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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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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雖不如前篇이나 而點次魏州牙軍本末如畫
羅紹威 字端己 其先長沙人이라 祖讓北遷爲魏州貴鄕人하고 父弘信 爲牧馬監卒이라
文德元年 하야 遂殺其帥樂彦貞하고 立其將趙文建爲留後러니 已而 又殺之하다
牙軍未知所立하야 乃聚呼曰 孰能爲我帥者오하니 弘信從衆中出應曰 我可爲君等帥也라하다
弘信狀貌奇怪하고 面色靑黑일새 軍中異之하야 乃共立爲留後하다 唐昭宗卽位 拜弘信節度使하다
梁太祖將攻晉할새 乞糴於弘信이어늘 弘信不與 由是有隙하야 梁兵攻魏하야 取黎陽臨河淇門衛縣하고 戰於內黃 魏兵五戰五敗 弘信懼하야 請盟하니 乃止하다
是時 梁方東攻兗鄆하고 北敵晉이라 晉遣李存信救朱宣할새 假道於魏
太祖間遣使語弘信曰 晉人志在河朔하니 兵還滅魏矣 弘信以爲然하고 乃發兵擊存信於莘縣하니 太祖遣葛從周助之하다
梁兵擒晉王子落落하야 送於魏어늘 弘信殺之하고 乃與晉絶하다
太祖猶疑弘信有二心하고 乃以兄事弘信하야 常爲卑辭厚幣以騁魏하고 魏使者至 梁太祖北面拜而受幣하고 謂使者曰 六兄於我有倍年之長하니 吾何敢慢之리오하니
弘信大喜하야 以爲厚己 以故 太祖往來燕趙之間하야 卒有河北者 魏不爲之患也일새라
弘信死 紹威立하다 紹威好學工書하야 頗知屬文하고 聚書數萬卷하야 開館以延四方之士하다
弘信在唐 以其先長沙人이라 故封長沙郡王이러니 紹威襲父爵長沙하다
紹威新立 幽州劉仁恭以兵十萬攻魏하야 屠貝州어늘 紹威求救於梁하야 大敗燕軍於內黃하다
明年 梁太祖遣葛從周會魏兵攻滄州하야 取其德州하고 遂敗燕兵於老鵶隄하니 紹威以故德梁助己하다
魏博自田承嗣始有牙軍이러니 牙軍歲久益驕 至紹威時已二百年하니 父子世相하야 婚姻以自固結하다
前帥史憲誠何全皥韓君雄樂彦貞等 皆由牙軍所立이라 怒輒逐殺之러니 紹威爲人精悍明敏하고 通習吏事하야 爲政有威嚴이라 然其家世由牙軍所立이라
天祐二年 魏州城中地陷하니 紹威懼有變이라 已而 牙校李公佺作亂이어늘 紹威誅之하고 乃間遣使告梁乞兵하야 欲盡誅牙軍이어늘
하야 爲遣李思安等攻滄州하고 召兵於魏 紹威因悉發魏兵以從하니 獨牙軍在
紹威子廷規 娶梁女러니 會梁女卒이라 太祖陰遣客將馬嗣勳하야 選良兵實輿中하고千人雜輿夫入魏하야 詐爲助葬하고 太祖以兵繼其後하다
紹威夜以奴兵數百으로 會嗣勳兵擊牙軍하야 幷其家屬盡殺之하다
太祖自內黃馳至魏하니 魏兵從攻滄州者行至歷亭하야 聞之皆反하야 分入澶博諸州하니 魏境大亂이라 數月 太祖爲悉平之하다
牙軍死 魏兵悉叛하야 紹威勢益孤 太祖乃欲奪其地하니 紹威始大悔
是歲 太祖復攻滄州하야 宿兵長蘆할새 紹威饋給梁兵하야 自滄至魏五百里하고 供帳什物自具하여 梁兵數十萬皆取足하니 紹威以此重困하다
昭宗東遷洛陽하야 詔諸鎭繕理京師이어늘 紹威營太廟成하야 加拜守侍中하고 進封鄴王하다
太祖圍滄州하야 未下어늘 劉守光會晉軍하야 破梁潞州하다 太祖自長蘆歸할새 過魏라가 疾作臥府中하니 諸將莫得見이라
紹威懼太祖終襲己하야 乃乘間入見曰 今四方稱兵爲梁患者 以唐在故也 唐家天命已去하니 不如早自取之라하니 太祖大喜하고 乃急歸하다
