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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宋八大家文抄 歐陽脩(6)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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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목차 메뉴 열기 메뉴 닫기
王處直 於梁晉之間衡決이라
王處直 字允明이오 京兆萬年人也 父宗善殖財貨하야 富擬王侯하다 爲唐神策軍吏하고 官至金吾大將軍하야 興元節度使하다 子處存處直이라
處存 以父任爲驍衛將軍 定州已來制置 內閑廐宮苑等使하고
乾符六年 卽拜義武軍節度使하다 黃巢陷長安 處存感憤流涕하야 率鎭兵入關討賊이러니 巢敗第功 而收城擊賊 李克用爲第一이요 勤王倡義 處存爲第一이라
乾寧二年 處存卒於鎭하니 三軍以河朔故事 推處存子郜하야 爲留後하니 卽拜節度使하고 加檢校司空 同中書門下平章事하다 處直爲後院中軍都知兵馬使하다
光化三年 梁兵攻定州어늘 郜遣處直率兵拒之하야 戰於沙河라가 爲梁兵所敗하다 敗兵返入城逐郜하니 郜出奔晉이어늘 亂兵推處直爲留後하다
梁兵圍之 處直遣人告梁하야 請絶晉而事梁하고 出絹十萬疋犒軍하니 乃與梁盟하다 梁太祖表處直義武軍節度使하고 累封太原王하다 太祖卽位 封處直北平王하다
其後梁兵攻王鎔이어늘 鎔求救於晉하니 處直亦遣人至晉하야 願絶梁以自效하다
晉王救鎔할새 處直以兵五千從하야 破梁軍於柏鄕하다 其後晉北破燕하고 南取魏博하고 與梁戰河上十餘年 處直未嘗不以兵從하다
處直好巫而客有李應之者하니 妖妄人也 處直有疾이어늘 應之以左道治之而愈하니 處直益以爲神하야 使衣道士服하야 以爲行軍司馬하고 軍政無大小 咸取決焉하다
初應之於陘邑闌得小兒劉雲郎하야 養以爲子러니 而處直未有子하니 乃以雲郎與處直而紿曰 此子生而有異라하여늘 處直養以爲子하야 更名曰都하야 甚愛之하다
應之由此益橫하야 乃籍館內丁壯하야 別立新軍하야 自將之하고 治第博陵坊할새 四面開門하니 皆用左道하다 處直將吏知其必爲患이나 而莫能諫也
是時 幽州李匡儔假道中山하야 以如京師어늘 處直伏甲城外하야 以備不虞하다 匡儔已去 甲士入城하야 圍應之第하야 執而殺之하고 因詣處直請殺都어늘 處直不與하다
明日 第功行賞할새 因陰疏甲士姓名하되 自隊長以上 藏於別籍하야 其後因事誅之하니 凡二十年 無一人免者어늘 而處直終爲都所殺이라
都爲人狡佞多謀 處直以爲節度副使하다 張文禮弑王鎔 莊宗發兵討文禮어늘
處直與左右謀曰 鎭 定之蔽也 文禮雖有罪 然鎭亡이면 定不獨存이라하고 乃遣人請莊宗毋發兵하다
莊宗取所獲文禮與梁䗶書示處直曰 文禮負我師하니 不可止라하다
處直有孽子郁하야 當郜之亡於晉也 郁亦奔焉이어늘 晉王以女妻之하야 以爲新州防禦使하다
處直見莊宗必討文禮하고 益自疑하야 乃陰與郁交通하야 使郁北招契丹入塞하야 以牽晉兵하고 且許召郁爲嗣어늘 都聞之不悅이라
而定人皆言契丹不可召 恐自貽患이라하되 處直不聽하다
郁自奔晉으로 常恐處直不容이라가 因此大喜하야 以爲乘其隙하야 可取之하고 乃以厚賂誘契丹阿保機하다
阿保機擧國入寇로되 定人皆不欲契丹之擧 小吏和昭訓勸都擧事어늘 都因執處直하야 囚之西宅하야 自爲留後하고 凡王氏子孫及處直將校殺戮殆盡하다
明年正月朔旦 都拜處直於西宅이어늘 處直奮起하야 揕其胸而呼曰 逆賊 吾何負爾아하다
