死하여 仙人이 된다고 하였다.
역주13 天祐十八年 : 唐 昭宗의 연호인 天祐를 연장하여 쓴 해이다. 天祐는 昭宗 이후 즉위한 당나라의 마지막 황제 哀帝 역시 사용하였으나 天祐 4년에 해당하는 907년에 당나라가 망하고 後粱이 들어서면서 폐기되었다. 後梁은 새로 開平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였다. 그러나 晉의 李克用을 비롯한 여러 번진 세력들은 後梁의 연호를 따르지 않고 계속하여 天祐 연호를 사용하였으므로 여기에서 天祐 18년이라고 말한 것이다. 天祐 18년은 後梁 末帝 龍德 1년에 해당한다.
역주14 天祐十八年冬……袖之而出 : ≪五代史纂誤補≫ 卷下에 “삼가 살펴보건대 唐紀에 張文禮가 王鎔을 죽인 해는 18년 정월로 되어 있고, 梁紀에도 역시 龍德 元年(921) 봄으로 되어 있다. ≪舊五代史≫의 梁紀와 唐紀에는 모두 18년 2월로 되어 있는데 〈王鎔傳〉에는 ‘冬十二月’로 되어 있으니, 여기서는 ≪舊五代史≫의 잘못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謹按唐紀 張文禮殺王鎔在 十八年正月 梁紀亦作龍德元年春 薛史梁唐紀俱作十八年二月 而鎔傳作冬十二月 此仍其誤]”라고 하였다.
역주15 籙(록) : 符籙으로 미래에 나타날 일을 예측하여 적어놓은 예언서이다. 符書, 符圖라고도 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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