太祖卽位하야 將都洛陽이어늘 紹威取魏良材爲五鳳樓朝元前殿하야 浮河而上하야 立之京師
太祖歎曰 吾聞이라하니 豈若紹威越千里而爲此若神化然하니 功過蕭何遠矣라하고 賜以寶帶名馬하다
이어늘 紹威馳書勸守光等降梁하다
太祖聞之하고 笑曰 吾嘗攻燕하야 不能下러니 今紹威折簡하니 乃勝用兵十萬이라하다 太祖每有大事 多遣使者問之하고 紹威時亦馳簡入白하니 使者相遇道中 其事往往相合이라
紹威自以魏久不用兵으로 願伐木淇門爲船하야 自河入洛하야 歲漕穀百萬石하야 以供京師하니
太祖益以紹威爲盡忠하야 遣將程厚盧凝督其役하다 舟未成而紹威病이라 乃表言魏故大鎭이라하니 願得梁一有功重臣臨之하고 請以骸骨就第라하니
太祖亟命其子周翰監府事하고 語使者曰 亟行하야 語而主호되 爲我하라 如有不諱어든 當世世貴爾子孫이라 今使周翰監府事하니 尙冀卿復愈耳라하다
紹威仕梁 累拜太師兼中書令이러니 卒年三十四 贈尙書令하고 諡曰貞壯이라
或問 牙軍之爲州帥禍者 五世矣 譬之附頸之瘤不去則病日盛하고 去之則身與俱斃하니 如何而可
固當揣人情權事機 而又必開誠布公이라야 斯能轉移其間이라 故曰 紹威之請兵於梁 世所謂 可不戒哉


02. 나소위羅紹威전기傳記
비록 전편만 못하지만 위주魏州 아군牙軍의 본말을 서술한 것이 그림과 같다.
나소위羅紹威는 자가 단기端己니 그 선조는 장사長沙 사람이었다. 조부 나양羅讓이 북쪽으로 옮겨가 위주魏州 귀향貴鄕 사람이 되었다. 아버지 나홍신羅弘信목마감牧馬監이 되었다가 하였다.
문덕文德 원년元年(888)에 위박魏博아군牙軍이 난을 일으켜 마침내 총수總帥 악언정樂彦貞을 죽이고 그 장령將領 조문건趙文建을 세워 유후留後로 삼았는데 이윽고 또 조문건趙文建을 죽였다.
아군牙軍이 누구를 세워야 할지 몰라 이에 사람들을 모아놓고 소리치기를 “누가 우리의 총수가 능히 되겠는가?”라고 하니, 나홍신이 무리에서 나와 대답하기를 “내가 그대들의 총수가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홍신은 용모가 기괴奇怪하고 얼굴이 검푸른 빛이라 군중의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겨 이에 군중이 함께 그를 세워 유후留後로 삼았다. 소종昭宗이 즉위함에 나홍신을 절도사節度使로 삼았다.
태조太祖가 장차 나라를 공격하려 할 때에 나홍신羅弘信에게 군량을 빌려 달라 청하였는데, 나홍신이 주지 않았다. 이로부터 틈이 생겨 양나라 병사가 위주魏州를 공격하여 여양黎陽, 임하臨河, 기문淇門, 위현衛縣을 취하고, 내황內黃에서 전투하여 위주魏州의 병사가 다섯 번을 싸워 다섯 번 다 패하였다. 나홍신이 두려워하여 동맹을 청하니 이에 공격을 멈추었다.
이때에 양나라가 바야흐로 동쪽으로 연주兗州운주鄆州를 공격하고 북쪽으로 나라를 적대하였다. 진나라가 이존신李存信을 보내 주선朱宣을 구원할 때에 위주에 길을 빌렸다.
양 태조가 몰래 사자를 보내 나홍신에게 말하기를 “진인晉人하삭河朔을 얻는데 뜻을 두고 있으니, 진나라 병사가 돌아오면 위주魏州를 멸망시킬 것이다.”라고 하였다. 나홍신이 옳다고 여기고 이에 병사를 일으켜 신현莘縣에서 이존신을 공격하니, 태조가 갈종주葛從周를 보내 도왔다.