然左右無兵하야 遂欲囓其鼻어늘 都掣袖而走러니 處直遂見殺하다
初有黃蛇見於碑樓하니 處直以爲龍하야 藏而祠之하고 又有野鵲數百巢麥田中하니 處直以爲己德所致어늘
而定人皆知其不祥曰 蛇穴山澤이어늘 而處人室하고 鵲巢鳥어늘 降而田居하니 小人竊位하야 而在上者失其所居之象也라하더니 已而 處直果被廢死하다
莊宗已敗契丹於沙河하야 追奔過定州할새 與都相得懽甚하야 以子繼岌娶都女하고 以都爲義武軍節度使하다
同光二年 莊宗幸鄴 都來朝하니 賜與鉅萬이라 莊宗以繼岌故 待都甚厚하야 所請無不從이라
及明宗立 頗惡都爲人하야 而安重誨每以法繩之하니 都始有異志
是時 唐兵擊契丹하야 數往來定州어늘 都供饋多闕하야 益不自安하다
和昭訓爲都謀曰 天子新立 四方未附하야 其勢易離하니 可爲自安之計라하다
已而 朱守殷反於汴州어늘 都遂亦反하고 遣人以䗶書招靑徐岐潞梓五鎭하여 約皆擧兵이나 而五鎭不應하다
明宗遣王晏球討之어늘 都復與王郁招契丹爲援한대 契丹遣禿餒하야 將萬騎救都하다
都遣指揮使鄭季麟龍泉鎭將杜弘壽하야 以二千人迎契丹이라가 爲晏球所敗하야 季麟弘壽被執하다
晏球責曰 吾嘗使人招汝어늘 何故不降고하니 弘壽對曰 受恩中山兩世矣 不敢有二心이라하다 遂見殺한대 弘壽臨刑 神色自若이라
晏球屯軍望都하야 與都及契丹戰하야 大敗之曲陽하니 都及禿餒得數騎遯去하야 閉城不復出하다
莊宗軍中闌得一男子하야 愛之하야 使冒姓李名繼陶하야 養於宮中하야 以爲子하다
明宗卽位 安重誨出以乞段徊어늘 徊亦惡而逐之하니 都使人求得之하다
至是 紿其衆曰 此莊宗太子也라하고 被以天子之服하야 使巡城上하야 以示晏球軍하니 軍士識者曰 此繼陶也라하고 共詬之하다
都居城中 兵少하야 惟以契丹二千人守城일새 呼禿餒爲餒王하고 屈身事之 諸將有欲出降者어늘 都伺察嚴密하야 殺戮無虛日이라 以故 堅守經年하다
天成四年二月 城破한대 都與家屬皆自焚死하야 王氏遂絶於中山이나
而處存有子鄴이러니 鄴子廷胤 與莊宗連外姻이라 爲人驍勇이라 自爲軍校 能與士卒同辛苦러니 明宗時 歷貝密澶隰州刺史하다
范延光反於鄴 晉高祖以廷胤爲楊光遠行營中軍使러니 破延光有功하야 拜彰德軍節度使하다
處直爲都所囚하니 幼子威北走契丹하다
契丹謂晉高祖曰 吾欲使威襲其先人爵土하니 如何오하니 高祖對曰 中國之法 自將校爲刺史하고 升團練防禦하야 而至節度使하니 請送威歸中國이면 漸進之호리라하다
契丹怒曰 爾自諸侯爲天子하니 豈有漸乎아하니 高祖聞之하고 遽徙廷胤鎭義武하고 曰 此亦王氏之後也라하다 하다


03. 왕처직王處直전기傳記
왕처직王處直나라와 나라 사이에서 수미首尾가 서로 엇갈렸다.
왕처직王處直은 자는 윤명允明이고 경조京兆 만년萬年 사람이다. 아버지 왕종王宗은 재화를 잘 불려 부유함이 왕후王侯와 비견되었다. 나라의 신책군리神策軍吏가 되었고 관직은 금오대장군金吾大將軍에 이르러 흥원절도사興元節度使를 맡았다. 아들은 왕처존王處存왕처직王處直이다.
왕처존王處存은 아버지의 관직 덕분에 효위장군驍衛將軍 정주이래제치사定州已來制置使 내한구궁원사內閑廐宮苑使 등이 되었다.
건부乾符 6년(879)에 곧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度使에 배수되었다. 황소黃巢장안長安을 함락시키자 왕처존은 감분하여 눈물을 흘리며 의 병사를 이끌고 으로 들어가 적을 토벌하였는데, 황소가 패하고 나서 평정評定할 때에 경성京城을 수복하여 적을 격퇴한 공은 이극용李克用제일第一이었고, 왕실을 구원하고 대의大義를 창도한 공은 왕처존이 제일第一이었다.