양나라 병사가 진왕晉王의 아들 낙락落落을 사로잡아 위주로 보내었는데, 나홍신이 그를 죽이고 비로소 진나라와 절교絶交하였다.
양 태조가 여전히 나홍신이 두 마음을 품었음을 의심하고 이에 나홍신을 형으로 섬겨 항상 말을 낮추고 폐백을 후하게 갖추어 위주의 나홍신을 빙문聘問하였고, 위주의 사자가 오면 양 태조가 북면北面하여 절하고 폐백을 받고 사자에게 말하기를 “육형六兄이 나보다 나이가 곱절로 많으니, 내가 어찌 감히 소홀히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나홍신이 크게 기뻐하여 자신을 후하게 대우한다고 여겼다. 이 때문에 태조가 나라와 나라 지역을 오가며 끝내 하북河北을 소유한 것은 위주가 후환이 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홍신羅弘信이 죽자 나소위羅紹威가 즉위하였다. 나소위는 학문을 좋아하고 글씨를 잘 써서 제법 글을 지을 줄 알았고, 수만 권의 책을 모아 관사를 열어 사방의 선비들을 맞이하였다.
나홍신은 나라 때에 그 선조가 장사長沙 사람이었기 때문에 장사군왕長沙郡王에 봉해졌었는데, 나소위는 아비의 작위爵位인 장사군왕을 그대로 이어 받았다.
나소위가 새로 즉위함에 유주幽州유인공劉仁恭이 십만 명의 군사로 위주魏州를 공격하여 패주貝州를 도륙하거늘 나소위가 나라에 구원을 청하여 나라 병사를 내황內黃에서 크게 패퇴시켰다.
이듬해에 태조太祖갈종주葛從周를 보내 위주의 병사와 회합하여 창주滄州를 공격하여 덕주德州를 취하고 마침내 노아제老鵶隄에서 연나라 병사를 패퇴시키니, 나소위가 이 때문에 양나라가 자신을 도운 것을 고맙게 여겼다.
위주魏州박주博州전승사田承嗣가 처음 아군牙軍을 설치하였는데, 아군은 세월이 오래 지날수록 더욱 교만해졌다. 나소위羅紹威 때에 이르러 이미 200년이 되었으므로 부자父子가 서로 계승하여 대대로 서로 혼인을 맺어 스스로 견고하게 결속되어 있었다.
이전 군수軍帥 사헌성史憲誠, 하전호何全皥, 한군웅韓君雄, 악언정樂彦貞 등은 모두 아군으로부터 옹립되었기에 아군이 노할 때마다 내쫓고 죽였었는데, 나소위는 사람됨이 용맹하고 명민하며 관무官務를 잘 알아 정사에 위엄이 있었다. 그러나 그 집안도 대대로 아군으로부터 옹립되었다.
천우天祐 2년(905)에 위주의 성 안의 땅이 함몰되니, 나소위가 변란이 있을까 두려워하였다. 이윽고 아군 군교軍校 이공전李公佺이 난을 일으키자 나소위가 그를 주살하고, 이에 몰래 사자를 보내 나라에 알려 병사를 빌려 아군을 모두 주살하려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이를 허락하여 이사안李思安 등을 보내 창주滄州를 공격하고 위주에 있는 병사를 불렀다. 이에 나소위가 위주의 병사를 모두 출동시켜 이사안을 따르니, 아군만 남게 되었다.
나소위羅紹威의 아들 나정규羅廷規 태조太祖의 딸에게 장가들었는데, 마침 양 태조의 딸이 하였다. 태조가 은밀히 객장客將 마사훈馬嗣勳을 보내 정예병을 선발하여 수레 안에 싣고 장직군長直軍 천 명을 가마꾼과 섞어 위주魏州로 들어가 거짓으로 장례를 돕게 하고 태조는 병사를 거느리고 그 뒤를 따랐다.
나소위가 밤에 노병奴兵 수백 명을 거느리고 마사훈의 군사와 회합하여 아군牙軍을 공격하여 그 가솔들까지 모두 죽였다.
태조가 내황內黃으로부터 위주로 달려가니 창주滄州를 공격하던 위주의 병사들이 역정歷亭에 이르러 이 소식을 듣고 모두 배반하여 전주澶州박주博州 등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위주의 경내가 크게 혼란해졌다. 몇 개월 만에 태조가 모두 평정하였다.
아군이 죽자 위주의 병사가 모두 배반하여 나소위의 형세가 더욱 고립되었기에 태조가 이에 그 땅을 빼앗고자 하니 나소위가 비로소 크게 후회하였다.
이해에 태조太祖가 다시 창주滄州를 공격하여 장로長蘆에 병사를 주둔시켰다. 이때에 나소위羅紹威나라 병사들에게 군량을 공급하기 위해 창주滄州로부터 위주魏州에 이르기까지 500리에 걸쳐 정후亭堠를 세우고 장막과 군수물 등을 스스로 갖추어 놓아 양나라 병사 수십만 명이 모두 제 맘대로 가져다 쓰니, 나소위가 이 때문에 더욱 곤궁해졌다.
소종昭宗낙양洛陽으로 동천東遷하여 여러 을 불러 경사京師를 수리하게 하였는데, 나소위가 태묘太廟를 지어 완성하자 수시중守侍中을 더하여 제수하였고 업왕鄴王진봉進封하였다.
태조太祖창주滄州를 포위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는데, 유수광劉守光나라 병사와 회합하여 나라 노주潞州를 격파하였다. 태조가 장로長蘆로부터 돌아올 때에 위주魏州를 방문하였다가 병이 나 부중府中에 누우니 장수들이 만나 볼 수 없었다.
나소위羅紹威는 태조가 끝내 자신을 습격할까 두려워하여 이에 틈을 타 들어가 뵙고 말하기를 “지금 사방에 전란이 일어나 나라에 근심이 되는 것은 나라가 있기 때문입니다. 당나라는 천명天命이 이미 떠났으니 서둘러 스스로 취하는 것만 못합니다.”라고 하니, 태조가 크게 기뻐하고 비로소 급히 돌아갔다.
태조가 즉위하여 장차 낙양洛陽을 도읍으로 삼으려 하자 나소위가 위주의 좋은 목재를 가져다 오봉루五鳳樓조원전전朝元前殿을 만들어 황하黃河를 통해 배로 운반하여 경사京師에 세웠다.
태조가 찬탄하며 말하기를 “내가 듣건대 소하蕭何관중關中을 지킬 때에 나라를 위하여 미앙궁未央宮을 세웠다지만 어찌 나소위가 천 리를 건너와 귀신의 조화처럼 지은 것만 하리오. 그 공이 소하보다 훨씬 뛰어나다.”라고 하고 보대寶帶명마名馬를 하사하였다.
연왕燕王 유수광劉守光이 자기의 아버지 유인공劉仁恭을 감금하여 아우 유수문劉守文과는 틈이 있자 나소위羅紹威가 서신을 보내 유수광 등에게 나라에 항복할 것을 권하였다.
태조太祖가 소식을 듣고 웃으며 말하기를 “내 일찍이 을 공격하여 함락하지 못하였는데, 지금 나소위가 서신을 보냈으니, 십만 명의 병사를 쓰는 것보다 낫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매번 큰 일이 있을 때면 사자를 보내 나소위에게 자주 묻고 나소위도 때로 또한 서신을 보내 아뢰니 사자들이 서로 길에서 만났는데, 사자들이 전하려는 일이 자주 합치하였다.
나소위羅紹威가 스스로 위주魏州는 오랫동안 군사를 쓰지 않아 민력民力이 있다는 이유로 안양安陽기문淇門에서 목재를 베어다 배를 만들어 황하黃河로부터 낙양洛陽으로 들어가 해마다 곡식 백만 석을 조운漕運하여 경사京師에 공급하려고 하였다.
태조太祖가 더욱 나소위가 충성을 다한다고 여겨 장수將帥 정후程厚노응盧凝을 보내 그 일을 감독하게 하였다. 배가 완성되기 전에 나소위가 병들자 이에 표문表文을 올려 아뢰기를 “위주는 예로부터 큰 이므로 외병外兵이 많으니, 나라에 공이 있는 중신重臣에게 이곳을 맡기고 노구를 거두어 집에 돌아가기를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태조가 나소위의 아들 나주한羅周翰에게 의 일을 감독하라고 급히 명을 내리고, 사자에게 “급히 가서 너희 주인에게 말하되 ‘나를 위해 억지로라도 밥을 들라. 불행히 그대가 죽으면 대대로 너희 자손들을 귀하게 대접할 것이다. 지금 나주한에게 의 일을 감독하게 하였으니 부디 이 다시 회복하기를 바란다.’라 하라.”고 하였다.