건녕乾寧 2년(895)에 왕처존이 에서 하니 삼군三軍하삭河朔고사故事에 따라 왕처존의 아들 왕고王郜를 추대하여 유후留後로 삼았다. 곧바로 절도사節度使에 배수되었고 검교사공檢校司空 동중서문하평장사同中書門下平章事의 벼슬을 더해주었다. 왕처직은 후원중군도지병마사後院中軍都知兵馬使로 삼았다.
광화光化 3년(900)에 나라 병사가 정주定州를 공격하자 왕고王郜왕처직王處直을 보내 병사를 거느리고 막게 하여 사하沙河에서 전투하다 양나라 병사에게 패하였다. 패한 군대가 성으로 들어와 왕고를 쫓아내니 왕고가 나라로 달아났다. 난을 일으킨 군대가 왕처직을 유후留後로 삼았다.
양나라 병사가 포위하자 왕처직이 사람을 보내 양나라에 고하여 나라와 국교를 끊고 양나라를 섬기기를 청하고 비단 십만 필을 내어 군사들을 위로하니 이에 양나라와 동맹을 맺었다. 태조太祖나라에 표문을 올려 왕처직을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度使로 삼았고, 여러 차례 봉하여 태원왕太原王이 되었다. 태조가 즉위하자 왕처직을 북평왕北平王에 봉하였다.
그 후에 나라 병사가 왕용王鎔을 공격하였는데, 왕용이 나라에 구원을 청하니, 왕처직王處直도 진나라로 사람을 보내 양나라와 국교를 끊고 진나라를 위해 스스로 힘을 다하기를 원하였다.
진왕晉王이 왕용을 구원할 때에 왕처직이 병사 오천 명으로 종군從軍하여 양나라 군대를 백향柏鄕에서 격파하였다. 그 후에 진나라가 북쪽으로 나라를 격파하고 남쪽으로 위박魏博을 취하고 양나라와 황하 가에서 전쟁을 하는 10여 년 동안 왕처직이 병사를 거느리고 종군從軍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왕처직王處直이 무당을 좋아하였는데 식객食客 중에 이응지李應之라는 자가 있었으니 요망妖妄한 사람이었다. 왕처직이 병이 있었는데 이응지가 좌도左道로 치료하여 나으니, 왕처직이 더욱 신묘하다고 여겨 도사의 복장을 입게 하고서 행군사마行軍司馬로 삼고 군정軍政은 크고 작은 일 가리지 않고 모두 그의 의견에 따라 결정하였다.
당초에 이응지가 형읍陘邑에서 어린아이 유운랑劉雲郎을 주워 양자養子로 삼았는데, 왕처직이 아들이 없는지라 이에 유운랑을 왕처직에게 주며 속여 말하기를 “이 아이는 태어나면서 남달랐습니다.”라고 하였다. 왕처직이 양자로 삼고서 왕도王都라 이름을 개명하고 몹시 그를 아꼈다.
이응지가 이로부터 더욱 전횡專橫을 일삼아 이에 관할구역 내의 정장丁壯군적軍籍에 올려 따로 신군新軍을 만들어 자신이 통솔하였고, 박릉방博陵坊에 관저를 지었는데, 사면에 문을 내었으니 모두 좌도를 따른 것이다. 왕처직의 장리將吏는 그가 반드시 우환이 될 것임을 알았지만 간언할 수 없었다.
이때에 유주幽州이광주李匡儔중산中山에 길을 빌려 경사京師로 가려고 하였는데, 왕처직王處直이 성 밖에 갑사甲士를 매복하여 뜻하지 않은 변고에 대비하였다. 이광주가 이미 떠나자 갑사들이 성으로 들어와 이응지李應之의 집을 포위하여 잡아 죽이고, 인하여 왕처직에게 나아가 왕도王都를 죽일 것을 청하였으나 왕처직이 허락하지 않았다.
이튿날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할 때에 갑사들의 성명을 은밀히 열거해두되 대장隊長 이상은 별도의 장부에 기록해 두고 후일에 다른 일을 빌미로 삼아 주살하니, 20년 동안에 한 사람도 면한 사람이 없었는데, 왕처직은 끝내 왕도에게 피살되었다.
왕도王都는 사람됨이 교활하고 꾀가 많으므로 왕처직王處直절도부사節度副使로 삼았다. 장문례張文禮왕용王鎔을 시해하자 장종莊宗이 병사를 일으켜 장문례를 토벌하였다.
왕처직이 좌우의 신하들과 모의하기를 “진주鎭州정주定州병장屛障이다. 장문례가 비록 죄가 있으나 진주가 망하면 정주만 홀로 보존될 수 없다.”라고 하고 이에 사람을 보내 장종莊宗에게 병사를 일으키지 말 것을 청하였다.
장종이 입수했던, 장문례가 나라에 보낸 밀봉서찰을 가져다 왕처직에게 보여주며 말하기를 “장문례가 우리 군사를 배반하였으니 멈출 수 없다.”라고 하였다.
왕처직에게는 얼자인 왕욱王郁이 있었는데 왕고王郜나라로 달아날 때에 왕욱도 역시 달아났다. 그러자 진왕晉王이 자신의 딸을 그의 아내로 삼아 주고서 신주방어사新州防禦使로 삼았다.
왕처직이 장종이 반드시 장문례를 토벌하려는 것을 보고 더욱 스스로 의심하였다. 이에 몰래 왕욱과 내통하여 왕욱으로 하여금 북쪽에서 거란契丹을 국경 안으로 불러들여 나라 병사를 견제하게 하는 한편 또 왕욱을 불러 후사後嗣로 삼을 것을 허락하자 왕도가 이 소식을 듣고 좋아하지 않았다.
정주定州 사람들은 모두 ‘거란契丹을 불러들여서는 안 되니 스스로 우환을 끼치게 될까 염려된다.’라고 하였지만 왕처직은 듣지 않았다.
왕욱王郁나라로 도망한 뒤로 왕처직王處直용인容認해주지 않을까 늘 걱정하였는데, 이로 인해 크게 기뻐하며 그 틈을 타 정주定州를 취할 수 있다고 생각하고 이에 후한 뇌물로 거란契丹아보기阿保機를 유인하였다.
아보기가 국력을 전부 동원하여 침공하였으나, 정주定州 사람들은 모두 거란契丹이 출병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소리小吏 화소훈和昭訓왕도王都에게 거사를 일으킬 것을 권하거늘 왕도가 왕처직을 잡아 서택西宅에 가두고 스스로 유후留後가 되고는 왕씨王氏자손子孫들 및 왕처직의 장교將校들까지 모조리 살육하였다.
이듬해 정월 초하루 아침에 왕도가 서택西宅에서 왕처직을 배견拜見하자 왕처직이 분연히 일어나 가슴을 치며 호통 치기를 “역적 놈아! 내가 너를 저버린 것이 무엇이더냐.”라고 하였다.
그러나 좌우에 병기가 없자 마침내 왕도의 코를 물어뜯으려 하자 왕도가 잡힌 소매를 뿌리치고 달아났다. 왕처직은 마침내 피살되었다.
당초에 누런 뱀이 비루碑樓에 나타나자 왕처직王處直이라고 여기고 이를 모셔두고 제사를 지냈고, 또 들에 까치 수백 마리가 보리밭 가운데 둥지를 지으니 왕처직은 자신의 덕망이 불러온 것이라 생각하였다.
그런데 정주定州 사람들은 모두 그것이 상서롭지 않음을 알고는 “뱀은 산택山澤에 굴을 파고 사는데 사람이 사는 집에 거처하고, 까치는 둥지를 짓고 사는 새인데 내려와 밭에 사니, 소인小人이 자리를 훔쳐 위에 있는 사람이 자리를 잃을 조짐이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왕처직이 과연 유폐되었다가 살해되었다.
장종莊宗사하沙河에서 거란契丹을 이미 패퇴시키고 추격하여 정주定州를 지날 때에 왕도王都와 서로 매우 사이가 좋아 자신의 아들 이계급李繼岌을 왕도의 딸에게 장가보내고 왕도를 의무군절도사義武軍節度使로 삼았다.
동광同光 2년(924)에 장종이 에 거둥하였는데 왕도가 와서 조회하니 거만鉅萬의 재물을 하사하였다. 장종이 이계급의 〈장인이라는〉 이유로 왕도를 몹시 후하게 대우하여 청하는 바를 들어주지 않음이 없었다.