나소위가 나라에 벼슬할 때에 누차 태사太師 겸중서령兼中書令에 제수되었고 하였을 때 나이는 34세였다. 상서령尙書令에 추증되었고 시호는 정장貞壯이다.
혹자가 묻기를 “아군牙軍주수州帥의 우환거리가 된 지가 오세五世이다. 비유하자면 목에 난 종기는 제거하지 않으면 병이 날로 심해지고 제거하면 자신도 함께 죽는 것과 같으니, 어떻게 해야 되는가?”라고 하였다.
宋 太祖宋 太祖
내가 답하기를 “살펴보건대 태조太祖중원中原을 평정한 뒤에 주연酒宴을 베풀어 장수들의 병권兵權을 내려놓게 하였으나 석수신石守信왕심기王審琦 등과 끝내 흠잡는 말이 없었으니, 여기에서 영웅이 환란을 평정하는 방법을 볼 수 있다.
진실로 인정人情을 헤아리고 일의 기미를 저울질해야만 하고 또 반드시 성심을 열고 공정함을 베풀어야만 이러한 상황을 잘 바꿀 수 있다. 그러므로 이가 빠져도 아이는 알지 못한다고 하였다. 나소위羅紹威가 〈아군의 우환을 없애기 위해〉 나라에 병사를 청한 것은 세상에서 이른바 의원이 오훼烏喙부자附子를 먹이는 방법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역주
역주1 羅紹威傳 : 羅紹威(?~?)는 자는 端己이고 그 선조는 長沙 사람이었는데, 조부 羅讓이 북쪽으로 옮겨가 魏州 貴鄕 사람이 되었다. 나소위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14 〈梁書 第14 列傳 第4〉, ≪新五代史≫ 卷39 〈雜傳 第27〉에 각각 실려 있다.
나소위는 牙軍의 장수이자 長沙郡王이었던 아버지 羅宏信의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하지만 자신이 거느리던 牙軍은 魏州 지역에서 200년 간 세력을 유지하며 전횡을 저지른 탓에 늘 변란을 일으킬 우려가 있었다. 이에 나소위는 梁 太祖를 끌어들여 위주 牙軍을 멸하였는데, 이로 인해 위주의 군사들마저 반란을 일으켰고 그 결과 나소위의 軍勢가 급격히 쇠락하여 결국 양 태조에게 복속되어 唐을 멸하고 양나라의 신하로 살다 34세라는 짧은 생을 살다간 인물이다.
이 列傳에서는 나소위의 일대기보다는 나소위와 牙軍의 관계에 초점을 맞추어 서술하였다. 따라서 史評에서도 나소위의 삶에 대한 평가보다는 나소위가 牙軍을 평정하는 과정에서 人情을 헤아리고 공정함을 베풀기는커녕 양 태조를 끌어들여 무력만으로 평정한 것을 비판하였다. 그리고 이를 빗대어 ‘나소위가 양나라에 병사를 청한 것은 세상에서 이른바 의원이 烏喙와 附子를 먹이는 방법이니, 경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하여 경계를 드리웠다.
이와 반대로 ≪舊五代史≫ 史評에는 “나소위가 처음 唐나라를 위해 위주에 웅거하였다가 당나라가 쇠약해지자 양 태조에게 당나라를 强勸하여 선위를 받으라고 가장 먼저 말하였으니, 梁나라 입장에서 보면 佐命功臣이 되지만 唐나라 입장에서 보면 어찌 충신이 되겠는가.”라고 하여 牙軍에 관한 이야기 보다는 인물에 초점을 맞추어 평하였다.
역주2 魏博 : 唐나라의 藩鎭 이름으로 鄴에 治所가 있었고, 지금의 河北省 大名․磁縣, 河南省 滑縣 및 山東省 冠縣 등이 관할지역이었다.