명종明宗이 즉위하자 왕도의 사람됨을 몹시 싫어하여 안중회安重誨가 매번 법으로 제재하니, 왕도가 비로소 다른 뜻을 품게 되었다.
이때에 후당後唐의 병사가 거란契丹을 공격하느라 자주 정주定州를 왕래하였는데, 왕도가 공급할 군수품이 많이 부족하자 더욱 스스로 불안해하였다.
화소훈和昭訓왕도王都를 위하여 모의하기를 “천자天子가 새로 등극함에 사방이 아직 귀부歸附하지 않아 그 형세가 쉽게 이산離散될 것이니, 자신을 보전하는 계책으로 삼을 만합니다.”라고 하였다.
이윽고 주수은朱守殷변주汴州에서 반란을 일으키자 왕도도 마침내 반란을 일으키고 사람을 보내 비밀서신으로 , , , , 다섯 을 불러 모두 거병하기로 약속하였으나, 다섯 이 모두 응하지 않았다.
명종明宗왕안구王晏球를 보내 토벌하자 왕도가 다시 왕욱王郁과 함께 거란契丹을 불러 원병으로 삼으려 하였는데 거란이 독뇌禿餒를 보내 1만 명의 기병을 거느리고 왕도를 구원하게 하였다.
왕도가 지휘사指揮使 정계린鄭季麟용천진장龍泉鎭將 두홍수杜弘壽를 보내 2천 명의 병사로 거란을 맞이하러 가다가 왕안구에게 패하여 정계린과 두홍수가 사로잡혔다.
왕안구가 꾸짖기를 “우리가 사람을 보내 너희를 불렀거늘 무슨 이유로 항복하지 않았느냐.”라고 하니, 두홍수가 대답하기를 “2대 동안 중산中山에서 벼슬하여 은혜를 입었으니 감히 두 마음을 가질 수 없다.”라고 하였다. 마침내 피살되었는데, 두홍수는 형을 받을 때에 신색神色이 태연자약하였다.
왕안구가 망도望都(하북성河北省 당현唐縣 북동쪽)에 군대를 주둔하고 왕도와 거란과 전투하여 곡양曲陽에서 크게 패배시키니, 왕도와 독뇌가 몇 명의 기병만 거느리고 달아나 성문을 닫고 다시 나오지 않았다.
당초에 장종莊宗군중軍中에서 한 남자 아이를 얻어 이를 아껴 이씨李氏 성을 쓰게 해주고 계도繼陶라 이름 짓고는 궁중宮中에서 길러 아들로 삼았다.
명종明宗이 즉위함에 안중회安重誨가 궁에서 데려나와 단회段徊에게 부탁하였는데 단회 또한 미워하여 쫓아내니, 왕도王都가 사람을 시켜 찾아내었다.
이때에 이르러 무리들을 속이기를 “이분이 장종莊宗태자太子이다.”라고 하고 천자의 복장을 입혀 성 위를 순시하게 하여 왕안구王晏球의 군사들에게 보이니, 군사 중에 아는 자가 “저자는 이계도李繼陶이다.”라고 하고 함께 욕하였다.
왕도王都가 성안에 있을 때에 병사가 적어 오직 거란契丹의 이천 명의 군사로 성을 지켰으므로 독뇌禿餒뇌왕餒王이라 부르고 자신을 굽혀 그를 섬겼다. 장수들 중에 성을 나가 항복하려는 자가 있었는데, 왕도가 엄밀히 사찰伺察해 〈죽여〉 살육이 없는 날이 없었다. 이 때문에 성을 굳게 지켜 한 해를 넘길 수 있었다.
천성天成 4년(929) 2월에 성이 함락되자 왕도와 가솔들은 모두 스스로 집에 불을 질러 자결하여 왕씨王氏중산中山에서 마침내 대가 끊어졌다.
그러나 왕처존王處存은 아들 왕업王鄴이 있었는데 왕업의 아들 왕정윤王廷胤장종莊宗외인外姻 관계에 있었다. 사람됨이 용맹하였다. 군교軍校가 된 뒤로 사졸士卒들과 동고동락同苦同樂하였는데, 명종明宗 때에 패주貝州, 흔주忻州, 밀주密州, 전주澶州, 습주隰州 다섯 자사刺史를 역임하였다.
범연광范延光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에 고조高祖왕정윤王廷胤양광원楊光遠행영중군사行營中軍使로 삼았는데, 범연광范延光을 격파한 공으로 창덕군절도사彰德軍節度使에 배수되었다.
당초에 왕처직王處直왕도王都에 의해 수감되니, 어린 아들인 왕위王威는 북쪽 거란契丹으로 달아났다.
거란이 고조高祖에게 말하기를 “우리는 왕위에게 그 선부先父의 작위와 토지를 이어받게 하려고 하는데 어떤가?”라고 하니, 고조가 대답하기를 “중국中國의 법은 장교將校로부터 자사刺史가 되고 단련방어團練防禦에 오르고 절도사節度使에 이르니, 청컨대 왕위를 중국으로 돌려보내면 점차 승진시켜 주겠습니다.”라고 하였다.
後晉 高祖後晉 高祖
거란이 노하여 “너는 제후로부터 천자가 되었으니, 어디에 점차적으로 올라가는 법이 있는가.”라고 하였다. 고조가 이 말을 듣고 대번에 왕정윤王廷胤을 옮겨 의무義武진수鎭守하게 하고 “이 사람 또한 왕씨王氏의 후손입니다.”라고 하였다. 후에 진해鎭海로 자리를 옮겼다가 하였다.


역주
역주1 王處直傳 : 王處直(?~929)은 자는 允明이고 京兆 萬年 사람이다. 왕처직의 열전은 ≪舊五代史≫ 卷54 〈唐書 第30 列傳 第6〉, ≪新五代史≫ 卷39 〈雜傳 第27〉에 각각 실려 있다.
이 열전에서는 왕처직이 唐나라, 梁나라를 차례로 배반하고 晉나라와 동맹을 맺는 과정과, 왕처직이 무당의 말을 신봉한 나머지 무당 李應之가 추천한 王都를 양자로 삼았다가 결국 왕도에게 살해당하는 과정, 왕도가 왕처직을 죽인 뒤 契丹을 끌어들여 晉나라를 배반하였다가 끝내 성이 함락되어 자결하는 과정 등을 생동감 있게 묘사하였다. 즉 왕처직의 일대기를 서술하기보다는 왕처직의 흥망과 그의 養子 王都의 흥망에 관계된 중요한 사건을 중심으로 서술하여, 무당의 말을 신봉하다 一身을 망친 왕처직과 아버지를 살해하고 契丹을 끌어들여 晉나라를 배신하려다 죽음을 맞이한 왕도를 통해 경계를 드리웠고 史評도 두지 않았다.
이에 반해 ≪구오대사≫에서는 王處直傳의 원본에는 왕도의 사적만이 기록되어 있고 왕처직의 사적이 闕佚되어 있다고 말하고 ≪唐書≫ 〈列傳〉에 근거하여 그의 사적을 간략하게 서술하고, 왕도의 사적을 중심으로 서술하였다. 두 사람에 대한 史評에서는 “부귀가 오랫동안 지속됨에 仁義를 수양하지 않아 눈으로는 여색에 현혹되고 귀로는 음악에 미혹되어 간악한 일이 일어나기 전에 이를 막지 못하였고 화가 일어나기 전에 이를 살피지 못하여 서로 이어 패망하였으니 또 누구의 잘못인가.”라고 하여 후세에 경계를 드리웠다.
역주2 (扈)[尾] : 저본에는 ‘扈’로 되어 있으나, 사고전서본에 의거하여 ‘尾’로 바로잡았다.
역주3 : 자신의 官等에 비해 낮은 직책의 임무를 겸하여 맡는 것을 領이라 한다. 이와 반대를 錄이라 한다.
역주4 (忤)[忻] : 저본에는 ‘忤’로 되어 있으나, ≪新五代史≫에 의거하여 ‘忻’으로 바로잡았다.
역주5 後徙鎭海而卒 : ≪五代史纂誤補≫ 卷下에 “삼가 살펴보건대 鎭海軍은 杭州에 있는데, ≪舊五代史≫ 〈王庭允傳〉을 살펴보면 ‘滄州節度使’로 바뀌어 있으니, 여기 ‘鎭海’는 응당 ‘橫海’를 잘못 기록한 것이다.[謹按 鎭海軍在杭州 考薛史王庭允傳 作改滄州節度使 此鎭海 當是橫海之誤]”라고 하였다.

당송팔대가문초 구양수(6) 책은 2022.01.20에 최종 수정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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