역주3 牙軍 : 唐 代宗 때 田承嗣가 魏博節度使가 되어 만든 호위대이다. 200년 후 唐나라 말기에 羅紹威가 절도사가 되었을 때에 牙軍의 세력이 지나치게 커서 민폐를 끼치고 난을 일으켜 선임 절도사 수 명을 죽이기까지 하였는데, 나소위는 당시 가장 강대했던 朱溫에게 구원을 요청해 2년 만에 아군의 세력을 완전히 제압하였다.(≪資治通鑑≫ 昭宗 3年)
역주4 魏博自田承嗣始有牙軍……梁太祖許之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梁本紀〉를 살펴보건대 羅紹威가 太祖와 함께 牙軍을 주살할 것을 도모한 시기는 天祐 3년(906) 丙寅年이다. 또 ≪新唐書≫ 卷6 〈代宗本紀〉를 살펴보면 廣德 元年(763)에 史朝義의 장수인 田承嗣가 魏州를 가지고 항복하니, 이로부터 田氏가 魏博을 소유한 것이 累世였다라고 하였다. 廣德 元年은 癸卯年으로 天祐 3년에 이르기까지 실로 144년일 뿐이니, 200년이라고 말하면 잘못된 것이다.[今按梁本紀 紹威與太祖謀誅牙軍時 天祐三年丙寅歲也 又按唐本紀代宗廣德元年 史朝義將田承嗣 以魏州降 自後田氏據有魏博者 累世 廣德元年歲在癸卯 至天祐三年 實一百四十四年爾 謂之二百年則誤也]”라고 하였다.
역주5 長直軍 : 만일의 일에 대비하여 禁中에서 번갈아 교대하지 않고 장기간 당직을 서는 군사를 이른다.
역주6 亭堠 : 고대에 변경에서 적군의 정황을 살피고 감시하는 기능으로 세운 초소를 말한다.
역주7 蕭何守關中 爲漢起未央宮 : 未央宮은 漢나라의 궁전으로, 한 高祖 때 蕭何가 지었다. 그 터는 陝西省 長安縣 서북쪽에 있다.
역주8 燕王劉守光囚其父仁恭 與其弟守文有隙 : ≪五代史纂誤≫ 卷中에 “지금 〈劉守光傳〉을 살펴보건대 劉守文은 바로 劉守光의 형이다.[今按守光傳 守文乃其兄也]”라고 하였다.
역주9 安陽 : 현재 河南省 북부의 현 이름이다.
역주10 外兵 : 군사제도의 하나로 ≪宋書≫ 〈百官志上〉에 “魏에 五兵을 두었는데 尙書領中兵․外兵二曹, 昔有騎兵, 別兵, 都兵 등을 五兵이라 하였다.”라고 하였다.
역주11 强飯 : 억지로 밥을 먹는다는 말로 ≪詩經≫ 〈魏風〉에 “억지로라도 밥을 먹고 병을 조심하여 스스로 보위한다.”[强飯愼疾以自保]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12 藝祖平定中原之後……終無間言 : 宋 太祖 趙匡胤이 중국을 평정한 뒤에 趙普의 계책으로 병권을 쥐고 있는 王審琦, 石守信 등을 불러 술자리를 마련하고 “장수들이 異心을 품는 자가 많으니, 황제의 자리를 내놓겠다.”라고 하니, 그들이 병권을 내놓고 물러갔으며 그 후로 군사의 실권을 황제가 좌우할 수 있게 되고, 반란도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宋史≫ 卷250 〈石守信列傳〉)
역주13 齒脫而兒不知 : 여기서는 시간을 두고 차근차근 정성을 들여 일을 처리한다는 말이다. ≪東坡全集≫ 卷66 〈代滕甫論西夏書〉에 “비유하자면 어린아이의 훼손된 치아는 점차 흔든다면 치아가 빠져도 어린아이가 알지 못하는데, 만약 점차 흔들지 않고 한 번에 뽑아 치아를 얻는다면 훼손된 치아가 아이를 죽일 수도 있다.[譬如小兒之毁齒 以漸搖撼之 則齒脫而小兒不知 若不以漸 一拔而得齒 則毁齒可以殺兒]”라고 한 데서 온 말이다.
역주14 醫者食烏喙與附子之術也 : 烏喙는 독성이 강한 약재로 附子를 이르는 말이다. 의원이 독성이 있는 약재를 사용하여 너무 급하게 병을 치료하는 것을 말하는데, 여기서는 羅紹威가 너무 급하게 梁나라를 끌어들여 牙軍을 죽인 것을 말한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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